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물리학자 이휘소박사 핵무기개발 의혹과 진실, 사망원인
이휘소박사 1935년 1월 1일 ~ 1977년 6월 16일
우리나라는 과거에 핵개발을 추진했을까요? 한 때 박정희 정권 때, 핵무기 개발을 계획하고 추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정희정권이 핵무기개발을 추진할 때, 항상 따라나오는 인물이 한명 있는데, 바로 이휘소박사입니다.
90년대 초반, 우리나라 핵무기 개발을 성공시킨다는 내용의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출판되어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답니다.
김진명이 90년대에 출판한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내용에 의하면, 이휘소박사는 박정희정권 때에 박대통령이 추진하는 핵무기개발에 참여한 핵심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핵무기 개발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천재핵물리학자였습니다.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박정희대통령과 손을 잡고 핵무기개발을 성공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핵물리학자이자, 소설의 주인공 이용후박사가 바로 이휘소박사입니다.
이휘소박사는 노벨물리학상에 여러번 노미네이트되었을 정도로 세계 물리학계에서 가장 탁월한 지식과 이론을 겸비한 70년대의 세계적인 천재 핵물리학자였습니다.
이휘소박사는 입자물리학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총 110편의 물리학 논문을 썼고, 그 중 70편의 논문이 세계유수의 학술지에 게제될 정도로 그는 입자물리학분야에서 커다란 업적을 세계적인 입자물리학자였답니다.
이휘소박사는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에서 물리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물리학교수로 재직했을 뿐만 아니라,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을 역임하는 등 미국학계에서 매우 화력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70년대에 이휘소박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물리학계의 최고의 거두였고, 최고의 업적을 이룬 천재 물리학자였습니다.
만약, 이휘소박사가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그는 반드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고도 남았을 인물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 일각에서는 우리가 알고있는 아인슈타인보다도 이휘소박사가 더욱 뛰어난 물리학자였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이휘소박사는 20세기 통틀어 최고반열의 물리학자라는 찬사를 받고있는 인물입니다.
♥ 박정희대통령의 핵개발 의혹과 이휘소박사의 사망, 사망원인
그런데, 그런 그가 1970년 후반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1977년 6월 16일 아침, 미국 일리노이주 도로를 달리던 작은 스포츠카가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던 거대한 크기의 탱크롤리 트럭과 정면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스포츠카를 운전하고 있던 이휘소박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휘소박사는 아내와 아들과 딸을 태우고 스포츠카를 몰고서 여행을 가고있었는데,
반대 차선을 달리던 36톤의 거대한 탱크롤리 트럭이 갑자기 중앙분리대를 넘어와 이휘소박사의 자동차를 들이받았고,
그 탱크롤리 트럭은 이휘소박사의 자동차 앞부분을 깔고 올라타 버렸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아내와 아이들은 무사했지만, 차를 운전했던 이휘소박사는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사망하고 말았는데, 그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42살에 불과했습니다.
이 당시 이휘소박사가 당한 교통사고는 매우 석연치않은 부분이 많았고, 많은 사람들은 매우 미스테리사건이라고 생각하면서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대편 차선을 달리던 거대한 크기의 탱크트럭이 차선을 넘어와서 이휘소박사의 차를 들이박는 사고를 냈는데,
이것은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서 이뤄진 계획적인 충돌사고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일각에서 이 때 만일 이휘소박사가 죽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도 핵보유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도 제기되었답니다.
미국정부가 한국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한국계 핵물리학자인 이휘소박사를 사고를 위장해서 계획적으로 살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음모론까지 대두되었습니다.
이 당시 시중에 떠돌았던 음모론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휘소박사가 박정희대통령에게 핵기밀문서를 건네려고 할 때에, 이를 눈치 챈 미국정부가 한국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서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이휘소박사를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당시 박정희대통령과 카터대통령은 사이가 매우 안좋았습니다. 그 이유는 박정희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려 한다는 것을 카터대통령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박정희대통령의 핵무기개발을 도와주기 위해 이휘소박사가 핵개발 기밀문서를 한국정부에 건넸다는 사실을 눈치챈 미국의 카터행정부의 지시에 의해서 미국CIA가 이휘소박사를 계획적으로 암살했다는 것입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에서도 이휘소박사에 해당하는 주인공 이용후박사가 제3공화국의 핵무기개발 계획의 중심인물로 핵무기 설계도를 수술한 다리뼈에 몰래 숨겨서 들여와서,
한국정부에 전달하는 등 한국의 핵개발에 큰 활약을 펼쳤고, 이를 눈치챈 미국정부는 한국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교통사고를 위장해서 이휘소박사를 암살했다고 합니다.
