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가짜다, ‘남자’라는 음모론, 후계자, 독신으로 산 이유
엘리자베스 1세 출생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
영국 제국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아시나요?
16세기 후반 유럽열강들의 치열한 각축과 아귀다툼 속에서도 훌륭한 정치력과 과감한 결단력, 그리고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후진국이었던 영국을 세계최강의 제국으로 발전시킨 철의 여인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 영국여왕입니다.
이 시기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뛰어난 통치력에 힘입어서 후진국이었던 영국은 ‘해가 지지않는 나라’라고 칭할 정도로, 세계 최강의 반열로 뛰어올랐답니다.
마치 지금 세계최강국인 미국처럼 16세기에 영국을 세계최고의 강대국반열로 올려놓는데 기반을 마련한 국왕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랍니다.
지금의 영국여왕은 16세기에 영국을 최강의 제국으로 올려놓는 위대한 업적을 쌓은 최고의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의 위대한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 2세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지요.
◆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탄생비화와 업적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는 헨리 8세이고, 어머니는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인 앤 블린이었지요.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는 우리가 보았던 영화 ‘천일의 앤’의 여주인공인 바로 천일의 앤 그녀인 ‘앤 블린’입니다. ‘천일’은 앤 블린이 왕비가 된 지 1,000일이 된 날에 왕비직을 박탈당하고 처형당했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랍니다.
그녀의 어머니 ‘앤 블린’은 헨리 8세와 결혼해서 왕비가 되었지만, 헨리 8세의 아들을 출산하지 못한 나머지, 헨리 8세의 노여움을 사서 외간남자와 불륜을 피웠다는 거짓누명을 쓰고 참혹하게도 처형을 당한 비운의 왕비였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도에 아버지 헨리 8세와 앤 블린의 딸로 때어났는데요.
영국왕 헨리 8세는 총 여섯 번의 결혼을 했답니다.
원래 앤 블린은 헨리 8세의 첫왕비였던 캐서린의 시녀였는데,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못하자, 상심한 헨리 8세를 유혹해서 두 번째 왕비가 된 여인입니다.
그리고 헨리 8세와 앤 블린 사이에 딸 엘리자베스 1세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헨리 8세는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의 출산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에,
딸을 낳은 앤 블린은 왕의 미움을 사게되었고, 급기야 헨리 8세는 앤 블린에게 간통을 저질렀다는 거짓 죄명을 뒤집어 씌워서, 그녀를 처형시켜버립니다.
어머니가 간통죄로 처형당했을 때 딸 엘리자베스 1세의 나이는 고작 3살이었는데, 어머니 앤 블린이 간통죄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는 아버지 헨리 8세의 관심권에서 멀어졌고, 급기야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해트필드하우스로 보내어졌으며, 사람들로부터 ‘불결한 앤의 딸’이라고 손가락질까지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엘리자베스 1세는 비록 왕의 딸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처형당하면서 어린 시절을 매우 불우하게 보내게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왕궁의 변방에서 외롭게 자라나던 엘리자베스 1세였는데, 1558년 24살의 나이에 아버지 헨리 8세의 자녀들이 모두 죽게되면서 그녀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헨리 8세가 죽으면서 그의 왕위를 물려받았던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가 15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영국 여왕이 된 이복언니 메리 1세마저도 병에 걸려서 일찍 죽게되자, 이제 국왕의 자리는 마지막 남은 헨리 8세의 유일한 혈육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1558년 24살이 된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영국여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영국 국왕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는 ‘불결한 앤의 딸’이라는 그간의 오명을 벗기위해서 한치의 흐트럼없는 정숙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고, 실제로도 여자로서 정숙함을 잃지않았습니다.
영국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는 재위기간 동안 뛰어난 통치술을 발휘했고, 화폐개혁등 경제개혁을 단행해 영국을 부강하게 만들었고,
당시 유럽의 패권국이었던 스페인을 격파해서 해상무역권을 확보해서 영국을 세계제일의 해양국가이자,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는 동인도회사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 식민지건설을 본격화해 영국을 일명 ‘해가 지지않는 나라’라고 하는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한 인물도 엘리자베스 1세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왕으로서 아메리카대륙을 최초로 발견했으며, 그녀의 명으로 발견한 아메리카 지역을 '버지니아'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은 엘리자베스 1세가 '처녀'라는 의미에서 그지역을 '버지니아'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후진국이었던 영국을 유럽의 최강대국으로 만들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45년 동안 영국을 다스렸던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영국을 최강국의 지위에 올려놓았던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결혼하지않고 독신으로 산 것으로 유명하답니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처녀여왕’이라는 닉네임이 붙게되었지요.
