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 발생이유, 정도전과의 전쟁, 죽음

역사이야기 2022. 2. 14. 00:30

태종 이방원의 1, 2차 왕자의 난과 그 결과, 자녀들, 정도전 살해한 이유

 

이방원 - 1367년 6월 13 ~ 1422년 5월 30일

 

태조 이성계의 아들로서 조선건국에 커다란 기여를 한 이방원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큰 인기를 끌면서 방송되고 있습니다.

 

사극 드라마 ‘태종 이방원’은 kbs 방송국에서 12월 11일부터 계속 방영되면서 11%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의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데요.

 

과연 이방원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난세의 영웅인가, 아니면 왕권을 탈취한 탐욕스러운 쿠데타의 수장인가’ 라는 이방원에 대한 서로 다른 두가지 평가가 이어지면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은 우리 역사에 커다란 한획을 그었던 불세출의 영웅이면서, 동시에 왕권찬탈을 위해 왕자의 난을 일으킨 풍운아 태종 이방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방원에 대한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숨겨져있던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주고 있답니다.

 

이방원은 문무를 동시에 겸비한 걸출한 대장부로서, 형제 중에서 정치적 야망이 가장 크고 호전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는 영웅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졌는데요.

 

이방원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고 영특했으며, 공부를 잘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방원을 무인기질이 강한 장부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이방원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열심히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백면서생의 모범생이었답니다.

 

특히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시험에 급제한 뛰어난 재원이었지요. 이방원은 17살 때에 과거시험에 응시해서 7등으로 합격했답니다.

 

이방원이 전형적인 무인출신인 아버지 이성계집안에서 자라난 아들 중에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함으로서 아버지 이성계의 마음을 흡족하게했고, 이 젊었을 때의 이방원은 아버지에게는 총명하고 공부 잘하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었답니다.

 

이렇게 공부도 잘하고 효심 깊어서 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했던 효자이자, 모범생이었던 이방원이 몇 년 후에 엄청난 변모를 하게 되는데요.

 

바로 고려말에 정치적 격변기에 시중 최영과 수시중 이성계간의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발생한 ‘위화도회군’ 때문에, 이방원은 자의이든 타의이든 간에 엄청난 정치적 변란의 한복판에 뛰어들게 된답니다.

 

태조 이성계의 용모가 높은 코에 용의 얼굴을 하고있었는데, 그의 다섯번째 아들 이방원도 높은 코에다 비범한 용모를 하고 있어서, 아버지와 매우 닮았다고 합니다.

 

하륜은 이방원의 관상을 보고 매우 감탄했다고 하는데, 관상을 보는 재주가 있던 하륜은 이방원의 관상을 보고 장차 나라의 큰 인물이 될 영웅의 관상임을 간파했고, 그 때부터 이방원을 섬기는 일에 집중하게 된답니다.

 

◆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발생과 발생원인

 

1388년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에 의해서 위화도회군이라는 엄청난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우왕 14년에 우왕과 최영의 주도로 우리의 고토인 요동을 되찾는다는 기치 아래 요동정벌군을 편성했는데,

5만명의 요동정벌군의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가 좌군도통사인 조민수를 꾀여서, 압록강가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에 있는 우왕과 최영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성계가 국왕에게 반기를 들고 조민수와 함께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역으로 국왕이 있던 개경성을 공격하는 군사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성계가 5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자신을 임명한 우왕과 시중 최영이 있는 개경성을 공격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은 근위병을 이끌고 개경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결국 엄청난 군사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경성이 함락되면서,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 반란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에 의해서 각각 고양과 강화도로 유배되었지만, 1년 뒤에 처형당했고, 대타로 세워진 우왕의 아들 창왕도 1년 뒤에 처형당하고 맙니다.

 

이렇게 우왕과 창왕이 처형당한 후, 이성계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상승하였고,

이후 이성계는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조민수마저 살해하면서, 그는 고려조정의 최고실권자로 우뚝 솟아오르게 됩니다.

 

이성계는 형식적으로 공양왕을 왕으로 옹립했는데, 공양왕은 실권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왕이었고,

그는 재위된 지 3년 만에 이성계에 의해서 왕위 자리에서 쫒겨난 후 피살당하고 맙니다.

