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무술스타 이소룡의 사망원인, 마지막 출연작품 사망유희 동영상, 절권도
- 이소룡 프로필 -
출생일 - 1940년 11월 27일 - 1973년 7월 20일 (향년 34세)
키 - 171cm
부인 - 린다 에머리
자녀 - 아들 이국호(브랜든 리), 딸 이향응
학력 - 워싱턴 주립대학교 철학과 중퇴
아시아최고의 쿵푸스타를 꼽으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바로 이소룡이다. 현란한 발차기기술과 분노의 액션연기를 선보이면서, 전세계의 관객들에게 커다란 재미와 감동을 선사해주었던 무술스타 이소룡!
오늘은 이소룡이 아시아최고의 무술스타가 된 사연과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소룡은 자기가 개발한 절권도를 바탕으로해서 엄청나게 빠른 스피드와 눈부실정도로 화려한 발차기기술을 활용해서, 무술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이소룡이 출연했던 영화 ‘당산대형’과 ‘정무문’, 그리고 ‘맹룡과강’ ‘용쟁호투’ 등 4편의 영화들은 아시아와 세계로 수출되어서 흥행에 엄청난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소룡은 세계최고의 무술스타로 화려하게 등극하게 된다.
그런데, 현대무술영화가 발전하는데 최고의 기여를 했던 이소룡은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발돋움하면서,
무술영화계의 최고의 영웅으로 큰 명성과 인기를 쌓아나갔지만, 석연치않게도 그는 1973년도에 34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소룡은 고작 4편의 무술영화를 찍었고, 그 네편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대히트하는 바람에 이제 막 최고의 무술스타로 올라섰는데, 그렇게 최고의 정점에 올라서는 순간, 그는 매우 석연치않은 이유로 사망하고 만다.
이소룡이 홍콩으로 귀환해 처음으로 찍었던 영화 ‘당산대형’은 홍콩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고,
그가 두 번째로 찍었던 영화 ‘정무문’은 아시아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으며, 네 번째영화 ‘용쟁호투’는 세계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그야말로 이소룡은 신비롭고 화려한 발차기무술액션을 선보여서,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무술액션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
◆ 이소룡이 세계최고의 무술스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이소룡이 홍콩에 귀환하기 전까지, 홍콩에서는 무협영화들이 제작되어서 큰 인기를 끌었고, 무협영화가 유행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홍콩의 무협영화들은 와이어줄을 몸에 매달아서 날아다니는 액션을 선보였고, 무협배우들은 거의 발차기기술을 선보이지 못했고, 단지 절도없는 동작과 주먹으로만 액션을 펼치는 등 액션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홍콩으로 귀환한 이소룡은 와이어줄 없이 절권도를 이용해 직접 공중으로 몸울 날려서 최고난도의 공중발차기기술을 선보였고,
마치 곡예와도 같은 화려하고 멋진 발차기액션을 선보여서, 무술영화의 작품성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켰고,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소룡은 원래 홍콩에서 영춘권이라는 무술을 연마했었는데, 영춘권은 발을 거의 사용하지않고, 주로 손만을 사용해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기술이다.
이소룡이 영춘권만을 연마한 상태에서 영화에 출연했다면, 그의 영화는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소룡은 1958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에서 태권도관장인 이준구사범으로부터 태권도의 발차기기술을 배웠다.