◆ 평생 독신으로 산 엘리자베스 1세, 독신으로 산 이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영국의 튜더왕가는 그녀를 끝으로 왕가의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항상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답니다.
그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을까요? 그녀가 정말로 국가를 극도로 사랑했기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을까요? 아니면 또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오늘은 영국 역대 최고의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는 엘리자베스 1세가 독신으로 살았던 이유와 그녀와 관련된 아주 비밀스럽고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독신으로 살았던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어렸을 때에 어머니가 아버지에 의해서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았고, 급기야 어머니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과 트라우마를 얻어서, 평생 남편없이 살 것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영국의 시모어제독이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을 했다가, 정부의 허가없이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것을 겪으면서, 큰 충격을 받은 것도 그녀가 독신으로 살게된 계기를 부여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같은 이유는 그저 표면적이면서 상투적인 이유에 불과하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독신으로 산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고 합니다.
◆ 엘리자베스 1세의 음모론, 그녀는 가짜다, 엘리자베스 1세는 남자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재위기간 45년 동안 영국을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인데, 그녀는 여성의 나약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인내심과 진취적인 기상이 남자 못지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당시 영국보다도 더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해상권을 놓고 전쟁이 벌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저없이 전쟁을 선택해서 결국 치열한 전쟁 끝에 영국이 승리할 수 있게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했습니다.
이 기록과 행동에서 알 수 있듯이, 엘리자베스 1세는 여성성보다는 남자 같은 강인한 기질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런데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지, 300년이 지난 뒤에 엘리자베스 1세의 성정체성에 커다란 의문이 제기됩니다.
한 학자로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은 가짜입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입니다.
소설 ‘드랴큘라’를 썼던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브램 스토커’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가짜이며, 그녀는 어렸을 때에 바꿔치기한 다른 사람이다’라는 놀라운 주장을 펼쳤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10살이던 1543년 영국에는 전염병이 창궐합니다. 그러자 딸의 안위를 걱정한 아버지 헨리 8세의 명을 의해서 엘리자베스 1세는 런던으로부터 140km나 떨어진 비슬리로 가게됩니다.
그리고 1년 후 전염병이 사라지자, 그녀는 헤트필드하우스로 다시 돌아오게됩니다.
그런데, 이 때 다시 돌아온 엘리자베스 1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고 하는데요.
- 엘리자베스 1세가 가짜라는 근거 -
첫째, 그녀는 원래 몹시 사람들을 멀리하는 내성적의 성격이었는데, 다시 돌아온 엘리자베스 1세는 아주 활발하고 명랑한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뀌어있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내향적인 성격에서 외향적인 성격으로 성격이 180도 바뀌어있었다고 해요. 사람의 성격은 결코 쉽게 바뀌는 게 아닌데 말이지요!
둘째, 엘리자베스 1세는 전에는 프랑스어를 전혀 못했는데, 다시 돌아온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랑스어를 아주 능통하게 잘 구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셋째, 엘리자베스 1세의 필체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하는데요.
원래 엘리자베스 1세의 필체는 각지고 날카로운 필체였는데, 다시 돌아온 그녀의 필체는 그림을 그리듯이 아주 부드러운 필체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사람의 필체는 평생동안 결코 바뀌지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1세의 필체는 전혀 다른 필체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변한 것들을 근거로 해서 브램 스토커는 ‘엘리자베스 1세는 가짜이며, 여자가 아닌 남자다’라는 주장을 강력히 제기했습니다.