 

그럼, 이성계는 왜 위화도회군을 감행해서, 자신을 임명해준 우왕과 최영을 살해했을까요?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한 이유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않고, 요동으로 진격해서 군사공격을 감행했더라면, 오늘날 고구려의 옛땅인 만주는 우리의 영토로 편입되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감행함으로써, 우리의 고토인 요동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고, 우리나라는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성계는 우왕이 자신에게 요동정벌을 명했을 때부터, 소위 ‘4불가소’라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요동정벌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답니다.

 

그렇지만, 이성계의 ‘4불가소’는 명목상의 이유일뿐,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과 같은 친명파에 속한 신진사대부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 자신도 신진사대부의 영향을 받아서 고려조정의 대표적인 친명파의 일원이 되어있었답니다.

 

즉, 이성계의 ‘4불가소’에 나오는 내용의 하나인 ‘소국이 대국을 공격할 수 없다’라는 그의 입장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이성계는 대표적인 친명파였고, 중국(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도전과 조준 등 신흥사대부들과 같은 파벌을 형성하고 있던 이성계는 그들이 상국으로 섬기는 명나라를 공격하는 요동정벌에 결코 찬성할 수 없는 정치적 입장을 갖고있었고,

그래서 이성계는 결사적으로 요동정벌을 반대했던 것이고, 이러한 이성계의 요동정벌 반대는 정도전과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성계는 혼자서의 결정이라기 보다는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는 친명파 신진사대부들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위화도회군을 감행했다고 보는 것이 정답입니다.

 

또한 위화도회군을 한 또다른 이유로는 이성계세력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화도회군 직전에, 남은, 조인옥 등 신진사대부들이 군사를 되돌리자는 의견을 이성계에게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도전, 남은 등이 이성계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는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세력이 권력을 잡기 위한 계획적인 사전 공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와 이성계의 권력장악이라는 두가지 목적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군사반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사실상 유도한 장본인은 이성계와 친밀하게 지냈던 신진사대부의 수장 정도전인데요.

 

정도전은 고려말·조선초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혁명사상가로서,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왕조를 개국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조선왕조의 사상적 기반과 제도적 틀을 만들었던 조선건국의 일등공신이지요.

 

조선을 건국하는데, 한편으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사용되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정도전의 지식이 사용되었는데,

조선건국에 필요한 국가적, 사상적 이념과 제도적 틀을 만든 사람은 바로 정도전이었지요.

 

아마도 정도전이 없었으면,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않았을 것이고, 조선건국도 이뤄지지 않았을 겁니다.

 

평생 무장으로서만 살아왔던 이성계가 혼자만의 생각으로 조선을 건국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이성계가 국가를 혼자서 창업할 만큼 그룻이 큰 인물도 아니라고 봅니다.

 

한양천도와 조선궁궐의 구조를 만든 것도 정도전이었고, 조선에 유교적 국가이념을 정립한 것도 정도전이었고, 조선의 최초의 법전인 ‘조선경국전’을 집필한 사람도 바로 정도전이었지요.

 

고려말에 권문세족들이 권력을 독점해나갔고, 권문세족들의 강권정치로 인해서 정치적으로 소외당해왔던 정도전과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뭔가 든든한 뒷배경을 필요로 하고있었답니다.

 

권문세족의 파워에 밀려서 권력의 상층부로 진입하지 못하고 소외당하였던 정도전, 조준 등의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상승시킬 강력한 뒷배경이 필요했는데,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이 주목한 사람은 바로 동북면도통사로 있는 이성계였습니다.

 

정도전은 고려 공민왕시절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급진개혁가였으나, 공민왕이 죽은 후 그가 꿈꾸웠던 정치, 사회개혁이 중도에서 하차하는 좌절을 맞보았고,

매우 급진적이고 강경한 개혁정치를 추진했던 정도전 및 조준 등 신흥사대부들은 그당시 권력을 잡고있던 보수권문세족들의 견제공작에 의해서, 일제히 정계에서 축출당하고 유배를 가게됩니다.

