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의 출연영화 동영상과 사망이유, 린다 에머리
70년대 홍콩 무술액션스타 이소룡의 전기와 영화 정무문, 부인 린다 에머리
이소룡 1940년 11월 27일~1973년 7월 20일
70년대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엄청난 스피드와 절도있는 무술액션, 폭발적인 발차기기술을 발휘해서 무술영화의 극치를 선보였던 위대한 홍콩의 무술액션스타가 있었으니, 바로 이소룡이다.
이소룡은 그 이전까지 전혀 없었던 대단히 기술적인 격투액션과 화려하고 절도있는 무술액션을 선보여주면서,
많은 관객들로부터 가장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70년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무술스타였다.
그 전까지는 마치 동네 닭싸움 같았던 액션영화들을 이소룡이 나타남으로써, 테크니컬하고 세련된 무술액션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고,
이소룡은 단순한 권법영화를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위대한 무술스타였다.
이소룡이 출연해서 무술액션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그의 영화들은 홍콩과 한국은 물론 아시아전역에서 엄청난 히트를 쳤고,
특히 이소룡의 영화 ‘정무문’과 ‘용쟁호투’는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흥행돌풍을 일으키면서, 이소룡은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우뚝 솟아올랐다.
2006년 미국 한 영화매체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액션스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는데,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액션스타로 단연 이소룡이 압도적인 표차이로 1위에 뽑혔다고 한다.
이소룡은 원래 홍콩배우였고 이소룡이 사망한지 30년이 훨씬 지난 시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수많은 허리우드 액션스타들을 제쳐놓고 수십년 전에 죽은 이소룡을 1위로 뽑았다는 것은
이소룡이 미국인들의 가슴에 얼마나 가슴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그런데 참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신은 뛰어난 천재는 일찍 데려가신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소룡은 1973년도 하늘 높이 올라갈 정도로 인기절정의 시기에 매우 의혹스러운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고야 만다.
홍콩스타에서 아시아의 스타로 떠올랐고, 아시아의 스타에서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솟아올랐는데, 그 인기절정의 시기에 안타깝게도 이소룡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전세계의 팬들에게 안타까움과 미련을 남겨놓았다.
1971년 이소룡이 홍콩영화계에 데뷔한 후, 그가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올라선는 데에는 4편의 영화들 출연이 있었다.
이 오직 네편의 영화로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완벽한 무술실력으로 젠세계인들의 큰사랑을 받았던 홍콩의 무술영웅 ‘이소룡’!
오늘은 이소룡의 활동과 그의 사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 이소룡의 생애와 영화
이소룡은 원래 홍콩사람으로 희극배우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적에 여러편의 영화에 아역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소룡은 원체 혈기왕성하고 주관이 강한 성격에다가 싸움실력도 좋아서, 주변에 적들이 많이 있었다.
이소룡이 한창 혈기왕성했던 청소년시절에 홍콩의 한 댄스클럽에서 친구들과 춤을 추다가 홍콩깡패들과 시비가 붙었고, 무술로 다져진 체력을 갖고 있었던 이소룡은 시비를 거는 깡패 몇몇과 싸움을 벌여서 그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그런데 이 폭력사건으로 이소룡은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까지 밭기도 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이소룡의 인생에 중대한 전기를 가져다준 사건이 된다.
이소룡에게 얻어맞은 깡패들은 바로 홍콩의 거대한 조직폭력단의 일원이었고, 그들이 곧 이소룡에게 보복으로 살해하려한다는 정보가 날아 들어왔다.
당시 이소룡은 어렸을 적부터 영춘권의 대가인 엽문으로부터 중국무술 영춘권을 배워서 무술과 싸움에 일가견이 있었고,
홍콩에서 벌어진 학생복싱선수권대회에도 출전해서 영국선수를 KO시킨 적도 있을 정도로 싸움과 격투를 잘하는 편이었다.
원래 옛날부터 홍콩에는 깡패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소룡이 아무리 싸움을 곧발 한다고 해도, 혼자서 폭력조직과 싸움을 벌이는 것은 섶을 지고 불길속으로 뛰어드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인지한 이소룡의 아버지는 1968년 홍콩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이소룡을 독립시키려고 미국으로 보내버린다.
이것이 이소룡이 미국으로 가게된 이유였다.
