저렴한 웹캠 앱코화상카메라 추천, APC930 프로그램 설치와 다운로드방법과 사용법

 

많은 사람들이 동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동영상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자신의 여행지에서 특별한 추억을 기념하기 위해서, 동영상을 만들어 간직하는 분들이 많아졌구요.

 

그리고 유튜브나 네이버TV, 아프리카TV에서 특정한 주제로 방송활동을 해서 수익을 올리는 분들도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지요. 이렇게 동영상을 만들때 필요한 것이 하나있지요.

 

또한 코로나19로 회사나 학교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화상회의를 하거나, 온라인 화상수업을 듣는 일들이 많이 증가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직접 방송을 하거나, 화상회의를 하거나, 온라인 수업을 듣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웹캠(화상카메라)’입니다.

 

그런데, 웹캠은 그 가격대가 만만치 않은데, 성능이 좋다고 알려진 로지텍웹캠의 경우, 그 가격대가 12만원 대로서 개인방송이나 화상회의 용도로 구매하기에는 부담이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능이나 화질도 괜찮으면서도 가격도 저렴한 소위 가성비가 좋은 웹캠(화상카메라)이 있어서, 여기서 괜찮은 웹캠 하나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직접 구매했고, 현재 제가 사용중인 웹캠인데, 바로 ‘앱코 APC930’이라는 웹캠입니다.

 

저는 이 웹캠을 용산 전자상가에 직접 가서 구매했고, 가격대는 65,000원대로서 웹캠 중에서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웹캠입니다.

앱코는 분명 로지텍이나 로그 아이보다는 몇만원 정도 더 싼 게 사실이고 성능면에서도 큰 차이가 없기때문에, 저렴한 웹캠을 구입하길 원하신다면 ‘앱코 APC930’을 구입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되네요.

 

그래서 오늘은 가성비 좋은 웹캠(화상카메라)인 앱코 APC930의 사향과 사용법에 대해서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 앱코 APC930의 특징, 설치방법과 사용법

 

 

먼저 앱코 APC930의 기본사양과 특징, 기능에 대해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앱코 APC930은 기본적으로 500만 화소이며, 앱코 웹캠의 케이블선의 길이는 2m이고, 앱코의 1초당 프레임은 30으로 보통 수준입니다.

앱코 APC930는 윈도우 7,8,10, 비스타에 설치할 수 있고, 맥에도 설치가 가능하답니다.

 

앱코 APC930에는 2개의 마이크가 탑재되어 있어서, 방송을 할 때에 별도로 마이크를 설치할 필요가 없답니다.

 

- 앱코 APC930의 특징 -

 

앱코 APC930은 30프레임과 QHD 1944P 고화질로 선명한 화질을 지원하고 있지요.

 

자동 초점 조절기능 - 피사체와의 거리를 자동으로 조종해서 초점을 자동으로 맞춰줍니다. 따라서 별도로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지요.

스테레오 마이크로폰 - 고감도 스테레오 마이크가 달려있어서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나 음향 전달이 가능합니다. 별도로 마이크를 설치할 필요가 없지요.

자동 밝기 조절 - 앱코는 주변의 밝기를 감지해서 자동으로 웹캠의 밝기정도를 조정해줍니다.

 

또한 앱코 APC930에는 랜즈 커버가 달려있어서, 외부로부터의 해킹이나, 의도하지않은 방송 무단송출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앱코 APC930은 웹캠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할 필수적 기능들은 거의 다 갖추고 있답니다.

 

 

가성비 좋은 웹캠 ‘앱코 APC930’의 구성품은 매우 간단한데, 앱코 APC930을 처음 구매해서 언박싱하면, 앱코 본체와 사용설명서의 두가지로 되어있어요.

 

그리고 ‘앱코 APC930’의 설치방법도 아주 간단합니다. 앱코 본체에 USB케이블이 달려있는데, 이 USB코드를 컴퓨터본체에 꽂으면 설치가 저절로 됩니다.

 

이렇게 ‘앱코 APC930’는 USB로 간단하게 설치할 수 있는데요. 그렇지만 여기서 설치가 다 끝난 건 아니고, 앱코 웹캠은 제대로 사용하려면, 별도로 ‘비디오캡’이라는 프로그램을 설치해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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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앱코 APC930의 소프트웨어 ‘VideoCap' 설치하는 법과 사용법

 

‘앱코 APC930’의 USB코드를 컴퓨터에 꽂으면, 기본적으로 방송화면이 나오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보다 선명한 영상화면을 얻기위해서나, 색상이나 채도, 밝기 조절 등 화면조정을 하기위해서는 별도로 ‘비디오캡’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줘야 합니다.

 

앱코 APC930의 전용 소프트웨어 ‘비디오캡’은 아래의 앱코 사이트에 방문하면, 무료로 손쉽게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www.abko.co.kr

 

위 주소의 앱코 사이트의 ‘고객지원’으로 들어가서, 그 하위메뉴에서 ‘자료실 다운로드’를 클립합니다.

 

그리고 자료실 다운로드의 검색어란에 ‘APC930’을 넣고, 조회를 합니다.

 

그리고 검색결과 나타나는 ‘APC930’ 웹캠을 클릭한 후, 맨하단 우측에 있는 ‘다운로드’를 클릭하면, 내컴퓨터로 앱코 APC930의 소프트웨어 ‘비디오캡’이 다운로드됩니다.