 

그렇게 정치적, 신분적으로 암울한 상태에 놓였던 정도전은 동북면에서 확고한 군사력기반을 갖고있던 이성계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성계에게 고의적으로 접근해 회유함으로써,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과 이성계는 서로 정치적 동맹관계를 맺게됩니다.

 

고려말 우왕 시기에, 최영과 이성계가 서로 연합해 군사를 일으켜서 그 당시 권력의 최고실세였던 이인임에게 군사공격을 감행한 후, 이인임을 축출시켰답니다.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권력자였던 이인임세력을 축출된 후, 정권을 획득해 공동정권을 형성한 최영과 이성계는 한동안 불안한 공동정부를 이끌어나가게 되는데요.

이 시기에 최영은 시중으로, 이성계는 수시중의 지위를 획득하고, 두사람은 일시적인 정치적 동반자관계를 맺게 되었지요.

 

그런데, 고려 우왕 때 최고의 권력층에 있던 이 두사람, 최영과 이성계가 요동정벌이라는 문제를 두고 서로 충돌하는 관계가 되고, 서로 돌아서게 된답니다.

 

친원파였던 최영과 친명파였던 이성계, 이처럼 두사람은 처음부터 서로 정치적 이념이나 정치적 색깔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두사람은 외형적으로는 동맹관계였지만, 처음부터 나중에 폭발할 수 있는 갈등의 불씨를 갖고있었답니다.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소외를 당해왔던 정도전은 군사적 기반과 정치적 기반을 모두 갖고있던 이성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두사람은 서로 끈끈한 동맹관계를 형성했는데요.

 

무엇보다도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필요했던 정도전은 위화도회군이 일어나기 5년전인 1383년도에 당시 동북면도통사로 있던 이성계장군을 찾아갔고, 그를 회유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자신의 백그라운드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때 이미 정도전은 고려의 국운이 쇠하였기 때문에, 새왕조의 개창의 필요성을 이성계장군에게 역설하고, 토의를 했다고 합니다.

즉, 정도전은 평생 충직한 무인으로 살아온 이성계장군의 가슴에 바람을 집어넣은 것이지요.

 

정도전은 자신의 정치적 도약을 위해서 이성계가 갖고있는 군사적 기반을 이용하기 위해 이성계를 회유한 것이랍니다~

 

정도전의 회유에 이성계장군이 넘어갔고, 이후부터 정도전, 조준, 남은 같은 신진사대부들은 이성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정치적 동반자관계, 즉 동맹관계가 맺게됩니다.

 

이 후 우왕과 최영에 의해서 요동정벌정책이 추진되었고, 요동정벌군 우군도통사로 이성계가 임명되자,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뒤에서 조종해서 위화도회군이 일으켰고, 이 위화도회군을 절호의 기회로 삼았던 신진사대부·이성계 동맹세력은 그때부터 국가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보에 나서게 된답니다.

 

여기까지가 위화도회군이 일어나게된 이유와 역사적 배경이랍니다. 즉, 위화도회군은 신진사대부와 이성계군부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군사정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실권을 잡게되었고, 창왕을 죽인 후 공양왕을 세운 후, 정도전,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은 과전법을 실시하는 등 대대적인 전제개혁을 단행하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 당시 이성계의 첫째부인 한씨의 다섯번째 아들인 이방원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서, 아버지 이성계의 무장세력과 정도전의 신진사대부 세력간의 중요한 매개체역할을 담당했답니다.

 

이때 정도전의 사대부세력과 이방원은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는 새로운 왕조창업을 위한 치밀한 물밑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이를 눈치챈 정몽주가 그들의 물밑작업에 제동을 걸게됩니다.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지는 낙상사고를 당해서 앓아눕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때를 기해서 정몽주는 공양왕에 정도전과 조준에 대한 탄핵상소를 올렸고. 이성계의 최측근인 정도전과 조준을 유배보내버립니다.

 

정몽주는 고려의 왕실을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고려의 충신이었고, 정도전과 조준은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만들고자 했던 역성혁명 음모론자들이었답니다.

