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측천무후의 악행과 업적, 남성편력과 최후, 3000명의 남총
측천무후 624년 2월 17일 ~ 705년 12월 16일
중국 왕실에는 역사적으로 여려명의 악녀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정말로 잔인하기로 소문난 악녀이자, 요부가 한명이 있는데, 바로 ‘측천무후’입니다.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마다 매우 엇갈립니다. 한편으로는 측천무후는 격동의 시기에 중국을 잘 다스리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서 중국을 태평성대로 이끈 여황제이자 여걸로 평가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무도한 독재자이자, 희대의 요부라는 평가도 받는 인물이랍니다.
저는 측천무후의 이런 엇갈린 평가 중에서 그녀가 중국을 태평성대로 이끈 위대한 여황제보다는 권력에 눈이 먼 무도한 독재자 내지는 희대의 요부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측천무후가 나라를 안정시키고 여러 가지 억접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너무도 많은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녀를 희대의 요부이자 악녀라고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원래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3대 악녀’가 있습니다. 바로 여태후와 측천서태후, 그리고 측천무후가 그 주인공이지요.
이들 3대 악녀들은 중국조정의 권력을 찬탈하고는 황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국정을 농락하고,
충신들을 죽이는 전횡을 일삼았으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천하를 쥐락펴락했던 중국의 무도한 권력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 세명의 여성들은 중국역사에 한획을 그을 만큼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후대의 사가들은 여태후와 서태후, 측천무후를 일컬어 ‘중국의 3대 악녀’라고 정의를 내렸답니다.
서태후와 측천무후는 아들을 쫒아내거나, 죽여서 자신이 스스로 여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악업을 행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여태후는 아들인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고, 엄청난 전횡을 일삼았던 인물이랍니다.
그런데 이 3대 악녀 중에서도 가장 스케일이 크고 놀라운 기행일 일삼은 악녀는 바로 ‘측천무후’입니다.
셋 중에서 다른 두명은 황제의 모후로써, 섭정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했지만, 측천무후는 자신이 직접 황제의 보위를 차지하고, 천하를 제멋대로 좌지우지했던 인물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측천무후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황제이며, 중국에서 유일한 여황제라는 신기록을 세운 여성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측천무후가 셋 중에서 가장 대단한 여걸이라고 할 수 있지만 -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공포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가장 잔인한 폭군이라고도 팡가할 수 있습니다.
측천무후가 아무리 내치를 잘하고 태평성대를 이룬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자신의 친아들을 죽이는 퍠륜으 저질렀다는 사실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악행이랍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중국의 왕실인물 중에서 남색을 가장 많이 밝힌 호색가로도 유명하답니다.
측천무후는 나이 60세에 황제의 보위에 오른 후, 수많은 젊은남자들을 뽑아 남총을 만들고, 그 남총들을 매일같이 갈아치우면서, 밤마다 동침했을 정도로 엄청난 정욕을 불살랐던 희대의 요부라는 오명을 남긴 인물이랍니다.
그럼,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이자, 희대의 요부인 측천무후의 업적, 악업 등 그녀의 생애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 측천무후의 생애와 업적, 악업
측천무후의 이름은 '무조'이며, 그녀는 지방태수였던 무사확의 둘째딸로 태어났고, 14살 때에 궁녀로 자원해서 궁궐로 들어와서 살았답니다.
측천무후가 미인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녀의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답니다.
측천무후의 원래의 이름은 '무조'이지만, 그녀가 궁궐로 들어온 후에는 '무미랑'이라는 예명으로 불리웠는데, '무미랑'이라는 뜻은 '무씨성을 가진 아름다운 낭자'라는 뜻입니다.
측천무후 즉 무조가 궁궐에서 '얼굴이 예쁜 낭자'라는 뜻의 '무미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또한, 측천무후(무조)가 궁녀가 된 것도, 그녀의 얼굴이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예뻤기 때문에, 궁녀가 되라는 주위사람들이 권유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색이 뛰어난 측천무후(무조)는 궁궐로 들어온 후부터, 궁녀로서는 만족하지 못하고, 황후가 되고자하는 엄청난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측천무후는 당시 당나라의 황제인 당태종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교묘한 술수를 부려서, 당태종의 환심을 얻는데에 성공합니다.
그녀는 당태종의 내관을 매수해서 당태종이 자주 다니는 곳을 알아내고는, 그 곳에 자주 출몰해서 당태종과의 조우를 시도했답니다.
이 당시 무조는 궁궐에서 하찮은 궁녀의 지위에 불과했기에, 황제의 총애를 전혀 받지못하고, 밤마다 독수공방을 하면서 혼자서 외롭게 지냈답니다.
