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가짜다, ‘남자라는 음모론, 후계자, 독신으로 산 이유

 

엘리자베스 1세 출생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

 

영국 제국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아시나요?

 

16세기 후반 유럽열강들의 치열한 각축과 아귀다툼 속에서도 훌륭한 정치력과 과감한 결단력, 그리고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후진국이었던 영국을 세계최강의 제국으로 발전시킨 철의 여인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 영국여왕입니다.

 

이 시기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뛰어난 통치력에 힘입어서 후진국이었던 영국은 ‘해가 지지않는 나라’라고 칭할 정도로, 세계 최강의 반열로 뛰어올랐답니다.

마치 지금 세계최강국인 미국처럼 16세기에 영국을 세계최고의 강대국반열로 올려놓는데 기반을 마련한 국왕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랍니다.

 

지금의 영국여왕은 16세기에 영국을 최강의 제국으로 올려놓는 위대한 업적을 쌓은 최고의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의 위대한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 2세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지요.

 

◆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탄생비화와 업적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는 헨리 8세이고, 어머니는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인 앤 블린이었지요.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는 우리가 보았던 영화 ‘천일의 앤’의 여주인공인 바로 천일의 앤 그녀인 ‘앤 블린’입니다. ‘천일’은 앤 블린이 왕비가 된 지 1,000일이 된 날에 왕비직을 박탈당하고 처형당했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랍니다.

 

그녀의 어머니 ‘앤 블린’은 헨리 8세와 결혼해서 왕비가 되었지만, 헨리 8세의 아들을 출산하지 못한 나머지, 헨리 8세의 노여움을 사서 외간남자와 불륜을 피웠다는 거짓누명을 쓰고 참혹하게도 처형을 당한 비운의 왕비였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도에 아버지 헨리 8세와 앤 블린의 딸로 때어났는데요.

영국왕 헨리 8세는 총 여섯 번의 결혼을 했답니다.

 

원래 앤 블린은 헨리 8세의 첫왕비였던 캐서린의 시녀였는데,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못하자, 상심한 헨리 8세를 유혹해서 두 번째 왕비가 된 여인입니다.

 

그리고 헨리 8세와 앤 블린 사이에 딸 엘리자베스 1세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헨리 8세는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의 출산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에,

딸을 낳은 앤 블린은 왕의 미움을 사게되었고, 급기야 헨리 8세는 앤 블린에게 간통을 저질렀다는 거짓 죄명을 뒤집어 씌워서, 그녀를 처형시켜버립니다.

 

어머니가 간통죄로 처형당했을 때 딸 엘리자베스 1세의 나이는 고작 3살이었는데, 어머니 앤 블린이 간통죄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는 아버지 헨리 8세의 관심권에서 멀어졌고, 급기야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해트필드하우스로 보내어졌으며, 사람들로부터 ‘불결한 앤의 딸’이라고 손가락질까지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엘리자베스 1세는 비록 왕의 딸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처형당하면서 어린 시절을 매우 불우하게 보내게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왕궁의 변방에서 외롭게 자라나던 엘리자베스 1세였는데, 1558년 24살의 나이에 아버지 헨리 8세의 자녀들이 모두 죽게되면서 그녀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헨리 8세가 죽으면서 그의 왕위를 물려받았던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가 15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영국 여왕이 된 이복언니 메리 1세마저도 병에 걸려서 일찍 죽게되자, 이제 국왕의 자리는 마지막 남은 헨리 8세의 유일한 혈육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1558년 24살이 된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영국여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영국 국왕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는 ‘불결한 앤의 딸’이라는 그간의 오명을 벗기위해서 한치의 흐트럼없는 정숙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고, 실제로도 여자로서 정숙함을 잃지않았습니다.

 

영국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는 재위기간 동안 뛰어난 통치술을 발휘했고, 화폐개혁등 경제개혁을 단행해 영국을 부강하게 만들었고,

당시 유럽의 패권국이었던 스페인을 격파해서 해상무역권을 확보해서 영국을 세계제일의 해양국가이자,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는 동인도회사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 식민지건설을 본격화해 영국을 일명 ‘해가 지지않는 나라’라고 하는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한 인물도 엘리자베스 1세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왕으로서 아메리카대륙을 최초로 발견했으며, 그녀의 명으로 발견한 아메리카 지역을 '버지니아'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은 엘리자베스 1세가 '처녀'라는 의미에서 그지역을 '버지니아'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후진국이었던 영국을 유럽의 최강대국으로 만들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45년 동안 영국을 다스렸던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영국을 최강국의 지위에 올려놓았던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결혼하지않고 독신으로 산 것으로 유명하답니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처녀여왕’이라는 닉네임이 붙게되었지요.

 

◆ 평생 독신으로 산 엘리자베스 1세, 독신으로 산 이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영국의 튜더왕가는 그녀를 끝으로 왕가의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항상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답니다.

 

그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을까요? 그녀가 정말로 국가를 극도로 사랑했기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을까요? 아니면 또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오늘은 영국 역대 최고의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는 엘리자베스 1세가 독신으로 살았던 이유와 그녀와 관련된 아주 비밀스럽고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독신으로 살았던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어렸을 때에 어머니가 아버지에 의해서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았고, 급기야 어머니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과 트라우마를 얻어서, 평생 남편없이 살 것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영국의 시모어제독이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을 했다가, 정부의 허가없이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것을 겪으면서, 큰 충격을 받은 것도 그녀가 독신으로 살게된 계기를 부여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같은 이유는 그저 표면적이면서 상투적인 이유에 불과하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독신으로 산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고 합니다.

 

◆ 엘리자베스 1세의 음모론, 그녀는 가짜다, 엘리자베스 1세는 남자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재위기간 45년 동안 영국을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인데, 그녀는 여성의 나약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인내심과 진취적인 기상이 남자 못지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당시 영국보다도 더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해상권을 놓고 전쟁이 벌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저없이 전쟁을 선택해서 결국 치열한 전쟁 끝에 영국이 승리할 수 있게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했습니다.

 

이 기록과 행동에서 알 수 있듯이, 엘리자베스 1세는 여성성보다는 남자 같은 강인한 기질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런데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지, 300년이 지난 뒤에 엘리자베스 1세의 성정체성에 커다란 의문이 제기됩니다.

한 학자로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은 가짜입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입니다.

 

소설 ‘드랴큘라’를 썼던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브램 스토커’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가짜이며, 그녀는 어렸을 때에 바꿔치기한 다른 사람이다’라는 놀라운 주장을 펼쳤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10살이던 1543년 영국에는 전염병이 창궐합니다. 그러자 딸의 안위를 걱정한 아버지 헨리 8세의 명을 의해서 엘리자베스 1세는 런던으로부터 140km나 떨어진 비슬리로 가게됩니다.

그리고 1년 후 전염병이 사라지자, 그녀는 헤트필드하우스로 다시 돌아오게됩니다.

 

그런데, 이 때 다시 돌아온 엘리자베스 1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고 하는데요.

 

- 엘리자베스 1세가 가짜라는 근거 -

 

첫째, 그녀는 원래 몹시 사람들을 멀리하는 내성적의 성격이었는데, 다시 돌아온 엘리자베스 1세는 아주 활발하고 명랑한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뀌어있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내향적인 성격에서 외향적인 성격으로 성격이 180도 바뀌어있었다고 해요. 사람의 성격은 결코 쉽게 바뀌는 게 아닌데 말이지요!

 

둘째, 엘리자베스 1세는 전에는 프랑스어를 전혀 못했는데, 다시 돌아온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랑스어를 아주 능통하게 잘 구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셋째, 엘리자베스 1세의 필체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하는데요.

