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상궁 김개시는 왕과 내연관계,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폐위이유

 

오늘은 조선 중기에 선조와 광해군의 후광을 입고, 권력의 정점에서 온갖 모략정치를 일삼으면서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상궁 김개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조선 중기시대에 음모와 모략정치의 대명사로 통하는 김개시란 인물이 있었지요. 이 김개시는 특히 광해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는 인물이었으며, 광해군이 왕이 되는데에 커다란 기여를 한 인물이랍니다.

 

광해군과 상궁 김개시의 관계를 알려면, 먼저 김개시의 정체부터 알아야 합니다. 선조와 광해군 때의 상궁이었던 김개시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김개시의 원래이름은 김개똥입니다. 그런데 사관들은 개똥이라는 이름이 좀 천박하다고 생각해서 ‘똥’자의 한자인 ‘시(屎)’로 바꿔서 좀 더 근사하게 개시(介屎)라는 이름으로 기록했습니다.

 

‘개똥’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김개시는 신분이 천한 노비의 딸이었습니다. 노비의 딸이었던 김개시는 10대 초중반경에 궁녀로 선정되어서 궁궐에 입궐했습니다.

 

그런데, 천민출신이었던 김개시는 글을 배워서 쓸 수 있었고, 한학에 매우 밝았을 뿐만아니라 아주 똑똑하고 야무졌다고 합니다.

 

천민출신이었던 김개시는 궁궐로 들어온 후, 끝이 안보이는 넓고 화려한 궁궐, 꽃처럼 화려하고 고고한 왕족들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신분상승을 꿈꿨을 것이고,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자 하는 야망을 가졌을 겁니다.

 

일개 궁녀로 입궁한 김개시가 처음으로 모시게된 인물은 바로 광해군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김개시와 광해군의 길고 질긴 인연이 시작되게 됩니다.

 

원래 궁녀는 입궁한 후 처음 모시게된 상전을 평생 모시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김개시도 자신이 처음으로 모시게된 광해군을 평생의 주군으로 생각하고 성의를 다해 모셨던 겁니다.

 

그리고 김개시는 자신이 입궁하면서 가졌던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꿈도 조금씩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592년 조선 전체를 뿌리채 뒤흔들만 대사건, 임진왜란이 터지게됩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을 통해 침략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진격해서 불과 보름만인 28일 도성 한양까지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게됩니다.

그런데, 이 때 조선왕인 선조가 경복궁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북쪽으로 피난가는 선조를 따르는 궁녀 중에 김개시가 포함되어 있었고, 김개시는 피난가는 선조를 따라서 북쪽으로 정처없이 떠나갔습니다.

 

광해군의 궁녀였던 김개시가 갑자기 선조의 파천길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당시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자 김개시는 선조를 모시는 파천길의 궁녀로 급하게 발탁되었던 겁니다.

 

눈치가 빠르고 약삭 빨랐던 김개시는 파천길에서 선조를 모시고 봉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선조는 일본군을 피해 피난가는 파천길에서 자신을 봉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김개시의 노고를 인정하고, 그녀를 일개 궁녀에서 정5품의 특별상궁으로 품계를 상승시켜줬습니다.

 

일개 궁녀에 불과했던 김개시가 임진왜란을 만나 왕 선조를 모시게됨으로써 모든 궁녀들의 꿈인 특별상궁으로 승진하게 됩니다.

 

이 당시 선조는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지만, 왕비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어서 아직 후계자를 선정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광해군은 정실의 자식이 아니라 첩실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왕의 후계자의 서열에 오르지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터지자, 선조는 적자가 아닌 광해군을 급하게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전쟁이 터졌고, 혹시라고 왕이 잘못되기라고 한다면,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조는 적자가 아닌 광해군을 급하게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비록 왕의 정실의 자식이 아니었지만,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전쟁이 갑자기 터지면서, 한때 김개시가 모셨던 광해군이 조선의 왕이 될 수 있는 세자로 우뚝 올라서게 된 것입니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전쟁 때문에, 광해군에게는 왕이 될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생겨나게된 것입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터지면서,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끝없이 피난을 갔으며, 선조는 중국땅으로로 도망갈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반면, 선조의 아들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분조를 이끌면서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민심을 수습하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아버지 선조는 북쪽으로 피난하는데에만 몰두했지만, 아들인 광해군은 한반도의 여러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을 수습했고, 군량미를 모으고 의병을 모으는 등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즉, 아버지 선조가 떨어뜨린 왕실의 권위를 아들 광해군이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겁니다.

