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열, 리칭, 악화 주연의 중국무협영화 협사행내용줄거리, 홍콩미녀여배우 리칭의 사망원인, 고독사, 70년대 고전 홍콩무협영화 추천

 

우리나라에서 70년대는 고전무협영화나 무술권법영화가 최고의 인기를 끌던 장르였습니다.

70년대에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관객들이 홍콩무협영화를 보기 위해서 서로 앞다퉈서 극장가로 몰려갔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홍콩의 최대자본의 영화사인 쇼브라더스사에서 제작한 무협영화들이 최고의 히트를 치던 시기였습니다.

 

70년대에는 특히 쇼브라더스사에서 제작한 검객무협영화들이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붐을 형성했는데, 그 중에서도 나열, 왕우, 리칭, 정패패 등이 주연을 맡은 무협검객영화들이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흥행을 주도해나갔습니다.

 

70년대 초반 홍콩 쇼브라더스사의 대표적인 무협스타 나열과 홍콩의 대표적인 미녀스타 리칭, 그리고 악화가 열연한 ‘협사행’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협사행’은 당시 홍콩무협영화의 정수를 보여준 대단한 걸작품입니다.

 

홍콩의 대표적인 무협배우 악화가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인 재상을 죽이는 협객 비도왕으로 열연을 펼쳤고, 로례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나열은 멋지고 화려한 검술액션을 선보이면서 악화의 뒤를 쫒는 포도청무사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악화가 맡았던 비도왕 쿠잉은 사악한 탐관오리들을 제거하는 민중들의 영웅이자, 의로운 협객입니다. 그렇지만 악화가 맡았던 비도왕 쿠잉이 한나라의 재상을 암살했기 때문에, 포도청관리인 판이의 역을 맡은 나열이 살인범 악화를 붙잡기 위해서 그의 뒤를 끝없이 쫒아갑니다.

 

그리고 여배우 리칭은 이 영화에서는 여검객이 아닌 여성스럽고 가녀린 여인의 역할을 맡아 비도왕 악화를 사모하는 청순미 넘치는 미모로 애절하고도 멋진 연기력을 선보이면서, 수많은 남성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습니다.

 

여관집의 딸 슈니앙으로로 분한 리칭은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무도한 탐관오리들을 처단하면서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던 시대적 영웅이자, 의로운 협객 쿠잉 즉, 악화를 짝사랑하는 가녀린 여인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사악한 탐관오리들을 처단하면서 살인범으로 몰려 숨어지내는 비운의 영웅 악화, 그리고 살인범 악화를 붙잡기 위해서 그의 뒤를 끝없이 쫒아가는 포도청무사 나열, 그리고 의로운 협객 악화를 짝사랑하면서 그의 곁에 영원히 머무르고자 하는 순정의 여인 리칭의 삼각관계가 아름답게 그려지는 고전 무협영화가 바로 ‘협사행’이지요.

 

영화 ‘협사행’은 범인을 뒤쫒는 사나이 나열, 살인을 저지르고 쫒겨다니는 영웅 악화, 비운의 영웅 악화를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가녀린 여인 리칭이 서로 삼각관계를 이루면서 멋지고 화려한 액션을 선보여준 정통무협영화입니다.

 

서로 숱한 결투를 펼치지만 끝내 승부를 보지못하는 나열과 악화는 처음에는 서로를 죽여야되는 원수의 관계였지만,

나중에는 두사나이 사이에 야릇한 우정이 싹트면서 급기야 나열은 살인범 악화의 체포를 포기하고 자신의 벼슬을 내던지는 의리의 사나이의 모습을 전격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던 걸작품입니다.

 

이 고전무협영화 ‘협사행’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개봉되지 않았고, 홍콩과 동남아시아에서 개봉되면서 공전의 대히트를 친 영화입니다. ‘협사행’이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지 않은 이유는 엄청나게 높은 수입단가 때문입니다.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거의 주름잡다시피할 정도로 수많은 무협영화들을 제작하고 히트시킨 쇼브라더스사에서 갑질을 부려 영화 ‘협사행’의 수입단가를 터무니없이 높은 단가를 책정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배급사에서 이 영화의 수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70년대 당시 홍콩무협영화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영화 ‘협사행’의 여주인공 리칭에 대한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71년대도에 홍콩여배우 리칭은 엄청난 절정의 인기를 끌었고, 우리나라에도 그녀의 영화 ‘스잔나’가 개봉되어 대히트 치면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습니다.

 

리칭은 60~70년대에 활동한 홍콩의 대표적인 미녀여배우로서, ‘도검’ ‘빙천협녀’ ‘아랑곡의 혈투’ ‘철수무정’ ‘보표’ ‘스잔나’ 등 수많은 걸작품에 출연해서 당시 아시아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인기를 톱스타였습니다.

 

 

특히 67년도에 제작된 영화 ‘스잔나’를 비롯한 수많은 홍콩 무협영화에 출연해서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남아에서 큰 인기와 명성을 쌓으면서 그 시대를 풍미했던 홍콩의 요정같은 미녀여배우입니다.

