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의 내연녀 메리 마이어, 미국 케네디대통령과의 불륜 및 내연관계, 사망이유

 

오늘은 케네디대통령의 숨겨진 정부로 알려진 메리 마이어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메이 마이어는 유명변호사인 아버지와 저널리스트인 어머니의 사이에 태어나 엘리트코스를 밟으면서 화가가 되길 꿈꾸었습니다.

 

그렇지만 메인 마이어는 결혼한 후 세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독박육아에 전념하며 자신의 꿈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남편 코드 마이어는 무심한 성격에 가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남편 코드 마이어는 전혀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않았고, 유독 비밀이 많았으며 수시로 외출해서 가정을 비우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1956년도에 메리 마이어는 결혼 11년만에 이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메리 마이어는 둘째아기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남편과 결혼생활을 청산했습니다.

메리 마이어는 남편과 애정없는 결혼생활을 해왔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편과 이혼소송을 거친 후, 1958년도에 남편과 정식 이혼했습니다.

 

이혼한 후, 메리 마이어는 위싱턴DC의 조지타운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여러 정관계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본격적인 사교생활에 들어갑니다.

 

위싱턴DC의 조지타운은 미국의 정치계, 경제계, 예술계 거물들이 많이 몰려사는 곳으로, 이곳에서 메리 마이어는 사회적으로 유명인사들과 수시로 만나면서 사교모임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메리 마이어는 이웃집 남성과 특별한 친분을 쌓았는데요. 그 이웃집 남성은 유부남이었는데 불구하고 메리 마이어와 급속도로 친해지면서 두사람은 결국 내연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964년도, 공원을 산책 중이던 메리 마이어는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쏜 총 두발을 맞아 사망하고맙니다.

 

그리고, 메리가 마이어가 죽었을 때, 그녀의 전남편 코드 마이어가 메리 마이어를 죽인 범인이라는 루머가 나돌았습니다.

 

전남편 코드 마이어는 당시 CIA의 고위급 간부였는데, 그는 자신은 군인이라고 말하면서, CIA 고위간부라는 사실을 숨긴 채, 그녀와 결혼했던 겁니다.

 

전남편이 메리 마이어에게 비밀이 많았던 것도 그가 CIA의 비밀공작에 많이 간여했었기 때문이지요.

 

자연히 부인인 메리 마이어도 남편이 추진하는 CIA의 비밀공작에 대해 많이 알게되었고, CIA의 비밀정보를 많이 알고있었던 메리 마이어가 이러한 비밀정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CIA요원이었던 전남편이 비밀유지를 위해 그녀를 제거했다는 겁니다.

 

 

◆ 메리 마이어, 존 F. 케네디와 불륜관계, CIA가 두사람 관계를 감추려고 살해했다?

 

그런데, 메리 마이어가 전 미국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 내연관계였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CIA가 메리 마이어와 존 F. 케네디이 불륜관계였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그녀를 살해했다고 합니다.

 

메리 마이어가 죽고난 다음날, CIA요원이 몰래 메리의 집을 찾아와서 메리 마이어의 개인일기책을 갖고 달아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메리 마이어의 개인일기책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길래, CIA요원이 그녀의 일기책을 갖고갔을까요?

 

그당시 메리 마이어는 어떤 유부남과 불륜관계에 있었는데, 일기책을 가져간 것은 그녀의 불륜상대남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메리 마이어의 불륜상대남을 누구였을까요? 그녀의 불륜상대남은 바로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였습니다.

 

CIA요원이 가져간 그녀의 일기책에는 케네디대통령과의 불륜사실이 노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메리 마이어와 존 F 케네디는 위싱턴DC의 조지타운에서 이웃사촌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케네디가 상원의원이었을 때부터 두사람은 자주 만나 밀회를 즐겼습니다.

 

그러니까, 케네디와 메리 마이어는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기전부터, 일주일에 두세번씩 만나 밀회를 즐겼다고 합니다.

 

이 후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두사람은 백악관의 비밀공간에 만나 불륜관계를 지속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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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메리의 여동생부부와 케네디대통령부부가 절친이었기 때문에, 메리 마이어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백악관을 자주 드나들면서 케네디와의 만날 기회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메리 마이어와 케네디대통령은 친분관계를 이용해서, 백악관의 은밀한 곳에서 자주 만나 은밀한 정사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케네디대통령이 자신을 만나러 오라며 메리 마이어에게 보낸 연애편지가 훗날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케네디대통령은 메리 마이어에게 ‘메리, 보고싶어! 주말에 날 만나러 와줄 수 있을까?’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케네디대통령이 암살당하기 한달 전에 쓴 이 연애편지는 케네디대통령의 인장까지 찍혀있었으며, 이 러브레터는 2016년 6월 미국에서 경매에 부쳐짐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경매에 부쳐진 이 케네디대통령의 러브레터는 1억 1000만원에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일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메리 마이어와 케네디대통령은 마약을 함께 즐긴 사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평소 메리 마이어는 사교모임에서 만난 고위급인사들에게 마약을 제공해왔다고 합니다.

