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
남극대륙의 남극점에 최초 도착한 정복자,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과 스콧
반헬싱
2023. 7. 2. 14:00
남극대륙 정복, 남극점 최초 정복자 노르웨이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 경쟁자 스콧
인류역사상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늘은 인류 최초로 남극대륙을 개척한 위대한 탐험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911년 12월 14일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착한 사람은 바로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이었습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은 지구상에서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남극대륙의 극점을 인류 최초로 가장 먼저 도착해 깃발을 꽂은 위대한 탐험가였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대장정에 올라 남극대륙의 극점을 정복한 탐험가 로알 아문센의 도전정신으로, 인류 탄생 이후 수십만년 동안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던 남극대륙의 실체가 밝혀지게 됐습니다.
만일 아문센 같은 위대한 탐험가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우리 인류는 아직도 남극대륙의 실체를 모른 체 살아가고 있었을 겁니다.
그럼, 인류최초의 위대한 정복이라고 할 수 있는 탐험가 아문센과 그의 경쟁자 스콧의 남극점 도전기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인류 최초의 남극점 정복 도전기
대부분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는 남극, 남극은 거대한 제7의 대륙이자, 미지의 세계입니다. 남극은 그 면적이 1,400만 km²로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지구상에서 네번째로 큰 대륙이며, 미국땅의 1.4배나 되는 면적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남극의 98%가 얼음으로 덮여있고, 이 얼음의 두께는 무려 1.6km나 된다고 하니, 남극자체가 거대한 얼음덩어리 대륙이지요.
그리고 남극의 지하에는 엄청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광물자원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눈독을 들이고있는 곳입니다.
20세기 초, 이 미지의 거대한 대륙인 남극을 탐험하기 위해서, 영국과 노르웨이 등 여러 나라의 탐험가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20세기 초에 대영제국이라고 불리우는 영국의 탐험대와 이제막 독립국가된 노르웨이의 탐험대가 남극점 정복을 놓고 서로 같은 시기에 경주하듯이 경쟁을 벌인 흥미로운 일화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던 영국 탐험대와 노르웨이 탐험대의 남극점 정복경쟁은 결국 승자에게는 영웅 칭호가, 패자에게는 죽음을 안겨주는 극과 극의 결말로 끝이 났습니다.
1910년 6월 1일, 영국의 해군장교출신 로버트 스콧은 영국정부의 막대한 후원 아래 남극탐사선 테라 노바호의 선장으로 임명된 후, 60명의 과학자, 선원들을 이끌고 남극점 정복을 위한 남극대륙 탐험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영국탐험가 스콧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라이벌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이었는데, 아문센은 영국탐험가 스콧과 비슷한 시기인 1910년 6월 7일 탐사선 프람호를 타고 남극점 정복을 목표로 일행들과 함께 남극탐험에 나섰습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은 북극탐험에 성공한 적이 있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탐험가였습니다.
아문센은 작은 배에 선원 몇 명을 테우고 노르웨이에서 알래스카로 가는 북극해 항로를 인류 최초로 개척해낸 뛰어난 공적을 지닌 위대한 탐험가였습니다.
로알 아문센은 북극탐험에 이어서 또다시 남극점 정복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과 영국탐험가 스콧은 서로 자신이 먼저 인류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비슷한 시기에 남극점 정복경쟁을 벌였습니다.
♥ 남극점 정복을 위한 아문센과 스콧의 목숨을 건 경쟁 레이스
영국탐험가 스콧은 1911년 1월 4일 영국을 출발한 지 7개월만에 남극대륙의 남쪽 해안가인 로스빙붕의 근처에 도착합니다.
노르웨이 탐험대 아문센 일행은 남극 남쪽 해안가 로스빙붕 근처에 도착해서 두 탐험대가 남극점 정복을 위한 선의의 레이스경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들 탐험가들 중 남극의 한가운데에 있는 남극점에 먼저 도착해서 깃발을 꽂을 경우, 그는 인류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업적을 달성한 위대한 영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극은 여름철에도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며, 가장 추운 겨출철에는 영하 94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곳으로 사실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남극은 3월부터 10월달까지의 8개월동안이 겨울철이며, 11월부터 2월까지가 여름철이지요.