 

아뭏튼 리칭은 60~70년대에 홍콩영화계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렸던 최고 인기여배우였습니다. 특히 리칭은 67년도에 출연한 멜로영화 ‘스잔나’로 아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영화 ‘스잔나’에서 리칭은 뇌종양에 걸려 6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슬프고도 가련한 소녀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내면서 영화 ‘스잔나’는 엄청난 디히트를 치게되었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71년도에 이 영화가 상영되어 29만명 관객을 동원하면서, 그 해 최다 관객동원의 금자탑을 세웠던 영화입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리칭신드롬’과 ‘스잔나신드롬’현상을 불러일으켰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리칭은 1970년대 전반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인기스타였고, 동시에 아시아의 최고미녀스타였답니다.

 

그렇게 한국의 수많은 올드팬들의 마음속의 연인으로 자리잡았던 리칭은 72년도에 한국의 신필름 대표인 신상옥감독에게 스카우트되면서 한국으로 건너와 무려 세편의 영화에 출연하기까지 합니다.

 

리칭은 1972년도에 한국으로 건너온 후 영화 ‘리칭의 여선생’ ‘반혼녀’ ‘흑야광주’라는 세편의 신상옥감독 영화에 출연했고, 이 영화들은 우리나라에서 공전의 대히트를 치면서, 우리나라에서의 리칭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올라가게 된답니다.

 

특히 신성일과 함께 출연한 영화 ‘리칭의 여선생’은 우리나라에서 공전의 대히트를 치면서 리칭은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스타로 각광받게 된답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렇게 60~70년대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미녀여배우 리칭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화 ‘스잔나’와 ‘철수무정’ ‘아랑곡의 혈투’ 등 수많은 걸작품에 출연해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절정의 미녀스타 리칭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하는데,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 리칭의 일생과 독신으로 살게 된 이유 -

 

그럼, 지금부터 리칭이 과거 살아온 이력과 리칭이 불행해진 이유와 독신으로 살게된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리칭은 1948년도에 상하이에서 출생했지만, 부모님을 따라서 곧바로 홍콩으로 이주했습니다.

소녀시절 때부터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리칭은 당시 홍콩과 아시아의 최대자본의 영화사인 ‘쇼브라더스사’에서 개최한 공개오디션에 응모하여, 무려 50 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히 쇼브라더스의 연극학교에 입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쇼브라더스사의 연극학교에는 리칭 외에도 정패패와 진평, 강청 등 쟁쟁한 동기생들이 함께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도 청순한 미모와 열정적인 연기력을 갖춘 리칭은 단연 최고의 두각을 나타내면서 쇼브라더스사의 간편여배우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리칭은 1964년 영화 ‘옥당춘’에 단역배우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첫데뷔하였고, 이후 ‘어미인’ ‘철면황제’ ‘도검’ ‘스잔나’ 등의 영화에 잇달아 출연하면서, 예쁜 얼굴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65년도에 리칭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어미인’은 홍콩과 동남아시아에서 엄청나게 대히트치면서, 리칭은‘ 아시아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미 이때부터 리칭의 뛰어난 연기력은 국제적으로 공인받았고, 리칭의 엄청난 인기는 지속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7년도에 불세출의 멜로영화 ‘스잔나’에 출연해 열연을 펼치면서 리칭은 최고의 인기여배우로 각인되면서, 인기의 고공행진을 달리게 된답니다.

 

그후에도 리칭은 ‘철수무정’ ‘아랑곡의 혈투’ ‘빙천협녀’ ‘14인의 여걸’ 등 비중 높은 여러 무협영화들에 출연해 무협전문 여배우로 큰 인기를 끌면서 70년대 전성기를 이어나갔으며, 명실상부한 홍콩의 최고미녀스타로 자리매김합니다.

 

리칭은 70년대 당시 홍콩과 한국을 오가면서 연기자로서 최고의 전성기시대를 열어나갔는데, 이 당시 리칭은 총 54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그녀가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들이 크게 히트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면서 리칭에게 서서히 불행이 닥쳐오게됩니다.

 

리칭은 1979년도에 10년동안 사귀어왔던 애인이자 버스회사 사장인 뇌각엽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자 큰 실의에 빠지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1983년도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고 영화계에서 완전 은퇴하게 됩니다.

 

리칭은 80년도를 전후해서 그녀가 이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두사람인 애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게되자, 엄청나게 큰 상실감에 빠졌고, 이 때부터 상실감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서 도박장에 드나들게 됩니다.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리칭은 마카오에 있는 카지노도박장에 드나들면서, 도박에 완전히 빠지게됩니다.

 

리칭은 자신이 평생동안 모았던 엄청난 돈을 마카오의 카지노도박장에서 도박으로 모두 탕진해버렸고 그녀는 완전 파상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영화계를 은퇴한 후, 허전함과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시작했던 도박이 리칭을 완전히 파멸로 몰아넣었던 겁니다.