원래 엘리자베스 1세의 필체는 각지고 날카로운 필체였는데, 다시 돌아온 그녀의 필체는 그림을 그리듯이 아주 부드러운 필체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사람의 필체는 평생동안 결코 바뀌지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1세의 필체는 전혀 다른 필체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변한 것들을 근거로 해서 브램 스토커는 ‘엘리자베스 1세는 가짜이며, 여자가 아닌 남자다’라는 주장을 강력히 제기했습니다.

 

브램 스토커의 주장에 따르면, 1543년 비슬리로 이주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창궐하던 전염병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는데, 그녀를 돌보아왔던 하인들은 헨리 8세로부터 처형당할 것이 두려워서, 엘리자베스 1세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전염병에 걸려 숨진 엘리자베스 1세와 닮은 아이를 찾아서 바꿔치기했다고 하는데, 바꿔치기한 애는 여자가 아닌 남자애였다고 하며,

그 남자애가 엘리자베스 1세와 너무도 많이 닮아서 유모와 집사가 그 남자애를 죽은 엘리자베스 1세로 감쪽같이 바꿔치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바꿔치기한 남자애를 마치 엘리자베스 1세인 것처럼, 머리도 기르게하고 예쁘게 단장시켜서 여자인 것처럼 분장시켜서 주위사람들을 속여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브램 스토커는 여러 가지 근거들을 토대로 해서 엘리자베스 1세는 가짜이며,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한 남자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브램 스토커의 ‘엘리자베스 1세는 가짜다’라는 주장에 대해 처음에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엘리자베스 1세가 가짜라는 대한 또다른 강력한 근거가 나옵니다.

 

1870년, 비슬리에서 목사 토마스 캐블이 엘리자베스 1세가 머물렀던 성을 리모델링하는 공사를 진행했는데, 그는 아주 이상한 것을 하나 발굴해냅니다.

토마스 캐블은 그 성 정원에서 석관 하나를 발굴해내는데, 그 석관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영국 튜더왕조 시절의 드레스를 입은 10살 정도의 아이의 유골을 발견합니다.

 

이 당시에는 일반인은 석관을 쓸 수가 없는 시절이었고, 더욱이 왕족이 사는 성의 정원에 일반인의 석관무덤은 결코 들어설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석관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당시의 정황이나 아이의 나이, 상태 등을 감안해본다면, 이 석관무덤의 주인은

튜더왕족의 여자아이의 유골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그 유골은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이 당시 엘리자베스 1세의 나이도 10살이었고, 그녀가 살았던 곳도 바실리의 그 석관이 나온 바로 그 성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살았던 성도 똑같고, 그 당시의 엘리자베스 1세의 나이도 똑같고, 왕족이 입는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었다는 점 등을 모두 고려해본다면,

이 석관무덤의 유골은 바꿔치기해졌다고 여겨지는 엘리자베스 1세의 유골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비슬리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갑자기 전염병에 걸려 죽자, 그녀를 돌보아왔던 유모와 집사는 그녀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서 엘리자베스 1세와 닮은 아이를 물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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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모와 집사는 엘리자베스 1세와 꼭닮은 아이를 찾았는데, 그 아이는 여자가 아닌 남자아이였습니다.

 

얼굴은 엘리자베스 1세와 판박이로 닮았는데 남자아이였기 때문에, 그 남자아이를 여자처럼 머리를 기르게하고, 예쁜 드레스를 입히는 등 철저히 여장을 시켜서 엘리자베스 1세로 둔갑시켰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영국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는 가짜이며,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는 겁니다. 물론 그 가짜 엘리자베스 1세는 철저히 여장을 했던 것입니다.

 

◆ 엘리자베스 1세가 남자였다는 근거

 

엘리자베스 1세가 남자라는 또다른 근거들이 더 있습니다.

 

당시 엘리자베스 1세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왕족들과 귀족들 사이에 굉장히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 당시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 프레데리크 2세, 스웨덴왕 에릭 14세, 프랑스왕 샤를 9세, 덴마크귀족 아돌프공작, 오스트리아 귀족 샤를 대공 등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청혼을 받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프러포즈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유럽왕실에서는, 왕족들간이나 귀족들 사이에 정략결혼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한 국가의 왕족이 다른 국가의 왕족과 결혼을 하게되면,

자연스럽게 결혼동맹이뤄지면서 강력한 군사동맹이 이뤄져서 국가를 지키는 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발언권을 강화하는 데에 대단히 유리해집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럽각국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다른 국가의 왕족과 결혼동맹을 맺곤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한 유럽의 왕들

 

그런데, 이렇게 유럽의 유력한 왕족들로부터의 수많은 청혼을 엘리자베스 1세가 모두 거절했다는 것 또한 매우 커다란 의문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절로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찬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어쩌면, 엘리자베스 1세는 이런 유력한 왕족들의 청혼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무슨 특별한 이유를 갖고있었던 건 아닐까요?

엘리자베스 1세는 진짜 여자였더라면, 이런 유력한 왕족들의 청혼을 굳이 모두 거절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엘리자베스 1세가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면, 유력한 왕족들의 청혼을 모두 거절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가 남자였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왔습니다.

 

생전에 엘리자베스 1세를 그린 초상화를 보면, 그녀의 모습이 여자보다는 남자의 두상에 더 가까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단지, 머리를 길게 길렀을 뿐이지, 그녀의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날카로운 메무리코에 툭 튀어나온 눈, 우락부락한 얼굴골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우 넓고 툭 튀어나온 까진 이마 등은 남자의 얼굴에서 나오는 특징인데,

그녀의 초상화에서 여자의 얼굴보다는 남자의 얼굴에 더 가깝다는 것을 어렵지않게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초상화를 보면, 모든 초상화의 그림이 그녀의 목을 모두 가린 모습만 나오는데,

남자에게만 있는 목젖을 가리기 위해서 일부러 목을 가린 의상을 입고나온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인데, 광대뼈와 이마가 튀어나오는 등 우락부락하게 생겼는데, 좀 남자같이 생기지 않았나요?

 

만일, 진짜 여자의 초상화라면, 굳이 목을 가리지 않았을 겁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초상화를 한번 보십시요! 초상화에서 그녀의 목을 훤히 드러내고 있지않습니까?

 

왜냐하면, 여자의 목과 쇄골라인은 여자의 아름다움의 상징이기 때문이지요. 마리 앙뚜아네트의 초상화 중에서 목을 가린 초상화는 단 한 개도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모든 초상화들이 전부 그녀의 목을 가린 상태로 그려졌다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여자가 아닌 남자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는 항상 직접 말을 타고다녔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왕비는 모두 마차를 타고다니는 게 상례였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엘리자베스 1세는 마차를 타지않고 자신이 직접 말을 타고 몰고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는 엄청 말을 빨리 달렸다고 하는데요. 호위병들보다도 훨씬 빨리 말을 몰았다고 합니다.

이 점을 보더라도, 엘리자베스 1세는 여자보다는 남자일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는 죽기 직전에 특별한 유언을 남겼는데요.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자신의 몸을 부검하지 말라고 했고, 그녀는 자신이 입은 옷 그대로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이런 유언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신체를 절대로 노출시키지않게 하려고한 의도라고 판단됩니다.

왜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이 죽은 후에 자신의 신체를 노출시키지 못하게 했던 걸까요?