 

소프트웨어 ‘비디오캡’은 앱코에서 판매하는 모든 종류의 웹캠 제품에 사용가능한 공용 소프트웨어이지요.

 

이렇게 내 컴퓨터에 설치된 후, 설치된 프로그램 ‘VideoCap’을 클릭하면,

 

곧바로 앱코 웹캠의 비디오 촬영화면이 실행됩니다.

 

그런데, 앱코 동영상화면을 실행하려면, 절차가 있는데요.

 

먼저 ‘앱코 APC930’의 렌즈 커버를 열어야 하고, 랜즈 커버를 연 상태에서 프로그램 ‘VideoCap’을 클릭하면, 앱코 비디오촬영 화면이 컴퓨터에 나타납니다.

이때 앱코 본체의 오른쪽부분에 영상실행을 나타내는 ‘파란불’이 들어오게 됩니다.

 

'비디오캡'의 상단메뉴에서 ‘캡처’를 클릭하고 ‘캡처 시작’을 클릭한 후, 동영상 저장루트를 지정해주면 동영상 촬영이 시작된답니다.

그리고 영상촬영이 종료되면, 상단메뉴의 ‘캡처 정지’를 클릭하면, 동영상 촬영이 종료됩니다.

 

이렇게 촬영한 영상은 금방 지정해준 저장장소에 저장이 된답니다.

 

또한 영상화면의 화질을 조정하려면, ‘비디오캡’의 상단메뉴에 있는 ‘옵션’을 클릭하고 ‘비디오캡쳐 필터’를 클릭한 후, 나타나는 비디오 속성창에서 밝기나 대비, 색상, 채도, 선명도 등 다양한 화면 조정 도구들을 조절해서, 영상화면의 화질을 보기좋게 조정할 수가 있답니다.

 

 

좀 더 좋은 영상화질을 얻고 싶다면, 소프트웨어 ‘비디오캡’의 속성메뉴에 있는 

밝기, 색상, 선명도, 채도 등의 화질조절 도구들을 십분 활용해서 영상을 편집하는 것이 더 좋은 영상화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디오캡'으로 저장한 촬영영상을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나 네이버TV에 올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자신이 촬영한 동영상을 좀 더 멋진 영상으로 편집하시길 원하신다면, 동영상편집프로그램의 편집기능을 이용해서 더 멋진 영상으로 만들 수도 있답니다.

 

동영상편집 프로그램으로는 ‘모바비 비디오에디터’나 ‘곰믹스’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좋습니다.

 

참고로, ‘곰믹스’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고, ‘모바비 비디오 에디터’는 유료로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제가 현재 실제로 웹캠 ‘앱코 APC930’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앱코 APC930’를 객관적으로 솔직히 평가한다면, 화질이나 성능면에서는 ‘중급’ 정도는 된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접근성이나 가성비를 따진다면, ‘앱코 APC930’가 매우 좋은 웹캠이라고 평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앱코 APC930’가 최고급의 화질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고, 그냥 평범하면서 무난한 영상화면을 원하실 경우에는 ‘앱코 APC930’를 추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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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

가락국 김수로왕과 왕비 아유타국 허황옥(허황후)의 결혼과 정체, 인도 루트, 타밀어와 한국어의 공통점

 

오늘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즉, 왕비라고 알려진 허황후(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허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허황후가 어떻게해서 가야로 왔고, 가야의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었는지, 그리고 허황후(허황옥)가 어느나라 태생인지 등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고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요.

 

고대국가 시절 변한지방에 가야라는 나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부인으로 알려진 허황후의 정체와 그녀가 왜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는지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어요!

 

✦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

 

허황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김수로왕을 이야기해야 하겠지요.

김수로왕은 김해지역에서 금관가야를 건국한 가야국의 시조이지요. AD 1세기경에 건국된 금관가야는 그냥 ‘가야’ 또는 ‘가락국’이라고도 하며, 이 가락국은 김수로왕이 처음으로 건국한 나라랍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인데, 김해지역에 9간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었는데, AD 42년에 북쪽의 하늘에서 이상한 노래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서 밧줄에 묶인 금상자 하나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금상자안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나왔는데, 그 황금알이 갑자기 여섯명의 아린아이로 변했고, 그 어린아이 중에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쎈 아이가 바로 김수로였고, 김해지역의 수장인 9간이 김수로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김수로는 가락국(가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수로왕이 가락국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황금알에서 나온 김수로가 키가 무려 9척(2m)나 될 정도로 엄청나게 체격이 크고 힘이 장사였을 정도로 기골이 장대했기 때문에, 9간들이 그를 하늘에서 내려보낸 최고의 지도자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9간은 고대시대의 김해지역에서 각 지방을 다스리는 그 지역의 군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매우 비범한 모습으로 주변사람들에게 위엄을 떨치며 숭배의 대상이 된 김수로는 어렵지않게 가락국의 시조가 되었으며, 김해를 비롯한 6개 지역을 통합해서 6가야 연맹을 다스리는 최고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수로왕은 천신 이비가지와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고유의 천신사상이 나오는데, 우리 고대국가의 대부분의 시조들은 모두 천신의 아들 또는 손자라고 나오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고대국가 시조들의 공통점이며, 이것이 우리나라 고유의 ‘천신사상’입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의 아들일 정도로 귀하신 몸이니, 그가 땅을 다스리는 통치자, 즉 왕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하자면, 옛 변한지역을 다스리던 9명의 군장(9간)들에게 어느날 하늘로부터 한 계시가 전해졌습니다.

