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를 살해한 시해사건의 원인, 실제 사진얼굴, 민비는 죽지않았다 생존설의 실체기록

 

명성황후 민비 1851년 11월 17일 ~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는 조선의 개혁을 추구했던 뛰어난 정치가인가, 아니면 조선을 멸망에 이르게한 희대의 요부인가요?

이처럼 명성황후 민비에 대한 평가는 두가지로 크게 엇갈리고 있는데요.

 

구한말 조선이 일본 등 열강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나라를 잃을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고있었던 시기에, 명성황후는 조선을 개혁시켜서 부강한 국가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난 그녀는 안타깝게도 일본세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마는 시대의 희생양이 된 인물이지요.

 

명성황후를 접했던 당대의 외교사절들은 그녀가 두뇌가 명석하고 뛰어난 지식과 식견을 지닌 탁월한 정치가이자, 현명한 외교가였다고 명성황후 민비를 호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명성황후 민비를 여러번 접했던 미국인 선교사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 호튼 언더우드는 명성황후는

‘우아하고 근엄하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그녀는 뛰어난 기지와 매력을 지닌 분으로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는 완벽한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지닌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논리에 있어서 핵심을 찌르면서 반대세력을 허를 찌르는 데 능통한 아주 뛰어난 지성을 지닌 왕후였다’고 호평한 바가 있습니다.

 

명성황후가 국력이 쇠약해갔던 조선을 개혁해서 다시 조선의 국력을 높이고자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고, 조선에 대해 침략의 야욕을 품었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외교적인 노력을 펼치면서 조선의 독립을 꾀했던 점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명성황후는 개인적인 집안의 안녕과 자기 개인의 권력과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는 개인적인 욕심이 매우 강했던 탐욕스러운 왕비였다는 비판도 함께 받고 있는 인물이랍니다.

 

한편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국가의 자주독립을 지키려고 처절한 노력을 펼쳤던 뛰어난 개혁적 정치가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에만 집중한 나머지 오히려 조선의 국력을 약화시킨 인물이라는 두가지 평가를 함께 받고 있는 인물이 명성황후 민비이지요.

 

그렇기에, 명성황후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던 현명한 개혁정치가 또는 나라를 말아먹은 희대의 요부라는 두가지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명성황후 민비는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난 인현왕후 민비의 오빠집안의 뼈대있는 가문의 자손입니다.

 

민자영(민비)은 1866년 16살 때에 당시 15세였던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서 혼례를 치르고, 왕의 정비로서 삶을 시작하게 된답니다.

 

이후 명성황후 민비는 고종과 결혼한 지 5년만에 첫아들을 출산해서 크게 기뻐하지만, 어렵게 얻은 첫아기가 항문이 없는 기형아였기에 크게 낙담하게 됩니다.

 

이 당시 아기의 원자책봉 문제로 인해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민비 사이가 나빠지게 되는 계기가 발생합니다.

 

원래 고종은 명성황후와 혼인하기 전에 귀인 이씨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두사람 사이에 완화군이 태어났지요.

그런데, 후에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아기가 태어났지만,

태어난 아기가 항문이 없는 기형아였기에, 흥선대원군은 완화군을 원자로 책봉하려고 시도를 했답니다.

 

이것 때문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민비 사이가 벌어졌고, 또한 흥선대원군이 민비가 낳은 아기에게 산삼을 보내어 달여 먹도록 했는데, 산삼을 먹인 민비의 아기가 사흘만에 죽었고,

이에 명성황후 민비는 흥선대원군이 자기 아기를 고의적으로 죽였다고 생각하면서, 두사람 사이가 크게 나빠지게 된답니다.

 

이렇게 명성황후 민비가 결혼한 지, 5년만에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나빠지고, 그 후 민비와 흥선대원군은 평생 사사건건 대립하고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답니다.

 

고종이 12살 때에 왕이 되었는데, 고종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은 섭정을 하였고, 향후 10년 동안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대신해서 왕을 넘어서는 최고권력을 행사해나갔습니다.

 

이처럼,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구실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10년 넘게 통치해나가자, 민비는 22살이 된 고종에게 왕권을 되찾게 해주기 위해서,

유생 최익현으로 하여금 흥선대원군에 대한 탄핵상소를 올리게했고,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잡은 지 10년만인 1873년에 최고권력을 아들 고종에게 넘기고 하야하게 됩니다.

