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와룡산 세방골 성서 초등학생 살인·암매장사건의 전말과 목격자, 개구리소년 사마원인
1991년 3월 26일 오전 8시경, 대구시 달서구에 살던 성서초등학생 다섯명이 개구리(도룡농알)을 주우러 간다고 나갔다가 갑자기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도룡농알을 줍겠다고 나갔던 다섯명의 초등학생 소년들은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입니다.
이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방영되면서, 세상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약하고 어린 다섯명의 소년들이 없어진데 대해 사회적으로 커다란 동정여론이 일어나면서, 우리사회에 엄청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이랍니다.
1991년 3월 26일, 와룡산에 도룡뇽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섰던 13살 우철원, 12살 조호연, 11살 김영규, 10살 박찬인, 9살 김종식 등 다섯명의 소년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다섯명의 아이들이 돌아오지않자, 당시 경찰과 군인 등 32만명을 투입해서 아이들이 갔던 와룡산 주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군인과 경찰, 민간자원자들까지 동원되어서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지만, 단 한명의 아이도 찾지못하고 그 흔적조차도 발견하지 못하면서,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묻히게 되었습니다.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아니라, 아이들의 사망원인조차도 제대로 규명하지못한 채,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2006년 3월 25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고, 이 때부터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는데요.
이렇게 소년들의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했던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2002년도에 와룡산에서 아이들의 유골이 전격 발견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됩니다.
1991년 3월 26일에 와룡산에 올라가 도토리를 줍던 주민에 의해 계곡에 널부러진 유골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유골들이 바로 개구리소년의 유골임이 확인되면서 큰 충격을 주었답니다.
이날, 김종식군을 비롯한 5명의 아이들이 와룡산으로 간 이유는 사실 도룡뇽알을 찾으러 간 것이었는데, 도룡뇽이 매스컴에 의해 개구리로 잘못 보도되면서,
세상에는 개구리를 찾으러 간 소년들로 잘못 보도되었던 것이며, 그 이후 ‘개구리소년’으로 굳어지지된 것입니다.
당시 5명의 아이들이 와룡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여러명의 마을주민들이 목격했으며,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2시간 내에 갔다 올 수 있을까?’라는 말을 주고받는 소리를 들은 목격자도 있습니다.
이날 12시경, 우철원과 같은반이었던 김경열군과 이태석군이 와룡산입구에서 5명의 아이들을 목격했고, 잠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며, 또한 와룡산기슭에 사는 마을주민이 이날 2시경에 다섯명의 아이들이 와룡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마을주민들이 5명의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목격담이지요.
그러니까, 1991년 3월 26일 오후 2시경, 와룡산기슭에 사는 한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후, 그 후 다섯명의 아이들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완전히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도룡뇽알을 찾으러 와룡산에 갔던 다섯명의 개구리소년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그런데, 또다른 소년 함승훈군에 의해서, 또다시 아주 중요한 증언이 나왔습니다.
같은날 다른 일행들과 함께 와룡산에 올랐던 함승훈은 이날 12시경 산 위쪽에서 아주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두 번 연속해서 들었다고 합니다.
그 비명소리는 너무도 날카롭고 끔찍해서 다시는 듣고싶지 않은 소리였다고 함승훈은 회고하고 있습니다.
결국, 다섯명의 아이들은 와룡산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되었고, 그날 저녁 7시 50분경, 부모들의 신고에 의해 경찰과 주민들이 출동해서 와룡산을 샅샅히 수색했지만, 다섯명의 개구리소년들을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경찰은 이 사건을 가정불화로 인한 아이들의 가출사건으로 보고 초등수사에 소극적이었는데, 이같은 경찰의 엉뚱한 수사방향으로 인해서, 아이들을 조기에 찾아내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정부당국이 이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한 후, 대구지방경찰청에 합동수사본부를 차리면서 본격적인 수사를 벌였고,
1995년까지 5년동안 32만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지만, 안타깝게도 끝내 다섯명의 개구리소년들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 2002년 9월, 개구리소년들의 유골 발견, 사망원인
이렇게 30만명 이상의 경찰과 군인을 총동원해가며 아이들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아이들을 찾는데에 실패하면서 영구 미제사건이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2002년 9월 26일, 놀랍게도 성산고등학교 뒤쪽 와룡산중턱에서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전격 발견되었습니다.
