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트로이카 영화배우 남정임의 영화와 결혼, 폭행사건과 사망원인
오늘은 60년대 트로이카 중 한명인 남정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리나라 영화계가 가장 크게 번영했던 영화의 중흥기인 60년대는 문희, 윤정희, 남정임 이라는 세명의 트로이카미녀들이 활동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던 시대이지요.
이 시기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가장 크게 번성했던 우리 영화의 황금기였는데, 이 시대에는 대단히 연기 잘하고 뛰어났던 배우들이 많이 활동했답니다.
연기의 천재, 신영균을 비롯해서 남궁원과 최무룡, 그리고 신성일 같은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활약을 펼치면서 우리영화계를 이끌어갔고, 우리 영화들이 크게 번성했던 시대였답니다.
60년대 전반에는 최은희와 김지미 같은 고전미인들이 인기를 끌었지만, 60년대 중반부터 이들과는 이미지가 다른 청순하면서 세련미를 갖춘 미녀여배우들이 속속 출현해서 우리 영화계를 주도해 나갔답니다.
60년대 중반, 좀 더 신선하고 세련된 미모를 갖춘 세명의 미녀여배우들이 출현해서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았는데,
그 주인공들이 바로 문희를 비롯한 윤정희, 남정임이었는데, 세상사람들은 그녀들은 ‘60년대의 트로이카’ 또는 ‘1세대 트로이카’라고 부른답니다.
과거의 인기여배우 최은희, 김지미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미인상을 갖춘 고전미인이었다면,
이들 트로이카 3인방은 좀 더 개성있고 세련된 미모를 발산하면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던 60년대 우리 영화산업을 한층 더 발전시켜나가면서, 큰 번영으로 이끌어나갔던 주역들입니다.
1세대 트로이카 중에서도 가장 청순한 미모와 세련미, 그리고 신선감을 안겨주었던 미녀가 바로 남정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녀는 청순한 미모로 그 시대의 남성들의 마음을 온통 사라잡았던 60년대의 대표적인 미녀아이콘이었답니다.
사실 1세대 트로이카 여배우들 모두 미녀들로서, 특히 당시 제일 예쁜 미녀로 문희를 꼽는 사람들이 많지만,
가장 개성이 짙고 가장 세련되며 청순한 미모를 발산했던, 가장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여배우는 단연 남정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희는 주로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한 좀 고루한 내용의 고전적인 스타일의 영화에만 주로 출연함으로서 연기의 스펙트럼이 좁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남정임은 애정물 뿐만아니라, 사회물과 범죄물, 액션물, 사극 심지어는 검술영화, 무협영화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연기활동을 펼쳤던 연기영역의 폭이 매우 넓었던 팔색조 같은 여배우로서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문희와 윤정희는 보편적인 미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정임은 두 미녀여배우와는 색다른 신선함과 세련미, 그리고 독특한 개성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남정임은 트로이카 3인방 중에서 가장 청순한 미녀로 볼 수 있는데, 특히 젊은층들의 큰 사랑을 받아왔던 여배우입니다.
60년대에 가장 청순한 미모를 발산하며 수많은 청춘영화들에 출연해서, 높은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남정임은 60~70년대에 가장 개성있는 여배우, 가장 청순한 미녀여배우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와 2010년대의 청순미인을 이영애와 김태희라고 한다면, 그 청순미인의 원조는 60년대의 트로이카인 남정임이라고 할 수 있고, 즉 남정임은 청순미인의 레전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희가 슬픈 신파극조의 멜로영화에 출연해서 비련의 여주인공으로서 인기를 끌었다면,
남정임은 다양한 청춘영화와 액션영화에 출연해서 명랑하고 발랄한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으며, 청춘스타의 아이콘같은 존재감으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 남정임의 60~70년대 연기활동과 출연영화
남정임은 1966년도에 영화 ‘유정’으로 데뷔했고, 그녀는 첫데뷔작에서 주인공을 맡았을 정도로 그녀의 대단한 미모가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후 남정임은 ‘학사기생’ ‘망향’ ‘빙점’ ‘악인시대’ ‘어느 여배우의 고백’ ‘풍운의 검객’ ‘일지매 필사의 검’ ‘일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 큰 활약을 펼치면서, 60, 70년대에 가장 대중적인 여배우로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남정임은 멜로영화나 청춘영화에도 많이 출연했지만, 특히 그 시대에서는 실험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검객무협영화와 형사액션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다는 점이 특징인데,
이렇게 남정임은 다양한 장르의 연기활동을 펼침으로써, 특히 남성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녀가 출연해 열연을 펼친 ‘풍운의 검객’ ‘일지매 필사의 검’ ‘팔도검객’ 같은 검객무협영화들은 아마도 문희나 윤정희는 결코 소화해낼 수 없는 배역이었을 겁니다.