또한 메리 마이어는 케네디대통령과 강력한 환각제인 LSD를 함께 복용했을 뿐만아니라, 심지어 백악관의 은밀한 침실에서도 함께 마리화나를 피운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메리 마이어와 케네디대통령은 단순한 내연관계를 넘어서서 함께 마약을 즐겼던 마약중독자들이었습니다.

 

이같은 사실들은 메리 마이어의 제부이자 유명한 언론사간부인 벤 브레들리가 언론에 공표하면서 밝혀졌습니다.

놀랍게도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메리 마이어와 함께 마약중독자였던 겁니다.

 

메리 마이어가 살해당한 시기는 케네디대통령이 암살당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으로, CIA가 케네디대통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메리 마이어를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벤 브레들리는 없어진 메리의 일기장에 이같은 여러 가지 비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메리 마이어가 죽은 것은 그녀가 케네디대통령과 내연관계였다는 사실과 두사람이 함께 마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CIA가 그녀를 제거했다는 겁니다.

 

케네디대통령과 관련되어 살해당한 여성은 메리 마이어 외에도 여배우 마릴린 몬로도 있지요.

마릴린 몬로의 죽음도 의문투성이이며, 그녀도 한 때 케네디대통령의 정부였고, 케네디대통령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암살당했다는 음모론이 나돌고 있습니다.

 

미국의 존 F. 케네디대통령과 메리 마이어가 불륜관계였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또한 케네디대통령이 메리 마이어와 함께 마약을 즐겼다는 사실에 또한번 더 놀라게 됩니다.

 

사실 미국의 존 F. 케네디대통령은 원래 엄청난 바람둥이였습니다. 케네디대통령은 마릴린 몬로와 킴 노박 등 당대의 유명한 허리우드여배우들과 성스캔들을 많이 일으켰던 유명한 바람둥이랍니다.

 

케네디대통령은 여배우 주디스 켐벨, 마를렌 디트리히, 백악관 인턴 미미 엘포드를 비롯해서 영부인 비서 파멜라 투루누어 등 무려 100여명의 여성들과 불륜을 나눴다고 합니다.

 

케네디대통령이 46세의 젊은 대통령으로서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백악관 침대에서 남몰래 외간 여성을 들여와서 함께 마약을 즐겼다는 사실은 정말 대통령으로서 있을 수 없는 매우 부도덕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케네디대통령의 외도에 신물이 난 제클린여사가 마피아와 짜고서 케네디대통령을 암살했다는 루머까지 나돌았을까요?

 

오늘을 케네디대통령의 숨겨진 연인 메리 마이어의 사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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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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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미국인 웬디 덩의 성격과 재산, 프로필과 최근 근황과 스파이설 , 2조원대 자산가

 

오늘은 팜므파탈이라고 불리우는 재벌가의 요정 웬디 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웬디 덩은 원래 중국의 무일푼 여성으로서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재벌이 된 신데렐라 같은 여성이었지요.

 

웬디 덩은 자신의 아름다운 미모를 앞세워서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과 결혼해서 재벌이 되었으며,

또한 영국 전 토니 블레어총리와 정사를 벌여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희대의 요부이기도 합니다.

 

중국 산동성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웬디 덩이 어떻게 해서 2조원대의 굴지의 재벌이 되었는지, 그 기막힌 사연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원래 웬디 덩은 중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웬디 덩은 1968년 12월 산동성의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미국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미국인부부에게 입양되면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에서 캘리포니아 주립대를 거쳐서 예일대 경영대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럼 먼저 웬디 덩의 프로필을 살펴볼께요!

 

- 웬디 덩의 프로필 -

 

출생일 - 1968년도 나이 56살

출생지 - 산동성 지난

키 178cm,

국적 - 미국,

가족 딸 2명,

학력 - 예일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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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원래 돈에 관심이 많았고 야망이 컸던 웬디 덩은 자신의 양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그를 전처와 이혼시킵니다.

그것도 모자라, 웬디 덩은 자신의 양아버지와 결혼식을 올리는 희대의 웃지못할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웬디 덩은 양아버지와 결혼 후 2년 7개월만에 전격 이혼을 요구합니다. 그 이유는 원래 웬디 덩은 처음부터 자신의 양아버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미국인과 결혼함으로써 미국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함이었지요.

 

이제 웬디 덩이 그토록 원했던 미국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니,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남편이 필요없게 된 것이며, 그녀는 양아버지와 전격 이혼하면서 자유의 몸이 된답니다.

 

웬디 덩은 재벌에서 총리까지 전세계의 정상급 남자들을 이용해서 무일푼에서 2조원대의 재산을 가진 재벌로 성장한 팜므파탈 웬디 덩!

그녀가 어떻게 해서 무일푼에서 재벌로 둔갑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어요!

