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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왕 파라오 투탕카멘 미라의 저주와 보물. 무덤, 크로울리
반헬싱
2021. 5. 11. 22:39
이집트왕 투탕카멘의 저주와 보물, 고고학자 20명의 사망원인
이집트에서 20세기 최고의 고고학적 발굴이 이뤄졌는데, 바로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것이 그것이다.
1922년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서 일련의 과학자들이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벌여서, 이집트 제18왕조 12대왕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는데 성공했다.
투탕카멘은 고대 이집트왕국의 제12대 왕으로서, 기원전 1361년 향년 9세에 왕위에 올라 10년 동안 재위하다가, 향년 18세에 사망했던 왕이었다.
투탕카멘은 소년이었던 9살에 왕위에 올라서 고작 10년 동안만 파라오로 집권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별로 알려진 게 없고,
단지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사망한 매우 불운한 왕으로만 알려져있다.
투탕카멘왕이 이처럼 일찍 사망한 이유는 타살설, 와병설등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그는 조상대대로 유전되어 내려온 유전병으로 인한 장애자였고, 심각한 유전질환을 앓고 있었다.
투탕카멘은 10살 때 배다른 누나와 혼인했고, 두명의 딸을 가졌지만, 두 딸도 곧바로 유전질환으로 죽고말았다.
즉, 투탕카멘은 왕조 대대로 내려온 풍습인 근친혼 때문에, 선천적 유전병을 갖고있었기 때문에 원래 몸이 허약했고,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심한 다리골절상을 앓고 있었다.
결국 투탕카멘은 타인의 암살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남매들끼리 결혼하는 근친혼 때문에, 선천적으로 심한 유전질환을 앓고있었고,
거기다가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에 감염되어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왜냐하면, 투탕카멘의 시신에서 선천적인 다리기형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말라리아에 감염된 흔적도 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고작 8년이라고 하는 아주 짧은 기간동안 왕으로 재임한 별로 인지도가 없는 왕이었던 투탕카멘이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무덤에서는 화려한 황금 마스크와 2,000개 이상의 유물 등 엄청난 보물들이 발견되어서 큰 화제를 낳았다.
1922년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서 일련의 과학자들이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하였는데, 재위기간도 짧고, 별볼일 없는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엄청난 황금과 보물,
그리고 수천건의 유물들이 발견됨으로써, 투탕카멘은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되었다.
다른 파라오들의 무덤들은 도굴을 당해서 대부분 훼손되었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은 한번도 도굴을 당하지 않은 체, 3,300년의 기간 동안 원형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집트 쿠푸왕의 무덤에서는 고작 석관 하나만 발견된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발굴 당시 110kg의 황금관 속에 투탕카멘의 시신이 담겨있었고, 투탕카멘의 얼굴에는 찬란한 황금마스크가 씌어져 있었다.
투탕카멘 무덤에서는 눈부실 정도로 빛이 번쩍번쩍 나는 황금마스크와 황금관, 파라오마차, 파라오의자, 각종 향료들, 150개의 황금장신구, 상아장식함 등 화려하고 값비싼 2,000점의 보물들이 발굴되었다.
즉, 투탕카멘 무덤에서는 역대 그 어떤 이집트왕의 무덤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하고 진기한 보물과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그래서 투탕카멘의 발굴은 20세기 최대규모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런데 투탕카멘무덤 발굴 후에, 의문의 사망사건들이 계속 발생하기 시작했다.
◆ 투탕카멘의 저주와 과학자들의 미스테리한 죽음
그당시 과학자들이 발견한 투탕카멘 무덤 속의 관에는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 라는 경고문구가 적혀있었다.
이것은 마치 투탕카멘무덤의 유물과 보물을 건드린 자들에게 천벌을 내리겠다는 표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이런 경고문구를 무시하고, 투탕카멘무덤 발굴을 계속해서 무덤속의 관과 유물들을 모두 발굴해 가져갔다.