 

한때 동양 최고의 인기여배우였던 리칭은 도박에 중독되어서 전재산을 탕진하고, 가난뱅이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그 후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리칭은 홍콩의 스타벨리라는 보잘 것 없는 시영 임대아파트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리칭은 한 때 ‘쇼브라더스사’의 공동회장인 후인교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유부남인 후인교와는 오랫동안 교제를 이어가지못했고, 한 때의 염문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리칭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애인도 잃고 전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한 리칭은 사실상 생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남은 여생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2000년대 전반까지 홍콩매체에 의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리칭은 홍콩의 스타벨리라는 싸구려 임대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살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리칭은 결혼을 했다는 뚜렷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고, 주변사람들이 전해주는 소식에 의하면, 그 임대아파트 주변에서 좀 뚱뚱해진 리칭이 항상 혼자서 다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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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여러 가지 정황들로 볼 때에, 사랑했던 첫사랑과의 사별, 그리고 전재산의 탕진으로 인해 크게 실의에 빠졌던 리칭은 그 후에도 결혼하지 않고, 계속 독신으로 살아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 리칭의 사망과 사망이유 -

 

한 때 아시아에서 톱스타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불멸의 스타 리칭이 2018년 2월 23일날 홍콩섬 빡콕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안타깝게도 사망했다고 합니다.

 

2018년 2월 23일날, 경찰은 홍콩섬 빡콕의 한 아파트에서 숨져있는 리칭을 발견했습니다.

 

이 임대아파트에서 리칭은 오래동안 혼자서 살아왔는데, 리칭이 오랫동안 모습이 보이지않자, 이상하게 생각한 주변사람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고,

경찰은 문을 부수고 그 아파트로 진입들어갔는데, 그 아파트에서 리칭이 이미 오래전에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왕년의 홍콩스타인 리칭이 71세의 나이로 ‘고독사’한 것이어서 그녀를 좋아했던 수많은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주변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리칭은 오랫동안 암투병을 해오고 있었는데, 암이 악화되어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리칭이 살고있었던 아파트는 임대아파트로서 이 임대아파트에서 리칭은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다고 하며, 그녀가 사망했을 때에 그녀의 임종을 지켜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리칭은 만년에 매우 외롭고도 고달프게 혼자서 살아왔다고 합니다.

 

60~70년대에 홍콩과 아시아에서 홍콩을 대표하는 미녀여배우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리칭이었지만, 그녀가 평생을 혼자 독신으로 살아왔다는 것도 믿겨지지않을 뿐만 아니라, 71세의 나이에 고독사했다는 사실이 더욱 믿어지지않을 따름입니다.

 

리칭이 사망한 것을 발견한 것은 2018년 2월 23일이었는데, 그녀가 죽었을 당시에 그녀의 임종을 지켜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 우리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죽은 리칭을 발견했을 때에는 리칭은 이미 오래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니까, 리칭은 사망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후에 경찰에 의해서 발견되었던 것이지요.

 

또한 생전에 리칭을 보았다는 목격자들도 리칭이 항상 혼자서만 다녔고, 혼자서 지냈다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생전에 리칭이 숨겨둔 애인이나 자식이 있었다는 소식도 전혀 없기 때문에, 그녀가 평생 혼자서 독신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리칭이 임대아파트의 임대료를 수개월 동안 내지못해서, 그 아파트 주인이 리칭을 상대로 소송까지 걸어놓은 상태라고 합니다.

 

리칭은 임대료를 무려 1년 동안 내지못했다고 합니다.

리칭이 말년을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리칭은 정말로 말년을 매우 외롭고 비참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리칭은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 방송이나 외부에 일체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키지않고 은둔생활을 해왔다고 하며, 말년에는 암에 걸려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71세의 나이에 안타깝게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협사행’ 줄거리 -

 

백성들을 수탈하고 괴롭히는 탐관오리이자 재상인 얀이 길거리에서 어떤 괴한의 공격을 받고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재상을 암살한 괴한은 대중들로부터 의로운 협객이자 영웅으로 존경을 한몸에 받는 비도왕 쿠잉입니다.

비도왕 쿠잉은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악덕한 재상을 살해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오히려 존경과 찬사를 받게됩니다.

 

비도왕 쿠잉은 백여명이 넘는 수행포졸들을 거느리고 행차하는 얀재상에게 단신으로 접근하여 재상을 죽이고, 포졸들을 물리치는 엄청난 쾌거를 이룩합니다.

 

그런데, 그 재상을 호위하던 호위무사 판이는 자신이 모시는 재상이 암살당하는 참사를 겪었기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심한 문책을 받았고, 그 살인범 쿠잉을 잡아온다는 조건하에 풀려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포도청 관리 판이는 살인범 비도왕 쿠잉을 잡기위해서 추격대를 결성해 쿠잉의 뒤를 쫒기 시작합니다.

만일 포도청 관리 판이가 재상살인범 쿠잉을 잡아오지 못한다면, 그는 조정으로부터 처형을 당할 수도 있는 다급한 상황입니다.

 

이때부터 비도왕 쿠잉과 그를 잡으려는 판이간에 쫒고쫒기는 대추격전이 벌어집니다.

비도왕 쿠잉은 악화가 맡았으며, 그를 쫓는 포도청무사 판이는 나열이 맡았습니다.

 

포도청관리 판이는 산속 깊은 곳의 한 절간에서 쿠잉을 찾아냈고, 쿠잉과 결투를 벌이지만, 쿠잉의 비범한 검술실력에 밀려서 끝내 쿠잉을 잡지못하고 놓쳐버립니다.