 

이제 혼자가 된 웬디 덩은 웨일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루퍼트 머독이 운영하는 한 미디어회사에 취직하게됩니다.

 

웬디 덩은 자신이 부와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자신의 팔자를 바꿔줄 재벌을 만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관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에 웬디 덩은 자신의 인생목표를 재벌이 되는 것으로 삼고, 아주 교묘한 술책을 하나 세우게되는데요.

웬디 덩은 평생 셀러리맨으로 살아봤자, 결코 재벌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총수인 루퍼트 머독을 유혹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포스트, 20세기 폭스 등 굴지의 언론미디어회사들을 운영하면서 22조원의 자산을 가진 언론재벌이 바로 루퍼트 머독입니다.

 

웬디 덩은 언론재벌 루퍼드 머독을 타킷으로 삼고 그에게 접근해서 그를 유혹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 웬디 덩은 홍콩스타TV에 인턴사원으로 입사했는데, 홍콩스타TV는 루퍼드 머독이 아시아에 진출하기 위해서 인수한 회사였습니다.

 

그리고 홍콩스타TV 인수를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열렸는데, 이날 전혀 초대조차 받지않았던 웬디 덩은 아름다운 하얀드레스를 입고 이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웬디 덩은 루퍼드 머독에게 접근해서 그의 옷에 고의적으로 와인잔을 쏟아버리는 행동을 자행합니다.

 

이렇게 실수인 척 하면서 의도적으로 루퍼드 머독의 옷에 술을 쏟아부은 그녀는 이순간 루퍼드 머독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드레스를 입고있는 동양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웬디 덩을 본 루퍼드 머독은 웬디 덩의 이국적인 매력에 사로잡히게됩니다.

 

루퍼드 머독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 웬디 덩을 곧바로 자신의 통역사 겸 비서로 승진시킨 후, 출장갈 때마다 항상 그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웬디 덩은 이 기회를 놓치지않고 루퍼드 머독을 유혹해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으며, 결국 1999년 웬디 덩은 루퍼드 머독과 결혼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뉴스 코퍼레이션 회사의 인턴사원에 불과했던 웬디 덩은 루퍼드 머독의 옷에 고의로 술을 부은 것이 인연이 되어서,

쾌속승진을 거듭한 끝에, 결국 언론재벌 루퍼드 머독과 결혼까지 했던 겁니다.

 

1999년 6월 25일 루퍼드 머독은 신부 웬디 덩과 자신의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때 루퍼드 머독은 자신의 전처와 이혼한 지 불과 3주만에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려서 더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때 루퍼드 머독의 나이는 68세, 웬디 덩은 31세로 두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37세로 누가 보더라도 문제가 많은 부적절한 결혼식이었습니다.

31살의 웬디 덩이 자신보다 37살이나 많은 늙은 루퍼드 머독과 결혼한 이유는 바로 루퍼드 머독이 가진 돈과 권력 때문이었습니다.

 

웬디 덩은 자신의 아름다운 미모를 팔아서 22조원대의 재산을 가진 루퍼드 머독을 유혹해서 그와의 결혼에 성공한 것인데요,.

 

이렇게 22조원대의 자산가인 루퍼드 머독과 결혼에 성공한 웬디 덩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남편 루퍼드 머독이 전립선 암에 걸리자, 남편을 졸라서 아이를 낳자고 제안했고, 결국 시험관시술을 통해서 그녀는 두명의 딸을 낳는데 성공합니다.

 

웬디 덩이 두명의 자식을 낳았던 이유는 아이를 가지면 남편이 죽은 후에 더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전립선암에 걸렸던 루퍼드 머독은 최고의 의료진의 수술을 받은 후, 완치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두사람은 어여쁜 딸까지 낳으면서 외관상으로는 금슬좋은 부부로 잘살아왔습니다.

 

그런데, 2013년도에 갑자기 루퍼드 머독과 웬디 덩은 이혼을 전격 발표하게됩니다. 그런데, 이혼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웬디 덩이 아닌 남편 루퍼드 머독이었습니다.

 

그리고 두사람이 전격 이혼한 이유는 웬디 덩의 불륜 때문이었습니다.

 

웬디 덩은 루퍼드 머독과 결혼생활 중에 또다른 남성인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잘생기고 지성적인 외모와 유창한 말솜씨로 영국총리가 되어서 국제무대를 주름잡았던 인물이 바로 토니 블레어였습니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1997년도부터 2007년까지 10년동안 영국총리로 재임했던 인물입니다.

 

토니 블레어총리는 루퍼트 머독의 오랜 친구였고, 토니 블레어는 루퍼트 머독과 웬디 덩의 딸 그레이스의 대부가 되어줄 정도로 엄청 친근한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두사람 부부는 함께 파티도 자주 열면서 자주 만남을 가져왔는데요.

 

그런데, 2014년도에 토니 블레어와 웬디 덩이 불륜관계라는 보도가 나와서 큰화제가 되었습니다.

