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주몽부인 소서노의 업적과 죽음, 최후, 아들 온조와 권력투쟁

 

우리나라에서 고대시기에 두 개의 고대국가를 건국했던 여장부가 있었는데, 혹시 누구인지 아시나요?

 

고대시기에 고구려와 백제라고 하는 두 개의 고대국가를 건국했던 뛰어난 여성은 바로 소서노랍니다.

 

만주의 부족장의 딸 소서노는 주몽을 도와서 함께 고구려를 건국했고, 연이어서 아들 온조를 도와 백제를 건국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건국의 일등공신이었지요.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있어서 두 개의 고대국가를 건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뛰어난 정치가 소서노의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창업비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백제를 건국한 후에 벌어졌던 아들 온조와 소서노의 치열한 권력암투, 그리고 소서노의 최후에 대해서도 소개해드리겠어요!

 

고구려와 백제라고 하는 고대시기에 위대한 두 개의 국가를 세우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던 여걸 소서노와 그의 아들 온조 사이에 벌어졌던 백제왕실 내부의 치열한 음모와 책략,

권력다툼 등 그동안 숨겨져왔던 권력이면의 치열한 암투 이야기도 함께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그리고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소서노의 최후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기원전 18년경, 지금의 수도인 서울 부근에서 세워졌던 국가가 바로 백제입니다.

그리고 이 고대국가 백제를 건국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여장부가 바로 소서노이며, 그녀는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건국하는데도 커다란 기여를 한 여걸입니다.

 

이렇게 소서노는 고대시기에 고구려와 백제라고 하는 두 개의 국가를 건국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불세출의 뛰어난 여장부이고, 위대한 국가건국자였습니다.

 

오늘은 고구려에 이어 백제라는 두 개의 고대국가를 건국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소서노의 업적과 고구려와 백제건국 이야기, 그리고 소서노의 최후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일반에 알려지기로는 고구려를 건국한 건국자는 주몽이지요.

그런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바로 소서노입니다.

 

만일 소서노가 없었더라면,  고구려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비록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하더라도, 소서노가 경제적 지원을 하지않았더라면 주몽은 결코 고구려를 건국하지 못했을 겁니다.

 

원래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에 주몽은 동부여의 왕자였지요. 그런데 동부여에서 치열한 권력다툼이 발생하고, 권력다툼의 희생물이 된 주몽은 동부여에서 탈출해 남쪽으로 망명해왔습니다.

 

그런데 동부여에서 탈출해나올 때 주몽은 빈털터리로 쫒겨왔기 때문에, 국가를 세울 만한 기반이나 경제적 여건을 전혀 갖추지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한나라의 기틀이 될만한 막대한 경제적 후원과 막강한 군사력까지 아낌없이 지원해줌으로써,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줬던 인물이 바로 소서노였답니다

 

소서노는 부여의 왕자출신인 주몽이 국가를 건국할 수 있도록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다 대주었고, 주몽은 소서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서노는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소서노는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땅으로 내려와서 또다른 고대국가 백제를 건국했던 겁니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는 데에도 소서노가 상당한 규모의 경제적 후원을 했기 때문에, 온조가 어렵지않게 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대시기에 있어서 고구려와 백제라고 하는 2개의 국가를 건국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소서노는 당대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국가설계자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같이 국가건국에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소서노였지만, 그녀는 아쉽게도 남자와의 사랑에서는 두 번이나 실연을 당하는 등 성공하지못한 것같아 큰 아쉬움을 주고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소서노의 고구려와 백제 건국이야기와 함께 두남자와의 결혼, 그리고 소서노와 아들 온조와의 애증관계에 대해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 소서노, 주몽을 도와 고구려 건국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주몽은 원래 부여의 왕족이었지요.

그런데, 주몽출신에 대해 두가지 엇갈린 기록이 존재한답니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을 동부여의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공개토대왕비문에는 주몽을 북부여의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주몽은 원래 북부여의 왕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입니다.

 

그렇지만 유화부인이 주몽을 임신을 한 상태에서 해모수로부터 버림 받했고, 그녀는 다시 동부여의 금아왕과 재혼을 한 후, 동부여땅에서 주몽을 낳았기 때문에, 북부여의 왕자였던 주몽은 자연스럽게 동부여의 왕자로 신분이 바뀌게된 겁니다.

 

이렇게 유화부인이 두명의 왕과 관계를 갖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주몽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이 서로 다른 차이점이 발생하게된 겁니다.