 

비도왕 쿠잉은 피신을 하는 과정에서 요기를 하기 위해서 슝화군에 있는 씬핀여관에 들릅니다. 그런데 그 씬핀여관의 식당에서 자신을 잡으로 다니던 포도청무사 판이를 목격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포도청관리 판이는 비도왕 쿠잉의 얼굴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쿠잉은 판이와 결투를 벌일 때에 변장을 하고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씬핀여관의 주인에게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딸 슈니앙 즉, 리칭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주민들은 재상을 암살한 비도왕 쿠잉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못된 탐관오리들을 척결하는 정의로운 협객으로 생각하면서, 쿠잉을 매우 존경하고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관집 딸 리칭은 평소에 정의로운 협객인 비도왕 쿠잉을 마음속으로 몹시 흠모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비도왕 쿠잉과 그를 잡으려는 포도청관리 판이가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포도청무사 판이는 전에 한번 싸운 적 있는 쿠잉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고는 체포하기 위해 결투를 벌입니다.

 

그런데, 포도청무사 판이에게 목격된 쿠잉은 자신은 쿠잉이 아니라 산동성에서 온 관리 송활롱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을 듣고있던 리칭은 쿠잉을 자신의 사촌오빠 송활롱이 맞다고 맞장구치면서, 쿠잉의 편을 들어주었고, 리칭의 센스있는 행동 때문에 쿠잉은 포도청무사에게 체포당한 뻔한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그 후 비도왕 쿠잉과 포도청무사 판이가 그 씬핀여관에 함께 묶으면서 서로를 감시하게 되며, 리칭의 쿠잉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 주민들을 약탈하고 살육을 자행하는 악한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얼룽산의 악당들이었습니다.

 

얼룽산의 악당들은 마을에 첩자를 내려보내서 산동성에서 온 송활롱이 있다는 첩보를 전해듣고, 송활롱을 없애기 위해서 부하들을 출동시켰습니다.

사실, 조정에서는 얼룽산의 악당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관리 송활롱을 내려보냈는데, 진짜 송활롱은 마을 어귀에서 얼룽산무리들에게 습격을 받고 죽고말았습니다.

 

진짜 송활롱을 죽고 없고, 비도왕 쿠잉이 가짜 송활롱 행세를 하고 있었는데, 얼룽산의 악당들은 쿠잉이 진짜 송활롱이라고 믿고 그를 없애기 위해서 부하들을 출동시킨 겁니다.

 

대규모의 얼룽산 무리들이 씬핀여관으로 쳐들어갔고, 그 여관에서 악당들과 조우한 쿠잉과 포도청무사 판이가 서로 협력해서 악당들과 한판 대결을 펼쳤습니다.

 

서로 쫒고쫒기는 원수지간이었던 쿠잉과 포도청무사 판이가 얼룽산 악당이라는 공동의 적과 마주치면서,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되었고, 두사람은 서로 협력하에 얼룽산의 무리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얼룽산의 두목은 자신이 보낸 부하들이 쿠잉과 전투를 벌여서 모두 죽게되자, 그가 강자임을 깨닫고는 장난의 여덟괴수들을 불러들여 쿠잉을 죽일 것을 청탁합니다.

 

한편, 쿠잉과 같은 여관에서 함께 묶고있는 포도청무사 판이는 여전히 쿠잉을 재상살해범이라는 의심을 거두지않고 있으며, 그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얼룽산에서 보낸 장난의 여덟괴수가 씬핀여관에 있는 쿠잉에게 쳐들어갔고, 두 세력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 싸움에 포도청무사 판이가 뛰어들었고, 결국 쿠잉은 판이의 도움을 받아서 장난의 여덟괴수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얼룽산의 악당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 원수지간이었던 쿠잉과 포도청무사 판이 사이에 야릇한 우정이 싹트게 되었고, 두사람은 서로에 대해 깊은 신뢰감을 갖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룽산의 악당들은 리칭을 자신들의 소굴로 납치해갔고, 리칭이 납치당한 것을 알게된 쿠잉과 포도청무사 판이가 함께 얼룽산으로 쳐들어가서 그들과 한판 대결을 펼치게됩니다.

 

얼룽산의 악당들과 최후의 결전에서 결국 쿠잉과 포도청무사 판이는 승리를 거두게됩니다.

쿠잉을 체포하려던 포도청무사 판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계급장을 떼어내버리면서 쿠잉의 체포를 전격 포기하였고, 쿠잉과 리칭의 결합을 축복해주면서 그곳을 떠나면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과거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우리들의 영원한 스타 리칭이 71세의 나이로 초라한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고독사했다고 하니, 너무나도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70년대에 홍콩의 최고의 미녀스타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리칭이 말년에 초라한 임대아파트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죽었다고 하니, 대단히 안타까울 따름이며, 정말 심각한 인생의 무상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리칭, 나열, 악화 주연의 무협영화 ‘협사행’의 줄거리와 리칭의 사망에 관한 슬픈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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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

왕조현의 최근얼굴 모습 사진과 최근 근황, 나이, 과거 임건학과의 스캔들

 

왕조현이 오랜만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고, 자신의 얼굴을 매스컴에 노출했습니다.