60년대 트로이카 3인방, 윤정희(좌측), 남정임(중앙), 문희(우측)
67년도의 ‘풍운의 검객’ 69년도의 ‘십오야’와 70년대의 ‘팔도검객’ 등의 영화는 흥미와 감동을 동시에 안겨주는 박진감과 스릴, 스팩터클과 미학이 넘치는 검객무협영화들로서,
60년대에 남정임은 이런 액션영화에 출연해 매우 개성 넘치고 멋진 검객여전사의 색다른 매력을 선보임으로써, 특히 젊은 남성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답니다.
60년대 당시에 홍콩에서 검객무협영화들이 많이 제작되어서 큰 인기를 끌던 시기였는데, 이렇게 아시아에서 유행했던 홍콩무협영화에 영향을 받았던 우리나라 영화계에서도
한국 특유의 토종 검객무협영화들이 여러편 제작되고 상영되어 인기를 끌었는데, 주로 박노식과 남정임이 그 당시의 새로운 장르였던 한국무협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해서 각광을 받았던 겁니다.
이렇게 남정임은 문희나 윤정희와는 달리, 애정물 뿐만아니라, 사회물과 형사물, 그리고 검객무협물 등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에 출연해서 연기활동을 펼쳤기에, 그녀를 개성있는 여배우, 전천후 여배우라고 부를 수 있는 겁니다.
그 당시의 ‘십오야’ ‘풍운의 검객’ 같은 무협영화들은 단순히 흥미만을 주는 오락영화가 아니라, 가슴에 찡하게 만들 정도로 큰 감동을 선사해주는 내용과 작품성이 뛰어났던 명작품들로서,
개성있는 캐릭터가 강한 남정임이 열연함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더욱 높일 수 있었답니다.
남정임은 이러한 검객무협영화에서 세련된 미모와 신비로운 검술을 선보이는 여전사로 출연해 열연을 펼침으로써, 그 당시 젊은 남성들로부터 큰 환호와 갈채를 받았던 겁니다.
남정임을 가히 한국판 리칭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60~70년대에 멜로연기 뿐만아니라, 액션연기도 함께 완벽하게 연기했던 여배우 남정임을 당대 최고의 스타로 꼽을 수 있고,
그런점에서 남정임은 다른 여배우들과는 차별화되는 가장 개성이 강한 여배우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남정임은 사극영화에 출연해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는데, 그녀의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68년도의 영화 ‘요화 장희빈’이 그 것입니다.
‘장희빈’은 당대의 공인된 미녀여배우만이 주인공을 맡을 수 있는 여배우들이 가장 선호하는 꿈의 배역인데,
남정임은 데뷔 2년 후인 68년도에 ‘요화 장희빈’에 주인공으로 출연해서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면서, 큰 각광을 받았답니다.
당대의 가장 빼어난 미녀여배우에게만 배역이 주어진다는 ‘장희빈’역을 남정임이 당당히 꽤참으로써, 남정임은 가히 60년대 중후반을 대표하는 당대의 최고 미녀여배우로 공인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영화계에서 1대 장희빈은 김지미였고, 남정임은 김지미의 뒤를 이어서 2대 장희빈역을 연기함으로써, 김지미와 더불어 남정임은 60년대의 대표적인 미녀여배우라는 공식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겁니다.
