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최초의 여권운동가 나혜석의 일대기와 그림, 남편과 이혼사유, 최린
나혜석 - 1896년 4월 28일~1948년 12월 10일
오늘은 우리나라 근대적 여권운동가인 나혜석의 일대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나혜석은 일제감정기시대에 태어나서, 최초로 서양화가로 활동했을 뿐아니라 여권운동가와 사회운동가로 큰 활약을 펼쳤던 근대적의미의 최초의 패미니스트이자, 뛰어난 여류화가였습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의 봉건주의시대에 횡행했던 남존여비사상에 저항해서 짓눌려있던 여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생동안 치열한 여권운동을 벌였고, 여권신장을 위한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여권운동가라고 평할 수 있는데요.
일제시대 때에 우리나라의 한 가정의 평범한 주부였던 나혜석이 서양화가로서 활약하면서, 여권운동가로 활동하게된 계기와 그녀의 일대기, 그리고 그녀의 결혼과 외도사건에 대해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 나혜석의 여권운동과 여성해방 운동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였던 근대시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조작가,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시인이자 소설가라는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인텔리여성이었답니다.
또한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권운동가로서 큰 활약을 펼치면서,
억눌려있던 조선시대 여성의 권리신장과 양성평등을 위해 여러가지 활약을 펼쳤던 여권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96년 군수였던 나기정의 넷째딸로 태어났던 나혜석은 1913년 진명여고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했던 구한말에는 드믈게 일본유학까지 하면서, 고등교육을 받았던 인텔리여성이었지요.
그리고 나혜석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뒤, 정신여학교에서 약 1년간 미술교사를 역임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혜석은 여성으로서 최초의 단편소설인 ‘경희’를 발표해서, 세간의 화제가 되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집필한 단편소설 ‘경희’를 통해서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서 여성도 주체성을 가진 당당한 인간임을 주장하는 등 조선역사상 최초로 여권신장을 주장하면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봉건주의사회로서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해있던 전근대적인 사회로서, 이런 보수적인 사회적인 배경에서 여성이 여권신장 자체를 말한다는 것은 금기시되던 상황이었는데,
놀랍게도 나혜석은 최초로 여권신장과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답니다.
또한 놀랍게도 나혜석은 잡지에 ‘현모양처 불용론’을 기고해서, 큰 파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답니다.
그녀는 한 잡지에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단지,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을 장려한 것에 지나지않는다’는 파격적인 내용의 글을 올려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었지요.
나혜석이 불과 19살의 어린 나이에 여권신장과 여성해방에 눈을 뜨고, 이렇게 파격적인 내용의 글을 올리면서, 그녀는 본격적인 패미니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또한 나혜석은 1919년 3·1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3·1 독립만세운동에 여성의 참여를 계획하고 조직을 만드는데 참여했다가, 일본경찰에 적발되어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답니다.
이처럼 나혜석은 십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여권신장과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개시했을 뿐만아니라,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나서기도 했던 행동하는 인텔리여성이자, 신여성이었습니다.
이처럼, 나혜석이 우리 조선시대에서 여권신장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틈틈이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합니다.
◆ 나혜석의 결혼과 이혼, 도덕관념과 이혼사유
나혜석은 조선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유학을 다녀왔고, 최초로 여권신장과 여성해방운동을 벌임으로써, 우리나라의 여권신장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랍니다.
그렇지만, 나혜석은 자신의 결혼생활에 있어서, 외도를 범하는 등 주부로서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함으로 인해서, 그녀의 여권운동의 선구자라는 좋은 이미지를 스스로 깎아버리는 우를 범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나혜석은 1920년에 25세의 나이에 변호사인 김우영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도 자신의 직업인 화가활동을 함께 겸임해나갔습니다.
결혼해 자녀를 양육하면서도 그녀는 결코 붓을 놓지않고, 계속해서 그림그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나혜석은 1921년도에는 서울에서 자신의 그림들을 모아서 조선여성 최초로 개인전시회까지 개최하기도 했답니다.
