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외모, 주걱턱 초상화, 애인 페르센백작과 비밀연애 편지 내용

 

마리 앙투아네트 - 1755년 11월 2일~1793년 10월 16일 (38세 사망)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왕 루이 16세의 부인이자, 프랑스대혁명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왕비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왕 루이 16세 몰래 다른 남자와 비밀연애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비운의 왕비로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가 남몰래 1년 동안 다른 남자에게 보낸 비밀 연애편지가 전격 공개되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있는데요.

 

오늘은 프랑스대혁명으로 단두대의 처형을 당한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그동안 숨겨져왔던 그녀의 비밀 연애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왕비로 알려졌지만, 그녀는 원래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 태어난 막내딸이며,

오스트리아궁궐에서 공주로서 귀엽게 자라났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양국간의 우호증진을 위해서 프랑스왕세자 루이 16세와 결혼을 함으로써, 프랑스 왕세자비가 되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살 때에 루이 16세와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양쪽 가문의 부모들에 의해서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한 것이었고, 루이 16세의 사랑을 별로 받지못한 불운한 왕비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예술적 풍토속에서 자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고, 특히 하프연주 실력도 뛰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자유분방한 생활을 누리면서 자라났기에 그녀의 성격도 활달하고 사교적이었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랐던 그녀가 프랑스로 시집을 가서 왕비가 된 이후, 프랑스왕궁의 엄격한 격식을 갖춘 틀에 박힌 생활을 하게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랫동안 고향에 대한 향수로 인해 무척 외로워했다고 합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후 오랫동안 남편 루이 16세의 사랑을 받지못함으로써, 7년 동안 자녀를 낳지못했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7년 동안 자녀를 낳지못했던 이유는 루이 16세의 애정결핍과 남편 루이 16세가 정신적 성적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후 치료를 받고 완쾌한 루이 16세와의 합궁이 이뤄져서 7년이 지난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녀 4명을 낳을 수 있었답니다.

 

처음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서로 성격과 취미가 달라서, 애정이 없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왕궁에 적응을 못하고 외로워하는 모습을 본 루이 16세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서 베르사유정원의 한쪽 구석에 프티 트리아농이라는 작은 궁전을 선물해주면서, 두사람 간 애정이 무르익게 됩니다.

 

프랑스라는 이질적 국가와 낮선 환경에서 오는 소외감과 외로움,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기위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이 선사해준 이 작은궁전에서

종종 귀족들을 모아놓고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여는 등 활발한 사교생활을 즐겼습니다.

 

남편이 선사해준 이 작은궁전은 새로 지은 게 아니라, 선왕인 루이 15세가 자신의 애첩 뒤바리 백작부인을 위해 만들어준 궁전이었는데, 뒤바리 백작부인이 궁궐에서 퇴출되고 난 후, 루이 16세가 고향에 대한 향수병에 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선사해준 작은 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와전되어서, 마치 마리 앙투아네트가 화려한 궁전을 지었고, 그곳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매일같이 열고, 사치와 향략을 즐겼던 허영심과 낭비벽이 심한 왕비라는 거짓루머가 만들어져서, 프랑스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던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거짓루머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민중들의 혐오의 대상이 되고말았답니다.

 

◆ 마리 앙투아네트의 외모, 주걱턱과 초상화

 

항간에는 프랑스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주걱턱에 대해서 심한 콤플렉스를 갖고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초상화에도 나타났듯이, 백옥같이 하얀 살결에 커다란 눈방울과 오똑한 코 등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여성스러움이 넘쳐나는 당대의 우아한 미인이었답니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합스부르크가문에서 내려오는 유전질환인 돌출된 주걱턱을 갖고있었고, 자신의 돌출된 주걱턱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주걱턱은 그녀의 가문인 합스부르크왕실에서 왕가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이 성행했는데,

바로 그 근친혼 때문에 합스부르크왕실의 후손들은 심각한 유전질환을 앓게되었고, 합스부르크왕가의 대표적인 유전질환이 바로 돌출된 입과 주걱턱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합스부르크왕실의 후손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유전질환인 돌출된 주걱턱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에는 그녀의 얼굴에 돌출된 입과 주걱턱이 전혀 나타나있지 않고, 그녀는 대단한 미인으로 그려져 있답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즐겨했는데요.

