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상궁 김개시는 왕과 내연관계,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폐위이유

 

오늘은 조선 중기에 선조와 광해군의 후광을 입고, 권력의 정점에서 온갖 모략정치를 일삼으면서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상궁 김개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조선 중기시대에 음모와 모략정치의 대명사로 통하는 김개시란 인물이 있었지요. 이 김개시는 특히 광해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는 인물이었으며, 광해군이 왕이 되는데에 커다란 기여를 한 인물이랍니다.

 

광해군과 상궁 김개시의 관계를 알려면, 먼저 김개시의 정체부터 알아야 합니다. 선조와 광해군 때의 상궁이었던 김개시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김개시의 원래이름은 김개똥입니다. 그런데 사관들은 개똥이라는 이름이 좀 천박하다고 생각해서 ‘똥’자의 한자인 ‘시(屎)’로 바꿔서 좀 더 근사하게 개시(介屎)라는 이름으로 기록했습니다.

 

‘개똥’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김개시는 신분이 천한 노비의 딸이었습니다. 노비의 딸이었던 김개시는 10대 초중반경에 궁녀로 선정되어서 궁궐에 입궐했습니다.

 

그런데, 천민출신이었던 김개시는 글을 배워서 쓸 수 있었고, 한학에 매우 밝았을 뿐만아니라 아주 똑똑하고 야무졌다고 합니다.

 

천민출신이었던 김개시는 궁궐로 들어온 후, 끝이 안보이는 넓고 화려한 궁궐, 꽃처럼 화려하고 고고한 왕족들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신분상승을 꿈꿨을 것이고,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자 하는 야망을 가졌을 겁니다.

 

일개 궁녀로 입궁한 김개시가 처음으로 모시게된 인물은 바로 광해군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김개시와 광해군의 길고 질긴 인연이 시작되게 됩니다.

 

원래 궁녀는 입궁한 후 처음 모시게된 상전을 평생 모시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김개시도 자신이 처음으로 모시게된 광해군을 평생의 주군으로 생각하고 성의를 다해 모셨던 겁니다.

 

그리고 김개시는 자신이 입궁하면서 가졌던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꿈도 조금씩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592년 조선 전체를 뿌리채 뒤흔들만 대사건, 임진왜란이 터지게됩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을 통해 침략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진격해서 불과 보름만인 28일 도성 한양까지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게됩니다.

그런데, 이 때 조선왕인 선조가 경복궁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북쪽으로 피난가는 선조를 따르는 궁녀 중에 김개시가 포함되어 있었고, 김개시는 피난가는 선조를 따라서 북쪽으로 정처없이 떠나갔습니다.

 

광해군의 궁녀였던 김개시가 갑자기 선조의 파천길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당시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자 김개시는 선조를 모시는 파천길의 궁녀로 급하게 발탁되었던 겁니다.

 

눈치가 빠르고 약삭 빨랐던 김개시는 파천길에서 선조를 모시고 봉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선조는 일본군을 피해 피난가는 파천길에서 자신을 봉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김개시의 노고를 인정하고, 그녀를 일개 궁녀에서 정5품의 특별상궁으로 품계를 상승시켜줬습니다.

 

일개 궁녀에 불과했던 김개시가 임진왜란을 만나 왕 선조를 모시게됨으로써 모든 궁녀들의 꿈인 특별상궁으로 승진하게 됩니다.

 

이 당시 선조는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지만, 왕비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어서 아직 후계자를 선정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광해군은 정실의 자식이 아니라 첩실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왕의 후계자의 서열에 오르지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터지자, 선조는 적자가 아닌 광해군을 급하게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전쟁이 터졌고, 혹시라고 왕이 잘못되기라고 한다면,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조는 적자가 아닌 광해군을 급하게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비록 왕의 정실의 자식이 아니었지만,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전쟁이 갑자기 터지면서, 한때 김개시가 모셨던 광해군이 조선의 왕이 될 수 있는 세자로 우뚝 올라서게 된 것입니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전쟁 때문에, 광해군에게는 왕이 될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생겨나게된 것입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터지면서,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끝없이 피난을 갔으며, 선조는 중국땅으로로 도망갈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반면, 선조의 아들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분조를 이끌면서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민심을 수습하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아버지 선조는 북쪽으로 피난하는데에만 몰두했지만, 아들인 광해군은 한반도의 여러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을 수습했고, 군량미를 모으고 의병을 모으는 등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즉, 아버지 선조가 떨어뜨린 왕실의 권위를 아들 광해군이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겁니다.

그렇게 세자가 된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큰 두각을 나타내면서 백성들 사이에 영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만 다닌 몰지각한 왕으로 백성들에게 인식되게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왕 선조는 아들 광해군을 심하게 질투했고,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1598년 11월이 되어서야 임진왜란의 길고긴 전쟁이 끝나게됩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궁궐에서는 선조가 자신의 아들 광해군에게 날 선 행동을 하면서, 궁안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듭니다.

 

광해군이 선조에게 아침문안 인사를 올리려고 갔더니, 선조는 광해군에게 ‘너는 정식 세자가 아니라, 전쟁 때문에 임시로 세운 임시세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너는 문안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광해군의 문안인사를 받지않았다고 합니다.

 

선조는 자신은 전쟁으로 도망만 다녔기에 왕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한 반면, 아들 광해군은 민심을 수습해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기 때문에, 광해군에 대한 질투심과 자격지심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광해군을 미워했던 겁니다.

 

1602년 선조는 2년전에 죽은 의인왕후의 후임으로 새롭게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이하게됩니다.

그리고 선조는 자신의 적자를 얻기위해 수시로 인목왕후의 처소를 찾아서 관계를 갖습니다.

 

인목왕후는 선조와의 사이에 세 번의 출산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딸을 낳았고, 또한번은 사산하였으며, 그리고 또 한번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두 번째 아이를 사산한 지 4년이 지난 1606년 3월 인목왕후는 마침내 왕자를 낳았습니다.

 

이 아들은 선조와 인목왕후 정실의 아들이었기에, 세자로 책봉될 수도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39년만에 선조는 자신의 적자 영창대군을 얻었습니다.

 

이 때문에 광해군과 김개시는 인목왕후의 아들출산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잘못하면 광해군의 세자자리가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광해군은 첩실의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아버지 선조가 혹시라도 세자를 바꾸지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영창대군은 정실의 자식이고 광해군 자신은 첩실의 자식이이라는 약점이 있었는데요. 만일 아버지 선조가 세자를 영창대군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그 일은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눈치 빠른 대신들이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사이에 놓고 편가르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의정은 정실의 자식인 영창대군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영의정 유영경은 나중에 세자가 될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진하’의식을 실시할 것을 선조에게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세자 광해군이 있는 상황에서, 영창대군에게 ‘진하’의식을 행하는 것은 광해군을 후계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영창대군을 왕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이렇게 영의정을 비롯해서 몇몇대신들이 영창대군을 왕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광해군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엄청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 상궁 김개시, 모략정치로 광해군을 왕으로 만들다

 

이 때, 왕의 후계자자리를 빼앗길까봐 불안해하는 광해군에게 김개시가 접근했고,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왕의 자리에 올려주겠다고 충성맹세를 했습니다.

 

이 당시, 선조가 세자를 바꿀 뜻이 있었기 때문에, 광해군이 매우 불안해하였는데,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접근해서 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 당시 김개시는 선조의 상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개시가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돕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당시 선조는 1년 넘게 병을 앓았습니다. 그런데 김개시는 선조를 모시는 궁녀였기 때문에, 매우 불안하고 위태로운 절박감 같은 것을 느꼈을 겁니다.

 

왕이 죽으면, 그 왕을 모시는 궁녀들은 상례를 치른 후 모두 궐밖으로 출궁하는게 원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궁궐에 계속 남아서 큰 권력을 손에 쥐고 싶어했던 김개시는 선조 이후에 자신과 손을 잡을 수 있는 광해군을 적극 후원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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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김개시는 선조의 병세가 심상치않다는 것을 잘 알았고, 선조가 곧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개시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광해군쪽에 줄을 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김개시는 선조가 죽고 두 살 배기인 영창대군이 왕위를 물려받지못하도록, 광해군을 적극 후원해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겁니다.

 

즉, 김개시는 광해군을 왕위에 올려놓고 자신은 광해군을 이용해서 더 큰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온갖 시도를 다했던 것입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환심을 사기위해서 궁안의 온갖 정보를 수집해서 광해군에게 제공해주었씁니다.

궁궐생활을 오래했던 김개시는 궁궐 곳곳에 자신과 친한 궁녀들을 심어놓았고, 그런 정보망을 통해서 궁궐의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김개시는 이런 정보망을 통해서 자신이 모시던 선조의 동태는 물론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의 동태까지 모두 수집해서 광해군에게 제공해주면서, 광해군의 신임을 듬뿍 얻을 수 있었습니다.

 

김개시는 굉장히 영특하고 야무졌을 뿐만아니라 일처리를 잘해서 결국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됩니다.

 

그런 김개시는 세자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인 광해군에게 아주 든든한 아군이 되었습니다.

 

1607년 어느날 방밖으로 나오던 선조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병석에 눕게된 선조는 영의정 및 고관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였고, 그 자리에서 선조는 놀랍게도 광해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겠다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선조는 서서히 기력을 회복했고, 다시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왕위를 넘기겠다는 전위어명도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고, 선조는 정상적으로 정사를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놀랍게도 선조가 돌연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어느정도 기력을 되찾은 후, 약밥을 먹었던 선조가 갑자기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급사한 선조의 죽음을 놓고, 여러 가지 뒷말들이 훌러나왔습니다.

