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주먹 시라소니 이성순 대 김두한의 실제 싸움대결, 이성순의 싸움실력, 기술, 키

 

 

시라소니 이성순은 싸움의 천재다. 역대 우리나라에는 유명한 싸움꾼들이 많이 있다. 임꺽정, 장길산, 구마적, 신마적, 김후옥, 김두한 등 쟁쟁한 싸움꾼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 중에 가장 강한 싸움꾼은 과연 누구일까?

엄밀히 말해서 이들 싸움꾼들 가운데, 가장 쎈 사람은 바로 시라소니 이성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라소니는 싸움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가장 쎈 상대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가서 꺾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싸움이라는 것은 서로 붙어보아야 누가 더 쎈 지를 알 것이 아닌가!’ 이것이 시라소니 이성순의 싸움철학인 것이다.

 

장안에 떠도는 소문이나 자자한 명성 보다는 직접 일대일 맞짱을 떠서 승리하는 자가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것이 시라소니가 갖고있는 평소의 싸움철학인 것이다.

 

시라소니는 실전 싸움을 통해서 조선과 만주 중국등지에서 수많은 국제적 주먹들을 물리치고 동양최고의 주먹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싸움꾼이다.

 

그렇게 수많은 실전경험을 통해서 진정한 최강자, 진정한 싸움꾼이라는 명성을 획득하면서 조선 최고의 싸움꾼이라고 불리워졌던 시라소니가 경성 최고의 주먹 김두한과 맞대결을 펼칠만한 사건이 1946년도 서울에서 벌어졌는데,

과연 북한 최고의 싸움꾼 시라소니와 남한 최고의 주먹 김두한간의 싸움(대결)에서 최후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여기서는 1946년도 서울(경성)에서 벌어졌던 남북한의 최고의 싸움꾼이라고 불리워졌던 두사람, 시라소니와 김두한의 싸움(대결)사건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 시라소니와 김두한부하들의 충돌

 

시라소니는 1936년도에 함경도에서 당시 최고의 싸움꾼이라고 불리워졌던 박두성에 도전해 일대일 맞대결에서 그를 쓰러뜨리면서 북한 최고의 주먹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었다.

 

당시 약관 21세에 불과했던 신의주출신의 시라소니는 안주에서 놀러운 건달들로부터 박두성이가 북한지역 최고의 주먹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 다음날 혈혈단신으로 안주로 찾아가서 박두성을 직접 만나, 그와 일대일 맞대결을 펼친 끝에, 공중걸이 박치기 연속공격으로 박두성을 KO시키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이 평안도 최고의 주먹 박두성과의 대결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시라소니는 북한지역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이 때부터 시라소니의 싸움신화가 시작되었다.

 

그 후, 시라소니는 힘없는 조선사람을 괴롭히는 일본형사를 때려눕힌 사건 때문에, 일본당국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지고, 그는 일제의 체포망을 피해서 만주로 떠나면서 만주, 중국등지에서의 유량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시라소니는 만주로 떠난 이후 주먹황제로서의 더욱 더 큰 명성을 떨치게 되었는데, 만주와 중국등지에서 마오, 하야시, 구로야마, 카네미야 등 국제적으로 유명한 거물급주먹들을 모두 물리치면서 중국대륙을 평정하는 등 동양최고의 주먹으로서 더욱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렇게 만주와 중국대륙에서 동양최고의 주먹으로 명성을 떨쳐나갔던 시라소니 이성순이 어느날 김두한 부하들과 한바탕 큰싸움을 벌이게된 사건이 발생했다.

 

1936년경 수도 경성에서 구마적과 신마적 등 최고의 오야붕들과 일대일 맞대결을 벌여서 이들을 모두 물리치면서 명실공히 경성최고의 주먹으로 우뚝 올라서게된 김두한!

 

약관 19세의 나이에 구마적과 신마적등을 물리치고 경성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선 김두한이었지만, 김두한은 결코 서울지역에서의 최고오야붕으로서만 만족할 수 없었다.

경성최고의 오야붕으로 우뚝 올라선 김두한의 야심은 바로 한반도 전체를 통할하는 조선최고의 오야붕이 되는 것이었다.

 

김두한은 야망이 무척 강한 매우 야심만한 인물이었고, 그는 결코 경성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조선 전체를 지배해는 조선의 최고오야붕이 될 야망을 갖고있었다.

 

김두한은 서울 뿐만아니라, 남쪽끝 부산에서 시작해서 북쪽끝 신의주까지 점령해서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의 오야붕이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김두한은 때로는 자신이 직접으로 나서서 싸웠거나, 때로는 부하들을 시켜서 지방의 도시들을 하나둘씩 점령해나갔다.

 

김두한의 우미관부대는 영등포와 광화문, 서대문, 왕십리와 마포 등 서울의 대부분을 점령한 뒤,
그들은 수원과 인천, 대전, 대구, 광주, 목포 등 지방의 대도시들을 하나둘씩 점령해나가면서, 우미관의 주먹조직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나갔다.

 

그리고 남쪽 끝에 있는 부산에는 자신의 죽마고우였던 친구이자 자신의 오른팔인 정진상과 50명의 부하들을 보내어서 부산주먹들을 모조리 무릎꿇리면서 마침내 부산지역마저 점령해버렸다.

 

그리고 김두한의 우미관조직은 북쪽의 개성과 원산을 점령한 후, 평양에도 자신의 부하들을 보내어서 이화룡과 담판을 벌이면서 이화룡으로부터 복속약속을 받아냈다.

당시 평양의 오야붕으로 있던 이화룡은 김두한의 부하들이 쳐들어와서 복속을 강요하자, 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평양의 이화룡의 입장에서는 김두한의 우미관조직에 저항하는 것보다는 그들과 적당히 손을 잡고, 평소에는 평양에서 얼마든지 독자적인 주먹활동을 할 수 있고,

단지 중대한 일이 발생할 경우에만 우미관과 협력해야한다는 김두한조직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해도 전혀 손해볼 것이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이화룡은 큰 무리없이 기꺼히 김두한의 복속요구에 순순히 응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조선의 대부분의 땅을 평정해나갔던 김두한의 우미관조직에게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지역은 바로 신의주였다.

 

때는 1940년도로 조선의 대부분 지역을 평정했던 김두한은 자신의 부하 40여명을 신의주로 급파했다.

 

신의주로 쳐들어간 40여명의 김두한부하들은 당시 신의주의 오야붕으로 있던 정팔을 만나서 담판을 지었다.