 

따라서 정몽주는 이성계일파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강화되면서 역성혁명의 움직임이 감지되자, 고려왕실을 지키기 위해서 먼저 선수를 쳐서, 이성계의 최측근인 정도전과 조준을 탄핵해서 유배보내버린 것입니다.

 

즉, 고려왕실을 지키기위해서 고려왕실의 최대의 위협인물인 이성계의 오른팔과 왼팔인 정도전과 조준을 미리 축출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전면에 나서서, 자신들과 정반대의 노선을 걷고있는 정몽주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이방원은 자신의 심복을 시켜서, 이성계의 병문안을 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 다리위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해서 살해해버립니다.

이방원이 보낸 자객이 선죽교부근에 잠복해 있다가, 말을 타고 지나가던 정몽주에게 기습적으로 접근해서 칼을 휘둘러 살해해 버렸답니다.

 

이는 이성계에게 알리지않고 이방원 혼자서 정몽주를 제거한 것이었고, 권력찬탈의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축출함으로써, 이후 이성계의 정권인수작업은 탄력을 받게됩니다.

 

이성계세력의 정몽주제거는 그들의 왕권찬탈 혁명을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몽주는 고려왕실을 끝까지 보호하려고 했던 고려충신파의 핵심인물이었고, 역성혁명을 결사적으로 반대해왔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지요.

 

◆ 이성계의 조선건국과 이방원의 야심

 

이방원이 자신들의 권력장악에 최대 방해요소인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이후 이성계의 왕위옹립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나갑니다.

 

이 후 이성계와 연대한 신흥사대부세력은 과전법시행 등 전제개혁을 단행함으로서, 새왕조 개창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구요.

 

이러한 시기에 이방원은 이성계의 신흥무장세력과 정도전등의 신진사대부세력 사이에서 중요한 매개체역할과 조정자역할을 담당하면서, 새로운 왕조개창작업을 주도해나갔습니다.

 

결국, 1392년 이성계세력은 고려의 마지막임금인 공양왕을 왕위에서 끌어내려 축출한 후,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면서, 새로운 국가 조선을 건국했답니다.

이때 조선의 초대임금이 된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고, 이방원은 26세였고, 그리고 정도전은 51세였답니다.

 

그런데, 이성계세력이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해나가자, 지조를 목숨같이 여기고있던 임선미, 조의생 등 고려유신들은 이러한 역성혁명에 크게 반발했고,

이들 72명의 고려유신들은 조선조정에의 동참를 거부하면서 관덕산기슭에 있는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높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유능한 선비들이었고,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서 얼마든지 조선조정에 들어가 높은 관직을 얻어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지식인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를 거부한 채, 고려왕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서,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했던 고려의 충신들이었지요.

 

그런데, 이성계세력은 자신들의 새왕조 개창에 반대하면서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한 고려유신들의 저항이 장차 백성들에게 크게 파급되어 저항세력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감을 갖게되었고,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작업에 착수하는데요.

 

두문동유신들이 자신들이 세운 새왕조의 기틀을 구축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한 이방원은 직접 자기수하들을 이끌고 두문동으로 쳐들어갔고,

선비들이 사는 두문동에 불을 지르는 화공을 감행함으로써, 두문동선비들을 모두 학살해버렸답니다.

 

이방원이 얼마나 야심만만하고 과격하고 급진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원은 좋게 말하면 과단성 있고, 추진력이 강한 사내대장부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너무 과격하고 잔인한 성향을 지닌 호전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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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의 이러한 행동의 도덕성여부는 차지하고라도, 이방원이 새왕조 개창에 반대하는 정몽주와 두문동선비 등 여러 반대세력들을 제거한 것이 결과적으로 조선개국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도전과 이방원 등 두사람의 공이 가장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신진사대부들과 이방원, 이성계의 합작으로 모든 방해요소들을 제거한 후, 1392년 마침내 조선이 건국되었고, 이성계는 조선의 제1대 국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의 왕으로 올라선 이성계는 정도전과 협의 하에 둘째부인 강씨의 아들인 방석을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로 책봉했답니다.

