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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09 백제 무왕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의 진실, 서동요 내용과 해석, 사택왕후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이야기의 진실, 서동요의 해석, 사택왕후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는 세기적인 러브스토리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실제로 존재했던 일이었을까요?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만큼 감동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또 없을 것 같아요!

 

오늘은 우리역사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큰 감동을 주었던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를 한번 재조명해볼까 합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졌던 데로 서동요의 주인공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가 맞는 것일까, 또한 두사람이 실제로 만나 사랑을 나누면서 결혼을 했던 것이 사실인지 심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어요!

 

그럼 먼저 서동요의 내용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어요!

서동요는 훗날 백제 무왕이 될 서동이 신라의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서, 서라벌로 가서 어린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부르게 함으로써,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만들어준 동요입니다.

 

서동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선화공주는 남몰래 정을 통하면서, 밤마다 서동이 도련님을 몰래 안고 간다

 

이 서동요의 내용은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이라는 외갓남자를 만나서 정을 통한다는 것으로, 선화공주의 대단히 문란한 사생활을 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은 원래 어렸을 적에는 가난뱅이의 아들이었어요. 서동은 백제땅 오금산 아래에 있는 허름한 집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갔던 가난뱅이였답니다.

 

설화에서는 과부인 어머니와 연못가의 용이 관계를 맺어서 서동이 태어났다고 알려졌는데요. 그렇게 신분은 미천했지만, 서동은 어려서부터 아주 비범하고 총명했으며,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면서 열심히 살아갔다고 합니다.

 

서동은 산에서 서여 즉 마를 캐어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으로 서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로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소문을 듣고서, 서동은 그 선화공주를 마음에 품게 되었고,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만들기 위해서 교묘한 계략 하나를 꾸며내었답니다.

 

신라 경주로 간 서동은 아이들을 마를 주고 꾀어서 서동요라는 노래를 지어서 부르게 했습니다. 서동은 선화공주가 몰래 서동이와 사귀어 정을 통하고는 밤마다 몰래 서동을 안고간다는 아주 외설스러운 내용의 노래를 지어서 퍼뜨렸던 겁니다.

 

선화공주에 관한 음란한 내용이 담긴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경주 도성내에서 널리 퍼지게 됐고, 급기야 궁궐에까지 이 노래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를 전해들은 신라의 대신들은 문란한 생활을 한 선화공주애개 벌을 내려야 한다고 진평왕에게 강력히 상소를 했고, 크게 분노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귀양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선화공주는 서동요라는 노래 때문에, 억울하게 궁궐에서 쫒겨나서 귀양을 가게되었는데요. 선화공주가 귀양을 가는 길목에 바로 서동이 기다리고 있었고, 서동은 귀양가는 선화공주의 경호를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만나게 된 서동과 선화공주는 첫눈에 서로에게 홀딱 반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두사람은 백제땅으로 건너와서 결혼을 했습니다.

 

이부분을 삼국유사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선화공주가 귀양처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맞이하여 모시고 가겠다고 말하자, 선화공주가 기뻐하여 그를 따르게 되었다' ~

 

서동은 착한 선화공주를 문란한 여자로 모함을 해서 궁궐에서 쫒겨나게 만들었고, 궁에서 쫒겨난 그녀를 손쉽게 자신의 아내를 만들었던 권모술수가 능했던 나쁜남자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네요.

 

그런데 서동은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난 후, 엄청나게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된답니다. 서동에게 시집을 온 선화공주는 궁궐을 떠날 때 어머니가 몰래준 황금 한자루를 갖고 왔습니다.

 

선화공주가 갖고온 황금을 통해서 그 황금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라는 것을 알게된 서동은 자신이 매일같이 마를 캐던 금오산에 금이 넘쳐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금오산에 엄청난 양의 금덩이를 캐내게 된답니다.

 

엄청난 양의 황금을 손에 쥔 서동은 신라 진평왕에게 황금을 선물로 주어서 진평왕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고, 또한 백제 대신들과 백성들로부터도 신망을 받게 된 서동은 마침내 백제의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백제의 30대임금 무왕입니다.

 

여기까지의 서동에 관한 내용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서동이 과부의 아들이라는 삼국유사 내용과는 달리 백제 29대왕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아뭏튼 서동은 백제 무왕이라는 것이고, 무왕은 바로 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의 부왕입니다. 그렇다면 의지왕은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였다고 추론할 수도 있지요,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격언처럼, 금오산 아래의 연못가에 살았던 가난한 서동이 선화공주를 아내를 맞이한 후, 백제의 무왕으로 벼락출세하게 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바로 서동설화입니다.

