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의 일기내용과 결말, 안네 프랑크의 사망이유, 은신처, 밀고자, 유태인학살 영화

 

안네의 일기 -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의 기록

주인공 겸 저자 안네 프랑크 - 1929년 6월 12일 ~ 1945년 3월 12일 (나이 17살때 사망)

 

‘안네의 일기’는 안네 프랑크라는 유태인소녀가 독일의 잔인한 유태인학살이 횡행하던 2차대전 당시에, 은신처에 숨은 체 자기가족과 함께 은둔생활을 하던 내용을 일기형식으로 써내려간 일기장입니다.

 

‘안네의 일기’는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당이 얼마나 끔찍하게 유태인들을 탄압하고 학살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자료이며, 전쟁의 처참함과 교훈을 후대에 일깨워준 한 연약한 소녀의 일기장이랍니다.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히틀러가 얼마나 잔인하게 죄없는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인륜범죄를 저질렀는지를 한 연약한 소녀의 일기장을 통해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태인 대학살의 증거자료라는 점에서, 역사의 산 증거이자,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일기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유태인학살의 생생한 증거로 가치를 인정받은 ‘안네의 일기’는 유네스코로부터 2001년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히틀러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실시하여 유럽에 있던 1800만명의 유태인 중 600만명을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지요.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유태인소녀 안네 프랑크는 이 불행한 시기에 독일에 태어났는데, 그 소녀는 독일 나치당이 자행한 유태인 강제격리정책에 의한 유태인 강제연행을 피하기 위해서,

가족과 함께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은신처로 숨어들어가 2년동안의 은밀하고도 숨막히는 은둔생활을 해나가게 된답니다.

 

언제 독일군에게 끌려갈지 모르는 이 위태롭고도 절박한 상황에서도 유태인소녀 안네 프랑크 솔직하고도 담담하게 은신처에서의 생활과 자신의 감정을 생생하고도 리얼하게 자신의 일기장에 기록해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안네의 일기’랍니다.

 

‘안네의 일기’는 2차세계대전 때에 유태인이 직접 겪은 실제의 기록이자, 산증거입니다.

 

‘안네의 일기’는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랭크가 책으로 만들어 출판해서 전세계인들에게 큰감동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화제의 책이며,

또한 1959년도에는 ‘안네 프랑크의 일기’라는 제목의 헐리우드영화로도 만들어져 상영되면서, 전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큰 감동을 주었던 이야기입니다.

 

‘안네의 일기’는 전쟁의 참혹함과 나치독일의 유태인학살의 잔학함을 생생하게 세상에 고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에 대해 점점 눈을 떠가는 14살 소녀의 풋풋한 감성과 솔직한 자기고백 등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입니다.

 

1959년도에 제작된 영화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안네 프랑크가 쓴 일기를 시나리오로 만들어서 조지 스티븐스감독이 연출한 허리우드 영화이며, 주인공 안네역은 밀리 퍼킨스가 맡았고, 언니 마르코 프랑크역은 다이앤 베이커가 맡았으며,

조지프 실드크라우트, 리처드 바이머, 셸리 윈터스 등이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그 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과 촬영상, 미술상 등 3개의 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그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감동적인 영화랍니다.

 

◆ 영화 ‘안네의 일기’의 내용 및 줄거리

 

1959년도에 제작된 영화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주인공 안네 프랑크가 네델란드의 한 은신처에 숨어살면서, 매일같이 기록한 당시의 생생한 생활상을 담은 그녀의 일기책을 토대로 만들어진 허리우드영화입니다.

 

따라서, 영화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안네 프랑크가 2차대전 중이던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네델란드의 은신처에서 경험했던 실제기록을 영화한 것으로, 실화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는 유태인소녀 안네 프랑크의 실제 경험담을 담아낸 영화 ‘안네 프랑크’의 내용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안네 프랑크 실제 사진

 

2차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이와같은 전쟁의 참혹함과 인종차별의 비극이 다시는 자행되지 않도록 하는 교훈으로 삼기위해서, 영화 ‘안네 프랑크의 일기’내용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14살의 유태인소녀 안네 프랑크는 ‘유태인은 노란별을 가슴에 달아야해, 유태인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만 쇼핑을 해야해, 밤 8시부터 아침 6시까지는 집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도 없어!’ ‘또한 유태인은 영화관, 수영장, 스케이트장 등 그 어떤 오락시설이나 스포츠경기장에도 들어갈 수 없어!