 

그녀는 유능한 화가 엘리자베스 비제르 브룅을 고용해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했고,

그 화가로 하여금 자신의 콤플렉스인 주걱턱 대신에 아름다운 턱을 그리게함으로써,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그녀의 초상화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걱턱이 없는 아름다운 미인의 모습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랍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

 

그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가 비제르 브룅을 왕실의 전용화가로 고용했고, 그 후에도 비제르 브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계속 그렸는데, 그가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들은 주걱턱이 없는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의 초상화들이랍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특히 화이트색상, 골드색상, 핑크색상을 좋아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초상화를 좀 더 화사하고 밝은 느낌이 나도록 하기 위해서, 화가 비제르 브룅으로 하여금 화이트색, 골드색, 핑크색 등 화려한 색상을 사용해서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습니다.

 

화가 비제르 브룅은 화사하고 화려한 색상을 넣어서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들은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을 하게되었답니다.

 

이렇게해서 만들어진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들은 대부분 우아하고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녀의 화려한 초상화들로 인해서 그녀는 백성들에게 허영과 낭비를 일삼는 사치와 허영의 대명사라는 오해를 받게되었답니다.

 

루이 16세 재위 당시 프랑스재정은 파탄이 났고, 계속된 흉작으로 인해서 물가는 가파르게 치솟았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기아와 가난에 허우적대는 프랑스민중들은 호화롭게 사치스러운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들을 보면서 매우 분개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서 프랑스재정을 파탄냈을 뿐만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곤궁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서, 프랑스민중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고, 결국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18세기 후반 흉작으로 인해 농업생산량이 급감함으로써 물가가 폭등했고, 서민경제는 파탄나고 말았답니다.

파탄난 서민경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프랑스왕정에 불만을 품은 혁명세력과 농민들이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1789년도에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답니다.

 

프랑스민중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으로 결국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시에 있는 튈르리궁에 감금당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혁명군에 의해 수년 동안 감금당했던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혁명재판을 통해 사형판결을 받고, 단두대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답니다.

그리고 9개월 뒤인 10월 16일날, 마리 앙투아네트도 혁명재판으로부터 사형판결을 받고, 콩코드광장에서 단두대에 올라 참수당하면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마리 앙투아네트가 애인과 주고받은 60통의 비밀 연애편지가 공개됨

 

그런데 그렇게 단두대의 처형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망한 지, 84년이 지난 1887년 스웨덴의 한 귀족가문이 소장하고있던 편지가 공개되면서, 세상을 발칵 뒤짚어 놓았답니다.

 

그 귀족가문이 공개한 편지들은 바로 프랑스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외갓남자와 주고받았던 60통의 비밀 연애편지들이어서, 더욱 큰 놀라움을 주고있습니다.

 

이 비밀편지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1791년 6월부터 1792년 8월 사이에 자신의 숨겨진 애인 페르센백작에게 보내진 것이라고 하며, 이 시기는 프랑스혁명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튈르리궁전에 감금당했던 시기였답니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보냈던 이 편지들 중 일부분이 남들이 보지못하도록 지워지거나, 덧칠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1774년도에 루이 14세에 시집을 와서,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못하면서 외로운 왕세자비 생활을 하고있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궁궐에서 개최한 가면무도회에서 한 멋진 남성을 만나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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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성은 스웨덴에서 온 귀족 악셀 폰 페르센백작이었는데, 잘생긴 외모에 사교적인 화술로 파티에서 큰 인기를 끌고있던 사교계의 인기남이었답니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은 서로 나이가 동갑인데다, 두사람 모두 외국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파티에서 쉽게 친해졌고, 이 후 자주 어울리는 사이가 됐답니다.

