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의 중국통일과 업적, 불로초, 사망이유, 어머니 조태후와 노애의 불륜
진나라 -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7년
진시황제 -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6월 14일
기원전 221년 중국의 서쪽 변방에 있는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서는 역사상 가장 뜻깊은 대관식이 열렸는데, 바로 진시황제가 황제로 등극하는 대관식이었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최초의 통일군주라는 커다란 업적을 쌓았던 인물이며, 중국인들이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명으로 존경하는 황제이다.
젊고 야심만만했던 이 40세의 젊은이는 주나라 때 분열된 중국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통일군주로서의 위업을 쌓았고, 중국역사상 최초로 ‘황제’칭호를 사용한 인물이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하는 위대한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잔혹한 독재자로, 망상에 사로잡힌 광기어린 군주라는 오명도 함께 받고있는 인물이다.
진시황제는 왜 중국통일이라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독재자,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게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의 실체와 업적에 대해서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영정(진시황)이 나이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 제태후는 여불위를 승상에 임명해서 그로 하여금 전권을 휘두르게 하였는데,
승상 여불위는 영정(진시황)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 여불위가 나이 어린 영정(진시황)의 섭정을 맡아서 진나라의 최고 실세로서 자기맘대로 전권을 휘둘렀다.
이 여불위는 영정(진시황)의 어머니 조태후와 사실상 연인관계로 두사람은 영정(진시황) 몰래 만나서 두사람만의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고 있었다.
◆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태후와 여불위의 관계, 또다른 연인 노애
원래 영정(진시황)의 어머니 조희(조태후)는 몰락한 호족가문의 여인으로 태어났고, 본래 여불위의 애첩이었는데,
권력에 눈이 멀었던 여불위는 자신의 애첩 조희를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에게 상납하였고,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과 여불위의 애첩 조희가 관계를 맺어 낳은 아들이 영정(진시황)인 것이다.
그러니, 원래 여불위의 애첩이었던 조희(조태후)는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당연스럽게 태후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옛주인인 여불위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벼슬인 재상으로 임명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또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진시황제의 실제 아버지는 장양왕이 아니라 여불위라는 주장이 있다.
여불위가 자신의 애첩 조희를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에게 상납했는데, 그 이전에 조희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녀가 장양왕에게 시집을 가고난 후, 영정(진시황)을 낳았기 때문에, 진시황의 진짜 아버지는 장양왕이 아니라 여불위라는 것이다.
아뭏튼 여불위는 승상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궁궐에서 몰래 진시황의 어머니 조희와 지속적으로 정분을 나누었다.
그렇지만, 승상 여불위는 자신과 조태후의 관계를 많은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진시황제에 들키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희는 미색이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어서 그런지, 욕정 또한 매우 강했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에는 '시황제가 성인이된 후에도 어머니 조태후는 음탕함을 그치지않았고, 남몰래 근육질의 환관 노애를 자신의 정부로 삼아서 상간을 일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승상 여불위는 진시황제에게 들킬까봐 두려워서, 조희와의 관계를 끊고 자기 대신에 조희의 욕정을 만족시켜줄 다른 남자를 그녀에게 소개시켜줬는데, 그 남자가 바로 환관 노애였다.
그런데, 그것은 탐욕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권력의 세계에서 언제 터질지모르는 위험한 시한폭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희는 환관 노애와 궁궐에서 몰래 만나 서로 정을 통하였고, 두사람의 관계는 급기야 서로 뗄레야 뗄수 없는 내연관계로 발전했다.
그리고 조희와 환관 노애는 급기야 두명의 아들까지 낳고는 두사람은 함께 오랫동안 동거를 했다.
이제 환관 노애는 더 이상 진시황제에게 머리를 굽신거리는 환관이 아니었고,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희의 엄청난 총애를 받는 노애는 더 큰 권력을 꿈꾸게 되었다.
환관 노애는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희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을 야망을 갖고있었고,
급기야 노애는 군사 3,000명을 모아서 진시황을 갈아치울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같은 노애의 음모를 사전에 알아차린 진시황제는 여불위와 함께 먼저 군사를 일으켜서 환관 노애를 공격했고, 진시황제 친위군의 선제 군사공격을 받은 환관 노애는 결국 전투 끝에 체포되고 말았다.
환관 노애의 쿠데타를 진압한 진시황제는 쿠데타의 주역인 환관 노애와 그의 두아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자신의 어머니 조태후마저 태후의 지위를 박탈하고 가택에 감금시켜 버렸다.