그 외에도 전철이나 버스 탑승금지 등 금지된 곳이 엄청나게 많아!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겠지!’라고 스스로 일기장에 쓰면서 독백을 합니다.

 

이것은 당시 독일 나치당의 유태인탄압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안네 프랑크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태인 은행가인 아버지 오토 프랑크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 사이에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자매로는 다소곳하면서도 마음씨가 착한 3살 연상의 언니 마르고트 프랑크가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 중산층으로 안락한 생활을 하던 안네 프랑크의 가족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쳐옵니다.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히틀러가 유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유태인들은 교통,교육,거주지에 대한 심한 인종차별을 당하게 됩니다.

 

1935년도에 독일의 히틀러가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에 따르면 독일계 유태인의 시민권을 박탈하며, 그 누구든지 유태인과 결혼할 수 없으며, 또한 유태인과 연애도 할 수 없으며,

유태인의 투표권을 박탈하고,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며, 유태인은 일정한 구역을 벗어나서 거주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이 뉘른베르크법은 유태인을 탄압하고 말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이랍니다.

 

그런데, 히틀러의 유태인탄압은 여기서 그치지않았는데, 히틀러는 마침내 유태인들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하는 정책을 추진했는데, 급기야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에 강제수용·격리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독일당국의 유태인에 대한 탄압정책으로 유태인의 삶이 매우 위태로워지자,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딸 안네 프랑크를 비롯한 가족전체를 데리고 네델란드로 망명을 갔습니다.

그런데, 네델란드 또한 독일군에게 점령당하고 독일의 통치를 받는 상황이 되자, 네델란드에서조차 안네 프랑크가족의 안전은 크게 위협받는 상황이 됩니다.

 

1942년 7월 8일, 안네 프랑크의 언니 마르고트가 나치친위대로부터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으면서, 안네의 가족이 나치에 체포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자, 안네의 가족들은 그 다음날인 7월 9일 암스테르담의 한 지인이 운영하는 잼공장에 있는 다락방으로 피신하면서, 그때부터 안네 프랑크와 가족들의 은신생활이 시작이 됩니다.

 

유태인소녀 안네 프랑크는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은신처에서 2년 동안 숨죽이는 은둔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일기장에다 날마다 겪는 은신처생활의 생생한 경험담을 기록해나갑니다.

 

42년 9월 2일날, 안네 프랑크는 자신의 일기장에 ‘바깥출입을 전혀 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생활인지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어! 하지만 바깥에 나가 게슈타포에 발각되어 총살당하는 건 훨씬 더 무서운 일이야!’라고 표현합니다.

 

안네는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서의 은둔생활이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생활인지를 이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안네 프랑크가 2년간 도피생활을 했던 은신처의 구조

 

안네가족이 은신처로 은둔하고 있는 암스테르담의 은신처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 은신처는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의 지인 클라러가 운영하는 잼공장 건물안에 있습니다.

 

그 건물 1층이 잼공장이고, 2층은 아버지의 지인 클라러와 여직원 미프 히스가 사무를 보는 사무실이고, 그 사무실 바로 윗층인 3층의 복도끝에 책장이 있고, 그 책장 뒤에 은신처로 통하면 문이 숨겨져있습니다.

 

남들한테는 그저 평범한 책장으로 보이지만, 그 책장을 잡아당기면, 조그만 문이 나타나고, 그 문으로 들어가면, 그 곳에서부터 위쪽으로 3개의 층이 전부 안네가족 일행이 은신하는 은신처입니다.