태권도는 당시 홍콩에서는 전혀 생소한 무술로서 중국과 홍콩에서 유행하던 영춘권이나 태극권, 소림권 같은 중국무술보다도 훨씬 더 미학적이고 효과적인 액션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으며,
이소룡은 과거의 손동작 위주의 중국무술을 버리고 과감히 태권도의 발차기를 응용한 무술액션을 영화에 적용시켰는데,
이 화려한 발차기액션이 주효해서 영화의 완성도를 훨씬 높여놓았으며, 전세계의 많은 관객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소룡영화가 크게 히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전까지 홍콩영화가 칼을 쓰는 검객영화이거나,
주로 손을 사용하는 권법영화였는데 반해, 이소룡이 최초로 화려한 발차기액션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소룡의 테크니컬한 발차기기술이 무술영화의 품질을 한층 높여놓았고,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소룡은 홍콩의 뒷골목에서 싸움을 자주 하고 돌아다니던 학생깡패였다. 미국태권도의 창시자인 이준구도 이소룡이 홍콩의 깡패였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홍콩에서 살던 시절, 이소룡은 홍콩 뒷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숱하게 싸움을 벌이고, 뒷골목에서 여러명의 싸움꾼들을 두들겨팬 적이 있었는데,
이소룡에게 얻어맞은 사람 중 한명이 홍콩의 거대한 갱단의 맴버였고, 그 갱단은 자신의 조직원을 두들겨팬 이소룡을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홍콩갱단(삼합회)의 살해계획 첩보를 입수한 이소룡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 갱단의 보복을 피하기위해서 아들 이소룡을 미국으로 미국으로 보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소룡은 1962년도에 위싱턴주립대학 철학과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였고,
동시에 미국태권도의 창시자인 이준구관장으로부터 태권도의 발차기기술을 습득해서, 수년간 무술을 연마하고 연구한 끝에, 영춘권과 복싱, 레스링, 유도, 태권도 등 여러가지 무술을 혼합한 종합무술인 절권도를 창시했다.
이소룡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무술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단연 태권도의 발차기 기술이며, 이소룡 무술의 핵심은 바로 태권도로부터 입수한 발차기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소룡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는 태권도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영화에서는 자신의 무술을 ‘쿵푸’라고 소개하곤 하였다.
‘쿵푸’는 중국사람들의 무술을 함축적으로 부르는 의미인데, 우리나라의 전통무술인 태권도를 주로 사용하면서도,
외국사람인 이소룡이 우리전통의 태권도기술을 ‘쿵푸’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영화에 활용해서 엄청난 명예와 부를 거머쥔 것이었는데, 그 당시의 우리나라 태권도의 고단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실로 안타까운 부분이다.
분명히 얘기하지만, 이소룡이 영화에서 사용한 현란한 발차기액션을 이준구사범으로부터 배운 태권도의 발차기기술이었다.
이준구사범은 영화에서 이소룡이 구사했던 옆차기와 날아차기 등 발차기기술은 모두 자신이 이소룡에게 전수해준 기술이라고 증언한 바가 있다.
이소룡의 영화가 엄청난 흥행돌풍을 일으키자, 이소룡 사후인 1974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부랴부랴 뒤늦게 태권도사범들을 초빙해서 태권도 무술영화들을 제작하였는데,
그 첫번째영화가 바로 1974년 재미교포출신의 태권도사범인 한용철을 주연으로 내새운 ‘용호대련’이었다.
그 후에도 우리영화계에서는 한용철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분노의 왼발’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등 본격적으로 태권도 무술영화를 제작해 나갔지만,
이소룡 영화만큼의 흥행성적은 거두지 못했지만, 단지 70년대에 불어닥친 무술영화의 붐에 편승해서, 우리나라에서만 반짝인기를 끌었을 뿐이었다.
이소룡은 무술실력도 뛰어나지만, 힘도 무척 쎘다고 한다.
이준구사범의 증언에 의하면, 이소룡은 힘이 무척 쎄서, 미국에서 백인들과 팔씨름에서 한번도 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덩치가 엄청 큰 백인들도 이소룡과의 팔씨름에서 그를 이기지 못했으며, 심지어 이준구사범자신도 이소룡과 팔씨름에서 졌다고 한다.
또한 이소룡은 손가락 두 개로 푸시엎을 자유자재로 하는 등 보기와는 다르게 타고난 강골이었다.
이소룡은 홍콩에서 대단한 싸움짱이었다. 이소룡은 수시로 홍콩의 뒷골목을 누비고다니면서, 여러 싸움꾼들과 싸움을 벌이고다녔던 싸움꾼이자 학생깡패였다.
그렇게 싸움에 이골이 난 이소룡은 골든글로브 복싱대회에 출전했는데, 결승전까지 진출해서 우승을 했을만큼, 주먹파워도 대단했었다.
이것은 이소룡이 단지 겉으로만 멋진 무술스타가 아니라, 실전무술에 강했던 실전싸움의 대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콩뒷골목에서 싸움짱이었던 학생깡패 이소룡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태권도를 배우는 등 본격적인 무술연마를 거친 끝에, 아시아최고의 무술액션 배우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소룡을 세계최고의 무술스타로 만들어 준 것은 이소룡이 미국에서 이준구로부터 배운 태권도 때문이라고 본다.