당시 1970년대 중반 미국의 카터대통령은 박정희대통령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의도를 눈치챘고, 한국 핵개발의 중심인물인 이휘소박사를 몰래 사찰하고 있었는데,
이휘소박사가 핵개발 설계도를 한국정부에 몰래 전달하려고 시도하자, CIA요원을 동원해서 위장 교통사고를 일으켜서 이휘소박사를 암살했다는 것이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나오는 내용처럼, 이휘소박사가 한국의 핵개발에 참여한 것이 사실일까요?
실제로 이휘소박사는 1974년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휘소박사가 한국을 방문했던 그 시기가 한국정부가 핵개발을 하겠다는 ‘890’계획을 처음 시작했던 시기와 일치합니다.
그래서 이휘소박사가 한국의 박정희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한국의 핵개발에 도움을 주기위해서 한국을 방문해 모종의 역할을 했다고 의심받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미국정부가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밝힌 시기여서, 박정희대통령으로서는 안보위기를 크게 느끼던 시기라서, 핵무기개발이 절실했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의 닉슨대통령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고, 카터대통령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지요.
이렇게 70년대 중후반 한국의 안보상황에 구멍이 뚫리고 안보위협이 심화되는 상황이 되자, 박정희대통령은 이휘소박사에게 친필서한을 보냈다고 합니다.
박대통령은 이휘소박사에게 ‘이박사님, 조국을 건져주십시오! 제 부탁이니 귀국해서 한국을 위해 일해주시오! 내 이박사만 돌아온다면, 60만 대군을 동원해 이박사의 경호를 위해 쓰겠소!
우리민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 이박사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친필서한을 써 보냈다고 합니다.
이 박대통령 친필서한 내용은 박정희정권 때에 외무부장관으로 활약했던 이동원씨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랍니다.
박정희정권 때에 외무부장관으로 일했던 인물이 자신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서 박대통령이 이휘소박사에게 핵개발을 위해 한국으로 귀국해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증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절실한 부탁을 받은 이휘소박사가 자신의 다리를 절개해 그 속에 핵기밀 마이크로필름을 넣고 몰래 한국으로 귀국해, 한국정부에 핵기밀을 전달했다는 것이지요.
미국의 핵물리학자의 최고봉이자, 미국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한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휘소박사를 아인슈타인보다 더 뛰어난 과학자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합니다.
즉, 이휘소박사는 미국 핵개발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오펜하이머의 총애를 받는 한국출신의 천재과학자였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퍼즐을 조합해보면,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나오는 내용처럼, 이휘소박사가 박정희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한국의 핵무기개발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미국의 최고 핵개발 권위자인 오펜하이머가 총애를 했고, 한국의 박정희대통령이 친필서한을 보내 도와달라고 절실한 부탁을 했고, 또한 이휘소박사는 실제로 1974년도에 한국을 다녀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휘소박사가 한달간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1974년도의 12월에 핵개발프로젝트인 ‘890프로젝트’를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70년대에 한국의 핵개발을 담당했던 부서가 있었는데, 경제 2수석실이 실제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우리나라의 핵개발을 추진했었다고 합니다.
그 때 박정희정권의 경제 2수석실에서 근무했던 김광모 비서관의 증언에 의하면, 1972년 7월에 박정희대통령이 참모들에게 ‘핵개발을 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한국의 핵개발이 처음으로 추진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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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은 우라늄은 돈도 많이 들고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기 때문에, 우라늄보다는 풀루토늄을 원료로 해서 핵무기개발을 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풀루토늄은 우라늄에 비해서 만들기가 쉬운데,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폐연료를 사용해 재처리만 하면 쉽게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박정희정권하에서는 풀루토늄 재처리시설을 짓는 방법으로 핵개발을 추진했다는 합니다.
그러니까, 박정희정권 때에 우리나라가 핵개발을 추진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랍니다.
박정희대통령의 핵개발을 시도한 이유는 닉슨독트린 때문이지요.
