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고전 홍콩무협영화 왕우의 ‘외팔이드래곤’ /줄거리와 사진 (중국무협영화 추천)
홍콩무술스타 왕우의 통쾌한 권법무술영화 ‘외팔이드래곤’ 줄거리내용과 사진, 70년대 중국무협영화 이야기
왕우 - 1943년생 현재 나이 78세
지난달에는 이소룡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므로 이번에는 홍콩무술영화의 또다른 심벌인 왕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왕우는 홍콩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꽤 뛰어난 연기감각과 열정을 지닌 홍콩무협영화 배우이다.
왕우는 60~70년대 홍콩영화의 대표적인 액션배우로서, 특히 ‘외팔이’시리즈로 한국과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며, 홍콩무협영화계에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무협배우 중 한사람이다.
60~70년대 홍콩무협영화가 아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데에는 액션배우 왕우의 공로가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는데,
홍콩무협영화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이끌어낸 대표적인 무협배우로 왕우를 꼽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정도로, 60~70년대 시절, 왕우의 무협영화에 대한 공로와 영향력을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왕우는 1964년도에 홍콩의 최대자본의 영화사(왠만한 허리우드영화사보다도 자본력이 훨씬 큰 아시아에서 최대자본의 영화사)인 쇼브라더스사에 수천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영화배우로 스카웃되었는데,
이 당시 왕우와 오디션을 함께 보고 스카웃된 배우가 바로 나열(로례)이다.
60년대에 홍콩과 한국, 아시아에서는 검객무협영화가 큰 인기를 끌면서 유행하였고, 특히 홍콩의 쇼브러더스사에서 만든 검객영화가 큰 붐을 형성하면서, 아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었다.
그 당시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홍콩무협영화들의 상당수가 왕우와 로례(나열)가 주연으로 출연해서 눈부실 정도로 멋지고 화려한 검술액션을 선보이면서, 관객들로부터 커다란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왕우는 ‘외팔이검객’의 주인공으로 분해 황홀할 정도로 멋진 액션연기를 선보여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홍콩무협영화의 최고의 인기스타로 우뚝 솟아올랐다.
67년도에 만들어져 상영된 왕우의 ‘외팔이검객’은 홍콩을 넘어, 대만과 일본, 한국에까지 수출되어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당시 왕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외팔이검객’은 그 수익이 홍콩 영화역사상 최초로 100만 달러의 흥행신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 영화로 큰 화제를 모았었다.
그렇게, 외팔이검객으로 홍콩무술영화계의 톱스타의 위치로 우뚝 올라서게된 왕우가 소속사인 ‘쇼브라더스사’를 퇴사한 후,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감독을 맡아서 만든 권법액션영화가 바로 ‘외팔이드래곤’이다.
사실 왕우가 최초로 직접 감독을 맡아서 만든 액션영화로는 ‘용호투’라는 영화가 있는데, 쇼브라더스사 시절에 왕우가 직접 연출해서 ‘용호투’를 만든 이후, 쇼브라더스사를 퇴사해서 두 번째로 자신이 직접 감독과 시나리오, 주연 등 1인 3역을 맡아서 만든 영화가 바로 ‘외팔이드래곤’으로서, 이 영화는 한국과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흥행에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왕우가 세 번째로 감독과 주연을 맡아서 만든 권법액션영화가 ‘흑백도’이다. 세영화 모두 왕우가 주연으로 출연해서 칼을 버리고, 주먹과 맨손무술을 사용해서 적들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권법무술영화이다.
- 왕우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만든 3대걸작 액션영화 -
70년 용호투
71년 외팔이드래곤
71년 흑백도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왕우가 직접 감독과 시나리오, 주연의 1인 3역을 맡아서 만든 무협영화로는 ‘용호투’ ‘외팔이드래곤’ ‘흑백도’의 3대 영화가 있는데,
이 3개의 영화는 모두 재미있고, 수준급 이상의 영화로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감동과 재미를 주는 영화가 바로 ‘외팔이드래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 ‘외팔이드래곤’은 71년도에 만들어져서 우리나라에도 상영되어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왕우는 한국 등 아시아에서 일약 최고인기의 무협스타로 우뚝 올라설 수 있었다.