참고로 좀 의외라고 할 수 있는데, 3대 장희빈은 윤여정이 맡았고, 4대 장희빈은 이미숙, 5대 장희빈은 전인화였습니다.
역대 장희빈 중에서, 미모와 연기력, 개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남정임이 가장 예뻤다고 느껴지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남정임은 경기도 광주출생으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1965년도에 실시한 영화 ‘유정’의 여주인공 공개캐스팅에 응모하여, 무려 1300:1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되었다고 하니, 그녀의 미모가 얼마나 출중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첫 데뷔작품인 ‘유정’에서 여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남정임은 그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김진규와 함께 호흡을 맞춰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침으로써, 큰 호평을 받았답니다.
원래 이름이 이민자였던 그녀는 ‘유정’의 여주인공 이름인 ‘남정임’을 자신의 예명으로 삼게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리고 남정임은 해마다 30여편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활발한 연기활동을 펼쳤고, 그녀가 은퇴를 선언한 1971년도까지 총 300편의 영화에 출연했답니다.
남정임은 미모만 출중한 것이 아니라, 연기력도 대단히 우수했던 정말 아까운 여배우였다고 느껴지는데, 그녀가 데뷔한 66년부터 그녀가 은퇴한 71년도까지의 6년 동안이 그녀의 최고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정임이 이렇게 영화에서는 큰 인기와 명성을 떨쳤지만, 그녀의 사생활만큼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걸로 알려지고 있어서, 그것이 미스테리입니다.
◆ 남정임의 결혼과 남편, 이혼
남정임은 한창 인기가 절정이었던 1971년도에 돌연 3살 연상의 재일교포 임방광과 결혼을 하면서, 영화계에서 은퇴를 하게 됩니다.
당시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고있었던 남정임은 성공한 재일교포 출신의 사업가 임방광과 세종호텔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려서 큰 화제가 되었는데, 1,000명이 넘는 대중들이 참석해서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화려한 결혼식을 올린 그녀의 결혼생활은 결코 오래 가지않았고, 3년 만에 파경을 맞게됩니다.
남편과 파경을 맞은 이유는 뻔할 뻔자로, 그녀의 남편의 사업부진 때문에 서로간에 심한 갈등이 생겼기 때문이고, 일본에서의 결혼생활에 환멸을 느낀 남정임은 3년만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그녀가 이혼한 구체적인 사연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일교포와 결혼함으로써, 일본의 시댁집으로 들어가 살았던 남정임은 일본에서의 낮설은 시집살이가 매우 불편했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일본에서 남정임은 남편의 시댁집에서 운영하는 도쿄에 있는 한식당(불고기집)에 자주 동원되어서 홀서빙일까지 했었다고 하니, 화려한 결혼식과는 달리 그녀의 실제 결혼생활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는 부분입니다.
왕년에 한국을 대표하는 톱 미녀스타가 일본식당에서 홀서빙을 하다니!!!
특히 그녀의 시부모님은 남정임을 식당으로 불러내어 서빙일에 시키면서 그녀를 마구잡이로 부려먹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된 시집살이와 남편의 무책임한 행동, 사업부진 등이 부부간의 갈등을 증폭시켰고, 결국 남정임은 남편, 시집과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3년만에 남편과 결별하고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누구보다도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지만, 허망하게 이혼하고 돌아온 남정임은 1976년도에 영화 ‘나는 고백한다’로 다시 한국영화계에 복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 남정임은 주로 안방TV 드라마에서 출연해 연기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우리사회는 지금과는 달리 보수적인 관념이 강했던 때라, 결혼실패해 돌아온 남정임에 대한 반응은 무척 싸늘했습니다.
60년대 중반부터 71년도까지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모두 흥행에 큰 성공을 거뒀을 정도로 흥행의 보증수표라고 불렸던 남정임이었지만,
이혼하고 복귀한 후, 그녀가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들은 모두 흥행에 실패했고, 그녀는 과거와는 전혀 달라진 영화판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큰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 남정임 폭행사건과 그녀의 애인
그리고 남정임은 77년도에 드라마 ‘여고동창생’에 출연해 연기활동을 해나갔는데, 그런데 이 드라마에 출연할 시기에 갑자기 뜻밖의 폭행사건이 터져버린 겁니다.
