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무술스타 왕우의 통쾌한 권법무술영화 외팔이드래곤줄거리내용과 사진, 70년대 중국무협영화 이야기

 

왕우 - 1943년생 현재 나이 78

 

지난달에는 이소룡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므로 이번에는 홍콩무술영화의 또다른 심벌인 왕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왕우는 홍콩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꽤 뛰어난 연기감각과 열정을 지닌 홍콩무협영화 배우이다.

 

왕우는 60~70년대 홍콩영화의 대표적인 액션배우로서, 특히 외팔이시리즈로 한국과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며, 홍콩무협영화계에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무협배우 중 한사람이다.

 

60~70년대 홍콩무협영화가 아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데에는 액션배우 왕우의 공로가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는데

홍콩무협영화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이끌어낸 대표적인 무협배우로 왕우를 꼽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정도로, 60~70년대 시절, 왕우의 무협영화에 대한 공로와 영향력을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왕우는 1964년도에 홍콩의 최대자본의 영화사(왠만한 허리우드영화사보다도 자본력이 훨씬 큰 아시아에서 최대자본의 영화사)인 쇼브라더스사에 수천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영화배우로 스카웃되었는데

이 당시 왕우와 오디션을 함께 보고 스카웃된 배우가 바로 나열(로례)이다.

 

60년대에 홍콩과 한국, 아시아에서는 검객무협영화가 큰 인기를 끌면서 유행하였고, 특히 홍콩의 쇼브러더스사에서 만든 검객영화가 큰 붐을 형성하면서, 아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었다.

 

그 당시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홍콩무협영화들의 상당수가 왕우와 로례(나열)가 주연으로 출연해서 눈부실 정도로 멋지고 화려한 검술액션을 선보이면서, 관객들로부터 커다란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왕우는 외팔이검객의 주인공으로 분해 황홀할 정도로 멋진 액션연기를 선보여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홍콩무협영화의 최고의 인기스타로 우뚝 솟아올랐다.

 

67년도에 만들어져 상영된 왕우의 외팔이검객은 홍콩을 넘어, 대만과 일본, 한국에까지 수출되어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당시 왕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외팔이검객은 그 수익이 홍콩 영화역사상 최초로 100만 달러의 흥행신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 영화로 큰 화제를 모았었다.

 

그렇게, 외팔이검객으로 홍콩무술영화계의 톱스타의 위치로 우뚝 올라서게된 왕우가 소속사인 쇼브라더스사를 퇴사한 후,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감독을 맡아서 만든 권법액션영화가 바로 외팔이드래곤이다.

 

사실 왕우가 최초로 직접 감독을 맡아서 만든 액션영화로는 용호투라는 영화가 있는데, 쇼브라더스사 시절에 왕우가 직접 연출해서 용호투를 만든 이후, 쇼브라더스사를 퇴사해서 두 번째로 자신이 직접 감독과 시나리오, 주연 등 13역을 맡아서 만든 영화가 바로 외팔이드래곤으로서, 이 영화는 한국과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흥행에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왕우가 세 번째로 감독과 주연을 맡아서 만든 권법액션영화가 흑백도이다. 세영화 모두 왕우가 주연으로 출연해서 칼을 버리고, 주먹과 맨손무술을 사용해서 적들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권법무술영화이다.

 

- 왕우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만든 3대걸작 액션영화 -

 

70년 용호투

71년 외팔이드래곤

71년 흑백도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왕우가 직접 감독과 시나리오, 주연의 13역을 맡아서 만든 무협영화로는 용호투’ ‘외팔이드래곤’ ‘흑백도3대 영화가 있는데

3개의 영화는 모두 재미있고, 수준급 이상의 영화로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감동과 재미를 주는 영화가 바로 외팔이드래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 외팔이드래곤71년도에 만들어져서 우리나라에도 상영되어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왕우는 한국 등 아시아에서 일약 최고인기의 무협스타로 우뚝 올라설 수 있었다.

 

적어도 이소룡이 나타났던 1972년 전까지만 해도, 왕우가 최고의 무협스타로 군림할 수 있었는데, 이런 왕우를 최고인기의 무협스타로 만들어준 영화가 바로 외팔이드래곤이었다.

 

왕우는 1960년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거의 10년 동안 홍콩영화계에서 최고로 몸값이 높았던 당대의 인기스타였다

적어도 1972년 이소룡이 출현하기전까지만 해도, 왕우가 중화권의 무협영화계에서는 가장 인기가 높은 최고인기의 무협스타로 군림했었다.

 

그리고 왕우는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단지 영화배우로서만 활동해왔지만, 그는 야먕이 매우 큰 배우였기에, 그는 영화배우로서만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감독직에도 뛰어들어서,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으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은 자신만의 독특한 무협영화들을 만들어 나갔다. 

 

왕우가 최초로 감독직을 맡은 액션영화 용호투와 두번째로 감독을 맡아서 만든 액션영화 외팔이드래곤으로 

중국(홍콩)무협영화의 패러다임을 한순간에 바꿔놓았고, 특히 외팔이드래곤은 당대의 뛰어난 무협영화 중의 명작품으로 관객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다.