 

하늘로부터 9간들에게 "너희들에게 위대한 왕을 내려보내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9간들은 이 노래를 불러서 왕의 하강을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9간들이 이 노래를 부르자, 실재로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왔고, 그 황금알 중에서 제일 먼저 알을 깨고 나온 김수로가 9간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  김해지역에서가락국(금관가야)을 건국하게 됩니다.

 

이 때 9간들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구지가’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김유신장군도 김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금관가야의 10대왕 구형왕이 신라의 법흥왕에게 항복하면서 금관가야는 멸망했고, 금관가야의 왕족과 후손들은 모두 신라에 귀부하여 신라의 관리로 살아갔는데요.

 

신라에 항복한 구형왕의 3대손이 바로 김유신이며, 신라에 귀부하여 신라의 관리로 살아가던 김유신이 장군이 되어서 큰공을 세우고, 삼국통일의 큰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계보로 따지면,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 후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수로왕은 왕이된 후, 신라와 중국의 관제를 모방해서 가야의 관직을 설치하는 등 문무제도를 정비해나갔고, 소국이었던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의 영토분쟁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등 나름대로 업적을 쌓아나갔답니다.

 

여기서 궁금한 건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즉 왕비에 관한 사항입니다.

김수로왕의 부인은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 즉 허황후라고 합니다.

 

◆ 김수로왕의 부인이자 왕비인 허황후(허황옥)의 정체

 

허황옥(허황후)는 아유타국에서 가야국으로 와서 김수로왕의 부인 즉, 왕비가 되었고, AD 32년부터 AD 189년도까지 무려 158년간 살았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신화적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었다는 허황옥(허황후)는 어느나라 사람이고,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삼국유사에는 허황옥(허황후)의 고향은 인도 아유타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 기록을 근거로 사람들은 허황옥(허황후)이 인도에서 온 여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김해시에 수로왕비릉(허황후 묘)이 현존한다고 합니다. 이 삼국유사의 기록과 허황후의 묘를 근거로 해서 허황후가 실존인물이며, 그녀가 인도 아유타에서 온 여인이라고 합니다.

 

허황옥(허황후)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건무 24년에 9간이 왕을 접견할 때에 왕에게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까지 배필을 얻지 못했으니, 저의 신하들 딸 중에서 가장 예쁜 여인을 골라 대왕의 배필로 삼겠습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김수로왕은 ‘짐이 이곳으로 와서 왕이 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짝을 지어 왕후로 삼는 것도 하늘의 뜻이니, 경들은 너무 심려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유천간에게 명하여 준마를 대동하고 경주를 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색의 돛단배가 붉은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항행해왔습니다.

유천간 등 신하들은 이 소식을 곧바로 김수로왕에게 아뢰었고,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구간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가서 그들을 친절하게 맞이하게 했습니다.

 

구간들은 배에서 나온 한 아리따운 공주를 맞이하고, 그곳에 왕림한 김수로왕 앞으로 데려갔고, 공주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 부왕과 황후가 저에게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서 우리 두사람이 함께 천황을 보았는데, 천황은 가락국의 왕 수로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이 된 자로서, 그는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자이다. 나라를 건국하였지만 아직 배필을 만나지 못했으니, 공주를 그에게 보내어 그의 배필로 삼게하라”고 말한 후,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왕은 저에게 곧바로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고 명했고, 저는 멀리서 배를 타고와 이제야 왕의 용안을 가까이서 뵙게 되었습니다’ 라고 허황옥은 말했습니다

 

허황옥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한 김수로왕은 ‘나는 자못 성스러워서 멀리서 공주가 올 것을 미리 알고있었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나에게 찾아왔으니, 짐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허황옥과 곧바로 혼인식을 올리고, 그녀와 사흘밤낮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김수로왕은 허황옥이 타고온 배에 함께 타고있던 15명의 뱃사공에게 450필의 비단과 쌀 150섬을 주어, 본국으로 귀국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김수로왕은 아유타국에서 찾아온 허황옥을 자신의 부인인 황후로 삼고, 그녀를 궁궐로 데려가서 중궁에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가야국에 올 때, 특이한 탑 하나를 갖고왔다고 합니다.

 

허황옥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항행해갔을 때, 거쎈 파도와 풍랑에 막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부왕이 그녀에게 파사석탑을 싣고가라고 명했고, 그녀가 이 탑을 싣고가자, 풍랑이 멈추고 바다를 쉽게 건널 수 있어서 가야국의 땅에 정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파사석탑이 실제로 허황옥이 인도에서 갖고온 것인가에 대한 그 진위여부를 놓고 학계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만일 진짜로 허황옥이 파사석탑을 인도에서 갖고왔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허황옥(허황후)은 인도에서 온 공주가 맞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습니다.

 

파사석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며,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한 형태의 탑입니다. 또한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라고 합니다.

 

허황옥은 파사석탑만 갖고온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종류의 다채로운 비단, 금과 은, 구슬과 옥, 유리구슬 장신구등 이루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부장품과 선물들을 갖고왔답니다.

 

 

◆ 허황옥(허황후)이 갖고온 파사석탑의 정체

 

금관성 호계사에 있는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가야에 속했을 때,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온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지금도 이 파사석탑은 원형 그대로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남아있는데요.

 

이 파사석탑의 정체를 살피는 것이 허황옥(허황후)이 실존한 인물인지, 그리고 그녀가 실제로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봅니다.