 

이 당시 명성황후 민비는 흥선대원군에게 대항하기 위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 필요를 느끼는데, 민승호, 민겸호 등 민씨 친척들을 모아서 백그라운드가 되는 자신의 정치세력으로 만들어놓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민비권력의 백그라운드를 만들기 위해서 포섭된 민겸호등 민비세력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매관매직, 뇌물등 온갖 권력형 부정부패가 창궐하였고, 그로인해 국고를 탕진해 국가예산이 고갈되어 버립니다.

 

이처럼 민씨일가의 부정부패로 인한 국고손실로 인해서 구식군인에게 줄 급료가 12개월 넘게 밀리는 등 온갖 폐단이 발생하자, 참다못한 구식군대에 의해 임오군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임오군란이 발생하면서, 구식군인들은 궁궐로 쳐들어가 민씨일파를 처단하고, 민비를 죽이려하지만, 민비는 궁녀복을 입고 몰래 궁궐을 탈출해 간신히 죽을 위기를 모면합니다.

 

◆ 민비의 사치와 부정부패

 

명성황후는 한편으로는 쇠약해진 조선의 국력을 높이려는 개혁정치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국고를 엄청나게 탕진함으로써 오히려 국력을 떨어뜨린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조선말기의 유학자 황현이 자신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명성황후 민비의 국고탕진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엄청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답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명성황후가 권력을 잡으면서, 그녀의 친족인 민씨 일파들이 궁궐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민씨일족에 의한 엄청난 부정부패가 발생하게 된답니다.

 

명성황후 민비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민씨 일족은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매관매직을 일삼았습니다.

 

민씨 일족에게 거액의 돈을 상납하고 벼슬을 산 사람들은 자신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혈의 세금을 뜯어냈고, 이로써 백성들의 삶은 더욱더 궁핍해지게 된답니다.

 

명성황후의 친척인 민겸호는 선혜청관리로 있으면서 군인들에게 지불해야할 급료를 갈취하였고, 이 때문에 구식군대에 지불할 급료 12개월치가 밀리면서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답니다.

 

명성황후는 자신이 낳은 원자(순종)가 병이 나자 원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한반도 전역의 1만 2천봉에 쌀 한섬과 돈 천냥을 갖다놓고 무당과 함께 궂을 벌여서 엄청난 국고를 낭비했습니다. 이런 행동을 11년 동안 계속했다고 합니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조카 민형익이 부상을 당했을 때, 그를 치료해준 의사 알렌에게는 10만냥을 주었답니다.

또한 명성황후는 자신과 친했던 언더우드라는 미국인선교사가 혼인식을 치를 때, 100만냥을 결혼선물로 선사해주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조선의 일년세입이 480만냥이었으므로, 언더우드에게 준 100만냥은 조선의 일년예산의 1/4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이처럼 명성황후는 엄청나게 국고를 낭비하고 조선의 예산을 탕진했다는 점에서, 사치의 여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명성황후 민비가 잘못 처신한 부분도 있지만, 또한 그녀가 잘한 부분도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쇄국정책을 펼쳤던 대원군과는 달리,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의 근대문물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손탁호텔을 이용하여 서양각국의 외국인 및 외교사절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그들을 이용해서 서양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였습니다.

 

명성황후는 우리보다 훨씬 발전된 서양의 근대문물을 수용하고자 노력했고, 조선의 부국강국을 이루고자 노력했다는 점으로 볼 때에, 그녀가 추구했던 목표나 정책은 합리적이었고, 그 방향이 정확했다고 찬사를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큰 그림에서는 명성황후의 방향이나 목표는 옳았지만, 그 목표를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는 잘못된 점들이 너무 많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권력을 사적으로 농단하고, 부정축재를 일삼는 자신의 친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 우리의 국력, 즉 내적인 힘을 먼저 다져놓은 다음에, 외국의 힘을 끌어들여야하는데,

국가내부의 힘도 없는 상태에서 외국세력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임으로서, 우리나라를 열강들의 이권전쟁터로 전락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고, 백성들이 얼마나 도탄에 빠졌으면, 임오군란이나 동학혁명 같은 민란이 계속해서 일어났겠습니까?

 

그런점에서 명성황후 민비는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꾀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정치나 내부개혁을 너무 못함으로써,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같은 내우외환을 야기시켰다는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녀가 정말로 정치개혁을 잘했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잘 다스렸다면, 결코 임오군란이나 동학농민혁명 같은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더군다나 명성황후가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청나라와 일본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엄청나게 많은 죄없는 농민들이 죽임을 당하는 동학농민학살 같은 끔찍한 일까지 벌어졌답니다.