 

선조의 죽음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의심받았던 인물은 바로 김개시였습니다.

선조가 죽기전에 약밥을 먹었다고 하는데요. 이 약밥은 바로 김개시가 선조에게 올린 것이고, 이 약밥은 김개시가 동궁전에서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김개시가 동궁전의 광해군으로부터 약밥을 받아서 선조에게 올렸고, 이 약밥을 먹은 선조는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즉, 누군가가 선조가 먹은 약밥에 독을 넣었고, 그 독을 넣은 약밥은 김개시와 광해군이 함께 만든 음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조의 죽음과 관련해서 김개시와 광해군이 함께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조가 죽고 독살설이 흘러나왔을 때, 조정에서는 아무런 조사도 진행하지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조가 죽고난 후, 세자인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고, 이 광해군이 김개시와 함께 독살설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입니다.

국가 최고의 권력인 왕이 된 광해군을 누가 감히 조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광해군과 김개시가 선조를 독살해서 죽였다는 심증은 강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감히 조사하지 못했던 겁니다.

 

이미 국가최고의 권력자가 된 광해군과 그의 총애를 받는 김개시를 조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는 이미 대세가 광해군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광해군의 즉위를 서두르라고 독려했습니다.

 

인목대비의 입장에서는 선조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 세자인 광해군을 놔두고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인목대비는 이처럼 광해군의 즉위를 독려했떤 것입니다.

 

즉,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적을 지는 것보다는 그의 즉위를 도와서 광해군의 환심을 사서 자신과 아들의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광해군은 세자에 올라선 지 16년만에 조선 15대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광해군을 왕으로 만든 일등공신인 상궁 김개시는 광해군의 후광을 입고 국가권력의 핵심인물로 올라서게 됩니다.

 

김개시는 왕이된 광해군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상궁이 되었습니다.

김개시는 광해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선조를 독살했다는 독살설의 주인공이었지만, 그녀는 항간의 그러한 소문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광해군이 왕이 된 후, 김개시는 광해군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렸고, 광해군의 후광을 입은 그녀의 권력도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광해군은 국가의 주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김개시의 자문을 얻었고, 김개시와 국가 중대사를 협의해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국왕 광해군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김개시는 과연 얼굴이 예뻤을까요? 역사기록에는 김개시의 외모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광해군일기에는 ‘김개시는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김개시는 나이가 들었어도 별로 예쁜 외모가 아니었다고 사관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김개시가 예쁜 얼굴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김개시는 어떻게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요?

 

역사기록에는 김개시가 ‘중전의 허락을 받아 왕의 잠자리를 모실 수 있었는데, 비방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다’고 광해군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개시가 비록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광해군의 사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김개시가 광해군과 종종 동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김개시는 왕과의 동침에서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사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 김개시만의 특별한 비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특별한 비법으로 광해군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상궁이 왕과 이렇게 동침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상궁이 왕과 동침하려면 먼저 왕의 후궁이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김개시는 상궁이면서도 왕과 계속 동침을 했으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궁 김개시는 중전이나 후궁보다도 광해군과 더욱 가까운 사이였고, 광해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아마도 광해군은 자신이 세자시절 때부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자신을 보듬어주었던 김개시에 대해 강력한 신임을 갖게된 것 때문에, 그녀에게 그토록 끌리게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광해군이 왕이된 후,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자신의 후궁이 될 것을 권했지만, 김개시는 후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상궁으로 영원히 남겠다고 말했습니다.

즉, 김개시는 자신은 광해군의 후궁이 되는 것보다는 그냥 광해군의 곁에서 상궁으로 남아 권력을 계속 누리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왕의 후궁이 되면, 왕의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릴 수 있고, 자신의 가문은 왕실가문으로 승격이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개시는 왜 후궁이 아닌 상궁으로만 남겠다고 요구했던 것일까요?

 

후궁은 자유롭게 정치활동도 할 수 없고, 궁밖으로도 나갈 수 없기 때문에, 김개시는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하기위해서, 그냥 상궁으로 남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김개시는 상궁으로서 정치활동을 자유롭게 하면서도, 광해군의 총애도 계속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상궁으로 남기를 원한 것 같습니다.

 

왕이 된 광해군은 자신이 세자인 시절에 자신 대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영의정 유영경을 제일 먼저 귀양을 보내버립니다. 그리고 6개월 후 유영경에게 자살을 명해서 그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이 왕이 된 후, 궁궐에서는 여러 가지 기이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영창대군의 처소안에 있는 소주방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영창대군의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에서 귀신의 울음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고 하며, 이러한 일이 몇 달동안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주방 궁녀들은 소주방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바로 김개시의 소행이었습니다.

계축일기에는 ‘김개시는 기회를 틈타서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못했고, 그녀는 저주물을 영창대군의 처소에 걸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상궁 김개시는 눈에 가시인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여러 음모를 꾸몄으나, 죽이지는 못했고, 대신 영창대군을 저주하는 저주물을 처소에 걸었다고 합니다. 이 계축일기는 그 당시 궁궐에 살았던 한 궁녀가 쓴 기록입니다.

 

귀신이야기도 김개시가 자신이 포섭한 궁녀들을 동원해서 밤마다 영창대군의 소주방에서 귀신울음소리를 내도록 사주하고 영창대군에게 겁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김개시는 일찍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궁녀들을 뇌물을 주고 포섭해놓았는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동태를 시시각각으로 감시하게 했고, 또한 그녀들을 시켜서 귀신울음소리를 내도록 사주했던 겁니다.

 

이렇게 김개시는 자신이 포섭한 궁녀들을 이용해서 영창대군을 해치려고 시도했던 겁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거처에서 큰불이 났습니다.

다행히도 궁녀들이 잽싸게 불을 끄는 바람에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불도 사실은 김개시의 계략으로 불이 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불상사 때문에,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은 언젠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무서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단의 배후에는 바로 김개시가 있었고, 김개시는 여러 가지 모략과 음모를 꾸며서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해칠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후광을 등에 업고 점점 더 대담하게 활개를 치면서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김개시의 입장에서는, 선조의 정실부인과 적장자인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이 광해군의 가장 큰 위협세력이라고 판단하고, 그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1613년 4월, 문경새제에서 강도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문경새제에서 은을 실고가던 상인이 강도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은상강도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가장 먼저 체포된 강도 박응서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박응서가 옥 중에서 광해군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상소문에 ‘은화를 모아서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하려고 하였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는데요. 이 강도 박응서는 뜻밖에 자신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자백을 한 것이어서 조정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또한 이 박응서는 반역을 통해서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만들고, 인목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고자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같은 사실이 밝혀지자, 크게 대노한 광해군은 역모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드리고, 역모를 뿌리뽑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역모관련자들을 잡아들여서 추국이 진행되었는데, 심문을 받던 한 관련자는 역모의 수장이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이라고 밝혔습니다.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은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정했지만, 광해군은 김제남을 역모의 수괴로 인정해서 처벌을 내렸습니다.

 

사실 강도 박응서가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세우겠다는 역모는 순전히 거짓증언이었습니다. 강도 박응서는 옥에 갇힌 후,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이같은 거짓증언을 했던 것입니다.

 

강도 박응서에게 이같은 거짓증언을 사주한 사람은 바로 이이첨이었습니다.

이이첨은 광해군정권의 예조판서로 있는 인물이며, 광해군정권의 핵심인물이었습니다.

 

이이첨은 광해군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영창대군과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같은 거짓된 음모를 꾸몄던 겁니다.

 

또한 이이첨을 뒤에서 사주했던 인물이 바로 김개시였습니다.

김개시와 이이첨은 서로 광해군의 후광으로 권력을 나눠먹으면서 이같은 거짓된 흉계를 꾸며서, 광해군의 라이벌인 영창대군과 그 추종세력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역모사건으로 광해군은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드리라고 명령했고, 잡아들인 관련자들을 상대로 엄청난 고문과 추국을 가했으며, 결국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에게는 역모의 주동자라는 죄명을 씌워서 사약을 내렸고, 인목대비의 어머니는 유배를 보냈으며, 남자형제들은 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

 

인목대비의 집안이 완전 몰살당했습니다. 그리고 나이 어린 영창대군은 폐서인시킨 후,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얼마 후, 김개시는 다음내용이 적힌 편지 한 장을 광해군에게 올립니다,

그 편지에는 ‘영창대군을 잘 길러뒀다가, 명나라장수가 오면 문을 열고 고이 모셔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김개시의 설명에 따르면, 인목대비가 이 편지를 써서 영창대군쪽으로 몰래 보내려했던 밀서였는데, 김개시의 부하들에게 발각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목대비가 주도한 것으로, 명나라장수와 결탁해서 영창대군을 옥에서 빼내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김개시가 만든 가짜편지였습니다. 김개시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 가짜로 만든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가 적발된 후, 10일 후에 영창대군은 뜨거운 방에서 쪄죽는 끔찍한 일이 발생합니다.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엄청 오열했습니다.

 

광해군의 폭거는 이뿐만이 아니었지요. 광해군세력은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도 해칠 생각을 하고있었지요.