 

우리한테는 안네의 은신처가 건물꼭대기에 있는 좁은 다락방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안네의 가족이 피신해 살고있는 은신처는 3개층이나 되며, 총규모가 30평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3개층의 은신처에서 세가구가 함께 모여 살아갔다고  합니다.

 

이 은신처에는 안네 프랑크와 언니 마르고트 프랑크, 아버지 오토 프랑크, 엄마 에디트 프랑크 등 안네의 식구 4명과 반단과 그의 부인, 아들 피터 등 3명, 그리고 가장 나중에 합류한 치과의사 뒤셀 등 총 8명이 함께 살았고, 이들은 약 2년 동안 이곳에 숨어 지냈답니다.

 

은신처의 다른 가족을 이끌던 반단은 과거 오토 프랑크의 사업일을 도와주었던 사업파트라고 합니다.

 

안네 프랑크 가족 4명과 치과의사 뒤셀은 아래층을 함께 쓰는데, 안네의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 마르고트의 3명은 넓은방을 사용하며, 안네 프랑크와 치과의사 뒤셀은 작은방을 함께 사용한답니다.

그리고 반단과 그의 가족은 윗층을 사용하게 되었지요.

 

이처럼 은신처에서 안네 프랑크를 비롯해 총 8명의 유태인일행 함께 은거했는데, 이들의 생활을 아버지의 지인 클라러와 미혼녀였던 여직원 미프 히스가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잼공장의 운영자였던 클라러와 그의 여직원 미프 히스는 날마다 안네가족 일행이 먹을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구입해서 남몰래 윗층의 다락방으로 전달해주었습니다.

 

만일, 이 헌신적인 박애주의자 두사람이 없었다면, 안네 프랑크의 가족을 포함한 8명의 피신자들은 벌써 굶어죽었을 겁니다.

잼공장의 대리운영자 클라러와 그의 여직원 미프 히스는 안네 프랑크 일행이 독일군에게 체포되던 그 순간까지 그들을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던 천사같은 존재감이자, 수호신이었답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사는 암스테르담에는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쉴세없이 독일군들이 유태인색출작업을 하고있었기 때문에, 식량과 생활용품의 구입과 조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암스테르담 또한 전쟁 등으로 인해 식량부족사태가 발생했고, 잼공장 다락방에 기거했던 안네 프랑크 등 8명의 일행은 매일같이 4인분의 식량만으로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배고픔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안네 프랑크 일행이 매일같이 먹었던 주된 식량은 감자와 양배추였답니다. 고기는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윗층 다락방에 유태인 은신처가 있다는 사실은 공장 운영자 클라러와 그의 여직원 미프 히스만이 알고있고, 이 두사람만이 안네 프랑코 일행을 도와주는 유일한 조력자이었지요.

 

나머지 공장직원들은 은신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만일 은신처의 유태인의 존재가 발각된다면, 독일군에 신고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은신처의 생활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 했습니다.

 

아래층 잼공장에는 직원들이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서 오후 5시 30분까지 근무한 후 퇴근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안네 프랑크일행을 도와주는 클라러와 여직원 미프 히스는 오전 8시에 출근해서 8시 30분까지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다락방에 몰래 들러서 그들이 먹을 식료품과 생필품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네 프랑크 일행은 직원들이 근무를 시작하는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실 30분까지는 쥐죽은 듯이 조용히 있어야합니다.

 

만일 다락방에서 그 어떤 소리라도 낸다면, 아래층의 잼공장에까지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공장직원들이 눈치를 챌 수 있습니다.

 

눈치 챈 공장직원이 독일경찰에 신고를 하면, 은신처에 있는 8명 전원이 채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답니다.

 

그리고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유태인들 중 일부는 독가스실험에 투입되며, 나머지사람들도 극심한 육체노동과 가혹행위에 시달리다가 몇 년 내에 대부분 목숨을 잃고맙니다.