그리고 장차 자신의 권력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승상 여불위 또한 함께 제거해버림으로써, 자신의 황권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승상 여불위는 진시황제의 명에 의해서 사천으로 유배를 갔는데, 유배가는 길목에서 진시황제가 내린 독주를 마시고 사망하고 만다.
즉, 진시황제는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 자신의 친아버지일 수도 있는 여불위를 냉혹하게 살해해버린 것이며, 권력은 아버지와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실천한 것이다.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고, 진나라 최고의 실권자인 여불위 제거에도 성공한 22살의 왕 진시황제는 이제는 그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군주로 올라서게 된다.
◆ 진시황제의 천하통일과 업적
이처럼 내부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한 진나라의 왕 영정(진시황제)은 이제 관심을 바깥으로 돌려서 중국을 통일하겠다는 거대한 야망을 품게되었고,
마침내 11년에 걸친 통일전쟁을 시작했으며, 진나라를 위협하는 주변의 국가들을 차례로 정벌해나갔다.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제나라, 연나라, 초나라 등 주변에 있는 여섯 개의 강국들에게 군사공격을 감행해서 이들 나라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 분열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면서, 통일제국 진나라의 황제로 우뚝 솟아오르게 된다.
진시황제는 능력만 좋으면 출신성분을 따지지않고 기꺼이 관리로 등용하는 등 현명한 왕도정치를 실천해나갔다.
이 시기에 진시황제는 법가사상가 이산, 병법에 통달한 장수 왕전, 토목기술자 정국 등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등용해서, 통일제국을 이룩하는데 중요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진시황제의 업적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전국의 도량형을 통일시켰다.
중국의 땅덩어리가 워낙 컸기 때문에, 각 나라나 각 지역들마다 도량형이 제각각 달라서 교역이나 조세를 거둘 때,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는데,
진시황제는 각 지역마다 제각각으로 다른 도량형을 한가지로 통일해서 보다 효율적인 교역과 거래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진시황제는 중국의 화폐를 한가지로 통일했다.
당시에는 중국의 각지역마다 서로 다른 화폐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다른 지역과의 무역이나 거래를 할 때에 큰 혼란이 야기될 수 밖에 없었는데, 진시황제는 중국 전국의 화폐를 표준화시키고 동일하게 통일함으로써, 다른지역과의 교역과 거래가 훨씬 수월하게 만들었다.
또한 진시황제는 중국전역에다 도로를 만들었고, 도로를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도로를 정비해서 군대나 관리의 파견을 쉽게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진시황제는 중국의 북부에서 남부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수로의 건설을 착수했는데, 비록 진시황제가 착수한 수로는 완공되지 못했지만, 후대에 수나라 양제때에 이 수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진시황제가 남북간 거대한 수로를 건설한 것은 조세와 물자의 운송을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진시황제는 중국의 한자를 통일시켰다.
이 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각 지역은 서로 다른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서의 해독도 제각각이었는데, 진시황제는 중국 전역의 제각각이었던 한자를 한가지로 통일함으로써, 문자해독의 단일화와 표준화를 이룩했다.
그리고 진시황제는 최초로 군현제를 실시했다. 이전의 나라인 주나라 때는 각각의 나라의 호족들로 하여금 그 나라를 독자적으로 다스릴 수 있게 했고, 주나라 왕실은 각각의 나라를 직접 다스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각각의 지역의 호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해주는 것을 봉건제라고 한다. 즉, 봉건제 하에서는 각각의 나라는 주나라왕실에서 직접 통치하지 않고, 각 나라의 제후가 스스로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했다.
단, 중앙에 있는 왕은 각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자인 제후만 임명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에 있는 왕은 각 제후국에 대한 통제력이 매우 약했고, 이 때문에 주나라 때에 각각의 나라들이 분열되면서, 전국시대 같은 내란전쟁이 벌어지게된 것이다.
봉건제도의 폐해를 잘 알고있는 진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의 황제가 각지역을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를 도입해서, 자신이 중국전역을 직접 통치했던 것이다.
진시황은 각지역마다 자신의 심복들을 직접 파견해서 자신의 명에 따라서 각지역을 다스릴 수 있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군현제’이다.
