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 폐위사건과 이유와 복위사건, 왕비 초상화, 장희빈의 매질

역사이야기 2020. 9. 15. 23:38

 

인현왕후 폐비사건과 복위, 질투, 장희빈의 악행과 최숙빈의 폐비복원운동

 

사극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는 우리역사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며, 또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후궁으로 평가를 받고있는 장희빈은 숙종을 유혹해서 궁녀에서 왕비로 신분상승을 이룩하지만, 인현왕후와 최무수리를 핍박하고 저주한 죄로 인해 마침내 사약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오늘은 가장 인자한 왕비로 알려진 인현왕후와 사악한 요부로 알려진 장희빈을 둘러싸고 일어난 인현왕후 폐비사건과 장희빈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숙종의 사랑을 더 많이 받기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관계였는데, 사실 두여인은 그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서인세력과 남인세력의 정치싸움에 이용당한 측면이 매우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서인세력은 인현왕후를 숙종의 왕비로 천거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켜나갔고, 남인세력은 장희빈을 숙종에게 소개하면서 자신들이 정권을 잡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사실이다.

 

이와같은 서인과 남인의 정치게임에 의해서 숙종의 여인으로 발탁되었지만,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한 지아비를 사이에 놓고, 지아비의 더 많은 사랑을 받기위해서 서로 시기하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비련의 여인들이었다.

 

 장옥정(장희빈)은 역관출신인 장형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궁궐로 들어와 장렬왕후의 궁녀로 있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서 단번에 후궁의 첩지를 받았던 인물이다.

 

역사기록에도 장옥정의 미모가 상당히 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장옥정은 우리 조선시대의 후궁 중에서 가장 미모가 탁월한 인물이 아닌가 사료된다.

 

숙종실록의 기록에 보면, ‘나인으로 뽑혀서 궁중으로 들어온 장옥정은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장옥정의 빼어난 미색을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옥정의 아름다운 미모에 홀딱 반해서 그녀를 숙원으로 봉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소의, 숙원, 희빈으로 승급시켜 주면서 장옥정을 상당히 총애하였다.

 

 

그렇지만, 장옥정(장희빈)이 숙종의 눈에 띄여서 숙종의 총애를 받게되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그녀의 성품이 극악하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장옥정을 쫒아냈고, 그 후 장옥정은 6년 동안 사가에서 외롭게 지내게 된다.

 

사실 이 때에 남인과 가까웠던 장옥정(장희빈)이 궁궐에서 쫒겨났던 이유는 서인세력이었던 명성왕후와 그녀의 오라버니인 김석주가 남인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때문이었다.

 

좌측이 인현왕후의 초상화이고, 우측이 장희빈의 초상화이다. 초상화에서 보듯이 인현왕후는 후덕한 인상을 가졌고, 장희빈은 요염하면서도 표독한 인상을 지녔다

 

당시 남인과 정적관계였던 명성왕후와 서인세력이 남인의 정계진출을 막기 위해서, 남인과 가까웠던 장옥정을 내쳤던 것이다.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관계, 숙종의 사랑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과 암투

 

장옥정을 출궁시켰던 1681년도에 왕비간택령이 내려지고, 서인세력의 추천으로 민씨(인현왕후)가 숙종의 계비가 되어 궁궐로 들어오고, 왕비로 책봉된다.

 

서인세력과 남인세력간의 정치적인 세력다툼으로 궁궐에서 쫒겨난 장옥정은 6년 동안 사가에서 지내면서 커다란 원한을 품었을 것이며, 숙종이 다시 자기를 부를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절치부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1686년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가 열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첫사랑인 장옥정(장희빈)을 궁궐로 다시 입궁시켰으며

6년만에 다시 궁궐로 돌아온 장옥정은 또다시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숙원으로 봉해지면서 그녀의 위세가 기고만장해진다.

 

이렇게 다시 궁궐로 환궁한 장옥정이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되자, 당연히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현왕후와 다시 후궁이된 장희빈 사이에 숙종의 사랑을 둘러싸고, 치열한 갈등과 암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과거 여러 사극드라마에서 인현왕후가 마음이 어질고 인자한 성품을 지닌 덕망놓은 왕비로 묘사되어 왔는데, 실제로도 인현왕후가 과연 덕망 높고 인자한 성품을 지녔을까?

 

실제 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인현왕후의 실제모습은 우리가 그동안 알고있었던 후덕한 성품의 인현왕후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서 놀라움을 주고 있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장희빈을 실제로는 많이 시기하고 질투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간특한 성품을 지닌 여인이기에, 궁밖으로 쫒아내야 한다고 숙종에게 직접 간언한 적도 있었다.