 

베르사이유의 작은 궁전에서 개최된 파티에서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은 자주 만나면서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두사람이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게 됐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세자비일 때부터 알게된 페르센백작은 그녀가 왕비가 된 후에도 베르사유궁전에 자주 드나들었을 정도로, 두사람은 매우 끈끈한 관계를 맺고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발생하면서 혁명군에 의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튈르리궁에 감금당하게 되는데요.

 

이렇게 혁명군에 의해 튈르리궁에 감금당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외국으로의 탈출을 꿈꾸게 됩니다.

이 때에 페르센백작이 나타나서 두사람의 탈출을 전격 도와주게 된답니다.

 

페르센백작은 러시아 여권 여러장을 준비해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외국으로 탈출시키는 비밀작전을 추진했는데, 루이 16세와 가족들을 러시아백작의 하인으로 위장시켜서, 프랑스국경을 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1791년 6월 페르센백작은 대형마차에 식량과 술, 옷가지들을 가득 싣고, 왕과 왕비, 그리고 자녀들과 시녀들까지 함께 태워서, 비밀리에 파리를 탈출했습니다.

 

그렇지만 루이 16세 일행은 워낙 많은 짐을 싣고서 많은 사람들을 마차에 태워갔기 때문에, 남들의 눈에 쉽게 띄일 수밖에 없었고,

탈출 5일만에 프랑스북부의 바렌지역에서 혁명군에 의해 발각되어서 다시 파리로 끌려와서 다시 감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바렌사건으로 인해서 루이 16세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혁명세력에 의해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왕권은 완전 박탈당하였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자녀들은 탕플탑에 갇혀서 혁명재판을 받았고, 1793년 결국 두사람 모두 단두대에 의해 처형당하는 비참한 말로를 겪고말았답니다.

 

 

그 때로부터 228년이 지난 2021년,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지를 스웨덴귀족으로부터 구입해서 보관해온 프랑스 국립문서보관소는

그녀의 편지에서 감춰지고 덧칠해진 부분을 복구하는 작업을 소르본대학에 의뢰했고, 소르본대학 연구팀은 오랜 작업 끝에 15통의 편지의 감춰진 부분을 복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소르본대학이 해독에 성공한 이 편지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튈르리궁에 갇혀있을 때에, 페르센백작에게 보낸 비밀연애 편지여서,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소르본대학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지 15통에서 원래의 잉크와 위에 덧칠된 잉크의 화학성분을 분석해냈고, 엑스선 형광스캐너로 글자층을 구분해서 원래의 글씨를 해독하는데 성공했답니다.

 

이 편지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튈르리궁에 갇혀있던 1년 동안 자신의 연인 페르센백작에게 보낸 비밀편지들이었고, 소르본대학 연구팀은 15통의 비밀편지들이 전부 해독하는 데 성공했답니다.

 

실로 230년만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내연의 남자에게 보낸 비밀 연애편지가 해독된 것이서, 대중적으로 엄청난 관심이 집중되었는데요.

 

누군가에 의해 덧칠되고 감추어진 편지내용이 완전 해독되어 눈으로 볼 수 있는 문장으로 바꿔었고, 그 해독된 내용을 본 연구원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요.

 

230년만에 해독에 성공하여 공개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밀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내용이 들어있었답니다.

 

-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센백작에게 보낸 편지 문장 -

 

‘내 사랑, 당신없이는 내 마음이 행복할 수 없어요!’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할 당신!’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만 살고 있어요’

 

- 페르센백작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보낸 편지 문장 -

 

‘당신과 만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로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된 이 편지들은 놀랍게도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이 서로 주고받았던 비밀연애 편지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에게 노골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문장들을 나중에 페르센백작이 남들이 보지못하도록 덧칠을 해서 감추어두었던 것이지요.

 

이 시기는 루이 16세가 바렌사건으로 왕권을 정지당하고 외국과 내통한다는 이유와 반혁명세력이라는 이유로 혁명군에 의해서 처형될 위기에 처한 위태로운 시기였기에, 튈르리궁에 갇힌 마리 앙투아네트가 신변에 큰 위협을 느끼고있던 매우 위태로운 시기였답니다.