2002년 9월 26일, 와룡산에서 도토리를 줍던 한 주민이 어린이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들을 발견했는데, 이 유골들은 바로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인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다섯명의 아이들은 와룡산의 동쪽 중턱 계곡에서 한데 엉켜있는 자세로 유골상태로 발견되었는데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범인의 DNA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유골이 한데 엉켜있는 점, 그리고 현장에 구덩이의 흔적이 없는점 등을 근거로 들면서 추운 날씨에 아이들이 길을 잃고 헤메이다가 체온저하로 숨졌다는 자연사를 주장했는데 반해,
법의학팀은 두개골 손상을 근거로 아이들이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는 타살설을 주장했습니다.
개구리소년의 유골이 발견된 곳은 구 육군 제50보병사단의 사격장 부지여서, 탄피를 모으러갔던 아이들은 군인이 쏜 오발탄에 의해서 타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아이들이 실종된 지 11년만에 아이들의 유골은 발견되었지만, 범인의 DNA 같은 중요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개구리소년들의 사망원인을 놓고, 자연사다, 사고사다, 타살이다 등 여러가지 주장이 제기되면서 치열한 논쟁만 가열되었습니다.
경찰은 파헤쳐진 소년들의 유골을 본 후, ‘상식적으로 볼 때, 타살흔적은 거의 없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라는 성급한 주장을 내놓아서, 유족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법의학팀이 수개월동안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을 정밀하게 조사를 벌인 끝에, 개구리소년들이 타살되었다는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중에 우철원, 김종식, 김영규의 두개골에는 여러개의 손상흔이 남겨져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만약 아이들이 그냥 추운 날씨 때문에 체온저하로 숨졌다면, 그들의 신체에 손상흔적이 남지않았을 텐데, 아이들의 두개골에는 뭔가 날카로운 도구에 맞아 깊게 파진 손상흔적이 남겨져 있는 모습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손상흔적은 아이들이 누군가에 의해서 예리한 도구나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아서 그 충격으로 숨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경찰은 아이들을 살해하는 데 사용된 그 범행도구를 밝혀내지 못했답니다.
◆ 개구리소년들의 사망원인, 타살 가능성 유력
이제, 개구리소년 암매장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의 유골에 남겨진 손상흔뿐이고, 이 손상흔적을 만들어낸 범행도구가 무엇인지가 이 사건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 버니어 캘리퍼스에 의한 타살
그런데, 22년 6월, 개구리소년의 구체적인 범행도구를 지목하는 글이 온라인게시판에 올라와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글에 따르면, 소년들 두개골의 손상흔과 비슷한 흔적을 내는 도구는 ‘버니어 캘리퍼스’라는 공구라고 합니다.
그 제보자는 소년들 두개골의 상처흔적을 보자마자, ‘어, 이 도구는 버니어 캘리퍼스잖아!’라는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공고다닐 때에 이 ‘버니어 캘리퍼스’를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잘 알고있다는 겁니다.
버니어 캘리퍼스는 길이나 높이 등 기계의 수치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측정도구의 일종으로, 앞뒤쪽 부분이 날카롭게 날이 튀어나와 있습니다.