 

광해군의 오른팔인 이이첨은 신하들을 부추켜서 인목대비를 폐모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동방예의지국이었던 조선에서 어머니를 폐위시킨다는 주장에 광해군도 처음에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고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1618년 다시 폐모론이 제기되었지요. 5년이 지난 후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 대신들은 또다시 인목대비를 폐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결국 광해군은 대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인목대비를 폐모시키고, 그녀를 서궁에 유폐시켜버렸습니다.

 

그러니까, 1618년도에 광해군에 의해서 인목대비는 대비에서 폐위되었고, 서궁(덕수궁)에 유폐되어 버렸습니다.

 

광해군은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어머니를 폐하고, 자신의 동생을 죽이는 ‘폐모살제’라는 만행을 저지르는 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광해군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키는, 광해군 자신을 폭군으로 만드는 엄청난 만행이었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모살제’를 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하고 설계한 인물이 바로 ‘김개시’였습니다.

김개시는 광해군이 ‘폐모살제’를 행하도록 광해군을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희대의 요부이자 악녀였습니다.

 

광해군이 왕이 된 후, 광해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김개시는 엄청난 권력을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오른팔이자, 광해군의 측근 중의 최측근으로서, 광해군이 국가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그녀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던 실세였습니다.

 

‘연려실기술’에는 ‘‘정사를 열 때마다 김상궁(김개시)가 붓을 들어 마음대로 결정하고, 임금도 마음대로 못하였다’라고 기록될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광해군 재위 때에, 임금이 정사를 결정할 때마다 김상궁이 자기뜻 대로 결정했고, 광해군은 김상궁의 뜻에 따르고 반대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광해군 재위 때에, 김개시가 얼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개 상궁인 김개시가 자기 마음대로 나라의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겁니다. 그리고 김개시는 돈을 받고 관직을 파는 매관매직을 밥먹듯이 자행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개시가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던 것은, 광해군의 총애와 후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광해군은 김개시를 무척 신뢰하고 총애했기 때문에, 김개시가 매관매직을 하고 국정을 농락해도 그냥 눈감아주었고, 그녀의 만행을 모른 척했습니다.

 

◆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국왕에서 폐위되다!

 

김개시가 국왕 광해군의 최측근임을 아는 사람들은 금은보화와 돈을 싸들고 와 김개시에게 갇다바치면서, 벼슬자리를 청탁하는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났습니다.

김개시는 이러한 막대한 뇌물들을 챙기면서, 광해군을 구슬려서 관직을 주도록 했습니다.

 

김개시의 세도가 이렇게 막강해지자, 심지어 후궁들도 김개시에게 뇌물을 싸들고 와서 임금과의 잠자리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김개시가 광해군의 동침상대까지 결정했다고 하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후궁도 김개시에게 재물을 갖다바쳐야 광해군과 잠자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왕과 가장 가까운 후궁마저도 김개시의 결정에 따라, 왕과 동침을 할 수 있었다고 하니, 김개시의 권력과 세도가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김개시는 중전보다도 더 높은 엄청난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겁니다. 광해군 재위 때, 김개시는 한마디로 말해 국가권력의 최고의 실세였습니다.

 

그런데, 1622년 12월 일부 신하들이 광해군에게 ‘이귀와 김자점이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중요한 상소를 올렸습니다.

즉, 이귀와 김자점이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올린 건데요.

 

이귀와 김자점은 한 때 광해군 밑에서 일을 한 대신들이지만, 이 당시 그들은 정치적으로 소외된 인물이었습니다.

이귀와 김자점이 인목대비편에 서서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일부 대신들이 광해군에 고해바친 것인데요.

 

그런데, 광해군은 이러한 역모 주장에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떠도는 소문만으로 옥사를 일으킬 수 없다’라고 말하며, 무시해버렸습니다.

 

광해군은 왕이된 이후에 많은 역모 고변이 일어났고, 그 때마다 광해군은 직접 추국에 나서서 관련자들을 철저히 처벌해왔는데, 이상하게도 이번 역모 고변에는 광해군은 전혀 반응을 하지않았습니다.

 

과거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던 광해군이 이번 역모 고변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었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김개시 때문이었습니다. 이같은 역모 고변이 들어오자, 광해군은 곧바로 김개시에게 어떻게 대처할 지를 물어보았는데,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고 합니다.

 

‘가소롭습니다. 김자점은 충성스럽고 한미한 선비에 불과한데, 그가 무슨 권력이 있어서 역모를 모의한단 말입니까?’라고 역모고변을 일축했다고 합니다.

김개시의 이말을 들은 광해군은 이귀와 김자점의 역모 모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즉, 김개시는 이귀와 김자점은 충신이며, 또한 세력이 너무 약해서 결코 역모를 일으킬 위인이 못된다는 광해군에게 조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광해군에게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엄청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냥 우습게 넘겨버렸던 이귀와 김자점이 궐내의 군사들와 결탁해서, 실제로 역모를 일으켰습니다.

 

1623년 3월 11일날, 후궁들을 옆에 끼고 잔치를 즐기던 광해군이 궁궐쪽문으로 달아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됩니다.

실제로, 이귀와 김자점이 역모를 일이켰고, 그들은 군사를 일으켜서 궁궐로 쳐들어갔습니다.

 

이귀, 김류, 김자점, 이괄 등 서인세력들이 주도해서 군사를 일으켰고, 이들은 1,000여명의 군사들은 동원해서 궁궐로 쳐들어갔고, 궁궐을 장악해버렸습니다.

반란군이 궁궐로 쳐들어오자, 광해군은 내시의 등에 업혀서 도망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광해군은 궁궐에서 벗어나 민가에 숨어들었지만, 곧 군사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궁궐로 다시 잡혀들어옵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광해군은 왕에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을 보위했던 이이첨과 김개시는 반정이 일어난 바로 그날 반정세력에 의해서 처형당했습니다.

 

광해군은 왕으로 봉해진 지 15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고, 1641년 67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보에 밝았던 김개시가 사전에 반란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김개시는 모든 궁궐 곳곳에 자신의 심복들을 파견해서 수많은 정보들을 수집해왔을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었는데, 과연 그런 김개시가 역모가 일어난다는 것을 사전에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김개시가 역모가 일어날 것은 사전에 알았다고 주장합니다.

 

즉, 역모가 일어나기 직전에 역모 정보가 누설되어서, 김개시측이 반정세력들을 검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김개시는 반정세력으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해서 반정세력을 물리칠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김개시가 이귀와 김자점의 역모 모의를 눈감아주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가 김자점의 뇌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을 무척 좋아했던 김개시는 김자점의 뇌물을 많이 받았고, 그 뇌물의 영향으로 김자점의 역모 모의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던 겁니다.

 

한 때, 광해군에게 그렇게 충성을 다했던 김개시가 광해군을 폐위하려는 역모에 뇌물을 받고 눈감아줬다고 하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돈을 좋아하는 인물은 처음 봅니다. 그렇지만, 뇌물을 받고 역모를 눈감아줬던 김개시는 결국 역모가 일어난 바로 그날에, 제일 먼저 반정세력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김개시는 반정세력의 첫 번째 척결대상이었습니다.

 

반정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역모가 일어난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도 불구하고, 김개시의 조언을 믿고 전혀 대비책을 세우지않은 광해군은 결국 왕위를 빼앗기는 엄청난 낭패를 보게됩니다.

 

광해군은 자신의 권력이 안정화되었다고 너무도 방심했던 것일까요? 그는 3 개월전에 들어온 역모의 고변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던 것이 그같은 엄청난 불행을 자초하게된 것입니다.

 

- 광해군의 폐위이유 -

 

광해군은 왕이된 이후, 백성들을 동원해서 엄청난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창덕궁가 창경궁, 덕수궁, 인경궁 등을 지었는데, 이 때 동원된 백성들의 삶을 엄청 피폐화시켰고, 궁궐공사에 들어간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엄청난 원성을 샀습니다.

 

또한 광해군은 ‘폐모살제’를 일으켜서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임으로써, 선비와 사대부들의 엄청난 반발과 비판을 받았는데, 이러한 광해군의 실정과 부도덕성 때문에 그에게 실망한 서인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광해군을 폐위시켰던 겁니다.

 

참고로, 반정세력들이 역모를 일으킬 때, 광해군을 폐위시킨 폐위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광해군은 잦은 옥사를 일으켜서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

제조지은 망각 -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인 금나라를 섬겼다는 것,

폐모살제(廢母殺弟) -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모시키고 이복 동생을 죽였다는 것,

그리고 엄청난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백성들의 삶을 피폐화시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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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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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도적 임꺽정의 난, 의적인가, 도적인가, 일대기와 서림

역사이야기 2023. 7. 20. 18:09

조선의 3대 도적(실존인물) 임꺽정의 난, 의적인가, 도적인가, 임꺽정의 일대기

 

16세기 조선을 뒤흔들어놓았던 대도적 임꺽정! 임꺽정은 장길산, 홍길동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적이라고 불리우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임꺽정은 다른 도적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임꺽정은 관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여서 승리했을 뿐만아니라, 조선임금조차도 벌벌 떨게했을 정도로 한 나라를 완전 뒤짚어놓을 만큼 엄청난 전과를 이룩해놓았던 도적은 조선역사상 전무후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임꺽정은 과연 로빈훗 같은 의적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욕스러운 도적이었을까요?