어느날, 당태종이 자주 찾는 궁궐의 연못가를 찾아간 측천무후(무조)는 그곳에서 당태종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결국 당태종과 조우하게 됩니다.
당시 당태종이 재후국에서 조공으로 보내온 사나운 말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당태종은 그 사나운 말을 보면서, 이 말을 어떻게 길들여야 할지 고민하면서 탄식하고 있었는데요.
이때 홀연히 무조(측천무후)가 나타나서 당태종에게 다가가서, 당돌하게 말했습니다.
무조(측천무후)는 당태종에게 세가지만 있으면, 그 사나운 말을 충분히 길들일 수 있다고 말했답니다.
당태종은 무조에게 그 세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무조(측천무후)는 ‘쇠채찍과 쇠망치, 비수 세가지 물건만 있으면, 사나운 말을 충분히 길들일 수 있습니다’
무조는 당태종에게 ‘먼저 쇠채찍으로 사나운 말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서 말을 듣게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쇠망치로 더 아프게 때리면 말을 들을 겁니다.
만일 그래도 말을 듣지않는다면, 그 말을 전혀 쓸모가 없는 말이므로, 비수로 찔러 죽이면 됩니다'라고 무조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당태종은 이렇게 자신에게 명쾌하게 답변을 한 무조(측천무후)의 영특함을 보고, 그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궁녀에 불과했던 그녀에게 정 5품에 해당하는 '재인'이라는 후궁지위를 하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조가 당태종의 후궁이 되었지만, 당태종은 그녀와 잠자리만큼은 하지않았습니다.
천문지리를 보면서 미래의 운세를 점치는 벼슬아치인 태사령은 무조(측천무후)가 장차 왕조를 뒤엎을 역모를 일으킬 반골의 기질을 갖춘 인물이니, 당태종에게 그녀를 가까이하지 말 것을 권고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조(측천무후)는 당태종의 후궁이었지만, 전혀 당태종의 총애를 얻지못하는 불우한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당태종이 병을 앓아서 병석에 누울 때에, 무조는 태종의 병간호를 했었는데, 태종의 병문안을 왔던 아들 이치(훗날 고종)는 무조의 미색을 보고, 첫눈에 홀딱 반해서, 그녀를 마음에 품게된답니다.
그리고 태종이 죽은 후에, 태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고종은 절에 들어간 무조(측천무후)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여서 자신의 후궁으로 삼아버립니다.
무조는 태종으로부터는 성은을 입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인 이치(고종)의 눈에 띄여서 후궁인 소의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고, 고종의 뜨거운 총애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무조(측천무후)는 결코 황제의 후궁지위에 만족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엄청나게 야망이 큰 여걸입니다.
그녀는 후궁보다도 더 큰 권력인 황후의 자리를 탐냈고, 현재의 황후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후가 될 엄청난 음모를 꾸미게 된답니다.
당시의 상황은, 고종의 정비인 황후 왕씨와 후궁인 숙비 소씨간의 고종의 총애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고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있는 숙비 소씨를 견제하기 위해서, 황후 왕씨는 절에 있던 무조(측천무후)를 궁궐로 불어들여서, 고종과 가깝게 지내도록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황후 왕씨의 행동은 엄청난 실수를 한 것으로서, 엄청난 야심가인 무조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으로, 황후는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랍니다.
고종의 후궁이된 무조는 이후에 새로운 음모를 꾸며서, 황후 왕씨를 자신의 딸을 죽인 살해범으로 몰아서, 사약을 받게 만들었답니다.
무조는 고종의 성은을 얻어서 딸을 낳았는데, 그녀는 자신의 딸을 아무도 몰래 목을 졸라서 죽였고,
이 죽은 딸이 있는 방으로 황후 왕씨와 고종을 순차적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도착한 황후 왕씨가 자신의 죽은 딸과 함께 있게 만들었고, 뒤이어 도착한 고종에게, 황후 왕씨가 자신의 죽은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무조는 황후 왕씨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황후를 모함했습니다.
즉 무조는 교묘하게 황후와 자신의 죽은딸이 함께 있는 상황을 만들어서, 황후 왕씨를 자신의 친딸 살해범으로 몰고갔고,
고종은 연극을 하는 무조(측천무후)의 말에 넘어가서, 측천무후의 고변을 믿고 황후를 공주살해범으로 처형해버렸습니다.
측천무후 초상화
또한 무조(측천무후)는 고종의 총애를 받고있던 숙빈 소씨에게도 똑같은 누명을 씌워서 죽여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무조(측천무후)는 갖은 권모술수를 다 부려서 자신의 라이벌들을 다 제거해버리고, 황후의 자리에 올랐고, 고종과의 사이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서 기르게 됩니다.
