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의 줄거리, 의적 홍길동 실존인물설 홍가와라, 율도국 위치

 

소설 홍길동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이며, 특히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장가인 허균이 지은 소설로 민중의 저항정신과 계급타파를 강조한 소설로 유명합니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장가로 큰 두각을 나타냈던 허균은 광해군 때에 동부승지와 예조판서라는 높은 벼슬을 지닌 당대의 명망높은 정치인이었고, 또한 근대적인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을 외쳤던 탁월한 혁명가였습니다.

 

시대를 훨씬 앞서갔던 급진적인 개혁사상과 평등사상을 제창했던 허균은 불운하게도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역모죄로 억울한 죽임을 당하면서 세상을 떠나게 된답니다.

 

허균이 살아 생전에 전북 부안으로 유배를 갔을 때, 그곳 부안의 정사암터에 은거하면서 집필했던 소설이 바로 ‘홍길동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최초의 한글소설이자 개혁소설이 허균이 정치적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갔던 부안의 한 유배지에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허균은 봉건사회의 악습과 신분차별제도의 철폐를 부르짖었던 조선중기의 뛰어난 개혁사상가이자, 급진적인 혁명이론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에는 포악한 탐관오리의 처벌과 적서차별의 철폐, 민중으로부터의 개혁사상이 여실히 담겨있습니다.

 

홍길동전의 줄거리 내용

 

‘홍길동전’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세종 때의 좌의정 홍상직의 서얼로 태어난 홍길동은 문무를 골고루 익히면서 청렴결백한 반듯한 성인으로 성장했지만, 서자라는 신분상 한계 때문에 자신의 뜻을 펴지못하는 것을 크게 한탄하게 됩니다.

홍길동은 아버지 홍상직과 시비 사이에 태어난 서자라는 한계를 갖고있었지요.

 

그리고 홍길동을 시기한 홍상직의 또다른 첩실이 보낸 자객에 의해서 암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홍길동은 크게 낙심한 후, 집을 떠나서 한 도적단체에 입당하게 됩니다.

 

홍길동은 그 도적집단에서 탁월한 재주와 신비로운 묘술을 부려서 단원들을 놀라게 하고는, 스스로 ‘활빈당’이라고 하는 의적단체를 조직하고 스스로 두목으로 우뚝 올라서게 됩니다.

 

홍길동이 지휘하는 ‘활빈당’은 조선전국을 무대로 의적활동을 벌여나갔는데, 포악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등 정의로운 의적활동을 활발히 벌여나갑니다.

 

조선조정에서는 홍길동을 잡기위해서 대대적으로 관군을 출동시켜 그의 검거활동에 나섰지만,

관군이 쳐들어올 때마다 홍길동은 신출귀몰한 도술을 부려서 포위망을 빠져나가면서 관군을 허망하게 따돌려버립니다.

 

이처럼 홍길동의 신기한 도술 때문에 도저히 그를 잡을 수 없었던 조선조정은 그의 아버지 홍대감을 회유해서 홍길동을 병조판서로 제수할 것을 알리며, 홍길동을 궁궐로 불러들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임금 앞에 나타난 홍길동은 병조판서 제수를 사양하면서, 자신과 수하들이 조선을 떠날 것을 알리며 홀연히 사라져버립니다.

 

그 후, 홍길동은 어머니와 활빈당 무리들을 이끌고 조선을 떠나 율도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새로운 이상국가를 건국하며 태평성대를 열어나갑니다.

 

홍길동은 율도국에서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두명의 부인을 두고, 3남 2녀의 자녀를 낳아  30년간 나라를 잘 다스리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앤딩의 결말을 맞고있습니다.

 

여기까지가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개략적인 줄거리입니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만들었던 조직 ‘활빈당(活貧黨)’은 그 의미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활동을 하는 집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단순한 도적패가 아니라,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도와주는 의로운 의적집단임을 명백히 정의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답니다.

 

그런데, 허균이 살았던 시기인 16세기는 양반과 평민, 천민의 차별이 엄격한 신분제 계급사회였는데, 이러한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신분차별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아가 민중이 주도해서 이상국가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소설을 썼다는 것은 대단한 혁명적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반과 천민의 신분차별이 뚜렷한 계급사회에서 허균은 ‘홍길동전’을 지음으로써, 봉건적 차별사회를 타파하고,

천민이나 양반이 모두 평등한 이상사회의 건설을 꿈꾸는 엄청난 선구자적 혁명적인 발상을 갖고 있었으며, ‘홍길동전’은 조선사회에서 엄청난 파란을 불러일으킨 혁명적인 소설이라고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허균이 지었다고 하는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단지 소설속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상으로 실존했던 실존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놀라움을 주고있습니다.