 

태조 이성계가 첫째부인의 소생인 여섯명의 아들을 제외하고 둘째부인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고, 이 때문에 엄청난 파란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같이 둘째부인의 소생인 11살의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실부인의 아들이 여섯명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실부인의 어린 아들을 왕의 후계자로 삼다니' 하면서 이방원은 크게 분노하였고, 엄청나게 반발을 하게됩니다.

 

이방원은 방석의 세자책봉은 정도전이 꾸민 음모라고 생각했는데요.

 

정도전이 자신이 다루기 쉬운 나이 어린 방석을 왕위에 올려놓고, 자신이 재상이 되어 어린 방석을 마음대로 휘둘러서 자신이 영원히 국가권력을 독점해나가려는 의도를 갖고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원은 방석의 세자책봉 뒤에는 정도전이 있고, 정도전이 앞으로 국가권력을 독점해나갈 것이라고 크게 우려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더 정도전을 경계하게 되었답니다.

 

이방원과 정도전은 원래 조선건국이라는 새왕조 개창에 있어서는 서로 정치적 동지였습니다.

 

이방원과 정도전은 이성계를 국왕으로 옹립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양대기둥이었는데,

이방원이 개국의 주역을 결정하는 공신책록과 세자책봉에서 소외당하는 등 쇠락의 길을 걷는 반면,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권력의 중추에 서서 새 왕조창업을 주도해나가게 됩니다.

 

이방원은 조선건국공신 책록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은 이방원이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왕조건설에 함께 뛰었던 정도전, 조준, 배극렴 등 신진사대부들은 조선건국 공신에 책록되었지만,

누구보다도 조선건국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이방원만이 조선건국공신에서 제외됨으로써, 이방원은 크게 분노했고, 자신을 제외시킨 정도전에 대해 심한 적개심을 갖게됩니다.

 

원래 정치적 동지였던 이방원과 정도전은 이 때부터 서로 정반대의 길을 가게되면서,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방원과 정도전은 이제 조정의 최고권력을 놓고 다투는 정치적 라이벌이 되었답니다.

 

- 정도전의 업적 -

 

조선이 건국된 후, 신진사대부의 거장인 정도전은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는 것을 주도해나갔으며,

경복궁, 근정전, 사정전, 숭례문, 숭인문등 조선의 모든 궁궐과 전각의 이름을 지었고, 유교적인 국가이념과 유교적 정치체제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최초의 법전인 조선경국전을 집필하는 등 조선왕조의 제도와 기틀을 완비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조선조정의 최고실력자로 급부상했답니다.

 

즉, 조선건국의 기틀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이 신하중에서는 최고의 실력자가 된 것이지요.

 

이렇게 제신 중의 최고실력자가 된 정도전은 자신의 권력유지에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있는 왕족세력들, 특히 이방원 같은 왕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답니다.

 

특히, 야심만만하고 과격한 성정을 지닌 이방원을 심하게 견제하게 되었는데요.

조선초기만 해도 왕자 등 왕족들이 자신들의 사병을 보유할 수 있게 되어있었습니다.

 

정도전은 병권에 대한 중앙집중체제를 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왕족들이 보유하고있는 사병들을 모두 중앙군사로 흡수해서 국가에서 통합관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사병혁파’를 주장했습니다.

 

즉, 정도전은 왕족들의 사병혁파를 제창했습니다. 이 ‘사병혁파’는 자체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이방원 같은 왕자들의 힘을 약화시킬 의도로 시행된 제도이지요.

 

◆ 이방원의 제1차, 2차 ‘왕자의 난’ 발생과 발생원인

 

정도전이 이렇게 조정의 모든 것을 주도해나가면서, 왕자들을 심하게 견제해나가자,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큰 불만을 품게되었습니다.

 

이방원은 자신이 정몽주와 고려유신 등 저항세력들을 제거하는 등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서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도록 큰 기여를 한 일등공신이었는데, 정도전의 모략 때문에 자신은 철저히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고 판단했답니다.

 

더욱이 정실의 아들이 여섯명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첩실의 소생인 방석이 세자가 된 것도 정도전의 음모 때문이라고 판단했답니다.