 

원래 토니 블레어를 처음 보았던 웬디 덩은 그의 잘생긴 외모를 보고 홀딱 반했습니다.

젊고 잘생겼으며 지성미 넘치는 토니 블레어를 보고 그를 마음속에 품게된 웬디 덩은 토니 블레어에게 접근해서 그에게 추파를 던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웬디 덩이 결혼 직후부터 토니 블레어에게 접근해 추파를 던졌다는 사실입니다.

 

토니 블레어 또한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지만, 웬디 덩의 유혹에 넘어갔고, 토니 블레어는 그녀와 오랜기간 동안 불륜관계를 맺어왔다고 합니다.

 

특히 웬디 덩은 그녀 소유의 개인요트와 런던자책에서 수시로 토니 블레어와 만나서 밀회를 즐겨왔다고 합니다.

 

또한 웬디 덩은 토니 블레어와 사랑을 속삭이는 내용의 300통이 넘는 문자메일을 주고받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두사람간에 주고받은 사랑의 메일을 본 남편 루퍼트 머독은 두 사람의 불륜사실을 눈치챘고, 전격 웬디 덩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결국 이혼소송 끝에 웬디 덩과 루퍼트 머독은 전격 이혼하게 되는데, 웬디 덩이 남편과 이혼 후 받았던 위자료는 무려 2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웬디 덩이 내연남 토니 블레어와 불륜을 저질렀던 내용들을 의도적으로 남편 루퍼트 머독이 보게했고, 일부러 남편과의 이혼을 유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웬디 덩은 남편과 이혼으로 인한 2조원이라고 하는 거액의 위자료를 챙겼던 겁니다.

 

그러니까, 웬디 덩이 재벌남편과의 결혼과 이혼, 거액의 위자료를 받았던 것 모두 웬디 덩이 의도적으로 자초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웬디 덩은 남자를 이용해서 부와 권력을 차지할 정도로 지능이 뛰어나고 기회를 잘 포착하는 대단히 기회주의적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언론에서는 그런 그녀를 ‘세계 최악의 암캐’라는 별명까지 붙여줬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남편과 이혼한 이후, 지금 웬디 덩은 20대 초반의 헝가리 출신의 잘생긴 남성모델 베르톨드 자호란과 사귀고 있다고 합니다.

 

이젠 자신보다 나이가 27살이나 어린 남성모델을 사귀고 있다고 하는데, 과거에 나이가 많은 재벌의 돈을 다 빨아먹고 그를 버린 후,

이제는 나이가 한참 어린 젊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있다고 하니, 정말 웬디 덩은 낯짝이 두꺼운 희대의 요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웬디 덩이 중국의 스파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2018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장녀 이방카와 그녀의 남편 재러드 쿠슈너가 웬디 덩 때문에, FBI에 소환된 적이 있습니다.

 

이방카는 1999년 웬디 덩이 루퍼트 머독과 결혼한 뒤 서로 친하게 지내온 사이였고,

이방카가 재러드 쿠슈너와 결혼한 후 세 사람이 함께있는 모습이 언론에 자주 목격되고도 했습니다.

 

FBI는 웬디 덩을 중국의 스파이로 의심했는데, 그 이유는 2016년 미국 워싱턴DC에 중국정원을 건설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작됐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는데, 이 당시 웬디 덩이 재러드 쿠슈너를 설득해서 중국정원의 건설을 완공해달라고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문제가 된 것은 공원 내에 설치될 21m 높이의 탑이었는데, 이 탑은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등 미국의 중요기관과의 거리가 불과 8km밖에 안되어서, 감시와 도청이 가능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웬디 덩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이 중국탑의 건설은 보안상 이유로 최종 중단되었습니다. 루퍼트 머독 또한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서 웬디 덩이 중국의 스파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웬디 덩은 자신이 중국스파이라는 의혹에 대해 말도 안되는 ‘낭설’이라고 일축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웬디 덩은 영화제작자이자, 스타트업 투자자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신의 부와 권력이라는 두가지 목표 달성을 위해서 두 남자의 가정을 파탄냈던 21세기 세계 최고의 요부이자, 팜므파탈 웬디 덩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소문내기 활동을 하면서 해당 광고업체로부터 경제적 대가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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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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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대륙 정복, 남극점 최초 정복자 노르웨이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 경쟁자 스콧

 

인류역사상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늘은 인류 최초로 남극대륙을 개척한 위대한 탐험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911년 12월 14일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착한 사람은 바로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이었습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은 지구상에서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남극대륙의 극점을 인류 최초로 가장 먼저 도착해 깃발을 꽂은 위대한 탐험가였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대장정에 올라 남극대륙의 극점을 정복한 탐험가 로알 아문센의 도전정신으로, 인류 탄생 이후 수십만년 동안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던 남극대륙의 실체가 밝혀지게 됐습니다.