김두한의 부하들은 정팔에게 속히 우미관조직에 복속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정팔은 시간을 끌면서 속시원한 답변을 하지않은 채, 확답을 하지않았다.

 

정팔은 너무 갑작스러운 요구라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대해 김두한부하들은 일주일후에 우미관으로 결정사항을 통보해달라고 일주일간의 시간을 주면서 우미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신의주의 정팔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확답을 하지않으면서 계속 시간을 끌어나갔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도록 신의주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김두한은 자신의 왼팔이자 대단한 싸움꾼인 김경수와 털빠진 개고기 등 자신의 부하 40여명을 다시 신의주로 급파해서 정팔일행을 단단히 손보도록 했다.

 

정팔이 이토록 시간을 끌었던 이유는 바로 만주 봉천에 가있던 시라소니를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이당시 신의주의 두목으로 행세하고 있는 정팔은 단지 바지두목일 뿐이었고, 신의주의 진짜두목은 만주에 가있는 시라소니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스스로 김두한의 40명의 부하들을 상대하기가 벅차다고 판단한 정팔은 만주에 가있던 신의주의 진정한 오야붕인 시라소니에게 지원요청을 했던 것이다.

 

정팔의 지원요청을 들은 시라소니는 단번에 신의주로 돌아왔고, 정팔 사무실의 뒷방에 기거하면서 김두한 부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0년도 9월달의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늦여름의 저녘무렵에 정팔의 사무실로 건장한 청년들 40명이 들이닥쳤다.

바로 김두한의 부하들로서 김두한조직에서 김두한을 제외하고는 싸움으로 2인자라고 하면 서러워할 정도로 무서운 주먹을 휘둘러온 김경수와 털빠진 개고기, 그리고 김두한의 부하들 40명이 정팔사무실로 박차고 들어왔다.

 

이들은 정팔에게 ‘더이상 시간을 질질 끌지말고 김두한 우미관조직의 휘하로 들어올 것을 약속하라’고 말하면서 만일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않는다면, 신의주를 완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고 협박했다.

 

이것은 사실상 두목 정팔을 비롯한 신의주의 모든 주먹들이 김두한의 부하로 들어오라는 것인데, 정팔로서는 자존심상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정팔사무실 뒷방에 앉아서 이 이야기를 듣고있던 시라소니가 문을 박차고 나왔고, 그는 김두한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시라소니는 ‘내레 신의주 토박이 시라소니야, 너희들 어데서 굴러먹던 아새끼들이네! 너희들이 대체 누구간데 갑자기 신의주로 쳐들어와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기야?’ ‘더이상 신의주에서 말썽부리지말고 당장 꺼지라우! 너희들이 순순히 돌아간다면 내레 이번 행패는 없던 일로 할끼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두한의 오른팔인 김경수는 ‘이게 어디서 굴러먹던 말뼉다귀야! 조선천지를 전부 점령한 김두한의 우미관조직에 당장 들어오라우! 만일 우리요구를 듣지않는다면, 너희들 모조리 두들겨패서 완전 병신을 만들어줄꺼야!’라고 맞받아쳤다.

 

더 이상 말로서는 통하지않는다고 판단한 시라소니일행과 김두한부하들은 사무실 밖으로 나와서 결국 패싸움을 벌이게됐다.

 

사무실 밖에서 시라소니일행과 김두한부하 수십명이 서로 뒤엉켜서 한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에서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그러자, 갑자기 시라소니가 앞으로 나서면서 김경수와 털빠진 개고기에게 ‘너희들이 김두한조직의 대표자들인 것 같은데, 더 이상 부하들을 희생시키지말고 너희들이 직접 나와 맞승부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시라소니의 제안대로, 시라소니와 김두한이 파견한 돌격대의 대장격인 김병수와 털빠진 개고기가 대결을 벌이기로 했다.

 

김두하조직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정도로 주먹이 쎄다고 정평이 난 김경수가 먼저 시라소니에게 그의 오른쪽 강편치를 날렸다.

 

시라소니는 김경수의 강펀치를 고개를 숙여서 피한 후, 정광석화같은 박치기를 날려서 들이받아버렸다.

시라소니의 박치기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김경수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대로 뒤로 자빠져버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털빠진 개고기가 개거품을 물고 달려들면서 시라소니에게 강력한 왼주먹을 날렸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털빠진 개고기의 주먹을 살짝 피한 시라소니는 털빠진 개고기의 턱에 강력한 오른주먹을 날렸고, 주먹을 맞고 고개를 숙인 털빠진 개고기의 복부를 그대로 오른쪽무릎을 찍었는데, 그는 ‘억’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배를 부여잡고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조금 전에 시라소니의 박치기를 맞고 쓰러졌던 김경수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나서 공격자세를 취했다.

김경수는 털빠진 개고기를 쓰러뜨리고 한숨을 몰아쉬고 있던 시라소니에게 강력한 왼손주먹을 날렸고, 이를 보지못했던 시라소니가 그의 펀치를 정통으로 맞고 뒤로 쓰러졌다.

 

그런데, 뒤로 쓰러진 시라소니가 쓰러진 상태에서 강력한 박치기가 가해왔다.

시라소니는 김경수의 왼주먹을 턱에 얻어맞고 그 충격으로 뒤로 쓰러졌는데, 쓰러지는 반동을 이용해서 시라소니는 용수철처럼 땅으로부터 튕겨져나오면서 그대로 김경수의 이마를 들이받아버렸다.

 

‘쿵’하는 마찰음소리와 함께 시라소니는 몸전체를 수직으로 날려서 그대로 김경수의 이마를 들이받았고, 시라소니는 쓰러지려는 김경수의 복부를 다시한번 무릎찍기로 그대로 찍어버렸다.

 

시라소니의 정광석화와도 같은 박치기에 이른 무릎찍기에 그대로 당한 김경수를 그대로 다시한번 쓰러졌고,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김경수와 털빠진 개고기는 김두하조직에서 김두한 다음으로 주먹이 쎄다고 알려진 김두한주먹조직을 대표하는 주먹들인데도 불구하고,

시라소니와의 맞대결에서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시라소니의 박치기와 무릎찍기 기술에 걸려서 싸움이 시작된 지, 10분 만에 그대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시라소니가 돌격대장 두명을 완전히 재압해버리자, 나머지 김두한부하들은 시라소니의 실력과 위세에 눌려서 더 이상 공격을 못하고 그만 기가 꺽이고 말았다.