 

◆ 소설속의 주인공 홍길동은 실존인물이다!

 

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洪吉童)은 조선중기의 실제 도적 홍길동(洪吉同)을 그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 연산군 때에 실제로 활동했던 도적 ‘홍길동’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그 실제도적 ‘홍길동’을 모델로 삼아서 소설의 주인공으로 둔갑시켰던 겁니다.

 

단지, 소설의 주인공 홍길동의 한자는 ‘洪吉童’이고, 실제 도적인 홍길동의 한자는 ‘洪吉同’으로서 맨 뒤의 한자 ‘동’자만 다를 뿐, 홍길동이라는 한글은 똑같습니다.

 

또한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의적활동을 하는 의로운 도적이고, 실제 도적 ‘홍길동’도 도적활동을 하다가 붙잡힌 인물로서 두 인물이 모두 도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두 인물 모두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활동했다는 시대적 공통점도 갖고 있습니다.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1434년도에 태어나서 세종 때인 1450년도에 도적단의 두목이 되었고, 세조 때에 적극적인 의적활동을 벌여나갔습니다.

 

그리고 실제 도적인 홍길동도 대체적으로 1450년 이후부터 도적활동을 벌여나가다가 연산군 때인 1500년도에 관군에 붙잡혀서 옥에 갇히게 됩니다.

 

도적 홍길동은 세종시절에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우리나라의 서남해안인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특히 공주를 근거지로 도적활동을 벌이다가 연산군6년인 1500년도에 관군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던 실존인물이라고 하며, 실제 도적 홍길동도 일각에서는 의적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연산군 때에 도적으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높였던 실제 도적 ‘홍길동’을 모델로 삼아서, 허균이 조선시대의 계급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서민들의 영웅’이자 ‘의로운 도적’인 소설속의 홍길동을 창조해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허균에 의해서 실제도적 ‘홍길동’이 소설속의 의로운 도적 ‘홍길동’으로 재탄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홍길동’이 실존인물이라는 근거

 

그럼,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실존인물 홍길동이라는 구체적인 근거를 살펴보도록 하겠어요!

 

1490년도에 홍길동에 관한 첫 번째 기록이 있습니다.

 

1490년도에 작성된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편에 보면, 의금부 위관 한치형이 ‘홍길동’을 붙잡았다고 왕에게 고하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한치형이 올린 보고문에서 ‘갓꼭대기에 옥장식을 달고, 붉은 허리띠를 두른 옷차림을 한 강도 홍길동이 관군에 사로잡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1490년경에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도적이 실제로 있었고, 실제 도적인 홍길동은 관군과 교전 중에 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00년 경에 작성한 홍길동에 관한 두 번째 기록이 존재합니다.

 

연산군 6년 때인 1500년경의 연산군일기의 기록에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는 명문의 기록이 존재합니다.

이 연산군 기록에 강도 홍길동이 관군에 체포되어서 옥에 갇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524년도에 작성된 세 번째 기록이 존재합니다.

 

1524년도에 작성된 중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조정은 홍길동을 잡기위해서 대대적인 토벌을 벌였는데,

활빈당은 충청도 공주지역에 견고한 산성을 쌓아 관군의 토벌을 방어하면서 맹렬히 저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단지 소설속의 주인공으로만 알고있던 홍길동은 소설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연산군 때와 중종 때에 실제로 도적으로 활동했던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성씨를 기록한 ‘만성대동보’에는 함경도의 경상절도사인 홍상직의 둘째아들이 ‘홍길동’이라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에서도 홍길동의 아버지가 홍상직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소설속의 홍상직은 실존인물인 경상절도사 홍상직이며, 그의 아들이 실제로 홍길동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과 그의 아버지 홍상직은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역사적 기록들을 근거로 해서 실존인물 홍길동의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 실존인물 홍길동의 생애와 활동 -

 

실존인물 홍길동은 세종대왕 시기에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한 때 경상절도사로 재임했던 홍상직이며, 홍길동은 그의 둘째아들이었습니다.

