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우드에서 최고의 미인으로 큰 인기를 한몸에 받고있는 여배우 캐롤 롬바트, 그녀는 허리우드의 최고의 미남배우 크라크 게이블의 부인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1940년대에 허리우드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캐롤 롬바트는 안타깝게도 1942년 1월 16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여객기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사망 당시 캐롤 롬바트의 나이는 불과 33살의 젊고 젊은 나이여서, 그녀를 잃은 세상사람들의 안타까움은 매우 컸다.

 

캐롤 롬바트는 1930~40년대에 허리우드에서 그레타 가르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최고의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을 자랑했던 당대의 톱여배우이다.

그녀는 허리우드의 미남배우 크라크 게이블과 세기적인 사랑을 하고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되어 죽을 때까지 클라크 게이블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여성이었다.

 

1908년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에서 태어난 캐롤 롬바트는 12살 때에 감독의 눈에 띄어서 ‘완전범죄 1921년’에 출연을 계기로 영화계에 데뷔한 후,

‘하이볼트’ ‘노맨 오브 허 온’ ‘진실한 고백’ ‘바보같은 스캔들’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1941년’ 등에 출연해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허리우드에서 최고의 연기력을 지닌 미녀배우로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캐롤 롬바트는 ‘노맨 오브 허 온’에 함께 출연했던 미남배우 클라크 게이블과 열애스캔들에 휩쌓이면서, 나중에는 그와 결혼까지 하는 등 큰 화제를 뿌리면서 허리우드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리고 캐롤 롬바트는 영화 ‘사느냐 죽느냐, 1942년’에 출연한 후, 자신의 집이 있는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오는 도중 비행기추락사고로 33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만 비운의 여인이 되고 만다.

 

그런데 놀랍게도 캐롤 롬바트가 사망하기 직전에 그녀가 사망할 것을 예언한 예언자가 있어서 세상을 놀라게하고 있다.

바로 진 딕슨이라고 하는 30대 여성이 캐롤 롬바트의 비행기추락사고로 인한 사망을 사전에 미리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크라크 게이블의 부인 캐롤 롬바트의 사망을 정확히도 예언했던 예언자 진 딕슨은 누구인가?

진 딕슨은 어릴 적에 누군가로부터 우연히 수정구슬을 받은 후부터 수정구슬을 통해서 미래의 환영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루스벨트대통령이 진 딕슨을 자신의 집무실로 초대하는 등 정치계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유명정치인들의 미래를 보면서 그녀는 더욱더 유명해졌다.

 

그러던 중 1963년 진 딕슨은 또다른 사람의 죽음의 환영을 보게된다. 진 딕슨은 바로 그 유명한 존 F. 케네디대통령의 암살을 예언한 것이다.

 

진 딕슨은 케네디대통령이 대선후보가 되기 훨씬 전인 1956년도에 잡지사 퍼레이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미 케네디의 대통령당선을 예언했는데,

그녀는 4년 후에 치러질 대통령선거에서 푸른눈과 갈색머리, 185cm의 장신의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예언을 내놓았고, 그로부터 4년 후 그녀의 예언은 정확히 적중해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진 딕슨은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가 암살사건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는 예언을 또다시 내놓아서 더 큰 화제가 되었다.

 

진 딕슨은 ‘케네디대통령의 암살사건은 비극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이미 제가 보였어요. 백악관에서 죽음의 시간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어요’라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이다.

 

진 딕슨은 ‘케네디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얼마 지나지않아서 암살사건으로 사망할 것이고,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진 딕슨의 이 예언이 다시 조명되면서 그녀는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최고의 예언자로 각광받게된다.

케네디대통령의 죽음을 정확히 예언한 진 딕슨은 졸지에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고, 자신의 미래를 알려달라고 하는 편지가 그녀에게 일주일에 3,000통씩 도착할 정도로 그녀는 미국최고의 유명인사가 된다.

 

뿐만아니라, 각종 방송사로부터 출연문의가 빗발쳤고, 세계의 400개 신문사에 그녀의 운세칼럼이 실릴 정도로 그녀의 유명세는 대단했다.