1977년 1월27일, 남정임은 누군가로부터 칼에 머리가 찔리고 얼굴과 몸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던 사건입니다.
경찰이 출동해서 조사가 이뤄졌는데, 경찰조사에서 남정임은 오빠에게 얻어맞아서 상처가 생겼다고 진술을 했지만, 그녀가 입은 상처가 너무 심했고,
그녀의 가족들마다 서로 다른 진술을 하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한 경찰은 매우 심도놓은 수사를 벌였습니다.
경찰의 정밀한 수사 끝에, 오빠에게 맞았다는 남정임의 진술은 거짓임이 드러났고, 그녀는 오빠가 아닌 그녀의 애인이자 동거인이었던 노승주에게 얻어맞았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놀랍게도, 남정임은 자신의 집에서 학원이사장 출신인 애인 노승주와 동거를 해왔는데, 밤에 늦게 귀가하고 거짓말을 한다는 이유로 애인 노증주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 남정임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고, 연기활동에 큰 지장이 초래되기 때문에, 남정임은 이같은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결국 거짓증언을 한 남정임과 오빠는 공무집행방해죄가 적용되어, 경찰에 입건되어 형사재판까지 받는 처지가 됩니다.
이같은 남정임의 폭행스캔들이 언론에 보도되고 세상이 널리 알려지면서, 남정임은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게됩니다.
이 폭행스캔들이 터진 당시만 해도 남정임은 일본에 있는 남편과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고, 별거만 해온 상태였습니다.
아직 이혼도 하지않은 여인이 외갓남자와 동거를 하고, 폭행에다 거짓말까지 한 사실이 들통이 나자, 그녀는 대중으로부터 심한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던 겁니다.
이같은 상황에 부닥치자, 그녀는 약을 먹고 자살까지 시도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방송국으로부터 출연정지를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남정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폭행사건의 주범인 애인 노승주와 1978년도에 재혼을 함으로써, 또한번 세상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답니다.
노승주와 결혼한 후 남정임은 연예계에서 은퇴하였고, 남편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낳아 기르면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고, 그 당시 남편 노승주는 대한도시가스 대표이사를 맞는 등 성공가도를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남정임은 그렇게 안정적인 삶을 살아갔지만, 운명의 신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나 봅니다. 한번의 결혼실패 후, 다시 재혼해서 평온한 삶을 살아갔던 남정임은 1989년도에 갑자기 유방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유방암에 걸린 그녀는 3년동안 병마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재기에 몸무림쳤지만, 그녀는 결국 암을 극복하지 못한채, 1992년도 사망하고 말았답니다.
암과 투병하는 와중에서도 남정임은 자신의 일생 일대기를 담은 영화를 찍기를 원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녀는 아쉽게도 남편과 두자녀를 남겨놓고는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하고 말았지요.
남정임은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출중한 미모와 개성있는 연기력으로 당대의 톱클라스의 여배우로 큰 명성을 떨쳤던 전설적인 여배우입니다.
그녀의 연기활동 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그녀는 300편이 넘는 당대의 뛰어난 명작들을 남겨놓았고, 60, 70년대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여배우로 많은 대중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마지막으로, 60년대 최고의 미녀스타 김지미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소개하겠어요.
남정임은 중학교시절에 고궁으로 소풍을 갔었는데, 그 곳에서 영화촬영중이던 김지미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남정임을 본 김지미는 그녀에게 ‘얼굴이 예쁘게 생겼다, 나중에 크면 배우가 되면 좋겠다’라고 남정임의 미모에 대해 칭찬했다고 합니다.
결국 당대최고의 미녀스타 김지미로부터 이같은 칭찬을 들었던 남정임은 그 때부터 영화배우의 꿈을 꾸게 되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에 그녀는 실제로 톱클라스의 영화배우가 되어서 대단한 활약을 펼쳐서, 우리영화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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