 

특히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그야말로 지옥같은 곳인데, 이곳에 한번 들어온 사람들은 시체가 되어서야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잼공장건물의 은신처에 사는 안네 프랑크 등 8명의 일행의 하루일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잼공장 은신처에 살고있는 안네 프랑크 일행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실 30분까지 그 어떤 소리도 내지말아야 하며, 아무런 활동도 하지않고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데, 이 시간에 안네 프랑크와 가족들은 주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또한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실 30분까지는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락방에 있는 화장실의 배관통이 아래층의 공장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면 배관을 통해서 아래층 잼공장에도 그 물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직원들이 퇴근한 오후 5시 30분 이후가 되어야만 비로서 자유시간이 주어지는데, 이 때부터 잠자기 전인 밤 12시까지는 마음놓고 이야기도 할 수 있고, 그 어떤 활동도 할 수 있습니다. 오후 5시 30분 이후에는 아래층에 직원들이 없기 때문이지요.

 

한창 바깥에서 친구들과 재잘거리면서 함께 뛰어놀아야할 그 사춘기 시기에, 어두컴컴한 다락방에 갇혀서 숨죽인 듯이 지내야만 하는 14살의 안네 프랑크로서는 이같은 은둔생활이 무척 답답하고 감옥같은 생활로 느껴졌을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안네를 위해 그 당시 유명했던 연예계 스타들의 사진들을 구해주었고, 안네 프랑크는 사춘기소녀답게 자신의 방 벽에다 온통 수십장의 영화배우들의 사진들을 붙여놓고,

그 멋진 스타사진들을 감상하면서 한줄기 위로를 얻을 수 있었고, 은둔생활에서 오는 긴장감과 답답함, 무료함을 달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청소년들이 자기방에 아이돌스타의 사진을 붙인 것과 똑같이 사춘기소녀였던 안네도 자신만의 아이돌사진을 붙여놓고 마음의 위안거리와 활력소로 삼았던 겁니다.

이 당시의 유명한 배우였던 그레타 가르보의 사진도 안네의 방벽에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안네의 아버지가 스타사진들과 함께 사다준 것이 체크무늬 표지로 된예쁜 일기장이었답니다.

 

안네 프랑크는 다락방 은신처에 자신과 마음을 나눌 만한 진정한 친구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이를 가엾게 여긴 아버지로부터 체크무늬가 새겨진 예쁜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에 ‘키티’라는 귀여운 이름을 지어주었고,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일기장인 ‘키티’에다 자신의 속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기록하면서, 지루하고 긴장된 다락방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고 합니다.

 

안네는 자신의 일기장에다, 자신이 2년동안 다락방에서 은신생활하면서 느낀 삶의 애환과 각종 경험담, 그리고 사춘기소녀로서 느끼는 솔직하고도 섬세한 감정과 마음속의 비밀들을 생생하게 기록해놓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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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안네 프랑크가 ‘안네의 일기’를 쓰게 된 동기입니다.

 

 

그런데, 8명이나 되는 서로 다른 세가족이 모여서 함께 생활하는  은신처에서의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가 않았습니다.

 

특히 안네 가족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원래 은행업과 식료품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전에는 매우 풍족한 생활을 누렸었습니다.

 

그런데 은신처로 숨어들어와 같이 살게되면서, 세가족 8명의 사람들이 4인분의 배급품을 서로 나눠먹는 처지가 되면서 항상 식량이 부족했고,

또한 속옷과 생필품들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 은신처 사람들은 항상 생활자체가 불만족스럽고,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바깥에는 유태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독일군들의 검문검열이 강화되면서, 도시 전체가 공포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답니다.

 

좁은 은신처생활의 불편함과 언제 체포될지 모른다는 중압감 때문에, 신경이 매우 예민해져있던 은신처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서로 싸우는 등 점점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는데요.

 

그렇지만, 독일군에 적발되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서로간의 갈등과 불만이 많았지만, 은신처에 피신한 사람들은 스스로 참고, 삭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항상 부족하고 열악하기만 했던 은신처생활 속에서도 그들만의 특별이벤트로 자그마한 행복감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몰래 구입한 소고기와 양념으로 소시지를 직접 만들어서 맛좋은 양배추 발효요리를 만들어 먹었고,

클라러와 미프 히스가 남몰래 사다준 포도주와 크림케이크를 테이블위에 놓고 생신파티나 크리스마스 기념파티를 열어 축하의식을 치르면서, 은신처 멤버들만의 소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 이성에 눈을 뜬 사춘기소녀 안네 프랑크와 피터의 사랑

 

안네 프랑크는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이성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요.