 

만일 아문센 같은 위대한 탐험가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우리 인류는 아직도 남극대륙의 실체를 모른 체 살아가고 있었을 겁니다.

 

그럼, 인류최초의 위대한 정복이라고 할 수 있는 탐험가 아문센과 그의 경쟁자 스콧의 남극점 도전기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인류 최초의 남극점 정복 도전기

 

대부분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는 남극, 남극은 거대한 제7의 대륙이자, 미지의 세계입니다. 남극은 그 면적이  1,400만 km²로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지구상에서 네번째로 큰 대륙이며, 미국땅의 1.4배나 되는 면적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남극의 98%가 얼음으로 덮여있고, 이 얼음의 두께는 무려 1.6km나 된다고 하니, 남극자체가 거대한 얼음덩어리 대륙이지요.

그리고 남극의 지하에는 엄청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광물자원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눈독을 들이고있는 곳입니다.

 

20세기 초, 이 미지의 거대한 대륙인 남극을 탐험하기 위해서, 영국과 노르웨이 등 여러 나라의 탐험가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20세기 초에 대영제국이라고 불리우는 영국의 탐험대와 이제막 독립국가된 노르웨이의 탐험대가 남극점 정복을 놓고 서로 같은 시기에 경주하듯이 경쟁을 벌인 흥미로운 일화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던 영국 탐험대와 노르웨이 탐험대의 남극점 정복경쟁은 결국 승자에게는 영웅 칭호가, 패자에게는 죽음을 안겨주는 극과 극의 결말로 끝이 났습니다.

 

1910년 6월 1일, 영국의 해군장교출신 로버트 스콧은 영국정부의 막대한 후원 아래 남극탐사선 테라 노바호의 선장으로 임명된 후, 60명의 과학자, 선원들을 이끌고 남극점 정복을 위한 남극대륙 탐험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영국탐험가 스콧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라이벌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이었는데, 아문센은 영국탐험가 스콧과 비슷한 시기인 1910년 6월 7일 탐사선 프람호를 타고 남극점 정복을 목표로 일행들과 함께 남극탐험에 나섰습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은 북극탐험에 성공한 적이 있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탐험가였습니다.

아문센은 작은 배에 선원 몇 명을 테우고 노르웨이에서 알래스카로 가는 북극해 항로를 인류 최초로 개척해낸 뛰어난 공적을 지닌 위대한 탐험가였습니다.

 

로알 아문센은 북극탐험에 이어서 또다시 남극점 정복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과 영국탐험가 스콧은 서로 자신이 먼저 인류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비슷한 시기에 남극점 정복경쟁을 벌였습니다.

 

♥ 남극점 정복을 위한 아문센과 스콧의 목숨을 건 경쟁 레이스

 

영국탐험가 스콧은 1911년 1월 4일 영국을 출발한 지 7개월만에 남극대륙의 남쪽 해안가인 로스빙붕의 근처에 도착합니다.

노르웨이 탐험대 아문센 일행은 남극 남쪽 해안가 로스빙붕 근처에 도착해서 두 탐험대가 남극점 정복을 위한 선의의 레이스경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들 탐험가들 중 남극의 한가운데에 있는 남극점에 먼저 도착해서 깃발을 꽂을 경우, 그는 인류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업적을 달성한 위대한 영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극은 여름철에도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며, 가장 추운 겨출철에는 영하 94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곳으로 사실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남극은 3월부터 10월달까지의 8개월동안이 겨울철이며, 11월부터 2월까지가 여름철이지요.

 

따라서 탐험대는 기온이 극한으로 떨어지는 겨울철인 3월이 오기전인 11월부터 2월까지의 4개월안에 탐험을 끝내는 것이 가장 좋은 코스입니다.

 

남극대륙의 남쪽 해안가에 도달하면 ‘로스빙붕’이라는 곳이 나타나는데, ‘로스빙붕’은 남극대륙의 해안가에 펼쳐진 50만km²의 거대한 얼음절벽인데, 이곳은 폭이 수백킬로미터나 되는 차가운 얼음벌판으로 되어있어서, 계속해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매우 험난한 곳으로, 이곳을 넘어가야만 비로서 남극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들 탐험가들이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남극대륙의 남해안에서 남극점까지의 거리는 약 1,400km의 머나먼 거리입니다.

 

이들 탐험가들이 남극 해안가에서 1400km 거리에 있는 남극점에 가기위해서는 수백킬로미터의 얼음벌판을 횡단한 후, 아주 가파른 빙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거대한 얼음산맥을 넘어가야 하며, 그 후에도 험준한 빙하벌판과 산맥들을 계속해서 건너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들이 목표로 하고있는 남극점은 남극고원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스콧탐험대와 아문센탐험대 모두 남쪽 해안가에 각각 베이스캠프를 설치했고, 두 탐험대 베이스캠프 기지는 서로 650km 떨어져있었습니다.