 

이때에 정팔의 부하들 30여명이 김두한부하들에게 돌진했고, 이로써 정팔부하들과 김두한부하들 간에 치고박는 피터지는 전투가 벌어졌다.

사기가 크게 꺾인 김두한부하들을 패싸움에서 점점 수세에 몰리면서 후퇴하더니, 전의를 완전 상실한 체, 그대로 모두 달아나버렸다.

 

1940년도에 벌어진 정팔조직과 김두한조직의 한바탕 패싸움에서, 시라소니의 신출귀몰한 실력 덕분에, 정팔조직이 완벽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한반도의 대부분의 지역을 재패한 김두한은 마지막 남은 신의주를 점령하기 위해서 자신의 선별된 부하 40명을 신의주로 파견해서 패싸움을 벌였지만,

시라소니의 두둑한 배짱과 신출귀몰한 싸움실력에 완전히 기가 죽은 그의 부하들은 수십명의 부상자만 발생시킨 체, 전원이 도망치듯이 서울로 쫒겨오고야 말았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김두한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서 노발대발했다.

지방으로 진출했던 김두한부대는 이때까지 단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이 승승장구해왔다.

 

서울을 비롯해 수원, 인천, 대전, 대구, 목포, 광주, 부산지역까지 완전 점령하였고, 그뿐만 아니라, 북쪽의 개성과 원산, 평양까지 점령하면서 패배를 전혀 몰랐던 김두한부대는 완전히 연전연승해나가는 무적함대 그 자체였다.

 

그렇게 완전 승승장구하면서 한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해왔던 김두한부대가 저 국경의 조끄마한 도시 신의주에서 김경수와 털빠진 개고기라는 두 거물급 주먹들이 시라소니라고 하는 이상한 놈에게 덜미가 잡혀서 완전 개박살나고 말았다니, 김두한으로서는 참으로 믿기가 힘든 사실이 아닐 수가 없었다.

 

김경수 등 김두한부하들은 김두한에게 ‘그 시라소니라고 하는 놈은 어찌나 빠르고 센지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싸운 놈 중에서 이렇게까지 쎈 놈은 정말 처음 봅니다.’라고 말했다.

 

김두한의 경호책임자로 임명될 정도로 김두한조직에서 싸움실력을 인정받았던 김경수가 시라소니와의 맞대결에서 제대로된 공격도 해보지못하고 보기좋게 KO당하고 말았으니, 시라소니의 싸움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두한조직의 사실상 2인자였던 김병수와 돌격대장인 털빠진 개고기를 시라소니 혼자서 상대해서 그들 모두를 완벽하게 KO시켰다는 것 자체는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조선천하의 주먹계를 거의 대부분 점령하다시피한 김두한조직에게 다른 지역의 주먹패들은 대부분 복종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시라소니 만큼은 그들의 침투를 결코 용납하지 않고, 맞서서 싸웠다는 것 자체가 시라소니가 얼마나 배짱이 쎄고, 강한 싸움꾼인지를 증명해주는 좋은 실례라고 하겠다.

 

여기서 참고로 시라소니의 키는 176cm이고, 김두한의 키도 176cm이어서 두사람이 키가 똑같다.

나이는 시라소니가 1916년생으로 1918년생인 김두한보다 2살이 더 많다. 1940년도 당시 김두한은 23인데 반해, 시라소니의 나이는 25살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김두한은 더 이상 부하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시라소니라는 놈을 직접 손보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신의주를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김두한은 자동차 스프링을 갈아서 엄청 날카로운 칼을 만들었고, 그 칼을 가슴속에 넣어둔 체, 부하 수십명을 대동하고 열차를 타고서 시라소니를 요절내기 위해 직접 신의주로 찾아갔다.

 

김두한일행이 신의주에 도착해 시라소니의 행적을 알아보았지만, 그 당시 시라소니는 이미 신의주를 떠났고, 만주 봉천으로 가있었다.

시라소니가 만주 봉천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김두한일행은 다시 열차를 타고서 봉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만주 봉천역에 도착한 김두한일행에게 갑자기 일본경찰들이 들이닥쳐 불심검문을 실시했고,

그 불신검문에서 김두한의 가슴속에 숨겨져있던 칼이 발각되었고, 그 때문에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만나보지도 못한 체, 그대로 경성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경성에서 일본경찰로부터 요주의인물로 낙인찍힌 김두한은 여행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였고, 열차에서 일본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 김두한은 일본경찰에 의해서 곧바로 경성으로 압송되고 말았다.

 

일본경찰의 개입으로 인해서, 남한지역의 최고의 싸움꾼으로 군림했던 김두한 대 북한지역의 최고의 싸움꾼인 시라소니간의 조선 최고의 주먹자리를 놓고 일대일 맞승부를 벌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만일 이 때에 김두한이 일본경찰의 불신검문에 걸리지않고 봉천으로 시라소니를 찾아가서 시라소니와 실제로 맞대결을 벌였다면, 과연 누가 이길 수 있었을까?

 

이 당시 김두한이 경찰의 불신검문에만 걸리지 않았다면, 조선최고의 주먹자리를 놓고 만주에서 김두한과 시라소니간의 역사적인 맞대결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두사람의 대결이 일본경찰의 개입으로 인해 끝내 이뤄지지 못한 점이 무척 아쉽게 생각된다.

 

그런데, 김두한 대 시라소니의 대결은 이로부터 6년이 지난 1946년도에 서울 한복판인 우미관에서 또다시 벌어지게된다.

 

1946년 2월경, 서울 종로 우미관에 있는 종로회관에서 시라소니와 김두한은 마치 운명처럼 서로 조우하게 되었고, 또다시 두사람 간의 운명을 건 맞대결이 벌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펼쳐지게된다.

 

◆ 서울 경성에서의 시라소니 대 김두한의 대결

 

신의주에서 활동하던 정팔이 공산당의 탄압을 이기지못하고 동생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내려왔고, 정팔은 명동의 중앙극장을 무대로 해서 조직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런데, 명동의 또다른 세력인 이화룡일파에게서 힘과 위세에서 밀리면서 그 존재감이 쇠락해지게된 정팔의 중앙극장파는 자신들의 세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신의주에 있는 시라소니를 모셔올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황병관, 맨발의 대장 같은 거물급주먹들이 많이 포진하고있는 명동파가 정팔의 중앙극장파를 파워면에서 압도해나가자, 수세에 몰리게된 중앙극장파의 정팔은 힘의 균형을 이루기위해서 신의주로 특사를 급파해서 시라소니를 급하게 모셔오게 된 것이다.