이 버니어 캘리퍼스의 날카로운 날부분으로 사람의 두개골을 가격했을 때에, 개구리소년들 두개골에 난 상처와 비슷한 상흔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버니어 캘리퍼스
이 제보자의 주장에 따르면, 와룡산부근에는 본드를 흡입하는 불량한 고등학생들이 있었는데, 산에 오른 소년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고,
이 불량청소년들은 자신들의 비행을 숨기기위해서 자신들을 목격한 개구리소년들을 버니어 캘리퍼스로 살해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가설은 실제로 버니어 캘리퍼스를 사용한 적이 있는 제보자가 내세운 가설인데, 당시 많은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면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가설은 개구리소년 실종사건과 관련해서 가장 유력한 가설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와룡산부근에서 버니어 캘리퍼스를 사용하는 고등학교가 있는지가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런데, 와룡산 인근에서 아주 가까운 한 공업고등학교가 있는데, 그 공고에는 전자계열과 화공과밖에 없고, 기계과는 없다고 합니다.
버니어 캘리퍼스를 사용하는 과는 기계과인데, 이 공업고등학교는 기계과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개구리소년사건과 연관성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해당 공업고등학교는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발생한 1991년도부터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한번도 버니어 캘리퍼스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은 와룡산인근 마을에서부터 대구전지역으로 대대적인 탐문수사를 벌여왔습니다.
특히 경찰은 와룡산 인근의 중고등학교 자퇴생 930명을 포함해 성서공단에서 일하는 공단종업원 1,232명 등 2,000명이 넘는 청소년과 학생들을 일일이 수사했지만, 그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조사팀에서 제보자가 살해의 도구라고 지목한 ‘버니어 캘리퍼스’로 유골을 내리칠 경우, 어떤 상흔이 남는지에 대한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두개골모형에 지점토를 붙여서 실제와 비슷한 두개골모형을 만든 후, 실제상황과 똑같이 ‘버니어 캘리퍼스’로 그 두개골을 내리쳤습니다.
버니어 캘리퍼스로 두개골을 내리쳤을 때, 버니어 캘리퍼스의 뒤쪽으로 내리쳤더니, 개구리소년의 두개골에 나타난 상처흔과 유사한 상흔이 나타났습니다.
실험결과, 제보자가 주장한 데로, 실제 개구리소년을 살해한 도구는 ‘버니어 캘리퍼스’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답니다.
즉, 와룡산에 올라온 개구리소년들에게 누군가가 나타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버니어 캘리퍼스로 그들의 두개골을 내리쳐서 살해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 체온저하로 인한 자연사, 경찰 추정
제보자의 주장대로 개구리소년들은 산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날카로운 도구로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지는데요, 이것은 법의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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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경찰은 이런 타설설에 동의하지 않고, 개구리소년들이 추운날씨 때문에 산속에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개구리소년들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은 와룡산 중턱에 있는 너비 320cm, 높이 80cm의 계곡이었습니다.
경찰의 주장에 따르면, 와룡산은 산세가 높고 험해서 어른들도 처음 이 산으로 들어오면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하물며, 초등학생인 다섯명의 어린아이들이 이 산속으로 들어와서 길을 잃고 헤메이다가 너무 추운 날씨 때문에, 저체온증에 결려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 개구리소년들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계곡으로 몸을 피한 점과 다섯명의 아이들이 서로 부등켜안은 자세로 숨져있는 점을 들었습니다.
즉, 경찰의 입장은, 다섯명의 개구리소년들은 누군가에 의해 타살된 것이 아니라,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저체온증으로 인해 자연사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경찰의 주장은 좀 논리에 맞지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초등학생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개구리소년들은 여러차례에 걸쳐서 와룡산에 다녀왔기 때문에, 이 소년들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자연사했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약하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경찰 주장대로 만약에 소년들이 자연사했다면, 개구리소년들의 두개골에 난 상처흔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개구리소년들의 두개골에는 분명히 굵게 깊게 파인 상처흔적들이 여러개 나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예리한 둔기로 소년들의 두개골을 내리쳐서 참혹하게 살해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찰이 주장하는 저체온증으로 인한 자연사는 타당성이 거의 없고, 범인을 잡지못한 자신들의 책임을 돌리기 위한 ‘책임전가’라고 판단됩니다.