따라서 탐험대는 기온이 극한으로 떨어지는 겨울철인 3월이 오기전인 11월부터 2월까지의 4개월안에 탐험을 끝내는 것이 가장 좋은 코스입니다.
남극대륙의 남쪽 해안가에 도달하면 ‘로스빙붕’이라는 곳이 나타나는데, ‘로스빙붕’은 남극대륙의 해안가에 펼쳐진 50만km²의 거대한 얼음절벽인데, 이곳은 폭이 수백킬로미터나 되는 차가운 얼음벌판으로 되어있어서, 계속해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매우 험난한 곳으로, 이곳을 넘어가야만 비로서 남극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들 탐험가들이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남극대륙의 남해안에서 남극점까지의 거리는 약 1,400km의 머나먼 거리입니다.
이들 탐험가들이 남극 해안가에서 1400km 거리에 있는 남극점에 가기위해서는 수백킬로미터의 얼음벌판을 횡단한 후, 아주 가파른 빙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거대한 얼음산맥을 넘어가야 하며, 그 후에도 험준한 빙하벌판과 산맥들을 계속해서 건너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들이 목표로 하고있는 남극점은 남극고원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스콧탐험대와 아문센탐험대 모두 남쪽 해안가에 각각 베이스캠프를 설치했고, 두 탐험대 베이스캠프 기지는 서로 650km 떨어져있었습니다.
남극탐험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식량과 연료, 피복 같은 보급품을 효율적으로 운반하고 저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3개월 이상이 걸리는 남극탐험 도중에 식량과 연료가 떨어지면, 얼음덩어리인 남극에서 새로운 식량을 얻을 수가 없으므로, 대원들의 생명을 부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탐험대는 각자 베이스캠프에서 남극점에 이르는 여러 지점에다 엄청난 양의 식량창고와 보급소를 만들어 놓는 등, 두 탐험대 모두 남극점탐험을 위한 치밀한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일행은 남극점까지 가기 위해 50마리나 되는 개들을 데려왔고, 개썰매를 이용해서 탐험에 나섰습니다.
식량과 연료등 무거운 짐들을 개썰매를 이용해서 개들이 나르게했고, 탐험대원들은 모두 직접 스키를 타고서 앞으로 진격해나갔습니다.
원래 노르웨이는 추운 지방이라서 스키타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고, 노르웨이사람들은 평소에도 스키를 잘 타기로 소문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문센대원 중에는 세계 스키대회챔피언 출신인 올라프 비욜란도 포함되어 있었답니다.
1911년 10월 19일, 아문센일행은 대원 5명과 4대의 썰매, 그리고 48마리의 개들과 함께 순조롭게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대원들은 능수능란하게 스키를 타면서 앞으로 나아갔고, 잘 훈련된 개들이 끄는 개썰매를 이용해 빠르게 앞으로 진격해나갔고, 아문센일행은 출발 4일째가 되던 날, 남위 80도상에 구축해놓은 첫번째 식량저장소에 도착해서 새로운 식량및 연료를 보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문센의 썰매개들은 지구력이 뛰어나고 훈련이 잘되어있어서, 지치지않고 오랫동안 달리기를 잘했습니다.
썰매개들의 대활약으로 아문센 일행은 아주 빠른 속도로 한달 만에 로스빙붕을 건너는데 성공했습니다.
반면, 영국탐험대 스콧일행은 운반수단으로 조랑말 10마리과 23마리의 개와 3대의 개썰매, 모터썰매 두대를 준비했습니다.
영국탐험대 스콧일행은 아문센일행의 출발보다 13일 후인 11월 1일 뒤늦게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스콧일행이 출발한 지 이틀 만에 갖고간 두대의 모터썰매의 엔진이 모두 고장났고, 이로써 스콧일행의 레이스는 중간에 주춤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콧일행은 대부분 스키를 잘 타지못하기 때문에, 모터썰매가 고장난 후에는 진격속도가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그들이 데려간 조랑말과 개들은 훈련이 잘되어있지않아서, 제대로 진격해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히 스콧이 데려간 개들은 베이스캠프와 저장창고 구축하는데에만 사용하고, 남극점 정복 레이스에는 투입하지 않았습니다.