적어도 이소룡이 나타났던 1972년 전까지만 해도, 왕우가 최고의 무협스타로 군림할 수 있었는데, 이런 왕우를 최고인기의 무협스타로 만들어준 영화가 바로 ‘외팔이드래곤’이었다.
왕우는 1960년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거의 10년 동안 홍콩영화계에서 최고로 몸값이 높았던 당대의 인기스타였다.
적어도 1972년 이소룡이 출현하기전까지만 해도, 왕우가 중화권의 무협영화계에서는 가장 인기가 높은 최고인기의 무협스타로 군림했었다.
그리고 왕우는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단지 영화배우로서만 활동해왔지만, 그는 야먕이 매우 큰 배우였기에, 그는 영화배우로서만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감독직에도 뛰어들어서,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으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은 자신만의 독특한 무협영화들을 만들어 나갔다.
왕우가 최초로 감독직을 맡은 액션영화 ‘용호투’와 두번째로 감독을 맡아서 만든 액션영화 ‘외팔이드래곤’으로
중국(홍콩)무협영화의 패러다임을 한순간에 바꿔놓았고, 특히 ‘외팔이드래곤’은 당대의 뛰어난 무협영화 중의 명작품으로 관객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다.
원래 60년대만 해도 홍콩에서는 칼을 쓰는 검객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1970년을 기점으로 해서 왕우는 과감히 칼을 버리고, 손과 주먹을 사용하는 권법액션 영화를 처음으로 연출해 만들었다.
그렇게 왕우가 처음으로 만든 권법액션영화가 ‘용호투’였는데, 최초로 주먹만을 사용한 영화 ‘용호투’는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그 후에도 왕우는 ‘외팔이드래곤’ ‘혹백도’ ‘사대천왕’ 등 권법액션영화들을 계속 만들어서 선보였고, 이러한 왕우의 노력으로 70년대에는 무협영화계에서 칼을 버리고 주먹으로 싸우는 권격액션영화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런데, 왕우가 자신을 무협스타로 만들어준 쇼브라더스사를 탈퇴하고 영화사를 골든하베스트사로 옮겼던 이유는 바로 게런티문제 때문이다.
당시 수많은 무협영화를 만들어서 아시아 영화계의 제왕처럼 군림해왔던 쇼브라더스사는 배우들에게 아주 적은 월급형태의 게런티를 지급해주고 있었는데, 왕우는 이러한 쇼브라더스사의 만행에 반기를 들었고, 제대로된 게런티를 지급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쇼브라더스사와 법원에서 소송전까지 벌이게 된다.
이렇게 쇼브라더스사와 소송전을 벌였던 왕우는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소브라더스사와 작별하고, 소속사를 골든하베스트사로 옮겼으며,
이후 영화연출까지 맡으면서 칼을 버리고 주먹으로 싸우는 권법영화를 만들어서 선보였고, 권법액션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내는 수훈을 세웠다.
60년대 홍콩, 중화권영화계에서 대세로 자리잡았던 검술무협영화에서 칼을 버리고 주먹으로 싸우는 권법무술영화를 왕우가 ‘용호투’를 통해서 최초로 시도했는데, 이러한 권법무술영화가 흥행에도 상당히 성공한다.
이렇게 왕우가 권법액션영화의 발판을 만들어놨는데, 이소룡이 홍콩으로 건너가서 왕우가 만들어놓은 권법액션영화의 토대를 바탕으로 해서, ‘당산대형’ ‘정무문’ 같은 무술영화에 출연해서,
세계적인 무술스타가 될 수 있었으니, 이소룡이라는 걸출한 무술스타가 탄생하는 데에도 왕우가 그 초석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소룡영화는 왕우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거나, 그 소재를 차용한 부분들이 꽤 많이 있다.