 

이렇게 선화공주를 만난 서동은 벼락출세해서 나중에 백제의 왕이 되었으니, 서동은 왕권과 예쁜 부인이라는 두마리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던 대단한 행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동은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두가지를 한꺼번에 모두 획득하게 되었으니, 모든 남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상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서동은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익산에다 미륵사라는 절을 창건하게 된답니다. 여기까지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그린 서동설화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서동설화의 내용처럼, 서동이 나중에 무왕이 된다는 것과 무왕의 아내가 선화공주였다는 것이 정말 역사적 사실일까요?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이 나중에 백제의 무왕이 된다는 것과 그의 부인이 신라출신의 선화공주라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서동설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각에서 서동설화에 대한 또다른 주장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서동설화에 나오는 것처럼, 백제 무왕의 부인이 선화공주가 아니라는 반전의 증거가 강력히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전북 익산 미륵사에 있는 미륵사지석탑이 붕괴될 우려가 있어서, 2009년도부터 미륵사지석탑에 대한 해체 및 복원사업을 실시했습니다.

미륵사지석탑이 너무 노후화되어 붕괴되기 전에, 석탑의 돌들을 모두 떼어내어서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미륵사지석탑을 해체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석탑기둥의 하단부에서, 금동사리외호금제 사리봉안기가 출토되었습니다.

 

금동사리외호는 사리를 넣어두는 금으로 만든 함이고, 금동 사리봉안기는 미륵사를 세우게 된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글귀가 세겨져 있는 금동판이랍니다.

 

그런데 이 금동 사리봉안기의 기록에 의하면, 미륵사를 세운 사람은 무왕의 부인인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합니다.

 

기존에는 미륵사를 세운 사람이 선화공주라고 알려졌었지요. 미륵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선화공주가 사자사라는 절로 가는 도중에 길가의 연못속에서 솟아오르는 미륵삼존상을 목격했다고 하며,

이 미륵삼존상을 모시기 위해서 선화공주의 강력한 건의로 무왕이 미륵사를 건립했다고 합니다.

 

무왕은 익산에 새로운 왕궁터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고, 선화공주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익산에 왕궁과 함께 웅장한 규모의 미륵사라는 절을 건립했습니다.

 

무왕은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고, 전북 익산에 미륵불국토의 세상을 열기 위해서 미륵사를 지었던 것이고. 아예 수도를 익산으로 천도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왕은 야심차게도 익산에다 웅장한 규모의 왕궁과 불탑, 그리고 미륵사를 지었고, 수도를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시도했던 겁니다.

그런데, 신하들의 반대로 무왕의 익산천도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익산에는 거대한 규모의 왕궁터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아뭏튼 선화공주의 제안에 따라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지요.

 

그런데, 2009년 미륵사지석탑 해체과정에서 나온 금제 사리봉안기에는 분명히 미륵사를 세운 사람은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후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세웠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내용과 배치되는 내용이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기록보다 당대의 기록이 더욱 우선시되기 때문에, 640년 후에 쓰여진 삼국유사의 기록보다는 당대에 기록된 금제 사리봉안기의 기록이 더 우선시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세운 것이 아니라, 금제 사리봉안기의 기록에 나온대로 사택왕후가 미륵사를 세웠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택적덕은 백제의 최고 품계인 좌평으로 있었던 명문가의 귀족으로서, 백제정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권세높은 귀족인데, 그의 딸이 바로 무왕의 부인 사택왕후입니다.

 

결국 무왕의 진짜 부인은 신라에서온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후라는 것이며, 미륵사를 창건하도록 한 사람도 바로 사택왕후라는 겁니다.

이것이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이 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세웠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내용은 거짓된 내용일까요?

선화공주와 관련된 내용은 아마도 서동설화가 오랜기간 동안 구전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내용이 변형되고 와전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어쩌면 금제 사리봉안기의 기록대로 사택왕후가 무왕의 정비이고, 선화공주가 무왕의 첩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는 무왕과 먼저 결혼한 선화공주가 일찍 죽고, 사택왕후가 후처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서동이라는 인물도 과연 무왕이 맞는 걸까요? 서동설화를 소개한 삼국유사의 무왕편에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어서, 서동이 무왕이라는 것을 강력히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서동의 주인공은 백제의 무강왕이라고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또다른 설명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백제에는 무강왕이라는 임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무강왕과 앞글자가 비슷한 무왕을 무강왕으로 추정했을 겁니다.