23년 12월 7일 중국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웨이보에 바이두의 20주년 축하영상에 왕조현이 나타나서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왕조현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2016년 이후 실로 7년만에 다시 대중들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고있습니다.

 

7년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왕조현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긴 생머리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56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않을 만큼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웨이보에서 공개된 영상에서 왕조현은 ‘바이두의 20주년을 축하한다’고 축하인사를 건넸습니다.

이를 본 네티즌들의 반응은 ‘7년만에 다시 왕조현의 목소리를 듣을 수 있어서 감격스럽다’ ‘왕조현의 목소리가 전과 하나도 변하지않았다’ ‘얼굴이 너무 많이 변했다’고 말하는 등 왕조현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표현했습니다.

왕조현이 영상으로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공개한 것은 2016년 이후 7년만의 일입니다. 과거 2016년도에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던 왕조현은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급히 대만으로 돌아왔고, 당시 장례식장에서 언론에 응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캐나다로 돌아간 왕조현은 자신의 SNS를 통해서 간간히 자신의 모습과 근황을 알려왔습니다.

 

 

왕조현은 1987년도 영화 ‘천녀유혼’이 엄청나게 히트하면서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고, 그 후 왕조현은 ‘화중선’ ‘천녀유혼2’ ‘천녀유혼3’ ‘동방불패’ 등 연속적으로 불후의 걸작품에 출연하면서, 아시아의 최고스타로 우뚝 솟아올랐습니다.

 

그렇게 왕조현은 아시아의 최고미녀라는 호칭을 들으면서 화려하게 아시아 영화계를 주름잡았는데, 1993년도에 영화계의 큰손이라 유부남재벌이었던 임건악과 열애스캔들이 터졌고, 그 스캔들로 인해서 영화배우로서의 이미지가 큰 손상을 받았습니다.

작년 12월 7일 웨이보에서 올라온 왕조현 최근사진

 

임건악은 홍콩영화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엄청난 재력을 갖춘 재벌이었고 홍콩 최대의 배급사인 미디어 아시아의 대표로서 부인과 세명의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조현이 유부남이 임건악과 동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왕조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유부남과의 스캔들로 인해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은 왕조현은 1994년도 잠시 영화계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임건악은 왕조현을 만나지 3년만에 왕조현에게 실증을 느끼고 더 젊은 여성을 만나 또다른 엽문을 뿌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만으로 다시 돌아온 왕조현은 과거의 연인인 가수 제친과 다시 만나 열애를 이어나갔지만, 제친은 자신보다 24살이 어린 20대의 젊은 여자와 결혼을 하면서 왕조현을 배신하고 맙니다.

 

졸지에 2명의 남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왕조현은 엄청난 상처를 받게됩니다.

결국 다시 영화계에 복귀한 왕조현은 2002년도 영화 ‘상해미려’를 끝으로 영화계에서 완전 은퇴한 후,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하였고,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계속 독신으로 살고있습니다.

 

1980~90년대에 아시아의 최고미녀 소리를 들으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왕조현이 두남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캐나다로 망명을 가서 지금까지 혼자 독신으로 살고있는 사실이 아이러니할 뿐만아니라, 정말 믿어지지않는 사실입니다.

 

한 때 10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할 정도로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어떻게 결혼도 하지않고 혼자 살 수 있을까요? 왕조현을 보면서 사람의 운명을 결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실감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로 이민 가서 조용히 살고있는 왕조현은 2019년 7월에 중국의 시나연예지에 자신의 사진을 게제하면서 대중들에게 자신의 근황소식을 알렸고, 동시에 자신의 SNS에도 자신의 근황을 알렸는데, 그 당시 새하얀 살결에 청순한 미모를 간직한 왕조현의 아름다운 얼굴사진이 공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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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에 당시 52세의 나이를 무색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에도 선이 뚜렷한 동안미모를 과시하는 등 최강의 동안미모를 자랑했습니다.

 

당시 왕조현은 자신의 아름다운 미모와 젊고 탱탱한 피부를 유지하는 비결을 공개했는데요.

 

왕조현은 매일같이 다음의 세가지 방법을 실천한다고 합니다.

 

첫째, 매일 아침에 따뜻한 물 두잔을 마시는 것.

둘째, 매일같이 하루에 30분 이상 동안 런닝머신 운동을 할 것.

셋째, 하루에 8시간 동안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것,

그당시 왕조현은 이같은 세가지 방법을 실천하는 것이 자신의 탱탱하고 젊은 피부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강조했답니다.

 

그리고 다시 4년이 지난 2023년 12월 7일 왕조현은 다시 웨이보지 포털사이트에 나타나서 자신의 얼굴모습을 공개해서 대중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2019년도에 찍은 왕조현 사진. 이 때까지만  해도 예뻤어요, 지금의 왕조현의 모습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왕조현은 1967년 1월 31일생으로 현재 나이가 56세입니다. 그렇지만 사진에 나타난 왕조현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솔직히 말해 얼굴모습은 좀 변한 것 것 같습니다.