 

이렇게 위태롭고 급박한 시기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센백작과 서로간의 애정을 표현하는 비밀 연애편지를 주고받은 것이어서,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튈르리궁에 유폐된 프랑스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남편이 아닌 외간남자와 1년 동안 무려 60통이나 되는 비밀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하니, 정말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남편인 루이 16세가 처형될 위기에 처하고, 자신도 앞날을 보장할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자신과 친밀관계에 있는 페르센백작을 정신적인 의지처로 삼고, 정신적인 위로를 받고자한 마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15통의 편지들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센백작에게 노골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문장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단순히 마리 앙투아네트가 정신적인 위안을 얻을 의향으로 쓴 편지라고 볼 수는 없으며,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연애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사람이 주고받았던 수십통의 편지들에 이처럼 노골적인 애정표현 문장들이 많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페르센백작은 그 문장들에 덧칠을 해서, 그 문장들을 감추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비밀연애 편지를 주고받은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1년 뒤에 콩코드광장에서 단두대에 의해 처형당하고 말았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처형당하기 며칠 전, 자신이 갖고있던 비밀연애 편지들을 페르센백작에게 맡겼고, 페르센백작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주고받았던 60통의 편지들을 자신의 서재에 보관해두었던 것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왕세자인 루이 16세와 결혼을 해 왕세자비가 되었고, 그녀는 가면무도회에서 페르센백작을 처음 만난 20살 때부터, 그녀가 사망한 38살 때까지 남편 몰래 페르센백작을 비밀리에 만나서 비밀연애를 해왔던 것이지요.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센백작과 사귀면서 염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은 당시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던 상황이었고, 이것을 그녀의 남편 루이 16세도 눈치채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혁명 당시 사치와 낭비의 화신이라는 오명을 썼고, 당시 많은 백성들도 그녀의 허영과 낭비, 사치행각을 비난하면서, 그녀에 대한 원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렇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와 낭비의 화신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히려 그녀가 살았던 쁘띠 트리아농 궁에서 닭과 염소를 키우고 손수 밭을 일구는 등 목가적인 삶을 꿈꿨던 여성이고, 실생활에서도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굶주리는 백성들에 대해 말했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이세요!’라는 말도 실제와는 다른 매우 과장된 말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길거리에서 굶주리는 아이들을 보고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슈를 주세요!’라고 말했는데, 파리 코뮌이 의도적으로 이 말을 왜곡해서 퍼뜨렸다고 합니다.

 

'브리오슈'는 프랑스인들이 평소에 먹는 달걀과 버터를 넣은 프랑스의 전통빵이지, 케이크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후대의 일부사람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난하기 위해서 평범한 빵인 '브리오슈'를 케이크로 왜곡편집한 것이지요.

 

프랑스대혁명 당시, 혁명군은 백성들을 선동하기 위해서 무언가 희생제물이 필요했고,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에서 시집온 마리 앙투아네트를 혁명을 위한 희생제물로 삼기 위해서, 그녀에게 ‘사치의 화신’이라는 악명을 뒤짚어씌운 것이라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큰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시대를 잘못 태어난 죄로 루이 16세와 함께 혁명세력의 희생제물로 바쳐져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왕비랍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해진 여러가지 결점들과 비난들도 크게 왜곡된 부분들이 많고, 오히려 그녀는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단두대에 선 마리 앙투아네트

 

그렇지만, 그 당시 프랑스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외간남자인 페르센백작과 염문을 뿌렸다는 소문이 귀족사회에 널리 퍼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230년 만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이 주고받았던 15통의 비밀편지들을 해독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 편지들을 통해 두사람이 실제로 연인관계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아이를 네명이나 낳았던 프랑스왕비가 남편 몰래 외갓 귀족남성과 18년동안 비밀연애를 했다고 하니, 정말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이 비밀연애를 했다는 명백한 증거물인 15통의 편지가 지금도 프랑스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최고권력가의 아내이자, 왕비로서 남부럽지 않게 화려한 삶을 살았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십수년동안 외갓남자와 비밀연애를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의 염문을 알면서도 눈감아줬던 남편 루이 16세의 무대응도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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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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