 

파사석탑은 5층으로 되어있고, 그 조각이 매우 기묘하며, 돌은 붉은 얼룩무늬가 나있고, 연한 재질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의 연구로 이 파사석탑의 돌이 한반도에는 존재하지않는 돌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파사석탑의 돌은 한반도에 나지않는 외국에서 들여온 돌이라는 겁니다.

 

고려대연구진이 파사석탑의 성분을 정밀 분석한 결과, 파사석탑의 재료인 붉은색의 탑돌이 한반도에는 없는 성분인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배달문화연구원장 허명철박사가 연구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파사석탑은 재료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인도의 아유타지방에서만 나오는 파사석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파사석탑의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발견되지않고, 인도의 동굴사원인 아잔타 엘로아나식에서 볼 수 있는 불탑의 형태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즉, 허황후가 갖고왔다는 파사석탑은 그 재질이나 형태가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인도의 재질인 것으로 밝혀졌답니다.

 

또한 중국기록에서도 파사석은 천축(인도)이 그 원산지라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파사석탑의 파사석 즉, 파사돌은 고대 인도 타밀어로도 똑같이 파사돌이라고 불렀습니다.

파사돌은 ‘부모’를 뜻하는 ‘파사’와 돌을 뜻하는 ‘돌’이 합쳐진 합성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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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 타밀어인 ‘돌’이 우리나라의 ‘돌’과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우리나라의 ‘돌’이라는 단어는 1세기경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후의 파사돌에서 유래한 말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고대 인도의 타밀지방에서는 자녀가 멀리 떠날 때, 부모가 자녀들의 평안과 신의 가호를 빌기위해서 몸에 부적과도 같은 파사돌(파사석)을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인도의 아요디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도지역에서는 마치 부적처럼 양미간 사이에 파사돌가루를 바르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바다의 노여움과 거친 풍랑을 막기위해서 부모가 허황옥(허황후)에게 주었다는 파사석탑의 내용과

인도 타밀지방에서 자녀의 안전을 지켜줄 목적으로 부모가 여행을 떠나는 자녀에게 파사석을 부적으로 준다는 풍습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은 내용을 근거로 하면, 허황옥(허황후)이 파사석탑을 부모로부터 받아 가야국으로 갖고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결론, 파사석은 한국에서는 전혀 나지않는 돌이고, 파사석의 재료가 인도의 아유타지방에서 난다는 점과 파사석탑이 형태가 인도의 불탑형태와 동일하다는 점,

또한 파사석이 인도에서 자녀의 안전과 평안을 기원하는 부적처럼 쓰인다는 점은 허황옥(허황후)이 인도에서 왔음을 증명해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인도북부에 있는 아요디아는 고대시기에 아유타국이 존재했던 지역입니다.

 

이 곳 아요디아지방에서는 상인들이 돌을 갈아서 만든 돌가루를 주민들에게 판매하고, 사람의 이마에 바르는 관습이 존재하는데, 주로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 이 돌가루를 이마에 바른다고 합니다.

이 돌가루를 이마에 바르면, 1년 한해동안 안녕과 평안을 이룰 수 있고,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돌가루가 바로 ‘파사석’입니다.

 

지금도 인도 아요디아에서 주민들이 파사석 돌가루를 이마에 발라서, 안녕을 기원하는 풍습이 남아있는데요.

이 아요디아지방이 바로 허황후의 고향인 아유타와 지명이 같은 지역입니다.

 

이 아유타지방(아요디아)에서는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허황옥이 항해의 안전을 기할 목적으로 파사석으로 만든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온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파사석 돌가루를 몸에 바르는 풍습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또한 고고학자의 연구분석에 의해서, 금관가야(가락국)가 위치했던 김해의 양동리고분에서 출토된 코발트블루 유리와 다크블루 유리의 화학적 구성물이 고대 인도 유리의 것과 일치함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랭턴 박사는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목걸이가 인도산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옛 가야지역의 고분에서 발굴된 유리구슬 목걸이류의 유물들이 인도산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것은 가야지방에서 발굴된 유리구슬 목걸이들이 AD 1세기경 허황옥(허황후)이 가야국의 김수로왕에게 시집올 때, 예물로서 갖고온 장신구들이 아닐까 합니다.

 

인도 동남쪽에 있는 항구 아리카메두에서도 코발트블루 유리가 많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김해지역과 인도 해안지역에서 똑같이 코발트블루 유리 장신구가 발굴되었다는 것은 고대 시기에 가야국과 인도가 서로 활발한 인적교류활동과 교역활동을 벌였다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김해 양동리고분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목걸이 유물을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그 시기를 측정한 결과, AD 1세기의 유물인 것으로 확인되었답니다.

 

AD 1세기면, 허황옥이 가야국을 방문한 연대인 AD 48년과 일치하는 연대입니다.

 

이처럼 삼국유사의 기록과 파사석탑의 유래,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여러 유물들과 흔적들을 근거로 살펴보면,

고대시기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허황후)이 가야국의 김수로왕에게 시집을 왔다는 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인도에서 한국까지의 거리가 직선상으로 약 5,000km나 되는 매우 먼거리인데요. 이처럼 고대시기에 인도의 공주가 5,000km 이상의 거리를 항행해와서, 가야국의 국왕에게 시집을 왔다는 것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도 허황후의 고향으로 알려진 타밀나두 주, 이곳에는 타밀어를 쓰는 칸야쿠마리지역이 있는데, 이곳의 예전지명은 아유타였다.