 

원래 60년대만 해도 홍콩에서는 칼을 쓰는 검객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1970년을 기점으로 해서 왕우는 과감히 칼을 버리고, 손과 주먹을 사용하는 권법액션 영화를 처음으로 연출해 만들었다.

 

그렇게 왕우가 처음으로 만든 권법액션영화가 용호투였는데, 최초로 주먹만을 사용한 영화 용호투는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그 후에도 왕우는 외팔이드래곤’ ‘혹백도’ ‘사대천왕등 권법액션영화들을 계속 만들어서 선보였고, 이러한 왕우의 노력으로 70년대에는 무협영화계에서 칼을 버리고 주먹으로 싸우는 권격액션영화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런데, 왕우가 자신을 무협스타로 만들어준 쇼브라더스사를 탈퇴하고 영화사를 골든하베스트사로 옮겼던 이유는 바로 게런티문제 때문이다.

 

당시 수많은 무협영화를 만들어서 아시아 영화계의 제왕처럼 군림해왔던 쇼브라더스사는 배우들에게 아주 적은 월급형태의 게런티를 지급해주고 있었는데, 왕우는 이러한 쇼브라더스사의 만행에 반기를 들었고, 제대로된 게런티를 지급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쇼브라더스사와 법원에서 소송전까지 벌이게 된다.

 

이렇게 쇼브라더스사와 소송전을 벌였던 왕우는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소브라더스사와 작별하고, 소속사를 골든하베스트사로 옮겼으며

이후 영화연출까지 맡으면서 칼을 버리고 주먹으로 싸우는 권법영화를 만들어서 선보였고, 권법액션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내는 수훈을 세웠다.

 

 

60년대 홍콩, 중화권영화계에서 대세로 자리잡았던 검술무협영화에서 칼을 버리고 주먹으로 싸우는 권법무술영화를 왕우가 용호투를 통해서 최초로 시도했는데, 이러한 권법무술영화가 흥행에도 상당히 성공한다.

 

 이렇게 왕우가 권법액션영화의 발판을 만들어놨는데, 이소룡이 홍콩으로 건너가서 왕우가 만들어놓은 권법액션영화의 토대를 바탕으로 해서, ‘당산대형’ ‘정무문같은 무술영화에 출연해서

세계적인 무술스타가 될 수 있었으니, 이소룡이라는 걸출한 무술스타가 탄생하는 데에도 왕우가 그 초석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소룡영화는 왕우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거나, 그 소재를 차용한 부분들이 꽤 많이 있다.

 

왕우의 영화 외팔이드래곤에서 나오는 도장이름 정덕무관에서 이소룡영화의 제목 정무관(정무문)’이 도출되어 나왔고, 왕우의 영화 용호투에서 이소룡영화 용쟁호투가 도출되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왕우의 영화 외팔이드래곤에서 자신의 스승을 죽인 일본인 무도가를 상대로 원수를 갚는 내용이 있는데

이소룡영화 정무문에서도 이소룡이 스승을 죽인 일본인무술고수를 상대로 스승의 원수를 갚는다는 유사한 내용이 전개된다.

 

이처럼, 이소룡이 출연했던 영화들은 왕우가 만든 권법영화로부터 여러 가지면에서 영감을 얻거나, 그 소재를 얻는 등 왕우영화로부터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7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한국의 젊은남성들에게는 왕우의 액션영화를 보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왕우는 대단히 큰 인기를 끌었지만, 이소룡이 나타난 이후부터 왕우의 인기는 시들어버리고, 왕우에 대한 관심은 곧바로 이소룡에 대한 관심으로 전이되어 버린 것이다.

 

 세기에 한번 나올까말까 하는 불멸의 스타 이소룡이 출현함으로써, 왕우의 인기와 명예는 상당부분 평가절하되어버리고, 점점 잊혀져가는 올드스타로 자리잡게되고

그 이후 왕우는 배우보다는 감독으로 전향해서 영화감독으로 더 많은 활동을 벌여나가게 된다.

 

왕우의 작품 중에서, ‘외팔이검객과 함께 2대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외팔이드래곤이다.

 

1971년도에 왕우가 시나리오와 감독, 주연의 13역을 맡아서 완성한 외팔이드레곤은 왕우의 권법영화 중에서도 내용과 액션, 구성면에서도 가장 잘 짜여진 정말 액션이 멋드러지고, 스토리가 재미있고, 감동적인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영화이다.

 

이 영화 외팔이드래곤에서는 비록 왕우가 이소룡처럼 화려한 발차기는 선보여주지 못했지만, 왕우는 애절하면서도 다이나믹한 연기력, 절도있는 주먹액션과 뛰어난 스펙터클, 세련된 촬영기법등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관객들에게,

영원히 잊지못할 흥미로운 볼거리와 진한 감동을 선사해주었고, 이 영화로 인해 왕우는 세계적인 액션스타로 우뚝 올라설 수 있었다.