 

만일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의 신체가 노출된다면, 그녀가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는 것 - 그녀가 가짜였다는 것 - 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또한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녀가 여성의 나약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남자처럼 강인한 기질을 갖고있었다고 하는 기록을 보더라도, 엘리자베스 1세가 여자보다는 남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엘리자베스가 평생 독신으로 산 이유와 그리고 그녀가 남자라는 가설에 대한 결론을 내릴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한나라의 최고의 지존인 국왕으로서 결혼할 수 있는 모든 유리한 조건을 다 갖고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1세가 처녀로서 평생 독신을 고집하고 살았던 것은, 아마도 그녀가 결혼하면 자신이 가짜(남자)라는 것이 들통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만일, 엘리자베스 1세가 다른 왕들처럼 결혼을 했더라면, 자신이 아이를 낳지못하는 남자라는 비밀이 곧바로 탄로날 것이며, 이것은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온천하에 드러내는 일일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엘리자베스 1세는 곧바로 탄핵을 당할 것이고, 어쩌면 처형까지 당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탄로나지않게 하기 위해서, 평생 결혼하지않고 독신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의 알콩달콩한 행복보다는 더 스케일이 큰 왕으로서의 권력을 획득하는 쪽을 택한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 자체가 그녀는 가짜이자, 남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독신으로 사는 바람에, 그녀의 사후에 그녀의 튜더왕가는 대가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후계자를 지명하는 순간에 권력의 추가 다른 곳에게로 옮겨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우울증과 노환으로 70세의 나이에 사망했는데, 그녀의 뒤를 이은 후계자는 스코틀랜드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제임즈 6세)에게 돌아갔습니다.

 

스코틀랜드 메리는 헨리 8세의 누나로서 헨리 8세의 외척이라고 할 수 있고, 결국 헨리 8세의 누나의 아들 즉, 헨리 8세의 외조카인 제임스 1세가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왕권을 이어받았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의 유해는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있는 왕실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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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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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이혼과 교통사고, 사망원인배후와 음모론

 

다이애나 황태자비 출생일 1961년 7월 1일 ~ 사망일 1997년 8월 31일 나이 37살

 

1997년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의 방송국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전 영국의 황태자비인 다이애나 스펜서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인해 사망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리츠호텔 식당에서 다이애나 스펜서는 남자친구 도디 알파예드와 함께 저녁식사를 한 후,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퐁드랄마 지하차도에서 자동차가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 사망했습니다.

 

전 황태자비인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녀의 죽음에는 석연치않은 많은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창 꽃피울 37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점, 그녀가 탄 자동차가 파리도심지의 도로에서 차가 완전히 박살날 정도로 엄청나고 처참한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점, 그리고 교통사고가 난 후, 무려 1시간 30분이 지난 후에야 그녀를 인근병원으로 이송했다는 점 등의 커다란 의문점들이 많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남자친구 도디 알파예드와 저녁식사를 함께한 후, 다른곳으로 이동하던 중 그녀의 자동차 뒤쪽에는 수많은 파파라치들이 쫒아왔고, 다이애나가 탄 자동차는 시속 110km의 엄청난 속도로 달려갔다고 하는데, 파리의 퐁드랄마 지하차도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다른차와 충돌하는 등 순식간에 3중 연쇄충돌 사고를 일으킨 그녀가 탄 자동차는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많은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그녀가 탄 자동차가 교통사고를 당한 퐁드랄마 지하차도에서 찍힌 참혹한 현장사진 때문이랍니다.~

 

차가 수없이 많이 다니는 파리의 도심지 한가운데에서 그녀가 탄 자동차는 앞부분이 완전 박살나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부숴져 있었답니다.

가장 안전하고 튼튼하다고 알려진 독일의 벤츠자동차가 도심지 한가운데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심하게 자동차가 부숴질 수 있을까요?

 

그녀가 탄 밴츠자동차는 마치 전쟁터에서 미사일이나 폭탄을 맞아 부숴진 탱크처럼 완전히 박살나 있었는데, 이게 도심지 한가운데서 교통사고로 이렇게 처참하게 부숴질 수 있었을까요?

 

이 사고는 단순한 교통사고였을까요,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계획적인 교통사고였을까요?

다이애나비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에는 누군가에 의한 어떤 사악한 음모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자동차에는 다이애나 비와 이집트 부호의 아들 도디 알파예드, 운전기사 앙리 폴, 보디가드 트레버 리스 존스 등 총 네명이 타고있었는데, 교통사고로 경호원 리스 존스만 살아남았고, 다이애나를 비롯한 세명이 전부 사망했습니다.

 

◆ 97년 8월, 파리에서 일어난 다이애나비 자동차의 교통사고의 전말

 

교통사고의 전말을 이렇습니다. 리츠호텔을 출발한 다이애나가 탄 자동차는 5분 후인 밤 12시 25경에 퐁드랄마 지하차도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앞서 가던 자동차와 한차례 충돌한 후, 또다시 왼편 터널기둥과 거세게 충돌한 후, 또다시 반대편벽에 강하게 또다시 충돌했습니다.

 

즉, 다이애나가 탄 자동차는 퐁드랄마 지하차도에 들어선 후, 갑자기 3중 충돌을 일으키면서 완전 박살나고 말았고, 그 차안에 타고있던 다이애나비를 비롯한 네명의 탑승자들은 그 충격으로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하도로에서 다른차와 기둥과 지하내벽 등과 3중 충돌을 일으킨 교통사고로 인해 자동차의 뒷좌석에 타고있던 다이애나비는 심각한 머리부상 및 내장파열을 일어나는 커다란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혹점은 다이애나비가 탄 자동차가 충돌하는 순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마치 큰 폭탄이 폭발하는 것같은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음모론이 나오고있는데요, 음모론자에 따르면, 누군가가 다이애나비가 탄 자동차에 폭탄을 설치해서 그 차가 지하차도에 들어서는 순간에 폭탄이 폭발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이지요. 그렇지만 다이애나비 교통사고는 이런 음모론이 나올 정도로 여러가지 석연치않은 의혹점들이 많고, 미스테리한 부분들이 많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이날 다이애나비가 움직인  행적을 다시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날밤 12시 20분 경, 다이애나비가 탄 밴츠자동차는 파리 리츠호텔을 출발한 후, 7분 후에 퐁드랄마 지하차도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녀가 탄 자동차는 갑자기 앞자동차와 충돌하면서 3중 연속 충돌을 일으켰고,

그 차에 타고있던 다이애나비는 큰 중상을 입고 생사를 오가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지요.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신고로 경찰구조대와 앨블런스가 출동했고, 부숴진 차안에 있던 다이애나비와 일행들을 꺼내어서 인근의 병원으로 이송시켰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큰 중상을 당한 다이애나비를 인근의 병원으로 옮기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고장소로부터 불과 4km거리에 있는 오뗄디유병원까지는 자동차로 약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런데, 밤 12시 32분경 사고현장에 구급차가 도착했고, 곧바로 쓰러진 다이애나비를 차에 태우고 출발해야하는데, 구급차는 곧바로 출발하지 않습니다.

 

구급차는 그 때로부터 무려 48분이 지난 후에야 병원을 향해 출발했으며, 그리고 출발한 지 46분이 지난 후에야 오뗄디유병원에 도착해 다이애나비를 응급실로 이송시킵니다.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교통사고 환자는 골든타임이 중요한데, 현장에 도착한 구급차는 부상당한 다이애나비를 실고 무려 1시간 34분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서 인근의 오뗄디유병원으로 이송했다는 겁니다.

 

병원으로 이송된 다이애나비는 의료진으로부터 큰수술을 받았는데, 그녀는 의료진의 응급 흉부절개술을 받던 중 왼쪽 폐정맥이 찢어져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날 새벽 4시에 다이애나비는 의료진으로부터 공식 사망판정을 받았습니다.

 

혼수상태에 있는 다이애나비를 고작 4km 거리 즉, 10분 거리에 있는 오뗄디유병원까지 이송시키는데 무려 1시간 34분이나 소요시켰다고 하니, 이것 또한 커다란 의혹이 생기는 부분입니다.

 

혹시 누군가의 지시로 인해 10분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다이애나비를 이송시키는데 1시간 34분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지체시켜서,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들어서 고의적으로 그녀를 죽게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음모론이 생기는 부분입니다.