19세때 미국으로 건너간 이소룡은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면서, 워싱턴대학에 다니며 철학을 공부하면서, 쿵푸도장을 열어서 운영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같은대학의 클라스메이트인 린다 에머리를 만나 평생 가약을 맺었고, 아들 브랜든 리와 딸 섀넌 리를 낳는다.
이소룡은 원래 홍콩에 있을 때, 중국전통무술인 영춘권과 공력권, 홍가권등 여러무술을 배워서 무술에 정통해 있었는데,
중국무술의 치명적인 약점이 발차기라고 판단했는데, 중국무술은 주로 주먹과 손을 위주로 사용하는 권법중심의 무술이었기 때문이다.
이소룡은 중국무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 위싱턴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이준구관장을 찾아가서 태권도를 배우면서, 태권도의 발차기기술을 연마해나갔다.
그리고 발차기기술이 경지에 이른 후, 이소룡은 쿵푸와 태권도, 권투, 레슬링등이 혼합된 새로운 무술 절권도를 창시했고,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 등 3곳에 절권도장을 열어 운영해나갔다.
이렇게 미국에서 자신만의 절권도장을 운영해나가면서 무술인으로 살아가던 이소룡이었지만, 역시 피는 못속인다고 하던가!
원래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도 경극배우였고, 이소룡도 홍콩에 있을 때에 아역배우로 활동하면서 23편의 영화들에 출연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이소룡은 무술가로서만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화려한 무술액션을 영화에 접목하여 멋진 무술액션을 펼치는 무술영화배우를 꿈꾸게 된다.
1966년도에 롱비치에서 개최된 가라데 토너먼트대회에 참여해 멋진 절권도 시범경기를 보여주었던 이소룡은 많은 무술가와 영화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버렸다.
이 가라데 토너먼트대회에 시범선수로 출전한 이소룡은 수많은 무술인들과 영화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인치 권법가격을 선보여서 큰 환호를 받게 되었다.
이소룡의 1인치 가격은 상대방과 딱 1인치 떨어진 거리에서 주먹이나 당수를 가격해서 상대방은 단 한방에 쓰러뜨리는 고난도 기술이었다.
이 대회에서 이소룡은 다른 무술인들이 전혀 하지못하는 1인치 가격으로 2m 거구의 남성을 한방에 KO시키는 멋진 시범을 보여주었고,
또한 이소룡은 두터운 송판을 1인치 손날가격으로 단번에 박살내는 멋진 시범도 보여주어서, 참석한 수많은 관객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1967년도에 이소룡은 자신의 멋진 시범을 보고 감탄한 영화관계자 윌리엄 도저의 추천으로, 미국의 TV시리즈물 ‘그린 호넷트’에 출연하면서 연기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소룡은 1971년도엔 또다른 TV시리즈물 ‘롱스트리트’에 출연하며 연기활동을 이어갔지만,
동양인이라는 차별과 천대 때문에 이소룡은 미국방송에서 좋은 배역을 맡지못했을 뿐아니나, 단역이나 만년 조연의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70년대 이 시기에는 미국에서 중국인이나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엄청 심했던 시기였고, 동양인은 결코 미국방송이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1969년도 미국에서 이소룡이 유일하게 출연한 영화 ‘말로우’에서도 이소룡은 주인공 제임스 가너와 싸우다가 허망하게 죽는 짧은 단역을 맡았을 뿐이다.
결국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데에 커다란 한계가 있다고 느낀 이소룡은 1971년 무협영화의 본산인 홍콩으로 건너가서 영화사의 문을 두드린다.
◆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들
홍콩에는 대표적인 영화사로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가 있었다.
홍콩으로 건너간 이소룡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사인 ‘쇼브라더스’사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쇼브라더스’의 문은 매우 높았고, 이소룡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를 거절했다.
‘쇼브라더스’는 나중에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거듭날 이소룡의 진가를 너무나도 몰라보는 엄청난 실수를 범했다.
‘쇼브라더스’사에서 거절당한 이소룡은 당시 자본력이 매우 취약한 신생영화사인 ‘골든하베스트’사로 찾아갔고,
골든하베스트사의 레이몬드 초우회장으로부터 스카웃제의를 받고 ‘골든하베스트’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영화배우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골든하베스트’로 들어간 이소룡은 1971년도에 영화 ‘당산대형’의 주인공을 맡아서 멋지고 화려한 발차기기술을 선보이면서, ‘당산대형’의 무술영화로서의 완성도를 올려놓았다.