 

왕우의 외팔이드래곤5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아도 여전히 재미있고, 훈훈한 감동을 주는 영화이다.

 

비록 현대의 액션물처럼 컴퓨터 그래픽이나 하이테크 기술을 활용하지않아서 세련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왕우의 외팔이드래곤에서 보여지는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인간미와 불굴의 정의감, 그리고 스승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통해서 따끈따끈하고 훈훈한 인간적인 매력을 물씬 느껴볼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대의 무협액션물에서는 외팔이드래곤처럼 훈훈한 인간미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단지 기계적이고 무의미한 액션만 반복되지 않는가!

 

여러분들도 70년대 무협영화의 추억이 물씬 흥겨나오는 왕우의 외팔이드래곤이나 용호투같은 영화들을 한번 감상해보시기 바란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럼, 이제부터 외팔이드래곤의 스토리를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외팔이드래곤의 줄거리, 스틸사진

 

홍콩에 있는 한 마을에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두 개의 무술도장이 있는데, 정덕무관과 철구문이 그것이다.

 

 정덕무관의 스승 한사부와 철구문의 스승 소사부는 중국최고의 무도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서로간에 치열한 경쟁구도를 형성해나갔는데, 당연히 두 도장의 문하생들도 상호간에 물밑에서 은밀하게 경쟁을 벌여나가고 있었다.

 

정덕무관에서 가장 뛰어난 무예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유천룡은 정덕무관의 스승 한사부로부터 최고의 신임을 받는 문하생으로서, 문하생 중의 으뜸가는 무술고수였고, 사실상 정덕무관의 수제자였다.

 

그런데, 어느날 정덕무관의 수제자 유천룡이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면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마씨 일당을 발견하고는, 그 마씨 일당을 두들겨패면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유천룡이 두들겨팼던 그 사람은 바로 정덕무관과 경쟁관계에 있던 철구문의 고참급 문하생이었다.

철구문파의 문하생이 두들겨맞았다는 사실이 철구문파의 스승 소사부에게 알려졌고, 소사부는 자신의 문하생을 두들겨팬 정덕무관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된다.

 

원래부터 정덕무관의 한사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철구문파의 소사부는 곧바로 정덕무관으로 찾아가서 한사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곧이어 한사부와 소사부간에 치열한 한판대결이 펼쳐졌는데, 10분도 안되어서 철구문파의 소사부가 보기좋게 패배하고 만다.

 

정덕무관의 한사부에게 처절하게 패배한 철구문파의 소사부는 패배한 분을 삭이지못하고 이전보다 더욱 치열한 보복을 하기 위해서

천하에서 무술이 뛰어난 무술고단자들을 여러명 끌어모았고, 엄청난 복수전을 계획했다.

 

철구문파의 소사부가 복수를 위해서 끌어모은 무술고수들은 동아시아 여러나라에서 날고 기는 무술고단자들이었다.

 

철구문팡듸 소사부는 일본의 가라데고수와 그 제자들, 한국의 태권도고단자 김기용, 그리고 유도고단자, 태국의 무에타이 고단자, 티벳의 라마교 고수, 인도의 요가무술의 대가 무라신등 

국제적으로 뛰어난 무술고단자들을 불러들여서 정덕무관으로 쳐들어갔고, 곧바로 두 세력간에 피를 뿌리는 대혈전이 벌어졌다.

 

이로써, 두 도장 세력간에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는데, 정덕무관의 최고실력자 유천룡(왕우역)이 이들 국제무도가들과 대결을 펼치면서, 선전을 펼쳐나갔지만, 종국에는 가라데의 최고고단자를 상대로 한 대결에서 유천룡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패배를 당했고, 그의 오른팔을 짤려나감으로서 외팔이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두세력간의 대결에서, 정덕무관의 한사부가 사망함으로서, 정덕무관은 완전히 패배해서 풍비박산이 났고, 유천룡은 오른팔을 잃고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간신히 탈출한 유천룡은 길거리를 헤메다가 쓰러져서 의식을 잃어버렸고, 때마침 길가를 지나가던 한 부녀가 쓰러진 유천룡을 구출해주었고

그들의 집에 이송된 유천룡은 그 부녀의 알뜰한 치료와 보살핌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부녀의 친절한 보살핌으로 다시 살아난 유천룡은 스승을 죽이고 자신의 오른팔을 앗아간 철전지원수인 철구문파에게 복수를 하기위해서

왼쪽팔 하나만으로 무술을 연마해나갔고, 수년동안 천신만고 끝에 무술최고의 비기인 필살기를 마스터하게 되었다.

 

이미 팔을 하나 잃고 왼팔만이 남은 외팔이신세가 된 유천룡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수년간 익힌 무술 필살기로 무장한 채, 철천지원수인 철구문파의 소사부일당에게 당당하게 도전장을 던졌다.