 

사람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임꺽정은 의로운 일은 한 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연 역사기록에도 임꺽정을 정의로운 의적으로 기록되어있을까요?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꺽정을 의적으로 알고있지만, 실제의 기록에는 임꺽정은 백성과 관군을 대상으로 약탈과 살인, 방화 일삼았던 포악한 도적패의 수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꺽정을 의적과는 거리가 먼 포악한 도적, 반란의 수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 기록 자체가 백성이 쓴 것이 아니라, 왕과 조정대신들의 입장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왕실과 조정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기록 자체는 역사의 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의 기록을 100%로 다 맞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도 임꺽정이라는 인물을 파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임꺽정이라는 인물과 그가 일으킨 난을 사실에 입각해서 객관적으로 그려볼까 합니다.

 

과연 임꺽정은 정말로 의로운 의적인지, 아니면 포악한 도적인지의 판단과 그리고 임꺽정의 난은 어떠한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갖고있는지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려고 합니다!

 

◆ 임꺽정의 난

 

16세기 중반, 임꺽정은 황해도일대에서 도적대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던 대단히 큰 규모의 도적집단이었습니다.

 

1559년 3월, 대낮에도 임꺽정 도적패가 출현해 관군을 공격해 죽이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으면서 큰 혼란을 일으켰고, 그 소식이 조선임금(명종)에게까지 보고되면서 조선 조정은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명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황해도에 임꺽정의 도적패가 크게 일어나서, 낮에도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고 관가를 에워싸고 관가의 포졸들을 죽일 뿐아니라, 옥문을 부수고 수감된 죄수들까지 빼앗아갔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에, 16세기 중반 황해도에서 일어난 임꺽정의 난이 얼마나 크고 대단했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임꺽정의 난에 큰 위기를 느낀 조정은 곧바로 ‘도적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황해도의 수령들을 전부 무관으로 교체한 후, 임꺽정일당에 대한 토벌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이 임꺽정을 추격하다가 오히려 임꺽정 도적패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은 임꺽정이 단순한 도적패가 아니라, 국가 공권력에 도전하는 반국가 세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임꺽정의 난의 발생이유

 

‘임꺽정의 난’은 조선시대에 일어난 최초의 난이며, 조선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최대 규모의 난입니다. 또한 임꺽정의 난은 최장기간에 걸쳐서 일어난 농민들의 반란이었습니다.

 

‘임꺽정의 난’은 소상인과 수공업자, 농민 등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아서 그 규모가 확대되어나갔기 때문에, 임꺽정의 난을 단순한 도적패의 난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조직적인 농민저항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임꺽정의 난’은 황해도뿐만 아니라, 평안도, 강원도까지 그 판세가 확대되어 나갔기 때문에, 명종을 위시로한 조정에서는 정권차원에서의 커다란 위기의식을 갖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임꺽정의 난이 그 세력이 커지고 점점 확대되어 나가자, 위기를 느낀 조선조정은 임꺽정을 ‘반역의 괴수’로 선포하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게됩니다.

 

이렇게 황해도와 평안도, 강원도 등 3도를 넘나들면서 관군들을 압도할 정도로 큰 위세를 떨친 임꺽정의 난은 도대체 왜 일어났던 걸까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던 이유는 바로 조선 권세가들의 수탈과 횡포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 머리부터 나오지않고 다리부터 나오는 등 거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태어날 때, 거꾸로 나오는 걸 보고, 혹시 이 아이가 커서 나라를 뒤짚어업는 큰 일을 하지않을까 하는 주변사람들의 우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꺽정의 어머니가 세상을 올바르게 살라는 의미로 이름에 정(正)자를 넣어서 이름을 ‘임꺽정’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명종실록에 나오는 바로는 원래 이름은 ‘임거질정’인데, 편의상 임꺽정으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임꺽정의 신분은 백정이었는데, 백정은 조선시대의 하층민으로서, 주로 들판에 널린 갈대를 베어다가 그것으로 고리나 갓, 짚신 등의 생필품을 만들어 생활을 하는 천민 수공업집단이었습니다.

 

임꺽정도 갈대를 베어다가 갓과 짚신을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이렇게 양주에서 생활을 해나가던 임꺽정과 그 일행은 더 많은 갈대와 개활지가 있는 황해도 일대로 이주해갔고,

황대도 개활지에 널려있는 갈대를 가져다가 생필품을 만들어 팔면서, 그 때부터 황해도에서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황해도에는 임꺽정의 고향인 양주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갈대밭이 있었기 때문에, 임꺽정과 일행은 이 황해도 연안에 터를 잡았고, 그곳에 널려있는 갈대로 생필품을 만들면서 생활의 안정을 이루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나이 어린 명종을 대신해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섭정을 했던 시기였고, 외척세력인 윤원형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농단하면서, 권력층의 비리와 부정부패가 극심했던 시기였습니다.

 

원래 갈대밭이 무성한 개활지들은 주인없는 땅으로, 누구든지 이곳의 갈대를 가져다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 당시 새롭게 권력을 장악했던 권세가들이 농간을 부려서, 황해도의 주인없는 개활지들을 양반과 권세가들의 소유지로 귀속시켜 버렸습니다.

 

그 결과, 황대도 개활지에서 갈대를 가져다가 생필품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던 임꺽정과 그 일행은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입게되었지요.

 

원래, 주인없는 갈대밭이 졸지에 양반들의 소유지로 탈바꿈하면서, 임꺽정 등 수공업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갈대밭으로 빼앗기고 거리에 나앉게되었습니다.

 

즉, 권력층과 결탁한 권세가들이 욕심을 부려서, 서민들이 생계를 이어왔던 갈대밭을 국가공권력을 이용해 강제로 빼앗고, 자신들의 소유지로 탈바꿈시켜버린 겁니다.

 

이렇게, 포악한 권세가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하층민들은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거나, 유랑민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권세가들의 수탈 때문에, 생계의 터전을 빼앗겼던 서민들 중의 한사람이 바로 임꺽정이었습니다.

 

조선 권력층의 횡포와 수탈 때문에, 강제로 갈대밭을 빼앗기고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임꺽정일행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말도안되는 세도가들의 횡포에 대해 엄청 끓어오르는 분노의 표출과 항거가 아니었을까요?

 

이 때에 임꺽정은 자신처럼 권세가들의 횡포와 수탈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규합해서 도적집단을 만들었고,

자신은 그 도적집단의 수괴가 되어 황해도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관아와 민가의 재물을 훔치고, 약탈하는 등 난을 일으키면서, 도적활동을 시작해나갔습니다.

 

♥ 임꺽정의 신출귀몰한 도적활동과 관군의 반격

 

도적을 잘 잡기로 소문난 평안도 개성의 포도관이 포졸들을 이끌고 임꺽정을 잡기위해서 새벽에 황해도의 임꺽정무리의 본거지를 급격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포도관이 임꺽정의 반격을 받아 화살 7대를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해버렸고, 그의 부하들도 전멸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임꺽정의 명성은 조선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으며, 임꺽정은 졸지에 도적단의 우두머리에서 관리를 죽인 범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1559년경, 임꺽정의 도적집단의 규모는 엄청 커졌는데, 그의 무리는 황해도는 물론 함경도, 경기도 일대까지 진출해서 관아와 민가를 습격해서 재물을 약탈하고 방화를 일삼았으며, 심지어는 관아를 지키는 포졸들을 죽이는 등 살상도 자행했습니다.

 

이 당시 임꺽정 도적집단의 활동영역은 황해도를 비롯해 함경도와 강원도까지 이르는 등 전국구 도적집단으로 확장되었는데,

임꺽정 도적집단이 이렇게 그 세력판도가 커지게된 데에는, 그곳의 일부 아전과 백성들이 호응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지방의 일부백성들은 자신들의 등꼴을 빼먹는 포악한 탐관오리들을 임꺽정 무리가 대신 응징해주는 것에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임꺽정무리의 활동에 호응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특히, 임꺽정무리는 평안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숨어있다가, 으슥한 산길에서 값진 재물들을 싣고가는 상인들을 급습해서 귀한 물건들을 빼앗곤 했습니다.

이 때에 상인들이 빼앗긴 물건들은 상당수가 만주와 평안도에서 양반사대부들에게 비싼값에 팔려가는 값지고 귀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값진 물건들을 많이 확보하게된 임꺽정무리는 그 재물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확대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임꺽정일당이 관리를 죽이는 등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어나가자, 조선 조정에서는 본격적인 임꺽정 토벌작전에 나서게됩니다.

 

관군은 임꺽정무리를 토벌하기 위해서 황해도 봉산에 있는 그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임꺽정과 일행은 미리 그 사실을 알고서 다른 지역으로 피해버렸습니다. 이렇게 관군과 임꺽정무리 사이에 서로 쫓고 쫓기는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임꺽정 도적집단은 관군의 집요한 추격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관군에게 붙잡히지 않고 계속 그들의 조직과 전열을 유지해나갔습니다.

 

임꺽정의 난이 일어난 지, 무려 3년동안 조정에서 파견한 관군의 추격과 공격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꺽정 도적집단은 꼬리를 잡히 않고, 계속 피해나갔는데요.

 

어느날, 마을의 한 남자가 임꺽정무리의 위치를 몰래 관군에게 밀고했습니다.

 

한 부락민의 밀고로 인해서, 임꺽정 도적집단은 그들의 본거지를 관군에게 급습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임꺽정 도적집단은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간신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그 후 임꺽정 일행은 그 밀고자를 찾아내어 밀고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처형해버렸습니다.

 

이렇게 임꺽정은 자신의 존재나 위치를 관군에게 밀고한 밀고자는 가차없이 죽여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밀고자를 응징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제2의, 제3의 밀고자가 계속 속출하게 되고, 그러면 임꺽정 도적집단은 파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임꺽정 도적집단은 자신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배신자나 밀고자들에게 가차없이 보복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임꺽정은 의적인가, 도적인가?