 

방석을 세자로 앉힌 후, 세자 방석을 등에 업은 정도전이 조정의 모든 국사를 독점해나가면서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이방원은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또한 정도전세력이 왕자들이 갖고있는 사병을 빼앗아서 힘을 빼놓는다고 하니,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위기감과 불만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답니다.

 

자신들의 군사적 기반인 사병을 빼앗은 후에, 정도전이 곧 자신을 숙청할 수도 있다고 이방원은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정도전은 당시 재상급에 해당하는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판삼사사는 삼사를 아우르는 최고의 벼슬이었습니다.

즉, 정도전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최고사정기관들을 총괄 관리하는 최고위직의 수장이었고, 이는 왕 다음의 2인자였습니다.

 

정도전은 국왕의 독주를 막고 재상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정사를 펼쳐나가는 ‘재상중심의 정치체제’를 목표를 삼고있었지요.

 

반면, 이방원은 정도전의 재상중심의 정치체제에 극렬한 반대입장을 갖고 있었는데, 이방원은 재상이 아닌, 국왕이 모든 정사를 독주하는 ‘국왕중심의 정치체제’를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이렇듯, 이방원과 정도전은 국가운영방식에서부터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었답니다.

 

정도전이 추구하는 ‘재상중심의 정치체제’는 왕권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정도전은 왕권강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할 숙적이자, 정적 1호였던 겁니다.

 

이렇듯 이방원과 정도전은 왕권강화냐, 재상의 권력강화냐를 놓고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갖고있었고,

조선건국 초기부터 이 두사람은 서로 권력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라이벌이었습니다.

 

단지, 두사람의 권력투쟁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하는 그 시기만 남겨놓았던 상태였죠.

거기다가,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와 합작으로 둘째부인의 소생인 방석을 후계자로 책봉하자, 이방원의 분노와 불만을 크게 팽배하게 됩니다.

 

또한 이방원의 힘의 원천인 사병까지 혁파하는 조치를 취하자, 이방원의 분노는 폭발하고 맙니다.

정도전이 이방원 등 왕자들의 병권을 빼앗는 조치를 취한 것은 왕자들을 일반 평민들과 같은 하찮은 존재감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다름없었지요.

 

또한 정도전은 진법을 만들어서, 제2차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작전을 감행합니다.

정도전이 만든 진법은 외적을 상대로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를 실행하는 군사병법인데, 이 진법은 사실상 요동정벌을 목표로 해서 만들어진 군사전략입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추진할 것을 건의했고, 태조가 이를 승낙함으로써 제2차 요동정벌계획이 시행된답니다.

 

원래 요동정벌은 고려 우왕과 최영이 추진했던 북진정책이었는데, 그 때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소국이 대국을 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요동정벌을 격렬히 반대했고, 그래서 위화도회군을 감행했던 것인데요.

 

이제 자신들이 정권을 잡고 난 후, 과거에 자신들이 격렬히 반대했던 요동정벌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것은 엄청난 궤변이며, 정말 역사의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도전이 건의해서 새롭게 추진하는 요동정벌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군사전략전술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진법’이었고,

정도전은 진법훈련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궁궐내외의 모든 병사들을 모아서 대대적인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정도전이 주도하는 진법훈련에 이방원 같은 왕자들의 사병들이 수시로 불참하는 등 군례를 위반하는 일들이 빈번히 벌어졌고, 군기가 매우 문란해졌답니다.

 

이에 진법훈련에 불참하는 이방원 등 왕자들을 문책해야한다는 문책론이 정도전세력에 의해서 비등하게 올라왔고,

이에 이방원 등 왕자들은 큰 위협을 느끼게 되고, 이로써 양세력간에 갈등이 최고조로 올라가게 된답니다.

 

즉,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정도전이 진법훈련에 불참한 자신을 처벌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커다란 위기감을 갖게되었는데,

이렇게 긴박한 상황에서 이방원은 자신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서 정도전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됩니다.

 

이것이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 발생의 배경원인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건국공신 책록 제외와 태자책봉 제외, 그리고 사병혁파 등으로 정도전에게 큰 불만을 품고있던 이방원이 진법훈련 불참으로 인해서 처벌 받게될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먼저 정도전을 축출하기 위한 선제 군사공격을 감행했던 것이 ‘1차 왕자의 난’이랍니다.

