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의 진짜 주인공 정조와 성덕임의 사랑과 승은, 의빈 성씨의 죽음과 자녀

 

MBC 사극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7%가 넘는 폭발적인 시청률을 자랑한 ‘옷소매 붉은 끝동’은 정조와 성덕임의 진솔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사극드라마이지요.

 

조선 제22대 왕이자, 개혁군주였던 정조 이산은 부인과 여러명의 후궁이 있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바로 ‘성덕임’이었답니다.

 

정조 이산은 평생동안 한명의 왕비와 네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정조가 가장 총애하였고,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성은 바로 ‘성덕임’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성덕임은 정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감이자 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조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알려진 성덕임은 정조의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했을 정도로, 소신있고 당찬 여성이었습니다.

 

왕의 ‘승은’은 왕의 요구로 잠자리를 함께 하고난 후, 후궁의 첩지를 받는 일을 말하는데, 궁궐에 사는 모든 궁녀들의 소원이 바로 왕의 승은을 입어서 입신양명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궁녀 성덕임은 당차게도 정조의 승은은 15년간 두 번이나 거절한 일화로 유명하답니다.

 

성덕임이 정조의 구애를 두 번이나 거절한 이유는 자신과 친밀했던 왕비이자 슬하에 자식이 없던 효의왕후를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덕임은 10살 때에 궁녀로 궁궐에 들어와서 혜경궁 홍씨의 처소에 있으면서 혜경궁 홍씨의 양녀처럼 보살핌을 받으면서 궁궐에서 생활했는데,

같은 시기에 궁궐에 들어온 효의왕후와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왕세손 시절이었던 1776년 정조는 성덕임에게 승은을 요구했는데, 성덕임은 세손빈(후의 효의왕후)이 자식을 낳지못하고 있는데, 제가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정조의 승은을 죽음을 맹세하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780년도에 왕이된 정조가 두 번째로 성덕임에 게 승은을 요구했으나, 성덕임은 똑같은 이유로 또다시 정조의 승은을 거절했답니다.

 

이에 화가난 정조가 성덕임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그때서야 성덕임은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이고, 정조의 후궁이 되었답니다.

 

여기서, 성덕임이 정조의 승은을 거절한 이유가 궁금해진답니다.

 

그녀는 왜 한 나라의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승은을 거절했던 걸까요? 다른 여인들은 왕의 후궁이 되지못해서 안달이 나있는데 말이죠.

 

 

당시 왕의 승은을 거절하는 것은 엄청난 불경죄로 죽음으로서 죄값을 치러야할 큰 죄였지만, 정조는 성덕임의 뜻을 받아들이고 더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성덕임은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와 친밀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지못하고 왕비로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녀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성덕임은 왕의 승은을 목숨을 걸고 거절했던 겁니다.

 

자신과 친한 효의왕후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 또한 효의왕후와의 권력암투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성덕임이 정조의 승은을 거절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면에서 성덕임은 조선여자로서는 드물게 소신있고 의롭고, 주관이 강했던 여성이라고 판단됩니다.

 

또한 성덕임은 머리가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던 여성이었는데, 21살 때에 성덕임은 ‘곽장양문록’이라는 고전소설을 한글로 필사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정조는 자신이 쓴 그녀의 ‘묘지명’에서, 성덕임은 단정하며 머리가 총명할 뿐만아니라, 재능과 기술, 예술까지 두루 갖춘 뛰어난 여인이라고 칭송할 정도로, 정조는 성덕임의 뛰어난 재능과 높은 인품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자신의 나이 30이 될 때까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왕실의 번성을 위해서 후손이 급하던 시기였답니다.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자녀를 낳지못했고, 정조의 첫 번째 후궁인 원빈 홍씨(홍국영의 누이)는 아이를 낳지못하고 병으로 사망했던 시기였지요.