왕우의 영화 ‘외팔이드래곤’에서 나오는 도장이름 ‘정덕무관’에서 이소룡영화의 제목 ‘정무관(정무문)’이 도출되어 나왔고, 왕우의 영화 ‘용호투’에서 이소룡영화 ‘용쟁호투’가 도출되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왕우의 영화 ‘외팔이드래곤’에서 자신의 스승을 죽인 일본인 무도가를 상대로 원수를 갚는 내용이 있는데,
이소룡영화 ‘정무문’에서도 이소룡이 스승을 죽인 일본인무술고수를 상대로 스승의 원수를 갚는다는 유사한 내용이 전개된다.
이처럼, 이소룡이 출연했던 영화들은 왕우가 만든 권법영화로부터 여러 가지면에서 영감을 얻거나, 그 소재를 얻는 등 왕우영화로부터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7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한국의 젊은남성들에게는 왕우의 액션영화를 보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왕우는 대단히 큰 인기를 끌었지만, 이소룡이 나타난 이후부터 왕우의 인기는 시들어버리고, 왕우에 대한 관심은 곧바로 이소룡에 대한 관심으로 전이되어 버린 것이다.
세기에 한번 나올까말까 하는 불멸의 스타 이소룡이 출현함으로써, 왕우의 인기와 명예는 상당부분 평가절하되어버리고, 점점 잊혀져가는 올드스타로 자리잡게되고,
그 이후 왕우는 배우보다는 감독으로 전향해서 영화감독으로 더 많은 활동을 벌여나가게 된다.
왕우의 작품 중에서, ‘외팔이검객’과 함께 2대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외팔이드래곤’이다.
1971년도에 왕우가 시나리오와 감독, 주연의 1인 3역을 맡아서 완성한 ‘외팔이드레곤’은 왕우의 권법영화 중에서도 내용과 액션, 구성면에서도 가장 잘 짜여진 정말 액션이 멋드러지고, 스토리가 재미있고, 감동적인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영화이다.
이 영화 ‘외팔이드래곤’에서는 비록 왕우가 이소룡처럼 화려한 발차기는 선보여주지 못했지만, 왕우는 애절하면서도 다이나믹한 연기력, 절도있는 주먹액션과 뛰어난 스펙터클, 세련된 촬영기법등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관객들에게,
영원히 잊지못할 흥미로운 볼거리와 진한 감동을 선사해주었고, 이 영화로 인해 왕우는 세계적인 액션스타로 우뚝 올라설 수 있었다.
왕우의 ‘외팔이드래곤’은 5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아도 여전히 재미있고, 훈훈한 감동을 주는 영화이다.
비록 현대의 액션물처럼 컴퓨터 그래픽이나 하이테크 기술을 활용하지않아서 세련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왕우의 ‘외팔이드래곤’에서 보여지는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인간미와 불굴의 정의감, 그리고 스승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통해서 따끈따끈하고 훈훈한 인간적인 매력을 물씬 느껴볼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대의 무협액션물에서는 ‘외팔이드래곤’처럼 훈훈한 인간미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단지 기계적이고 무의미한 액션만 반복되지 않는가!
여러분들도 70년대 무협영화의 추억이 물씬 흥겨나오는 왕우의 ‘외팔이드래곤’이나 ‘용호투’ 같은 영화들을 한번 감상해보시기 바란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럼, 이제부터 외팔이드래곤의 스토리를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 외팔이드래곤의 줄거리, 스틸사진
홍콩에 있는 한 마을에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두 개의 무술도장이 있는데, 정덕무관과 철구문이 그것이다.
정덕무관의 스승 한사부와 철구문의 스승 소사부는 중국최고의 무도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서로간에 치열한 경쟁구도를 형성해나갔는데, 당연히 두 도장의 문하생들도 상호간에 물밑에서 은밀하게 경쟁을 벌여나가고 있었다.
정덕무관에서 가장 뛰어난 무예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유천룡은 정덕무관의 스승 한사부로부터 최고의 신임을 받는 문하생으로서, 문하생 중의 으뜸가는 무술고수였고, 사실상 정덕무관의 수제자였다.