 

안네 프랑크가 그 이듬해 15살이 되던 때부터 안네는 자신보다 3살 많은 반단부부의 아들 피터에 대해 이성적인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니까, 1년 넘게 계속된 은신처생활에서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사춘기소녀 안네의 가슴에 이성 피터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지요.

 

바로 이 시기부터 안네 프랑크는 월경을 하기 시작했고, 월경을 하면서 그녀는 이성에 대한 성적 호기심과 관심이 부쩍 더 상승해져갔습니다.

 

이 때부터 안네는 점점 피터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맨꼭대기 층인 5층의 다락방은 안네 프랑크와 피터가 함께 몰래 데이트를 보내는 밀회장소가 되었는데요.

 

5층 다락방에서 혼자 감자를 나르고 있는 피터에게 다가간 안네는 ‘나보다 언니 마르고트가 더 예쁘지않냐? 나도 예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묘한 질문을 던지면서 피터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당시 안네보다 3살 연상인 안네의 언니 마르고트는 자신과 동갑인 피터와 서로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틈새를 발칙한 사춘기소녀 안네 프랑크가 끼어들어 왔던 거지요.

 

그리고 안네는 언니가 차던 브레지어를 빌려 차고, 멋진 쇼올을 걸치는 등 자신을 예쁘게 치장을 하고는 피터의 방에 자주 들낙거렸습니다.

 

피터와 언니 마르고트 사이에 끼어들어온 안네는 피터와 잦은 만남을 가지면서 두사람간의 감정교환을 통해서, 피터를 자신의 남자친구로 만들어 버렸는데요.

 

그 시기에 안네 프랑크와 피터 사이에는 묘한 애정의 기류가 흐르게 되었는데, 오죽하면 안네의 엄마가 피터의 방에서 단 둘이(안네와 피터) 만날 때는, 꼭 문을 열어놓고 만나라고 당부까지 했을 정도랍니다.

 

안네는 이성인 피터에게서 느껴지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감정을 솔직하게 자신의 일기장에 기록해놓았습니다.

 

안네는 자신의 일기장에서 피터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즘 나와 피터는 단둘만의 공간인 다락방에 점점 자주 올라오곤 했다. 이렇게 피터와 단둘이 있을 때면 난 사랑에 빠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피터오빠도 같은 마음인지는 잘 모르겠다, 근데 오빠는 너무 소극적이다!’

 

단둘이 있을 때, 안네는 피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피터, 우리 두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게 어때?’

 

그리고 단둘이 있을 때, 안네 프랑크는 피터에게 키스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고, 피터는 엄마 외에는 한번도 키스를 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는데, 이렇게 한껏 분위기가 무르익은 그 때 두사람은 은밀한 다락방에서 서로 키스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안네와 피터는 독방에서 단 둘이 자주 만나면서, 둘만의 특별한 우정(사랑)을 나누었던 겁니다.

 

은신처에서 2년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안네는 유일한 이성인 피터에게서 묘한 이성적 감정 즉, 사랑을 느꼈으며,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그녀의 일기장에 생생하게 기록해놓았답니다.

 

아니, 나이가 고작 15살인데, 벌써부터 이성에게 사랑을 느끼다니 좀 성격이 발칙한 것 아냐?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겁니다.

 

이것은 안네가 발칙한 성격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2년 동안이라는 길고 답답한 은신처생활에서, 사춘기소녀로 불쑥 성장한 안네 프랑크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성장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네 프랑크는 14살부터 16살까지의 사춘기시절을 일체 바깥에 외출하지못하고 오직 은신처 안에서만 생활했고, 그 곳에서 정신적, 육체적 성숙해져가면서, 자신의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할 수가 있지요.