그런데, 그 후 투탕카멘 무덤 발굴에 참여했던 과학자들 대부분이 끔찍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집트의 왕가의 계곡에서 카나본 경의 후원을 받아서 하워드 카터가 주도해서 5년 동안 발굴을 시도했고, 마침내 1922년 가까스레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투탕카멘무덤 발굴에 후원을 했던 카나본 경의 죽음을 시작으로 해서 발굴에 참여했던 여러명의 관계자들이 질병이나 사고사, 자살 등으로 거의 대부분 사망하고 말았다.
그렇게 투탕카멘무덤 발굴에 참여한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의 수는 20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세간의 사람들 사이에는 이것을 두고 ‘투탕카멘의 저주’ 혹은 ‘파라오의 저주’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열어서는 안된다는 경고문구를 무시한 체 투탕카멘무덤을 열어본 사람들에게 투탕카멘 파라오가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다.
먼저 투탕카멘무덤 발굴팀의 자금줄이자, 영국의 대부호인 카나본 경은 무덤 발굴 후 6주 만에 갑자기 돌연사하고 말았다.
발굴 당시에 카나본 경은 자신의 얼굴이 모기에 심하게 물렸는데, 하필 그곳을 면도하다가 면도칼에 비었고, 결국 패혈증에 걸려서 엄청난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고 말았다.
그런데, 카나본 경 얼굴에 난 상처가 투탕카멘 미이라의 얼굴에 난 상처와 동일한 위치였다고 한다.
그래서 카나본 경의 죽음이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더 한층 강하게 퍼져나갔다.
또한 투탕카멘무덤의 발굴에 함께 참여한 미국의 고고학자 아서 메이스도 갑작스럽게 돌연사하고 말았고,
소식을 듣고 이집트로 건너온 카나본 경의 친구이자, 미국철도업계의 거물 제이슨 제이 굴드도 투탕카멘의 무덤을 방문한 그 다음날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발굴한 투탕카멘 미이라를 최초로 X-레이로 촬영했던 기사 아치볼드 더글러스도 무덤 발굴 2년 후인 1924년에 갑자기 사망했으며,
투탕카멘 미이라를 검시했던 의사 데리 더글러스도 석연치않게 갑자기 사망했다.
또한 투탕카멘의 관을 촬영했던 카메라맨 프랭크 로리도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고고학자 에블린 화이트는 동료들의 사망소식을 듣고난 후, ‘파라오의 저주에 쓰러졌다’라는 의문의 유서를 남기도 자살하고 만다.
그리고 투탕카멘무덤의 안내를 담당했던 가이드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렇게 카나본 경을 비롯해서 5년 동안 투탕카멘무덤 발굴에 참여했던 22여명의 사람들이 특별한 원인도 없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같은 의문스러운 죽음이 계속 이어지자, 사람들 사이에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사망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게 됐다.
투탕카멘왕 무덤에 씌여있는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는 경고처럼 정말 투탕카멘이 저주를 내린 것일까?
◆ 투탕카멘 무덤의 저주와 흑마술사 크로울리의 살해의식
그런데, 투탕카멘의 저주와 관련되어서 전혀 새로운 사실이 제기되었는데, 투탕카멘무덤 발굴 후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22명 중 7명의 사람들이 사실은 흑마술사이자 오컬트의 창시자인 크로울리의 공작에 의해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2011년 영국의 역사학자 마크 베이논은 투탕카멘무덤 발굴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사람들 중 7명은 투탕카멘의 저주때문이 아니라,
흑마술사인 크로울리의 사주에 의해서 살해당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집트의 최고신 호루스를 숭배해왔던 알리스터 크로울리의 사주에 의해 투탕카멘무덤의 발굴 참여자 7명이 크로울리의 살해공작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투탕카멘무덤의 발굴현장에 있었던 이집트왕자 알리 케멜 화미 베이도 사실은 크로울리의 사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집트 최고의 신으로 추앙받던 호루스를 극진히 숭배해왔던 크로울리는 평소에 호루스신으로부터 여러가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호루스를 숭배하는 ‘텔레마’라는 종교집단을 만들어 스스로 교주가 되었다.