 

조선 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덕망 높고 인자한 성격의 인현왕후의 모습과 많이 달라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 인현왕후의 고변, 자신의 꿈속에서 본 장희빈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이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자신의 어젯밤에 꾼 꿈 이야기를 했는데, ‘명성왕후(숙종의 모친)가 꿈에 나타나 저[인현왕후]에게 계시를 내리셨는데

장옥정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의 사주를 받고서 입궁했으니, 하루빨리 장옥정을 궁밖으로 내쫒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인현왕후는 장옥정의 팔자에는 본래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공이 없을 것이다라고 숙종에게 간언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에 기록된 부분으로서, 장희빈(장옥정)이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이를 시기한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비난하고 간언하는 내용이어서

인현왕후가 실제로는 장희빈을 상당히 많이 시기질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인현왕후의 이러한 간언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왠일인지 장희빈의 손을 들어준 것 같다.

 

당대의 미인이었다는 장희빈

 

이러한 인현왕후의 장희빈디스가 있은 후, 168810월 소의로 승격한 장희빈은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생산해냈고, 그 때까지도 아들이 없었던 숙종은 첫아들을 얻고 뛸 듯이 기뻐했다. 이 때 낳은 장희빈의 아들이 나중에 경종이 된다.

 

아들이 하나도 없었던 숙종의 첫아들을 낳아준 장옥정은 그 공로로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하였고, 장희빈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고,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장희빈이 아들을 낳지못할 것이라고 장희빈악담을 늘어놓았던 인현왕후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숙종은 더욱더 인현왕후를 찾지않게 되었다.

 

그리고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곧바로 원자로 책봉하는 교서를 내렸는데, 이에 송시열 등 서인세력이 반대를 하자크게 분노한 숙종은 송시열, 김수항 등 서인세력을 정권에서 축출하고 남인중심의 조정을 다시 부활시켰다.

 

이것이 기사환국인데, 숙종과 남인세력은 승정원과 사간원, 사헌부의 3사와 조정의 핵심요직에서 서인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남인으로 대체했는데

서인의 거두이자 인현왕후의 친척인 송시열을 제주도로 유배당한 후, 사약을 내려 사사했다.

 

이렇게 대대적인 정계개편이 일어나자, 가장 난처한 처지에 빠진 것은 인현왕후였고, 인현왕후는 아무런 백그라운드가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자신의 지지세력이었던 송시열 등의 서인세력이 대거 폭망한 상태이고, 장희빈은 원자를 낳아서 후궁 최고의 품계인 빈의 자리에까지 올라가는 등 기세등등해졌다.

 

한술 더 떠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짐승이 환생한 사람이니, 절대 아들을 낳지못할 팔자라고 말했던 그녀의 언동을 비난하면서, 그녀가 교사스럽고 간특한 부인이라며, 왕후에서 폐위시킬 것을 명했다.

 

숙종은 표면적으로는 인현왕후가 투기를 일삼고 덕이 없으니 왕후의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인현왕후를 폐위시켰지만

사실은 그동안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던 서인세력의 뿌리를 완전 뽑기 위해서, 서인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를 왕후의 자리에서 폐위시켰던 것이다.

 

1689년 서인정권의 몰락과 함께 인현왕후는 거짓을 고변하고, 왕을 조롱하고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폐서인되어서, 궁궐밖으로 쫒겨나 사가에 연금되었다.

 

인현왕후가 궁궐밖으로 쫒겨나자 마자, 장희빈은 왕비로 승격되었고, 장희빈의 아들 윤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서인과 남인의 정권투쟁과 장희빈의 원자생산으로,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여인의 위치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으며, 장희빈은 자신의 아들은 왕세자가 되고 자신은 국모의 자리에 올랐는데 반해인현왕후는 왕후의 자리에서 쫒겨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왕후에서 서인으로 강등된 인현왕후의 처참한 몰락은 숙종의 변덕스럽고 히스테릭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인세력의 지나친 권력집중화를 견제하기 위한 숙종의 정치적 고려 때문에 이뤄진 참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확히 판단한다면,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것은, 자신이 총애하고 자신의 왕자를 잉태한 장희빈을 국모로 올리기 위한 고도의 계략이었다고 판단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숙종은 자신의 아들을 잉태한 희빈 장씨를 엄청나게 총애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최숙빈 독살음모 사건과 인현왕후의 왕후 복귀

 

그런데, 4년 뒤에 또다른 대역전이 일어나게 된다.