수많은 관객들은 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이소룡의 초스피드하고 절도 있고 화려한 무술액션에 완전 매료되어 큰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고, 영화 ‘당산대형’은 홍콩에서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또한 1972년도에 이소룡이 두번째로 출연한 영화 ‘정무문’은 억울하게 죽은 스승의 원수를 갚는 주인공 진진의 절개높은 의리와 복수를 그린 영화였는데,
이소룡의 화려하면서 뛰어난 무술액션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이 영화는 탄탄한 이야기전개와 짜임새 있는 구성, 그리고 이소룡에 신기에 가까운 정도로 절도있고 박진감 넘치는 무술연기로 인해서,
아시아의 수많은 관객들로부터 큰 환호를 받았고, 아시아에서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우게 된다.
또한 1972년도에 이소룡이 직접 제작, 시나리오, 감독, 주연 등 1인 4역으로 만들어진 이소룡의 세번째 영화 ‘맹룡과강’이 상영되었는데,
미국의 가라데 챔피언출신인 척 노리스와 콜롯세움에서의 다이나믹하고 멋진 최후의 결투씬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큰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면서, 이 영화 역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소룡의 네 번째영화인 ‘용쟁호투’는 1973년도에 골든하베스트사와 미국의 워너브라더스사의 합작으로 만들어졌고,
이 영화에서 이소룡은 무술감독과 주인공을 맡아서, 한층 더 차원 높은 멋지고 환상적인 무술액션을 선보였다.
이소룡은 영화 ‘용쟁호투’에서 마약밀매와 폭력을 일삼는 홍콩폭력조직단의 아지트로 직접 들어가서,
이 폭력조직단원들과 피비린내 나는 대결을 펼치면서, 핵심지도부를 일망타진하는 멋지고 수준 높은 화려한 무술액션을 펼쳐보여서, 전세계의 관객들을 열광시킬 정도로 이 영화는 전세계적인 엄청난 흥행성공을 이루어 내었다.
이 영화 ‘용쟁호투’는 그 해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홍콩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신기록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용쟁호투’가 벌어들인 수익은 무려 2억 달러(우리돈 2,200억원)에 달하며,
이 영화제작에 들어간 돈은 고작 85만불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영화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를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겠다.
즉 영화 ‘용쟁호투’는 고작 9억 3천만원의 비용을 들여서 2,200억원을 벌어들인 셈인데,
이 영화는 홍콩역사상 최고의 흥행수익을 올린 영화로 기록되었고, 이소룡의 ‘용쟁호투’는 홍콩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소룡은 홍콩으로 건너가서 2년 동안 고작 네편의 영화들에 출연함으로써 대단한 흥행신화를 만들어냈고,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우뚝 솟아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들이 엄청난 흥행성공을 이루어냄으로써, 70년대 초반 당시 자본이 매우 열악했던 신생영화사였던 골든하베스트사는 세계적인 대형영화사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소룡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무술스타이자, 무술영웅으로 급부상했던 인기절정의 시기에, 그는 돌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하고 만다.
◆ 이소룡의 사망원인
촬영을 마친 영화 ‘용쟁호투’의 영화가 개봉되기 3주전에, 갑작스럽게 이소룡의 사망소식이 전혀져서 홍콩은 물론 전세계인들을 경악시켰다.
1973년 7월 20일 홍콩 구룡반도에 있는 이소룡의 애인 베티 팅페이(정패)의 맨션에서, 이소룡이 원인모를 이유로 갑작스럽게 쓰러져 사망하고 만 것이다.
이소룡은 만 32살(우리나이 34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애인 정패의 집에서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고, 전세계의 수많은 팬들에게 큰 슬픔과 아쉬움을 남겨놓았다.
이소룡의 사망원인은 그가 죽은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수많은 논쟁과 의혹들을 남겨놓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그렇게 강했던 이소룡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소룡의 석연치않은 죽음에 커다란 음모가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가기도 했다.
한창 젊은 만 32세의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소룡의 진짜 사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소룡이 사망했던 시기는 1973년 7월 20일날 오후 10시 30분에서 11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에 이소룡은 자신의 마지막 영화이자 다섯번째 영화인 ‘사망유희’의 40분 분량의 격투씬을 촬영해놓은 상태였다.