 

그렇게 여자로서 정체성이 확립되어갈 시기에, 2년동안 함께 살면서 정이 들었던 은신처의 유일한 이성인 피터에게서 이성적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사춘기소녀로서 겪게되는 당연한 성장통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이렇게 안네 프랑크와 피터는 은신처에서의 2년간의 은둔생활 동안 서로간 이성적인 감정이 싹트게 됐고, 둘만의 은밀하고도 찐한 우정(애정)을 나누면서 은신처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냈답니다.

 

◆ 은신처의 발각과 안네 가족의 강제수용소 수감

 

1944년 8월 4일 운명의 밤, 누군가의 밀고를 받은 나치 경찰이 안네 프랑크의 은신처에 들이닥쳤고, 결국 안네 프랑크 일행 8명 전원이 체포되었으며, 이들 모두는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안네 프랑크 일행을 밀고한 밀고자는 누구일까요?

 

어느날, 그 잼공장의 2층 사무실에 도둑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몰래 2층 사무실로 들어온 도둑은 그곳에 있는 금고를 열어서 약간의 돈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사무실 바로 위에 있는 은신처에서 피터가 기르는 고양이가 달려가면서 탁자위의 컵을 떨어뜨리면서, ‘와장창’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 때 도둑은 윗층 은신처에 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그곳에서 달아나버렸는데요.

 

얼마 후에, 그 도둑은 게슈타포(비밀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붙잡혔고, 체포된 그 도둑은 경찰에게 자신의 절도행위를 자백했는데, 그 과정에서 안네가족 일행이 은신했던 은신처의 장소가 발각나 버렸답니다. 

 

그러니까, 절도를 했던 그 도둑이 안네가족의 은신처를 제보한 밀고자인 셈이랍니다.

 

도둑의 말을 듣고 그 잼공장 건물로 출동한 독일경찰은 그 건물 전체를 샅샅이 수색했습니다.

 

그리고 독일경찰은 3층 복도에 있던 책장 뒤에 쪽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쪽문을 열고 은신처로 들이닥친 독일경찰은 은신처에 숨어있던 안네 프랑크의 일행 8명을 모두 찾아내었고,

결국 1944년 8월, 안네 프랑크를 비롯한 일행 8명 모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안네 프랑크 은신처를 독일경찰에 제보한 밀고자는 도둑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알려지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밀고자에 대한 또다른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안네 프랑크의 은신처를 밀고한 자는 판덴베르크라는 유태인이라고 합니다.

 

2022년도 즉, 가장 최근에 나온 이론으로서 신빙성이 높은 주장인데요.

FBI와 법학자를 비롯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팀이 6년동안 조사활동을 벌인 끝에, 최근에 안네 프랑크의 은신처를 제보한 밀고자로 한 인물을 지목했습니다.

 

조사팀이 지목한 밀고자는 아르놀트 판덴베르크라는 유태인인데, 판덴베르크는 암스테르담의 유태인을 관리하는 유태인연합회의 회원으로 있는 사람이었고, 그는 유태인들의 은신처주소에 대한 정보와 접근권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이 판덴베르크가 게슈타포에게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담보받는 조건으로 암스테르담에 은신하고 있는 안네 프랑크가족의 은신처를 게슈타포에게 밀고했다고 합니다.

 

판덴베르크가 유대인 은신처를 제보해준 후에, 그는 결코 나치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았고, 아무런 피해를 보지않고 편안하게 살다고 1950년도에 암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즉, 이 판덴베르크라는 유대인은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위해서 동족을 배신하고 동족을 밀고했던 겁니다.

 

현재까지 안네 프랑크의 은신처를 밀고한 자는 도둑과 판덴베르크 이 둘 중 한사람으로 압축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최근에 나온 주장이 더욱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되는데요!