 

남극탐험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식량과 연료, 피복 같은 보급품을 효율적으로 운반하고 저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3개월 이상이 걸리는 남극탐험 도중에 식량과 연료가 떨어지면, 얼음덩어리인 남극에서 새로운 식량을 얻을 수가 없으므로, 대원들의 생명을 부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탐험대는 각자 베이스캠프에서 남극점에 이르는 여러 지점에다 엄청난 양의 식량창고와 보급소를 만들어 놓는 등, 두 탐험대 모두 남극점탐험을 위한 치밀한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일행은 남극점까지 가기 위해 50마리나 되는 개들을 데려왔고, 개썰매를 이용해서 탐험에 나섰습니다.

식량과 연료등 무거운 짐들을 개썰매를 이용해서 개들이 나르게했고, 탐험대원들은 모두 직접 스키를 타고서 앞으로 진격해나갔습니다.

 

원래 노르웨이는 추운 지방이라서 스키타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고, 노르웨이사람들은 평소에도 스키를 잘 타기로 소문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문센대원 중에는 세계 스키대회챔피언 출신인 올라프 비욜란도 포함되어 있었답니다.

 

1911년 10월 19일, 아문센일행은 대원 5명과 4대의 썰매, 그리고 48마리의 개들과 함께 순조롭게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대원들은 능수능란하게 스키를 타면서 앞으로 나아갔고, 잘 훈련된 개들이 끄는 개썰매를 이용해 빠르게 앞으로 진격해나갔고, 아문센일행은 출발 4일째가 되던 날, 남위 80도상에 구축해놓은 첫번째 식량저장소에 도착해서 새로운 식량및 연료를 보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문센의 썰매개들은 지구력이 뛰어나고 훈련이 잘되어있어서, 지치지않고 오랫동안 달리기를 잘했습니다.

썰매개들의 대활약으로 아문센 일행은 아주 빠른 속도로 한달 만에 로스빙붕을 건너는데 성공했습니다.

 

반면, 영국탐험대 스콧일행은 운반수단으로 조랑말 10마리과 23마리의 개와 3대의 개썰매, 모터썰매 두대를 준비했습니다.

영국탐험대 스콧일행은 아문센일행의 출발보다 13일 후인 11월 1일 뒤늦게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스콧일행이 출발한 지 이틀 만에 갖고간 두대의 모터썰매의 엔진이 모두 고장났고, 이로써 스콧일행의 레이스는 중간에 주춤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콧일행은 대부분 스키를 잘 타지못하기 때문에, 모터썰매가 고장난 후에는 진격속도가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그들이 데려간 조랑말과 개들은 훈련이 잘되어있지않아서, 제대로 진격해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히 스콧이 데려간 개들은 베이스캠프와 저장창고 구축하는데에만 사용하고, 남극점 정복 레이스에는 투입하지 않았습니다.

 

개들을 남극점 정복 레이스에 투입하지않은 것은 엄청난 실책이었고, 이것은 나중에 스콧일행이 남극점 최초정복에 패배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더욱이 비어드모어 빙하기슭까지 나아갔을 때에는, 스콧이 데려간 조랑말들이 모두 얼어 죽는하는 바람에, 320kg이나 되는 무거운 짐이 실린 썰매를 사람의 힘으로 끌고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은 목표지점인 남극점까지 갔다가 다시 베이스캠프까지 돌아가는 거리는 무려 1,600km나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매서운 칼바람, 엄청난 추위와 악천후를 뚫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마다 이들의 생존율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문센일행은 하루에 32km씩 전진했지만, 반면 스콧일행은 하루에 16km밖에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스콧일행이 이미 훨씬 앞서나간 아문센일행을 추월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만일 이 때에 스콧일행이 레이스를 포기했더라면, 대원들의 생명만큼은 부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스콧은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고, 무모한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두 탐험대간에 전진속도에 현격한 차이가 나기 시작했고, 목표점에 가까워질수록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스콧일행에게 또다시 불행이 닥치는데, 그들이 나아가는 얼음평원에 ‘블리자드’라는 매서운 눈폭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스콧일행은 처음부터  '블리자드' 눈폭풍이 불어닥치는 곳으로 경로를 잘못 잡았던 겁니다.

 

남극에서는 종종 ‘블리자드’라는 폭풍이 불어오는데, 눈폭풍 ‘블리자드’는 평균 시속 160km의 강풍으로, 이 블리자드는 수많은 눈들을 동반해서 불어오는데,

이 ‘블리자드’가 불어오면 그곳에 있는 사람은 주위가 온통 하얀색 눈밭으로만 보이기 때문에, 방향과 거리를 알 수 없게되는 등 위치감각, 거리감각을 모두 잃어버리고 미아가 되고맙니다.

 

이 ‘블리자드’는 한번 불었다 하면 며칠에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불어옵니다. ‘블리자드’로 인해 주위가 온통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리감각을 완전 상실하고 자신의 정확한 경로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이 블리자드폭풍 때문에, 영국탐험대 스콧일행은 오랫동안 앞으로 전진하지 못한 체, 캠프안에서만 지내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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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아문센일행은 잘 훈련된 개썰매를 이용해서, 3,000km 높이의 빙하산맥을 넘는데 성공했고, 빙하산맥 너머에 있는 남극고원에 도달했습니다.