 

아뭏튼 10분 밖에 안걸리는 병원에 혼수상태인 다이애나비를 이송시키는데, 무려 1시간 30분이 넘는 시간을 소요시킨 것은 커다란 의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의혹에 대해 그당시 그녀를 이송시킨 구조대원들은 사고를 당한 그녀를 꺼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고, 혼수상태인 다이애나비에게 응급조치를 취하는 데에도 적지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상을 입은 다이애나비를 꺼내고 이송시키는데 1시간 30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며,

만일, 구급대가 다이애나비를 좀 더 빠르게 병원으로 이송시켜서 치료를 해주었다면, 어쩌면 그녀를 살릴 수도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이처럼 다이애나비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을 때에, 이런 저런 의혹점들이 많이 노출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 사이에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서 다이애나 황태자비를 고의적으로 죽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음모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를 죽음으로 이르도록 배후에서 사주한 사람으로 단 한사람이 지목되고 있는데, 바로 그녀의 전남편인 찰스황태자입니다.

 

37살의 젊은 나이에 석연치않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다이애나비를 죽음에 이르도록 사주한 배후인물로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전남편인 찰스황태자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이애나비 사망의 의혹점은 이 뿐만아니라 또 한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다이애나비가 죽기 전에 썼던 그녀의 친필편지가 그것인데, 다이애나비가 쓴 친필편지 또한 그녀의 사망원인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어서 소개합니다.

 

◆ 다이애나비가 죽기전에 작성한 친필편지의 충격적인 내용

 

다이애나가 사망하기 전에 쓴 그녀의 친필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편지에는 너무도 놀라운 내용이 담겨있어서 큰 충격을 주고있습니다.

다이애나가 쓴 친필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시기입니다. 나의 차사고, 브레이크고장, 나에 대한 심각한 머리부상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내 남편 찰스가 내연녀와 재혼하기 위해 교통사고를 계획하고 있습니다’라는 놀라운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편지는 다이애나가 죽기 전에 직접 쓴 친필편지인데, 그 내용에는 마치 자신의 미래를 내다본 것처럼, 자신에게 도래할 미래의 교통사고를 예측하는 내용들이 들어있답니다.

놀랍게도 다이애나의 자필편지에는 자신의 전남편인 찰스황태자가 자신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편지내용은 나중에 거의 그대로 실현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예측대로 파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서, 머리와 내장이 심한 파열을 당해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이애나비의 편지내용 속에 전남편 찰스황태자가 그녀의 암살을 위한 교통사고를 계획했다는 내용이 나와서 큰 충격을 주고있습니다. 

 

그녀의 친필편지의 내용대로 정말로 찰스황태자가 교통사고를 계획한 것이 사실일까요?

현재로서는 다이애나비가 예측했던 대로 찰스황태자가 그 교통사고를 사전에 계획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친필편지가 공개된 후, 사건을 담당했던 프랑스 파리경찰은 찰스황태자를 실제로 소환해서 조사까지 벌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조사를 받은 찰스황태자는 경찰에서 무혐의판정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비록 찰스황태자가 혐의를 벗었다고 하지만, 다이애나 비가 사전에 찰스황태자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교통사고를 계획했다고 예언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놀랍고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이애나는 자신이 예언한 내용 그대로 교통사고를 당해서 사망한 것이 사실이어서 더욱 소름끼칠 정도로 놀랍습니다!

단, 그녀의 예언대로 진짜로 찰스황태자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 그러한 교통사고를 계획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않아서,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습니다.

만약, 이같은 다이애나비의 편지내용이 사실이라면, 찰스황태자는 왜 굳이 다이애나비를 죽이려고 계획했던 걸까요?

 

찰스황태자가 다이애나비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그와 오랫동안 내연관계에 있던 카밀라와 재혼하기 위해서라고 음로론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찰스황태자가 진짜로 사랑했던 여인은 카밀라 파커 볼스였고, 그녀와 재혼하는데에 다이애나비가 걸림돌이 될 수 있기때문에, 카밀라와의 완벽한 결합을 위해서 다이애나비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같은 주장도 약간 모순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다이애나비는 찰스황태자와 이미 이혼한  후였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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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또다시 나온 음모론은 영국왕실에서는 즉 다음 후계자가 될  윌리엄왕자의 모친인 다이애나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다른 남자의 씨를 임신하는 것을 막기위해서, 도디 알파예드와 결혼할 가능성이 있는 다이애나를 제거했다는 겁니다.

 

당시 다이애나는 이집트의 백만장자인 도디 알파예드와 연애를 하고 있었고, 두사람 간에 함께 데이트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찰스왕의 뒤를 이어 다음번의 영국국왕이 될 윌리엄왕자의 모후인 다이애나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는다면, 이것은 영국왕실의 존엄과 위엄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라고 영국왕실을 판단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국왕실의 존엄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영국왕실이 직접 모의를 해서 교통사고를 가장해서 다이애나비를 죽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단지 영국왕실의 존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한 때 윌리엄왕자의 모후이자 황태자비였다가 이혼한 다이애나 스펜서가 다른남자의 애를 임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의로 교통사고를 일으켜 그녀를 죽게만들었다고 하니, 정말 충격적이고도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때 왕실의 왕비로 있다가 이혼한 여자는 결코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도,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아서도 안된다는 법이 있을까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국왕실은 한 개인의 생명과 인권은 안중에도 없는 정말 포악하고도 무도한 집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음모론일 뿐이며, 다이애나비가 정말로 영국왕실의 음모에 의해서 암살당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않고 있습니다.

 

◆ 다이애나비, 찰스황태자와의 세기적인 결혼은 오히려 불행의 시작?

 

다이애나 스펜서와 찰스황태자는 1981년 7월 29일 세기적인 결혼식을 올립니다.

두사람의 세기적인 결혼식은 50개국에 생중계로 방송되었고, 전세계의 7억 5천만명이 두사람의 성대한 결혼식을 시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세계인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렸지만, 다이애나비에게는 찰스황태자와의 결혼은 그야말로 악몽이 되고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찰스황태자는 결혼하기 전부터 사랑하는 여인이 한명 있었는데, 카밀라 파커 볼스가 바로 그의 오래된 연인이었습니다. 

 

다이애나비도 찰스왕자에게 카말라라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있었지요.

원래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카밀라가 찰스왕자의 여사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카밀라를 단순히 찰스황태자와 그저 친한 친구로만 알고있었기에, 두사람 사이를 별로 의심하지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카밀라에게 접근해 ‘언니’하면서 잘 따랐다고 하며, 친해진 카밀라가 다이애나의 결혼예복까지 골라주었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다이애나는 카밀라를 의심하지않고 있었고, 그냥 친한 언니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이애나비가 찰스황태자와 약혼하고 난 후, 어느날 찰스와 카밀라가 전화통화하는 것을 듣게되었는데, 그 통화를 통해서 두사람이 연인관계인 것을 깨닫게되었다고 합니다.

 

◆ 찰스황태자의 외도와 카말라와의 불륜관계

 

두사람간 전화통화에서 찰스는 카밀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는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찰스와 카밀라는 단순한 친구사이가 아니라 내연관계라는 것을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그 때 처음으로 알게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찰스 황태자가 결혼한 후에도, 찰스의 외도는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두사람이 연인관계임을 알게된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찰스에게 카밀라와의 관계를 정리하라고 여러번에 걸쳐서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스 황태자는 별 일 아니라고 말하면서 두리뭉실 적당히 넘어갔다고합니다.

 

결혼후에도 오랫동안 찰스와 카밀라의 불륜관계가 계속 이어지자,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직접 찰스의 연인인 카밀라를 만나서 헤어지라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이애나의 결별하라는 요구에 카밀라는 ‘세상 모든 남자들이 널 사랑해, 그리고 예쁜 아이도 둘이나 있잖아! 그런데 더 이상 뭘 더 원해?’라고 오히려 다이애나비에게 따졌다고 합니다.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아무리 카밀라에게 결별할 것을 요구하고 설득해도 전혀 먹혀들지 않자, 그녀는 급기야 엘리자베스여왕에게 가서 두사람의 불륜사실을 여러번 호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여왕은 ‘찰스는 구제불능이야!’라는 말만 하면서, 찰스의 외도를 묵인해주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배스여왕은 찰스황태자의 외도를 잘 알고있었지만, 그를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며느리인 다이애나비가 참고 조용히 살기를 요구했습니다.