남편인 김우영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낳았던 나혜석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개인전시회도 여러번 여는 등 아이들 육아와 화가일을 계속 병립해나갔습니다.
1920년대 후반 나혜석은 한 잡지에 아이를 양육하면서 자신의 일을 병행하는 고충을 겪는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나타내는 글을 올렸는데요.
‘나는 할 일이 많았는데, 기어코 아이를 임신하고 말았다’ ‘예술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인생인지 깨닫고 각성해야 할 시점에, 아이를 덜컹 임신하고 말았다’
‘조선사람이 어떻게 해야하겠고, 조선여자가 어떻게 해야만하겠는지, 이 모든일을 결코 타인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할 일이었다’
이 글에서 나혜석이 예술가로서의 소명의식과 조선시대의 여권신장운동을 선도해나가는 주체인으로서 자각하면서, 그것들을 실천해나가는 신여성으로서의 사명감과 각오를 다지는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서술해놓았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나혜석은 해마다 열리는 조선미술전람회에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을 출품했고, 그녀는 매회마다 입상을 거두었답니다.
그리고 나혜석은 1926년에는 자신의 작품 ‘천후궁’으로 특선에 선정되는 쾌거를 거두었답니다.
그렇지만, 결혼 후에도, 육아와 자신의 화가일을 계속 병행해나갔던 나혜석은 네명의 자녀들을 양육하느라, 그림을 계속 그리느라,
점점 몸과 마음이 지쳐만갔고,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나 자극제가 필요했습니다.
이 시기에 4명의 자식을 키우느라 너무 힘들어했던 나혜석은 한 잡지에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뜯어먹는 악마’라고 파격적인 글을 올려서 엄청난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네명의 자식을 키우면서 동시에 자신의 화가일, 그리고 여권운동을 함께 병행하느라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갔던 그녀에게는 자식의 의미보다도 자신의 직업, 그리고 사회적인 활동이 더욱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나혜석은 일생일대에 여러차례에 걸쳐서 매우 파격적인 발언을 많이해서, 사회적으로 큰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나혜석이 31살이 되던 무렵, 남편을 통해서 그녀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만주 안동부영사로 일하던 외교관이었던 남편 김우영이 유럽과 미국으로 시찰을 떠나게됐고, 나혜석도 남편을 따라서 조선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유럽여행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답니다.
나혜석은 남편과 함께 모스크바횡단열차를 타고 30일간의 기차여행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자녀양육과 화가생활을 병행하던 중, 화가로서 한계를 느끼고 있었을 무렵, 그녀에게는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시기였는데,
마침 남편의 유럽시찰로 인해 함께 프랑스 파리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그녀는 프랑스 파리에 몇 달동안 머물면서 화가로서 매우 중요한 경험을 하게됩니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의 생활은 나혜석에게 화가로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화가로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선사해주었답니다.
나혜석에게 파리는 그야말로 도시전체가 교과서이자 캔버스였습니다. 그녀는 파리의 여러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화폭에 담았습니다.
파리의 도시곳곳에 있는 미술관과 박물관들에 있는 대가들의 작품들은 나혜석으로 하여금 서양화가로서 눈을 뜨게하였고, 영감을 불러일으키게했습니다.
나혜석은 파리의 조셉 바라 거리에 있는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거장들로부터 서양미술교육을 받았으며, 그녀는 파리에서 동양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서양미술의 진수를 배웠고, 그것들을 작품으로 실현해내었습니다.
아뭏튼 나혜석의 수개월에 걸친 파리생활은 그녀로 하여금, 수많은 값진 영감을 얻게하는 계기가 되었고, 화가로서 더욱 도약하고,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술가로서 한 단계 도약의 계기를 마련해준 파리생활이 또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답니다.
나혜석은 그녀에게 예술적 발전의 계기를 가져다준 파리생활을 접고,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서 부산항을 통해서, 6개월 만에 다시 우리나라 입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가 부산 시댁집에 돌아오자 마자, 곧바로 큰 사단이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남편 김우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하였습니다.