 

원자의 출산이 나라의 존립과 관계되는 일이니만큼, 자식이 하나도 없었던 정조로서는 원치도 않는 다른 후궁을 얻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이 과거에 사랑했던 여인인 성덕임을 후궁으로 책봉해서 자신의 자녀를 낳게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정조는 자신을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15년 후에 또다시 두 번째 프로포즈를 한 것을 보면, 정조가 진실로 성덕임을 사랑했었고,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그녀를 잊지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는 ‘지금까지 성덕임을 후궁의 반열에 둔 지 20년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정조가 첫번째 프로포즈를 한 지 15년이 지난 상태에서 성덕임에게 후궁책봉을 했고,

또한 의빈 성씨를 후궁에 책봉한 지 5년이 지난 시점에 쓴 묘지명이기 때문에, 정조가 성덕임에게 처음 승은을 내렸다가 거절당한 시점부터 15년간 내내 그녀를 마음속으로 후궁으로 대우를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한 나라의 최고의 권력자인 왕이 자신을 거절했던 여인을 15년 동안 마음속으로 사랑해왔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15년 동안 전혀 변치않고 이어왔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래서, 정조가 평생동안 진정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여인은 성덕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조는 자신을 두 번이나 거절한 성덕임을 무리를 해서 결국 자신의 후궁으로 책봉하였고, 그리고 성덕임은 정조의 승은을 받아서 귀한 원자(문효세자)를 출산했습니다.

 

자손이 하나도 없었던 정조에게 아들(문효세자)을 낳아주었으니, 정조와 왕실은 후사를 이을 수 있게 되어서 그녀에게 크게 만족했고, 성덕임은 정3품 소용에서 정1품인 의빈이 되었답니다.

또한 성덕임은 2년 후 딸을 낳아서, 후사가 없었던 정조에게 1남 1녀의 귀중한 자녀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 성덕임의 죽음과 사망원인

 

이렇게 성덕임은 정조의 왕자와 옹주를 낳아 왕실의 후사를 이어주면서, 두사람은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녀의 행복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성덕임이 낳은 문효세자는 1786년 다섯 살 때에 돌연 홍역으로 사망했고, 성덕임 또한 아들이 죽은 지 4개월 후에 셋째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애석하게도 사망하고 말았답니다.

 

성덕임은 정조의 성은을 입은 지 5년 만에 34살의 젊은 나이로 원인모를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성덕임은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태기가 불안정하고 속이 답답하고 신체에 큰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며, 이러한 증상이 가속화한 상태에서 어떤 자극에 의해 쇼크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34살에 사망한 성덕임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옹주 또한 일찍 죽어서 그녀의 후손은 완전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조는 자신이 진실로 사랑했던 의빈 성씨를 보내고난 후, 자신의 슬픔과 한을 담은 어제비문을 남겼습니다.

 

성덕임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돌고 있습니다.

 

성덕임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셋째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태기가 안정되지못하고, 가슴이 부어오르는 통증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그 이상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빈 성씨의 사망과 관련하여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의 두번째 후궁인 화빈 윤씨가 독을 써서 성덕임을 죽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투기심이 강한 화빈 윤씨가 아이를 임신한 의빈 성씨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낀 나머지, 독을 탄 약물을 성덕임에게 먹게해서 죽였다고 하며, 정조가 화빈 윤씨에게 죄를 물어서 내쫒았다고 하는데요.

 