홍콩뒷골목에서 건달들과 어울리면서 싸움을 즐겼던 이소룡이 태권도 같은 무술들을 연마한 후에, 최고의 무술고수가 되면서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우뚝 솟아오른 것이다.
◆ 이소룡의 죽음의 미스테리, 사망원인
70년대 초반을 영화 네편의 출연으로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우뚝 솟아오르면서, 큰 인기를 끌었던 이소룡이 73년 7월 20일 돌연 사망하고 만다.
그렇게도 강했고, 그렇게 위대했던 이소룡이 34살(만 32세)의 젊은나이로 사망하고 말아서, 전세계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소룡이 사망했던 날에, 영국과 프랑스의 개봉관에서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 ‘정무문’이 개봉되었을 때라고 하는데,
이날 극장에서는 이소룡의 부고소식을 알리면서, 죽은 이소룡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하기도 했고, 마침 이소룡영화의 개봉일날 그의 죽음소식을 전해들었던 유럽의 관객들은 큰 충격을 받고 매우 비통해했었다고 한다.
이소룡이 홍콩의 무술스타에서 세계적인 무술스타가 막 되려던 찰라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갑자기 사망하고 만다.
그렇다면, 이소룡의 사망원인은 무었이었을까?
73년 7월 20일 이소룡은 사망했는데, 그날의 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날도 이소룡은 평소처럼 아주 평범한 하루일상을 보냈다.
이소룡은 오전에는 골든하베스트사의 추문회회장과 만나 차기작품의 영화시나리오문제로 대화를 나누었고, 오후에는 그의 애인 정패(베티 텐페이)의 아파트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알려져있다.
당시 이소룡은 부인 린다 에머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홍콩여배우인 정패(베티 텐페이)와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정패는 사실상 이소룡의 내연녀로서 이소룡과 뜨거운 관계를 맺고 있는 여배우였다.
그녀는 쇼브라더스에 소속된 글래머스타일의 미모의 여배우로서, 나이는 이소룡보다 7살 연하였고, 이소룡은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찰영 장소에 정패를 자주 데리고 다녔을 정도로 그녀는 이소룡의 공식적인 애인이었다.
이소룡이 사망한 그날도, 그는 구룡반도에 있는 애인 정패의 아파트에 있었고, 정패의 침대위에 누워있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패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던 것도 사실이다.
사망 당일날 숨진 이소룡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정패는 이소룡이 숨진 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이야기했다.
원래 정패는 영화 ‘사망유희’에 이소룡과 함께 출연할 예정이었는데, ‘사망유희’를 완성하지 못하고 이소룡이 사망함으로써, 정패의 출연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날 오후 3시경 이소룡이 정패의 아파트를 찾아왔고, 이소룡은 ‘사망유희’의 대본에 대한 의논을 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패의 집에 온 이소룡은 그날 저녁 7시 30분경에 조지 래젠비와의 만남약속이 잡혀있었는데, 그는 ‘머리가 아프고, 몸이 매우 피곤하다’며, 그때까지 잠을 자겠다고 말하면서, 정패의 침실에서 혼자 잠을 잤다고 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줄곧 정패의 침실에서 혼자 잠을 자고 있었는데, 정패가 조지 래젠비와의 약속시간이 가까워지자, 이소룡을 깨우러 침실에 갔을 때, 이소룡은 침대에서 혼수상태로 쓰러져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소룡이 전혀 깨어나지 못하자, 정패는 이소룡 주치의와 레이몬드 초우에게 전화를 했고,
그 후 앰블런스를 통해서 이소룡을 퀸엘리자베스병원으로 이송시켰다. 그런데, 이소룡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이렇게 이소룡이 사망한 당일날 정패가 이소룡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정패가 혹시 이소룡에게 독약을 먹여서 사망하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을 받기도 했다.
이소룡이 너무도 젊은 나이에 허망하게도 사망함에 따라, 홍콩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팬들이 그의 죽음을 매우 애통해했고, 그의 죽음에 많은 의혹을 제기했었다.
그리고, 이소룡사망에 관한 여러가지 루머들이 흘러나왔다.
이소룡사망에 대한 루머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여기에 소개해보고자 한다.