그렇게 세자가 된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큰 두각을 나타내면서 백성들 사이에 영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만 다닌 몰지각한 왕으로 백성들에게 인식되게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왕 선조는 아들 광해군을 심하게 질투했고,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1598년 11월이 되어서야 임진왜란의 길고긴 전쟁이 끝나게됩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궁궐에서는 선조가 자신의 아들 광해군에게 날 선 행동을 하면서, 궁안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듭니다.

 

광해군이 선조에게 아침문안 인사를 올리려고 갔더니, 선조는 광해군에게 ‘너는 정식 세자가 아니라, 전쟁 때문에 임시로 세운 임시세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너는 문안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광해군의 문안인사를 받지않았다고 합니다.

 

선조는 자신은 전쟁으로 도망만 다녔기에 왕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한 반면, 아들 광해군은 민심을 수습해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기 때문에, 광해군에 대한 질투심과 자격지심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광해군을 미워했던 겁니다.

 

1602년 선조는 2년전에 죽은 의인왕후의 후임으로 새롭게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이하게됩니다.

그리고 선조는 자신의 적자를 얻기위해 수시로 인목왕후의 처소를 찾아서 관계를 갖습니다.

 

인목왕후는 선조와의 사이에 세 번의 출산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딸을 낳았고, 또한번은 사산하였으며, 그리고 또 한번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두 번째 아이를 사산한 지 4년이 지난 1606년 3월 인목왕후는 마침내 왕자를 낳았습니다.

 

이 아들은 선조와 인목왕후 정실의 아들이었기에, 세자로 책봉될 수도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39년만에 선조는 자신의 적자 영창대군을 얻었습니다.

 

이 때문에 광해군과 김개시는 인목왕후의 아들출산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잘못하면 광해군의 세자자리가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광해군은 첩실의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아버지 선조가 혹시라도 세자를 바꾸지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영창대군은 정실의 자식이고 광해군 자신은 첩실의 자식이이라는 약점이 있었는데요. 만일 아버지 선조가 세자를 영창대군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그 일은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눈치 빠른 대신들이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사이에 놓고 편가르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의정은 정실의 자식인 영창대군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영의정 유영경은 나중에 세자가 될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진하’의식을 실시할 것을 선조에게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세자 광해군이 있는 상황에서, 영창대군에게 ‘진하’의식을 행하는 것은 광해군을 후계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영창대군을 왕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이렇게 영의정을 비롯해서 몇몇대신들이 영창대군을 왕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광해군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엄청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 상궁 김개시, 모략정치로 광해군을 왕으로 만들다

 

이 때, 왕의 후계자자리를 빼앗길까봐 불안해하는 광해군에게 김개시가 접근했고,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왕의 자리에 올려주겠다고 충성맹세를 했습니다.

 

이 당시, 선조가 세자를 바꿀 뜻이 있었기 때문에, 광해군이 매우 불안해하였는데,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접근해서 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 당시 김개시는 선조의 상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개시가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돕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당시 선조는 1년 넘게 병을 앓았습니다. 그런데 김개시는 선조를 모시는 궁녀였기 때문에, 매우 불안하고 위태로운 절박감 같은 것을 느꼈을 겁니다.

 

왕이 죽으면, 그 왕을 모시는 궁녀들은 상례를 치른 후 모두 궐밖으로 출궁하는게 원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궁궐에 계속 남아서 큰 권력을 손에 쥐고 싶어했던 김개시는 선조 이후에 자신과 손을 잡을 수 있는 광해군을 적극 후원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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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김개시는 선조의 병세가 심상치않다는 것을 잘 알았고, 선조가 곧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개시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광해군쪽에 줄을 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김개시는 선조가 죽고 두 살 배기인 영창대군이 왕위를 물려받지못하도록, 광해군을 적극 후원해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겁니다.