그렇지만, 이 독살설은 승정원일지 같은 정사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황윤석의 이재난고에만 나오는 기록 즉, 정사가 아니라 야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100%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화빈 윤씨가 의빈 성씨를 독살한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왕조실록 같은 정사에 기록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화빈 윤씨의 독살설은 왕조실록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로 인정하기 곤란한 측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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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화빈 윤씨가 왕비와 의빈 성씨에 대해 질투를 심하게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명문가의 자재인 화빈 윤씨가 정조의 후궁이 된 후, 아들을 출산하지 못했는데, 자신보다 더 늦게 후궁이 된 성덕임이 아이를 두명이나 출산을 했을 뿐만아니라, 또다시 셋째아이까지 임신을 하자,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투기를 했을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화빈 윤씨세력이 의빈 성씨를 중상모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 보면,  화빈 윤씨가 성덕임에게 못된 해코지를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화빈 윤씨가 상상임신을 해서 산실청까지 세웠을 정도라고 하는데, 아기를 낳지못하는 화빈 윤씨가 정조가 총애하는 효의왕후와 의빈 성씨를 심하게 투기를 했기 때문에, 정조는 화빈 윤씨에게 죄를 물어서 대궐에 따로 방을 만들어 그곳에 연금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식을 낳지못하고 정조의 사랑을 받지못했던 화빈 윤씨가 자녀를 세명이나 임신한 의빈 성씨를 심하게 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함까지 했기 때문에, 아마도 화빈 윤씨가 성덕임에게 독을 써서 독살했다는 루머가 생겨난 게 아닌가 합니다.

 

아뭏튼 문효세자가 다섯 살이 된 후 갑자기 사망했고, 그로부터 4개월 후에 성덕임도 함께 사망했는데요. 

 

의빈 성씨와 그의 아들 문효세자 모두 원인모를 병에 걸려서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자, 의빈 성씨와 연적관계에 있던 화빈 윤씨와 외숙부 조시위가 함께 성덕임을 저주하고 독살했다는 의혹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의빈 성씨에게 심하게 질투하고 모함했던 화빈 윤씨의 외숙부 조시위가 성덕임을 독살한 주인공으로 의심받았는데요.

 

실제로 화빈 윤씨의 외숙부 조시위는 상상임신을 한 화빈 윤씨를 위해 산실청을 30개월 동안이나 주관해서 문효세자의 세자책봉을 늦추려고 했고,

또한 그가 주도해서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에게 약을 잘못 올리게 했다는 의혹을 받게되었고, 결국 조시위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죽음에 연류되었다는 이유로 위리안치되었습니다.

 

의빈 성씨와 아들 문효세자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 두사람의 죽음과 관련해서 성덕임을 심하게 질투했던 그녀의 연적 화빈 윤씨의 외숙부 조시위가 약을 잘못 올리게 했다는 의심을 받고 유배당했다는 사실만 존재한답니다.

 

그렇게도 정조의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하면서 평생 궁녀로서 독신으로 삶을 살아가려했던 성덕임은 정조의 끈질긴 승은요구를 더이상 거절할 수 없어, 결국 정조의 후궁이 되어 왕의 사랑을 듬뿍 받는 빈으로서 화려한 삶을 살아갔지만,

자신이 낳은 왕자와 딸이 모두 원인모를 병으로 사망하고, 자신도 임신 도중 사망하고 만 비운의 여인이 되고야 말았답니다.

 

자신과 친한 관계였던 자식을 못낳는 효의왕후를 배려하기 위해서 정조의 승은요구를 두 번이나 거절했던 배려심 많고 의로운 성품을 지녔던 성덕임이 34살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고 말아 정말 애절하고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왜 악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오래 살게 하시고, 착한 사람들만 일찍 데려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의빈 성씨는 자신이 죽는 순간에도 정조에게 효의왕후와 함께 꼭 후사를 맺으시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효의왕후를 끝까지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니,

정말 의빈 성씨는 후궁치고는 상전에 충성을 다하는 성품이 의로운 착한 여인이라고 하겠습니다.

 

◆ 성덕임의 죽음에 슬퍼하면서 정조가 묘지에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 내용

 

다음은 정조가 성덕임의 묘지에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의 내용인데, 성덕임이 죽은 것을 슬퍼하는 정조의 마음속 깊은 곳에 한맺힌 절규라고 보시면 됩니다.