또한 경찰은 당시 국과수에 의뢰했는데, 국과수에서는 소년들의 두개골 상처와 똑같은 상처를 낼만한 공구는 없다는 결과를 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최근에한 조사팀에서 행한 실험에서 소년들의 두개골 상처와 유사한 상처흔적을 낼만한 공구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버니어 캘리퍼스’와 ‘전지가위’입니다.
버니어 캘리퍼스 뿐만아니라 전지가위도 개구리소년들 두개골에 난 상처와 유사한 상처흔을 내는 공구로 밝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은 버니어 캘리퍼스나 전지가위로 소년들의 두개골을 내리쳐서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대구 개구리소년 암매장사건’은 타살이냐, 자연사냐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아직 뚜렷한 결론이 나지않은 상태입니다.
◆ 개구리소년 유골터에서 탄두 대량 발견, 군인 사격훈련에 의한 피살?
그런데, ‘대구 개구리소년 암매장사건’에서 또다른 의혹이 불거지고 있으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곳은 와룡산의 동쪽 성산고등학교 뒷쪽의 중턱이었어요.
경찰은 32만명을 동원해서 와룡산일대를 대대적으로 수색했는데도 불구하고,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와룡산의 동쪽지역은 제대로 수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찰이 30만명이 넘는 인원을 투입해서 수색하였지만, 이상하게도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역은 제대로 수색하지않았다고 하니, 정말 어이없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찰은 처음부터 이 사건은 개구리소년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수사했기 때문에, 수사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무성의하고 안이하게 수사를 했습니다.
만일 경찰이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와룡산 동쪽지역을 제대로 수색했더라면, 어쩌면 개구리소년들을 살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안이하고도 형식적인 수색활동을 벌인 경찰 때문에 개구리소년들을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겁니다!
그런데, 개구리소년의 유골이 발견된 그 계곡에서 ‘탄두’가 함께 발견되어서 놀라움을 주고있습니다.
즉, 군인들이 총으로 사격을 할 때 발사되는 ‘탄두’가 개구리소년들의 유골 근처에서 함께 나왔는데, 탄두 138개가 들어있는 우유팩도 근처에서 함께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개구리소년의 죽음과 탄두 사이에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개구리소년들이 다니는 성서초등학교 뒤쪽 1km 지점에 와룡산이 있는데, 학생들은 이 와룡산에 곤충이나 도룡뇽을 잡으러 가기도 하고, 때론 총알이나 탄피를 주우러 많이 다닌다고 합니다.
아파트가 많이 밀집해있는 대구의 이곡동 부근에 90년대에는 군대 사격장이 있었으며, 아이들은 이 사격장 근처로 총알이나 탄피를 주으러 많이 다녔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바로 이 사격장에서 가까운 인근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수색활동을 벌였던 경찰은 이 사격장쪽으로는 수색을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탄피를 주우러 다녔다는 정보를 얻지못했기 때문이랍니다.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사격장 인근지역인데, 당시 경찰이 이 지역을 수색하지 않는 바람에, 사건이 미궁에 빠지게된 것이지요.
경찰이 좀 더 적극적이고 성심껏 대응했더라면, 경찰이 사격장 인근지역을 촘촘히 수색했더라면, 개구리소년들을 더 빨리 찾아낼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 점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이처럼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주변에서 대량의 탄두가 발견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은 군부대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격장에서 사격훈련을 하고있던 군인들이 혹시나 잘못 사격하는 바람에 개구리소년들을 죽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겨났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 사격장을 관할하는 부대는 50사단이었는데, 50사단 군관계자의 따르면, 아이들이 실종된 그 날에 그 어떤 부대활동도 전혀 없었으며, 해당부대원들의 사격훈련 또한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개구리소년 유골의 손상흔이 총상과 관계가 있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유골과 거의 같은 모의유골을 만들어놓고, 사격을 가하는 실험을 실시하였는데, 개구리소년의 유골에 있는 손상흔적은 총탄에 의한 손상흔과 다르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구리소년들이 실종된 3월 26일 오후 4시경에, 소년들과 군인을 함께 보았다는 한 목격자의 증언이 나왔습니다.