 

경성으로 온 시라소니는 오자마자 ‘디금 서울에서 누가 제일 쎄디?’라고 일갈하면서 서울의 주먹세계의 일인자에 대한 자신의 지대한 관심을 피력했다.

 

또한 시라소니는 명동에서 활개치고 있던 이화룡파의 기를 꺾어놓기 위해서 일부러 이화룡의 본거지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당시 2인자 행세를 하고있던 맨발의 대장 이영순에게 일대일 맞대결을 신청했다.

 

맨발의 대장 이영순은 키가 190cm나 되고 발의 크기가 37cm나 되는 그야말로 엄청난 괴력을 갖춘 거인이었다.

싸움에서 발차기가 주특기인 맨발의 대장은 한 싸움에서 자신의 오른발로 상대방을 걷어찼고, 그 상대방이 쓰러지면서 뇌진탕을 일으켜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의 발차기 한방에 상대방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한 맨발의 대장은 그 이후부터는 싸울 때는 꼭 신발을 벗고 싸우는 버릇이 생겼다. 그만큼 맨발의 대장의 발차기킥의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이화룡파의 본거지를 찾아간 시라소니는 대뜸 맨발의 대장에게 자신과 일대일 맞대결을 벌이자고 제안을 했다.

맨발의 대장이 흔쾌히 응하지않고 조금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자, 시라소니는 그에게 겁쟁이라고 놀리면서 약을 올렸다.

 

그러자, 오기가 발동한 맨발의 대장은 시라소니의 맞대결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두사람은 시공관 뒷골목에서 일대일 맞대결을 벌이게됐다.

 

서로 10m를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시라소니 대 맨발의 대장, 그러자 시라소니는 ‘자 간다!’라고 외치면서 동시에 4m를 달려나가면서 그대로 공중걸이 박치기로 맨발의 대장의 이마에 들이받아버렸다.

‘딱’ 하는 둔탁음과 함께 맨발의 대장의 ‘악!’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쓰러지는 맨발의 대장의 가슴팍에 또다시 시라소니의 오른발 무릎찍기가 작렬했다.

 

시라소니는 불과 2초 사이에 공중걸이 박치기와 무릎찍기의 공격을 동시에 가했고, 이를 얻어맞은 맨발의 대장은 제대로된 공격 한번 못해보고 그대로 대자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오른발킥 한방으로 상대방을 뇌진탕을 일으키게 한다는 맨발의 대장이 자신의 주특기인 킥을 전혀 사용해보지도 못한 체, 시라소니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박치기와 무릎찍기 연속공격을 받고 그냥 대자로 뻗어버리는 개망신을 당하고만 것이다.

 

뻗어버린 맨발의 대장은 한참동안 일어나지 못한 체 혼절해 있었는데, 비로서 10분이 지난 후에 겨우 일어난 맨발의 대장에게 시라소니가 다가가서 ‘영순이, 고마워, 덕분에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내레 몸 한번 잘 풀었어, 내레 오늘 술한잔 사갔어!’라고 말했다.

 

시라소니가 이화룡파의 실력자 맨발의 대장을 KO시키면서, 명동에서 이화룡파와 정팔파간의 세력균형이 이뤄지게 되었고, 이화룡파는 더이상 정팔파를 무시할 수 없게되었다. 극적으로 이화룡파와 정팔파간의 화해모드가 형성되었다.

 

1946년의 어느날, 시라소니는 신의주출신의 고향친구이자 역도선수인 이영환과 함께 술을 마시러 우미관에 있는 종로회관으로 들어갔다.

시라소니가 서울에 온 후, 김두한의 아성이자 아지트인 우미관입구에 있는 종로회관을 방문한 것인데, 이것은 어찌보면 시라소니가 김두한의 나와바리를 침범한 것이나 다름 없다.

 

이 당시는 주먹조직들간의 나와바리가 형성되어 있었고, 상대방의 나와바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지역 주먹조직의 사전허락을 받아야하는 시대였다.

시라소니가 사전허락도 전혀 없이 김두한의 본거지인 종로회관으로 들어간 것은 어찌보면 김두한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시라소니가 다른 장소도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김두한의 아지트인 종로회관을 찾아간 것을 두고, 시라소니의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시라소니는 자신보다 쎄다는 사람이 있으면, 기어코 그를 찾아가 도전해서 반드시 꺾어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다!

싸움에 있어서 자존심이 엄청 쎈 시라소니는 자신보다 더 강한 주먹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스스로 그 강자를 찾아가 꺾어놓음으로써 스스로 일인지하(一人地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싸움꾼으로 남길 원했다.

 

이 당시 시라소니가 우미관의 종로회관에 들어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쫙 퍼졌고, 그 소식은 꼬붕들에 의해서 김두한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 당시 김두한은 서대문에서 지인들과 만나 술 한잔 걸치고난 후, 다시 우미관본거지로 돌아왔을 때였다.

우미관극장으로 들어간 김두한은 동생들에게 ‘어이, 오늘 종로회관에서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라고 말했고, 동생들은 ‘멀리 갈 것 없이 그냥 이곳에서 막걸리나 한잔 마시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두한은 다시 ‘아냐, 오늘을 그냥 종로회관에 가서 술마시고 싶어!’라고 동생들을 종용했고, 결국 김두한을 위시로 해서 신영균, 문영철, 김무옥, 김삼수, 홍만길, 종로꼬마, 털빠진 개고기, 김관철, 김경수 등 그의 동생들 10여명과 함께 종로회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김두한일행이 종로회관으로 들어섰고, 김두한과 잘 알고지내던 역도선수 이영환은 김두한을 보고 인사를 나눴다.

두사람이 인사를 나누자, 이영환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시라소니가 김두한일행쪽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김두한의 왼팔 김경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김두한에게 ‘형님, 저놈이 바로 시라소니예요!’라고 말했다.

과거 6년전, 김두한대원들을 이끌고 신의주까지 가서 직접 싸웠던 시라소니의 얼굴을 톡톡히 기억하고 있던 김경수가 그곳에 와있던 시라소니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해낸 것이다.

 

그러자,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노려보면서 ‘네놈이 시라소니야, 너 이새끼, 일전에 신의주로 내려간 내 동생들을 때리고 박살냈다며!