 

‘의빈 성씨가 사망하기 전날에 울면서 내게(정조) 말하기를 “자주 정전에 들러서 (효의왕후)와 함께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곧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의빈 성씨는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아 기르지못한 것을 항상 근심하면서 탄식했다’

 

- 다른 후궁 같으면 왕이 왕비를 자주 만나면, 심한 질투를 하고 저주까지 하는 후궁들이 많은데, 의빈 성씨는 정조에게 효의왕후와 자주 만나서 관계를 맺고 후사를 맺으라고 요구를 합니다,

질투는커녕 왕비의 후사 없음을 항상 근심했다고 하니, 성덕임의 충절과 의로움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의빈 성씨는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또한 의빈 성씨는 죽음에 임박했어도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한결같은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회임)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빈은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또한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아! 빈의 죽음이 너무도 슬프다! 빈이 죽었으니, 장차 내가 어찌 구하고, 어디에 기대고,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통하며 비참한 마음을 어찌 위로하고, 어찌 달래겠는가? 이에 있어서 지금의 슬픔이 거의 예전의 일보다 심하다’

 

‘아아! 빈은 후궁으로 있으면서 마땅히 사람이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되어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박복한 운명이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 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 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다.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빈이 죽음으로써 마음 한가운데가 참으로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는 진짜 이승을 떠나는구나’

 

위의 글은 정조가 죽은 성덕임을 위해 쓴 묘지명 내용의 일부인데, 정조가 얼마나 의빈 성씨를 사랑했는지, 또한 정조가 그녀의 죽음을 얼마나 슬퍼하고 애통해했는지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정조가 총명하고 검소하며, 예의 바르고 의로운 성품을 지닌 성덕임을 얼마나 존경하고 흠모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왕의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았던 후궁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정조의 ‘어제의빈묘지명’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성덕임이 정조의 승은요구를 거절했던 것은 자신과 친했던 효의왕후가 자녀를 출산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효의왕후를 배려하는 마음 때문에, 그녀가 정조의 추상같은 승은요구를 간절한 마음으로 거절했던 겁니다.

 

다른 궁녀들은 왕의 후궁이 되기위해서 온갖 술수를 다 부리는데도, 성덕임은 왕비의 후사를 위해서 자신을 낮추고 왕의 성은도 거절했던 의롭고 반듯한 여성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후궁들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왕비를 모함할 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서슴치 않는데,

의빈 성씨는 질투는 커녕 정조에게 효의왕후를 자주 찾아 후사를 만들라는 요청을 했을 정도로, 왕비를 위하고 배려하는 배려심과 충절이 뛰어났던 여인이었습니다.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무당까지 불러서 인현왕후를 저주했던 장희빈과 비교해볼 때에, 성덕임의 의롭고 뛰어난 성품이 얼마나 대단하고 존경스러운지를 생각할 때, 그녀의 이른 죽음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정조는 의빈 성씨의 유언대로 그녀의 묘를 아들 문효세자의 바로 옆자리에 안장해주었다고 합니다.

 

◆ 정조의 초상화와 의빈 성씨의 초상화

 

정조의 어진 초상화는 존재하지만, 아쉽게도 의빈 성씨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고있습니다. 정조의 초상화는 김흥도가 그린 것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에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이길범화백이 상상으로 그린 초상화가 남아있습니다.

 

정조의 외모는 할아버지 영조가 ‘너의 용모는 매우 뛰어나서 이 나라의 무궁한 복과 다름없다’고 칭찬할 정도로 매우 잘생긴 미남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정조의 아들인 순조실록에 쓰인 기록에 의하면, 눈자위가 평퍼짐하고 콧날이 오똑하며, 이마가 반듯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이길범화백이 정조 어진 초상화를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성덕임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성덕임의 초상화라고 알려진 초상화가 있어서 여기에 실었습니다.

 

성덕임은 정조가 침이 마를 정도로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예의 바르고 반듯한 성품을 지녔다고 칭찬을 했는데요.

정조가 무려 15년 동안 구애를 해서 간신히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을 정도로, 정조가 무척 사랑했던 여인인 것을 보면, 성덕임은 용모가 여성적이면서 청순가련한 미인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답니다.

 

드라마 ‘이산’에서 한지민이 의빈 성씨역을 맡았는데, 아마도 의빈 성씨의 초상화는 한지민처럼 단아하면서도 청순한 미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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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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