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로서, 한 때 사치의 여왕으로 알려졌던 인물이지요

 

오늘을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와 그녀의 비운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비운의 왕비입니다. 

 

오스트리아공주 출신으로 프랑스국왕 루이 16세에게 시집와서, 화려한 궁중생활을 즐기기도 했지만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 분노한 혁명군에 의해 체포되어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의 처형을 당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당한 비운의 왕비라고 할 수 있지요.

 

프랑스의 왕비로서 남부럽지않은 삶을 살고있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였지만, 그녀에게는 심한 콤플렉스를 하나 갖고있었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하얗고 고운 피부에 탐스러운 금발머리를 가진 미인이었지만, 아쉽게도 주걱턱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턱이 심하게 돌출되어 있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돌출된 주걱턱에 대한 콤플렉스를 많이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원래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는데, 오스트리아왕실의 정략적 목적에 따라 프랑스왕가로 시집을 왔는데, 그녀는 자신의 고향을 무척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고향에 있는 어머니를 무척 그리웠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자신의 초상화를 보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러차례에 걸쳐 실력있는 화가를 모집해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답니다.

그런데, 수많은 화가들이 초빙되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4년이 지나도록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는 어머니에게 보내지못했습니다.

 

궁정화가들은 그녀를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그 그림들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돌출된 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합스부르크왕가의 후손이었는데, 그녀는 합수부르크의 유전적인 질환을 앓고 있었답니다.

합스부르크는 자신들의 유전적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근친혼을 해왔기 때문에, 합스부르크왕가의 후손들은 유전질환을 앓아서 모두 돌출된 입과 주걱턱을 갖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도 합스부르크의 유전질환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튀어나온 아랫입술과 주걱턱, 매부리코를 갖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그녀의 주걱턱과 튀어나온 아래입술을 사실대로 그렸고, 이것이 그녀의 마음에 들지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운 화가 엘리자베스 비제르 브룅를 고용해서, 다시 초상화를 그리게했고

그녀의 컴플렉스를 간파한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주걱턱 대신 작고 아름다운 턱을 그려넣었고, 이로서 마침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가 완성되었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엘리자베스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의해서 왕실화가로 고용되었고, 그 후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계속 그리게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제 모습보다 더 예쁘고 매력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그 후에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수많은 초상화들을 계속해서 그렸습니다.

  

그림그리는 재능이 뛰어났던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초상화를 최대한 화사하고 밝은 이미지로 그렸고

화이트와 핑크빛, 골드빛의 색상을 사용해서 좀 더 화려하고 우아한 느낌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렇게 멋진 초상화에 대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큰 만족감을 표시했고, 그 초상화를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낼 수 있었답니다.

  

이렇게 멋지고 화려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프랑스민중들에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당시 대단한 흉작으로 가난에 허덕이던 민중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화려하고 멋진 초상화에 대해 크게 분노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정부의 재정은 파탄난 상태였고, 프랑스시민들은 엄청난 세금과 흉작으로 인해 매우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 프랑스민중들은 초상화속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보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왕비가 백성들의 가난한 삶은 전혀 돌보지않은 채, 혼자만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프랑스민중들의 참았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 당시에 프랑스민중들로 하여금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된 두가지 사건 때문이랍니다.

 

프랑스의 가난한 민중에게 빵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부족하면 케이크를 먹으면 돼지!’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민중들 사이에 크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고국인 오스트리아를 떠나서 프랑스로 시집을 온 이후에, 프랑스의 낯설고 엄격한 궁중문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몹시 외로워했는데요.

 

향수병에 시달리는 그녀를 위해서 남편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프티 트리아농궁전을 선물로 주었지요.

 

그녀는 타지에서의 낯설운 궁중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생긴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잊기위해서, 귀족들을 불어서 가끔씩 궁궐에서 파티를 즐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민중들 사이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궁전에서 사치스럽고 향략적인 파티가 밤낮없이 열린다는 매우 과장된 루머가 만들어져 퍼지게 된답니다.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향수병과 프랑스궁중의 엄격한 규율로 인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가끔씩 그 별궁에서 귀족들을 모아 파티를 연 것인데요.

 

마리 앙투아네트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실제의 사실보다 크게 부풀려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불리한 소문을 만들어서 민중들에게 퍼뜨렸던 것입니다.

 

또한 1785년도에 다이아몬드목거리 도난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마리 앙투아네트의 별궁파티에 참가한 한 보석상이 그녀에게 엄청나게 귀하고 비싸고 고급스러운 다이아몬드목걸이를 사줄 것을 권유했는데요. 이 목걸이에는 다이아몬드가 무려 540개나 박혀있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왕실의 재정이 매우 어려운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있기에, 그녀는 다이아몬드목걸이 구매를 거절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라 모트 백작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왕비의 이름을 사칭해서 이 목걸이를 훔치는 절도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다이아몬드목걸이 절도사건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건이었지만

관련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같은 루머는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된답니다.

 

이렇게 마리 앙투아네트왕비와 관련된 안좋은 소문들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왕비의 권위와 이미지는 크게 실추되어 버렸고, 왕비는 민중들에게 미움받는 존재가 되어버렸지요.

 

그때부터 프랑스민중들 사이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향락의 화신같은 존재감으로 각인되었고, 그녀에 대한 분노감이 크게 증폭되고 맙니다.