 

홍길동은 우리나라의 서남해안으로 진출해서 도적단을 결성하고, 전라도와 충청도, 그리고 특히 공주를 근거지로 해서 의적활동을 벌여나갔습니다.

 

의적활동을 벌여나갔던 홍길동은 연산군 6년인 1500년경에 조선조정에 의해 출동한 관군에게 체포되어 의금부 옥사에 갇히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홍길동이 1494년과 1500년, 1524년 이렇게 세 번이나 관군에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 부분이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홍길동이 체포되었다가 탈출해서 다시 저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홍길동이 체포된 후에도 또다른 도적두목이 ‘홍길동’의 이름을 차용해서 의적활동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길동은 홍상직의 둘째아들인 서자로 태어났고, 홍상직의 첫째아들(정실부인)의 아들인 홍일동은 1420년경에 과거 문과에 급제해서 조정에 진출한 후,

세조의 각별한 신임아래 지중추부사, 상호군까지 지낸 뒤 1464년에 사망했으며, 당대의 문필가인 서거정이 자신의 저서 ‘필원잡기’에 홍일동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속에 나오는 홍길동의 아버지 홍상직과 이복형 홍일동, 그리고 홍길동 모두 역사기록에 나오는 역사적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길동이 명망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떠나 의적이 된 이유는 당시 서자에 대한 극심한 차별대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에 ‘서얼자손은 문과, 진사과, 생원과 같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는 적서차별법 때문에,

서자로 태어나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홍길동은 그 시대의 잘못된 신분제도의 희생양이 되어야했습니다.

 

이렇게 봉건적 신분차별제도 때문에 사회진출이 원천봉쇄됨으로써, 사회체제에 대한 강한 불만과 울분을 갖고있었던 홍길동은 마침내 집을 떠났고,

경상도에서 학도대사라는 스승을 만나서 불교와 도학을 습득한 후, 충청도의 공주를 근거지로 해 본격적으로 반체제활동과 활빈활동을 펼쳐나갔다고 합니다.

 

충청도 공주시 사곡면 일대에는 홍길동이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던 ‘홍길동성’이라고 불리는 산성이 지금도 남아있으며,

조선 세조 때에 홍길동은 이 홍길동성을 근거지로 해서 탐관오리와 포악한 토호를 징벌했다는 전설이 계속해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공주시 우성면 한천리에 남아있는 ‘무성산성’이 바로 홍길동성이라고 하며, 홍길동은 이곳에 성곽을 쌓고 무장활동을 벌였으며, 이 성안에는 홍길동에 살았다는 동굴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홍길동은 이 공주의 무성산성을 근거지로 활동을 벌이다가 조선 관군의 토벌작전으로 위기를 맞게되자, 활동무대를 서남해안의 바닷가로 옮겼고,

이곳에서 지방관아나 토호들의 양곡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등 활발한 의적활동을 펼쳐나갔고, 결국 연산군 6년때인 1500년경에 지리산 근처의 임실에서 추격해온 관군에 체포되어 의금부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의금부가 체포한 홍길동을 심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 의금부에 투옥된 홍길동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투옥된 홍길동은 놀랍게도 극형을 받지않았고, 단지 강상죄로 처벌받았다고 합니다. 

‘강상죄’는 도덕이나 삼강오륜의 윤리를 위반했을 때 받는 처벌이며, 일종의 패륜범죄에 대한 처벌입니다.

 

그리고 왕조실록의 기록에는 홍길동이 투옥되었다는 기록만 있을뿐 극형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홍길동이 형을 살고 출소했거나, 탈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탈출한 홍길동은 이후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조선을 완전히 떠나서, 바다로 항해해나갔다고 합니다.

 

 

◆ 홍길동, 오키나와섬으로 진출, 일본영웅 홍가와라로 행세

 

일본 오키나와 인근섬 이시가키섬에는 ‘오야케아카하치’라는 유명한 호족이 존재하는데, 그는 또다른이름인 홍가와라(洪家王)로 더욱 유명한 인물입니다.

 

'홍가와라'라고도 불리우는 ‘오야케아카하치’는 15세기에 오키나와의 인근에 있는 이시가키섬에서 활발한 의적활동을 벌인 매우 용맹한 호족이자 민중의 영웅이라고 합니다.