남편 김우영의 이혼요구는 파리에 머물렀을 무렵에, 나혜석이 최린과 벌인 염문행각 때문이었습니다.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에서 한창 미술아카데미에 다닐 무렵에, 파리 모처에서 최린을 만나 수십번에 걸쳐서은밀한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최린은 우리나라 천도교대표로서, 3·1 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며, 그당시 유력한 정치인이자 개혁파였습니다.
최린은 1928년도에 프랑스 파리에서 외교관으로 출장을 왔었는데, 마침 파리의 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 함께 참석한 최린과 나혜석은 서로가 보자마자 서로간에 첫눈에 홀딱 반하게 되고, 두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은밀한 사랑에 빠지게된답니다.
나혜석과 최린은 사상과 취미, 예술에 있어서 서로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프랑스어를 모르는 두사람은 통역관까지 고용해서 레스토랑과 오페라극장, 벳놀이를 하면서 수많은 데이트를 즐겼답니다.
특히 1928년도 11월 20일 저녁에, 두사람은 오페라극장을 다녀온 후, 나혜석의 숙소인 셀렉트호텔로 함께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최린은 숙소로 돌아가지않고, 나혜석과 함께 밤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나혜석과 최린이 그녀의 호텔방에서 밤을 함께 보낸 횟수가 수십번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당시 나혜석이 여러명의 남자들과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우리 교포사회에 널리 퍼져있었고,
당시 베를린에 있던 남편 김우영도 이 소문을 듣고 급히 파리에 돌아왔습니다.
파리에 돌아온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은 비밀리에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한 호텔방에서 나혜석과 최린이 정사를 벌이는 불륜장면을 목격하게 된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친 6개월간의 유럽여행은 끝이 나고, 부산집으로 돌아온 후, 남편 김우영은 나혜석의 외도를 이유로 그녀에게 이혼을 강력히 요구했고,
결국 1930년 11월, 나혜석은 결혼 11년만에 35세의 나이에 이혼을 당하고 집에서 쫒겨나게 된답니다.
그녀는 35년도에 집필한 자신의 자서전 ‘신생활에 들면서’에서 최린과의 불륜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기까지 했습니다.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사건으로 인해서 나혜석은 그동안 쌓아올렸던 그녀의 예술가로서의 높은 명성이 한 순간에 무너져내려버렸고,
이 사건으로 인해서 그녀의 인생은 한없이 끝도없는 나락으로 추락지고 말았습니다.
여권신장과 남녀평등사상을 가진 인텔리여성이었던 나혜석은 또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분방한 연애관을 가진 자유연애가였고, 한 가정의 부녀자로써 결코 만족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자의 정조와 도덕관념을 중시여기던 조선말기 시대에 나혜석의 이러한 자유분방한 연애사상은 그녀의 발목을 잡았을 뿐만아니라, 그녀를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단초가 되었던 겁니다.
나혜석의 불륜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당시 각계각층으로부터 그녀에게 엄청난 비난이 쇄도하였고, 한순간에 나혜석은 음탕하고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찍히고 말았답니다.
남편과 네명의 자녀까지 둔 유부녀가 외국에서 은밀하게 외갓남자를 끌여들여서 불륜을 저질렀으니,
유부녀의 정조를 중시하던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었답니다.
나혜석은 불륜으로 인해서 그녀가 평생 쌓아왔던 여성운동가와 화가로서의 명예를 잃게되었을 뿐만아니라, 남편과 자녀들까지도 모두 잃게되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답니다.
주부로서 화가로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했던 유럽여행에서, 나혜석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나혜석은 외도를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했을 뿐만아니라, 또한 자신의 정인 최린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답니다.
그녀의 지나친 여성해방사상과 자유연애사상에 염증을 느낀 최린 또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그녀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더욱 웃긴 것은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연인 최린에게도 버림받았던 나혜석은 자신의 불륜상대남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죄'로 법원에 고소했을 뿐만아니라, 12,000원의 위자료 청구소송까지 추진하게 됩니다.
나혜석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최린은 나혜석의 소송을 중단시키기위해서 2,000원의 돈으로 그녀를 매수하기를 시도했답니다.