 

불모의 계곡에서 벌어진 유천룡과 소사부일당과의 대결에서, 외팔이인 유천룡 혼자서 철구문파의 10여명의 국제무술 고단자들을 한사람씩 차례로 대결을 벌여나갔다.

 

 왕우와 딸 왕형평 

 

유천룡은 자신이 보유한 고도의 필살기로 소사부일당의 뛰어난 무술고수들을 한사람, 두사람씩 계속 쓰러뜨려나갔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오른팔을 부러뜨린 철천지원수인 가라데고수를 만나서 최후의 대결을 벌였다.

 

유천룡은 가라데고수를 상대로 일진일퇴의 치열한 혈전을 벌여나갔는데, 종국에는 자신이 수년동안 익혀온 필살기기술로 그 가라데고수를 연속 공격한 끝에

그의 오른팔을 잘라버림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유천룡의 복수전은 마침내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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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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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드미녀여배우 티피 헤드런의 영화 로어아프리카 사자를 위한 영화의 촬영이야기

 

티피 헤드런은 60년대에 허리우드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미녀여배우이지요.

티피 헤드런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과 관련이 깊은 여배우인데,

그녀는 1963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게 스카웃되어 공포스릴러물 의 주인공으로 열연을 펼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여배우이지요.

 

60년대에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했던 공포스릴러영화 ’ ‘마니의 두작품에서 주연으로 출연해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과 함께 작업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던 여배우이지요.

 

티피 헤드런이 주연으로 출연해서 신선한 연기력을 선보였던 영화 가 크게 히트하면서, 

그녀는 1964년도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됩니다.

 

티피 헤드런은 금발의 아름다운 머릿결과 오똑한 콧날, 짙푸른 눈동자를 지닌 허리우드의 아름다운 금발미녀로서

60년대에 전세계의 수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전형적인 고전미인입니다.

 

티피 헤드런은 그녀의 대표작품 에서 선굵은 미모를 뽐내면서 완벽한 연기력을 선보여주였는데

특히 난폭하게 몰려드는 새떼들과 엄청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허리우드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명장면으로 손꼽힌답니다.

 

희대의 공포스릴러물을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모와 고품격 연기력으로, 공포영화의 수준을 한차원 더 상승시켜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허리우드의 진정한 연기자 티피 헤드런은 

지금까지도 그녀의 미모와 연기력을 잊지못하는 수많은 팬들의 마음속의 연인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티피 헤드런의 딸은 유명한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부인인 멜라니 그리피스입니다

물론 멜라니 그리피스와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201520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이혼했지만 말이요.

 

딸 멜라니 그리피스도 유명한 영화배우이지만, 미모만큼은 엄마인 티피 헤드런보다는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60년대 유명한 미녀여배우 티피 헤드런이 사자들과 함께 영화를 찍었던 이야기입니다.

인터넷상에서 티피 헤드런과 그녀의 가족들이 거대한 맹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어서 큰 화제가 되고있는데요.

 

평화스러운 가정집에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친근하게 함께 사진을 찍은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그 상대는 놀랍게도 사자와 호랑이들이었답니다.

 

티피 헤드런과 가족들은 동물의 왕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시무시한 사자와 호랑이들과 함께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찍은 사진들이 공개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티피 헤드런과 가족들은 거대한 사자와 함께 잠도 자고, 수영도 함께 하고, 여가도 함께 보내는 등 여러가지 다양한 모습들이 담긴 사진들이 공개되었답니다.

 

200kg이 훨씬 넘는 거대한 몸집의 사자인데, 이 사자가 한번 물기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상황인데

이 거대한 사자와 그녀의 가족들은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편안하게 함께 사진을 찍은 모습들이 여러장 공개된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티피 해드런은 왜 이 무시무시한 사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것일까요?

 

◆ 티피 해드런, 남편과 함께 사자를 위한 동물다큐영화 '로어' 촬영이야기

 

영화 의 히트로 미국 허리우드여배우로 큰 인기를 끌었던 티피 헤드런과 영화 엑소시스트의 제작자로 유명한 프로듀서 노엘 마셜은 1960년대 후반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됩니다.

 

1970년도가 되자,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는 오랫동안 꿈꾸워왔던 영화 하나를 제작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 영화는 바로 사자와 호랑이 같은 야생의 맹수들과 함께 같이 살아가는 동물다큐멘타리영화 로어(ROAR)’입니다.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는 4년에 걸쳐서 시나리오를 쓰고, 미국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출연배우들을 섭외하였는데요.

 그런데, 그 영화에 출연할 배우들은 놀랍게도 사자와 호랑이, 표범 같은 야생의 맹수들이었답니다.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가 제작하는 영화 로어는 아프리카로 이사온 한 미국인 가족이 야생의 맹수들을 데려와 함께 살면서, 벌어지는 각종 에피소드를 그려낸 사람과 동물이 함께 사는 이야기입니다.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는 미국 전역과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사자와 호랑이, 표범과 재규어 등 사납고 거대한 맹수들을 100마리나 사들였고, 이 맹수들을 모두 영화에 출연시켰답니다.