 

아문센일행은 이곳에서 48마리의 개들 중 지치고 힘이 빠진 개 24마리를 총으로 쏴서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대원들과 남은 개들을 위한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개들을 죽인겁니다.

 

이 상황에 대해 아문센은 자신의 일기책에 ‘충성스러운 동반자들이 한 마리씩 죽어갔다. 개들을 죽인 건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를 달성해야만 했다’라고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2011년 12월 14일, 어려운 상황에서도 악전고투 끝에 아문센일행은 드디어 먼저 남위 90도 남극점 도착에 성공했습니다. 

 

아문센일행은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한달 25일만에 약 1,300km를 내달려서 목표점인 남극점에 도착하는데  성공했고, 그곳에 노르웨이 국기를 꽂았습니다.

 

♥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 승리 요인과 스콧일행의 패배와 죽음

 

결국 아문센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남극점 도착에 성공했고, 그 시기가 1911년 12월 14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남극점 정복으로, 인류역사상 아주 위대한 대역사였습니다.

 

반면, 아문센과 남극점 정복을 위해 경쟁했던 영국탐험가 스콧은 아문센이 도착한 시기보다 34일 후인 1911년 1월 17일에야 가까스레 남극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아문센은 남극에 캠프를 설치할 때, 위도와 경도를 계산해서 남극점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지점에다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영국탐험가 스콧도 남극점 탐험을 위한 캠프를 설치했지만, 아문센의 캠프가 남극점에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근접한 지역에 설치했기 때문에, 아문센은 스콧의 경로보다 110km 정도 거리를 더 단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문센이 위도와 경도 등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해서 계산해낸 결과, 남극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경로의 단축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문센은 개썰매를 끌기에 적합한 잘 훈련된 개들을 준비해두었고, 남극대륙 횡단에 매우 유리한 스키 잘 타는 사람들로 대원들을 구성한 것도 주요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지식과 신중하고도 치밀한 전략으로 남극탐험에 적합한 사전준비를 철저히 한 아문센이 영국정부의 풍부한 자금지원을 받은 스콧일행을 오히려 앞질러서 남극점 정복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문센일행과 달리 스콧일행이 늦게 남극점에 도착한 이유는 몇가지 있는데, 스콧일행은 근본적으로 남극탐험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아문센일행과 달리 스콧일행의 대원들은 대부분 스키를 탈 줄도 몰랐고, 갖고갔던 전동 썰매차도 금방 고장났으며,

썰매개들은 제대로 훈련이 되어있지않고 제멋대로 움직여서, 식량과 연료들을 운반하는 역할을 잘해내지 못해서, 대신 대원들이 직접 식량과 연료를 나르는 등 스콧일행은 최악의 조건에서 레이스를 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거의 준비가 되어있지않았던 스콧일행은 아문센일행보다 34일 늦게 남극점에 도착하는 바람에, 최초 남극점 정복의 명예를 아문센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사전에 치밀한 전략과 과학적인 사고로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 레이스를 펼친 아문센일행과 과학적인 지식없이 오로지 대영제국의 해군장교라는 오만과 혈기만을 갖고 무모하게 레이스를 펼친 스콧일행의 남극점 정복경쟁은 아문센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고, 반면 패배자는 엄청나게 쓰라린 댓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영국탐험가 스콧은 아문센에게 남극점 최초정복의 영광을 빼앗긴 후에도, 그의 행로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남극점에 도착한 후, 다시 1,400km 거리에 있는 베이스캠프로 귀환하는 것도 매우 험난한 여정인데,

스콧일행은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크레바스’라는 낭떠러지에 대원들이 떨어지는 등 커다란 시련을 겪게됩니다.

 

남극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크레바스’인데, ‘크레바스’는 빙하의 갈라진 틈 사이에 수백~수천킬로미터 깊이의 낭떠러지 얼음구덩이였습니다.

 

이 ‘크레바스’가 눈으로 수북히 덮여있어서, 구덩이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발을 잘못 디디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길 낭떠러지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게 되어 살아남기 힘든 위험천만한 곳입니다.