 

◆ 명성황후 민비 시해사건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가혹한 수탈로 인해서 삼남지방에서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입니다.

 

삼남지방에서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민씨정권은 농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여서 농민군을 진압하게 되는데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한반도에 출동한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농민군을 진압한 후, 한반도에서 서로 우위에 서기 위해 청일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지게된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민비와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러시아를 조정에 끌어들여 러시아에 외존하는 외교정책을 펼쳐나갔고, 일본을 멀리하게 된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서 눈에 가시같은 존재인 민비를 살해했습니다.

 

1895년, 일본은 40여명의 자객들을 동원해서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킨 이유는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의 한반도진출을 막기 위해 강력한 친러반일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지요.

 

한반도에서 일본의 힘과 영향력이 커지고 일본이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자,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서 일본세력의 영향력과 발호를 막고자 시도했는데,

이처럼 반일친러정책을 펼치는 눈에 가시같은 명성황후를 제거해야만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이 용이해지기 때문입니다.

 

1894년 일본공사 미우라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낭인들을 조종해 경복궁의 민비거처인 건청궁을 무단으로 침입해 명성황후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6시경, 40명의 일본낭인들과 일본수비대가 합세하여 경복궁의 담을 뛰어넘었고, 궁궐을 지키던 조선수비대와 한차례 교전을 벌여 수비대를 물리친 뒤, 경복궁 뒤쪽에 있는 왕비의 처소 건청궁으로 침입해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훈련대연대장 홍계훈과 시위대가 낭인들이 쏜 총에 맞아 쓰러졌고, 일본낭인들은 건청궁 내의 왕비의 침전인 곤녕합으로 쳐들어가 명성왕후를 찾아내어 살해를 시도했는데요.

 

왕비의 침전인 곤녕합으로 낭인들이 쳐들어오자, 명성왕후는 궁녀복장으로 갈아입고, 내실 깊숙이 숨었지만, 결국 일본낭인들에게 발각되어서 미야모토 다케다로 등 여러명의 낭인들의 칼을 가슴에 맞고,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낭인들은 명성왕후의 시신을 건청궁 밖의 10m지점의 마당으로 끌고가서 불에 태워서 소실시켜버렸습니다.

 

일본이 명성황후 민비를 살해한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명성황후가 일본을 멀리하기 위해 러시아를 조정에 끌어들이는 반일친러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랍니다.

 

고종보다 민비가 훨씬 더 영특했고, 정치적 감각이나 군사적 전략에 더 식견이 높았기 때문에, 민비를 그냥 놔두고서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에 큰 방해를 받게된다는 판단했기 때문에, 일본이 무참히도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즉, 일본으로서는 일본의 조선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것이 일본의 조선진출을 위해 필요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만일 명성황후가 계속 살아있었더라면, 일본은 그토록 손쉽게 조선을 합병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처럼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후, 1905년에는 러일전쟁을 일으켜서 승리하면서, 조선에서 러시아세력을 몰아내었고, 1905년도에는 한일을사조약을 맺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후, 결국 한일합방을 하면서 조선을 완전 멸망시키게 됩니다.

 

◆ 명성황후 생존설

 

그런데, 명성황후가 을미사변 때에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는데요.

을미사변을 겪은 후에도 명성황후가 생존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외국공관의 문헌사료들이 여러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을미사변이 있은지 8개월이 지난 1896년 6월 2일날,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라돌린이 독일본국에 올린 보고서내용을 보면, ‘을미사변 직후,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명성황후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놀라움을 주고있습니다.

 

또한 독일대사 라돌린이 상부에 보고한 또다른 문서에는 ‘명성황후가 살아있으며, 왕비는 서울주재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발견되었답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8개월 후에도 주러시아 독일대사 라돌린은 명성황후가 살아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을미사변이 있은지 4개월이 지난 1896년 2월 15일날, 서울주재 영국총영사 윌터 힐리어는 ‘을미사변 당시 궁녀 서너명이 살해당했고, 명성황후는 궁녀복을 입고 궁궐을 탈출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상부에 올렸다고 합니다.

 

이 때는 고종이 러시아대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일어났던 시기인데, 아마도 고종이 러시아대사관으로 피신할 때에, 남몰래 민비도 함께 피신시킨 것이 아닌가 판단됩니다.

 

또한 을미사변 때에, 시위대의 연대장 이학균이 고종에게 ‘왕후마마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여쭈었을 때, 고종은 그에게 ‘걱정하지 마라, 왕비는 이미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다’고 답하면서 이학균을 안심시켰다고 합니다.