 

왕조현이 2019년도에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볼 때, 이제 나이가 50대 중반이 넘어서 그런지 얼굴이 좀 더 늙은 모습으로, 얼굴이 좀 더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있습니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할 정도로 엄청난 미인도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변하게 되는구나 하는 점에서 인생의 무상을 느끼게 된답니다.

 

2019년도에 찍은 왕조현의 사진. 이때까지만 해도 왕조현은 젊고 예쁜 모습이었는데, 12월 7일날 찍은 사진의 모습은 좀 늙은 모습이어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얼굴이 이제 나이를 먹으니까, 저렇게 늙어가게 되는구나를 느끼면서, 왕조현의 얼굴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과 세월의 무상함을 심히 느끼게 됩니다. 아무도 나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앞으로 5년 후에 60대가 된 왕조현의 얼굴모습이 또 어떻게 변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서글픈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답니다.

 

왕조현이 2019년도에 보여준 아름다운 동안미모를 영원히 간직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역시 왕조현이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그녀의 변한 모습을 이제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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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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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로례 주연의 중국무협영화 옥중도의 내용과 줄거리, 70년대 고전 홍콩무협영화

 

영화 ‘옥중도’는 71년도에 개봉한 대표적인 홍콩무협영화입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었던 70년대 당시 우리 대중들의 유일한 오락거리는 단연 영화였습니다.

 

특히 70년대에는 홍콩무협영화들이 물밑듯이 밀려들어오면서 큰 인기를 끌면서 커다란 붐을 형성하던 시기였습니다.

홍콩무협영화나 쿵푸영화들이 물밑듯이 밀려오면서 50~60년대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전국의 개봉관들을 점령하다시피 했습니다.

 

왕우의 외팔이검객으로 촉발된 홍콩무협영화의 열풍은 마치 전염병이 퍼지듯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고, 71년도에 ‘옥중도’를 비롯해 ‘스잔나’ ‘아랑곡의 혈투’ 등의 영화가 크게 히트하면서 한국영화계의 붐을 주도해나갔습니다.

 

70년대는 홍콩무협영화가 우리나라에서 크게 히트했던 홍콩영화의 전성기시대였습니다.

그 와중에 71년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영화 ‘옥중도’는 대단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대표적인 홍콩무협영화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70년대 중국무협영화 ‘옥중도’는 당시 홍콩의 대표적인 미녀여배우인 시사가 여주인공역을 맡았고, 당시 홍콩의 대표적인 무협배우 나열이 남주인공을 맡아 열연을 펼친 영화입니다.

 

당시 무협영화의 히어로인 나열은 멋지고 화려한 검술액션을 선보여서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았고, 매력적인 청순미인 시사는 섬세하고도 열정적인 연기액션을 펼쳐서 남성관객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습니다.

 

당시 여주인공 시사는 송나라의 재건을 위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펼치는 여전사 바이 야르역을 맡아서 열연을 펼쳤는데요.

여주인공 시사는 깜찍하면서도 여성적인 매력을 듬뿍 발산하면서, 깜찍발랄한 연기를 펼쳐서 영화를 보는 재미와 흥미를 크게 배가시켰구요.

 

로례라고도 불리워졌던 남주인공 나열은 떠돌이무사역을 맡아서 시사를 따라다니면서 송나라의 복원을 위한 독립운동을 뒤에서 도와주는 해결사역할을 맡으면서 멋지고 화려한 검술액션을 선보이면서, 관객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여주인공 시사는 어려서부터 무용과 발레를 배워서 몸이 매우 유연하고 무협영화에서 필요한 발차기 등 무술액션을 잘 소화할 능력을 갖추고있어서 무술액션을 멋지게 펼칠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시사는 그당시 무협영화의 여검객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여검객 1호 정패패의 뒤를 이을 제2세대 여검객으로 크게 각광을 받았습니다.

 

정패패는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많은 홍콩무협영화에 출연해서 여검객으로 분해 멋지고 화려한 검술액션을 펼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죠,

 

하지만 정패패가 70년대 전반 결혼을 하면서 영화계를 떠나자 그녀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여검객을 필요로 했는데, 그 때 나타난 여배우가 바로 시사였습니다.

 

시사는 대만출신의 여배우로 어려서부터 무용과 발레를 배워서 몸이 탄탄하면서도 매우 유연했기 때문에 정패패의 뒤를 이어서 무협영화의 여검객으로 활동하기에 매우 적합했던 여배우였습니다.

시사는 1953년생으로 71년도 영화 ‘옥중도’를 찍을 당시에 고작 19세의 앳된 미소녀시절인데도 불구하고, 비중높은 여검객 역할을 맡아 뛰어난 연기를 펼쳤습니다.

 

홍콩 쇼브라더스의 감독들은 정패패의 뒤를 이을 여검객으로 시사를 전격 발탁했고, 십대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여러편의 무협영화에 출연시켜서 멋진 검술액션을 펼치도록 했습니다.

 

여배우 시사는 감독들의 기대에 부응해서 70년대에 ‘혈부문’ ‘종규낭자’ ‘옥중도’ ‘흑점’ ‘여포쾌’ ‘생사투’ 등의 여러편의 무협영화에 출연해서 멋진 활약을 펼치면서 대중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많은 사람들은 시사를 ‘제2의 정패패’ ‘여검객 2호’라고들 불렀습니다.