 

‘오야케아카하치’ 또는 ‘홍가와라’라고 불리는 이 용맹한 호족은 오키나와섬 부근의 여러섬들을 옮겨다니면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면서 활발한 의적활동을 벌였다고 유구왕국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5세기경 오키나와 일대를 무대로 활동을 벌였던 ‘오야케아카하치’ 또는 ‘홍가와라’는 그지역의 수령이자,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영웅이었다고 하며, 이 홍가와라가 바로 ‘홍길동’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오키나와 지역에는 유구왕국이 존재했는데, 유구왕조의 심한 수탈과 탄압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고, 백성들의 삶이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거기다가 주변지역으로부터 해적떼들이 자주 출몰해 온갖 수탈을 일삼는등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홍가와라’라는 영웅이 출현해서 백성들을 괴롭하는 도적들을 물리치고 그지역의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홍가와라’는 그지역의 도적때들을 소탕하고, 백성들을 탄압하는 유구왕조에 대항해서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고는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그지역의 위대한 수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홍가와라’라는 말은 우리말로 홍가왕(洪家王)으로 ‘홍씨 성을 가진 수령'이라는 뜻으로, 바로 ‘홍길동’을 뜻한다고 합니다.

일본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 일본에는 ‘홍’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하며, 홍씨는 다른지역에서 이주한 이주민이라고 합니다.

 

‘오키나와’는 옛날에 ‘유구국’이라고 불리웠다고 하며, 이 ‘유구국’이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조선을 떠나 바다로 나아갔던 ‘홍길동’과 활빈당은 오키나와지역으로 진출했다고 봅니다.

 

오키나와섬에서 유구왕조의 폭정에 맞서 싸우면서, 도탄에 빠졌던 그곳의 백성들을 구제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던 당대의 영웅 ‘홍가와라’라는 인물이 바로 조선에서 건너간 홍길동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같은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일부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가설이며 추정입니다.

 

그렇지만 홍가와라가 홍길동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여러가지 근거와 유물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원래 오키나와지역에서는 돌잔치행사나 풍년기원 행사, 줄다리기 같은 풍습이 없었는데, ‘홍가와라’가 15세기에 오키나와지역으로 진출한 후부터, 이같은 풍습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선의 풍습을 오키나와지역으로 갖고갔던 사람들은 분명 조선인일 것입니다.

 

이러한 풍습들은 조선의 고유한 풍습이기 때문에, 홍가와라 일행이 오키나와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이러한 조선의 풍습들을 새롭게 그지역으로 전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오키나와지역에서 홍가와라가 근거지로 삼았던 성이 ‘구지천성’인데, 이 구지천성에서 조선의 화폐인 ‘해동통보’가 발굴되었고, 조선의 농기구도 나왔다고 합니다.

또한 오키나와지역에서 조선식 산성과 도자기, 칠기 등의 유물이 계속해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15세기에 오키나와지역에서 조선의 풍습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조선의 화폐와 농기구 같은 조선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는 현상들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이같은 현상들은 15세기 경에 홍길동세력 같은 조선의 유력한 세력이 오키나와지역으로 진출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근거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소설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은 일본의 섬 오키나와 또는 그 인근의 섬 이시가키섬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형을 살고 출소했거나, 또는 감옥에서 탈옥한 홍길동은 그의 활빈당수하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고, 그들은 머나먼 항해끝에 오키나와로 진출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홍길동일행은 도적떼들을 소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후, 포악한 류쿠왕조에 대항해 싸우면서 대중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바로 ‘홍가와라’였던 겁니다.

 

물론 홍길동이 ‘홍가와라’라는 이야기는 현재 우리나라의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팀에서 주장하고 있는 가설이며, 일본에서는 이같은 주장에 대해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홍길동이 오키나와의 ‘홍카와라’라는 주장에 대해, 학자들 간에 열띤 찬반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연구진은 오키나와에서 홍길동과 관련된 연구조사를 계속 벌어오고 있으며, 오키나와지역에서는 조선의 유물과 유적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지역에서 조선의 유물유적이 계속적으로 발굴됨에 따라, 현재 일본에서도 두 인물이  동일인물임을 인정하는 경향이 늘고 있으며, 

홍길동이 오키나와의 ‘홍카와라’라는 주장이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학자들이 서로 협력해 더욱 치밀한 연구조사활동를 벌여서, 오키나와가 홍길동이 주장한 율도국인지 여부와 홍길동이 홍가와라인지에 관한 진실을 보다 명확하게 밝혀주길 바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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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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