 

그 후, 진 딕슨은 자신의 예언을 집대성한 예언서 ‘예언의 선물: 경이로운 진 딕슨’을 출간하기까지 한다.

 

루스벨트대통령의 사망, 원스턴 처칠영국총리의 총선패배,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암살, 마릴린 몬로의 사망 등을 미리 보았다는 내용의 이 책은 미국에서 30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진 딕슨을 은인처럼 생각했던 정치인이 있었는데, 바로 리처드 닉슨전대통령이었다.

닉슨대통령은 진 딕슨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녀에게 정치현안 등 여러 가지 미래의 일들에 대한 예언과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부통령시절부터 진 딕슨을 잘알고 있었던 닉슨은 그녀에게 앞으로의 정치일정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물어보았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진 딕슨으로부터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상의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부터 닉슨대통령은 진 딕슨과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었다.

백악관으로 불려간 진 딕슨은 닉슨대통령 앞에서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진 딕슨은 닉슨대통령에게 ‘앞으로 엄청난 테러가 일어날 것이다.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예언한 것이다.

 

진 딕슨은 얼마전에 끔찍한 테러사건을 수정구슬에서 보았다고 예언했고 테러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것을 닉슨에게 주문했다.

그런데, 그 후 그 어떤 테러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그로인해 테러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밝힌 닉슨대통령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되었을 뿐만아니라, 그의 지지율이 크게 추락하게 됐다.

 

그리고 진 딕슨은 1967년도에 암치료제가 개발되어서 암이 정복될 것이라는 예언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암치료제는 전혀 개발되지 않았고, 그녀의 예언은 크게 빗나갔다.

 

또한 진 딕슨은 달에 최초의 사람을 보낼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라고 예언했는데, 이 예언 또한 크게 빗나가 버렸다. 최초의 달착륙한 나라는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1958년도에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1980년대에 미국에서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당선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1980년대에는 지구와 소행성이 충돌해서 지구에 엄청난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진 딕슨의 대부분의 예언들이 크게 빗나가버렸다.

 

진 딕슨은 1년에 20개 이상의 예언들을 발표했지만, 그 중 적중한 예언은 고작 1~2개 정도일 뿐이었다. 그녀의 예언 적중률은 고작 10%에 지나지않았다.

 

이렇게 진 딕슨의 예언들이 빗나가버리면서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심이 사라졌고, 그 후에는 더 이상 그녀의 예언을 믿으려하지않았고,

이렇게 예언의 신통력이 사라지면서 진 딕슨은 더 이상 쓸모없는 가짜예언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과거 그녀가 예언해서 적중한 사건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특히 캐롤 롬바트의 죽음은 어떻게 알아맞췄을까?

 

진 딕슨이 미용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캐롤 롬바트에게 비행기추락사고로 사망한다고 예언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있다.

 

1942년도만해도 지금처럼 기술이 발전했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비행기추락사고가 빈번히 일어났고, 진 딕슨은 자신이 유명세를 사기위해서 우연히 마주친 여배우 캐롤 롬바트에게 비행기추락사고를 사망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한 것이었을 뿐인데, 그 말이 우연히 적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미래의 환영을 본다고 수정구슬도 비행기추락사고가 일어나기 오래전에 이미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케네디의 대통령당선을 예언한 후, 나중에 그녀는 말을 바꿔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새로운 예언을 내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많은 언론에서 진 딕슨의 적중한 예언들만을 골라서 신문에 실었고, 또 그녀가 케네디대통령의 암살까지 예언했다는 조작보도까지 했다.

 

이렇게 진 딕슨은 언론의 후원을 얻어서 자신이 유명해지고난 후, 매일 신문에 기고한 운세칼럼과 부적인 척 판매한 사인사진으로부터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고,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엄청난 부를 축척해나갔다.

 

또한 전세계의 어린이들을 돕겠다면 ‘칠드런 투 칠드런’이라는 자선단체까지 설립해서 세계인들로부터 엄청난 기부금을 받았을 정도다.

그리고 자신의 예언이 틀릴 경우, 자신이 번 돈을 로비자금으로 활용해서 언론사에 대대적인 로비를 벌여서 자신의 빗나간 예언들을 싫지못하게 하는 등 자신의 이미지홍보에 엄청난 돈을 쓰기도 했다.