 

이것은 AD 1세기경에 인도의 아유타국과 우리 가야국이 인적교류와 물적교류를 포함해서 양국간 활발한 교역활동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원래 가야국은 항해술이 무척 발달해서 고대시기에 요서지방과 산둥반도, 일본등과 활발한 무역활동을 했던 해양무역국가로 유명한 나라이지요.

 

이처럼 고대시기에 주변의 여러나라들과 활발한 교역활동을 해왔던 해상무역국가 가야국이 동북아를 넘어 동남아지역인 인도에까지 진출해서,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교역활동 했다는 것이 허황후신화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가야가 인도의 한지역의 왕족인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은 가야국이 인도의 아유타국과 정치적 연맹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 1세기경 가야지방 고분에서 출토된 왕족유골의 주인공은 인도계

 

서울대 의대 서정선교수 연구팀은 AD 1세기경 가야시대의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 예안리고분 유골의 유전자DNA를 분석해보았더니, 인도의 남방인의 DNA와 매우 가까웠으며, 이들이 인도 남방지역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합니다.

 

1세기경, 가야지방 고분에서 발굴된 왕족유골의 유전자가 인도 남방인의 유전자와 흡사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즉, 가야국의 왕족에 인도 남방인의 혈통이 포함되었다는 겁니다.

 

한 언어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인도 남부지역에서 사용하는 드라비다어(타밀어)와 우리말은 무려 1,000개가 어휘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도의 드라비다족이 고대시기에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어 인도 타밀어 한국어 인도 타밀어
엄마 엄마
아빠 아빠
아버지 아버치 아주머니 에자마니
나는 가다 가다
이것봐 잉게봐 사람 사남
이리와 잉게와
강가 갈비 갈비
쏘루 비단 비단

 

한국어 인도 타밀어
길쌈 길쌈
윷놀이 윳노리
팽이놀이 팡이노리
궁둥이 궁디

 

이외에도 한국어와 타밀어가 똑같은 말로는 아기를 달랠 때 쓰는 말로서 ‘도리도리’ ‘짝짜꿍’ ‘곤지곤지’ ‘죔죔’ ‘어부바’ ‘까꿍’ 입니다.

 

이처럼, 인도 남부의 타밀지역에서 쓰는 타밀어와 우리 한국어간에 유사한 말이 너무도 많은데, 무려 1,000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국어와 인도 타밀어가 유사한 것은, 고대시기에 한반도에 정착한 선주민의 일부가 인도 등 남방으로부터 이주해왔음을 증명해주는 유력한 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인도에서 이주해온 무리 중 하나가 허황옥(허황후)로 대표되는 아유타집단일 것이며,

허씨세력은 한반도남부의 유력한 정치세력인 가야국과 결혼동맹을 맺어서, 자신들의 정치적 귄위와 입지를 다졌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즉,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온 데로, 아유타국의 허황옥(허황후)과 김수로왕이 혼인을 맺음으로써,

인도 남방계의 정치세력과 한반도남부의 정치세력이 정치적 동맹관계를 결성하고, 가야지역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다고 보여집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후는 김수로왕과의 사이에 10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하며, 그 중 한명의 왕자가 김수로왕의 대를 이었다고 합니다.

 

허황후가 낳은 10명의 아들 중 장자 거등은 태자가 되어 김수로왕의 왕통을 이어받아 거등왕이 되었고, 두명의 왕자는 허황후의 요청으로 허씨 성을 물려받아서 김해 허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나머지 7명의 왕자는 모두 불교에 귀의하여 사원에 들어가 불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에는 허황후의 능이라고 전해지는 고분이 존재합니다.

 

결론적으로, 삼국유사에 김수로왕과 혼인한 여인으로 나오는 허황후는 여러가지 정황근거 상 인도 남부지역의 타밀나두에서 온 이주민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국유사에 허황후가 아유타에서 왔다고 소개하였는데, 인도 남부지역에 있는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가 옛날에는 ‘아유타’라고 불리웠다고 하는데, 허황옥(허황후)은 타밀지역에서 왔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1,000개가 넘는 한국말이 고대 타밀어와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허황후는 타밀어를 쓰는 지역에서 온 것이 거의 확실해보입니다.

 

허황후가 인도남부 타밀지역의 옛 ‘아유타’라고 불리우는 칸야쿠마리지역에서 가야국으로 이주해와서, 가야국의 왕족과 혼인을 맺어서 가야국의 왕비가 되고, 그녀와 측근들은 가야의 유력한 정치세력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허황후가 우리나라에 와서 정착하면서, 자신의 모국어인 타밀어를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시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현재 1,000개가 넘는 한국말이 타밀어와 일치한다는 점은 허황후의 인도 타밀지역 도래설의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인도에서 건너와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허황옥(허황후)에 대한 이야기와 허황후가 김수로왕과 혼인하게된 비사, 그녀의 정체, 그녀가 도래하게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소개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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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의 거인()의 목격담과 키, 유골 사진, 네피림의 후손

 

21세기 첨단과학의 시대를 살고있는 오늘날 거인족은 과연 존재할까? 놀라운 것은 아프카니스탄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2002년도에 아프칸의 산골짜기에서 거인이 발견되었다는 목격담이 나와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오늘날 거인은 과연 존재하고 있을까?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실제로 거인을 목격했다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서, 큰 관심을 끌고있다.