 

◆ 안네 프랑크와 가족들의 최후와 사망원인

 

1944년 8월 4일 독일경찰에 전격 체포된 안네 프랑크는 안타깝게도 아우슈비치 못지않게 악명 높은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로 수감되었고,

이 수용소에서 7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안네는 1945년 3월 2일에 영양실조와 장티푸스 감염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곳에 함께 있던 언니 마르고트 프랑크는 안네보다 훨씬 먼저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안네 프랑크와 언니 마르코트 프랑크는 수용소안에서 독일군이 자행한 극심한 학대행위와 극렬한 노동착취, 그리고 오랜 굶주림으로인한 영양실조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장티푸스라는 질병까지 걸려 결국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안네 프랑크의  실제 사진

 

안네 프랑크의 어머니도 강제수용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체, 온갖 학대를 다 받다가 정신이상에 걸렸고, 결국 가스실행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안네 프랑크가 수용되었던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는 1945년 4월 15일날 영국군에 의해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안네 프랑크가 2개월만 더 버텨주었다면, 그녀는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며, 그녀는 살아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가 해방되기 2개월 전에 사망했다는 점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은신처에 같이 살았던 반단씨는 가스실 실험으로 사망했고, 그의 부인도 강제수용소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단씨의 아들이자, 안네 프랑크의 남자친구인 피터는 또다른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강제 이주당한 후, 역시 수용소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암스테르담 은신처에서 같이 살았던 가족 가운데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악명높은 아우슈비치 수용소에 수감된 후, 힘들고 험악한 수용소생활에도 끝까지 견뎌내면서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답니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해방된 후, 암스테르담 은신처를 찾아와서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클라러와 미프 히스를 다시 만나 감격의 해후를 나눴다고 합니다.

 

이 때에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았던 여직원 미프 히스는 자신이 몰래 숨겨놓았던 안네의 일기장을 살아돌아온 안네 아버지 오토 프랑크에게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죽은 딸 안네의 일기를 손에 쥔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딸의 일기를 출판사에 맡겨 출판함으로써, 안네의 일기가 전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생전에 안네 프랑크가 자신의 경험담이 담긴 일기를 나중에 꼭 책으로 출판하고 싶다는 소망을 아버지에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결국 생전에 딸이 그토록 원했던 것처럼,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그녀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함으로써, 죽은 딸의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무척 감격해했다고 합니다.

 

영화 '안네의 일기'의 한장면

 

책 ‘안네의 일기’는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딸의 일기에서 성적인 표현부분과 다른 가족을 맹렬히 비난한 부분등 일부를 삭제하는 작업을 거친 후, 1947년도에 네델란드어로 첫출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출판한 ‘안네의 일기’는 60개국에 번역출판되면서, 무려 3,200만권이 팔리는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오토 프랑크에 의해서 무수정 완전판이 다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안네 프랑크는 주관이 뚜렷하며 호불호가 분명하며 다소 몽상가적인 기질도 갖추고 있는 긍정적인 성향을 갖추고 있는 소녀입니다. 

 

머리도 영리한데다 항상 적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춘기소녀 안네 프랑크는 장차 무용수나 영화배우 같은 유명한 연예인이 되는 화려한 꿈을 꾸고있었는데,

2차세계대전이라는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유태인으로서 핍박받는 삶을 살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지도 못한 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만 정말 너무나도 안타깝고 가엾은 소녀랍니다.

 

만일 안네 프랑크가 지금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녀는 더욱 알차고 적극적인 주체적인 삶을 살아갔을 것이고, 틀림없이 만인이 우러러보는 성공한 연예인이나 스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안네 프랑크 가족 사진(맨위 왼쪽부터 어머니, 언니 마르고트, 안네 프랑크, 아버지 오토 프랑크, 아래 왼쪽부터 반단의 부인, 피터, 반단씨)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자신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체, 17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한 안네 프랑크가 너무도 안타깝고 가엾기 그지없습니다.

 

오늘을 ‘안네의 일기’를 남김으로써 히틀러의 만행과 2차세계대전의 참상과 처참함을 세상에 널리 알린 이 시대를 앞서나간 선구자적인 인물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안네 프랑크가 은신해 있던 은신처 주소 -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의 프린센흐라흐트(Prinsengracht) 26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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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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