이같은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소송이 언론을 통해서 공개되면서, 두사람의 불륜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두사람은 세상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지탄을 받게된답니다.
이렇게 이혼후에 나혜석은 여러가지 구설에 오르면서 좌절감을 맞보게 되지만,
나혜석은 여기서 주저않지 않았고, 새로운 재기의 삶을 모색해나갔답니다.
나혜석은 1934년도에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라는 글을 올려, 자신의 이혼사실을 세상에 알려서 또한번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답니다.
1934년에 나혜석이 발간한 이혼 고백서에서, 그녀는 약혼과 결혼, 이혼에 이르렀던 모든 과정과 최린과의 관계에 대해 적나라하게 기록하면서,
불평등한 남녀관계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였고, 남녀간의 자유연애를 주장하였습니다.
‘이혼고백서’에서 그녀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와 딸에게는 한없이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음탕한 성욕을 품는 한국남성들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성모랄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자유연애론을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그녀는 당사자의 의견을 중시하지 않고, 오직 집안어른들의 의견에 따라 행해지는 정략결혼에 대한 강한 비판과 함께,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의 가부장권적인 행태와 횡포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사회적인 약자인 조선여성이 여권신장과 여성해방에 눈을 뜰 것을 주장하였답니다.
나혜석은 그녀의 ‘이혼고백서’에서 ‘나는 거의 재기할 수없을 만큼,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고 고백하면서 제기의 꿈을 꾸었습니다.
이혼한 후에도, 나혜석은 붓을 결코 놓지않고, 죽을 힘을 다해서 작품활동에 매진해나갔습니다.
나혜석은 계속적으로 작품활동과 출품활동을 이어나갔고, 제국미술전람회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해서 입선하였고,
여자미술학사를 차리는 등 그녀는 한때 재기에 성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혼한 후,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에 체류할 때 목격했던 ‘생 제르망 성당문’을 보고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두 번씩이나 미술대회에서 큰 상을 받았답니다.
파리의 클뤼니 중세박물관의 뒤뜰에 전시되어 있던 ‘생 제르망 성당문’을 보면서 그린 그녀의 작품 ‘정원’이 1931년도에 개최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으로 선정되었고,
동시에 제12회 일본제국미술전람회에서도 입선을 하는 등 두 번씩이나 큰 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면서, 나혜석은 재기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서’에서 이때의 수상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수상으로 인하여 나는 비로서 면목이 섰고, 내 일신의 생계가 생겼나이다. 이로 인하여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힘을 의식하였나이다. 그때에 나는 퍽 행복스러웠사외다’
상을 수상하면서 자신감과 삶의 용기를 얻은 그녀는 이듬해에 금강산에 머물면서 30점이 넘는 그림들을 그리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여나갑니다.
그렇지만, 그 후 나혜석의 집에 큰불이 나서, 그녀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인 그녀의 그림들이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혼으로 남편과 자식들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보물은 그녀가 그린 주옥같은 그림들뿐이었는데,
그녀의 모든 그림들이 불이 나는 바람에 전부 불에 타서 없어지고 말았답니다.
◆ 나혜석의 최후, 행려병자로 길거리에서 사망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 완전 빈털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화재사고로 인해서, 나혜석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병을 얻어서 병석에 눕게 된답니다.
그녀는 붓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떨리고 점차 사지가 굳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의 아래턱이 떨리면서 일그러져갔고, 입까지 돌아가는 파킨슨씨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화재로 자신의 모든 그림들을 잃게된 나혜석은 없친데 덮친 격으로 파킨슨씨 병까지 걸리는 큰 불행이 닥쳐와서, 점점 사회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나혜석이 다시 그린 그녀의 그림들이 조선미전에서 혹평을 받으면서 그녀는 더욱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나혜석은 자신의 여자미술학사를 차리고 독립적인 생활을 꿈꾸었지만,
그녀는 급기야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외면을 당했고, 그녀의 마지막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던 오빠의 경제적 지원이 끊어지면서, 그녀의 생활은 매우 힘들어지게되었습니다.