첫째, 이소룡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애인 정패가 독약으로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정패가 이소룡외에도 또다른 애인을 사귀고 있었는데, 그녀는 삼각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 걸림돌이 되어버린 이소룡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둘째, 이소룡이 소속되어 있던 골든하베스트사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쇼브라더스사의 사주로 인해 이소룡은 암살당했다고 한다.
셋째, 이소룡은 뇌종양에 걸려서 심한 두통을 겪고 있었고, 이같은 심한 두통으로 인해서 평소에 화를 잘내고 히스테리를 심하게 부려서,
더이상 감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골든하베스트사의 회장 추문회(레이몬드 초우)가 킬러를 고용해 이소룡을 암살했다고 한다.
넷째, 이소룡은 뇌부종에 의해서 사망했다는 설이다.
이소룡이 사망했을 당시에, 이소룡이 이송되었던 병원의 담당의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소룡은 뇌종양이 악화되면서, 갑작스럽게 발생한 뇌부종의 쇼크로 인해서 사망했다고 한다.
사망하기 2달 전에 이소룡은 ‘용쟁호투’를 촬영하고 있었는데, 그는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면서, 쓰러져 기절한 적이 있었다.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진찰을 받았는데, 진단 결과, 이소룡은 뇌부종의 증세가 발생했었다고 한다.
이소룡은 뇌속에 물이차고 뇌가 부어오르는 증세인 뇌부종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소룡을 담당했던 퀸 엘리자베스병원측의 공식입장이라고 한다.
이소룡이 사망 당일날 정패의 아파트에 있을 때, 이소룡이 심한 두통을 호소하자, 정패가 아스피린의 일종이자 두통약인 에콰제를 주었고, 이 약을 먹고난 후 몇시간 후에 이소룡이 갑자기 사망했다고 한다.
정패가 건네주었던 진통제 에콰제는 아스피린의 일종인 평범한 진통제인데도, 이소룡 죽음과 관련해서 정패가 나중에 많이 의심받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진통제인 에콰제를 갖다줬다는 이유로 이소룡 팬들에게 엄청난 시달림을 받았던 정패는 그 후 불가에 귀의하였고, 무려 30여년 간을 산속의 절에서 숨어살아왔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정패가 진통제 대신에 독약을 주어서 이소룡을 죽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정패가 이소룡을 죽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이소룡 사후에 정패가 이소룡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30여년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온 것을 보더라도, 정패가 이소룡을 죽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않는다고 본다.
이소룡은 평소에 심한 두통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아왔다고 하는데, 이소룡이 평소에 화를 잘내고 히스테리를 많이 부린 것은, 심한 두통 때문이었다.
이소룡은 두통을 완화하기 위해서 평소 마리화나도 많이 복용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자신의 근육량을 늘리기 위해서 스테로이드를 자주 복용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소룡이 피지컬관리를 위해서 복용해왔던 스테로이드 등의 약물의 자극으로 인해서, 쇼크사한 것이라고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즉, 이소룡의 죽음은 스테이로이드 같은 약물의 남용 때문이라고 동료배우 척 노리스가 주장하기도 했다. 척 노리스는 이소룡과 영화 ‘맹룡과강’에 함께 출연했던 무술배우이다.
또한 태권도사범 이준구는 이소룡은 이소룡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한 액션배우가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소룡이 무술배우로서 너무도 크게 성공했는데, 이소룡의 성공으로 인해 비즈니스상 큰 손해를 보게된 그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한 액션배우가 그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이준구는 미국에서 이소룡과 오랫동안 함께 무술을 수련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으로 이소룡의 많은 것을 알고있는 사람이다.
이준구는 그렇게도 건강했던 이소룡이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을 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이소룡은 그가 성공하면서 손해를 보게된 경쟁자가 고의적으로 살해한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준구는 그 경쟁자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시대에 이소룡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액션배우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왕우다.
왕우도 같은 시기에 홍콩에서 권법영화들을 많이 만들어서 스스로 주연으로 출연해서 주가를 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소룡이 나타나서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성공하게 되자, 상대적으로 왕우는 인기가 주춤해졌고, 이소룡의 높은 인기에 가려져 소외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래서 왕우가 자신의 인기를 되찾기위해서 경쟁자인 이소룡을 암살했다는 가설인데, 이 가설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역시 설득력이 약하다고 본다.