 

시사는 1979년 이후 자유계약배우로 자유의 몸이 되자, 고국인 대만으로 돌아와 83년도부터 ‘애지여’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했습니다.

85년도에는 ‘비연경룡’이라는 시리즈물에 출연했는데, 이 시리즈물에서 시사는 여주인공역을 맡아 센세이셔널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귀염성 있는 매력적인 얼굴에 깜찍발랄하게 생긴 용모를 지닌 시사는 무협영화에서 절도있고 화려한 검술액션 등 남성들 못지않은 엄청난 스케일의 고난도 액션연기를 펼쳐서, 당시 한국남성팬들의 인기를 한몸에 모았습니다.

 

저렇게 연악하고 여성스럽게 생긴 여배우가 어떻게 저렇게 엄청난 고난도의 무술액션을 펼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매우 고난도의 절도있는 액션연기를 펼침으로써, 무협영화의 흥미를 더욱 배가시켰던 여배우가 바로 시사였지요.

 

한편으로는 여성스럽고 깜찍한 연기를, 다른 한편으로는 악당들을 때려부수는 여검객의 무자비한 액션연기를 펼치는 냉혹한 여전사의 연기를 펼친 시사는 ‘옥중도’에서 팔방미인의 면모를 모두 보여줌으로써, 남성관객들로부터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옥중도’에 남자주인공으로 출연한 나열 또한 영화에서 멋지고 화려한 검술액션을 선보여서 영화의 흥미를 배가시켰습니다.

 

다른이름으로 ‘로례’라고도 불리웠던 나열은 60~70년대에 홍콩무협영화를 이끌어나갔던 전설적인 인기배우이지요.

나열은 ‘철수무정’ ‘아랑곡의 혈투’ ‘옥중도’ ‘여포쾌’ 등 많은 무협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해서 악당들을 쳐부수는 정의의 검객역할을 맡으면서 한국팬들에게 커다란 인기를 끌었던 명배우이지요.

 

‘옥중도’에서 나열은 송나라의 재건에는 관심이 없는 한량이자 떠돌이 바랑둥이무사로 나오는데, 그는 비범한 무예를 갖춘 뛰어난 무사입니다.

 

나열은 우연히 마주친 시사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송나라의 복원을 위해서 목숨 바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여러 송나라 지사들의 절개 높은 저항운동에 감명 받아서, 자신도 독립저항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 정의로운 검객역할을 하게 된답니다.

 

특히 나열은 마지막장면에서 사랑하는 여인 시사를 위해 감옥의 육중한 철문에 깔려죽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될 정도로 대단한 로맨티스트로 열연합니다.

 

‘옥중도’는 말괄량이 여동생처럼 생긴 시사가 송나라의 복원을 위해서 절도 높고 멋지고 화려한 검술액션을 펼치는 재미있는 70년대판 고전무협영화입니다.

 

중국무협영화 ‘옥중도’는 나열과 시사가 각각 남녀주인공을 맡았으며, 구문종과 방면, 당적 등 홍콩의 관록파배우들이 출연했을 뿐만아니라, 한국배우 김기주가 일인이역을 맡아 원나라의 대원사로 등장해서 무게감 있는 연기를 펼쳤고 한국배우 진봉진도 함께 출연해 열띤 연기를 펼진 한홍 위장합작영화입니다.

 

여주인공 시사는 88년도에 대만투자회사 흥원그룹의 대표 심장성과 결혼하면서 영화계에서 은퇴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사는 결혼한 지 2년도 채 안된 1989년도 12월에 성격차이로 남편과 이혼한 후 홍콩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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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시사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불행한 결혼생활이었으며, 남편과 헤어진 후에는 다시는 전남편을 보지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연예계를 떠난 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시사는 그 후 불교강연을 다니면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홀어머니밑에서 자란 시사는 현재도 90이 넘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의지하면서 함께 살고있습니다.

 

 

- 옥중도의 줄거리 -

 

‘옥중도’는 몽골족의 공격에 의해 송나라가 멸명했을 당시, 멸망한 송나라를 복원할 계획을 가진 송나라 지사들의 독립저항운동을 그린 영화입니다.

 

때는 1279년 송나라가 몽골족의 원나라에 나라를 빼앗긴 상황으로 원나라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송나라의 애국지사들은 서로 비밀리에 모여서 국가재건을 위한 저항운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송나라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문승상이 포로로 잡혀서 감옥에 투옥되자, 리우산과 송나라의 왕자 루씨푸, 그의 동생 루야푸를 중심으로 하는 여주인공 바이 야르 등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투옥된 문승상을 구출하기 위해서 결사대를 결성하게 됩니다.

 

산속의 오솔길에서 낮잠을 자고있던 나열은 묘령의 아름다운 여인 시사를 발견하고 그녀의 미모에 홀딱 반했는데, 그 때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못된 네명의 몽골족병사들이 그녀를 욕보이게 위해 쫒아가자, 자신이 갖고있는 도끼를 휘둘러 이들 몽골족병사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그녀를 구해줍니다.