즉, 진시황제는 각지역에 대한 간접통치방식인 봉건제를 버리고, 직접통치방식인 군현제를 실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시황제는 업적도 많았지만, 그가 추진했던 정책 중에 잘못된 폐단도 많이 있었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들을 전부 불태워버렸고, 진시황제의 정책을 비판하는 지식인과 유학자 460명을 모두 생매장하는 ‘분서갱유’를 저질렀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진나라의 사상을 하나로 통일하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실시한 정책이었지만 너무도 잔인무도했다.
또한 진시황제는 그전까지만 해도 ‘왕’이라고 불리웠던 군주의 칭호를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중국의 모든 나라들을 통일한 자신에게 기존의 왕들과 똑같은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통일군주의 권위에 맞지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태황에서 ‘황’을 취하고, 삼황오제의 ‘제’를 택해서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었다.
◆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진시황제, 평생 불로초 찾기에 몰두
진시황제는 평생 죽지않는 불로장생을 꿈꾸면서도 또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하기 위해 여산에 진시황릉을 만들기 시작했고, 또한 자신의 왕궁인 거대한 아방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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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시황릉과 아방궁을 짓는데 무려 70만명의 백성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진시황은 동서 700m, 남북 120m 크기의 엄청난 크기의 2층궁전인 아방궁을 건축했는데, 이 아방궁에는 무려 1만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크기라고 하니, 진시황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호화스럽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궁궐보다 더 큰 아방궁에는 중국전역에서 뽑은 1만명의 미인들을 모아놓았고, 진시황제는 매일같이 마음에 드는 미녀들을 골라 향락의 밤을 보냈다.
아방궁은 진시황이 젊은 미녀들과 향락을 즐기기 위한 그만의 은밀한 내실공간, 향락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제는 황후자리는 영원히 공석으로 남겨놓았는데, 그 이유는 어먼니 조태후의 음탕한 행위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으로 그는 또다시 어머니같은 음탕한 황후가 나올까봐, 아예 황후를 세우지않고 황후자리는 영원히 공석으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진시황에게는 후궁들은 많이 있지만, 황후는 단 한명도 없었다.
강력한 법률과 철저한 상호감시체제로 인해 두려움에 떨던 힘없는 백성들은 이러한 대규모공사에 동원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사하다가 죽고, 희생되면서, 많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진시황제는 북방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위해서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이 대역사에 백성 30만명이 동원되었다.
만리장성을 쌓는 과정에서 장성 아래에는 강제로 징용되어 노역하다가 죽은 남자들의 해골이 겹겹이 쌓여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 당시 중국에서는 만리장성 축조 시에는 결코 사내아이를 낳지마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만큼, 만리장성 공사 중에 많은 중국남자들이 희생당했다.
즉, 진시황제는 진시황제릉, 아방궁, 만리장성 등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100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수의 백성들을 강제 징용했고,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 중 수십만명이 엄청난 노역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어갔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분열된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던 중국의 존경받는 황제이지만,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동원한 수많은 백성들을 혹사시키고 죽게만듦으로써, 백성들의 엄청난 원성을 들었다는 점에서는 폭군 또는 독재자라는 평가도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고 절대권력을 차지했던 진시황제는 급기야 영원히 죽지않는 불로장생을 꿈꾸게 된다.
중국을 통일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된 진시황제는 그가 비록 절대권력을 갖고있었다고 해도 늙어가는 것과 죽음만은 피할 수 없었다.
재위 내내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주색잡기에 빠져서 점점 육체적으로 쇠락해가자, 진시황제는 불노불사의 명약을 찾게된다.
진시황제는 신선의 도술을 닦는다는 서복이라는 점술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서복은 진시황제에게 동해 한가운데 ‘봉래’ ‘방장’ ‘영주’라는 세 개의 신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영험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으로, 그곳에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로장생의 약초가 있다고 말했다.
서복은 진시황제에게 동남동녀 3천명을 내려주시면, 그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서 불로장생의 불로초를 구해다 바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진시황제가 하사한 3천명의 동남동녀와 3년 동안 먹을 곡식과 의복, 생필품등의 대규모 선단을 거느린 채, 서복은 동쪽땅을 향해 떠나갔다.
그런데, 서복이 말한 불로장생의 약이 있다는 삼신산 중 하나인 ‘영주’는 바로 지금의 제주도이고 영주산은 지금의 한라산이라고 한다. 즉, 제주도의 옛지명이 바로 ‘영주’이다.