 

덕분에 예언적중률이 고작 5%밖에 되지않았던 진 딕슨은 여자노스트라다무스라고 불리울 정도로 희대의 최고예언자라는 타이틀을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후대에는 어쩌다 한번 맞춘 것을 두고 모두 맞춘 것처럼 과대포장하는 현상을 ‘진 딕슨 효과’라고 불리우는 현상이 생기게 된다.

‘진 딕슨 효과’는 가짜예언자 진 딕슨을 비판하고 풍자하기 위해서 생겨난 용어인 것이다.

 

그런데, 진 딕슨은 1997년 마지막으로 또다른 예언을 내놓는데, 언젠가 내가 죽을 것이다라는 아주 당연한 예언이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을 마치 대단한 예언인 것처럼 포장한 것이다.

 

진 딕슨은 9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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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강제 성추행한 국가대표 피겨선수는 누구, 이해인의 해명, 자격정지 징계

 

5월 15~28일 이탈리아로 전지훈련을 떠난 우리 피겨대표팀 선수들 간에 성추행논란이 발생했습니다.

 

해외 전지훈련 동안 합숙소에서 술을 마시고 미성년자 후배에게 강제성추행한 일이 발각되어서 여자피겨 국가대표선수 두명이 자격정지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여자 피겨 국가대표선수들은 이탈리아 바레세에서 전지훈련을 진행하는 동안 숙소에서 술을 먹은 사실이 들어나면서 즉각 대한빙상경기연맹 스포츠공정위원회에 회부되었지요.

 

음주는 경기력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훈련기간 동안 음주는 금지되는 행위이지요.

 

그런데, 스포츠공정위원회는 이들에 대해 조사하는 도중, 성적 가해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스포츠공정위원회는 지난 19일 회의를 열고, 성적 추행을 일삼은 두 여자 피겨대표선수들에게 중징계를 내렸는데요.

 

그 때 스포츠공정위원회로부터 중징계를 받은 선수 중 한명이 바로 이해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해인 스스로 자신의 SNS에 이같은 사실을 시인하는 글을 올렸기 때문이지요.

 

이 당시 이해인은 강제추행 혐의로 스포츠공정위원회로부터 3년의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고, 다른 또한명의 여자 피겨선수는 1년의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해인선수는 자신의 성추행혐의에 대해 전면 부정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해인은 ‘음주를 한 행위는 인정하지만, 강제추행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습니다.

 

이해인은 ‘강제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후배 A씨와는 연인사이였다’고 밝혔습니다.

 

이해인은 ‘전지훈련 도중 술을 마신 것은 명백한 저의 잘못이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남자 후배에 대한 강제 성추행혐의에 대해서는 강력 부인했습니다.

 

이해인은 ‘후배 A씨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던 연인관계로 A씨와 애칭을 담아 주고받은 메시지도 여러개 간직하고 있다. 그 일을 성추행이라고 보도하는 기사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아프고 괴로웠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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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와은 미성년자일 때부터 교제를 시작했기 때문에 경각심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A씨에 대해 성적 가해행위나 성추행은 전혀 없었고,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이해인은 ‘후배 A씨와는 연인관계였으나, 이러한 사실을 대한빙상연맹에 알리지않았고, 연맹은 두사람이 연인관계라는 사실을 알지못했기 때문에 사실관계를 오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해인은 ‘다가오는 밀라노 올림픽이 정말 너무나도 간절하게 바라던 경기였는데, 이번 자격정지 처분으로 사실상 도전해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이 많이 슬프고 절망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해인은 자신의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서 ‘후배 A씨와 연인관계에서 있었던 가벼운 스킨쉽이었다. 이 행위는 연인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장난이나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충분히 다시 소명하고 잘못된 음주부분에 대해서는 선처를 구할 생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빙상연맹은 자체조사를 벌여서 이해인선수에게는 3년의 자격정지 징계를 내렸고, 사진을 촬영한 혐의를 받고있는 여자선수 B씨에게는 1년의 자격정지 징계를 내렸습니다.