그런데, 이집트 파라오무덤의 발굴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나가자, 크로울리는 이것을 자신이 믿는 호루스신에 대한 모독으로 판단하고 몹시 격분한 나머지, 투탕카멘무덤 발굴참여자들을 응징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크로울리는 발굴현장에 있었던 이집트왕자 알리 케멜 화미 베이를 암살하기 위해서, 그의 아내 마리에게 접근해서 자신이 만든 텔레마 종교로 마리를 끌어들여 세뇌시켰고,
크로울리의 사주를 받은 마리 마거릿은 실제로 이집트왕자이자 남편인 알리 케멜 화미 베이를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권총으로 살해했다.
사실 크로울리와 마리 마거릿은 종교적 주종관계 외에도 서로 내연관계에 있었고, 크로울리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마리는 카나본의 조카 오베리 허버트도 권총으로 살해했다.
마리에게 살해된 허버트는 무덤발굴의 총책임자인 카나본의 조카이자, 무덤발굴 현장에서 인부들을 감독했던 감독자였다.
카나본의 비서인 리처드 베텔은 무덤 발굴 직후, 몰래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가서 값비싼 유물들을 훔쳐서 비싼값에 팔아서 큰 부자가 되었는데,
크로울리는 베텔을 호루스신을 모독한 자로 판단하고, 하수인을 시켜서 베텔을 살해했을 뿐아니라, 베텔의 장물을 보관해준 그의 아버지 웨스트베리도 함께 살해했다.
그 후에도 크로울리는 영국박물관에서 투탕카멘의 유물을 관리하는 직무를 담당했던 에드거 스틸과 어니스트 왈리스도 살해했다.
이렇게 크로울리는 자신이 숭배하는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투탕카멘무덤 발굴에 관련된 자 중 무려 7명의 사람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7명을 살해한 후에도 크로울리는 또다른 관련자들에 대한 살해공작을 계획했지만, 자신이 운영하는 종교단체에서 뜻밖의 사망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공작을 펼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크로울리는 자신이 세운 종교인 텔레마 교당에서 한 신도가 죽는 사망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경찰로부터 요주의인물로 낙인이 찍혀 감시받는 처지가 됐고, 그 후에는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은둔생활을 해나갔다.
그리고 크로울리는 타인들을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을 했다는 이유로 여러건의 송사에 휘말렸으며, 이들 재판에서 패소하면서 전재산을 잃었고, 그는 1947년 72세의 나이에 마약에 중독된 체 사망하고 말았다.
영국 역사학자 베이논은 크로울리가 쓴 책들과 자서전, 일기책등을 오랜 기간 동안 정밀 분석한 끝에, 이같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크로울리가 자신이 신봉하는 호루스신의 계시를 받고, 파라오의 무덤을 발굴함으로서 신을 모독하는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살해의식’으로 관련자 7명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크로울리와 그의 추종자 마리 마거릿
즉,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죽었다고 알려진 사람들 중 일부는 사실 크로울리의 사주에 의해서 억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이같이 크로울리가 잔인한 살인행각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소문이 워낙 대세를 이루었기 때문에, 운좋게도 크로울리의 살인행각은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묻혀버리게 됐다고 한다.
역사학자 베이논의 새로운 발견으로 투탕카멘 무덤의 발굴자 중 일부사람들의 죽음의 원인이 밝혀졌지만, 나머지 사망자 15명의 사망원인은 아직도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고있다.
15명이나 되는 발굴참여자들이 정말로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죽었다고 믿고싶지는 않지만, 이들이 정말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 이후, 매우 석연치않게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은 투탕카멘무덤 발굴 후에, 발굴에 참여한 과학자들의 미스테리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렸다.
투탕카멘무덤 발굴 이후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발굴 참여자들의 정확한 죽음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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