개들을 남극점 정복 레이스에 투입하지않은 것은 엄청난 실책이었고, 이것은 나중에 스콧일행이 남극점 최초정복에 패배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더욱이 비어드모어 빙하기슭까지 나아갔을 때에는, 스콧이 데려간 조랑말들이 모두 얼어 죽는하는 바람에, 320kg이나 되는 무거운 짐이 실린 썰매를 사람의 힘으로 끌고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은 목표지점인 남극점까지 갔다가 다시 베이스캠프까지 돌아가는 거리는 무려 1,600km나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매서운 칼바람, 엄청난 추위와 악천후를 뚫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마다 이들의 생존율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문센일행은 하루에 32km씩 전진했지만, 반면 스콧일행은 하루에 16km밖에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스콧일행이 이미 훨씬 앞서나간 아문센일행을 추월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만일 이 때에 스콧일행이 레이스를 포기했더라면, 대원들의 생명만큼은 부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스콧은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고, 무모한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두 탐험대간에 전진속도에 현격한 차이가 나기 시작했고, 목표점에 가까워질수록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스콧일행에게 또다시 불행이 닥치는데, 그들이 나아가는 얼음평원에 ‘블리자드’라는 매서운 눈폭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스콧일행은 처음부터 '블리자드' 눈폭풍이 불어닥치는 곳으로 경로를 잘못 잡았던 겁니다.
남극에서는 종종 ‘블리자드’라는 폭풍이 불어오는데, 눈폭풍 ‘블리자드’는 평균 시속 160km의 강풍으로, 이 블리자드는 수많은 눈들을 동반해서 불어오는데,
이 ‘블리자드’가 불어오면 그곳에 있는 사람은 주위가 온통 하얀색 눈밭으로만 보이기 때문에, 방향과 거리를 알 수 없게되는 등 위치감각, 거리감각을 모두 잃어버리고 미아가 되고맙니다.
이 ‘블리자드’는 한번 불었다 하면 며칠에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불어옵니다. ‘블리자드’로 인해 주위가 온통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리감각을 완전 상실하고 자신의 정확한 경로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이 블리자드폭풍 때문에, 영국탐험대 스콧일행은 오랫동안 앞으로 전진하지 못한 체, 캠프안에서만 지내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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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아문센일행은 잘 훈련된 개썰매를 이용해서, 3,000km 높이의 빙하산맥을 넘는데 성공했고, 빙하산맥 너머에 있는 남극고원에 도달했습니다.
아문센일행은 이곳에서 48마리의 개들 중 지치고 힘이 빠진 개 24마리를 총으로 쏴서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대원들과 남은 개들을 위한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개들을 죽인겁니다.
이 상황에 대해 아문센은 자신의 일기책에 ‘충성스러운 동반자들이 한 마리씩 죽어갔다. 개들을 죽인 건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를 달성해야만 했다’라고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2011년 12월 14일, 어려운 상황에서도 악전고투 끝에 아문센일행은 드디어 먼저 남위 90도 남극점 도착에 성공했습니다.
아문센일행은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한달 25일만에 약 1,300km를 내달려서 목표점인 남극점에 도착하는데 성공했고, 그곳에 노르웨이 국기를 꽂았습니다.
♥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 승리 요인과 스콧일행의 패배와 죽음
결국 아문센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남극점 도착에 성공했고, 그 시기가 1911년 12월 14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남극점 정복으로, 인류역사상 아주 위대한 대역사였습니다.