이렇게 황후의 자리에 오른 무조(측천무후)는 황후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아먕을 품게되었고, 더 큰 권력을 추구해나갑니다.
무조(측천무후)는 고종이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게되자, 고종을 대신해서 섭정을 펼쳤고, 점차적으로 권력을 독점해나갔답니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조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대신들을 집중적으로 고위관직에 임명해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강화시켜나갔고, 자신을 반대하는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해나갔답니다.
건국공신이었던 장손무기와 저수량등의 충신들을 측천무후는 반역의 누명을 씌워서 숙청해버렸답니다.
이처럼 측천무후는 고종이 앓아누운 사이에, 스스로 섭정을 통해서, 무수한 정적들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도록 조치를 취했던 겁니다.
측천무후의 정치력과 권모술수가 얼마나 능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측천무후의 야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지요. 그녀는 궁극적으로 황제인 아들를 몰아내고, 자신이 여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을 원하고 있었거든요.
측천무후는 656년 자신의 장남 이홍을 황태자 자리에 올려놓았는데, 얼마 지나지않아, 그녀는 자신의 친아들인 이홍의 식사에 독을 넣어서 친아들을 독살시켜버립니다.
이홍이 죽은 후, 측천무후는 자신의 둘째아들인 이현(李賢)을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했답니다.
그런데 새로운 황태자가 된 이현이 너무도 똑똑했기 때문에,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는 데에 위기의식을 느낀 측천무후는 이현을 여색을 밝힌다는 거짓누명을 씌여서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켜 버렸답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폐위된 이현을 먼 곳으로 유배보내 버렸는데, 유배간 이현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자살을 강요했고, 이현은 결국 유배지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권력에 눈이 먼 측천무후는 자신의 친아들 두명을 거짓 누명의 씌워서 폐위했을 뿐 아니라, 죽여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친아들마저도 권력의 걸림돌로 생각하고는 죽여버리는 엄청난 패륜을 저질렀답니다.
그런데 측천무후는 두아들들을 페위시키고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은 그녀의 셋째아들 이현(중종)을 단 3개월 만에 외척세력을 끌어들인다는 명분을 붙여서, 또다시 폐위시켜버립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막내아들 이단을 새로운 황제(예종)로 책봉했고, 자신은 황태후가 됩니다.
그런데 새로운 황제가 된 이단(예종)은 허울만 황제일 뿐, 모든 실권을 측천무후가 전부 다 행사했고, 예종은 꼭두각시황제에 불과했답니다.
꼭두각시 황제가 된 이단(예종)도 언제 어머니에게서 폐위를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 자신의 황제자리를 어머니인 측천무후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이로써 690년, 측천무후는 67세의 나이에 아들을 몰아내고 여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나라이름을 당나라에서 ‘주나라’로 바꾸어버립니다.
과거에, 태사령이 고종에게 무조를 가까이하면, 나중에 그녀가 역성혁명을 일으킨다고 경고했는데, 태사령의 그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고 말았습니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67세였고, 그녀는 황제가 된 후에 15년 동안 주나라를 강력하게 통치해갔습니다.
그리고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전국의 관공서에 암행관리나 밀정을 파견해서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죽이는 등 엄청난 공포정치를 펼쳐나갔습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친자식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최고권력을 획득했던 탐욕스러운 못된 권력의 화신입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측천무후가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죽였던 사람은 공식적으로는 93명이며, 비공식적으로는 200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측천무후의 지시를 받거나, 그녀의 정책추진 과정에서 관리들이 죽인 사람들은 7,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 측천무후의 업적
그렇지만, 이렇게 잔악스러운 행동을 한 측천무후지만, 그녀는 정치만큼은 잘 이끌어나갔고,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었다는 역사가들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측천무후는 과거제도를 개편함과 동시에 인재들을 골고루 등용하고 적제적소에 인재들을 배치함으로써, 나라를 안정화시켰답니다.
그녀는 정인걸, 장간지 같은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정치를 안정적으로 잘 수행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고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승려들을 육성하고 사원들을 건립하는 등 불교를 증흥시켜 나갔고, 농업생산력 강화와 민생회복에 힘써서,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고, 국가를 안정된 반석위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국방에도 힘을 써서 군사력을 더욱 확충하고 강화시켜나갔고, 천적인 고구려를 토벌해서 당나라영토를 크게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고구려가 측천무후의 당나라에 의해서 망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랍니다.
이렇게 측천무후는 공로와 악업이 함께 있는 인물어어서, 그녀에 대한 평가는엇갈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측천무후의 남성편력, 남총
그런데 측천무후는 여황제에 오른 후, 남색을 무척 많이 밝혔다고 하며, 엄청난 쾌락을 즐겼다고 합니다.