 

사실 영화 로어의 주인공은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와 사자, 호랑이, 표범 같은 맹수들이었답니다.

 

그런데,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가 이렇게 맹수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든 이유는, 

소외받고 있는 불쌍한 맹수들을 보호하자는 동물보호 캠페인의 일환이었답니다.

 

과거에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가 영화 두편을 촬영하기 위해서 아프리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 사자들이 떼를 지어서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수백마리의 사자들이 가뭄 때문에, 먹이를 구하지못해서 떼거지로 굶어죽어 있었고

그 장면을 본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은 앞으로 사자를 주제로 하고, 맹수를 위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지요.

  

사자들을 직접 영화에 출연시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아서, 맹수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와 제도를 만들자는 취지였답니다.

 

일종의 맹수보호 홍보영화를 만들겠다는 복안이었지요. 그래서 이들 부부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전국에서 100마리가 넘는 맹수들을 수집해서 영화에 출연시켰다고 합니다.

 

 실제로 1974년도에 켈리포니아에 세트장을 마련하고, 영화 로어의 촬영을 시작했답니다

남편 노엘 마셜은 영화감독을, 부인 티피 헤드런과 그들의 세자녀들은 직접 영화에 출연자로 출연했습니다.

 

그들은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그 세트장에서 사자와 호랑이, 표범, 제규어등 사나운 맹수들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허물없이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맹수와 사람이 함께 지내는 장면들은 영화를 통해서 고스란히 공개되었답니다.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가 만든 영화 로어는 기존의 포악하고 무서운 사자가 맹수가 아닌 친구로서

사람들과 친구처럼, 그리고 가족처럼 함께 지내는 모습, 사람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모습을 그려낸 정말 흔치않은 영화로 평가되었습니다.

 

노엘과 티피 헤드런부부는 영화 로어를 통해서, 사자와 호랑이 같은 맹수들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얼마든지 우리들의 친밀하고 편안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가 제작한 영화 로어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되었고, 영화가 개봉된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7년동안의 제작기간을 거쳐서 1981년 드디어 영화 로어가 개봉되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7년 동안이나 사람들을 엄청나게 기대감을 갖게하고 기다려왔던 영화 로어가 개봉되자 마자,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관중들 중 상당수가 영화상영 도중 더 이상 영화를 못보겠다면서, 뛰쳐나오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영화 '로어'에 대해서 많은 비평가들의 혹평과 비난이 쇄도했고, 이 영화를 보고서 야생동물에 대한 후원을 중단하겠다는 요구가 쇄도했습니다.

 

영화 로어가 개봉된 후, 이 영화의 카메라감독이었던 얀 드봉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폭로했는데요.

 

영화 로어를 촬영하는 도중 얀 드봉감독은 사자에 머리에 물려서 머리를 무려 220바늘이나 꿰메는 큰부상을 입었답니다.

 

카메라감독이 촬영 도중에 사자에게 머리를 물려서 죽기 직전까지 갔으며, 간신히 사자에게서 탈출했지만

그의 머리를 크게 물려 머리 뒷부분 전체가 뜯겨져 나갔고, 그는 220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받은 끝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경악과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또한 영화 로우를 본 사람들은 맹수들의 잔인한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고, 영화의 잔인성과 참혹함에 놀라면서, 큰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많은 관객들은 영화의 제작자가 돈을 벌 목적으로, 사나운 맹수들과 사람들을 함께 출연시켜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했다고 비난을 가했습니다.

 

실제로 영화 로우에 출연했던 출연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크고작은 부상을 당했고, 사자에게 물려 죽을 뻔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촬영세트장에는 항상 맹수들이 가득찼는데, 사자가 무려 71마리, 호랑이 26마리, 그외에도 표범과 제규어 등 100마리가 넘는 맹수들이 있었지만, 촬영장의 출연자나 스탭들을 위한 안전장치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어요.

 

 이렇게 위험한 촬영현장에서, 사람들은 촬영 내내 100마리가 넘는 맹수들에게 쫒겨다니면서 종종 사자나 표범에게 물리기도 하고, 할퀴어지는 등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는 일이 속출했답니다.

 

그런데도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는 촬영장의 사자나 호랑이들은 순한 동물이라서 안전하다고 주장했는데요.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는 다자란 수컷사자 '닐'을 집으로 데려와서 키웠는데, 그 숫사자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아무런 사고도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영화에 출연했던 사자나 호랑이들은 집에서 키운 닐과는 달리 야생성을 가진 맹수들이 대부분이어서, 촬영장에서 맞부닥친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큰 부상을 입히곤 했답니다.

 

실제로 촬영하는 도중에, 티피 헤드런도 사자에게 목주변을 물려서 38바늘이나 꿰메는 중상을 입었고, 아들 존은 팔을 물려서 58바늘을 꿰멨고

그녀의 딸 멜라니 그리피스는 사자에게 얼굴을 물려서 50바늘이나 꿰메며, 성형수술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티피 헤드런의 남편 노엘은 같은 부분을 여러번 물려서 피부가 썩어들어가기까지 했답니다.