엘리자베스여왕은 왕실의 권위와 명예를 위해서, 다이애나비가 조용히 참고 살기를 바랬던 겁니다.

 

찰스황태자의 잦은 외도 때문에, 속이 상할 때로 상한 다이애나비였지만, 왕실에서 그녀가 하소연할 곳을 없었으며, 왕실에서 그녀의 편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왕실에서 그녀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외로운 처지였고, 밤마다 혼자서 독수공방해야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왕실의 권위와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모든 불만을 잠재우면서 살아야했습니다.

즉, 찰스황태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은 사랑 없는 정략결혼이었으며, 결혼 후에도 두사람은 형식적인 결혼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두사람의 결혼은 영국왕실을 유지시키기 위한 정략결혼이었고, 결혼 후에도 두사람은 형식적인 결혼생활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찰스황태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렇지만, 찰스황태자는 다이애나비를 전혀 사랑하지않았고, 자신의 내연녀인 카밀라만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다이애나비는 황태자비인데도 불구하고 서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일반서민들을 직접 만나고 다녔고, 서민의 곁으로 직접 다가가서 그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아주 솔직하고 가식없이 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영국왕실은 이런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행동을 별로 달가와하지않았습니다.

 

오히려 영국왕실에서는 다이애나비의 친서민적인 행동과 봉사활동을 왕실의 위엄을 깎아내리는 행동, 왕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이라고 판단했으며, 이런 다이애나비를 천박한 행동을 한다며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다이애나비는 남편한테도 사랑을 받지못했을 뿐만아니라, 왕실로부터도 냉대를 받는 외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 다이애나비와 찰스황태자의 이혼, 다이애니바의 사망, 사망이유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찰스황태자는 결혼생활 내내 전혀 애정도 없이 매우 냉랭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결국 90년도가 되자, 두사람은 서로에 대한 비난과 폭로를 일삼는 최악의 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두사람은 한달 동안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않았기에 매스컴에서는 두사람의 근황을 매우 궁금해했습니다.

그런데, 언론의 인터뷰에 응한 찰스황태자는 카밀라와 자신의 불륜을 인정하면서 ‘나는 단 한번도 다이애나비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충격적인 말을 하고나섰습니다.

 

아무리 정략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부부로서 15년 동안 함께 살았을 뿐만아니라, 자신의 두명의 아들을 낳아준 다이애나비에게 어떻게 이렇게 치명적인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이 말을 듣고 영국국민은 물론 전세계인들이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런 무도한 말을 하는 찰스황태자비에 대해 다이애나비도 언론에 나와 다음과 같이 비난의 말을 내뱉습니다.

다이애나비는 ‘찰스는 애초에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그를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두사람간의 엄청난 폭로전과 비난전이 가열되어 나가자,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여왕이 나서서 ‘두사람 이혼해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찰스황태자가 서로를 비난하면서 왕실의 위엄과 명예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여왕은 영국왕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두사람간의 이혼을 승낙하게 됩니다.

 

이렇게 엘리자베스여왕의 이혼승낙이 떨어지면서 두사람은 파국을 맞게됩니다.

 

다이애나비와 찰스왕세자는 1981년 결혼해서 두명의 왕자를 낳았지만, 형식적인 부부관계만을 유지해오다가 결혼한 지 15년만인 1996년도에 전격 이혼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혼한 지 1년만인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비는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게됩니다.

 

파리시내에서 달려가던 다이애나의 자동차가 갑자기 3중 충돌을 일으키는 엄청난 교통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교통사고로 차속에 갇힌 다이애나가 신음하고 있을 때,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파파라치들은 그녀를 구할 생각은 않고 오직 카메라촬영에만 급급했습니다.

 

또한 신고를 받고 앰블런스 구조대가 도착했지만, 그 구조대가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를 구조하는데 너무도 오랜 시간을 소요하면서 다이애나비는 점점 죽음의 늪으로 빠져들어갑니다.

 

또한 구조대가 근처의 병원으로 다이애나비를 옮기는 데에 무려 1시간 30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고, 병원으로 이송된 다이애나비는 의료진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석연치않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답니다.

 

전세계인들은 37살의 젊은 나이에 석연치않은 죽음을 당한 다이애나비를 무척 슬퍼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다이애나비의 죽음에 영국왕실의 음모가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했습니다. 

 

다이애나비가 탄 자동차에 폭탄을 미리 설치해서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폭파시켰다는 설,

찰스황태자가 자신의 내연녀와 재혼하기 위해서 그녀의 암살을 획책했다는 설, 다른남자의 아이 임신을 막기위한 목적으로 영국왕실에서 그녀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설 등등 다이애나비의 죽음에는 여러가지 많은 음모론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음모론이 나올 정도로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은 정말 의문스러운 점들이 많고, 미스테리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뭏튼 한 때 만인이 사랑했던 다이애나비는 안타깝게도 의문스러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찰스황태자는 그의 소원대로 그의 오랜 연인인 카밀라와 재혼해서 잘 살고 있으며, 또한 엘리자베스여왕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현재 왕의 지위까지 물려받고 왕이 되었습니다.

 

다이애나비는 젊은 나이에 의문스럽고도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그녀의 죽음 이후에 찰스황태자는 오히려 카밀라와 재혼에 성공하고, 왕의 지위까지 물려받는 등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큰 행운을 얻고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이 것은 정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여자의 불행으로 다른 남자는 두가지의 큰 행운을 얻었으니, 말이죠! 

 

만일 교통사고가 일어날 당시에, 구급대가 다이애나비를 좀 더 빠르게 병원으로 이송시켜서 치료를 해주었다면, 어쩌면 그녀를 살릴 수도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그래서 더욱 더 다이애나비의 죽음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너무나 젊은 나이에 일찍 사망한 다이애나비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아직도 그녀를 잊지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에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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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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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백두산 폭발 시기와 가능성, 규모와 주기, 대비책, 폭발예측, 폼페이 화산폭발

 

얼마전에 마우나로아화산이 분화를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미국 하와이에 있는 마우나로아화산은 38년만에 분화를 시작했고, 무려 60m 높이의 용암을 분출시키며 치솟아서 이곳 주민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2022년 11월 마우나로아화산이 폭발하면서 이 곳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이같은 화산폭발로 인해 우리나라 백두산의 화산폭발문제가 큰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화산폭발은 한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거대하고도 무서운 자연적 재난입니다. 발해가 화산폭발 때문에 멸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화산폭발은 세계의 역사까지도 바뀌놓을 수 있으며, 인류멸망을 야기할 수 있는 정말 무시무시한 재앙입니다.

 

전문가들은 핵폭발보다도 오히려 화산폭발의 위력이 더 크고 더욱 강하다고 합니다.

 

로마의 도시국가 폼페이는 화산폭발로 인해 폼페이 도시자체가 완전 멸망해버렸습니다.

 

과연 우리나라는 화산폭발로부터 안전할까요? 우리나라의 백두산은 언제 분화하고, 또 언제 폭발할 지가 우리대중들 사이에 큰 화두가 되고있습니다.

 

백두산은 100년 주기로 폭발한다고 하는데, 이제 남은 시간은 2년이라고 하는데, 2025년도에 백두산이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먼저, 폼페이 화산폭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 폼페이 화산폭발과 도시멸망

 

폼페이는 기원후 1세기경에 꽤 잘 나가는 로마의 고대도시였습니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주 나폴리 인근에 있는 폼페이는 1세기경에 큰 부흥을 이루었던 도시로서, 상업과 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지고있던 발전된 상업도시이자, 귀족들의 휴양지로 크게 번성했던 고대도시였답니다.