네놈이 감히 호랑이굴로 제발로 쳐들어와, 너 오늘 정말 잘 만났다!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이 될 줄 그리 알아!’라고 일갈했다.

 

사실 김두한은 이날 꼬붕의 보고를 통해 시라소니가 종로회관으로 들어온 것을 이미 알고있었고, 그래서 싸움 잘하는 중간보스급 동생 10명을 거느리고 종로회관에 들어온 것이다.

김두한은 시라소니에게 일갈을 퍼부어서 과거에 자신의 동생들을 두들겨팼던 그를 혼내주고 손을 봐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시라소니가 ‘네가 김두한이냐!’라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시라소니는 김두한에게 ‘어라, 이게 서울인사법이라고 이거지, 내레 경성의 최고오야붕이 김두한이라는 얘긴 많이 들었디, 그런데, 님자가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 욕지거리를 하다니, 처음 신고식치고는 이거 좀 심하구만!’

 

내레 일전에 서울의 똘마니들이 신의주에 와서 하도 설치길래, 손 좀 봐준 것 뿐인데, 그것이 못마땅하다면 이거 잘 됐구먼,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 누가 더 쎈디 밖으로 나가서 한번 붙어보자우!’라고 말하면서 김두한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라소니가 이렇게 도발적인 말을 하자, 김두한부하들이 모두 일어났다. 그리고 그 부하들 중에서 김두한의 경호를 맡고있던 김관철이 시라소니를 향해 돌진했다.

 

덩치가 남산만 한 김관철은 시라소니를 향해 달려갔고, 솥뚜껑만한 오른쪽주먹을 시라소니의 턱을 향해 날렸다.

그러자, ‘퍽’하는 둔탁음이 울렸고, 그 이어 ‘윽!’하는 소리와 함께 김관철의 거구의 몸이 그래도 거꾸러지고 말았다.

 

분명히 주먹을 내뻗은 사람은 김관철인데, 오히려 대자로 뻗어버린 사람은 시라소니가 아닌 김관철이었다.

 

시라소니는 김관철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오는 김관철을 향해 공중으로 치솟으면서 박치기를 가했고, 박치기를 맞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김관철의 옆구리에 그대로 무릎치기로 찍어버린 것이다.

 

시라소니의 연속공격을 받은 김관철은 고목나무 쓰러지듯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시라소니의 공격에 키 185cm에 몸무게 120kg이나 되는 거구의 김관철이 쓰러지자, 김두한과 그의 동생들은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10여명의 김두한의 동생들은 시라소니를 한꺼번에 공격하기 위해 김두한의 그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시라소니와 김두한일행 간의 누가 먼저 공격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태가 잠시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김두한으로부터 뜻밖의 다음과 같은 말이 터져나왔다. 김두한은 갑자기 껄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시라소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시라소니란 사람이 우리구역에 들어왔다기에 어떤 사람인가 한번 보고싶어서 이렇게 나왔던 겁니다’라고 말하면서,

김두한은 ‘안 그래도 시끄러운 세상인데, 우리까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지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명동의 이화룡과도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고있습니다. 저보다 연배이시니 앞으로 제가 형님으로 대우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시라소니에게 화해를 권했고, 시라소니도 흔쾌히 김두한의 화해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두사람은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두한과 시라소니는 그 날 종로회관에서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시면서 함께 밤을 지세웠다.

 

이렇게 시라소니와의 대결을 펼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김두한은 싸움 대신 화해하는 쪽을 택했다. 김두한은 싸움도 잘하지만, 싸움 못지않게 두뇌회전과 상황판단이 무척 빠른 사람이다.

 

김두한은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활동하는 시라소니와 싸워서 이겨야 본전이고, 만일 진다면 오야붕자리를 포함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마는 상황에서,

그를 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적당히 구슬려서 그와 협력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욱 이로울 것이라는 판단을 했고, 그 결과 김두한은 시라소니와의 화해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 때의 상황을 놓고 많은 호사가들은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비굴하게도 무릎을 꿇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자신의 경호원 김관철을 단 두방의 공격으로 KO시키는 장면을 본 후,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겁을 먹고 시라소니와의 맛대결을 회피한 것이라고 평가를 한다.

 

시라소니가 김두한의 나와바리 한복판에 들어가서 10명이 넘는 김두한일행과 당당하게 맞서면서 김두한으로 하여금 싸움을 회피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시라소니의 두둑한 배짱과 용력만큼은 정말 대단하다고 본다.

 

아뭏튼 시라소니가 분명히 김두한에게 도전을 했고, 이 도전을 김두한이 회피했기 때문에, 비록 두사람이 싸우지 않았더라도, 사실상 승부는 낫다고 보며, 분명히 시라소니의 판정승이라고 본다.

 

만일 이때에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화해를 청하지않고 대결을 펼쳤다면, 과연 누가 이겼을 것인가?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을 수 있지만, 만일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일대일 맞대결을 펼쳤다면, 시라소니가 김두한을 KO시켰을 것이라고 본다.

 

김두한은 ‘잇뽕’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주먹 한방의 위력이 매우 대단한 사람이며, 발차기도 잘하는 싸움의 달인이다.

그런데, 김두한은 주로 일대일싸움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시라소니는 천진에서 카네미야일당과 40 대 1의 대결을 벌여서 이겼던 사람이다.

 

김두한이 비록 일대일싸움을 잘하는 싸움의 달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전적에서 보듯이 시라소니는 수십명과 대결을 펼쳐서 모두 물리쳤을 정도로 싸움기술에 있어서는 신과도 같은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고 엄청 빠른 사람이다.

 

만일 시라소니와 김두한이 일대일 맞대결을 펼쳤다면, 시라소니가 엄청 빠른 스피드를 이용

해서 쏜살같이 달려들어 공중걸이 박치기로 김두한을 KO시킬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시라소니의 정광석화와도 같은 박치기공격에는 김두한의 강한 주먹도 무용지물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몸전체의 체중을 실어서 날아가서 받아버리는 공중걸이 박치기는 주먹 위력의 3배~5배 이상의 위력을 지니고 있으며, 김두한이 내뻗는 주먹보다 시라소니의 박치기의 위력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만일 두사람이 실제 대결을 벌인다면 여지없이 시라소니의 KO승으로 끝이 난다고 본다.

 

그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두뇌회전이 빠른 김두한이 자신에게 도전의사를 피력한 시라소니에게 적당히 화해를 요청해서 그 위기를 피해나갔다고 본다.