 

인현왕후를 폐서인으로 만들고, 왕후의 자리에 올랐던 장옥정은 4년 뒤에 희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후로 복귀하는 대반전이 일어난다.

 

인현왕후는 23살에 왕비에서 폐위가 되어, 폐가에 연금되어 6년 동안 고통스러운 폐서인생활을 하게된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난 후, 한양 장안에는 아이들의 입에서 이상한 노래가 퍼져나오게 된다.

 

‘미니리는 사철인데, 장다리는 한철일세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를 이르는 말이고, ‘장다리는 장희빈을 이르는 말인데, 즉 인현왕후는 사철내내 싱싱한데, 장희빈은 한철에 꺾이고 만다는 내용의 노래가 장안에 온통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장희빈의 세상은 한철이이서 꺾이고 말지만, 곧 인현왕후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말이다.

장희빈이 곧 왕에 의해서 짤리고, 인현왕후가 다시 복귀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김만중이 쓴 사씨남정기의 대대적인 유포로 미색을 이용해서 왕을 유혹하고 왕후를 쫒아낸 장희빈의 못된 행각을 비난하는 여론이 유생들과 백성들 사이에 폭넓게 퍼져나오게 된다.

 

또한 궁궐내에서도 궁녀들 사이에 당언문이라는 문서가 나돌고 있었는데, ‘당언문에는 중전 장씨(장옥정)는 반드시 물러나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권력에서 밀려났던 서인세력에 의해서,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이 이처럼 물밑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궁궐의 한적한 궁녀의 방에서 당시의 정치지형을 완전 뒤바꿀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다.

 

한밤 중에 궁궐시찰에 나섰던 숙종은 한 궁녀의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그 방문을 열어보았다.

그 방안에는 한 궁녀가 인현왕후의 생일상을 차려놓고, 인현왕후의 생신을 기리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바로 최무수리였다.

 

그녀는 한 때 자신이 모셨던 인현왕후의 생신날이 되자, 생일상을 차려놓고 인현왕후의 생일의식을 혼자서 치르고 있었다. 이 여인이 바로 나중에 영조의 어머니가 되는 최무수리였다.

 

 이것을 본 숙종은 최무수리의 갸륵한 정성에 크게 감탄하였고, 최무수리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 숙종은 그날밤 그녀의 방에서 함께 잠을 자면서 최무수리에게 성은을 내린다.

 

이러한 최무수리의 행동이 서인세력에 의한 짜여진 각본에 의한 행동이다, 아니다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 서인세력에 속했던 최무수리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기 위해서 행했던 일종의 인현왕후 복위운동이었다고 판단된다.

 

 아뭏튼 이것이 짜여진 각본이든, 우연한 사건이든 간에, 자신이 한 때 모셨던 인현왕후를 잊지못하고, 폐서인된 옛주인의 생신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남몰래 생신축하 의식을 치렀던 최무수리의 지극한 마음씨가 너무나도 가상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최무수리는 졸지에 숙종의 성은을 입어서, 숙원의 첩지를 받고 전격 후궁으로 승격된다.

 

원자를 생산하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면서 더 이상의 정적이 없게된 장희빈의 위세는 하늘로 솟구칠만큼 대단했고 기고만장했는데,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장희빈에게 엄청난 타격을 안겨줄 대단한 연적이 출현한 것이다.

 

숙종이 장희빈 외에도 최무수리를 총애하게된 것인데, 숙종은 최무수리에게 숙빈의 첩지를 내렸고, 그녀를 총애하였다.

 

이로써, 장희빈에게는 최숙빈이라는 강력하고도 새로운 연적이 생긴 것이다.

 

장희빈의 새로운 라이벌 최숙빈의 등장으로, 장희빈과 최숙빈 사이에 숙종의 총애와 권력을 놓고, 치열한 궁중암투가 전개되어 나간다.

 

이처럼 숙종이 최숙빈을 총애하자, 이를 눈치챈 장희빈은 최숙빈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어느날 최숙빈을 불러다가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핑계로 그녀에게 심한 매질을 가했다.

 

장희빈이 최숙빈에게 심한 매질을 한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숙종은 장희빈의 태도를 크게 질타하면서, 이때부터 숙종의 마음은 장희빈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후에 최숙빈은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은밀하게 계속 전개해 나갔는데, 그녀는 자신을 총애하는 숙종에게 인현왕후에 대한 덕담을 이야기하면서, 인현왕후에 대한 숙종의 마음을 서서히 누그려 뜨려나가는데 힘썼다.