또한 미성년자 선수 A씨에게는 이성선수 숙소를 방문한 것은 강화훈련 규정위반이라는 판단아래 견책처분을 내렸답니다.

 

이렇게 후배 선수에게 성추행과 불법 촬영 혐의로 중징계를 받았던 이해인과 또다른 여자선수는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에 재심의를 신청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강제추행 혐의로 중징계를 받은 이해인은 국제빙상경기연맹의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싱글에서 은메달을 따낸 우리나라 피겨의 간판급 선수입니다.

 

그렇지만, 이해인선수는 이번에 후배선수에 대한 강제추행 혐의로 인해서 3년의 자격정지 징계를 받아서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대회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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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글래머스타 여배우 윤미라의 젊은시절 미모와 결혼안한 이유, 양말공장사장과 불륜스캔들

 

우리나라의 탁월한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70~80년대를 풍미했던 글래머여배우가 한명이 있는데요. 바로 여배우 겸 탤런트 윤미라입니다.

 

윤미라는 70년대만 해도 섹시미와 관능미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섹시스타였답니다.

 

지금은 드라마에서 주로 어머니나 아줌마역할을 하고 있지만, 젊은시절에 윤미라는 수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셀레이게 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글래머스타였답니다.

 

청순미와 섹시미를 동시에 갖고 있는 스타를 ‘청순글래머’라고 하는데, 70년대의 윤미라가 바로 ‘청순글래머’의 대표적인 아이콘이었답니다.

 

윤미라는 70년대 당시 동양적인 외모의 여배우들이 인기를 끌었던 시절에, 커다란 눈동자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매우 이국적인 미모를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윤미라의 커다랗고 부리부리한 눈동자는 수많은 남성관객들의 마음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70년대 당시 무척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답니다.

 

윤미라는 69년 영화 ‘사랑하고 있어요’로 데뷔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섹시글래머스타로 각광을 받았고, 41편이 넘는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던 여배우랍니다.

 

그리고 윤미라는 한때 미국 허리우드에서 스카웃제의가 들어왔을 정도로, 그 미모가 외국에서도 크게 각광을 받았답니다.

 

윤미라는 1세대 트로이카로 불렸던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 세명의 스타가 은퇴하였던 1972년도부터 70년대 후반까지 한혜숙과 함께 우리 연예계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인기여배우였지요.

 

이렇게 한 시대를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을 바탕으로 최고의 여배우로 주름잡았던 윤미라가 실은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미혼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아름다웠던 그녀가 미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시나요?

 

놀랍게도 윤미라는 오랫동안 촉망받는 여배우로서 그렇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결혼을 하지않은 독신녀라고 합니다.

 

그녀는 이혼한 게 아니라, 결혼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윤미라는 완전무결한 미혼녀입니다.

윤미라는 1951년생으로서 지금 나이가 73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싱글로 혼자살고 있다고하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남자들이 눈이 삐어도 한참 삔 것 같습니다. 이런 미녀를 독신으로 살 게 만들다니!

 

한때에 대한민국을 뒤흔들 정도로 초절정 미모를 간직하면서 수많은 남심들을 셀레이게 했던 글래머스타가 70이 넘은 지금까지도 독신으로 살고있다니 말입니다!

 

여배우 윤미라가 결혼을 하지않은 데에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여배우 윤미라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해부해보도록 하겠어요!

 

◆ 윤미라의 프로필과 출연영화

 

나이 - 1951년 12월 18일 (73세)

신체 - 168cm, 몸무게 55kg

출생지 - 전북 정읍

학력 - 광주여자고등학교

가족 - 2남 3녀 중 장녀

 

윤미라는 어렸을 적부터 미모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주위에서 윤미라에게 여배우가 되어보라구 권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어렸을 적부터 남들과 다른 두드러진 미모와 섹시한 관능적인 매력을 듬뿍 갖고있었던 윤미라는 동네미인으로 소문이 났구요.

 

1969년 당시 김수용감독 등 우리나라 감독들이 합동으로 신인여배우 모집하는 공고를 냈는데, 여고를 갓졸업한 윤미라는 신인여배우 모집에 응모하여,

5,000명이 지원하는 선발대회에서 윤미라는 16명 중 한명으로 당당히 뽑혔답니다.