 

임꺽정무리는 약탈의 대상을 특정하진 않았는데, 그들은 관청이나 관아는 물론 일반 민가도 습격해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만약 불복하거나 항거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살해해버렸습니다.

 

이점은 임꺽정 일행이 의적이다 라는 평가에 대해 의문점을 갖게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임꺽정 일행이 민가와 관청을 급습해서 재물을 약탈하고, 살상을 자행하는데도, 사람들은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신고하지 않았고, 지방수령도 역시 보복이 두려워서 체포하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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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이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처참히 살해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아무도 그의 무리를 신고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임꺽정이 난을 일으킨 지 3년이라는 오랜기간 동안 관군에 붙잡히지 않고, 계속 세력을 확산시킬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꺽정 집단은 원래 황해도 봉산과 구월산일대에서 활동했는데, 관군이 집요하게 공격해오는 바람에, 그들의 본거지를 평안도의 맹산지역으로 옮겼습니다.

 

임꺽정무리가 평안도 맹산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은 관군은 이번에는 맹산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관군의 도착이 또다시 한발 늦었고, 관군이 도착하기 전에 임꺽정무리는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습니다. 그리고 임꺽정무리는 곧바로 강원도 이천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렇게 임꺽정무리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신출귀몰하게 관군들의 추격을 멀찌감치 따돌렸습니다.

 

명종은 임꺽정을 잡지못한 지방관들을 가차없이 파직했고, 그리고 새로운 지방관을 파견해서 다시 임꺽정 일당을 잡도록 독려했습니다.

그렇지만, 새로 부임한 지방관들도 황해도와 평안도, 강원도를 넘나들면서 신출귀몰하게 피해다니는 임꺽정무리를 토벌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임꺽정 무리는 평소에는 상인으로 변장해서 지역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관군과 사람들의 눈을 피했는데, 이러한 임꺽정 무리의 변장술도 관군에 쉽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는 또다른 요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임꺽정은 매우 지능적이고 전략적으로 관군들을 따돌렸고, 이로 인해 임꺽정의 세력은 더욱 커졌고, 그들의 활동반경도 황해도와 평안도, 강원도 등지로 더욱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임꺽정무리가 오랫동안 관군들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임꺽정 무리는 관청과 관군, 마을 곳곳에 자신들이 파견한 밀정(정보원)을 미리 숨겨놓고 있어서, 관군의 추격정보를 사전에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이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임꺽정이 곳곳에 자신의 정보원들을 숨겨놓았기 때문에, 관군이 임꺽정의 근거지를 습격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미리 그 추격정보를 전해 듣고 다른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 임꺽정의 한양 진출과 책사 서림의 체포

 

1560년 10월 28일, 임꺽정이 이미 한양에 소굴을 만들어서 잠입해있다는 이야기가 조정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명종은 명을 내려서 도성 한양의 성문 경비를 강화하고, 한양을 다섯권역으로 나눠서 수색과 정찰을 하도록 지시했는데요.

 

그런데, 이 때에 드디어 관군은 임꺽정의 근거지를 알아낼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을 한명 찾아내는데 성공합니다.

관군은 한양에 몰래 숨어있는 임꺽정의 부하 서림을 전격 체포했습니다.

 

서림은 임꺽정집단에서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내는 임꺽정의 일급 브레인이자, 임꺽정집단의 가장 뛰어난 책사였습니다.

이 책사 서림이 한양에서 염탐활동을 하다가 관군에게 전격 체포되었습니다.

 

임꺽정의 책사 서림이 붙잡히면서, 관군은 비로서 임꺽정을 잡을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요.

 

조정은 임꺽정의 소재와 근거지를 알아내기 위해 서림을 집요하게 심문했지만, 처음에 서림은 임꺽정의 근거지를 발설하지않고 완강히 버텼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죄를 사해주고, 벼슬까지 내려주겠다고 제안하며 끈질기게 회유하자, 결국 서림은 임꺽정의 근거지와 소재지를 자백하고 말았습니다.

 

서림은 조정 수사관에게 ‘임꺽정이 이미 한양을 빠져나가서 황해도에 있다’고 제보해주었고, 또한 임꺽정일행이 26일 새 봉산군수 이흠례를 죽이기로 계획을 세웠다고 알려줬습니다.

 

이흠례는 전에 임꺽정의 부하들을 수도없이 많이 잡아넣었던 임꺽정의 숙적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흠례가 제발로 걸어들어와서 봉산군수로 부임한다고 하니, 임꺽정으로서는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흠례를 쳐부술 계획을 세웠던 겁니다.

 

이같은 정보를 전해들은 명종은 자신의 호위대장인 정수익을 임꺽정 토벌대 대장으로 임명하고, 임꺽정토벌을 명령하면서 그의 군사를 황해도로 출격시켰습니다.

 

◆ 임꺽정 도적 60 대 500명 관군의 전투와 대승

 

1560년 11월 26일, 정수익 토벌대는 총 5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황해도 봉산에 집결한 후, 곧바로 임꺽정의 근거지가 있는 평상군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토벌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임꺽정 등 7명의 도적들은 곧바로 산속 깊은 계곡으로 달아났습니다.

 

500명의 토벌군은 계곡주위를 포위한 채, 한발짝 한발짝씩 앞으로 전진하는 순간, 계곡위에서 ‘훵’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수십발의 화살이 날아왔고, 전진하는 포졸들을 하나둘씩 쓰러뜨렸습니다.

 

이날 높은 계곡위에서 매복해있던 임꺽정과 부하 60여명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토벌군들을 향해 마치 비오듯이 활을 쏘아댔습니다.

계곡위에서 한 순간에 수백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왔고, 산위를 오르던 포졸들은 화살에 맞아 추풍낙옆처럼 쓰러져갔습니다.

 

사실, 이날 근거지에 남아있었던 대원들은 임꺽정이 일부러 심어놓은 미끼였고, 이 대원들이 도망치면서 임꺽정부대가 미리 매복해있던 계곡쪽으로 토벌군들을 유인해왔던 겁니다.

 

이렇게 매복지점으로 들어온 관군들을 미리 포위 매복해있던 임꺽정 대원들이 동시에 화살세례를 퍼부었고,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았던 정수익의 토벌대원들 500명은 모두 전멸해버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전에 임꺽정이 고안해낸 계략이었으며, 관군을 유인해서 함정에 빠뜨려놓은 다음, 미리 매복해있던 대원들이 관군에게 기습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이 탁월한 임꺽정의 유인 기습공격 전략으로, 500명의 토벌대원들은 전부 전멸했다고 합니다.

 

왕의 최정예군 500명이 고작 60명의 도적패에게 처참히 패배했습니다.

 

이것도 임꺽정이 관아에 숨겨놓았던 정보원으로부터 정보를 전달받았던 것이 이같은 기습게릴라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임꺽정은 여러 곳곳에 자신의 정보원들을 숨겨놓았고, 그들로부터 서림이 체포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토벌대가 쳐들온다는 정보도 미리 알고있었던 것입니다.

 

이같이 최정예 토벌대와의 싸움에 대승을 거둔 임꺽정일행은 그 토벌대가 타고온 말을 타고서 다시 그 지역을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한낱 도적에 불과한 임꺽정이 왕이 파견한 최정예 토벌군을 전부 몰살시킬 정도로 대승을 거둔 것을 보면, 임꺽정은 단순한 도적패가 아니라, 정말 대단한 지략가이자, 뛰어난 전략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처절히 깨진 명종은 또다시 임꺽정을 토벌하기 위해서 임꺽정토벌 전담부서인 ‘순경사’를 설치하고, 잘 조련된 정예 군사들을 임꺽정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황해도와 강원도로 또다시 출정시켰습니다.

 

남치근을 대장으로 하고 서림을 책사로 함께 대대적인 정예 토벌대를 편성해서, 또다시 임꺽정이 있을 만한 황해도로 출격시켰습니다.

 

남치근 토벌대는 황해도일대에서 4개월 넘도록 수색활동을 벌였고, 특히 임꺽정소굴이 있다는 구월산일대를 샅샅이 수색해나가던 중, 임꺽정도적패의 일부 단원들이 하나둘씩 투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관군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추격과 겨울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추운 산속에서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되자, 임꺽정도적패의 단원들이 항복하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많은 수의 도적 단원들이 항복해왔습니다.

 

4개월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토벌대가 끈질기게 추격해왔고, 추운 겨울철에 산속에서 도망치면서 식량도 떨어지고 몸도 얼어붓는 등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되자, 많은 수의 임꺽정 단원들이 투항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관군은 투항한 임꺽정도적패의 단원으로부터 임꺽정이 숨어있는 산채의 위치를 알아냈고, 그 산채를 찾아내어 완전 포위해버렸습니다.

 

토벌대가 그 산채를 습격해 들어가자, 그 안에 숨어있던 임꺽정은 뒷문을 통해 재빨리 집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임꺽정은 계곡 아래에 있는 한 민가로 숨어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토벌대가 또다시 추격해서 임꺽정이 숨어있는 민가를 포위했고, 결국 그 민가에 숨어있는 임꺽정을 알아본 서림의 제보로 인해 임꺽정은 전격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체포된 임꺽정은 15일 뒤에 전격 처형되었습니다.