 

실제로 거인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프칸전쟁에 참여했던 미군병사들이었고, 이들은 자신들이 아프칸의 한 계곡의 동굴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체격의 거인과 맞닥뜨렸고, 그와 전투까지 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은 ‘서프라이즈’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는 21세기 최대의 미스테리사건인 칸다하르의 거인 목격담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2016년 미국에서 한 영화제작자가 현대에도 거인이 실존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쳐서 큰주목을 끌었다.

이같은 거인실존설을 주장한 사람은 미국의 작가이자 영화제작자 마르줄리와 종교학자 스티브 퀘일인데, 그들의 말에 따르면 키가 키가 3~4m나 되는 거인이 존재하며, 실제로 거인을 목격한 사람도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종교학자 스티브 퀘일은 어느날 아프칸 참전군인으로부터 실제로 거인을 보았다는 목격담을 전해들었다고 하며, 그 군인이 거인을 목격한 곳은 아프칸의 고원지대인 칸다하르의 동굴이었다고 한다.

 

그 군인이 보았던 칸다하르의 거인은 키가 3m가 훨씬 넘는 엄청 거대한 키와 덩치를 가진 실제 거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도 또다른 아프칸 참전군인이 나타나서 자신도 아프칸의 고원지대에서 엄청나게 키가 큰 거인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고 나섰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진술한 바에 따르면, 2002년도 아프칸전쟁이 한창 진행중일 때에, 아프칸의 고원지대인 칸다하르에서 거대한 덩치를 지닌 거인을 목격했다고 하며, 이들의 진술은 매우 구체적이고 일관성을 띠고 있었다.

 

아프칸전쟁에 실제로 참전했던 몇 명의 군인들이 전하는 칸다하르 거인의 목격담은 다음과 같다.

 

◆ 칸다하르의 거인 목격담

 

2001년도에 미국의 쌍둥이빌딩에 폭탄테러가 발생하면서, 수많은 미국인들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의 무역센터빌딩에 폭탄테러를 감행했던 세력은 바로 아프칸에 주둔하고 있던 알 카에다조직이었고, 미국은 알 카에다와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탈레반세력을 축출하기 위해서 아프카니스탄에 군대를 파견해, 대대적인 군사공격을 감행했다.

 

2002년도 현상금이 걸려있는 알 카에다 간부들을 소탕하기 위해 일단의 미군부대원들이 아프칸의 고원지대로 출병하였고, 해발 1000m의 칸다하르지역으로 수색해 들어갔다.

 

그런데, 먼저 수색에 나섰던 선발부대원 전원이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들을 구조하기 위한 후발 특공대가 조직되어 칸다하르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군인들이 칸다하르의 1000m 지점까지 수색해 올라갔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동굴이 하나 있었다.

미군은 그 동굴 속에 탈레반과 알 카에다 간부들이 숨어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 동굴로 포위해들어갔다.

 

그런데, 그 동굴 앞에는 죽은 미군병사들의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여러대의 무기와 군사장비들도 함께 널려있었다.

특히 일부 미군병사의 시신들은 마치 맹수가 잡아먹은 것처럼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미군부대원들은 이 시신들이 먼저 출동한 선발부대이며, 탈레반의 기습공격을 받아서 희생당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그 동굴속에는 미군을 공격한 탈레반대원들이 숨어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게, 미군부대원들이 탈레반의 은신처로 여긴 동굴근처에까지 접근해갔을 때, 갑자기 눈앞에서 매우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 동굴에서 엄청나게 키가 큰 거인이 나왔고, 미군병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동굴에서 나온 거인은 붉은수염과 붉은 머리카락을 갖고있었고, 손에는 커다란 창과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고대 로마의 전사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거인은 미군병사 키의 두배나 될 정도로 키가 매우 컸고, 덩치도 엄청나게 컸다고 한다.

 

너무 놀란 미군병사가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했는데, 그 총소리를 듣고 크게 분노한 그 거인은 들고있던 창을 던져서 병사의 몸을 관통시켰다고 한다.

 

그 거인은 창으로 관통시킨 병사의 몸을 들어올리기까지 했다. 그러자, 전부대원들이 일제히 거인에게 총을 발사했다. 그런데 전부대원들이 총을 발사했는데도 그 거인은 별로 타격을 받지않고 건재했다.

 

그러자, 부대원들은 다시 거인의 얼굴쪽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소대원들이 30초 동안 집중 총격을 가하자, 거인의 얼굴턱이 완전히 날아갔고, 큰 충격을 받은 거인은 곧 사망하고 말았다.

 

죽은 거인의 몸체가 워낙 커서, 부대원들이 직접 운반하지 못했고, CH46 헬기가 동원되어 그 거인의 시신을 나를 수 있었다.

 

이 때, 그 거인을 헬기로 운반했던 헬기조종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 거인의 키는 3m 65cm이고, 몸무게는 680kg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거인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각 6개이며, 몸에서 엄청난 악취가 풍겨나왔다고 한다.

 

그 거인의 시신은 헬기로 운반되어서, 미국 국방부의 모처로 이송되었고, 그 시신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렇게 키가 3m가 훨씬 넘는 엄청난 덩치를 지닌 거인이 칸다하르지역에서 목격되었는데, 그 거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 칸다하르의 동굴부근에서 목격한 거인은 한명도 아닌 여러명의 미군병사들에 의해서 목격되었기 때문에,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을 받고있다.

 

영화제작자인 마르줄리와 종교학자 스티브 퀘일은 칸다하르의 거인을 목격했다는 여러명의 목격자들을 확보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오늘날에도 거인족은 분명히 실존하고 있는 또다른 생명체라는 주장을 펼쳤다.