 

그런데, 서기 79년 8월 24일, 이 폼페이에 있는 베수비오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는 바람에, 이 번성했던 도시 폼페이는 하룻만에 도시전체가 멸망하여 완전 잿더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당시, 베수비오화산의 대폭발로 인해서,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분출물을 뿜어내면서 66만m2의 크기의 폼페이 도시전체가 마그마와 화산재로 뒤덮이면서 그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베수비오화산의 폭발로 인해, 날아온 화산재의 뜨거운 열과 지상을 뒤덮은 고온가스로 의해 폼페이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0명의 주민들이 사망하는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이 폼페이 화산폭발로 인해서, 로마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 폼페이에 지어진

로마의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호화스러운 건물과 극장, 화려한 상가와 광장, 그리고 당시 최고의 설비를 자랑하던 스타비안목욕탕 등이 뜨거운 용암과 화산재에 의해서 땅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고대 로마인들이 건설해놓은 로마최전성기 시절의 거대한 도시 하나가 베수비우화산 폭발로 완전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화산폭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폼페이도시가 1592년도에 진행된 폼페이의 고가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 흔적이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당시 폼페이 도시의 일부가 첫발견된 것을 기점으로, 인부들의 계속된 발굴작업에 의해서 4m 두께의 화산재에 묻혀있는 폼페이 시가지와 건물들이 속속 발굴되었습니다.

 

계속된 발굴작업으로 인해 폼페이의 거대한 시가지가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호화로운 건물들과 극장, 사치스러운 공중목욕당과 원형경기장, 그리고 건물내부의 멋진 벽화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또한 당시 뜨거운 화산재에 목숨을 잃은 인간들의 화석도 함께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발굴현장에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바로 인간화석이었습니다.

 

당시 날아온 화산재의 뜨거운 열기에 바짝 몸을 웅크린 채 비명을 지르면서 앉아있던 사람, 화산폭발 순간 주인을 놓치고 혼자서 떨었을 반려견, 날아오는 화산재를 피해서 도망가다가 길거리에서 죽은 사람,

가족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다가가다가 죽은 가장, 집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다고 참변을 당한 남자와 여자, 화마를 피하지못하고 뜨거운 화산재와 가스에 의해서 계단에서 죽은 어린아이들 등 1500년 동안 폼페이의 땅속에 파묻혀있던 사람들의 인간화석들이 발견되면서, 그 당시 폼페이 화산폭발의 위력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폼페이 화산폭발은 지진과 화산폭발이 함께 일어났고, 이로써 도시 자체가 완전히 파묻힐 정도로 엄청난 대참사가 발생했던 겁니다.

 

폼페이 도시 전체가 베수비오화산 폭발로 인해 날아온 마그마와 화산재에 묻히면서 거대한 도시 폼페이가 완전 사라져버렸는데요.

처음에는 폼페이도시가 18시간 동안에 걸쳐 날아온 화산재가 4m 두께로 쌓이면서, 도시 전체가 파묻혀버렸다는 진단이 내려졌는데요.

 

그런데, 폼페이 화산폭발 당시에 무려 2,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화산재에 파묻혀 사망했는데,

이들은 화산재가 날아와 쌓이던 18시간 동안 왜 도망가지 않았는지 의혹이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18시간 동안 화산재가 날아와 쌓이는 동안, 그 중간 중간에 충분히 달아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일본학자의 조사에 의해서 폼페이참사에 대한 정확한 시간이 밝혀졌습니다.

과거의 학설과 다르게, 폼페이 화산폭발로 인해서, 폼페이도시에 화산재가 쌓였던 시간은 단 15분이었다고 합니다.

 

즉, 화산이 폭발하고난 다음에, 4m 두께의 화산재가 쌓였던 시간은 불과 15분이었다고 하며, 15분의 짧은 시간에 화산재가 쌓이면서 2,000명의 사람들은 미처 대피할 시간도 없이 그 자리에 매몰된 것이랍니다.

 

이 당시 베수비오화산이 폭발하면서 함께 고농도의 이산화탄소가 방출되면서 도시 주민들에게 퍼져나갔고, 미처 폼페이시가지를 빠져나가지못한 일부주민들은 이산화탄소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중독되면서, 이같은 많은 사망자를 낳았다고 합니다.

 

만일 사람이 고농도의 이산화탄소에 노출되면, 불과 40초에서 1분만에 질식사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폼페이 화산폭발 때에 뜨거운 화산재와 열기에 의해서 사망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고농도의 이산화탄소에 중독되어 질식사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건물화재가 발생했을 때, 뜨거운 열기에 타서 죽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유독가스에 중독되어 질식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습니까?

똑같은 논리입니다. 서기 79년경에 발생한 폼페이 화산폭발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화산폭발로 방출된 고농도의 유독가스(이산화탄소)에 중독되어 질식사한 것입니다.

 

고농도의 유독가스(이산화탄소)에 중독되면, 단 1분만에 죽기 때문에, 죽는 사람은 자신이 죽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순식간에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폼페이 발굴사업으로 인해서 발굴된 인간화석의 얼굴표정은 별로 고통스럽지않고 평범한 모습을 하고있습니다.

 

◆ 화산폭발의 위력과  규모, 영향과 피해

 

만일, 화산폭발이 일어났을 때, 화산재가 어느 정도 쌓였을 때 도시가 마비될까요?

무서운 점은 화산폭발이 일어났을 때, 화산재가 고작 1cm 정도만 쌓이는 것만으로도 그 도시의 기능이 마비된다고 합니다.

 

화산폭발이 일어나고 날아온 화산재가 단 1cm만 쌓여도 자동차와 지하철, 항공기 등 교통수단이 마비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교통수단이 마비되면, 사람들은 회사에 출퇴근할 수 없게되고, 그 도시의 경제활동이나 산업활동이 마비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화산폭발 때에 발생한 화산재는 돌가루인데, 이 화산재는 전기를 띠고있어서 전파를 방해하고, 전력마비를 유발시킨답니다.

그러므로 이 화산재로 인해 교통수단이 마비될 수 있고 전력이 끊어질 수도 있으며, 또한 날아온 돌가루가 항공기엔진에 들어가면서 항공기가 고장나면서 항공기가 운항할 수 없게됩니다.

 

그러므로 화산폭발로 인한 화산재가 단 1cm만 쌓인다고 하더라도, 자동차와 지하철, 항공기 등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되면서, 그 도시의 산업활동은 멈춰서게 된답니다. 사실 자동차는 화산재 돌가루가 1cm만 쌓여도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바퀴가 터지고 맙니다.

 

◆ 인류역사상 최대규모의 탐보라화산 폭발

 

1815년 4월 인도네시아 숨바와섬에서 엄청난 화산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숨바와섬에 있는 탐보라화산 폭발로 인해 피어오른 화산분출물이 43km 높이로 치솟았고, 발생한 이산화황 분출량은 100메가톤이며, 인도네시아 숨바와섬 화산폭발은 인류역사상 최대규모의 화산폭발이었다고 합니다.

 

이 탐보라화산 폭발로 인해 흘러내린 용암은 반경 40km 일대를 덮쳤고, 9만명의 주민들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때 탐보라화산 폭발로 발생한 화산의 분출물이 삽시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탐보라화산 폭발 이후 매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전세계의 여러지역에서 눈과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맺히는 등 냉기가 휘몰아쳤다고 합니다.

 

이 시기가 초여름이었는데, 여름철인데도 불구하고 눈과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어는 등 기상이변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때에 지구의 평균기온이 5도나 떨어지면서 세계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왜 이런 말도안되는 기상이변현상이 일어난 것일까요?