 

주몽이 북부여의 왕자이든, 동부여의 왕자이든, 그가 부여의 왕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몽이 왕자로 있었던 동부여에서 치열한 왕위계승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주몽은 금아왕의 첩실부인의 아들로서 서자의 신분인데 반해, 금아왕의 정실부인의 아들이 두명이나 있었고,

정실부인의 맏아들인 대소왕자와 주몽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졌고,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주몽은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 동부여를 탈출해 남쪽지방으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주몽은 자신의 추종세력 몇 명을 이끌고 남쪽땅 졸본지역으로 내려왔고, 그 곳에서 새로운 국가를 창업할 야심찬 계획을 품었는데,

이같이 국가를 건국하는 데에는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필요한데, 그러한 인력과 자금을 지원해준 사람이 바로 소서노였습니다.

 

그당시 졸본지방을 다스리는 계루부의 연타발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소서노는 연타발의 둘째딸이었고, 한 부족을 다스리고 있던 군장 연타발은 풍부한 재산과 상당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졸본지역에서 나라를 건국하려는 야심을 품은 주몽은 연타발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함으로써 족장 연타발의 엄청난 인력과 풍부한 물자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는 연타발이 죽은 후, 소서노의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얻어서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부여에서 빈털터리 신세로 쫒겨났던 주몽에게 소서노가 지원해준 엄청난 자본과 인적자원은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며, 소서노는 고구려건국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졸본지역으로 온 주몽이 얼마나 가난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습니다. 처음 졸본에 도착한 주몽은 비류수가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강가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을 정도로 가난했던 주몽이 돈이 어디 있어서 천문한적인 자금과 물자가 들어가는 국가건국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만일 소서노의 경제적 후원이 없었더라면,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건국에 있어서 소서노는 단순한 지원자가 아니라 고구려건국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실세라고 할 수 있고. 고구려의 공동창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인인 연타발이 졸본지역의 부족장이었기 때문에, 연타발이 갖고있는 권력과 군사력도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우 궁금해하는 부분이 따로 있는데, 소서노가 주몽의 유일한 부인이었는가 하는 부분과 주몽이 소서노의 유일한 남자였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서노는 주몽의 유일한 부인이 아니며, 주몽도 소서노의 유일한 남편이 아니랍니다.

 

소서노는 주몽의 유일한 부인이 아니며, 주몽은 두명의 부인이 존재했었답니다

 

주몽은 동부여에 살고있을 때, 결혼을 한 예씨부인이 있었고, 주몽이 졸본지역으로 망명을 와서 또다시 소서노와 재혼했으므로 주몽에게는 부인이 두명 있는 셈입니다.

 

또한 소서노도 주몽을 만나기 전에, 이미 우태라는 남자와 결혼을 해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우태가 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일찍 과부가 된 소서노는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을 만나 서로 눈이 맞아 재혼을 했던 겁니다.

 

이렇게 주몽과 소서노는 둘다 이미 결혼했던 경력이 있는 상태에서 재혼을 했던 것인데, 문제는 새롭게 왕이된 주몽의 후계자 자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입니다.

 

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이된 주몽은 소서노의 내조를 받아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다져나가면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자신을 지원해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소생인 비류와 온조도 자신의 친아들처럼 아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하는데, 고구려왕인 주몽의 후계자인 태자 자리는 오직 하나뿐인데, 주몽의 아들은 셋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왕자들 간에 권력 갈등이 생길 여지가 존재했었답니다

 

그리고 고구려건국 후에 부여에 남아있던 예씨부인과 아들 유리가 졸본지역으로 주몽을 찾아왔고, 주몽은 예씨부인과 아들 유리를 큰 기쁨으로 맞이해주었다고 합니다.

 

친아들을 맞이한 주몽은 주저없이 자신의 친아들 유리를 태자로 책봉했고, 소서노의 소생인 비류와 온조는 태자책봉에서 제외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주몽의 입장에서 볼 때, 비류와 온조는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 소서노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의붓아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친아들인 유리를 왕의 후계자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태자책봉에서 제외당한 후, 왕위세습에 큰 기대를 품었던 소서노와 주몽 간에는 큰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요. 소서노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를 세우는 데 자신의 전재산을 투입해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던 소서노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자신의 아들이 태자책봉에서 탈락한 것에 대해 큰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도 역시 유리의 태자책봉에 대한 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형 비류는 동생 온조에게 ‘처음 부왕이 부여에서 쫒겨왔을 때,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서 나라건국의 기틀을 만들어주는 등 큰 위업을 세웠는데, 부왕이 왕위를 유리에게 물려줘서 유리가 왕이 되고 말았다’고 말하면서

부왕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 큰 불만을 품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나옵니다.