 

이렇게 영화 로우를 촬영하는 도중, 수많은 스탭들과 출연진들이 사자나 호랑이들에게 물려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속출했습니다.

전체스탭 140명 중에 절반인 70명이 맹수들에게 물려서 병원으로 이송될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맹수들과 사투를 벌이면서 영화를 찍었고, 여러번에 걸쳐 편집까지 하느라 영화는 7년이라는 시간이 소모되었답니다.

 

실제로 영화장면에서는, 갑자기 달려든 사자가 사람의 손을 물어서 손에 피가 철철 흐르는 장면이 노출되기도 했고

사자가 등뒤에서 사람의 뒷머리를 물고 놓지않아서 비명을 지르는 장면 등, 매우 잔인하고 처참한 장면들이 많이 노출되어서, 관객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답니다.

 

처음에는 사자나 표범 등의 맹수들과 사람이 그냥 연기를 하는 줄로 알았지만, 영화속에서 사람들이 사자에게 물려서 피를 흘리거나, 공포에 떠는 장면을 보면서

이것이 연기가 아닌 실제상황임을 인식하면서, 관객들은 모두 크게 경악했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제의 야생의 맹수들을 데려다가 사람과 함께 출연을 시키다니, 이런 촬영현장에서 사고가 나지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티피 헤드런과 남편, 그리고 딸과 아들 등 가족전체가 수십바늘을 꿰메는 큰 부상을 당했고, 70명의 스탭들이 크고작은 부상을 당하는 등 촬영장소는 공포의 도가니나 다름없었습니다.

 

관객들은 이렇게 잔인한 영화를 만들어서 스탭들을 희생시킨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에게 맹비난을 퍼부어댔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 로우의 흥행은 어떤 성적을 거두었을까요?

 

영화촬영 도중 70명의 사람들이 사자등에게 물려 치료를 받고 입원을 했다고 하니, 그 치료비만해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을 겁니다.

 

영화 로우는 총 60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해서 만들었지만, 흥행수익은 제작비의 1/8밖에 되지않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만든 영화가 흥행에도 대참패를 했기 때문에,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 사이도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두사람은 영화실패로 인한 파산으로,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서, 결국 이혼하고 말았답니다.

 

노엘 마셜과 티피 헤드런부부는 도대체 왜 이런 말도안되는 영화를 제작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잘 훈련된 맹수 한두마리만 출연시켰어도 얼마든지 사람과 동물간의 우정을 담은 좋은 영화를 만들 수가 있었는데

무슨 이유로 사자 같은 맹수를 100마리 이상이나 출연시켜서 혼란을 자초했는지, 도저히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만일, 말 잘듣고, 잘 길들여진 사자 한두마리만 출연시켜서, 짜임새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면, 사람들이 다치거나 희생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영화제작비용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고, 관객들의 좋은 호응도 이끌어낼 수 있는 감동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야생의 맹수들을 100마리나 출연시켜서 70명이 넘는 사람들을 부상을 입히면서까지 영화촬영을 강행해서, 결국 흥행에 대참패를 가져오고, 이혼까지한 이들 부부가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나중에, 티피 헤드런은 영화 로어를 촬영할 당시에 사람이 한명도 죽지않은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회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같은 무모한 영화를 만들어서 많은 스탭들을 다치게한 점에 대해서도 사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티피 헤드런의 동물사랑은 전혀 식지않았는데요. 그녀는 남편과 이혼 후에도, 혼자서 동물보호단체를 설립해서, 소외된 동물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답니다.

 

 

영화 로어의 숏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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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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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중국무협영화) 왕우의 외팔이검객 줄거리

멋진 영화이야기 2018. 8. 6. 20:14

 

추억의 홍콩무협영화, 왕우 주연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내용과 줄거리

 

왕우, 반영자, 초교 주연의 1967년도 영화, 감독 정팔

 

아시아에서 무협영화가 가장 발달했던 나라는 단연 홍콩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홍콩이 중국에 편입되어 중국의 특별자치구에 속해있지만, 과거에는 홍콩은 중국과는 다른 독립된 별개의 나라였다.

 

홍콩에서는 60년대부터 무협검객영화가 많이 제작되었고, 아시아전역에서 상영되어 크게 히트하였으며, 이로인해 홍콩에서는 걸출한 무협스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60~70년대 홍콩무협영화를 이끌었던 가장 대표적인 스타가 바로 왕우이다.

 

1972년 이소룡이 등장하기 전까지 홍콩의 최고의 무협스타는 단연 왕우였고, 왕우가 출연한 무협영화들은 한국 등 아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면서 왕우는 아시아 최고의 무협스타로 각광을 받았다.