반면, 아문센과 남극점 정복을 위해 경쟁했던 영국탐험가 스콧은 아문센이 도착한 시기보다 34일 후인 1911년 1월 17일에야 가까스레 남극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아문센은 남극에 캠프를 설치할 때, 위도와 경도를 계산해서 남극점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지점에다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영국탐험가 스콧도 남극점 탐험을 위한 캠프를 설치했지만, 아문센의 캠프가 남극점에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근접한 지역에 설치했기 때문에, 아문센은 스콧의 경로보다 110km 정도 거리를 더 단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문센이 위도와 경도 등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해서 계산해낸 결과, 남극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경로의 단축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문센은 개썰매를 끌기에 적합한 잘 훈련된 개들을 준비해두었고, 남극대륙 횡단에 매우 유리한 스키 잘 타는 사람들로 대원들을 구성한 것도 주요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지식과 신중하고도 치밀한 전략으로 남극탐험에 적합한 사전준비를 철저히 한 아문센이 영국정부의 풍부한 자금지원을 받은 스콧일행을 오히려 앞질러서 남극점 정복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문센일행과 달리 스콧일행이 늦게 남극점에 도착한 이유는 몇가지 있는데, 스콧일행은 근본적으로 남극탐험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아문센일행과 달리 스콧일행의 대원들은 대부분 스키를 탈 줄도 몰랐고, 갖고갔던 전동 썰매차도 금방 고장났으며,
썰매개들은 제대로 훈련이 되어있지않고 제멋대로 움직여서, 식량과 연료들을 운반하는 역할을 잘해내지 못해서, 대신 대원들이 직접 식량과 연료를 나르는 등 스콧일행은 최악의 조건에서 레이스를 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거의 준비가 되어있지않았던 스콧일행은 아문센일행보다 34일 늦게 남극점에 도착하는 바람에, 최초 남극점 정복의 명예를 아문센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사전에 치밀한 전략과 과학적인 사고로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 레이스를 펼친 아문센일행과 과학적인 지식없이 오로지 대영제국의 해군장교라는 오만과 혈기만을 갖고 무모하게 레이스를 펼친 스콧일행의 남극점 정복경쟁은 아문센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고, 반면 패배자는 엄청나게 쓰라린 댓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영국탐험가 스콧은 아문센에게 남극점 최초정복의 영광을 빼앗긴 후에도, 그의 행로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남극점에 도착한 후, 다시 1,400km 거리에 있는 베이스캠프로 귀환하는 것도 매우 험난한 여정인데,
스콧일행은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크레바스’라는 낭떠러지에 대원들이 떨어지는 등 커다란 시련을 겪게됩니다.
남극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크레바스’인데, ‘크레바스’는 빙하의 갈라진 틈 사이에 수백~수천킬로미터 깊이의 낭떠러지 얼음구덩이였습니다.
이 ‘크레바스’가 눈으로 수북히 덮여있어서, 구덩이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발을 잘못 디디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길 낭떠러지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게 되어 살아남기 힘든 위험천만한 곳입니다.
귀환하는 과정에서, 스콧 일행 중 세명이 이 ‘크레바스’에 빠졌는데, 그렇지만 다행히 그 크레바스가 깊지 않았기 때문에, 빠진 대원들은 다른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곧바로 지상위로 기어올라올 수 있었지만, 그 댓가로 그 대원들은 커다란 부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스콧은 어깨부상을 입었고, 월슨은 치명적인 다리부상, 그리고 에반스는 뇌진탕 증상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대원 여러명의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1,400km나 되는 베이스캠프로 귀환하는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남극대륙의 거대한 크레바스
귀환하는 과정에서 엄청 고생을 많이 한 스콧일행은 자신들의 베이스캠프로부터 250km 떨어진 지점까지 간신히 도착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한 상태에서 스콧을 포함한 대원들은 며칠동안 계속 불어온 폭풍 ‘블리자드’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 완전 굶주림과 탈진한 체로 결국 전원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악천 후속에서도 무려 1,100km를 걸어왔던 스콧일행은 베이스캠프를 불과 250km 남긴 상태에서, 부상과 굶주림, 탈진으로 인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렇지만, 남극점을 먼저 정복한 아문센 일행은 풍족한 식량과 성능좋은 개썰매를 타고서 아주 손쉽게 자신들의 베이스캠프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아문센일행은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레이스에서도 왔던 길을 정확히 찾아갈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각 지점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깃발을 꽂아두었기 때문입니다.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고, 탐험전략을 잘 세운 아문센은 스콧일행보다 먼저 남극점을 정복하는 쾌거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귀환하는데 성공했을 뿐만아니라, 대원들 한명의 희생없이 전원이 자신들의 나라 노르웨이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과 영국 탐험가 스콧은 모두 똑같은 시기에 남극점 정복에 도전했지만,
아문센이 스콧에 앞서서 최초로 남극점 정복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룩했을 뿐만아니라, 대원들 한명도 죽지않고 자기 나라로 무사히 돌아가는데도 성공했습니다.