 

 

 

 

 

이같은 이학균의 증언은 서울주재 러시아공사인 베베르가 상부에 올린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랍니다.

 

이처럼 을미사변 당시에 조선에 주둔했던 여러나라의 외교관들이 기록한 보고서에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살아있었다는 내용들이 여러건 담겨있기 때문에,

어쩌면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죽지않고, 탈출해서 은밀한 장소에서 계속해서 살아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여집니다.

 

즉, 을미사변 당시 겉으로는 명성황후가 일본낭인에 의해서 살해된 것인양 가장을 했고, 실제로는 일본낭인에 의해 살해당했던 인물은 궁녀이며,

궁녀복으로 갈아입은 명성황후는 남몰래 궁궐을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성밖의 안전한 은신처에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을미사변 이후, 일본이 명성황후 장례식을 강행하려고 하자, 고종은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외국대사관의 문헌자료들과 고종의 행동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보면,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는 죽지않고,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뒤인 1897년도에 가서야 비로서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치러지게 됩니다.

 

이 때에도 명성황후 장례식을 치른 이유는 그녀가 진짜로 죽어서가 아니라, 명성황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일본이 알게되면, 일본이 다시 그녀를 죽이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명성황후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러 명성황후 장례식을 치러서 그녀가 죽은것처럼 가장을 했을수도 있다고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의 재야사학자들 중에는 을미사변 이후에도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살아있었다고 믿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아뭏튼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에 살해당했다는 설과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설이 함께 병존하고 있는데, 역사학자들이 더욱 많은 사료들을 발굴조사해서 명성황후 생존설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성황후는 19세기말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되던 그 어려운 시국에, 일본의 침략의 야욕을 미리 간파하고 일본침략을 분쇄하기 위해서,

러시아 등 열강의 힘을 이용해서 일본을 견제하여 조선의 독립과 생존을 위해서 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난세의 지혜로운 왕비였습니다.

 

그렇지만, 명성황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조선의 국력은 고갈되고 나라의 존립이 쇠락해져 있었기 때문에, 명성황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조선수호를 위한 한맺힌 노력과 수고는 안타깝게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이 멸망한 이유는 명성황후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대원군의 잘못된 쇄국정책으로 인한 근대화가 크게 지연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답이라고 봅니다.

 

만일 대원군이 집권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고종과 민비가 10년 더 일찍 정권을 잡았더라면, 민비에 의해서 더 빨리 문호를 개방해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그렇게 조선의 근대화가 10년 일찍 앞당겨짐으로 인해서 조선은 더 빨리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일본의 침략야욕을 더 강력하게 분쇄할 수 있었을 거라고 판단됩니다.

 

그런 점에서 명성황후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아까운 난세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뭏튼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인해서 죽음으로써, 조선이 근대화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게 되고, 그 후 조선은 서서히 일본제국의 침략에 무너지고 말았답니다.

 

◆ 명성황후의 얼굴과 진짜 실물 사진

 

명성황후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그녀의 실제 얼굴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시중에 명성황후의 실제 얼굴을 찍은 사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진들이 여러장 나돌고 있습니다.

그 사진 중에서 대표적으로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3장의 사진을 소개해드리겠어요.

 

사진 1.

1905년 언더우드가 자신의 책에서 소개한 명성황후 사진이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이 사진을 정장을 갖춰입은 한국여인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내용이 곡해되어서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잘못 알려져 왔습니다.

 

고등학교 역사책에서도 나와있는 이 사진은 실제로는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라, 궁녀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사진 2.

1894년도에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 7월호에 실린 사진인데요.

가채머리를 하고 부채를 든 조선여인의 사진으로, 이 사진도 한 때에 역사책에 민비의 사진이라고 실리면서, 명성황후의 얼굴이라고 알려졌던 사진입니다.

 

그렇지만,이사진은 영국 등 외국에는 조선 궁녀의 사진으로 소개된 사진이라고 하며, 명성황후의 실제사진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사진은 사진의 얼굴표정이 그동안 알려졌던 왕비의 인상착의와 전혀 다른 외모를 하고 있고, 왕비로서 품격과 체통에 전혀 맞지않는 얼굴표정이어서 전문가들은 명성황후가 아니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이 비치는 치마를 입었다는 점과 치마속에 바지를 입고있는 점 등은 품격있는 왕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이 사진의 뒷배경이 흥선대원군의 뒷배경과 같다고 해서, 민비의 사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사진은 왕비가 아닌 기생의 사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어쩌면 흥선대원군의 소실의 사진일 수도 있습니다.