 

이 시기에 마침 태조 이성계가 갑작스럽게 병이 나서 병석에 눕게되면서, 아버지 병문안을 위해서 이방원 등 모든 왕자들이 궁궐에 입궐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태조 이성계가 병석에 눕는 등 조정에 혼란스러운 사태가 발생하자, 이같은 혼란한 상황에서 혹시나 왕자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우려를 한 나머지,

정도전은 이방원 등 왕자들이 준동하지못하게 하기위해서, 이들 왕자들을 궁궐안에 가둬놓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형들과 함께 궁궐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족들과 함께 궁궐 안에 연금되는 상황에서, 정도전세력이 자신들을 도륙낼 것이라고 판단한 이방원은 화장실에 간다고 말하고는 남몰래 궁궐에서 빠져나와서, 자신의 집으로 도주하게 됩니다.

 

이 때 다른기록에는 궁궐에 연금된 이방원이 부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궁궐에서 빠져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방원은 궁궐에서 일시적인 연금상태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고, 자신의 집으로 가서 정도전에 대한 군사공격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이방원의 집에는 그의 부하 이숙번과 조영무, 이화, 박포 등 이방원의 측근들을 비롯한 완전무장한 수십명의 군사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또한 태조 이성계의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등 왕족들도 함께 참여해서 군사정변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답니다.

 

1398년 8월 26일, 이방원은 하륜, 이숙번등과 작전을 짠 후, 곧바로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정도전의 집으로 쳐들어갔고, 그의 집에 있던 정도전을 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있던 남은 등 그의 측근들까지 척살하였습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척살한 명분은 정도전이 반역을 꾀했다는 것인데, 그 날 정도전은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한가로이 술을 마시고 있었을 뿐, 전혀 역모행위를 하지않았습니다.

 

정도전 반역운운은 이방원이 자신의 군사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꾸며낸 거짓된 명분이었지요.

 

정도전일행을 살해한 이방원의 군사들은 그 여세를 몰아서 궁궐로 쳐들어갔고, 태조 이성계를 겁박해서, 세자 이방석을 밖으로 불러낸 뒤,

세자 이방석과 그의 형 이방번을 살해한 후, 정권을 장악하게 된답니다.

 

군사위협을 통해서 태조 이성계의 항복을 받아낸 이방원은 태조의 왕권을 둘째형 이방과(큰형이 사망함으로써, 장자의 자격 승계)에게 양위하게 하고, 이성계를 태상왕으로 봉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만든답니다.

이때 태조로부터 왕권을 넘겨받은 이방과가 바로 조선의 2대임금 정종입니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이복동생에게 잘못 이양된 왕세자 자리를 자신의 맏형인 이방과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정당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자신의 군사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답니다.

 

왕세자 자리는 여덟째 아들인 방석에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적장자인 방과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당하다는 적장자승계의 원칙을 주장한 것이지요.

 

이처럼, 왕자의 난을 통해서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과를 정종으로 옹립했고,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으로 봉해서 뒷전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400년에도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납니다.

2차 왕자의 난은 이성계의 넷째아들 이방간과 다섯째 아들 이방원간의 왕세자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벌어진 형제간의 왕위계승 다툼이었습니다.

 

1차 왕자의 난의 승리로 이방원이 권력의 실권자로 우뚝 솟아오르면서 정종의 세자로 유력해지자,

방원의 친형인 이방간이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을 품게되었고, 결국 이방간과 이방원이 서로 왕위계승을 놓고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됩니다.

 

그런 와중에 이방간이 이방원을 치기 위해 먼저 군사를 일으켰고, 이 사실을 눈치챈 이방원이 이에 대응하면서, 개경 선죽교에서 서로의 군사를 동원해서 두세력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숙번, 이맹종, 이저와 이화 등 맹장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이방원의 군사가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면서 도망가는 방간의 군사를 추격해 궤멸시켰고,

마지막에 방간을 사로잡으면서 전투는 이방원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2차 왕자의 난의 결과, 이방간은 유배형에 처해지게 됐고, 또다시 승리한 이방원은 정치적 위상이 더욱 견고해지면서, 그는 곧바로 왕세자 지위를 획득하게 된답니다.