반면, 영국탐험대 스콧일행은 남극점 최초 정복에 실패했을 뿐만아니라, 스콧을 포함한 대원 5명이 남극의 거친 눈보라 속에서 사망하는 등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스콧일행이 남극점에 도착한 후 귀환하는 길에 엄청난 악천후를 만났을 뿐만아니라, 이미 식량과 연료가 바닥이 났기때문에 기지까지 돌아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스콧일행은 귀환 길에 크레바스에 떨어졌는데, 간신히 기어올라온 에반스는 머리에 심한 충격으로 뇌손상으로 사망했고, 동상으로 다리를 다친 오츠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보워스와 윌슨은 식량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오랫동안 굶주린 상태에서 기력이 쇄진해서 둘 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존한 대장 스콧은 식량이 바닥이 난 상태에서 생으로 씹어먹던 홍차잎이 모두 소진된 후, 3월 29일 굶주림과 동상으로 결국 동사(凍死)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사망한 5명의 스콧 대원들은 남극점을 돌고 귀환하는 길에 자신들의 기지를 불과 250km 남겨놓은 지점에서 전부 사망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8개월이 지난 후에, 스콧대원들의 시신은 영국에서 파견한 구조대원들에 의해 모두 수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남극 탐험경쟁에 있어서 남겨진 뒷이야기가 있어서 소개하는데요.
원래 먼저 남극점에 도착한 아문센일행은 자신들보다 나중에 도착할 스콧일행이 식량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 그 남극점 텐트속에 스콧일행이 먹을 수 있도록 일정분량의 식량과 털가죽등을 남겨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뒤늦게 남극점에 도착한 스콧일행은 그곳에 아문센일행이 남겨놓은 식량과 털가죽피복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 아문센의 예상대로 스콧일행은 식량과 연료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식량이 거의 모두 바닥난 상태였지만, 스콧일행은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곳에 남겨놓은 아문센의 식량을 하나도 손도 대지않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대영제국의 자랑스러운 영관급 장교출신 스콧이 초라한 신생국 노르웨이의 탐험가가 남겨놓은 식량에 손을 대는 것을 대단히 큰 수치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알량한 자존심과 국뽕 때문에 아문센이 남겨놓은 식량에 손도 대지않고 귀환길에 올랐던 이들 스콧일행은 돌아오는 길에 악천후를 만나 부상을 당한 후, 식량고갈로 인해 다섯명 모두 굶어죽고 말았지요.
만일 남극점에 도착했을 때, 스콧이 그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아문센이 남겨놓은 식량을 사용했더라면, 대원 전원이 사망하는 불행한 일은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남극점 정복 경쟁을 벌였던 스콧(왼쪽)과 아문센(오른쪽)
아뭏튼, 아문센과 스콧의 남극탐험이 토대가 되어서, 1959년 12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나라들이 남극을 ‘인류공동의 땅’으로 규정하는 남극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후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남극에 연구기지를 설립해서 꾸준한 연구조사 활동을 벌여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극을 인류공동의 땅으로 규정한 남극조약은 2048년도에 만료된다고 하며, 그 이후에는 남극은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 소유권을 얻기위해서 치열하게 각축을 벌일 수 밖에 없는 미완의 대륙으로 남게될 운명입니다.
특히 남극에는 석유가 인류 전체가 100년 이상 사용해도 남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양이 매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석유, 천연가스, 광물자원 등 엄청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남극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치열한 소유권경쟁을 벌이는 뜨거운 화약고가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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