 

한국 최고의 주먹황제라고 불리워졌던 김두한과 동양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명성을 떨쳤던 시라소니간의 맞대결이 벌어질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김두한의 석연치않은 기권으로 두사람간의 역사적인 맞대결이 이뤄지지않음으로써 진정한 한국 최고의 주먹을 가려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척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만일 이 때에 김두한과 시라소니간의 일대일 맞대결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정말 승자가 누가 되었을지 무척 궁금하기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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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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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의 내연녀 메리 마이어, 미국 케네디대통령과의 불륜 및 내연관계, 사망이유

 

오늘은 케네디대통령의 숨겨진 정부로 알려진 메리 마이어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메이 마이어는 유명변호사인 아버지와 저널리스트인 어머니의 사이에 태어나 엘리트코스를 밟으면서 화가가 되길 꿈꾸었습니다.

 

그렇지만 메인 마이어는 결혼한 후 세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독박육아에 전념하며 자신의 꿈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남편 코드 마이어는 무심한 성격에 가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남편 코드 마이어는 전혀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않았고, 유독 비밀이 많았으며 수시로 외출해서 가정을 비우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1956년도에 메리 마이어는 결혼 11년만에 이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메리 마이어는 둘째아기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남편과 결혼생활을 청산했습니다.

메리 마이어는 남편과 애정없는 결혼생활을 해왔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편과 이혼소송을 거친 후, 1958년도에 남편과 정식 이혼했습니다.

 

이혼한 후, 메리 마이어는 위싱턴DC의 조지타운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여러 정관계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본격적인 사교생활에 들어갑니다.

 

위싱턴DC의 조지타운은 미국의 정치계, 경제계, 예술계 거물들이 많이 몰려사는 곳으로, 이곳에서 메리 마이어는 사회적으로 유명인사들과 수시로 만나면서 사교모임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메리 마이어는 이웃집 남성과 특별한 친분을 쌓았는데요. 그 이웃집 남성은 유부남이었는데 불구하고 메리 마이어와 급속도로 친해지면서 두사람은 결국 내연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964년도, 공원을 산책 중이던 메리 마이어는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쏜 총 두발을 맞아 사망하고맙니다.

 

그리고, 메리가 마이어가 죽었을 때, 그녀의 전남편 코드 마이어가 메리 마이어를 죽인 범인이라는 루머가 나돌았습니다.

 

전남편 코드 마이어는 당시 CIA의 고위급 간부였는데, 그는 자신은 군인이라고 말하면서, CIA 고위간부라는 사실을 숨긴 채, 그녀와 결혼했던 겁니다.

 

전남편이 메리 마이어에게 비밀이 많았던 것도 그가 CIA의 비밀공작에 많이 간여했었기 때문이지요.

 

자연히 부인인 메리 마이어도 남편이 추진하는 CIA의 비밀공작에 대해 많이 알게되었고, CIA의 비밀정보를 많이 알고있었던 메리 마이어가 이러한 비밀정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CIA요원이었던 전남편이 비밀유지를 위해 그녀를 제거했다는 겁니다.

 

 

◆ 메리 마이어, 존 F. 케네디와 불륜관계, CIA가 두사람 관계를 감추려고 살해했다?

 

그런데, 메리 마이어가 전 미국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 내연관계였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CIA가 메리 마이어와 존 F. 케네디이 불륜관계였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그녀를 살해했다고 합니다.

 

메리 마이어가 죽고난 다음날, CIA요원이 몰래 메리의 집을 찾아와서 메리 마이어의 개인일기책을 갖고 달아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메리 마이어의 개인일기책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길래, CIA요원이 그녀의 일기책을 갖고갔을까요?

 

그당시 메리 마이어는 어떤 유부남과 불륜관계에 있었는데, 일기책을 가져간 것은 그녀의 불륜상대남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메리 마이어의 불륜상대남을 누구였을까요? 그녀의 불륜상대남은 바로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였습니다.

 

CIA요원이 가져간 그녀의 일기책에는 케네디대통령과의 불륜사실이 노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메리 마이어와 존 F 케네디는 위싱턴DC의 조지타운에서 이웃사촌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케네디가 상원의원이었을 때부터 두사람은 자주 만나 밀회를 즐겼습니다.

 

그러니까, 케네디와 메리 마이어는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기전부터, 일주일에 두세번씩 만나 밀회를 즐겼다고 합니다.

 

이 후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두사람은 백악관의 비밀공간에 만나 불륜관계를 지속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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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메리의 여동생부부와 케네디대통령부부가 절친이었기 때문에, 메리 마이어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백악관을 자주 드나들면서 케네디와의 만날 기회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메리 마이어와 케네디대통령은 친분관계를 이용해서, 백악관의 은밀한 곳에서 자주 만나 은밀한 정사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케네디대통령이 자신을 만나러 오라며 메리 마이어에게 보낸 연애편지가 훗날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케네디대통령은 메리 마이어에게 ‘메리, 보고싶어! 주말에 날 만나러 와줄 수 있을까?’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케네디대통령이 암살당하기 한달 전에 쓴 이 연애편지는 케네디대통령의 인장까지 찍혀있었으며, 이 러브레터는 2016년 6월 미국에서 경매에 부쳐짐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경매에 부쳐진 이 케네디대통령의 러브레터는 1억 1000만원에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일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메리 마이어와 케네디대통령은 마약을 함께 즐긴 사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평소 메리 마이어는 사교모임에서 만난 고위급인사들에게 마약을 제공해왔다고 합니다.

또한 메리 마이어는 케네디대통령과 강력한 환각제인 LSD를 함께 복용했을 뿐만아니라, 심지어 백악관의 은밀한 침실에서도 함께 마리화나를 피운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메리 마이어와 케네디대통령은 단순한 내연관계를 넘어서서 함께 마약을 즐겼던 마약중독자들이었습니다.

 

이같은 사실들은 메리 마이어의 제부이자 유명한 언론사간부인 벤 브레들리가 언론에 공표하면서 밝혀졌습니다.

놀랍게도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메리 마이어와 함께 마약중독자였던 겁니다.

 

메리 마이어가 살해당한 시기는 케네디대통령이 암살당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으로, CIA가 케네디대통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메리 마이어를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벤 브레들리는 없어진 메리의 일기장에 이같은 여러 가지 비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메리 마이어가 죽은 것은 그녀가 케네디대통령과 내연관계였다는 사실과 두사람이 함께 마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CIA가 그녀를 제거했다는 겁니다.