 

탐보라화산 폭발 때에 분출물이 100메가톤이라고 하는데, 이 엄청난 양의 분출물이 하늘로 올라가 태양빛을 가라면서 태양열을 차단해서 지구의 전세계의 기온을 급강하시킨 것이랍니다.

 

숨바와섬의 탐보라화산 폭발로 인한 기후변화에 의해서 전지구적인 한파가 발생하면서 유럽대륙과 아시아에서 기근과 식량부족사태가 발생했고, 많은사람들이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때에 유럽과 아시아에서 발진티푸스와 콜레라 등 각종 전염병이 창궐해서 많은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또한, 그 이듬해인 1816년에는 북반구에서 여름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화산폭발이 지구의 기후까지도 바꿔놓을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즉, 1816년도 발생한 인도네시아의 탐보라화산 폭발로 여름이 사라지고 일시적인 빙하기가 발생했고, 전염병이 발생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탐보라화산폭발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17만배나 되는 엄청난 위력을 발생시켰다고 합니다.

한지역에서 발생한 화산폭발이 핵폭탄보다도 더 큰 위력을 지녔다고 하니, 정말 놀랍고도 소름끼칠 정도입니다.

 

이렇게 대규모의 화산폭발은 기후를 바꾸어놓고 엄청난 인명피해를 발생시키는 등 엄청난 피해를 발생시키는데, 만일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폭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백두산 폭발 가능성과 예측, 위력과 피해규모

 

백두산은 언젠가는 분화할 수 있는 활화산입니다. 언제 분화하는지가 문제이지 반드시 분화한다고 합니다.

 

천년 전인 946년도에 백두산에서 최고규모의 화산폭발이 일어났는데, 그 당시 백두산 화산폭발의 영향권은 150입방미터이며, 폭발지수는 7로 상당히 큰 대규모 화산폭발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백두산폭발로 발생한 화산재가 한반도 전역을 1m 두께로 뒤덮을 만큼 엄청난 양의 분출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지구상에 다섯 번밖에 없었던 슈퍼화산폭발 중의 하나가 바로 백두산 화산폭발입니다.

 

그 당시 백두산폭발로 봉우리 1,000m 정도가 사라졌는데, 지금의 백두산높이 2,593m는 화산폭발 전보다 1,000m 정도 낮아진 높이라고 합니다.

그 때의 화산폭발로 백두산천지가 생겨난 것이며, 백두산천지의 둘레는 13.1km이고 직경은 5km, 면적은 9.8㎢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칼데라천지가 바로 백두산천지이며, 이 백두산천지는 바로 화산폭발의 흔적입니다.

 

지금, 백두산천지에는 화산폭발로 인해 분출된 마그마가 변해서 생긴 현무암 부석이 다량으로 남아있습니다.

천지에 현무암부석이 다량 남아있는 것만 보더라도 과거에 백두산이 대규모로 폭발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현무암부석 - 화산분하로 마그마가 대기 중에 방출될 때, 휘발성성분이 빠져나가면서 기공이 생긴 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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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서쪽에 위치한 아오모리현 쿠로이시 발굴현장에서는 과거 백두산으로부터 날아온 화산재 덩어리 즉, 화산의 흔적이 발굴되어서 큰 화제가 되고있습니다.

 

이 쿠로이시 발굴현장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유물유적을 발굴하는 현장인데, 그 발굴현장에서 백두산 화산재가 다량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백두산 화산재가 날아온 시기는 헤이안시대인데, 대략 기원후 946년경으로 백두산지역에 발해가 존재했던 시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발해시대에 백두산에서 대규모 화산폭발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가 되고있습니다.

 

즉, 기원후 946년경에 백두산이 폭발했으며, 그 백두산폭발 때 생긴 화산재가 편서풍을 타고서 일본의 서부지역까지 날아왔으며, 그 당시 백두산폭발은 엄청나게 그 규모가 거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백두산에서 일본 아오모리현까지의 거리가 1,060km인데, 이 때 백두산폭발로 인해 생긴 화산재가 편서풍을 타고 1000km가 넘는 일본 아오모리현까지 날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이 당시 백두산폭발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거대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기록인 ‘흥복사 연대기’에는 ‘일본나라 지역에 화산재가 마치 눈과 같이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려사 세가(946년, 고려정종 원년)’에는 ‘이 해에 하늘의 북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대사면령을 내렸다’고 백두산폭발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 발해의 멸망원인은 백두산 화산폭발 때문 -

 

발해가 멸망한 것도 백두산폭발이 그 원인이었다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발해가 존재했던 시기인 946년도에 대규모의 백두산폭발이 일어났고, 백두산폭발로 인해서 엄청난 화산재와 분출물들이 백두산 주변의 만주와 함경도일대를 뒤덮으면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발생시켰고,

화산폭발로 발생한 다량의 화산재가 수년동안 하늘을 뒤덮으면서 평균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졌으며, 이로인해 한파와 냉해가 발생하면서 농작물생산물이 급격히 감소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사망하게 되었고, 이러한 기근과 질병, 전염병의 발생으로 삶이 피폐해진 주민들에 의해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고, 이로인해 발해가 분열하면서 멸망했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2010년 10월, 인도네시아의 므라피화산이 폭발하면서, 주민 389명이 사망하고 1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는데, 이 므라피화산 폭발은 화산폭발지수 4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화산폭발은 그 폭발정도에 따라 1~8까지 분류하며 숫자가 클수록 그 화산폭발의 규모가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므라피화산폭발 때에 화산재는 0.1㎦까지 날아갔고 그 화산폭발지수는 4이지만, 천년 전에 발생한 백두산화산폭발 때에 그 화산재는 150㎦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화산폭발지수가 7에 해당할 정도로 엄청나다고 합니다.

 

즉, 천여년 전에 발생한 백두산 화산폭발은 10만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므라피 화산폭발의 1,500배나 되는 엄청나게 큰 슈퍼대폭발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백두산 화산폭발은 기원후에 발생한 화산폭발 중에서, 1위 2위를 다툴 정도로 엄청나게 큰 대규모 폭발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규모가 큰 백두산폭발이 지금 시점에서 또다시 발생한다면 얼마나 큰 인명피해가 발생하게 될까요?

 

백두산의 화산폭발이 천년 전에 일어난 것이 마지막이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천년 전에 백두산폭발이 일어난 후에도, 백두산은 백년에 한번씩 크고작은 분화가 계속 발생했었다고 합니다.

 

◆ 백두산폭발의 전조현상들

 

현재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있는 곳이 바로 백두산입니다.

 

백두산은 100년을 주기로 크고작은 분화가 계속 일어난다고 하며, 100여년 전인 1925년에도 백두산에서 분화가 일어났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100년이 되는 2025년도에 백두산에서 또다시 분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지질과학자들 곧 머지않아 백두산의 화산폭발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백두산주변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징후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어서 큰 충격을 주고있습니다.

 

백두산정상의 나무들이 말라가고 있다고 하며, 백두산 주변에서 펄펄끓는 온천수가 나타나고 있는데, 백두산천지 주변의 온천에서는 원래 67도였던 수온이 최근 갑자기 상승해서 83도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또한 백두산 일대에서 작은 지진파가 계속해서 감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16년도에 국제 전문가들이 합동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백두산 아래의 5~10km 지점에 서울면적의 2배 정도 되는 많은양의 마그마가 적재해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합니다.

 

또한 2018년도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이산화탄소의 기포가 천지주변으로 올라오는 것이 관측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백두산천지가 다시 끓고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화산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나타나는 전조현상으로, 화산폭발이 곧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사전 징후들이라고 합니다.

 

백두산정상의 나무들이 말라가는 것은 화산가스 때문이라고 하며, 천지주변 온천수의 수온이 급격히 올라가는 것은 천지아래에 땅속으로부터 뜨거운 마그마가 차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화산폭발은 산 밑에까지 차오른 엄청난 양의 마그마가 대규모로 분출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랍니다.