 

신도, 금연자,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외팔이검객), 용호투, 흑백도, 외팔이드래곤, 사대천왕 등 왕우가 출연해서 크게 히트했던 작품들은 수없이 많았다.

 

이소룡이 나타나기 전까지, 홍콩무협영화는 왕우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나갔으며,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중국무협영화의 최고의 스타는 단연 왕우였다.

 

중국(홍콩)무협영화의 레전드라고도 불리우는 왕우를 아시아 최고의 무협스타로서 급부상하게 만든 영화가 바로 외팔이검객(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이다.

 

외팔이검객은 왕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1967년도에 만들어진 홍콩검객영화인데, 이 영화에서 왕우가 멋진 검술액션과 열성적이고 실감나는 외팔이 검객연기를 펼침으로서,

백만관객을 달성하는 금자탑을 세웠고, 당시 홍콩에서 최고의 히트작이 되었다.

 

즉 왕우 주연의 외팔이검객은 왕우를 중국 최고의 무협스타로 만들어준 그의 효자영화라고 할 수 있다.

 

왕우는 이 외팔이검객영화의 성공을 발판으로 그 후 수많은 무협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최고의 무협스타로 각광을 받게 되었고,

70년대에는 용호투’ ‘흑백도’ ‘외팔이드래곤같은 주먹과 발을 이용한 맨손무술영화를 만들어서 또다시 제2의 전성기시대를 열어나갔다.

 

70년대 전반에는 이소룡이 홍콩영화계에 진출해서, ‘당산대형’ ‘정무문같은 맨손권격영화에 출연해서 최고의 무술스타로 등극하지만, 원래 맨손권격영화를 처음 만들어 히트시킨 인물은 바로 왕우였다.

 

홍콩에서 60년대에는 주로 검술을 소재로 하는 검객무협영화가 크게 각광을 받았다면,

70년대에는 칼을 버리고 맨손으로 싸우는 권격무술영화가 큰 붐을 이루며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권격무술영화를 처음으로 제작해서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왕우이다.

 

왕우는 60년대까지만 해도, ‘외팔이검객’ ‘신도같은 검객무술영화에 출연해서 큰 인기를 끌었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혀 새로운 성격을 영화를 신도해나간다.

 

왕우는 자신이 속해있던 쇼브라더스사에서 자신이 직접 주연과 감독을 겸한 영화의 연출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종전에 주된 영화의 소재였던 칼과 창을 버리고 맨손권법으로만 결투를 펼치는 맨손권법영화를 처음으로 기획, 연출을 시도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영화가 용호투였고, 왕우는 70년도 영화 용후투에서 감독과 시나리오, 주연 등을 맡는 등 13역을 맡아서 용호투라는 최상의 권법무술영화를 만들어냈고, 그의 영화 용호투는 엄청난 히트를 쳤던 것이다.

 

 이처럼 왕우는 단순한 영화출연자가 아니라, 시나리오와 감독직까지 훌륭히 소화해내었던 다재다능한 영화인이었고,

60~70년대 아시아에서 크게 히트하면서 붐을 일으켰던 홍콩무협영화의 최고의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왕우가 붐을 조성한 권법무술영화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이소룡이 출연하는 무술영화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계기가 조성된 것이다.

 

그러니까 왕우는 검객무협영화와 권법무술영화 양쪽을 모두 히트시키고 붐을 일으킨 홍콩무협영화의 최고의 공로자이자 레전드라고 할 수 인물이다.

 

홍콩무협영화의 최고의 스타였던 왕우는 2013년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서 한국의 올드팬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80년대 이후 왕우는 홍콩에서 계속 영화감독을 수행하면서 활발한 영화활동을 벌여오고 있는데, 아직도 그는 홍콩영화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무시하지 못할 홍콩영화계의 막후실력자라고 한다

 

성룡이 출연한 대복성도 바로 왕우가 기획 연출한 영화라고 한다.

 

이렇게 홍콩영화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는 왕우는 2011년 갑자기 뇌졸중에 걸려서 쓰러졌다가 다시 기적처럼 회복된 적이 있는데, 2016년도에 또다시 뇌졸중 증세가 악화되어 다시 쓰러졌다고 하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홍콩무협영화와 홍콩권법영화의 산증인인 왕우가 뇌졸중에서 하루빨리 회복되어서 멋진 무술영화들을 많이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왕우가 출연한 영화 중에서도 특히 액션과 내용이 모두 뛰어났던 매우 인상깊은 영화가 바로 1967년작 외팔이검객이다. 이 영화의 원래제목은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이다.

 

그럼 이번에는 왕우를 홍콩최고의 무협스타로 만들어준 당대 최고의 걸작품 외팔이검객의 줄거리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외팔이검객 줄거리

 

무림의 고수이자 대스승인 제여봉은 많은 무사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의로운 협객이다.

제여봉에게는 아주 무예가 뛰어난 제자 방강이 있는데, 방강은 원래 제여봉의 노예의 아들 출신이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외톨이신세다.