 

케네디대통령과 관련되어 살해당한 여성은 메리 마이어 외에도 여배우 마릴린 몬로도 있지요.

마릴린 몬로의 죽음도 의문투성이이며, 그녀도 한 때 케네디대통령의 정부였고, 케네디대통령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암살당했다는 음모론이 나돌고 있습니다.

 

미국의 존 F. 케네디대통령과 메리 마이어가 불륜관계였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또한 케네디대통령이 메리 마이어와 함께 마약을 즐겼다는 사실에 또한번 더 놀라게 됩니다.

 

사실 미국의 존 F. 케네디대통령은 원래 엄청난 바람둥이였습니다. 케네디대통령은 마릴린 몬로와 킴 노박 등 당대의 유명한 허리우드여배우들과 성스캔들을 많이 일으켰던 유명한 바람둥이랍니다.

 

케네디대통령은 여배우 주디스 켐벨, 마를렌 디트리히, 백악관 인턴 미미 엘포드를 비롯해서 영부인 비서 파멜라 투루누어 등 무려 100여명의 여성들과 불륜을 나눴다고 합니다.

 

케네디대통령이 46세의 젊은 대통령으로서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백악관 침대에서 남몰래 외간 여성을 들여와서 함께 마약을 즐겼다는 사실은 정말 대통령으로서 있을 수 없는 매우 부도덕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케네디대통령의 외도에 신물이 난 제클린여사가 마피아와 짜고서 케네디대통령을 암살했다는 루머까지 나돌았을까요?

 

오늘을 케네디대통령의 숨겨진 연인 메리 마이어의 사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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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미국인 웬디 덩의 성격과 재산, 프로필과 최근 근황과 스파이설 , 2조원대 자산가

 

오늘은 팜므파탈이라고 불리우는 재벌가의 요정 웬디 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웬디 덩은 원래 중국의 무일푼 여성으로서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재벌이 된 신데렐라 같은 여성이었지요.

 

웬디 덩은 자신의 아름다운 미모를 앞세워서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과 결혼해서 재벌이 되었으며,

또한 영국 전 토니 블레어총리와 정사를 벌여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희대의 요부이기도 합니다.

 

중국 산동성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웬디 덩이 어떻게 해서 2조원대의 굴지의 재벌이 되었는지, 그 기막힌 사연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원래 웬디 덩은 중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웬디 덩은 1968년 12월 산동성의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미국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미국인부부에게 입양되면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에서 캘리포니아 주립대를 거쳐서 예일대 경영대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럼 먼저 웬디 덩의 프로필을 살펴볼께요!

 

- 웬디 덩의 프로필 -

 

출생일 - 1968년도 나이 56살

출생지 - 산동성 지난

키 178cm,

국적 - 미국,

가족 딸 2명,

학력 - 예일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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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원래 돈에 관심이 많았고 야망이 컸던 웬디 덩은 자신의 양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그를 전처와 이혼시킵니다.

그것도 모자라, 웬디 덩은 자신의 양아버지와 결혼식을 올리는 희대의 웃지못할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웬디 덩은 양아버지와 결혼 후 2년 7개월만에 전격 이혼을 요구합니다. 그 이유는 원래 웬디 덩은 처음부터 자신의 양아버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미국인과 결혼함으로써 미국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함이었지요.

 

이제 웬디 덩이 그토록 원했던 미국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니,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남편이 필요없게 된 것이며, 그녀는 양아버지와 전격 이혼하면서 자유의 몸이 된답니다.

 

웬디 덩은 재벌에서 총리까지 전세계의 정상급 남자들을 이용해서 무일푼에서 2조원대의 재산을 가진 재벌로 성장한 팜므파탈 웬디 덩!

그녀가 어떻게 해서 무일푼에서 재벌로 둔갑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어요!

 

이제 혼자가 된 웬디 덩은 웨일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루퍼트 머독이 운영하는 한 미디어회사에 취직하게됩니다.

 

웬디 덩은 자신이 부와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자신의 팔자를 바꿔줄 재벌을 만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관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에 웬디 덩은 자신의 인생목표를 재벌이 되는 것으로 삼고, 아주 교묘한 술책을 하나 세우게되는데요.

웬디 덩은 평생 셀러리맨으로 살아봤자, 결코 재벌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총수인 루퍼트 머독을 유혹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포스트, 20세기 폭스 등 굴지의 언론미디어회사들을 운영하면서 22조원의 자산을 가진 언론재벌이 바로 루퍼트 머독입니다.

 

웬디 덩은 언론재벌 루퍼드 머독을 타킷으로 삼고 그에게 접근해서 그를 유혹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 웬디 덩은 홍콩스타TV에 인턴사원으로 입사했는데, 홍콩스타TV는 루퍼드 머독이 아시아에 진출하기 위해서 인수한 회사였습니다.

 

그리고 홍콩스타TV 인수를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열렸는데, 이날 전혀 초대조차 받지않았던 웬디 덩은 아름다운 하얀드레스를 입고 이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웬디 덩은 루퍼드 머독에게 접근해서 그의 옷에 고의적으로 와인잔을 쏟아버리는 행동을 자행합니다.

 

이렇게 실수인 척 하면서 의도적으로 루퍼드 머독의 옷에 술을 쏟아부은 그녀는 이순간 루퍼드 머독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드레스를 입고있는 동양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웬디 덩을 본 루퍼드 머독은 웬디 덩의 이국적인 매력에 사로잡히게됩니다.

 

루퍼드 머독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 웬디 덩을 곧바로 자신의 통역사 겸 비서로 승진시킨 후, 출장갈 때마다 항상 그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웬디 덩은 이 기회를 놓치지않고 루퍼드 머독을 유혹해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으며, 결국 1999년 웬디 덩은 루퍼드 머독과 결혼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뉴스 코퍼레이션 회사의 인턴사원에 불과했던 웬디 덩은 루퍼드 머독의 옷에 고의로 술을 부은 것이 인연이 되어서,

쾌속승진을 거듭한 끝에, 결국 언론재벌 루퍼드 머독과 결혼까지 했던 겁니다.

 

1999년 6월 25일 루퍼드 머독은 신부 웬디 덩과 자신의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때 루퍼드 머독은 자신의 전처와 이혼한 지 불과 3주만에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려서 더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때 루퍼드 머독의 나이는 68세, 웬디 덩은 31세로 두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37세로 누가 보더라도 문제가 많은 부적절한 결혼식이었습니다.