여황제로 등극한 후, 측천무후는 중국전역에서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모집해 궁궐로 모아들였고, 그 젊은 남총들과 엄청난 향락생활을 즐기면서 음탕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남총’이라는 기관을 만들어서, 중국 전역에서 무려 3,000명의 젊은 남성들을 남총으로 뽑아서 궁궐로 입궁시켰답니다.
측천무후가 뽑았던 남총의 조건은, 젊은 남성일 것, 미모가 수려할 것, 키가 크고 풍체가 좋을 것 등의 세가지 요건을 갖춘 젊고, 잘생긴 남성들을 주로 뽑았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궁궐속 은밀한 곳에 ‘공학부’라는 기관을 설치해놓고, 젊은 남총들 3,000명을 배치했고, 그곳에서 밤마다 젊은 남성들을 번갈아가며 동침하면서, 뜨거운 정욕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자리에서 그녀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 남성들은 곧바로 죽임을 당했을 정도로 측천무후는 정욕도 대단했지만, 동시에 아주 잔인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특히 장씨형제를 아주 총애했다고 하는데요.
장씨형제는 장종창과 장역지형제인데, 그들은 사대부인 복각시랑 장구청의 아들이며,
스무살도 채 되지않은 잘생긴 미소녀들인데, 장씨형제는 측천무후의 지극한 총애를 받아서 그녀와 자주 동침했다고 합니다.
장씨형제는 피부가 매우 하얗고 외모가 상당히 잘생겼다고 하며, 이들은 궁궐에 갈 때에는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고,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고, 입에는 정양이라고 하는 입냄세를 제거하는 향수를 뿌리고 가서 측천무후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장씨형제는 원래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의 정부였다고 하며, 태평공주가 어머니인 측천무후에게 아첨하게 위해서 자신의 애인인 이들 장씨형제를 측천무후에게 상납해 남총으로 삼도록 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장씨형제에게 늙은 자신을 대신해서 정사를 담당하도록 막강한 권한을 주었습니다.
이 장씨형제는 측천무후의 후광을 등에 업고, 백성들에게 엄청난 횡포를 부렸으며, 국정을 마음대로 농락하고, 막대한 국가재정을 자신들의 사금고로 빼돌리는 등 엄청난 전횡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측천무후는 여황제가 된 이후,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천명의 젊은 남성들을 번갈아 바꿔가면서 정욕을 채웠다고 하니, 정말 대단히 음탕한 요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남성편력을 자랑하는 요부 중의 최대의 요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측천무후의 최후와 죽음
이처럼 중국역사상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측천무후의 말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측천무후는 자기 스스로 당나라를 멸하고, 무씨의 나라인 주나라를 만들었는데, 자신의 후계자 또한 무씨성을 가진 사람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조카인 무씨성을 가진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 지, 아니면 아들인 이현에게 황위를 물려줄 지를 놓고, 고심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병을 않아서 병석에 누워있던 705년도에, 제상 장간지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쳐들어왔습니다.
재상 장간지는 측천무후를 협박해서 다시 당나라를 복원시킬 것과 무씨가 아닌 아들 이현에게 황위를 물려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측천무후는 장간지의 요구대로 따랐다고 합니다.
결국, 측천무후가 세운 주나라는 건국한 지 15년만에 없어지고 다시 당나라로 복위되었고,
측천무후의 셋째아들 이현(중종)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병들고 노쇠해진 측천무후는 이제 더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705년도 측천무후는 자녀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유언을 남긴 후에 82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측천무후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자신의 묘비에 어떤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도 권력욕심이 많았던 그녀가 자신의 묘비에 자신의 업적을 새겨넣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 무척 이색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측천무후가 자신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를 넣지말라고 한 것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반성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일각에서는 측천무후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서 나라의 발전을 이루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현명한 군주였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측천무후는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숙청했던 잔인한 군주였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권력을 얻기위해서, 자신의 두아들과 한명의 친딸을 죽인 패륜을 저지른 사실은 결코 지울 수가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의 안정을 이루고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명목하에, 자신의 친자식과 수많은 백성을 죽이는 행위를 결코 용납될 수 없고, 결코 합리화되어서는 안되는 패륜행위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측천무후가 정치를 잘했다는 몇가지 업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3대 악녀 중에 가장 최악의 악녀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다른 악녀들은 정적들은 죽였어도, 자신의 친자식만큼은 죽이지 않았는데, 측천무후는 자신의 친자식마저 인정사정없이 살해해버리는 끔직한 패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그녀의 최대의 약점이자 만행인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친자식을 죽인 이유는 권력의 욕심 때문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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