 

1969년도에 영화 '사랑하고 있어요'에서 단역으로 데뷔한 윤미라는 그 후 여러편의 영화에서 조연으로 활동하다가

1973년 영화 '처녀사공'에 남궁원과 함께 주인공으로 출연해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답니다.

 

크고 시원시원한 눈과 이국적인 마스크로 브라운관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윤미라는 70년대 후반까지

'아내들의 행진' '바보 용칠이' '황금마담' '딸삼형제' '여수대탈옥' '옥중녀' '부초' 등 수십편의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활발한 연기활동을 벌여가면서 높은 인기를 끌었지요.

 

미모와 연기력을 모두 겸비한 윤미라는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과 인기를 얻었고, 77년도에는 영화 '고가'로 '대종상'의 최우수 여우상을,

78년에는 영화 '부초'로 '백상 예술대상'의 최우수 여자연기상을 수상하면서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합니다.

 

이 70년도의 시기가 윤미라의 최고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이시기에 윤미라는 신트로이카 3인방에 견줄만큼 높은 인기를 끌었답니다.

70,80년대 섹시한 여배우가 엄유신, 이미지, 윤미라 등 세명이 대표적이었는데, 그 중 단연 윤미라가 가장 크게 각광을 받던 여배우였답니다.

 

윤미라의 키는 168cm로 70년대에는 웬만한 모델보다 더 큰 키에 볼륨몸매를 갖고 있었고,

한국판 마릴린 몬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윤미라의 섹시미와 관능적인 몸매는 정평이 나 있답니다.

 

특히 윤미라는 영화 '남사당'에서 섹시하고 관능적인 매력을 하면서, 많은 남자들의 로망으로 자리잡았답니다.

 

윤미라는 78년대 후반에 허리우드의 테렌스 영감독이 연출하는 영화 '오 인천'에 스카우트되었던 적이 있답니다.

 

1978년도에 영화 '007'을 만들었던 명감독 테렌스 영이 연출하는 허리우드 영화 '오! 인천'이 한국에서 로케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이 영화의 여주인공을 한국여배우 중에서 선발할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테렌스 영감독은 '오! 인천'의 여주인공을 뽑기위해 한국여배우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실시했는데요.

 

한국의 내노라하는 여배우들 30명이 응모해서 모두 떨어지고 난 후, 윤미라가 31번째로 응모해서 당당히 여주인공으로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여배우 최초로 윤미라가 드디어 허리우드영화에 진출하게 된 것이랍니다.

그당시 윤미라의 개런티는 5천만원이었는데,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0억 에 해당되는 커다란 금액이었다고 해요.

 

자기 혼자의 실력으로 당당히 허리우드영화에 스카웃되었던 윤미라는 영화촬영을 막 시작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유부남과의 불륜사건'이 터져나오게 된답니다.

 

윤미라가 유부남인 양말공장 사장과 눈이 맞아서 연애를 했다는 것이지요.

이 불륜스캔들로 인해서 윤미라의 허리우드영화 진출은 모두 무산되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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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 인천'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어서 본격적으로 허리우드영화에 진출하려던 윤미라의 꿈은 때아닌 '불륜스캔들'로 인해서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답니다.

 

◆ 윤미라의 유부남과 불륜스캔들 사건

 

이렇게 윤미라는 70년대에 수많은 영화들에 출연해서 큰 인기를 끌면서 대표적인 섹시글래머 스타로 각광을 받았는데,

그만 70년대 후반 뜻하지 않게 불륜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답니다.

 

70년대 후반에 터진 윤미라와 양말공장 사장과의 '간통사건'이 그것인데요.

 

윤미라가 대종상과 백상 등 좋은 상들을 휩쓸면서 인기의 고공행진을 펼쳐나갈 무렵인 70년대 후반에

그녀는 양말공장 사장과의 불륜사건으로 인해서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답니다.

 

윤미라가 유부남과 불륜을 맺어서 간통으로 고소를 당했던 겁니다.