 

◆ 거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키가 무려 3m 65cm이고 몸무게가 680kg라고 한다면, 우리 인류라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괴생물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아프칸 칸다하르에서 미군병사들이 거인을 목격한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거인의 정체가 몹시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과연 칸다하르의 고원지대에서 발견된 거인의 정체는 무엇인지에 대해 세계인들의 관심이 쏠리고있다.

 

우리인간들 중에서도 키가 큰 기형적인 사람들이 가끔씩 태어나고 있는데, 그렇지만 인간이 아무리 키가 크다고 하더라도 결코 3m를 넘을 수는 없고, 몸무게가 300kg을 넘을 수는 없다.

 

그런데, 칸다하르에서 미군들이 목격한 거인은 키가 무려 3m 65cm이고 몸무게가 680kg이어서,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미군병사들이 여러발의 총을 발사했지만, 여러발의 총에 맞고도 죽지않고 건재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거인이 인간과는 다른 괴생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거인은 인간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제2의 생물체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어떤 존재인지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칸다하르의 거인의 시신을 인수한 미국 국방부는 거인의 시신을 인수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그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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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마르줄리와 스티브 퀘일은 거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아프카니스탄 칸다하르 지역으로 직접 날아갔고, 그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가지 조사활동을 벌였다.

마르줄리와 스티브 퀘일은 칸다하르지역의 주민들을 직접 탐문조사했는데, 이곳에서 매우 놀라운 사실을 전해들었다.

 

그 칸다하르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그 거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그 거인을 신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거인을 위해서 산사람을 재물로 바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프칸의 고원지대가 좀 낙후된 지역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거인을 숭배하기 위해 산사람을 산재물로 바쳤다는 것은 너무도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거인의 실존사실을 현지주민들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제작자 마르줄리와 종교학자 스티브 퀘일은 거인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거인의 기원에 대한 연구조사를 계속 벌여나갔고, 다음과 같은 가설을 내놓았다.

 

◆ 현재 목격되고 있는 거인은 네피림의 후예라는 설

 

성경에 거인에 관한 기록들이 존재하는데, 성경에 언급된 거인족은 바로 ‘네피림’이다.

 

성경의 창세기에 ‘네피림’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세상에는 ‘네피림’이라는 거인족이 있었는데, 네피림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존재로서, 힘이 센 장사들이며, 거인들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즉, 성경에 따르면, 천사와 인간여성이 관계를 맺어 낳은 자손이 바로 ‘네피림’이라는 것이다. 네피림족은 성정이 매우 호전적이며, 힘이 장사인데다 소문난 용사라고 한다.

 

다윗과 싸움을 벌인 용사 골리앗도 덩치가 엄청나게 큰 거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골리앗은 네피림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거인족 네피림은 인간이나 다른 동물들을 닥치는 데로 잡아먹으면서, 인간세계에서 엄청난 패악질을 했기때문에, 이에 분노한 하느님이 대홍수를 일으켜서, 내피림족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이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네피림의 모습이 아프칸 칸다하르지역에서 목격된 거인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에 근거하여, 마르줄리와 스티브 퀘일은 칸다하르에서 목격된 거인은 네피림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즉, 대홍수로 인해서 멸종된 줄로 알았던 네피림종족의 일부가 대홍수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인간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네피림은 사람들이 미치지않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서 그들만의 명맥을 지금까지 이어왔다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 실제로 세계의 곳곳에서는 거인족의 유골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 또한 거인족 네피림의 후예가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해왔다는 증거라고 한다.

 

키가 3~4m에 이르는 거인의 무덤과 유골들이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 유골들이 네피림의 후손의 무덤일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1950년 터키 유프라테스강 부근에서 거인의 대퇴골이 발견되었는데, 그 대퇴골의 크기는 무려 1.2m였고, 이 대퇴골을 기준으로 그 생물체의 키를 산정해본 결과, 키가 5m인 생물체로 판명되었다.

 

또한 1988년경 사진작가 그레고르 스포에리가 이집트여행 중에 만난 한 도굴꾼으로부터 거인의 손가락을 확보하고 이 거대한 손가락을 촬영했다.

그 도굴꾼은 이집트의 기자지역의 오래된 무덤에 몰래 도굴하러 들어갔다가, 엄청 거대한 크기의 거인의 시신을 발견했고, 거인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해서 손가락만 잘라 갖고나왔다고 한다.

 

이 손가락의 크기는 무려 35cm였는데, 보통 인간의 손가락의 크기는 평균 8cm로서,

이 거인의 손가락은 보통 인간의 손가락의 4배 크기에 해당할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한 사이즈로, 이 손가락의 크기로 추정한 생물체의 크기는 4m 50cm인 것으로 판명났으니, 이 생물체는 거인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 이집트벽화에 무수히 많이 그려진 거인족 그림

 

또한 이집트에서는 또다른 거인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집트의 레크미르 고분벽화에는 유독 거대한 체격의 사람들의 그림이 많이 그려져있다.

커다란 돌을 옮기는 사람, 기린과 신장이 비슷한 사람, 배를 미는 거대한 체격의 사람 등 보통사람과는 다른 키와 체격이 월등히 큰 거인들 그림이 레크미르 벽화에 많이 그려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이집트벽화의 그림에서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작게 그리고,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크게 그린 것으로, 거인그림은 단지 고대 이집트사회의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그림이라고 평가하면서 거인설을 일축했다.