 

그리고 숙종은 최숙빈에게 또다시 숙원의 첩치를 내렸고, 최숙원은 마침내 숙종의 아들을 출산하면서, 더욱 큰 총애를 받았다. 그녀가 출산한 아들이 나중에 조선의 21대 왕으로 등극하는 영조이다.

  

1694년도에 김춘택 등 서인세력이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모의하다가, 남인세력에게 발각되어서 김춘택 등 수십명의 서인들이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당시 정권을 잡은 남인의 영수이자 우상이었던 민암은 김춘택 등 수많은 서인들을 검거하는 등 대규모 옥사를 치렀는데

이 때에 숙종은 또다시 마음의 변심을 일으켜, 갑자기 남인의 거두인 민암을 파직 처형하고, 남인세력을 모두 권력에서 축출해버렸다.

 

 그리고 숙종은 남구만, 박세채 등의 소론(서인)인물들을 등용해서 새롭게 인사개편을 단행하고, 장옥정을 왕후에서 희빈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이것을 갑술환국이라고 부르는데,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권은 다시 남인에서 서인세력에게로 넘어가게 되며, 장옥정은 왕비의 지위를 잃고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만다.

 

그런데, 숙종은 자신이 스스로 왕후로 책봉했던 장옥정을 왜 희빈으로 강등시켰던 것일까? 그리고 남인세력을 축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갑술환국이 일어나게된 이유는 장희재에 의한 최숙빈 독살음모사건 때문이었다.

 

갑술환국이 일어나기 얼마전에, 장옥정의 오라버니이자 한성 부좌윤인 장희재는 최숙빈이 아이를 회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커다란 음모를 꾸몄는데, 그것은 궁녀를 시켜 최숙빈을 독살하는 것이었다.

 

숙종의 마음이 장옥정에게 점점 식어가고, 최숙빈에게 뜨거워져가는 상황에서, 숙종의 총애를 받는 최숙빈이 왕자라도 낳게된다면, 왕후 장씨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장옥정의 오빠인 장희재는 나중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최숙빈을 독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고, 이러한 장희재의 독살음모가 서인 김춘택에게 발각되었고, 김춘택의 고변으로 숙종이 알게된 것이다.

 

장희재의 최숙빈 독살음모사건을 접한 숙종은 크게 대노했으며, 곧바로 장희재를 체포하고 남인세력을 몰아낸 후, 다시 서인의 일파인 소론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장옥정을 희빈으로 강등시킨 후, 숙종은 폐위시켰던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복원시키고, 궁궐로 환궁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인현왕후는 폐비되어서 사가에 쫓겨났다가, 6년 만에 다시 왕비로 복위되어서 궁궐로 돌아오게 되는 대반전이 일어났다. 

왕세자를 낳아 기세등등했던 장희빈은 왕후의 자리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쫓겨났던 인현왕후는 다시 왕후의 자리로 복원되는 등 엄청난 대반전이 일어났다.

 

이처럼, 인현왕후가 폐위된 지, 6년 만에 다시 왕후로 복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최숙원과 김춘택 등 서인세력이 꾸준히 추진해왔던 인현왕후 복위운동이 성공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궁궐에서 단지 물을 길어나르는 무수리였던 최숙원은 숙종의 환심을 사고 숙종의 마음을 녹이는 등 꾸준한 폐비복위운동을 전개해나간 끝에

마침내 정적인 장희빈을 왕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폐위되었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시 숙빈 최씨가 서인 김춘택과 전략을 함께 모의해서 남인정권을 무너뜨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을 보더라도 최숙빈이 정치적으로 서인측에 속해있었고,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부분이다.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사건과 인현왕후 사망

  

1701년 음력 814, 오랜 지병을 앓던 인현왕후가 사망하였다.

숙종의 명령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그녀가 궁궐로 돌아온 후, 그녀는 오랜 유폐생활로 인해 병을 얻어서 앓아누웠다.

 

그리고 숙종은 인현왕후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최숙빈에 대한 애정이 커서 인지, 그 때부터 장희빈을 찾지않았다.

숙종은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킨 후부터 단 한번도 장희빈의 처소를 찾지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현왕후는 궁궐로 돌아온지 7년만에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는데, 이 때의 그녀의 나이는 고작 35세였다.

 

 6년 동안의 유폐생활 후, 궁궐로 복귄한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보낸 궁녀들의 감시활동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 때문에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희빈이 보낸 궁녀들이 인현왕후의 침실에까지 들어와서 인현왕후의 침전에까지 자주 왕래하였고, 심지어 문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침실안을 엿보는 행동까지 했다고 한다.