 

주몽의 첫 부인의 아들 유리가 태자가 되었을 때. 소서노와 비류, 온조가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 부분입니다.

 

결국, 주몽한테 커다란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낀 소서노는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 땅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소서노는 배다른 자식 유리가 왕이 된다면 자신과 두 아들의 앞날에 희망은 사라지고, 자신들의 신상에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고 걱정하게 되었고,

결국 두 아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한반도의 남쪽땅으로 이주해갔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주몽의 친아들인 유리가 태자가 되자, 크게 두려움을 느낀 소서노는 아들 비류와 온조 그리고 10명의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땅으로 내려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서노의 계획은 고구려의 영향이 전혀 미치지않는 남쪽 땅으로 내려가서 두아들에게 새로운 국가를 창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자는 것입니다

 

소서노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자금을 만들었고,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10여명의 신하를 대동한 채, 한반도의 남쪽 한강유역으로 이주해 갔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소서노가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이주해올 때에, 열명의 신하 외에도 수많은 백성들이 그녀일행을 따라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당시 소서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기원전 18년, 남쪽 한강부근으로 내려온 두아들 중 큰아들 비류는 인천부근에 있는 미추홀로 가서 나라를 건국했고, 둘째아들 온조는 한강부근에 있는 하남지역에서 백제라는 국가를 건국했습니다.

 

그런데 인천쪽 미추홀로 가서 나라를 세웠던 비류는 소금기가 많고 습기가 많은 그 땅에서 편히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되고, 백성들이 굶주리는 등 큰 낭패를 겪게되자, 크게 낙심한 나머지 화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한강부근의 하남위례성을 도읍지로 정하고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성체가 견고할 뿐만 아니라, 토지가 비옥하고 모든 백성들이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됨으로서 국가의 기반을 확립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소서노가 남쪽 땅에서 국가를 건국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고 정했는데, 나라이름 ‘백제(百濟)’는 ‘백명의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 따라왔다’ 즉, 수많은 백성들이 즐겨이 따라왔다는 의미에서 백제라는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또한 소서노는 남쪽 땅에서도 주몽한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투입해서 온조의 백제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고, 그 결과 온조는 어렵지않게 국가를 건국할 수 있었고, 온조가 세운 백제는 크게 번창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소서노는 자신의 남편과 아들 두사람으로 하여금 두 개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할 수 있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던 건국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5,000년 역사 중에서 한 여인이 두개의 국가를 건국하는데 관여한 사례는 소서노가 처음이며,

소서노는 단순히 국왕의 부인이나 왕의 모후 외에도 두 개의 고대 국가 건설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설계자이자, 뛰어난 정치가였습니다.

 

 

◆ 백제건국의 일등공신 소서노의 최후와 미스테리한 죽음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의 도움을 받아 백제를 건국한 후, 성체를 튼튼히 만들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국가를 성공적으로 운영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시기에 북쪽의 국경지대에서는 말갈족이 끊임없이 쳐들어왔고, 국경지역을 어지럽혔습니다.

 

말갈족이 자주 북쪽의 국경을 넘어서 쳐들어왔는데, 이렇게 침략을 일삼은 무도한 말갈족은 백제의 존립과 안위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지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후 8년이 되었을 무렵, 말갈족 3천명이 국경을 넘어쳐들어와 거칠게 하남위례성을 포위해서 공격했지만, 온조와 백제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잠근 채 방어에만 전념했습니다.

 

10일 동안 하남위례성의 성벽을 공략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던 말갈족은 결국 식량이 떨어져서 스스로 후퇴하게 되었는데, 이때 온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가서 말갈족의 후미를 기습공격해서 대승을 거뒀습니다.

 

그 후에도 말갈족이 북쪽국경을 넘어서 계속 쳐들어왔지만, 온조가 친히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싸워서 말갈족들을 완전히 섬멸시켜 버렸습니다.

 

백제는 원래 그 조상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왕의 성씨를 부여씨로 정했고, 자신들의 원래 시조인 동명왕을 모실 수 있는 동명사당을 세워서 동명왕을 기렸습니다.