그런데, 어느날 정덕무관의 수제자 유천룡이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면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마씨 일당을 발견하고는, 그 마씨 일당을 두들겨패면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유천룡이 두들겨팼던 그 사람은 바로 정덕무관과 경쟁관계에 있던 철구문의 고참급 문하생이었다.
철구문파의 문하생이 두들겨맞았다는 사실이 철구문파의 스승 소사부에게 알려졌고, 소사부는 자신의 문하생을 두들겨팬 정덕무관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된다.
원래부터 정덕무관의 한사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철구문파의 소사부는 곧바로 정덕무관으로 찾아가서 한사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곧이어 한사부와 소사부간에 치열한 한판대결이 펼쳐졌는데, 10분도 안되어서 철구문파의 소사부가 보기좋게 패배하고 만다.
정덕무관의 한사부에게 처절하게 패배한 철구문파의 소사부는 패배한 분을 삭이지못하고 이전보다 더욱 치열한 보복을 하기 위해서,
천하에서 무술이 뛰어난 무술고단자들을 여러명 끌어모았고, 엄청난 복수전을 계획했다.
철구문파의 소사부가 복수를 위해서 끌어모은 무술고수들은 동아시아 여러나라에서 날고 기는 무술고단자들이었다.
철구문팡듸 소사부는 일본의 가라데고수와 그 제자들, 한국의 태권도고단자 김기용, 그리고 유도고단자, 태국의 무에타이 고단자, 티벳의 라마교 고수, 인도의 요가무술의 대가 무라신등
국제적으로 뛰어난 무술고단자들을 불러들여서 정덕무관으로 쳐들어갔고, 곧바로 두 세력간에 피를 뿌리는 대혈전이 벌어졌다.
이로써, 두 도장 세력간에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는데, 정덕무관의 최고실력자 유천룡(왕우역)이 이들 국제무도가들과 대결을 펼치면서, 선전을 펼쳐나갔지만, 종국에는 가라데의 최고고단자를 상대로 한 대결에서 유천룡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패배를 당했고, 그의 오른팔을 짤려나감으로서 외팔이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두세력간의 대결에서, 정덕무관의 한사부가 사망함으로서, 정덕무관은 완전히 패배해서 풍비박산이 났고, 유천룡은 오른팔을 잃고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간신히 탈출한 유천룡은 길거리를 헤메다가 쓰러져서 의식을 잃어버렸고, 때마침 길가를 지나가던 한 부녀가 쓰러진 유천룡을 구출해주었고,
그들의 집에 이송된 유천룡은 그 부녀의 알뜰한 치료와 보살핌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부녀의 친절한 보살핌으로 다시 살아난 유천룡은 스승을 죽이고 자신의 오른팔을 앗아간 철전지원수인 철구문파에게 복수를 하기위해서,
왼쪽팔 하나만으로 무술을 연마해나갔고, 수년동안 천신만고 끝에 무술최고의 비기인 필살기를 마스터하게 되었다.
이미 팔을 하나 잃고 왼팔만이 남은 외팔이신세가 된 유천룡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수년간 익힌 무술 필살기로 무장한 채, 철천지원수인 철구문파의 소사부일당에게 당당하게 도전장을 던졌다.
불모의 계곡에서 벌어진 유천룡과 소사부일당과의 대결에서, 외팔이인 유천룡 혼자서 철구문파의 10여명의 국제무술 고단자들을 한사람씩 차례로 대결을 벌여나갔다.
왕우와 딸 왕형평
유천룡은 자신이 보유한 고도의 필살기로 소사부일당의 뛰어난 무술고수들을 한사람, 두사람씩 계속 쓰러뜨려나갔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오른팔을 부러뜨린 철천지원수인 가라데고수를 만나서 최후의 대결을 벌였다.
유천룡은 가라데고수를 상대로 일진일퇴의 치열한 혈전을 벌여나갔는데, 종국에는 자신이 수년동안 익혀온 필살기기술로 그 가라데고수를 연속 공격한 끝에,
그의 오른팔을 잘라버림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유천룡의 복수전은 마침내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