 

지난 3년동안 조선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은 끈질긴 저항과 도주 끝에 마침내 토벌대에 의해 체포된 후, 끔찍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명종이 보낸 500명의 정예토벌대를 전부 몰살시켰을 정도로 그토록 강했던 임꺽정 도적집단이었지만, 관군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추격과 겨울철 얼음장추위와 굶주림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와해되어버렸습니다.

 

◆ 임꺽정의 난의 의미

 

그렇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조선 권세가들의 탐욕과 수탈 때문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정답니다.

 

조선 권세가들이 주인없는 땅이었던 황해도의 갈대밭을 자신들의 땅으로 소유화하자, 그곳에서 터전을 일구면서 먹고살아가던 황해도 하층민들이 임꺽정을 중심으로 뭉쳐서 권세가들의 수탈에 항거해서 난을 일으켰던 겁니다.

 

만일 조선 권세가들이 하층민들의 땅과 생활터전을 강제로 수탈하지 않았더라면, 하층민들의 갈대밭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임꺽정의 난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꺽정의 난을 단순히 도적패의 난동이라고 볼 수는 없고, 권세가들의 탐욕과 횡포 때문에, 권세가들의 수탈에 항거하기 위해서 일어난 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도록 만든 것은 조선 권문세가들의 탐욕과 수탈이 그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이나 그 어떤 역사기록에도 임꺽정이 양반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의적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임꺽정을 로빈훗 같은 의적이라고 보기에는 다시 무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권력을 가진 왕과 조정대신들의 입장에서 쓴 기록이기 때문에, 100%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즉,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없지만, 임꺽정 일행이 자신들이 빼앗은 재물을 자기단원들에게 골고루 분배했을 것이고, 자기집단에 호응해주는 일부 백성들에게는 나눠줬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됩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는 임꺽정이 양반집이나 관아를 습격해 재물을 빼앗아서 그 재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선행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내려오고 있는데요.

 

그렇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자신들에게 칼을 겨누는 임꺽정을 미화하기 위해서, 임꺽정집단의 선행을 고의적으로 역사기록에 빼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임꺽정무리가 포악한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그들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단원들이나 일부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이야기는 비록 역사기록에는 없다고 하더라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꺽정의 난은 단순히 도적패의 난동이라기 보다는 포악한 조선 권문세가들의 횡포와 수탈에 항거해서 일어난 조선 하층민들의 민중봉기 또는 항거라고 규정할 수 있겠습니다.

 

항상 조선 권세가들의 횡포와 수탈에 억눌려지내왔던 조선 하층민들이 권세가들의 도를 넘는 노골적인 수탈행위에 더 이상 참지못하고 임꺽정을 중심으로 뭉쳐서 민중적 항거로서 일어난 것이 바로 ‘임꺽정의 난’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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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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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여황제 측천무후의 업적과 죽음, 3000명의 남총을 거느린 측천무후의 남성편력

 

중국역사에서 유일한 여황제가 한 명 있었는데, 바로 측천무후가 그 주인공입니다.

 

측천무후는 400명이나 되는 중국황제 중에서 유일한 여황제로서, 중국을 태평성대로 이끈 위대한 통치자라고 알려져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친아들마저 죽이고 여황제로 등극한 사악한 통치자라는 두가지의 서로 다른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오늘은 중국역사상 가장 잔혹한 황실역사의 주인공이자, 희대의 악녀라고 평가받는 측천무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혹자는 측천무후, 서태후, 여태후를 중국의 '3대 악녀'라고 부르는데, 이 세명의 악녀 중에서도 특히 측천무후의 잔인성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정말 대단한 악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욕망이 강했던 여태후와 서태후도 자신의 아들만큼은 죽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측천무후는 권력 획득을 위해서 자신의 친아들마저도 죽였을 정도로 그녀의 잔악성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이렇게 중국역사상 희대의 악녀라고 불리우는 측천무후이지만, 군주로 올라선 다음에는 관리를 공평하게 등용하고 비교적 통치를 잘해서 민생을 안정화시켰다는 긍정적인 업적도 갖고있는 정말 상반된 두 얼굴을 갖고있는 중국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측천무후는 중국역사상 가장 음탕한 요부라는 평가를 받고있는데, 그녀는 여황제가 되고난 다음에 수천명의 남총들을 궁궐로 끌여들여서 매일밤마다 후안무치의 향략을 즐겼으며,

자신의 하룻밤 쾌락을 위해 수많은 젊은 남성들을 희생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던 인물입니다.

 

희대의 음탕하고도 사악한 요부, 그리고 민생을 안정시킨 위대한 군주라는 두가지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고있는 여황제 측천무후의 구체적인 생애를 살펴보도록 하겠어요!

 

측천무후의 원래 이름은 ‘무조’인데, 무조는 636년 당나라 태종시절에 14살의 어린 나이로 궁궐에 입궁해서 태종의 궁녀로 생활을 시작하게됩니다.

 

측천무후의 원래 이름은 ‘무조’인데, 무조 즉 측천무후는 궁궐에 처음 들어갔을 때, 후궁중에서도 낮은 품계인 정 5품의 ‘재인’으로 봉해졌지요.

후궁 중에서도 품계가 낮은 측천무후였지만, 그녀의 미모만큼은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은 무조(측천무후)를 ‘무미랑’이라고 불렀는데, ‘무미랑’은 귀엽고 예쁜 낭자라는 뜻이었답니다.

 

이렇게 측천무후는 미모는 매우 빼어났지만, 아직 당 태종으로부터 인정을 받지못해서 하위직 후궁으로 일하고 있었는데요.

 

측천무후의 성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날 태종이 궁원으로 산책하러 나왔다가 말 한 마리를 보러갑니다.

이 말은 외국의 사신이 당 태종에게 조공으로 바친 말이었는데, 이 말이 어찌나 거칠고 사나운 지, 전혀 길들이지못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태종을 수행하면서 함께 그 궁원에 나왔던 무조(측천무후)와 태종이 이 사나운 말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게됩니다.

태종이 ‘이 말이 너무도 사나워서 어떻게 길들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자, 무조(측천무후)가 나서서 한마디 하게됩니다.

 

무조(측천무후)는 ‘이 말이 사람 말을 안 들으면, 먼저 철채찍으로 때려서 말을 듣게하고, 그래도 사람 말을 안 들으면, 철몽둥이로 때려서 말을 듣게하면 되고, 그래도 사람 말을 안 들으면 철칼로 찔러서 죽여버리면 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 말은 쓸모없는 말이기 때문이지요’라고 태종에게 말을 했습니다.

 

이 당시 무조(측천무후)는 나이 14살 밖에 되지않았는데 불구하고, 이 정도로 잔인한 말을 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잔인하고 비정한 성격을 가졌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무조가 후궁에서 황후로, 황후에서 여황제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때 이미 무조(측천무후)의 잔혹한 성정의 일단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 태종은 이 때 무조(측천무후)의 당돌하고도 잔인한 기질에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또한 별자리를 보면서 나라의 운세를 점치는 직무를 수행하는 태사령이 태종에게 무조의 관상이 장차 나라를 뒤짚어버리는 역모의 상이 강하다고 간하면서 그녀를 경계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즉, 태사령은 태종에게 무조(측천무후)를 후궁으로 삼을 경우, 장차 무씨에 의해 역모가 일어나서 후손들이 큰 화를 당할 뿐만아니라, 황실의 대가 끊어지게될 것이라고 조언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태사령의 예측은 태종이 죽고난 후, 그대로 적중하고 말았으니, 그의 미래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실로 놀라울 뿐입니다. 나중에 무조(측천무후)에 의해서 태종의 후손들이 황위에서 쫒겨나는 역성혁명이 실제로 발생하게 됩니다.

 

태사령의 이같은 말은 들은 태종은 그 때부터 무조(측천무후)를 멀리하게 되며, 그녀에게 황실 서가를 관리하는 관리직책을 주어서 일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무조(측천무후)가 경국지색의 빼어난 미모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태종의 승은을 얻지도 못했고, 태종의 자식도 출산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 측천무후, 당 고종의 후궁이 되면서 권력을 잡다

 

그렇지만, 권력의 욕심이 대단했던 무조(측천무후)는 장차 자신이 권력의 정점에 오를날을 학수고대하면서, 자기 특유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나갔습니다.

 

비록 무조(측천무후)가 태종의 승은은 얻지못했지만, 태종의 아들 고종에게 접근해서 온갖 교태와 간교를 다 부리면서 고종의 마음을 완전 사로잡아버렸습니다.

 

태종이 병을 얻어 병석에 눕게되면서, 무조(측천무후)는 태종의 병간호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태종의 병문안을 왔던 고종의 눈에 매혹적인 용모를 가진 무조가 들어왔고, 무조를 처음 본 고종은 첫눈에 그녀의 미모에 홀딱 반하게 됩니다.

 

그리고 태종이 죽고난 후, 고종은 첫눈에 반한 무조(측천무후)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고 싶었지만, 왕이 죽으면 그 왕을 모시던 후궁들은 모두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법도이었기 때문에,

무조(측천무후)도 황실의 법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조(측천무후)가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그녀를 잊지못해 수시로 절로 그녀를 찾아가서 무조(측천무후)와 사통을 나눴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종의 이러한 행위는 나중에 자신의 황가를 뒤엎어버리고 아들들을 희생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못한 정말 어리석은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후, 몇 년 동안 비구니로 지내온 무조(측천무후)에게 다시 황실로 복귀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오게됩니다.