아들 즉, 후계자가 없는 정종으로부터 동생인 이방원이 다음 보위를 이을 수 있는 세자의 지위를 부여받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왕세자가 된 때로부터 불과 9개월 후에 정종은 이방원에게 자신의 왕위마저 넘겨주었는데, 왕위를 넘겨받은 이방원이 바로 조선의 3대왕 태종이랍니다.

 

이 당시 권력구조는 조정의 모든 권력은 이방원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정종은 아무런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왕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실권도 없는 왕위에 눌러앉아 있으면서,

이방원과 그의 측근들로부터 눈총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서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는 것이 더 낮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종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동생에게 왕권을 양위하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이방원이 군사반란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가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을 안정시킴으로 인해서,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또한 태종 이방원을 높이 평가하는 또다른 부분은, 그로부터 조선역사상 최고의 위대한 성군인 세종이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슬하에 양념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등 세아들을 낳았는데, 셋째아들 충녕대군이 태종의 다음 보위를 잇는 세종이 된답니다.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이라는 군사반란을 일으켜 집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왕이 됨으로써, 그로부터 조선역사상 최고의 성군인 충령대군이 태어날 수 있었고,

그 충령대군이 왕(세종)이 되어 한글창제 등 훌륭한 문화유산을 만들었고, 모범적인 성군정치를 펼침으로써, 조선이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방원의 왕자의 난은 결과적으로 우리국민들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대한 평가

 

태종 이방원은 원래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고 영특했고,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격하고 호전적이면서 야심만만한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자신의 아버지 이성계를 왕위에서 쫒아내고,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도륙하는 등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찬탈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을 안정화시킴으로서 그의 집권이후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나라의 안정된 기반을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함께 받고 있습니다.

 

저는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게 잘못이 있다기 보다는, 애초부터 첫째부인 소생의 왕자들을 제외시키고, 둘째부인의 소생을 왕의 후계자로 삼은 이성계에게 더 큰 잘못이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 성장한 정실의 아들이 여섯명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11살밖에 안된 그것도 둘째부인의 아들을 무리하게 세자로 책봉하는 어리석은 결단을 내린 이성계에게 원죄가 있다고 판단되며,

이러한 이성계의 잘못된 결단 때문에 애초부터 왕자들의 쿠데타가 일어날만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라, 왕의 후계자를 잘못 선택한 태조 이성계에게 진짜 잘못이 있었다고 봅니다.

원래 왕의 세자 자리는 적장자(큰아들)에게 주는 것이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이자, 당연한 관행이기 때문이지요.

 

이같이 이성계가 적장자에게 세자 자리를 내려주는 적법한 관행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둘째부인의 소생인 어린 아들에게 세자 자리를 내준 것이 이성계가 자초한 엄청난 실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원의 '왕자의 난'은 노망난 아버지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왕권이 뒤바꾼 상태를 자신의 결단과 과감한 조치로 바로잡았던 정변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방원의 군사행동이 정당했다고 하더라도, 나이 어린 두 동생들을 그냥 유배 보내도 될 것을 굳이 살해했다는 점은 크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세자로 책봉된 것은 배다른 동생 이방석의 뜻이 아니라, 노망난 아버지 이성계의 뜻이었고, 이성계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자가 된 11살베기 이방석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흥미로운 아이러니한 사례가 하나 있는데요.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그 해로부터 10여년 전에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감행할 때에, 고려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역적으로 규정했는데,

우왕의 친위군에 의해서 인질이 되거나, 보복살해당할 위험에 처했던 강씨부인과 이복동생(방석과 방번)들을 이방원 자신이 직접 찾아가서 구출해주었는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이방원은 왕위계승투쟁에 휘말리면서 계모 강씨부인과 사이가 나빠지고, 이복동생들을 자신이 직접 죽이는 전과 상당히 모순된 사건을 일으켰다는 점도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눠가질 수 없다고 하는데, 당연히 권력은 형제지간에도 나눠가질 수 없으며, 권력 앞에서는 형제지간도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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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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