31살의 웬디 덩이 자신보다 37살이나 많은 늙은 루퍼드 머독과 결혼한 이유는 바로 루퍼드 머독이 가진 돈과 권력 때문이었습니다.

 

웬디 덩은 자신의 아름다운 미모를 팔아서 22조원대의 재산을 가진 루퍼드 머독을 유혹해서 그와의 결혼에 성공한 것인데요,.

 

이렇게 22조원대의 자산가인 루퍼드 머독과 결혼에 성공한 웬디 덩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남편 루퍼드 머독이 전립선 암에 걸리자, 남편을 졸라서 아이를 낳자고 제안했고, 결국 시험관시술을 통해서 그녀는 두명의 딸을 낳는데 성공합니다.

 

웬디 덩이 두명의 자식을 낳았던 이유는 아이를 가지면 남편이 죽은 후에 더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전립선암에 걸렸던 루퍼드 머독은 최고의 의료진의 수술을 받은 후, 완치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두사람은 어여쁜 딸까지 낳으면서 외관상으로는 금슬좋은 부부로 잘살아왔습니다.

 

그런데, 2013년도에 갑자기 루퍼드 머독과 웬디 덩은 이혼을 전격 발표하게됩니다. 그런데, 이혼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웬디 덩이 아닌 남편 루퍼드 머독이었습니다.

 

그리고 두사람이 전격 이혼한 이유는 웬디 덩의 불륜 때문이었습니다.

 

웬디 덩은 루퍼드 머독과 결혼생활 중에 또다른 남성인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잘생기고 지성적인 외모와 유창한 말솜씨로 영국총리가 되어서 국제무대를 주름잡았던 인물이 바로 토니 블레어였습니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1997년도부터 2007년까지 10년동안 영국총리로 재임했던 인물입니다.

 

토니 블레어총리는 루퍼트 머독의 오랜 친구였고, 토니 블레어는 루퍼트 머독과 웬디 덩의 딸 그레이스의 대부가 되어줄 정도로 엄청 친근한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두사람 부부는 함께 파티도 자주 열면서 자주 만남을 가져왔는데요.

 

그런데, 2014년도에 토니 블레어와 웬디 덩이 불륜관계라는 보도가 나와서 큰화제가 되었습니다.

 

원래 토니 블레어를 처음 보았던 웬디 덩은 그의 잘생긴 외모를 보고 홀딱 반했습니다.

젊고 잘생겼으며 지성미 넘치는 토니 블레어를 보고 그를 마음속에 품게된 웬디 덩은 토니 블레어에게 접근해서 그에게 추파를 던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웬디 덩이 결혼 직후부터 토니 블레어에게 접근해 추파를 던졌다는 사실입니다.

 

토니 블레어 또한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지만, 웬디 덩의 유혹에 넘어갔고, 토니 블레어는 그녀와 오랜기간 동안 불륜관계를 맺어왔다고 합니다.

 

특히 웬디 덩은 그녀 소유의 개인요트와 런던자책에서 수시로 토니 블레어와 만나서 밀회를 즐겨왔다고 합니다.

 

또한 웬디 덩은 토니 블레어와 사랑을 속삭이는 내용의 300통이 넘는 문자메일을 주고받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두사람간에 주고받은 사랑의 메일을 본 남편 루퍼트 머독은 두 사람의 불륜사실을 눈치챘고, 전격 웬디 덩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결국 이혼소송 끝에 웬디 덩과 루퍼트 머독은 전격 이혼하게 되는데, 웬디 덩이 남편과 이혼 후 받았던 위자료는 무려 2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웬디 덩이 내연남 토니 블레어와 불륜을 저질렀던 내용들을 의도적으로 남편 루퍼트 머독이 보게했고, 일부러 남편과의 이혼을 유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웬디 덩은 남편과 이혼으로 인한 2조원이라고 하는 거액의 위자료를 챙겼던 겁니다.

 

그러니까, 웬디 덩이 재벌남편과의 결혼과 이혼, 거액의 위자료를 받았던 것 모두 웬디 덩이 의도적으로 자초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웬디 덩은 남자를 이용해서 부와 권력을 차지할 정도로 지능이 뛰어나고 기회를 잘 포착하는 대단히 기회주의적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언론에서는 그런 그녀를 ‘세계 최악의 암캐’라는 별명까지 붙여줬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남편과 이혼한 이후, 지금 웬디 덩은 20대 초반의 헝가리 출신의 잘생긴 남성모델 베르톨드 자호란과 사귀고 있다고 합니다.

 

이젠 자신보다 나이가 27살이나 어린 남성모델을 사귀고 있다고 하는데, 과거에 나이가 많은 재벌의 돈을 다 빨아먹고 그를 버린 후,

이제는 나이가 한참 어린 젊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있다고 하니, 정말 웬디 덩은 낯짝이 두꺼운 희대의 요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웬디 덩이 중국의 스파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2018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장녀 이방카와 그녀의 남편 재러드 쿠슈너가 웬디 덩 때문에, FBI에 소환된 적이 있습니다.

 

이방카는 1999년 웬디 덩이 루퍼트 머독과 결혼한 뒤 서로 친하게 지내온 사이였고,

이방카가 재러드 쿠슈너와 결혼한 후 세 사람이 함께있는 모습이 언론에 자주 목격되고도 했습니다.

 

FBI는 웬디 덩을 중국의 스파이로 의심했는데, 그 이유는 2016년 미국 워싱턴DC에 중국정원을 건설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작됐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는데, 이 당시 웬디 덩이 재러드 쿠슈너를 설득해서 중국정원의 건설을 완공해달라고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문제가 된 것은 공원 내에 설치될 21m 높이의 탑이었는데, 이 탑은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등 미국의 중요기관과의 거리가 불과 8km밖에 안되어서, 감시와 도청이 가능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웬디 덩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이 중국탑의 건설은 보안상 이유로 최종 중단되었습니다. 루퍼트 머독 또한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서 웬디 덩이 중국의 스파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웬디 덩은 자신이 중국스파이라는 의혹에 대해 말도 안되는 ‘낭설’이라고 일축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웬디 덩은 영화제작자이자, 스타트업 투자자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신의 부와 권력이라는 두가지 목표 달성을 위해서 두 남자의 가정을 파탄냈던 21세기 세계 최고의 요부이자, 팜므파탈 웬디 덩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소문내기 활동을 하면서 해당 광고업체로부터 경제적 대가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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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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