1973년 7월 20일날 이소룡은 낮에 자신의 애인 정패(베티 팅페이)의 맨션에서 자신의 마지막영화인 ‘사망유희’에 대해 레이몬드 초우와 상의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때가 되어 레이몬드 초우는 맨션을 나갔고, 이 맨션에는 이소룡과 애인 정패 단 둘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날 밤 이소룡은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면서 정패에게 진통제를 달라고 요구했고, 정패는 이소룡에게 진통제약을 주었으며, 이소룡은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소룡이 진통제를 먹고 쓰러진 때는 1973년 7월 20일 밤 10시 30분경이었고, 놀란 정패가 경찰에 전화해서 앰블런스가 와서 이소룡을 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이송시켰지만, 퀸 엘리자베스 병원에 도착한 이소룡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소룡이 사망한 시기는 1973년 7월 20일날 밤 10시 30분부터 병원에 도착한 밤 11시 사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소룡이 죽기 직전에 애인 정패가 준 진통제를 먹었다는 점에서 정패가 이소룡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으며,
정패는 홍콩의 수많은 이소룡팬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이소룡의 죽음 뒤에는 애인 정패의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애인 정패(베티 팅페이)가 이소룡과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
독약을 음료수에 타 먹여서 이소룡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정패(베티 팅페이)
당시 정패도 잘나가는 젊은 여배우였는데, 그녀는 이소룡에게 반해서 이소룡과 내연관계로 지내왔지만, 이소룡이 부인과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라는 점 때문에 심적부담감이 컸다고 하며,
또한 정패가 새로운 애인이 생겨서 부담스러운 이소룡과의 관계청산을 위해서 그에게 독약을 먹여 죽게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문에 대해 정패는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대중과 매스컴의 심한 비난을 받아야했던 정패는 결국 몇 년 뒤에 산속의 절로 들어가서, 속세와 인연을 끊은 채,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이소룡의 죽음에 관련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됐던 정패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깊은 산속 절에 들어가서 거의 10년 동안 칩거생활을 해왔으며, 그동안 계속 독신으로 살아왔다.
아내 린다 에머리와 이소룡
이같은 정패의 독살설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은 그 근거가 매우 미약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당시 맨션에서 이소룡에게 정패가 준 약은 단지 평범한 진통제 였고, 그 진통제는 홍콩에서 흔하게 쓰이는 아스피린의 일종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소룡 사망 당시 이소룡부검을 담당했던 의사도 이소룡이 복용한 약은 진통제 ‘에콰제’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바가 있었다.
정패는 단지 이소룡의 요구에 따라서 평범한 진통제를 주었을 뿐인데, 대중적으로 너무나도 큰 인기를 끌었던 이소룡이 죽었다는 크나큰 안타까움 때문에, 정패가 희생양이 되어서 대신 많은 욕을 먹어야만 했다.
따라서 정패가 준 약이 진통제라는 사실이 부검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정패는 이소룡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소룡이 죽은 이유에 관한 두번째 가설은 ‘쇼브라더스’사에서 고용한 살인청부업자에 의한 암살설이다.
당시 홍콩에서 가장 큰 영화사는 단연 ‘쇼브라더스’사였고, 이 쇼브라더스사가 홍콩과 동남아시아의 영화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을 정도로 가장 잘 나가는 영화사였다.
그 유명한 왕우의 ‘외팔이검객’이나 리칭의 ‘스잔나’ 영화들도 모두 쇼브라더스사에서 제작해서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들이었다.
이렇게 쇼브라더스사는 60년대부터 시작해서 70년도까지 수많은 검객영화들을 만들면서 최고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이소룡이 자신의 라이벌영화사인 ‘골든 하베스트사’에 들어가면서, 쇼브라더스사가 크게 위축되는 판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골든 하베스트사가 만든 이소룡의 영화들이 계속해서 흥행돌풍을 일으키면서, 상대적으로 쇼브라더스사의 영화들이 점점 흥행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소룡 때문에, 홍콩과 동남아시아에서 최고의 영화사라는 지위를 상실할 상황에 처하게 되자, 큰 위기감을 느꼈던 쇼브라더스사의 고위층이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서 이소룡을 암살했다는 가설이다.
그렇지만 이 가설도 별로 설득력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소룡이 미국에서 홍콩으로 건너가서 제일 먼지 문을 두드린 곳은 바로 쇼브라더스사였기 때문이다.