 

 

서동이 동성왕이라는 가설

 

다른 일각에서는 서동이 무왕이 아니라, 동성왕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동이 무왕일 경우에는, 여러가지 현실적인 모순점들이 많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무왕은 왕이 된 지 3년째 되던 해부터 재위기간 40년 동안 계속해서 총 16번이나 신라와 격렬한 전쟁을 벌였고, 대부분 무왕이 먼저 신라에 쳐들어간 전쟁들이었습니다. , 무왕에게는 신라와 신라의 왕은 반드시 죽여야할 적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무왕이 진짜 서동이라면, 신라의 왕은 장인이고 신라는 처갓집이 있는 왕후의 고향이지요.

그리고 무왕이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는 국혼까지 맺은 신라와는 친교를 맺고, 서로 동맹국가처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무왕은 자기부인의 친정아버지인 신라의 진평왕과 친교를 맺기는커녕, 엄청나게 격렬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점이 매우 이상한 점이며, 이런 점 때문에 혹시 무왕이 서동이 아닐 수도 있다는 반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백제의 무왕은 국혼까지 맺은 장인의 나라와 16번씩이나 피말리는 전쟁을 계속 벌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욱이 무왕의 4대 조상인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신라군에게 처참한 죽임까지 당했습니다.

 

554년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한 때부터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깨어졌고, 이때부터 백제와 신라는 서로 철저한 원수지간이 되어버렸습니다.

 

554년 이후, 백제인에게 신라는 성왕을 죽이고 배신한 원수 같은 나라로 인식되었는데, 백제왕족인 서동이 신라의 도성까지 들어가서 구혼한 끝에, 신라공주와 결혼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동성왕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제의 동성왕 때에는, 백제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서, 백제는 신라와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동성왕이 스스로 신라의 소지왕에게 요청을 해서 신라귀족 비지의 딸과 혼인을 맺음으로써,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졌고, 동맹관계가 성립되었던 겁니다.

 

이 시기에 백제 동성왕이 신라귀족의 딸과 혼인을 해서 백제와 신라가 동맹관계를 멪는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동성왕편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 당시는 북쪽에 가장 크고 강한 국가인 고구려가 있었고, 고구려가 남진정책으로 백제의 첫번째 수도인 한성을 빼앗아가는 등,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백제는 전략적으로 고구려에게 함께 대항할 동맹국으로서 신라가 필요했던 것이며, 동성왕의 요청으로 백제와 신라가 결혼동맹을 맺고 함께 고구려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백제와 신라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동성왕 때가 서동설화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 서동설화의 주인공 서동은 백제의 무왕이 아니라, 신라귀족의 딸과 결혼까지한 동성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지요.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수없이 많이 치른 무왕보다는 신라의 최고위직 귀족의 딸과 결혼까지 해서 동맹관계를 맺은 동성왕이 서동에 더 적합한 인물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동성왕과 혼인을 한 여성은 신라귀족 이찬 비지의 딸인데, 그녀의 조상 중에는 왕족의 혈통도 일부 섞여있기 때문에, 서동과 결혼한 신라공주는 백제귀족 비지의 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본에 전래되어 내려오는 설화 중에 마나노장자 설화가 있는데, 이 마나노장자 설화의 내용이 백제의 서동설화와 매우 유사합니다.

 

마나노장자는 어릴 적부터 숯을 굽는 아이로 불렸다. 그런데 나라국의 다마쓰공주는 신으로부터 장래에 숯굽는 아이가 남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전해듣고, 여러지역을 돌아다닌 끝에 숯굽는 소년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 소년에게 청혼을 해서 두사람은 혼인을 하고 부부가 된다.

 

다마쓰공주와 혼인을 한 그 소년은 산속에서 엄청난 양의 황금을 발견해서 큰 부자가 되었고, 만석꾼이라는 의미의 마나노장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 후에 마나노장자는 불교에 깊이 심취하였는데, 백제에서 온 승려 연성법사에게 의뢰해서 연성사라는 큰 절을 건립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일본의 마나노장자 설화의 내용인데, 마나노장자 설화는 소년이 황금을 발견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점과 소년이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 그리고 큰 절을 세웠다는 점이 모두 백제의 서동설화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나노장자 설화는 백제에서 전래된 서동설화를 본따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마나노장자 설화의 주인공 마나노장자는 6세기 초반에 일본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백제의 서동설화가 일본의 마나노장자 설화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서야 합니다.