 

그런데 백제건국을 도와줬던 온조의 모친 소서노는 그 후에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백제건국 후 삼국사기에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딱 한번만 나오는데, 매우 이상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큰 논란이 되고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온조왕 본기의 기록 - 온조왕 13년에 서울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했고, 그리고 다섯마리의 호랑이들이 성안으로 들어왔고, 갑자기 왕의 어머니가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의 그 다음 기록에 의하면, 온조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요망한 징조가 자꾸 일어나 나라가 편할 날이 없고, 나름 형세가 매우 불안하니, 도읍지를 한강 남쪽으로 천도할 것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소서노가 죽었다는 기록이 소서노에 대한 마지막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매우 이상한 내용이 나오는데, 늙은 할멈이 갑자기 남자로 변했다느니, 또한 다섯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성안으로 들어왔다느니, 상식적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기록은 실제의 일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록은 온조왕 제위 13년경 백제의 도성 안에서 무슨 큰 이변이나 대사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이 기록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백제의 도성 안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면서 갑자기 안좋은 사변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가 갑자기 사망했고, 이같은 요망한 일이 자꾸 일어나니까, 온조왕은 수도를 다른 곳으로 천도할 것을 명했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을 본격적으로 의역해 풀이해보겠습니다.

 

여기서 ‘늙은 할멈’은 왕의 어머니 즉 소서노로 풀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권력 또는 권력자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섯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에서 호랑이들은 무서운 존재들 또는 강력한 무리를 의미하므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으로 풀이해볼 수 있습니다.

 

이 기록들을 서로 연결해 종합적으로 해석해보면,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가 권력의 정점에 서서 나라의 권력을 휘어잡고 통치해나갔는데, 이 당시 아들 온조와 어머니 소서노 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온조가 어머니 소서노의 옹위세력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군사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는 살해를 당했다고 보여집니다.

 

고구려를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백제를 세울 때에도 어머니 소서노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벡제가 건국된 후, 아들 온조보다 어머니 소서노에게 더 큰 권력이 집중되고 소서노가 사실상 권력을 독점해나가자, 권력에서 소외된 아들 온조가 큰 불만을 풀었을 겁니다.

 

아들 온조는 아무리 공로가 많은 어머니이지만, 이 나라의 왕은 엄연히 자신인데, 왕권을 어머니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어머니 소서노세력을 축출할 계획을 세웠을 겁니다.

 

결국 어머니의 전횡을 더이상 볼 수 없었던 온조는 성밖에서 군사들을 끌어들여 친위쿠데타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소서노를 권력의 정점에서 끌어내려 살해했을 것이고, 온조가 다시 왕권을 되찾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어머니 소서노의 권력독점에 항거한 아들 온조의 친위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며, 그 당시 군사들간의 전투과정에서 어머니 소서노가 살해당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기록에 온조왕이 성내에서 요상한 일이 일어나니까 도읍지를 다른 곳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요. 한 국가의 수도는 그렇게 손쉽게 천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큰 위기에 처할 정도의 큰 변란이나 쿠데타가 일어났을 경우에만, 부득이하게 수도를 천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기록을 의역해보면, 수도를 천도할 정도로 국가적으로 큰 쿠데타나 군사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서노가 고구려건국에 이어 백제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백제 건국 후 소서노세력과 아들 온조세력 간의 치열한 권력암투가 일어났고,

온조왕이 군사를 동원해 소서노세력을 척결하는 과정에서 어머니 소서노가 피살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이고, 주관적인 분석일 뿐, 실제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이 기록이 매우 이상하고, 너무 특이한 표현이 담겨있어서, 최대한 당시의 상황과 가깝게 해석해 본 것입니다.

 

이 해석이 사실이라면, 소서노는 정말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비극의 여주인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몽의 부인이면서 동시에 온조의 어머니로서 두 번씩이나 나라를 건국하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던 여걸 소서노!

그런데 그토록 위대한 업적을 세웠던 여걸 소서노는 남편과 아들 등 두 남자에게 두 번씩이나 배신을 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권력은 부인이나 어머니와도 결코 나눠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소서노는 국가를 두 번이나 건국하고서도 건국 후에는 남편과 아들에게 보기좋게 토사구팽당했던 불행한 여성이기에, 그녀의 최후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깝고, 슬프기만 합니다.

 

두 개의 나라를 세웠던 위대한 여장부 소서노 최후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하고 안타깝지만, 고대시기에 고구려와 백제라고 하는 두 개의 위대한 고대국가를 건국했던 소서노의 위대한 업적은 우리역사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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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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