제발로 걸어들어오는 이소룡을 스스로 걷어차 놓고, 나중에 이소룡이 경쟁사로 가서 톱스타가 되니까, 그를 죽였다는 것은 너무 말이 되지 않고,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세번째 가설이 있는데, 이소룡집안에서 이소룡의 할아버지의 묘자리를 다른 곳으로 이장했는데, 그 이장한 곳은 원래 ‘신동’이라고 하는 풍수지리의 천재아이가 묻혀있던 묘자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풍수신동’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머리가 천재였던 이 아이는 12살의 어린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이 아이는 죽기 전에 자신의 묘자리 주변에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묘자리를 만들지 말 것을 경고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소룡집안에서 이 풍수신동의 묘자리가 최고로 좋은 명당자리였기 때문에, ‘풍수신동’의 경고를 무시하고, ‘풍수신동’의 묘자리 바로 옆에 이소룡의 할아버지 묘자리를 새로 조성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소룡 할아버지 묘자리를 이전하고 난 후, 이소룡 아버지인 이해천이 잠을 잘 때마다, 꿈속에서 ‘풍수신동’이 나타나서
‘네가 내 경고를 무시하고 내 묘자리터에 너의 아버지 묘자리를 만들었으니,
이제부터 내가 너의 자손들에게 저주를 내리겠다, 앞으로 너의 자손 중에 장자들을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 것이고,
너의 손자는 30세 이전에 죽게될 것이다’라고 저주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런 꿈이 너무도 사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던 이해천은 큰 우려를 한 나머지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 아들 이소룡을 미국으로 멀리 이민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풍수신동’의 악령의 서려있는 홍콩을 떠나서 멀리 미국으로 떠나갔던 이소룡이었지만, 이소룡은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고야 말았고,
결국 이소룡은 젊은 나이에 석연찮은 이유로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풍수신동’의 저주가 들어맞은 꼴이 됐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또다시 일어났다. 이소룡의 맏아들이 바로 브랜든 리이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이소룡으로부터 절권도를 배웠던 브랜든 리는 나중에 장성해서,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진출해 유명한 액션스타로 성공할 수 있었다.
브랜든 리는 1993년도에 영화 ‘크로우’ 촬영할 당시에, 상대방이 쏜 총기오발사고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고, 이 때 그의 나이가 29세였다.
‘크로우’에서 상대방이 브랜든 리에게 장난감총을 쏘는 씬이 있었는데, 그 장난감총에 진짜총알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이 브랜든 리의 죽음은 아버지죽음만큼 정말로 미스테리한 죽음이 아닐 수가 없다.
풍수신동이 꿈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해천의 손자 브랜든 리가 30세 이전의 나이에 사망하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혼령 ‘풍수신동’이 이소룡 아버지 이해천에게 꿈속에서 했던 저주의 말이 그대로 실현되고 만 것이다.
이소룡사망에 관한 네번째 가설로, 이소룡은 뇌부종으로 인한 쇼크로 사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소룡이 진통제로 먹은 에콰제가 큰 자극을 일으켜서, 뇌부종이 악화되어 그 충격으로 사망한 것이라고 한다.
이소룡시신 부검에 참여했던 로버트 티어즈박사는 부검경력이 10만건에 이를 정도로 부검에 있어서는 베테랑이였다.
이소룡이 쓰러진 후, 병원에 실려와서 사망하게 되자, 곧바로 부검을 실시했는데, 그당시 이소룡의 뇌가 퉁퉁 부어있었다고 한다.
티어즈박사 등이 이소룡의 뇌를 부검해서 정밀조사를 벌인 결과, 이소룡은 원래 뇌종양을 앓은 흔적이 있었고, 이소룡이 죽기 전에 먹은 진통제속에 들어있던 에콰제성분이 위속에서 나왔다고 한다.
전문부검의들이 징밀부검 결과, 이소룡은 평소에 앓고있던 뇌종양이 진통제로 먹었던 에콰제성분 때문에 큰 자극을 받아서, 뇌부종이 발생하였고, 그 뇌부종의 충격으로 뇌출혈을 일으켜서 이소룡은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즉, 이소룡의 사인은 에콰제 때문이라기 보다는, 평소에 앓아왔던 뇌종양이 악회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겠다.
이소룡은 외부에는 숨겨왔지만, 평소에 뇌종양을 앓아오고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오랫동안 무술인으로서 살아왔던 이소룡은 수많은 무도가들로부터 도전을 많이 받아왔던 이소룡은 크고 작은 여러건의 싸움에 휘말린 적이 많았다.