이소룡은 매우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최고의 인기를 끌던 시기에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이소룡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같은 다양한 루머들이 확대재생산되었다고 본다.
또한 그 당시 홍콩경찰이 이소룡의 사인에 대한 설득력있는 발표를 내놓지않아서, 이소룡 죽음에 대한 의혹들이 크게 증폭되어서, 이같은 루머들이 더욱 빠르게 퍼져나갔다고 생각된다.
저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이소룡의 사망원인은 이소룡부검을 담당했던 퀸 엘리자베스병원의 담당의사의 증언대로 뇌부종으로 인한 ‘쇼크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패와 이소룡 사진
마지막으로 이소룡죽음에 대한 또다른 흥미로운 루머가 있어서 소개해보고자 한다.
◆ 이소룡사망의 진짜원인은 이소룡가문에 내려진 저주 때문이다!
이렇게 이소룡죽음에 관해서 여러가지 루머들이 나돌고 있고, 이소룡죽음에 관해 가장 흥미를 끌고있는 루머가 따로 있는데, 바로 이소룡가문에 내려진 저주에 관한 이야기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소룡조부의 묘자리를 잘못 선택했고, 그 때문에 혼령의 저주를 받아서, 이소룡을 비롯한 3대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좋다는 소문난 명당자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소룡아버지는 이소룡 할아버지의 묘자리를 그 명당자리로 이전했는데,
그 이전한 묘자리의 원래 주인이었던 혼령의 저주를 받아서 이소룡 등 3대가 죽었다는 설이다.
이 혼령의 저주 때문에 이소룡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이소룡 사후 20년이 지난 후에, 이소룡가문으로부터 흘러나온 이야기인데, 이같은 혼령의 저주이야기를 믿는 홍콩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고 한다.
혼령의 저주를 받아서 이소룡이 사망했다는 이야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은 이소룡의 할아버지의 묘자리를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이라고 알려진 다른 묘자리로 이전했는데,
그 묘자리 바로 옆에는 과거 천재의 풍수지리가였다가 12살의 어린나이에 죽은 신동의 무덤이 있는 묘자리였다고 한다.
이소룡조부의 묘자리를 이전한 바로 그날밤 이소룡 아버지 꿈에 그 신동의 혼령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은 경고를 했다고 한다.
신동의 옆자리로 이전한 이소룡조부의 묘자리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않으면, 이소룡일가의 3대에 걸쳐 큰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고 하는데, 즉,
이소룡 아버지와 이소룡, 그리고 이소룡 아들 등 이소룡가문의 3명의 남자들이 젊은 나이에 모두 끔찍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
‘이소룡아버지는 앞으로 몇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고, 이소룡은 35세 이전에 죽을 것이며, 이소룡의 아들은 30세가 되기 전에 죽을 것이라고’ 그 신동의 혼령은 꿈속에서 말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소룡아버지는 꿈속에 나온 혼령의 경고를 무시하고, 할아버지믜 묘지이전을 실행했다.
그리고, 얼마 지니지 않아, 이소룡의 아버지는 병에 걸려 사망했고, 이소룡은 34살의 젊은나이에 사망했고, 이소룡아들도 28세의 젊은나이에 사망했다.
이소룡의 아들 브랜던 리는 tv시리즈 ‘더 크로우’를 촬영하는 도중에, 총을 맞고 죽는 연기를 했었는데, 그를 쏜 총에 실탄이 들어있었고, 실탄이 들어있는 총을 맞은 브랜던 리는 연기하다가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미국에서 무술가로, 영화베우로 활동하고 있던 이소룡의 아들 브랜던 리는 아버지보다도 더 어린 28살의 나이에 아버지처럼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이처럼 이소룡아버지의 꿈에 나왔던 그 신동의 혼령이 경고한 내용과 똑같은 일이 발생한 것이어서, 진짜 그 혼령의 저주에 의해서 이소룡 3대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은 이소룡을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이소룡팬들이
이소룡을 잊지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때문에, 이소룡 죽음에 대한 루머들이 크게 확산되어 나온게 아닌가 한다.
이소룡애인 정패
이소룡이 죽은 지, 47년이 지났지만, 이소룡사망에 대한 의혹들은 해소되지 않았고, 여전히 커다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사망유희’의 이소룡과 대니 이노산트의 대결 동영상
이소룡의 사망유희 풀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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