1969년도에 닉슨대통령은 괌에 가서 ‘닉슨독트린’을 발표하는데, ‘닉슨독트린’의 주된 내용은 아시아의 국방과 안보는 아시아인이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었지요.
이제 미국은 더이상 아시아국가들의 방어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베트남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엄청난 예산낭비와 인력의 손실을 맞보았고, 종국적으로는 베트남전쟁에서 패배까지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닉슨대통령은 더 이상의 국가의 손실을 막기위해서, 아시아의 전쟁에서 손을 떼겠다는 발표를 한 것이지요. 더욱이 닉슨대통령은 미군철수도 함께 거론했습니다.
이러한 닉슨대통령의 미군철수 주장과 계속되는 무장공비 침투로 인해 남북대치가 첨예화되는 상황에서, 박정희대통령은 심각한 안보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실제로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수를 단행했고, 박대통령은 이때부터 더이상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나라 스스로 우리국방을 책임지는 ‘자주국방’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답니다.
이러한 위태로운 안보상황에서 박정희대통령은 마침내 핵개발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기술력이 부족했던 그 당시에, 한국의 핵개발에 가장 필요로 하는 인물이 바로 미국의 천재물리학자 이휘소박사였던 겁니다.
박정희정권은 1974년도부터 ‘890계획’을 수립한 후, 본격적으로 핵개발을 추진하게 되었는데요.
미국은 이러한 한국의 핵개발계획을 도감청을 통해서 눈치챘고, 한국의 핵개발의 핵심인물인 이휘소박사를 CIA를 시켜서 암살했다는 겁니다.
여기까지의 일련의 상황을 조합해보면, 한국이 핵개발을 추진한 것은 사실이고, 또한 박정희정권의 핵개발에 이휘소박사가 참여한 것도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정말로 이휘소박사 박정희대통령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한국의 핵개발에 참여한 것이 사실일까요?
♥ 이휘소박사의 한국 핵개발 참여는 허구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박정희대통령의 부탁으로 이휘소박사가 한국의 핵개발에 참여했다는 것은 허구입니다.
박정희대통령 때, 핵무기개발을 추진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박정희정권의 핵개발에 이휘소박사는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휘소박사는 독재정치를 하는 박정희정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박정희대통령 때, 이휘소박사가 핵개발에 참여했다는 것은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내용과 이동원 전외무부장관의 회고록, 그리고 일부의 음모론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휘소박사가 한국의 핵개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이휘소박사의 부인의 육성증언이 전격 공개되면서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이휘소박사 부인 마리안은 이휘소박사가 한국의 핵개발을 도와주다가 사망했다는 소설의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고, 그러한 소설을 쓴 소설가들을 모두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답니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의 제2 경제수석실에 근무했던 김광모 전비서관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박대통령이 이휘소박사에게 핵개발 위해 도와달라는 내용의 친필서신을 보낸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라고 증언을 했습니다.
김광모 전비서관의 주장에 따르면, 이휘소박사는 순수한 물리학자이며,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한 뛰어난 과학자의 한사람일 뿐인데,
세계평화를 위해 일한 물리학자에게 핵무기개발의 핵심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휘소박사는 입자물리학이 전공이며, 핵물리학은 이휘소박사의 전공과는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휘소박사가 박정희정권의 핵개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휘소박사는 자신의 논문지도를 받았던 제자 강주상에게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잘라말했다고 합니다.
즉, 이휘소박사는 평소에 한국 같은 독재국가에서는 절대로 핵무기가 개발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굳은 신념을 갖고있었다고 합니다.
이휘소박사는 평소에 박정희정권의 독재권력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이 그토록 반대하는 박정희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핵개발에 동참한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김진명이 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나온 이휘소박사가 한국의 핵개발에 참여했다는 내용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쓴 소설이고, 과장된 픽션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과학계의 중론입니다.
이휘소박사는 단지 입자물리학에 큰 기여를 한 천재물리학자일 뿐인데, 작가가
자신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기 위해서 이휘소박사를 크게 포장하고 과장해서 마치 그가 핵개발에 공을 세운 핵물리학자인 것처럼 둔갑시켜 책을 출판했다는 겁니다.
이휘소박사의 부인 마리안은 한국작가들이 이휘소박사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한국작가들을 법원에 고소까지 했습니다.