 

즉, 백두산천지의 밑부분까지 펄펄 끓는 마그마가 꽉 차올랐으며, 여차하면 이 엄청난 양의 마그마가 천지를 뚫고 공중으로 분화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백두산폭발입니다.

 

과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백두산폭발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한데, 그 게 언제 일어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100년 주기로 일어나는 백두산화산폭발이 마지막 분화된 때로부터 100년이 되는 2025년도가 100년 주기에 딱 맞는 시점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2025년도에 백두산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과연 2025년도에 백두산폭발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1815년도에 발생한 인도네시아의 탐보라화산의 폭발로 인해서, 9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43km로 높이로 치솟은 화산재가 하늘로 퍼지는 바람에 태양빛을 차단해 평균기온이 5도나 낮아지고, 여름이 사라지는 엄청난 기상이변을 발생시키면서 대규모 인명피해를 발생시켰습니다.

 

만일 실제로 백두산폭발이 일어난다면, 그 화산폭발의 규모나 영향력이 인도네시아의 탐보라화산폭발과 비교해서 어떤 규모가 될 지에 큰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백두산 화산폭발은 단지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심각한 지구적 재앙이기 때문에, 반드시 확실한 대책을 마련해야합니다.

 

◆ 백두산 화산폭발의 발생원인

 

원래, 화산폭발이나 지진은 태평양 ‘불의 고리’지역에서 발생하는게 원칙인데, 백두산은 전혀 ‘불의 고리’지역이 아닌데도 이곳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난다는 게 의문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래 판과 판이 만나는 경계점에서 지진이 일어나거나, 화산이 발달해서 그 화산에서 주기적으로 폭발이 일어나는게 일반적입니다.

즉, 태평양판과 유라시아판이 만나는 경계면에 있는 일본에서 지진이나 화산폭발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두판의 경계가 부딪치면서 그 경계면에 있는 지질이 일그러지면서, 그 충격에 의해서 지진과 화산폭발이 일어나게 되는 원리이지요.

 

일본의 후지산은 그 유라시아판과 태평양판이 만나는 경계면의 위에 위치하기 때문에, 두판이 부딪치는 충격과 마찰로 인해 마그마가 공급되고 마그마가 위로 올라가면서 후지산 화산폭발이 일어나게 된답니다.

그런데, 백두산은 두 판의 경계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면으로부터 한참 뒤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판의 경계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백두산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태평양의 해양판이 유라시아판 아래로 쭉 들어가는 과정에서, 그 들어가는 물길을 따라 함께 밀려들어간 물을 먹은 암석층이 지표면위쪽으로 녹아나오면서 마그마를 형성하게 되며, 그 마그마가 백두산 아래쪽에서 백두산 천지쪽으로 계속 올라가면서, 백두산 아래부분에 여러개의 펄펄 끓는 마그마층이 형성되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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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백두산 천지의 아래쪽에서 펄펄 끓고있던 마그마가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 때 갑자기 지표면을 뚫고 공중으로 분출하는데, 그 때 백두산 화산폭발이 일어나게되는 겁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백두산 천지의 아래부분에 엄청난 규모의 마그마방이 채워지고 있는 중이며,

그렇게 대규모로 채워진 마그마방들이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포화상태에 이르게되면, 어느 순간 갑자기 지표면을 뚫고 공중으로 치솟게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백두산 화산폭발입니다.

 

◆ 백두산폭발의 피해규모와 대책

 

만일, 백두산폭발이 일어난다면 그 피해규모는 얼마나 될까요?

실제로 백두산폭발이 일어난다면, 그 폭발규모에 따라서 피해규모도 크게 달라질 겁니다.

 

일반적으로 백두산폭발이 일어난다면, 백두산 반경 50km 지점까지 화산재와 분출물들이 날아와 덮칠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백두산폭발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반경 50km 지점까지로 보고있는데, 이 지점에 있는 주민들과 건물들은 분출물에 뒤덮이는 등 그야말로 쑥대밭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백두산폭발이 일어나서 그 분출물이 40km 이상 공중으로 치솟을 정도로 엄청난 대규모로 발생했을 때는,

분출된 화산재가 상층권으로 올라가서 50km보다 훨씬 더 먼 수백km 또는 1천km까지 날아가서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대규모의 백두산폭발이 일어나게되면, 50km 지점을 넘어 한반도 전역에 큰 피해를 끼칠 수 있으며, 북한은 물론 한국과 일본, 중국에까지 피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한 보고서에 의하면, 백두산폭발이 일어나면, 그 화산재가 남한으로 날아오는 데는 불과 9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화산폭발이 겨울에 일어나느냐, 여름에 일어나느냐에 따라서 우리나라에 미치는 피해규모는 크게 달라지게됩니다.

 

만일, 백두산폭발이 겨울에 일어나게되면,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이 불기 때문에, 그 화산재가 남한쪽으로 물밑듯이 들이닥치게 되며, 한반도 전역에 큰 피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백두산폭발이 여름에 일어나게되면, 여름에는 남동풍이 불기 때문에 한국에 미치는 영향이나 피해나 별로 크지않고 제한적일 확률이 높습니다.

 

남동풍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남쪽에 있는 한국에는 별로 피해를 입지않게 되며, 반면 만주쪽으로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몰려가게 되므로 만주에 사는 중국인들이 큰 피해를 입게됩니다.

 

화산폭발로 인해 발생한 화산재가 1cm만 쌓여도 자동차나 지하철, 항공기운항이 불가능하게 되므로, 대규모의 백두산폭발은 우리나라의 교통체계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산재가 공장지대에 퍼지게될 경우, 정밀을 요하는 반도체공장의 운영이 중단될 수 있으며,

화산재는 각종 기계와 각종 전자기기를 망가뜨릴 수 있고, 물을 오염시켜서 어류를 패사시키는 등, 백두산폭발은 우리산업계와 자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날아온 화산재가 쌓인 농작물을 먹을 수가 없게되므로, 농산물품귀현상과 농산물의 수입이 급증하게 되며, 농산물가격이 급등 등 물가상승으로 우리나라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주게됩니다.

 

무엇보다도 백두산폭발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면, 탐보라화산 폭발 때처럼 화산재가 태양을 가려서 지구의 평균기온 2도 정도 떨어뜨려서 일시적인 빙하기가 도래할 수 있으며, 이로인해 한파와 냉해로 인해 농산물생산 저하로 인한 기아와 식량부족사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피해상황은 대규모의 백두산폭발이 일어났을 때를 상정한 것이며, 북서풍이 부는 겨울에 일어났을 때를 상정한 예측에 불과합니다.

백두산폭발이 남동풍이 부는 여름에 일어나거나, 100년 전처럼 소규모의 백두산분화가 일어나게 된다면, 우리나라가 입게되는 피해는 아주 적을 수 있고, 미미한 수준에 그칠 것입니다.

 

백두산폭발에 대한 대책으로는 백두산 반경 50km 지점에 있는 주택과 건물들에 사는 주민들을 훨씬 더 먼 지역으로 미리 소개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백두산은 북한과 중국땅에 있으므로, 우리나라가 그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점이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화산폭발에 대비해서 평소에 마스크와 생수, 의약품등을 미리 많이 준비해두는 것이 좋으며, 유통기한이 길고 오래 먹을 수 있는 통조림이나 라면류, 건조된 식량 등을 충분히 비축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전파나 통신수단이 차단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외부의 상황이나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충전기용 라디오를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백두산 화산폭발이 여름에 일어날지, 겨울에 일어날지, 1000년 전처럼 대규모로 일어날지, 소규모로 일어날지 그 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금세기안에 백두산폭발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합니다.

 

부디, 백두산폭발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남동풍이 부는 여름에 일어났으면 좋겠으며, 소규모로 일어나서 국민들이 받는 피해가 최소한에 그쳤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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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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