나혜석은 이혼한 후, 오랫동안 타락한 여성, 불륜을 저지른 음탕하고 부도덕한 여성이라는 세상의 비난과 조소를 받았고,
친자식들을 보지못하는 고통 때문에 나혜석의 심신은 더욱 병들어갔습니다.
이렇게 사회적인 비난과 동시에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그녀는 수덕사에 은거하며 불공을 드렸고,
자신을 찾아온 학생들에게 유화를 가르치면서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또한 나혜석은 1940년경 신사참배령과 창씨개명령을 거절하는 바람에, 조선총독부의 요시찰대상자로 낙인찍혀서 감시를 받게 되면서, 이 때부터 방랑생활을 하게된답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된 나혜석은 1944년도에 인왕산에 있는 청운양로원에 들어가서 은거했으나,
1945년도에 50세가 되면서 지병인 파킨슨병이 더욱 악화되면서,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게 됩니다.
그 후, 정신이상 증세가 심하다는 이유로 양로원에서 쫒겨난 나혜석은 이후에 병원과 보육원, 산사를 오가면서 3년동안 방랑생활을 해오다가,
병세가 더욱 심해진 1948년도에 서울 시립자제원 병동에 입원하였고, 입원한 지 한달만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고 말았답니다.
나혜석이 사망하였을 때에, 그녀의 곁을 지키는 가족은 단 한명도 없었고, 그녀는 혼자서 외롭게 고독사하고 말았습니다.
사망 당시 나혜석은 소지품 하나없이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죽기 직전에, 나혜석은 자신의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서 수시로 병원을 뛰쳐나가서 자식들을 만나려고 시도했지만,
전남편 김우영은 경찰을 동원해서 그녀가 자식을 만나지못하도록 했습니다.
사실상 나혜석은 집도 절도 없이 길거리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나혜석에 대한 평가
나혜석은 분명 시대를 앞서간 여권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다는 점에서, 나름 높이 평가할 가치가 있습니다.
나혜석과 남편 김우성 사진
그녀는 구한말 여성들에게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하는 봉건주의적 가부장권사회에서, 최초로 여권의 신장과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
봉건적사회에 투쟁하면서 경종을 울렸던 여권운동의 선각자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권사회에서 억압당하면서 의무만을 강요당하며 살았던 조선여성들의 억눌려있던 여권의 신장과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면서,
용감하게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나혜석의 행동은 분명히 사회적으로 큰 의미있는 기여를 했다고 판단되며, 이런 점에서 나혜석의 존재감과 그녀의 활동을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여권신장과 사회개혁에 기여를 한 나혜석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약점도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혜석은 안타깝게도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우를 범함으로써, 한집안의 평화를 깨고, 단란한 가정을 파탄나게 함으로써,
그녀의 여러 긍정적인 업적들을 스스로 희석시키고, 빛을 잃게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안타까움이 남게됩니다.
나혜석은 분명히 시대를 앞서간 신 인텔리여성이었고, 여권운동의 선각자였지만, 그녀가 시대를 너무 앞서간 자유연애가였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분방하고 문란한 연애관으로 인하여,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고,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에 내몰리게 됨으로써, 53세의 젊은 나이에 결국 행려병자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일본유학생, 최초의 여류서양화가, 최초의 여성 단편소설가, 최초의 근대적 여권운동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자적인 활동을 벌였던 뛰어난 여성지식인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너무 앞서나갔던 의식 때문에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불행을 자초한 여성이 되었다는 점에서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인 사상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를 옥죄는 자가당착, 자승자박에 빠지게된 안타깝고 불행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조금만 덜 과격하고 조금만 덜 급진적이었다면, 그리고 자유연예주의자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자, 존경받는 여권운동가로서 성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며, 남편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면서 평생을 명예롭게 행복한 여생을 살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답니다.
그런점에서, 나혜석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격언이 느껴지는 여성이라고 판단됩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 ‘너무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마지막으로 나혜석이 '이혼고백서'에 쓴 내용의 일부를 올리면서 끝을 맺을까 합니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줌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이름을 기억할 것이리라,
그러니 소녀들이여! 깨어나 내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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