 

그런데, 이집트 벽화 그림에는 거인이 돌을 나르고, 곡식을 나르고, 심지어 거인이 배를 미는 장면이 나온다.

즉, 이집트벽화 그림에 나오는 거인은 신분이 높은 귀족이 아니라, 노동일에 종사하는 하층민이나 노예인 것이다.

 

즉, 이집트벽화 그림은 신분이나 지위의 차이에 따라서, 사람의 크기를 달리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집트 한 벽화그림에서 거인이 거대한 돌 두 개를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돌은 피라미드축조에 사용되는 돌로서, 무게 2.5톤이나 되는 거대한 크기의 돌이다.

 

2.5톤이나 되는 무거운 돌 두 개를 나무장대의 양 끝에 줄에 달고, 그 장대를 어깨에 메달아 나르는 그림의 주인공은 결코 보통 인간이라고 할 수 없고, 거인이 분명해 보인다.

 

또한 이집트벽화에 그려진 거인은 키가 4~5m로 일정한 크기로 묘사되어 있고, 이렇게 거인의 그림이 그려진 이집트벽화는 아주 많이 존재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거인의 그림을 이렇게 많은 벽화에 사실적으로 그릴 필요가 있겠는가?

 

일부 학자들은 이집트의 많은 벽화에 그려진 거인들은 고대에 실존했던 종족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집트 가자지구에 건축된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고대시기에 이 거인족들을 동원해서 만들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집트 가자지구의 쿠프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대피라미드는 2.5톤의 돌이 230만개나 들어가있고, 총높이가 147m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이다.

 

기원전 2500년경, 2.5톤 무게의 돌을 230만개를 쌓아올려서 대피라미드를 만들었는데, 과학적으로 매우 낙후된 시기인 BC 2500년경에 이렇게 거대한 돌들을 230만개나 쌓아올려서 이렇게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든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지금처럼, 거대한 타워크레인도 없고, 강철제 도구를 만들 수 없었던 신석기 내지는 청동기시대에, 나무나 청동기로 된 거중기를 사용해서 230만개나 되는 돌들을 147m나 되는 높이까지 쌓아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지구의 대피라미드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류보다 더 문명이 발달했고, 거대한 힘을 가진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 만들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고, 그 다른 종족은 거인족 또는 외계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집트 피라미드는 보통 인간들의 노동과 노력으로는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때문에, 외계로부터 날아온 외계인이나 키 3~4m의 거대한 덩치를 가진 거인족들의 기술과 노동력을 이용해서, 기자지구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일단, 외계인을 제외하고라도, 거인족들이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는 증거로 이집트 레크미르벽화를 들 수 있다.

 

피라미드를 축조하는 모습들이 이집트벽화에 많이 그려져있다. 거인들이 2톤이 넘는 무거운 돌 두 개를 나무에 메달아 그 나무를 어깨에 얹어서 운반하는 그림, 그리고 거대한 거인 한명이 10명이 탄 배를 혼자서 밀고가는 그림, 또한 거인 두명이 엄청나게 큰 돌뭉치를 세우는 그림 등등 거인들이 활동하는 모습들이 이집트벽화에 무수히 많이 그려져 있다.

 

이집트벽화의 거인들의 그림은 매우 사실적이고,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이 거인족 그림은 그 시대의 실제로 존재했던 생활상의 모습을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230만개의 돌들을 쌓아올려서 만든 기자지구의 대피라미드는 이집트벽화에서 보여주듯이 거인종족들의 기술과 노동력을 이용해서 만들었다는 가설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인간의 기술과 노력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피라미드를 만들었던 시기는 BC 2500년으로,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시대이며, 철기제품이 발명되기 훨씬 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대피라미드를 건축한 거인족의 정체는 성경에 나오는 네피림의 후손들이거나, 또는 외계에서 날아온 외계인종족  중 하나라고 보는게 타탕하다고 본다.

 

20세기와 21세기 들어서서 거인족의 유골이나 흔적들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1912년경 미국의 위스콘신주에서 3m나 되는 키의 거인족 미이라가 발견되었고, 그 거인족 미이라는 지금도 그지역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그 인근지역에서 2~3m 키의 거인족 유골 18구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 거인의 정체는 네피림의 후예 또는 외계인?

 

그리고 남아프카공화국의 트란스발지역에서 ‘신의 발자국’이라고 명명된 1.2m 크기의 거인발자국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거인발자국을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연대측정을 한 결과, 31억년 전에 형성된 발자국이라는 것이 판명되어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31억년 전에 거인족들이 지구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많이 발견되고 있는 거인족의 유물과 흔적들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있던 상식을 완전 뒤집어버리는 현상이며, 우리인류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고 있다.

 

이렇게 많이 발견되고 있는 거인족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성경에 나오는 천사와 인간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네피림의 후예인가, 아니면 인간보다 훨씬 문명이 발달된 외계의 별에서 날아온 외계인의 한 종족일까?

 

그리고 이집트 고대벽화에 무수히 많이 그려진 거인들의 그림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어쩜, 이집트왕조보다 훨씬 더 이전에, 외계의 별에서 이주해온 일단의 외계인종족이 먼저 이집트땅에 터를 잡고 상주하면서,

그들이 갖고있는 고도의 과학기술을 이용해서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같은 불가사의한 건축물을 만들고, 선진문물의 일부를 인간들에게 전수해주고, 다시 지구를 떠나 자신들의 별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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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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