이휘소박사의 부인 마리안은 이휘소박사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새로운 원리를 발견한 순수한 과학자일 뿐인데,
일부 한국작가들이 사실과 다르게 오히려 이휘소박사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포악한 핵개발자로 둔갑시켜 이휘소박사의 명예를 크게 훼손했다는 이유로 작가들을 고소한 사실만 보더라도 이휘소박사가 한국의 핵개발을 주도했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느껴집니다.
김진명작가 쓴 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때문에, 순수물리학자인 이휘소박사가 마치 박정희정권 때에 핵개발을 주도한 핵개발자로 활동했다가 암살당했다는 터무니없는 음모론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답니다.
책이 너무 인기가 좋아서 순수물리학자였던 이휘소박사를 책의 주인공과 혼동해서 진짜 핵개발자인 것처럼 오해를 받게된 것이 너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이휘소박사가 CIA의 공작으로 위장 교통사고를 당해서 암살당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습니다.
이휘소박사가 1977년 일리노이주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도,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탱크롤리트럭의 타이어가 터짐으로써,
트럭이 중심을 잃고 중앙분리대를 넘어와 고인의 자동차와 충돌하는 우연한 교통사고가 발생해 사망한 것이지, 고의적으로 일으킨 충돌사고가 아니었음이 조사를 통해서 확인되었답니다.
고속도로에서 고속으로 달리던 탱크트럭의 타이어가 터져서 브레이크가 작동되지않는 상태에서 일어난 단순한 교통사고였을 뿐인데,
음모론자들은 마치 이휘소박사가 한국의 핵개발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미움을 사서 CIA의 공작에 의해서 암살된 것처럼 그럴듯하게 묘사했던 것이지요.
이휘소박사가 박정희정권의 핵무기개발에 참여했다는 주장은 여러 가지 정황증거들로 인해서 허위사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휘소박사가 세계물리학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천재물리학자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1999년에 네델란드의 물리학자 엇호프트는 지도교수 펠트만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엇호프트가 이휘소박사의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에 대한 강의에서 큰 영감을 얻어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고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만일 이휘소박사가 그 때까지 생존해있었다면, 이휘소박사와 엇호프트가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과학계의 통설입니다.
197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압두스 살람은 ‘이휘소박사는 현대물리학을 10년 앞당긴 물리학의 천재이다. 이휘소박사가 수상해야할 노벨상을 내가 탄 것이 부끄럽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휘소박사는 20세기 세계물리학계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세운 천재물리학자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랍니다.
핵개발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세계물리학계에 커다란 기여를 한 천재물리학자 이휘소박사가 42살의 젊은 나이에 일찍 사망하고 말아, 너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만일, 이휘소박사가 일찍 사망하기 않았다면, 그는 분명히 2~3개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세계의 많은 과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휘소박사는 자신의 주 전공분야인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로 노벨물리학상을 따내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가 너무도 일찍 사망하고 말아서, 한국에 최초의 노벨물리학상을 안겨주는 영광을 놓치게된 점이 너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아마도,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는 정도로 세계물리학계에서 커다란 업적을 쌓은 천재물리학자 이휘소박사의 너무나도 빠른 죽음을 너무도 안타까워한 대중들의 아쉬움과 군중심리가 작용해서,
그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최고의 숙원사업인 핵개발사업의 주인공으로 둔갑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사료된답니다.
비록 이휘소박사는 사망했고, 우리나라는 비록 핵개발을 이룩해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기적과 같은 경제성장을 이룩해서, 현재는 세계적인 과학기술강국으로 도약했고,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선진국이자, 세계 6위의 군사강국으로 우뚝 올라섰답니다.
비록 핵개발은 성공하지 않았지만, 이처럼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레벨의 경제선진국이자, 과학기술강국으로 도약한 것이야말로 이휘소박사가 진정으로 원했던 바램이 아니었을까요?
참고로, 이휘소박사의 핵개발 참여여부를 떠나서, 박정희정권은 1979년 하반기에 이미 핵무기개발의 95%까지 완성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핵개발 완성 발표를 몇 개월 남겨놓고 갑자기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면서 우리나라의 핵개발은 갑자기 중단되고 맙니다.
그리고,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라는 약점 때문에, 박정희대통령이 개발한 일체의 핵개발 설계도와 기술을 모두 미국에 넘기면서 우리나라의 핵개발 사업은 완전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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