 

인현왕후는 '지금 나의 병증세가 매우 이상한데, 주위사람들이 말하기를 "귀신의 저주가 있다"고 한다'고 그녀는 오빠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장희빈이 자신의 궁녀들을 인현왕후의 침전까지 보내어서 그녀를 감시하게 하고 핍박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장희빈의 과도한 도발행위 때문에, 인현왕후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인현왕후가 젊은 나이에도 이상하게 병세가 갈수록 악화된 것은 누군가가 즉, 장희빈이 그녀를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소문이 궁중안에 파다하게 나돌았다고 하며,

결국 인현왕후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원인모를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인현왕후가 젊은 나이에 의혹스러운 죽음을 당하자, 장희빈과 새로운 라이벌관계가 된 최숙빈은 숙종에게 장희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변했다.

 

 장희빈이 자신의 처소에 몰래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매일같이 벌이고 있다.

인현왕후가 죽은 것은 사실 장희빈의 저주굿 때문이라고 ~

 

즉, 장희빈이 매일같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했기 때문에, 인현왕후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원인모를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희빈의 처소인 취선당의 한쪽에 신당이 있는 것이 실제로 발견되었고, 그 신당에서 굿을 벌인 흔적도 발견되었다.

 

이와같은 여러 정황들을 발견한 숙종은 최숙빈의 고변에 동조해서 장희빈이 몰래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시해하기 위한 저주굿을 벌였다고 대신들 앞에서 발표하였다.

 인현왕후가 죽은 같은 해인 1701년 10월 숙종은 장희빈에게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로 사약을 내려서 사사했다.

 

이렇게 장희빈이 사사되자, 결국 최후의 승자의 자리는 최숙빈에게 돌아갔다.

 

사실, 숙종에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몰래 고변한 사람은 최숙빈이었고, 

최숙빈은 궁녀때부터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벌여왔으며, 후궁이 된 후에는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의심을 받고있는 장희빈을 몰락시키기 위해서 서인세력과 함께 장희빈축출운동을 벌여왔던 인물이다. 

 

즉, 장희빈이 사사된 것은 최숙빈과 서인세력의 은밀한 계획하에 성사된 것이다.

 

 그러니,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라이벌전의 최후승자는 장희빈도 인현왕후도 아닌 최숙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현왕후가 죽고난 후 장희빈이 살아있을 경우에는 세자를 낳은 장희빈의 권세가 계속 높아질 것이고,

왕자를 낳은 최숙빈은 장희빈과 세자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계속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가게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최숙빈은 세자를 등에 업은 장희빈에 의한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최숙빈의 계산과 서인들의 계산이 딱 맞아떨어져서, 결국 서인세력의 비호를 등에 업은 최숙빈은 장희빈의 저주굿을 숙종에게 밀고함으로써, 자신의 최대의 라이벌인 장희빈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즉, 인현왕후의 복귀와 장희빈의 사사는 새롭게 숙종의 후궁으로 올라선 최숙빈의 계획하에 이뤄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희빈이 죽고난 후, 장희빈의 아들 윤이 숙종의 뒤를 이어서 왕(경종)이 되지만, 몸이 매우 약했던 경종은 즉위 4년 만에 사망하고,

결국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이 새로운 왕 영조로 등극하게 되었으니, 숙종 시기에 궁궐여인들의 암투에서는 최숙빈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대한 질투와 정치적인 이해득실 때문에, 왕비에서 폐위되는 비극을 겪었고,

장희빈은 인현왕후의 복위로 인해 왕후의 자리를 상실한 후, 질투심 때문에 행한 저주굿 때문에, 왕후자리에서 쫒겨나고 사사를 당했다.

 

그리고 최숙빈은 인현왕후 복위운동의 성공으로 숙빈의 자리에 올랐고, 장희빈의 저주행위를 밀고함으로써, 연적인 장희빈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숙종시절 궁중여인들의 암투에서는 두 여인은 숙종의 총애를 받고자하는 질투심 때문에 왕후에서 폐위되고 죽음을 당했지만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최숙빈은 인현왕후 복위운동의 최대수혜를 받아서 숙원으로 승진했을 뿐 아니라, 장희빈축출에도 성공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영조)으로 만드는 등 최후의 승자가 됐다.

 

그렇지만 냉혈한인 숙종은 세 여인들을 오직 왕권강화를 위한 도구로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여자는 사랑에 울고, 남자는 권력에 웃는다는 말이 귓가를 멤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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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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