옛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실제로 서복은 지금의 한라산에서 자신이 불로초라고 여기던 ‘영지버섯’ ‘금광초’ ‘옥지지’ 등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복은 이들 약초를 제주도 한라산부근에서 구했지만, 서복은 이들 약초가 결코 불로초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여기서 언급되는 ‘영지버섯’이 서복이 찾아낸 불로장생의 약초라고 하는데, 이 영지버섯은 결코 불로초가 아님은 우리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이 영지버섯이 불로장생의 약초라는 거짓된 선전이 유행한 적도 있기는 하다.
서복은 이들 약초를 갖고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다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서쪽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서귀포의 지명은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서복은 자신이 약속한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했지만, 특유의 교묘한 말솜씨로 진시황에게 거짓증언을 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서복은 ‘봉래산의 불로장생 약초을 찾았지만, 바닷속의 큰 괴물물고기가 나타나 방해하는 ㅂ바람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진시황에게 거짓증언을 했다.
이에 대해 진시황제는 서복에게 최강의 궁수들을 딸려보냈고, 또다시 서복은 이전과 같은 엄청난 선단을 거느리고 다시한번 불로초를 구하러 떠나갔다.
이처럼, 진시황제의 불로장생에 대한 열망은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대단했고, 그는 죽기 하루전까지도 불로초를 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결코 버리지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다시 불로초를 찾아 떠나간 서복은 그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진시황제에게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불로장생의 불로초를 서복으로서도 결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인데,
만약 서복이 또다시 불로초를 찾지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게되면, 그는 틀림없이 진시황제로부터 참혹한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복이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평탄하고 너른 땅(平原廣澤)’으로 바로 일본땅이다.
서복은 그 일본땅에 도착해서 낙후된 현지인들에게 농업과 어업, 의약, 주거문화 등의 선진문화를 전수해주었고, 서복일행은 그곳에서 토호노릇을 하면서 일본땅에 정착해서 살아갔으며, 다시는 중국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때 일본땅에 도착한 서복의 일행들은 신석기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수전농업을 하는 벼농사를 전수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을 서복일행을 일본의 경제발전을 이끌어준 ‘문화의 사자’로 칭송하고 있다고 한다.
불로초를 찾아떠난 서복일행이 다시 돌아오지 않자, 엄청난 배신감에 크게 노한 진시황제는 이 후 죄없는 방술사들 400명을 잡아들여서 모두 처참히 살해했다.
왜냐하면 불로초를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서복이 방술사였기 때문에, 서복 때문에 애꿎은 다른 방술사들 400명만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진시황제는 두 번씩이나 서복에게 엄청난 재물을 선사하면서까지 불로장생의 약을 구해오도록 요구했는데, 아마도 진시황제는 자신이 애써 이룩한 통일제국의 황제로서 자신의 절대권력을 쥐고 오랫동안 영화를 누리면서, 영원히 죽지않는 삶을 꿈꾸었던 것 같다.
이처럼, 진시황제는 평생동안 불로불사의 약초를 얻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천하를 통일한 영웅이었던 그도 결코 죽음은 피할 수 없게된 것이다.
그토록 불로장생을 원했던 진시황제는 기원전 210년도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진시황제는 불로불사의 명약이라고 굳게 믿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수은’이었다.
진시황제는 ‘수은’을 많이 복용했는데, 이 수은은 그의 생명을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진시황제의 수명을 단명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연단술을 연구하던 도술사들은 영원히 변치않는 물질에 불로장생의 성분이 있을 것으로 믿고서 진시황제에게 수은을 권했던 것이다.
진시황제는 평생 5차례 중국 전역을 순행했는데, 기원전 210년도에 마지막 순행을 떠났다. 그 마지막 순행을 하는 도중 진시황제는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고 만다.
이 마지막 순행길에서 진시황은 신하 조고에게 큰 아들 부소에게 줄 유서를 작성케 한다.
그리고 진시황제가 사망하자, 그를 호위하던 신하 조고는 숭상 이사와 서로 공모해서 유서를 위조하여, 진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를 태자로 삼고, 장자 부소와 장군 몽염에게 없는 죄를 뒤짚어씌워서 죽음을 명하는 내용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렇게 신하들의 농간으로 진시황제의 장자 부소와 충신 몽염은 죄를 뒤짚어쓴 채 사약을 마시고 사망했다.
그리고, 진시황제의 막내아들인 철부지 호해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는데,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호해가 황권을 잡은지 4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지 14년만에 통일제국 진나라를 멸망하고 만다.
이렇게 진시황제가 이룩한 통일왕국도 그가 죽음으로써, 15년만에 허무하게 무너져내리고 중국은 또다시 분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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