지금은 간통죄가 없어졌지만, 70년대만 해도 간통죄는 엄청 커다란 죄악이었으며 엄중한 법적 처벌을 받았답니다.

 

더욱이 대중적으로 모범을 보여야만 하는 연얘인이 간통죄에 휘말린다면 그 스캔들만으로는 그여배우는 여자연예인으로서 생명이 끝나는 겁니다.

 

1979년 29세의 윤미라는 35세의 양말공장 사장 홍씨와 간통을 한 혐의로 홍씨의 부인으로부터 고소를 당했답니다.

그런데 윤미라는 단순한 간통혐의 말고도 사기죄로도 함께 고소를 당하고 말았지요.

 

홍씨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은 윤미라와 78년도에 10차례에 걸쳐서 동침을 했고, 돈 1000만원을 빌려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윤미라가 빌려간 돈을 전혀 갚지않는다는 이유로 홍씨는 그녀를 사기죄로 고소했답니다.

그러자 윤미라는 자신과의 사적인 부분을 모두 까발린 홍씨를 상대로 명예훼손죄로 맞고소를 했답니다.

 

이렇게 고소사건으로 인해서 두사람의 관계가 드러나자, 홍씨의 부인이 두사람을 상대로 '간통죄'로 고소하기에 이른 겁니다.

 

그리고 두사람은 법정에서 '간통죄'와 '명예훼손죄' 그리고 '사기죄' 등 여러가지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답니다.

 

홍씨가 1,000만원의 돈을 빌려줬다는 주장에 대해서, 윤미라는 200만원은 자신을 동생으로 삼은 기념으로 그냥 준 것이고,

나머지 800만원은 어머니의 사업자금으로 무이자로 빌려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윤미라는 홍씨가 자신에게 돈 1000만원 중 800만원을 빌려준 것은 인정했답니다.

그렇지만 윤미라는 홍씨가 주장하는 자신과의 동침은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답니다.

 

윤미라는 돈을 빌린 적이 있지만, 홍씨와 동침은 결코 없었다고 강력히 부인했답니다.

남자쪽에서는 여러번 동침을 했다고 주장하고, 여자쪽에서는 절대로 동침을 하지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윤미라와 홍씨는 서로간 다른 주장을 하면서 팽팽하게 맞서면서 재판을 받았답니다.

두사람이 서로간에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재판은 무지하게 길어질 수밖에 없었답니다.

 

결국 재판은 3년을 끌게 되며, 그 기간 동안 윤미라는 일체의 연기활동을 하지 않은 채로 재판에만 몰두하게 된답니다.

 

결국 3년이 지난 후에 윤미라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법원에서는 윤미라의 간통혐의가 없다는 것과 사기죄가 아니라는 것을 선고하게 됩니다.

 

윤미라는 유부남 홍씨와의 '간통사건' 재판에서 비록 승소는 했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많이 실추되고 맙니다.

허리우드진출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때아닌 간통사건에 휘말린 윤미라는 수년 동안 영화도 찍지못하고 그녀의 이미지만 크게 실추되고 맙니다.

 

아뭏튼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으니 윤미라는 명예를 회복할 수는 있었지요.

윤미라는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난후,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하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연기생활을 해나가겠다'고 입장을 밝혔답니다.

 

윤미라와 홍씨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두사람은 광고를 찍는 문제로 만났는데 홍씨가 윤미라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답니다.

그래서 두사람은 친하게 지내는 관계가 되었는데요. 이당시 홍씨는 자신이 유부남인 사실을 숨기고 윤미라를 만났던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홍씨가 유부남인 사실이 밝혀지고 난 후, 윤미라는 곧바로 홍씨와 결별을 선고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홍씨는 돈까지 주면서 정성을 다한 윤미라가 자신을 매몰차게 차버리자, 그것에 앙심을 품고서 그녀와의 관계를 친한 신문기자에게 모두 까발리고 만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홍씨는 윤미라를 사기죄로 함께 고소를 한 것이지요.

 

아뭏튼 사건이 일단락되고 난 후, 윤미라는 다시 영화 출연제의를 받았고, 영화 '여자의 이 아픔을'에 출연하면서 제기에 성공할 수 있었답니다.