 

이렇게 나열의 무예로 자신을 욕보이려는 네명의 병사들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시사는 전혀 나열(르 허루)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그냥 제갈길을 가고맙니다.

이에 격분한 나열은 이 때부터 시사의 뒷꽁무니를 졸졸 쫒아다니게 되는데요.

 

나열이 그녀의 뒤를 쫒아가본 결과, 시사는 송나라의 복원을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는 비밀저항단체의 한 단원임을 알게됩니다.

 

이 비밀저항단체는 감옥에 투옥된 송나라의 정신적 지주인 문승상을 구출하기 위한 논의를 하고있었고, 실제로 문승상을 구출하기 위한 비밀결사대를 꾸몄고 거기에 시사가 단원으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시사가 문승상을 구출하기 위한 비밀결사대의 단원으로 활동가자, 나열은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서 자진해서 그 비밀결사대에 들어가 활동하게 됩니다.

 

비밀결사대가 감옥에 갇힌 문승상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비밀결사대는 일부러 몽골여인들을 능욕하는 흉내를 내서, 스스로 감옥에 끌려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나열도 몽골호위대장과 시비가 붙어서 감옥에 끌려들어갑니다.

 

또다시 나열과 시사가 감옥에서 만났습니다. 시사는 문승상을 구출하기 위해서 스스로 감옥에 들어왔고, 나열은 몽골호위대장과의 시비 때문에 감옥에 끌려들어왔습니다.

 

나열은 사랑하는 여인 시사와 감옥에서 만난 것에 오히려 행복해했고, 그녀의 문승상 구출작전을 적극 도와주기로 마음먹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비밀결사대는 간수를 매수해서 열쇠를 획득한 후 옥문을 풀고 밖으로 빠져나와서, 문승상을 구출하기 위해 몽골족병사들과 치열한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비밀결사대가 몽골족병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문승상을 구출해냈지만, 구출된 문승상을 가짜였습니다.

비밀결사대가 문승상을 구출해낼 것을 미리 예측한 몽골측에서 문승상을 다른 사람과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비밀결사대는 감옥에서 몽골군에게 포위된 체,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시사도 몽골군간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다리에 칼을 맞는 부상을 당하는데요.

이때 나열이 나타나서 그녀를 등에 업고 몽골군들을 물리치면서 그 현장을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붙잡혔다가 풀려난 루대협이 문승상의 새로운 거처를 알아냈습니다. 몽골측은 문승상을 몽골군수장 대원사 장군의 집에 가둬뒀습니다.

 

그래서 송나라 저항단체는 새롭게 문승상 구출 비밀결사대를 다시 구성해서, 문승상을 구출해내기 위해서 대원사장군의 집으로 쳐들어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몽골측의 계략이고 함정이었습니다. 몽골측은 일부러 문승상 거처정보를 흘려보내어서 이곳으로 저항단체가 들어오도록 유인한 다음, 그곳에 몽골군을 매복시켜서 송나라 저항단체를 한꺼번에 몰살시킬 계획을 갖고있었습니다.

 

송나라 비밀결사대가 힘들여서 대원사장군의 집으로 침투해 들어갔을 때, 그곳에 이미 기다리고있던 수많은 몽골군대에 포위되어 양측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소수의 비밀결사대와 몽골군 대군과의 목숨을 건 한판 결투가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대원사 장군은 비밀결사대에 항복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투항을 권유하지만, 비밀결사대는 항복을 하지않고 끝까지 맞서 싸워나갑니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나열의 눈부신 맹활약으로 비밀결사대는 간신히 그 집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송나라 저항단체는 문승상이 다시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는 정보를 알게됩니다.

비밀결사대는 문승상을 구출하기 위해 다시 몽골의 감옥으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웁니다.

 

비밀결사대는 몰공군으로 변장을 한 체 다시 감옥으로 침투해 들어갔고, 감옥에 갇힌 문승상을 풀어주려고 하다가 송나라 비밀결사대인 것이 들통이 났고, 다시 비밀결사대와 몽골군간에 치열한 결투가 벌어집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시사는 그곳에서 탈출에 성공하지만, 나열은 시사의 탈출을 도와주다가 그만 육중한 철문에 깔려죽게됩니다.

나열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감옥까지 따라가서 전투를 벌였을 뿐만아니라 그녀를 구해준 후,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마는 진한 로맨티스트의 모습을 보여주어서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감옥에서 벌어지는 비밀결사대와 몽골군간의 목숨을 건 일당 백의 전투장면은 정말 압권입니다.

 

‘옥중도’는 ‘문승상 구출작전’을 주도하는 무림의 고수 나열과 여검객 시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감옥’이라고 하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숨막히는 피의 혈전이 처절하게 펼쳐지는 멋지고 아름다운 정통무협영화입니다.

 

‘옥중도’는 다른 무협물과는 달리 남주인공이 철문에 깔려 죽는 강렬한 여운의 엔딩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영화입니다.

 

영화 ‘옥중도’는 1971년도에 우리나라에 수입되어서 서울 허리우드극장에서만 27일간 상영되어 10만명이 넘는 관객을, 부산극장과 태화극장에서 7만명의 관객을 모을 정도로 엄청난 대히트를 기록했던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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