 

고종이 절에 있는 무조(측천무후)를 총애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왕황후는 통크게 무조를 궁궐로 입궁시키는 조치를 취합니다.

고종의 정비인 왕황후는 당시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소숙비를 견제할 목적으로, 일부러 또다른 후궁 즉 무조(측천무후)를 입궁시켜서, 두 후궁사이에 암투가 벌어지도록 간교를 꾸몄던 겁니다.

 

그러자, 고종은 뛸 듯이 기뻐했고, 즉시 무조를 궁궐로 불러들여서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왕황후는 자신이 아들을 낳지못했기 때문에, 소숙비의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을 막기위해서, 일부러 소숙비의 정적이 될 수 있는 무조를 입궁시켰던 겁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왕황후의 조치는 나중에 엄청난 재앙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을 이 때만 해도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궁궐로 다시 복귀한 무조(측천무후)는 소의의 첩지를 받고 그 때부터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고종과 소숙비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고종과 왕황후의 사이도 멀어지게 만들었답니다.

 

왕황후의 입장에서는, 순한 토끼인줄 알고 궁궐로 불러들인 무조가 사실은 발톱을 숨기고있었던 매우 사나운 호랑이였던 겁니다.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게된 무조(측천무후)는 이 때부터 점차 본색을 드러내면서 교활한 술수를 부려서 자신의 경쟁자인 왕황후와 소숙비를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나가게됩니다.

 

무조(측천무후)는 고종의 후궁이 된 후, 자신이 황후가 되고자하는 야망을 갖고있었습니다. 무조(측천무후)가 황후가 되기위해서는 그녀의 최대의 라이벌인 왕황후를 어떻게든 제거해야만 했는데요.

 

무조(측천무후)는 왕황후를 제거하기 위해서 남들은 상상하지못한 아주 기상천외한 계략을 꾸미게됩니다.

무조(측천무후)는 고종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낳았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딸을 이용해서 왕황후를 끌어내리려고 계략을 꾸몄습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이 딸을 낳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별궁으로 왕황후를 초청했고, 왕황후는 그녀의 출산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측천무후의 별궁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왕황후가 돌아간 직후, 자신의 별궁으로 고종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고종이 오기 전에 자신의 친딸을 목졸라 죽였습니다.

 

측천무후가 자신이 낳은 친딸을 죽이고난 후, 곧바로 고종이 들어왔고, 이 때에 측천무후는 자신의 숨진 딸을 고종에게 보여주면서, 왕황후가 다녀간 후 자신의 친딸이 숨졌다고 간하면서, 자신의 딸 살해범으로 왕황후를 지목했습니다.

 

즉, 측천무후는 자신의 최대의 라이벌인 왕황후를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이 낳은 친딸을 죽였고, 그리고 왕황후를 딸 살해범으로 누명을 씌웠던 겁니다.

정말 측천무후는 남들이 결코 생각할 수도 없는 기상천외하면서 사악한 계략을 꾸몄는데, 그것은 자신의 친딸을 스스로 죽인 것입니다.

 

측천무후가 자신의 죽은 딸을 부웅켜 안고서, 왕황후가 친딸을 죽였다고 말하면서 자신 앞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모습을 본 고종은 그녀의 말을 믿지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측천무후의 이 황당한 연기를 고지 곳대로 믿은 고종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었고, 왕황후를 살인죄로 처벌하게 되는데요.

측천무후는 자신이 스스로 친딸을 죽인 후, 그곳을 방문한 왕황후에게 죄를 뒤짚어씌워서 왕황후를 딸 살해범으로 누명을 씌우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자신이 황후자리를 독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친딸을 죽이다니! 정말 측천무후가 얼마나 잔인하고 표독스러운 인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측천무후의 연기에 속은 고종은 왕황후를 폐위시켜서 감옥에 가둬버리고, 곧바로 측천무후를 황후에 봉합니다.

이때 측천무후의 간계에 넘어간 고종은 소숙비마저도 왕황후의 공범으로 몰아서 폐위시켜 버렸습니다.

 

이렇게 교활한 술수를 부려서 두명의 라이벌들을 완벽하게 제거한 측천무후는 655년도에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됩니다.

원래 측천무후의 직위는 소의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측천무후의 품계는 수직상승해서 곧바로 황후로 봉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황후가된 후, 궁궐에는 온통 피바람이 불게됩니다. 측천무후는 황후가 된 후, 자신의 앞길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될 만한 장애물들은 거침없이 제거해나갑니다.

 

측천무후는 고종에게 간해서 왕황후와 소숙비에 대한 처분권을 백지위임받았고, 감옥에 갇혀있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끌어내 곤장 백 대씩 때리게 했고,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한 그녀들을 술독에 담가버렸고, 왕황후와 소숙비는 며칠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죽어갔습니다.

 

측천무후의 라이벌이었던 왕황후와 소숙비는 자신이 하지도않은 죄를 뒤짚어쓴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측천무후의 두 번째 목표는 기존에 있던 태자를 페위하고 자신이 낳은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기존에 고종과 다른 후궁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황태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측천무후는 평소에 뇌물을 많이 써서 여러 대신들과 환관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신들과 환관들을 조종해서 고종에서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상소를 올리게 했습니다.

측천무후가 황후가 되었으니, 측천무후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는 것이 법도에 맞다는 주장을 펼치도록 했던 것입니다.

 

결국, 측천무후의 계획대로 그녀의 아들 이홍이 태자의 자리에 오르게됩니다. 그리고 쫒겨난 태자는 측천무후가 보낸 자객에 의해서 암살을 당했습니다.

 

정치적 식견과 역량이 대단했던 측천무후는 점차 정사에 간여하기 시작했고, 측천무후는 자신의 앞날에 방해가 될만한 대신들을 차례로 제거해나갔습니다.

측천무후는 고종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무기와 그의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켰습니다.

 

또한 측천무후는 자신의 반대편에 서있던 대신들을 대역죄를 꾸미려했다는 거짓 누명을 뒤짚어씌워서 모두 처형해버렸습니다.

황태자 자리에 오른 측천무후의 아들 이홍은 고종의 총애를 받았을 뿐만아니라, 대신들로부터도 신임을 두텁게 받고있어서, 황제가 되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고종은 병이 위독한 상태이어서, 고종이 자신의 황위를 맏아들 이홍에게 물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차기 황위 계승이 유력했던 이홍이 궁궐에서 고종과 측천무후와 함께 식사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원인모를 병으로 경련을 일으키면서 죽고말았습니다. 이 때 장남 이홍의 나이 고작 24살이었습니다.

 

소숙비의 두 딸이 유폐되어 40살이 넘도록 시집을 못가고 있자, 측천무후의 장남 이홍은 그녀들을 불쌍히 여겨서 시집갈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었는데, 이것을 못마땅히 여긴 측천무후가 이홍의 밥에 독약을 넣어 독살시켰다고 합니다.

 

장남 이홍은 측천무후의 심기를 잘 못 건드렸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게되었습니다.

이홍이 죽고난 후, 측천무후의 둘째아들인 이현을 황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런데 황태자가 된 두 번째 아들 이현(李賢)은 여색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고, 어머니의 잔인한 숙청작업에 불만을 표기하곤 했습니다.

이 때문에 측천무후의 심기를 자극했고, 측천무후는 이현(李賢)을 태자간 된 지 5년만에 반역죄로 몰아서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2,300리 떨어진 머나먼 파주로 유배보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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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배지에서 둘째아들 이현(李賢)은 ‘황대과사’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의 내용이 측천무후의 귀에 들어갔고, 자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시라고 판단한 측천무후는 사신을 유배지로 보내서 이현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살하도록 유도했고, 결국 그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둘째아들이 죽고난 후, 측천무후는 셋째아들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책봉했는데요.

셋째아들 이현(李顯)은 형들과 달리 매우 유약한 성격을 가진 아들이었고, 어머니 측천무후의 말에 잘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683년 고종이 56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셋째아들 이현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황제에 올랐고 그가 바로 중종입니다.

고종이 죽고난 후, 심약한 아들을 허수아비황제로 삼은 측천무후는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모든 정사를 자신의 뜻대로 펼쳐나갔습니다.

 

이 때부터 측천무후는 서서히 자신의 대권을 향한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측천무후의 세 번째 목표는 자신이 직접 여황제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셋째아들 이현(李顯)은 황제가 되면서 마음이 돌변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장악한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고 싶어했습니다.

 

이때 중종 이현은 장인인 위현정을 재상으로 임명하려 했으며, 이 때에 이현의 처인 황후 위씨와 그녀의 아버지 위현정이 중종의 황권강화를 위해서 모의하는 것을 눈치 챈 측천무후는 셋째아들 이현(李顯)을 국정을 농단한다는 이유로 전격 폐위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자신의 넷째아들 이단을 대신 황제로 책봉했는데, 그가 바로 예종입니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책봉한 막내아들 이단 또한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습니다.

측천무후는 이단 즉 예종을 황제로 책봉했지만, 그를 궁궐 안에 가둬놓고 다른 대신들을 일체 만나지 못하도록 외부와의 교류를 일체 차단시켰습니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된 막내아들 이단을 사실상 감금시켜버렸던 것이며, 막내아들 이단은 황제로서 그 어떤 권력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측천무후가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면서 자신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좌지우지해나가자, 그녀의 전횡에 반대하는 지방호족세력들이 저항하면서, 군사반란까지 일어났습니다.