 

사진 3.

이 사진은 이승만이 1910년도에 출간한 책 ‘독립정신’에 나오는 사진으로, 이책에서 이승만은 직접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궁궐과 관련된 일을 했던 한 궁녀분이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전문가는 명성황후가 저렇게 민간인의 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을 수는 없기 때문에, 명성황후의 사진이 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은 이승만을 비롯한 여러명의 당대 문객들이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가장 많이 소개된 사진이랍니다.

 

1917년도에 발간된 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도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소개된 적이 있으며, 1927년에 발간된 장도빈의 ‘대원군과 명성황후’란 책에도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즉, 이 사진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공통적으로 묘사하는 사진입니다.

반면, 또다른 학자는 왕비가 왜 정복을 입지않고 평복을 입고 사진을 찍냐는 의혹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답변을 내놓았답니다.

 

이 사진은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후, 궁궐로 오기전에 사가에 있을 때에 평복을 입고 찍은 사진일 수 있다는 겁니다.

즉, 명성황후가 궁궐로 들어오기 전인 16살 때에 자택에서 평복차림을 입고 찍은 사진으로, 명성황후의 십대 시절의 사진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한말에 명성황후를 실제로 보았던 여러 외국선교사들이 명성황후의 외모를 구체적으로 묘사해놓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궁궐에서 여러 외국인선교사들을 여러번 초대해서 대화를 많이 나누었던 왕비로 유명한데요. 왕비와 자주 만났던 여러 외국선교사들이 왕비의얼굴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기록들이 남아있는데요.

 

아래의 사진이 이승만이 ‘독립정신’이라는 책에서 명성황후라고 소개한 사진의 원본사진입니다. 책이나 신문에 실린 흑백사진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잘나온 원본사진인데요.

 

이 원본사진이야말로 왕비와 자주 만났던 여러 외국선교사들이 민비를 묘사했던 외모와 가장 근접한 사진이라고 합니다.

 

이 사진의 인물은 대단히 귀족적인 용모를 갖춘 여인으로 느껴지는 사진이며, 그 자태가 장차 왕비가 될만한 고귀한 풍모가 풍겨나오는 사진이라고 느껴집니다.

 

흑백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부드럽고 여성적이며 곱고 예쁜 외모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원본사진이 책이나 신문에 흑백으로 실리는 바람에 이상한 외모로 변해버린 건데요.

 

이 원본사진에서 보면, 그녀가 귀족적인 풍모를 지녔을 뿐만아니라, 매우 여성적이고 예쁜 외모를 갖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외국선교사들의 묘사에 의하면, 왕비는 이마는 넓고 반달눈썹을 지니고 있으며, 눈은 아몬드형으로 가늘고, 눈끝이 위로 치솟아있다고 합니다. 또한 왕비의 입매는 야무지고 결단력과 개성이 강해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비의 귀는 작은편이고 코는 가늘고 오똑하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 번째 원본사진을 보면, 외국선교사들이 묘사한 것과 거의 99% 이상 일치하는 외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널따란 이마에다, 반달형 눈썹, 그리고 아몬드같이 가늘은 눈, 그리고 눈끝이 살짝 위쪽으로 올라간 점, 그리고 야무지게 닫혀진 입술과 결단성이 엿보이는 입술선도 선교사들의 묘사와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또한 이 사진을 보면, 귀가 작고 코가 가늘고 오똑하다는 점도 선교사들의 묘사와 100% 일치합니다.

 

그런데, 궁녀는 왜 이 세 번째사진을 보고, 명성황후가 아니라고 했던 걸까요?

그것은 그 궁녀가 이 원본사진을 본 게 아니라, 신문과 책에 실린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진 탁본 흑백사진을 보고, 명성황후가 아니라고 느꼈던 겁니다.

 

만일 그 궁녀가 이 원본사진을 보았다면, 명성황후가 맞다고 답했을 겁니다.

 

신문과 책에 실린 엉성한 흑백의 탁본사진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부드럽고 느낌의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실제사진일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결론 - 이 세 번째 사진이 명성황후의 실제사진이 맞다고 봅니다.

명성황후를 여러번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던 여러 외국선교사들의 묘사와 거의 100% 일치하는 외모를 가진 이 세 번째사진이 명성황후의 실제얼굴이라고 판단됩니다.

 

드디어 명성황후의 실제얼굴을 찾을 수 있어서, 너무 반갑기 그지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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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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