 

◆ 윤미라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

 

윤미라에 관해서 대중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사항이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것일 겁니다.

윤미라는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최고의 미녀여배우였는데, 도대체 결혼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그녀는 왜 결혼을 하지않았던 걸까요?

 

 

전성기때의 윤미라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고 합니다. 모기자의 설명에 의하면, 70년대 윤미라의 인기는 지금의 '소녀시대'의 인기보다도 훨씬 더 좋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던 윤미라는 왜 결혼을 하지않았을까요?

 

윤미라가 결혼을 하지않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자기집안의 사실상 가장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미라는 집안의 맏딸이자 가장으로서 아래로 2남 3녀의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지요.

 

사실상 가장이었던 윤미라는 가족들의 생계를 모두 책임져야 했고,

5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모두 공부시키고 대학까지 보내는 등 그녀가 모든 동생들의 양육을 책임졌다고 합니다.

 

밖에서는 바쁘게 연기활동을 하면서, 집에서는 동생들 공부시키고 뒷바라지하면서, 바쁘게 생활했던 윤미라에게는

한가롭게 남자들과 연애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직 연기와 동생들 양육에만 전념을 쏟다보니, 접근해오는 남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그리고 윤미라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매우 극심해서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에도 지극정성을 다했답니다.

 

이렇게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부양하는데 전력을 다했던 그녀는 남자와 만나는 것 자체를 멀리했던 겁니다.

어쩌면 윤미라의 도도하면서도 완고한 성격도 그녀가 독신으로 살도록 하는데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성격이 도도하고 완고한 사람은 이성과 연애하기가 무척 힘들답니다.

 

그리고 윤미라가 결혼하지 않은 또다른 이유는 그녀를 간통사건에 휘말리게 했던 홍씨에 대한 실망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윤미라는 처음에는 홍씨가 총각이라는 거짓말에 속아서 그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리고 홍씨의 여러가지 비열한 행동을 보고는 남자에 대한 실망감이 엄청 컸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처럼 만나서 데이트를 한 남자에 대해서 커다란 실망감을 갖게된 그녀는 남자전체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남자에게 크게 데이고 실망한 그녀는 그 후에 남자를 멀리했을 것이고, 남자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 것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한 남자에 대한 불신감은 자칫 남자전체에 대한 불신감으로 번질 수 있답니다.

 

이렇게 윤미라는 다섯명이나 되는 동생들 뒷바리지하느라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여러 기회들을 놓쳐버렸고,

더욱이 '간통사건'에 연루되어 남자에 대해서 커다란 불신감을 생겼던 것 등 이러한 두가지 이유로 인해서 결혼을 멀리하고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사실들을 토대로 해서 추정을 한 것일 뿐이고요.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진짜이유는 오직 윤미라의 가슴속에만 간직되어 있을 것이고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윤미라는 불륜스캔들을 극복하고 난 이후부터는 영화보다는 주로 tv드라마쪽으로 방향을 선회해서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최근까지도 드라마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여오고 있습니다.

 

이제 나이를 먹은 그녀는 드라마에서 어머니역이나 아주머니역으로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드라마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73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독신으로 살고 있는 그녀는 '외롭지 않냐?'라는 질문에 애인은 없지만, 주변에 남자친구들이 있어서 외롭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알고지내는 남자친구들은 그녀를 만날 때면 꼭 부인과 함께 나온다고 합니다.

70이 훨씬 넘은 윤미라는 아직도 결혼에 대한 핑크빛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윤미라는 얼마전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결혼기사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우회적으로 결혼에 대한 소망을 피력했답니다.

 

70이 훨씬 넘은 그녀가 아직도 결혼을 포기하지 않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윤미라는 한번쯤은 자신이 존경할 수 있는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자선사업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답니다.

 

70, 80년대에 최고의 섹시글래머 스타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윤미라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다는 좀 안타까운 사연을 전혀드렸는데요.

그렇지만 그녀는 지금도 매우 당당하고 활기차게 방송활동을 펼쳐나가고 있어서,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정말 멋지게 보입니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윤미라는 정말 멋지고 대단히 매력적인 배우라고 느껴진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에서 계속 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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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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