 

자신들의 가난한 산림을 돌보지 않은채, 혹독한 세금을 거둬서 그 돈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엄청난 사치를 즐기면서 국고를 낭비한다는 비난이 민중들 사이에 쇄도하게 되었지요.

 

이때부터 민중들 사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아니라, 사치의 화신이며, 악녀이며, 오스트리아의 스파이라고 명명된답니다.

 

 심지어 마리 앙투아네트왕비를 두고 오스트리아의 창녀’ ‘나라를 말아먹을 여자라고까지 부르면서 그녀를 저주하게 되었고

사치스러운 왕비로 낚인찍힌 그녀는 가난한 백성의 타도의 대상으로 몰리게 되었답니다.

 

◆ 프랑스대혁명 발발과 마리 앙투아네트 구금과 처형

  

그리고 실제로 로베스피에로의 주도로 프랑스대혁명이 발생하게 된답니다.

엄청난 흉작과 가혹한 세금징수로 삶이 피폐해지고 도탄에 빠진 프랑스민중들은 데모를 일으켜서, 프랑스정부에게 대대적인 사회개혁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봉기한 민중들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한 루이 16세는 군사들을 동원해서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시도합니다.

 

군사동원으로 억압을 시도한 왕실에 대해 크게 분노한 민중들은 총칼로 무장하고 1789년도에 혁명을 일으키고,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합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인해 발발한 전투에서, 왕실호위군이 혁명군에게 크게 밀리게 되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왕비는 성밖으로 도주하였고, 

외국(오스트리아)로의 망명을 시도했는데, 왕실가족 모두 국경지역 바렌에서 혁명군에게 체포되고 맙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남편 루이 16 국왕은 혁명군에 체포된 후, 감옥에 감금되었고, 결국 4년 뒤에 분노한 혁명군에 의해서 루이 16세가 먼저 단두대의 처형으로 사망하고 말았고, 

9개월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도 콩고드광장으로 끌려나와 단두대에 의해 처형당하고 말았답니다.

 

 그렇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당하는 순간까지도 왕비로서의 위엄과 우아함을 잃지않고 당당했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로 인해서 촉발되었던 흉흉한 민심이 대대적인 흉작과 왕실지배계층의 가혹한 세금징수로 인해서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일반민중들을 중심으로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답니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후, 분노한 민중들은 향락과 사치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왕비 마리앙투아네트를 잡기위해 궁궐로 쳐들어갔고

마침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농민혁명군에게 체포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을 뿐만아니라, 단두대의 참수로 사망하고 말았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외모

 

마리 앙투아네트의 외모는 굉장한 미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예쁘장한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단지, 그녀의 혈통인 합스부르크의 유전으로 인해서 턱이 약간 주걱턱이고 매부리코여서 그렇지, 그녀는 그런대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여성스럽게 생겼다고 합니다.

 

그녀의 초상화는 그녀를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인데, 약간 변조한 턱부분만 빼고는 큰 눈에다 오밀조밀하게 생긴 코와 입 등으로 볼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얼굴은 여성스럽고 예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쪽의 유전으로 가슴둘레가 109cm로 상당히 컸다고 합니다.

 

그녀의 가슴은 귀족부인들간에 열렸던 가슴 콘테스트에서 당당히 1위를 할 정도로 큰 가슴을 지녔다고 하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큐티 글래머스타일의 외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주걱턱이 가장 큰 콤플렉스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예쁜편이었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오해와 해명

 

그런데 후대의 평가에 의하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와 향락의 상징이라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와 루이 16세의 방탕에 의해서 프랑스재정이 파탄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와 루이 16세는 프랑스 왕실재정의 1/10밖에 쓰지않았다고 합니다.

 

프랑스재정이 파탄난 것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때문이 아니라, 루이 16세의 선대왕인 루이 15세의 방탕한 생활때문이라고 하며, 루이 16세는 선대왕의 파탄난 재정을 그대로 물려받은 죄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두번째 오해는 그녀가 굶주리는 백성들한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주면 된다라고 한 말인데, 

그녀는 이런말을 전혀 한 적이 없으며, 혁명군에서 그녀의 죄목을 만들기 위해서 가짜로 만든 가십성 찌라시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운 왕비라고 알려졌으나, 실제로 그녀는 오히려 다른 왕비에 비해 검소한 편이었고, 선량한 성격인데다 동정심이 많은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남편인 루이 16세가 말을 몰다가 농부가 다쳤을 때, 곁에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농부를 데려다가 자신이 직접 그의 부상을 치료까지 해주었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명랑하고 사교적인 성격인데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편견없이 친절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비로서 루이 16세로부터 쁘띠 트라아농 궁을 선물로 받고, 그 성에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가끔씩 귀족들과 파티를 열였다는 것 때문에, 사치의 상징으로 오해를 받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해 그리게 했던 그녀의 화려한 초상화들 때문에

민중들에게 사치와 향락의 화신으로 몰리고 오해를 받게 된 것이고, 종국에서 프랑스대혁명의 완성을 위한 희생양이 되어, 그녀가 희생당한 측면이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남편인 루이 16세는 혁명군의 요구사항인 입헌군주제를 반대했기 때문에,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습니다.

 

그렇지만, 평소에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반혁명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왕비라는 이유와 사치의 화신이라는 잘못된 오해 때문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시대의 억울한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화려한 초상화 때문에, 사치의 화신으로 오해를 받아 죽임까 당했던 프랑스대혁명의 억울한 희생양인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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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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