브램 스토커의 주장에 따르면, 1543년 비슬리로 이주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창궐하던 전염병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는데, 그녀를 돌보아왔던 하인들은 헨리 8세로부터 처형당할 것이 두려워서, 엘리자베스 1세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전염병에 걸려 숨진 엘리자베스 1세와 닮은 아이를 찾아서 바꿔치기했다고 하는데, 바꿔치기한 애는 여자가 아닌 남자애였다고 하며,
그 남자애가 엘리자베스 1세와 너무도 많이 닮아서 유모와 집사가 그 남자애를 죽은 엘리자베스 1세로 감쪽같이 바꿔치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바꿔치기한 남자애를 마치 엘리자베스 1세인 것처럼, 머리도 기르게하고 예쁘게 단장시켜서 여자인 것처럼 분장시켜서 주위사람들을 속여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브램 스토커는 여러 가지 근거들을 토대로 해서 엘리자베스 1세는 가짜이며,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한 남자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브램 스토커의 ‘엘리자베스 1세는 가짜다’라는 주장에 대해 처음에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엘리자베스 1세가 가짜라는 대한 또다른 강력한 근거가 나옵니다.
1870년, 비슬리에서 목사 토마스 캐블이 엘리자베스 1세가 머물렀던 성을 리모델링하는 공사를 진행했는데, 그는 아주 이상한 것을 하나 발굴해냅니다.
토마스 캐블은 그 성 정원에서 석관 하나를 발굴해내는데, 그 석관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영국 튜더왕조 시절의 드레스를 입은 10살 정도의 아이의 유골을 발견합니다.
이 당시에는 일반인은 석관을 쓸 수가 없는 시절이었고, 더욱이 왕족이 사는 성의 정원에 일반인의 석관무덤은 결코 들어설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석관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당시의 정황이나 아이의 나이, 상태 등을 감안해본다면, 이 석관무덤의 주인은
튜더왕족의 여자아이의 유골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그 유골은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이 당시 엘리자베스 1세의 나이도 10살이었고, 그녀가 살았던 곳도 바실리의 그 석관이 나온 바로 그 성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살았던 성도 똑같고, 그 당시의 엘리자베스 1세의 나이도 똑같고, 왕족이 입는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었다는 점 등을 모두 고려해본다면,
이 석관무덤의 유골은 바꿔치기해졌다고 여겨지는 엘리자베스 1세의 유골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비슬리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갑자기 전염병에 걸려 죽자, 그녀를 돌보아왔던 유모와 집사는 그녀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서 엘리자베스 1세와 닮은 아이를 물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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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모와 집사는 엘리자베스 1세와 꼭닮은 아이를 찾았는데, 그 아이는 여자가 아닌 남자아이였습니다.
얼굴은 엘리자베스 1세와 판박이로 닮았는데 남자아이였기 때문에, 그 남자아이를 여자처럼 머리를 기르게하고, 예쁜 드레스를 입히는 등 철저히 여장을 시켜서 엘리자베스 1세로 둔갑시켰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영국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는 가짜이며,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는 겁니다. 물론 그 가짜 엘리자베스 1세는 철저히 여장을 했던 것입니다.
◆ 엘리자베스 1세가 남자였다는 근거
엘리자베스 1세가 남자라는 또다른 근거들이 더 있습니다.
당시 엘리자베스 1세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왕족들과 귀족들 사이에 굉장히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 당시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 프레데리크 2세, 스웨덴왕 에릭 14세, 프랑스왕 샤를 9세, 덴마크귀족 아돌프공작, 오스트리아 귀족 샤를 대공 등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청혼을 받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프러포즈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유럽왕실에서는, 왕족들간이나 귀족들 사이에 정략결혼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한 국가의 왕족이 다른 국가의 왕족과 결혼을 하게되면,
자연스럽게 결혼동맹이뤄지면서 강력한 군사동맹이 이뤄져서 국가를 지키는 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발언권을 강화하는 데에 대단히 유리해집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럽각국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다른 국가의 왕족과 결혼동맹을 맺곤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한 유럽의 왕들
그런데, 이렇게 유럽의 유력한 왕족들로부터의 수많은 청혼을 엘리자베스 1세가 모두 거절했다는 것 또한 매우 커다란 의문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절로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찬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어쩌면, 엘리자베스 1세는 이런 유력한 왕족들의 청혼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무슨 특별한 이유를 갖고있었던 건 아닐까요?
엘리자베스 1세는 진짜 여자였더라면, 이런 유력한 왕족들의 청혼을 굳이 모두 거절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엘리자베스 1세가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면, 유력한 왕족들의 청혼을 모두 거절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가 남자였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왔습니다.