 

외팔이 방강을 사랑하는 여인 패아역의 반영자

 

그런데 스승 제여봉의 딸 패아는 남몰래 방강을 짝사랑하고 있는데, 이를 알고있는 제여봉의 다른 제자들은 방강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방강을 더욱 더 괴롭히고 못쌀게 군다.

 

방강은 다른 동문들과 의롭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느날 스승 제여봉의 집을 떠나가게 된다.

그런데 방강이 떠나는 것을 눈치챈 제여봉의 딸 패아와 다른 사형들이 방강을 따라와서 시비를 걸며 결투를 청한다.

 

제자들 가운데 검술이 가장 뛰어난 방강은 다른 동문들을 가볍게 물리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이를 막던 제여봉의 딸 패아가 내려친 칼을 맞고 그만 오른팔을 잃고 만다.

 

방강을 짝사랑하는 제여봉의 딸 패아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방강에게 홧김에 칼을 휘둘렀는데, 그만 그녀가 휘두룬 칼에 맞은 방강은 외팔이가 되어버렸다.

 

한쪽팔을 잃은 방강은 그대로 달아나다가, 다리밑에서 쓰러져버리는데, 마침 그 강을 배타고 지나가던 여인 소만이 팔을 잃고 기절한 방강을 배에 태워 구출해준다.

 

졸지에 한쪽팔을 잃고 외팔이신세가 된 방강이지만, 그를 구해준 소만은 혼자 사는 여인이라서 두사람이 함께 살면서 결국 부부의 정을 나누게 된다.

 

외팔이가 되어 자신을 구해준 여인과 결혼까지 해 단란한 가정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방강은 무예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외팔이 상태에서도 소만이 준 무예비결서와 아버지가 남겨준 단검을 갖고 계속 혹독한 훈련을 거친 끝에, 검객으로서 최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렇게 외팔이로서 검객 최고의 경지에까지 오른 방강은 어느날 길거리를 거닐다가, 자신의 옛 문하동기들과 제여봉의 딸이 다른 검객들에게 붙잡혀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을 목격한다.

 

무림가의 대스승 제여봉에게는 또다른 무술고수 장비신마라는 경쟁자가 있었다.

두사람은 과거 한때 한 문파에 속해 있었지만,

두사람간의 최고가 되려는 경쟁의식 때문에, 두사람은 서로 원수지간처럼 대립하는 적대관계가 되어버렸다.

 

장비신마는 무도계의 라이벌인 제여봉을 제거하려고 사악한 음모를 꾸민다. 장비신마는 제여봉의 제자들을 하나둘씩 습격해서 죽여나갔다.

 

장비신마는 갈고리칼인 금도쇄라는 최강의 칼이 있었는데, 이 금도쇄로 제여봉의 부하들을 하나둘씩 죽여나갔고, 결국 제여봉을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빠트려버린다.

 

스승 제여봉의 딸 패아도 장비신마의 부하들의 마수에 걸려서 감금당한 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같은 사실을 알아챈 외팔이 방강은 기습적으로 장비신마의 부하들을 습격해서 죽인 다음, 죽을 위기에 처한 제여봉의 딸을 구출해낸다.

 

과거에 자신의 팔을 배어서 외팔이가 되게 만든 제여봉의 딸 패아를 이번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외팔이 방강이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몇 년 만에 방강을 다시 만나게 된 제여봉의 딸 패아는 방강에게 그동안 방강을 사모하는 자신의 속마음을 전하고 청혼을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소만을 배신할 수 없다면서 방강은 패아의 청혼을 거절한다.

 

한편 제여봉은 자신의 55살 생일잔치 때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은 무림에서 떠나겠다고 은퇴선언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제여봉이 은퇴선언을 한 날에, 그의 최대의 라이벌인 장비신마가 부하들을 대동하고 제여봉의 집으로 쳐들어와 결투를 요청한다.

 

결국 제여봉의 생일날, 그의 집에서 제여봉과 장비신마 간에 목숨을 건 한판 대결이 펼쳐지는데, 제여봉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장비신마의 갈고리칼 금도쇄에 걸려 커다란 부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

 

제여봉의 제자들도 대부분 장비신마의 부하들과의 결투에서 크게 패배해서, 쓰러지고 마는데, 제여봉과 그의 부인, 그리고 딸 패아는 모두 장비신마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그 위급한 상황에, 갑자기 밖에서 외팔이 방강이 그 집을 찾아온다.

 

장비신마 일당이 스승 제여봉을 급습한다는 첩보를 전해들은 외팔이 방강이 스승을 구하기 위해 급하게 찾아온 것이다.

 

이미 외팔이검객으로서 최고의 무술경지에 오른 방강은 장비신마의 부하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리고 나서, 장비신마와 목숨을 건 결투를 펼친다.

 

자신을 키워준 은인이자, 오늘날의 외팔이검객 방강을 만들어준 대스승 제여봉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원수인 장비신마와 사력을 다해 혈투를 펼친 끝에, 마침내 방강은 장비신마를 죽이고 스승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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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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