 

귀환하는 과정에서, 스콧 일행 중 세명이 이 ‘크레바스’에 빠졌는데, 그렇지만 다행히 그 크레바스가 깊지 않았기 때문에, 빠진 대원들은 다른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곧바로 지상위로 기어올라올 수 있었지만, 그 댓가로 그 대원들은 커다란 부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스콧은 어깨부상을 입었고, 월슨은 치명적인 다리부상, 그리고 에반스는 뇌진탕 증상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대원 여러명의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1,400km나 되는 베이스캠프로 귀환하는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남극대륙의 거대한 크레바스 

 

귀환하는 과정에서 엄청 고생을 많이 한 스콧일행은 자신들의 베이스캠프로부터 250km 떨어진 지점까지 간신히 도착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한 상태에서 스콧을 포함한 대원들은 며칠동안 계속 불어온 폭풍 ‘블리자드’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 완전 굶주림과 탈진한 체로 결국 전원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악천 후속에서도 무려 1,100km를 걸어왔던 스콧일행은 베이스캠프를 불과 250km 남긴 상태에서, 부상과 굶주림, 탈진으로 인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렇지만, 남극점을 먼저 정복한 아문센 일행은 풍족한 식량과 성능좋은 개썰매를 타고서 아주 손쉽게 자신들의 베이스캠프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아문센일행은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레이스에서도 왔던 길을 정확히 찾아갈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각 지점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깃발을 꽂아두었기 때문입니다.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고, 탐험전략을 잘 세운 아문센은 스콧일행보다 먼저 남극점을 정복하는 쾌거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귀환하는데 성공했을 뿐만아니라, 대원들 한명의 희생없이 전원이 자신들의 나라 노르웨이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과 영국 탐험가 스콧은 모두 똑같은 시기에 남극점 정복에 도전했지만,

아문센이 스콧에 앞서서 최초로 남극점 정복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룩했을 뿐만아니라, 대원들 한명도 죽지않고 자기 나라로 무사히 돌아가는데도 성공했습니다.

 

반면, 영국탐험대 스콧일행은 남극점 최초 정복에 실패했을 뿐만아니라, 스콧을 포함한 대원 5명이 남극의 거친 눈보라 속에서 사망하는 등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스콧일행이 남극점에 도착한 후 귀환하는 길에 엄청난 악천후를 만났을 뿐만아니라, 이미 식량과 연료가 바닥이 났기때문에 기지까지 돌아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스콧일행은 귀환 길에 크레바스에 떨어졌는데, 간신히 기어올라온 에반스는 머리에 심한 충격으로 뇌손상으로 사망했고, 동상으로 다리를 다친 오츠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보워스와 윌슨은 식량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오랫동안 굶주린 상태에서 기력이 쇄진해서 둘 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존한 대장 스콧은 식량이 바닥이 난 상태에서 생으로 씹어먹던 홍차잎이 모두 소진된 후, 3월 29일 굶주림과 동상으로 결국 동사(凍死)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사망한 5명의 스콧 대원들은 남극점을 돌고 귀환하는 길에 자신들의 기지를 불과 250km 남겨놓은 지점에서 전부 사망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8개월이 지난 후에, 스콧대원들의 시신은 영국에서 파견한 구조대원들에 의해 모두 수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남극 탐험경쟁에 있어서 남겨진 뒷이야기가 있어서 소개하는데요.

 

원래 먼저 남극점에 도착한 아문센일행은 자신들보다 나중에 도착할 스콧일행이 식량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 그 남극점 텐트속에 스콧일행이 먹을 수 있도록 일정분량의 식량과 털가죽등을 남겨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뒤늦게 남극점에 도착한 스콧일행은 그곳에 아문센일행이 남겨놓은 식량과 털가죽피복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 아문센의 예상대로 스콧일행은 식량과 연료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식량이 거의 모두 바닥난 상태였지만, 스콧일행은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곳에 남겨놓은 아문센의 식량을 하나도 손도 대지않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대영제국의 자랑스러운 영관급 장교출신 스콧이 초라한 신생국 노르웨이의 탐험가가 남겨놓은 식량에 손을 대는 것을 대단히 큰 수치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알량한 자존심과 국뽕 때문에 아문센이 남겨놓은 식량에 손도 대지않고 귀환길에 올랐던 이들 스콧일행은 돌아오는 길에 악천후를 만나 부상을 당한 후, 식량고갈로 인해 다섯명 모두 굶어죽고 말았지요.

 

만일 남극점에 도착했을 때, 스콧이 그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아문센이 남겨놓은 식량을 사용했더라면, 대원 전원이 사망하는 불행한 일은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남극점 정복 경쟁을 벌였던 스콧(왼쪽)과 아문센(오른쪽)

 

아뭏튼, 아문센과 스콧의 남극탐험이 토대가 되어서, 1959년 12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나라들이 남극을 ‘인류공동의 땅’으로 규정하는 남극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후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남극에 연구기지를 설립해서 꾸준한 연구조사 활동을 벌여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극을 인류공동의 땅으로 규정한 남극조약은 2048년도에 만료된다고 하며, 그 이후에는 남극은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 소유권을 얻기위해서 치열하게 각축을 벌일 수 밖에 없는 미완의 대륙으로 남게될 운명입니다.

 

특히 남극에는 석유가 인류 전체가 100년 이상 사용해도 남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양이 매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석유, 천연가스, 광물자원 등 엄청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남극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치열한 소유권경쟁을 벌이는 뜨거운 화약고가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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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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