그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날 오후 4시경에 초등학생 소년들이 와룡산 중턱에 있었는데, 독수리마크가 새겨진 빨간모자를 쓴 군인이 나가라고 호통을 쳐서, 아이들을 다른곳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실종사건이 일어난 3월 26일에 개구리소년들은 군인들과 동선이 겹치는 곳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 목격자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의 군대 관계자는 그날 부대원의 훈련이나 이동이 전혀 없었다고 전혀 다른말을 했습니다.
군 관계자가 목격자의 말과 일치하지 않는 증언을 한 것인데, 그러면 그날 부대원들의 훈련이나 이동이 전혀 없었다는 군대 관계자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사건당일에 개구리소년들의 동선과 군부대원의 동선이 서로 겹치고 있기 때문에, 경찰이 군부대원에 대해 치밀한 수사를 벌였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군인들에 대해서 거의 수사를 벌이지않았다고 합니다.
목격자의 증언과 여러가지 정황들에 의하면, 군인들을 개구리소년 암매장사건의 중요한 용의선상에 놓고 수사를 벌였어야 마땅했는데, 이상하게도 경찰은 군인들을 놓쳐버린 겁니다.
91년 3월 26일,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개구리소년들의 시간차별 이동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날 개구리소년들은 8시 40분경에 성서초등학교 앞에 있었고, 9시 4분경에 항공대입구를 지나서 12시경에 쌍마섬유 앞까지 왔다가, 오후 2시경에 와룡산 불미골입구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개구리소년들은 오후 4시경에 무학사 뒤편으로 이동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후, 개구리소년들은 불미골의 동쪽 중턱지점에서 유골이 되어 발견되었답니다.
개구리소년 암매장사건은 아직 범인의 윤곽도 찾지못했고, 소년들의 사망원인 조차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개구리소년 암매장사건의 단서는 위에서 설명한 데로, 저체온증으로 인한 자연사, 산에서 만난 불량청소년의 ‘버니어 캘리퍼스’나 ‘전지가위’를 사용한 타살, 인근 군부대원들의 실탄발사 오발사고에 의한 타살 등 세가지 중 하나에 의해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됩니다.
소년들의 두개골에 나타난 상처흔적을 볼 때에, 여기서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산속에 있던 누군가에 의해서 ‘버니어 캘리퍼스’나 ‘전지가위’같은 날카로운 공구에 의해 가격당해서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판단되는데요.
그 범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있으나, 경찰은 범인을 잡는데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반드시 범인을 검거해서 남은 유가족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경찰의 초동수사 미흡과 무사안일하고 소극적인 수사 때문에, 황금같은 시간을 낭비함으로써, 어쩌면 살릴 수도 있었을 불쌍한 다섯명의 소년들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개구리소년 실종암매장사건은 정말로 안타까운 사건이며, 희대의 미스테리한 미제사건입니다.
경찰 32만명을 투입하면서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경찰의 초동수사 미흡과 과학수사 미흡으로 11년 동안 사건의 단서조차 찾지못했습니다.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을 발견한 장소, 와룡산 동쪽 중턱 계곡, 성산고등학교 뒷쪽
그리고 11년이 지난 후에 우연히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되었지만, 범인의 윤곽은 커녕, 아직까지 아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사망원인 조차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개구리소년사건은 대구경찰청의 장기미제수사팀에서 맡아 재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대구경찰청의 장기미제수사팀에서 개구리소년사건을 재수사를 담당하면서, 여러 제보와 증거물 재감정 등 다각도로 수사를 벌여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신빙성있는 단서를 찾지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기미제 사건인 개구리소년 암매장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찰의 적극적인 수사의지와 국민들의 관심과 제보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더욱 더 진일보한 수사기법을 사용해서 하루빨리 그 잔인한 범인을 검거해서, 억울하게 죽은 소년들과 유가족의 한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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