미국에서 쿵푸도장을 열었을 때에 외국인들에게 쿵푸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쿵푸대가로부터 도전장을 받았고, 이 대결에서 이소룡은 도전자 쿵푸고단자를 3분만에 주먹과 발차기를 써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이것은 이소룡의 부인 린다 에머리가 직접 들려주었던 이야기이다.
또한 이소룡은 역시 미국 시애틀에서 절권도장을 운영하고 있을 때에, 근처에 있는 가라데도장의 가라데사범으로부터 도전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 가라데고단자와의 대결에서 이소룡은 단 10초만에 강력한 옆차기 한방으로 그를 KO시키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이소룡 전기문에 나왔던 내용이다.
이렇게 이소룡은 단지 영화속에서 무술시늉만 하는 은막스타로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실전무도의 대가였고 실전에서도 숱한 우승경험을 갖고있는 인물이었다.
이처럼 이소룡은 일대일 싸움에서는 모두 다 완벽하게 승리했다.
그런데 이렇게 강했던 이소룡도 집단린치를 당했던 적이 있었다. 이소룡이 1972년도 하반기에 영화구상을 하기 위해서,
제임스 코반과 함께 LA공항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몽둥이를 든 깡패패거리들로부터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10여명의 깡패들이 집단으로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무방비상태에 있었던 이소룡과 제임스 코반에게 주먹과 몽둥이찜질을 가했으며,
워낙 무방비상태에서 이뤄진 기습공격이라서 이소룡도 어쩔 수 없이 집단린치를 당하고만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무도가라고 하더라도 10명이 몽둥이를 들고 집단으로 달려드는데 당할 수 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이소룡은 머리에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아마도 이때의 몽둥이찜질의 충격으로 뇌종양이 생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소룡은 홍콩에서 영화촬영을 할 때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촬영을 중단하고 LA에 있는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그 검찰결과 이소룡은 심한 뇌종양으로 6개월 시한부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었다고 한다.
이 때가 이소룡이 영화 ‘용쟁호투’를 촬영을 시작할 시기였고, 그때로부터 반년 가량이 지난 7월 이소룡은 실제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소룡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죽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소룡의 부인은 이소룡이 머지않아 뇌종양이 악화되어서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이 자신의 부인 린다 에머리를 놔두고도 홍콩여배우 정패와 바람을 피웠는데도, 린다 에머리가 눈감아주었던 것은 그녀는 이소룡이 6개월의 시한부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있었기에, 그가 죽기 전에 원없이 세상을 즐기게 해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여태까지 이소룡의 죽음에 대해 숱한 의혹들이 많이 제기되었지만, 이소룡의 죽음의 진짜이유는 ‘뇌부종발생으로 인한 쇼크사’가 정답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이소룡 시신은 이소룡이 원래 살았던 시애틀의 레이크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아들 브랜드 리의 시신도 아버지 이소룡의 묘지옆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 이소룡부인 린다 에머리 근황과 재혼
그렇다면 이소룡의 부인 린다 에머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린다 에머리 사진
이소룡이 사망한 후에, 이소룡부인 린다 에머리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홍콩에서 다시 미국 시애틀로 이주했다.
이소룡부인 린다 에머리는 이소룡이 죽은지 15년이 지난 후인 1988년도에 탐 블리커와 재혼해서 함께 살았었는데, 재혼남 탐 블러커와는 고작 2년만에 파경을 맞았다고 한다.
린다 에머리가 탐 블러커와 이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린다 에머리가 죽은 남편 이소룡을 잊지못하고, 그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탐 블리커와 이혼한 린다 에머리는 다시 91년도에 부동산업자인 브루스 캐드웰과 재혼을 해서 지금까지 함께 잘 살아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브루스 캐드웰과 재혼한 린다 에머리는 자신이 이름에 이소룡의 성을 함께 넣어서 ‘린다 리 캐드웰’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왔을 정도로 이소룡을 오랫동안 잊지못했다고 한다.
두 번째로 재혼한 남편 캐드웰은 이소룡을 그리워하는 린다 에머리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아주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진 남편이라고 하며, 두사람이 서로 이해해주고 배려하면서, 지금까지도 금슬좋게 잘 살고있다고 한다.
현재 린다 에머리는 미국 아이다호주의 보이즈에서 남편 캐드웰과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이소룡이 생전에 전해준 가르침과 그의 무도가정신을 기리고 후대에 전수해주기 위해서, ‘브르스리 재단’을 설립해서 운영해오고 있다고 한다.
이소룡의 영화 ‘정무문’의 마지막대결 장면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