생전에 엘리자베스 1세를 그린 초상화를 보면, 그녀의 모습이 여자보다는 남자의 두상에 더 가까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단지, 머리를 길게 길렀을 뿐이지, 그녀의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날카로운 메무리코에 툭 튀어나온 눈, 우락부락한 얼굴골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우 넓고 툭 튀어나온 까진 이마 등은 남자의 얼굴에서 나오는 특징인데,
그녀의 초상화에서 여자의 얼굴보다는 남자의 얼굴에 더 가깝다는 것을 어렵지않게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초상화를 보면, 모든 초상화의 그림이 그녀의 목을 모두 가린 모습만 나오는데,
남자에게만 있는 목젖을 가리기 위해서 일부러 목을 가린 의상을 입고나온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인데, 광대뼈와 이마가 튀어나오는 등 우락부락하게 생겼는데, 좀 남자같이 생기지 않았나요?
만일, 진짜 여자의 초상화라면, 굳이 목을 가리지 않았을 겁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초상화를 한번 보십시요! 초상화에서 그녀의 목을 훤히 드러내고 있지않습니까?
왜냐하면, 여자의 목과 쇄골라인은 여자의 아름다움의 상징이기 때문이지요. 마리 앙뚜아네트의 초상화 중에서 목을 가린 초상화는 단 한 개도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모든 초상화들이 전부 그녀의 목을 가린 상태로 그려졌다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여자가 아닌 남자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는 항상 직접 말을 타고다녔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왕비는 모두 마차를 타고다니는 게 상례였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엘리자베스 1세는 마차를 타지않고 자신이 직접 말을 타고 몰고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는 엄청 말을 빨리 달렸다고 하는데요. 호위병들보다도 훨씬 빨리 말을 몰았다고 합니다.
이 점을 보더라도, 엘리자베스 1세는 여자보다는 남자일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는 죽기 직전에 특별한 유언을 남겼는데요.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자신의 몸을 부검하지 말라고 했고, 그녀는 자신이 입은 옷 그대로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이런 유언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신체를 절대로 노출시키지않게 하려고한 의도라고 판단됩니다.
왜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이 죽은 후에 자신의 신체를 노출시키지 못하게 했던 걸까요?
만일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의 신체가 노출된다면, 그녀가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는 것 - 그녀가 가짜였다는 것 - 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또한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녀가 여성의 나약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남자처럼 강인한 기질을 갖고있었다고 하는 기록을 보더라도, 엘리자베스 1세가 여자보다는 남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엘리자베스가 평생 독신으로 산 이유와 그리고 그녀가 남자라는 가설에 대한 결론을 내릴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한나라의 최고의 지존인 국왕으로서 결혼할 수 있는 모든 유리한 조건을 다 갖고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1세가 처녀로서 평생 독신을 고집하고 살았던 것은, 아마도 그녀가 결혼하면 자신이 가짜(남자)라는 것이 들통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만일, 엘리자베스 1세가 다른 왕들처럼 결혼을 했더라면, 자신이 아이를 낳지못하는 남자라는 비밀이 곧바로 탄로날 것이며, 이것은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온천하에 드러내는 일일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엘리자베스 1세는 곧바로 탄핵을 당할 것이고, 어쩌면 처형까지 당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탄로나지않게 하기 위해서, 평생 결혼하지않고 독신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의 알콩달콩한 행복보다는 더 스케일이 큰 왕으로서의 권력을 획득하는 쪽을 택한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 자체가 그녀는 가짜이자, 남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독신으로 사는 바람에, 그녀의 사후에 그녀의 튜더왕가는 대가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후계자를 지명하는 순간에 권력의 추가 다른 곳에게로 옮겨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우울증과 노환으로 70세의 나이에 사망했는데, 그녀의 뒤를 이은 후계자는 스코틀랜드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제임즈 6세)에게 돌아갔습니다.
스코틀랜드 메리는 헨리 8세의 누나로서 헨리 8세의 외척이라고 할 수 있고, 결국 헨리 8세의 누나의 아들 즉, 헨리 8세의 외조카인 제임스 1세가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왕권을 이어받았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의 유해는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있는 왕실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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