 

그런데, 마나노장자는 6세기 초반의 인물인데, 서동을 무왕으로 규정할 경우 무왕은 7세기 전반의 인물이기 때문에, 서동설화가 마나노장자 설화보다 더 늦은 시기가 되므로, 서동을 무왕으로 규정할 경우에는 시기적으로 맞지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서동설화가 일본에 전래되어서 그 영향으로 마나노장자 설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서동설화의 시기가 마나노장자 설화의 시기보다 무조건 앞서야 합니다.

 

그런데 서동을 동성왕으로 규정한다면, 동성왕의 활동시기가 479년에서 501년까지이므로, 6세기 전반의 마나노장자 설화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기 때문에, 시기적인 면에서 동성왕이 서동이라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마나노장자 설화에 영향을 주었던 서동설화의 주인공 서동은 무왕보다는 동성왕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 서동설화의 서동은 무왕보다는 동성왕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여지며, 그리고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딸 선화가 아니라 신라 귀족 비지의 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강성한 고구려의 침략의 위협과 잦은 내란으로, 나라가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백제의 24대 왕으로 즉위한 동성왕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신라와 국혼을 치러서 굳건한 동맹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위협에 대해 백제와 신라가 공동으로 대처함으로써, 국가안보를 더욱 튼튼할 할 수 있었고, 그리고 이같은 안정된 기반을 토대로 해서 백제를 다시 부흥시켜나가게 됩니다.

 

사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인 장수왕의 시기였는데, 고구려의 장수왕이 강력한 남진정책을 추진하는 바람에, 백제의 첫번째 수도인 한성을 빼앗기고, 백제가 웅진천도를 하는등 남쪽으로 계속 밀려나는 아주 위태로운 상황이었답니다.

 

그래서 동성왕은 신라귀족의 딸과 혼인을 함으로써 신라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백제는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의 강력한 남쪽공략에 공동방어전선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던 겁니다.

이같은 논리에서 볼 때에 서동설화의 서동은 동성왕이며, 선화공주는 신라귀족 비지의 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서동설화의 서동을 동성왕이라고 규정하면,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아귀가 딱 들어맞기 때문에, 일부학자들은 서동을 동성왕으로 보고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하나의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삼국유사의 흥법 법왕금살편을 보면, 무왕이 35년에 걸쳐서 왕흥사를 완성하였는데, 이 왕흥사라는 절이 미륵사다 라는 기록이 나온답니다.

 

, 삼국유사에는 미륵사를 건립한 왕이 무왕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동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과 상통하므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는 서동이 무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두가지 이율배반적 사실이 서로 상충하고 있어서,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역사적 상황으로 볼 때에는 서동이 동성왕일 가능성이 높지만, 순수한 기록상으로만 볼 때에는 서동이 무왕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동요와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서, 우리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사랑을 나누었던 한국판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제인물이 누구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서동의 실제인물이 무왕인지 동성왕인지를 놓고 계속해서 열띤 논쟁이 이어지고 있고, 선화공주 또한 진평왕의 딸 선화인지, 신라귀족 비지의 딸인지를 놓고 역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랍니다.

 

제가 보기에는 서동의 실제인물은 그 시대적인 상황으로 보면, 동성왕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되는데요.

 

한자어 서동의 우리식의 음이 맛동또는 마동인데, 동성왕의 이름인 마대, 모도와 엇비슷하다는 점과 우리역사서에 백제왕이 신라왕족과 결혼했다는 유일한 기록이 바로 동성왕과 신라귀족 비지의 딸의 결혼이라는 점등이 서동이 동성왕일 것이라는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백제 무왕이 수많은 치열한 전쟁을 벌일 정도로 적대관계에 있었던 적국 신라의 공주와 결혼한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않는다고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400여년 전에 이뤄졌던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는 우리역사상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로맨스의 주인공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제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제인물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우리학계에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지못하고 있으며, 치열한 논쟁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보다 더 심도높은 연구분석을 통해서,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제인물이 누구인지가 속시원히 밝혀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음속에서는 실제 역사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1400년 동안 서민들 사이에 인기리에 전해져 내려왔던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진짜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게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국경과 신분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애틋한 사랑을 나눴던 두사람의 사랑이야기가 너무도 아름답고, 우리들 가슴속에 뭉클한 감동을 주고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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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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