 

684년 양주의 이세적의 손자 서경업이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장안으로 진군했는데, 측천무후는 즉시 30만의 군사를 모아서 진압군을 파견했고, 진압군의 공격으로 서경업의 반란은 40일만에 평정되었습니다.

 

◆ 측천무후, 여황제로 등극

 

반대파의 반란을 모두 진압하면서 실권을 욺켜잡은 측천무후는 자신을 반대하는 공신들을 모두 역모를 일으켰다는 거짓 죄명을 씌워서 대대적으로 숙청해버렸습니다.

이렇게 반대파 공신들을 모두 제거한 측천무후는 그들이 사라진 빈자리에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측근들을 대신 채워넣어서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로써, 자신의 황제즉위에 걸림돌이 될만한 장애물들을 모두 제거한 측천무후는 690년, 막내아들 예종으로부터 황위를 넘겨받아서 67세의 나이에 여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나라이름을 ‘주’로 고치고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갔는데, 이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여황제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며, 나라이름도 당에서 주로 바뀝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친아들 네명을 죽이거나, 제거해버렸습니다.

측천무후는 결국 여황제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 두명은 죽여버리고, 나머지 두명의 아들은 권좌에서 축출해버렸던 겁니다.

 

자신의 권력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친아들들까지 희생시켰을 정도이니, 그녀의 권력욕심과 탐욕이 얼마나 대단한 여성이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관리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혹리라는 비밀감시제도를 만들었고, 남들의 비리를 먼저 고발하는 사람에게 승진의 기회를 주는 등 관리들 사이에 충성경쟁을 유도하고, 서로 밀고하게 하는 악랄한 통제정치를 실시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밀고'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관리들이 경쟁적으로 서로를 밀고하게 하고, 서로 감시하게 만듦으로서, 자신의 반대파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가는 등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켜나갔습니다.

측천무후는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무소불위의 철권통치를 해나갔지만, 백성들에 대한 통치는 비교적 잘 해서 민생을 크게 안정시켰습니다.

 

측천무후는 과거제도를 확대 시행하면서 문벌귀족집단이 고위직을 독점해오던 폐단을 없애고 널리 인재를 고르게 등용했고, 일원적인 통치시스템 구축과 사회안정을 이룩해나갔습니다.

 

또한 측천무후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기위해 ‘진실의 함’이라는 투고함을 만들어 운영하는 등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쳐나갔습니다.

이 시기에 측천무후는 민생회복과 생산력 강화를 국정운영의 기본틀로 삼고, 백성을 위한 통치를 해나갔으며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일을 잘하는 관리와 일을 못하는 관리를 확실히 구분짓고, 잘하는 관리에겐 인센티브를 주고, 잘못하는 관리는 직책에서 퇴출시키는 등 공정하고 적법한 인사관리를 해나가는데 힘썼습니다.

 

그녀는 적인걸, 장간지 같은 명재상들을 등용해서 민생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 태평성대를 이룩해나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측천무후가 백성을 잘 돌보고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것은 그 당시의 인구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고종 652년에 나라의 총 가구수가 385만호인데 반해,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어 통치하는 시기인 705년도의 총 가구수는 600만호로 거의 두배 정도 인구가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인구수가 크게 증가한 것은 측천무후가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고,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측천무후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칼바람을 일으키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축출해나가는 비정함과 잔인함을 보여주었지만,

그녀는 뛰어난 통치술을 발휘해서 백성들의 민생을 안정화시키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보살피는 등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측천무후의 최후, 죽음

 

67세의 늦은 나이에 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많이 썼는데, 여성에게 좋다고 알려진 익모초를 즐겨먹었는데, 익모초는 노화를 방지해주고 항암효과가 좋으며, 피부질환에 효능이 좋은 약초라고 합니다.

또한 측천무후는 건강을 위해 도교의 양생술 수련도 많이 했으며, 특히 불로장생을 위해서 젊은 남자들을 데려와 합궁을 했습니다.

 

원래 도교의 양생술에는 젊은 남자들을 가까이 두고 성생활을 하면, 젊은 남자의 양기를 받아 젊음을 회복하거나,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측천무후는 ‘공학감’이라는 관청을 두어서 전국의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모아서 궁궐로 데려왔는데,

이렇게 선발된 잘생긴 남성들을 ‘남총’이라고 불렀으며, 이렇게 그녀를 밤에 시중들기 위해 끌어들인 남총의 수는 무려 3,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불로장생과 쾌락을 위해서 이들 수많은 남총들을 자신의 침소로 데려와서 밤마다 남자들을 번갈아 바꿔가면서, 매일같이 뜨거운 정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특히 측천무후가 매우 총애했던 남총은 그녀가 73세에 만났던 장씨 형제들이었는데,

장씨 형제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매우 잘생겼을 뿐만아니라, 재주도 뛰어나고 능력도 좋았으며, 피리를 잘 불어서 측천무후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측천무후는 장씨형제를 매우 총애해서 자신의 침실수발을 들게 했을 뿐만아니라, 높은 벼슬과 특권을 주어서 자신을 옆에서 보좌하게 했습니다.

측천무후 재위기간 그녀의 총애를 듬뿍 받았던 장씨형제가 최고의 실세가 되어 엄청난 위세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재위 후반기에 측천무후가 남총에 너무 깊이 빠지면서 그녀의 지지세력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그녀의 권력기반에 누수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총애를 받던 장씨형제들이 측천무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남용하면서, 국정을 독점해나갔습니다.

 

측천무후가 연로해지면서 정사를 점점 멀리했고, 대신 장씨형제에게 정사를 위임했습니다. 이렇게 측천무후가 정사를 돌보지않고 대신 장씨형제가 국정을 독점해나가자, 정사에서 소외된 기존 원로대신들의 불만이 팽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측천무후가 건강이 악화돼 병석에 눕고 장씨형제의 국정농단이 더욱 심각해지자, 평소에 측천무후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있던 대신들이 드디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705년 측천무후가 황제가 된 지 15년째가 되던 해에, 측천무후가 여황제에서 퇴출되는 대사변이 일어나게됩니다.

 

705년, 측천무후가 건강이 악화되어 병상에 눕게되자, 재상 장간지가 군사를 모아 측천무후의 두 아들을 앞세워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궁궐로 침입해들어왔습니다.

이 때 쿠데타군에 동조했던 왕자는 측천무후의 셋째아들 이현(중종)과 이단(예종)이었고, 그들은 측천무후에게 버림을 받고 황제의 자리에서 쫒겨났던 아들이었습니다.

 

쿠데타군이 군사정변을 일으킨 명분은 간악한 장씨형제가 역모를 일으키려하니 이를 진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쿠데타군은 궁궐로 처들어와서 제일 먼저 장씨형제를 죽이고 그 시신을 궐문 앞에 효시했습니다.

 

또한 쿠데타를 일으킨 재상 장간지는 측천무후를 압박해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할 것을 요구했고,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를 셋째아들 이현에게 물려주면서 스스로 퇴위해버렸습니다.

 

이 때 쿠데타군은 측천무후를 권좌에서 퇴위시켜버렸지만, 그녀가 새로이 등극한 황제 이현(중종)의 친어머니이기 때문에, 처벌하지는 않았고, 대신 그녀에게 실권이 없는 태상황제의 직위를 부여해서 별궁에서 편안히 살도록 허용했습니다.

아무리 측천무후를 황제의 자리에서 쫒아버렸다고 해도, 황제의 친어머니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측천무후가 폐위되고 아들 이현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주나라에서 다시 당나라로 복원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측천무후는 아들과 딸을 모아놓고 몇가지 유언을 남긴 체,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숨을 거뒀습니다.

 

이 때 측천무후가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가문인 무씨가문을 잘 돌봐달라는 것과, 자신의 손에 죽은 폐황후 왕씨와 소숙비 일가를 사면 복권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앞으로 자신을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해줄 것과 자신의 묘비명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말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왜 자신의 묘비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을까요? 그 이유는 측천무후는 자신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 내리지않고, 훗날 후대사람들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여집니다.

 

즉, 측천무후는 자신의 업적은 후대의 지식인들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평가해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명의 딸과 두명의 아들을 죽이고, 두명의 또다른 아들들을 유배시키는 등 잔인하고 패륜적인 행동을 행했던 사악한 요부 측천무후는 8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두가지의 서로 상반된 평가를 함께 받는 황제인데요,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친자식까지 죽은 천하의 사악한 요부라는 평가와 함께, 정사를 잘 돌보아서 민생을 안정화시키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위대한 여황제라는 평가가 그것이지요.

 

측천무후가 비록 민생을 안정시키고 여러가지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황제가 되기 위해서 너무도 많은 대신들의 피를 희생제물로 삼았을 뿐만아니라,

친자식마저 희생시키는 등 잔인하고 패륜적인 행동을 일삼았다는 점 때문에, 후대의 사가들은 그녀를 위대한 여황제보다는 사악한 악녀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측천무후는 한나라의 여태후, 청나라의 서태후와 함께 ‘중국의 3대 악녀’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인구를 두배 정도 늘렸을 정도로 풍요로운 나라를 만드는 등 통치를 비교적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강화를 위해서 수많은 악행들을 저질렀던 측천무후였기 때문에,

‘성군’이라는 명예를 얻지못하고 중국의 영원한 ‘3대 악녀’라고 불리울 수 밖에 없었던 측천무후의 파란만장한 일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중국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초의 여황제로 군림한 측천무후를 성군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사악한 악녀라고 생각하시나요?

 

소문내기 활동을 하면서 해당 광고업체로부터 경제적 대가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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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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