 

즉, 김개시는 광해군을 왕위에 올려놓고 자신은 광해군을 이용해서 더 큰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온갖 시도를 다했던 것입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환심을 사기위해서 궁안의 온갖 정보를 수집해서 광해군에게 제공해주었씁니다.

궁궐생활을 오래했던 김개시는 궁궐 곳곳에 자신과 친한 궁녀들을 심어놓았고, 그런 정보망을 통해서 궁궐의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김개시는 이런 정보망을 통해서 자신이 모시던 선조의 동태는 물론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의 동태까지 모두 수집해서 광해군에게 제공해주면서, 광해군의 신임을 듬뿍 얻을 수 있었습니다.

 

김개시는 굉장히 영특하고 야무졌을 뿐만아니라 일처리를 잘해서 결국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됩니다.

 

그런 김개시는 세자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인 광해군에게 아주 든든한 아군이 되었습니다.

 

1607년 어느날 방밖으로 나오던 선조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병석에 눕게된 선조는 영의정 및 고관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였고, 그 자리에서 선조는 놀랍게도 광해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겠다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선조는 서서히 기력을 회복했고, 다시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왕위를 넘기겠다는 전위어명도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고, 선조는 정상적으로 정사를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놀랍게도 선조가 돌연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어느정도 기력을 되찾은 후, 약밥을 먹었던 선조가 갑자기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급사한 선조의 죽음을 놓고, 여러 가지 뒷말들이 훌러나왔습니다.

 

선조의 죽음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의심받았던 인물은 바로 김개시였습니다.

선조가 죽기전에 약밥을 먹었다고 하는데요. 이 약밥은 바로 김개시가 선조에게 올린 것이고, 이 약밥은 김개시가 동궁전에서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김개시가 동궁전의 광해군으로부터 약밥을 받아서 선조에게 올렸고, 이 약밥을 먹은 선조는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즉, 누군가가 선조가 먹은 약밥에 독을 넣었고, 그 독을 넣은 약밥은 김개시와 광해군이 함께 만든 음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조의 죽음과 관련해서 김개시와 광해군이 함께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조가 죽고 독살설이 흘러나왔을 때, 조정에서는 아무런 조사도 진행하지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조가 죽고난 후, 세자인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고, 이 광해군이 김개시와 함께 독살설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입니다.

국가 최고의 권력인 왕이 된 광해군을 누가 감히 조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광해군과 김개시가 선조를 독살해서 죽였다는 심증은 강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감히 조사하지 못했던 겁니다.

 

이미 국가최고의 권력자가 된 광해군과 그의 총애를 받는 김개시를 조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는 이미 대세가 광해군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광해군의 즉위를 서두르라고 독려했습니다.

 

인목대비의 입장에서는 선조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 세자인 광해군을 놔두고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인목대비는 이처럼 광해군의 즉위를 독려했떤 것입니다.

 

즉,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적을 지는 것보다는 그의 즉위를 도와서 광해군의 환심을 사서 자신과 아들의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광해군은 세자에 올라선 지 16년만에 조선 15대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광해군을 왕으로 만든 일등공신인 상궁 김개시는 광해군의 후광을 입고 국가권력의 핵심인물로 올라서게 됩니다.

 

김개시는 왕이된 광해군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상궁이 되었습니다.

김개시는 광해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선조를 독살했다는 독살설의 주인공이었지만, 그녀는 항간의 그러한 소문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광해군이 왕이 된 후, 김개시는 광해군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렸고, 광해군의 후광을 입은 그녀의 권력도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광해군은 국가의 주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김개시의 자문을 얻었고, 김개시와 국가 중대사를 협의해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국왕 광해군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김개시는 과연 얼굴이 예뻤을까요? 역사기록에는 김개시의 외모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광해군일기에는 ‘김개시는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김개시는 나이가 들었어도 별로 예쁜 외모가 아니었다고 사관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김개시가 예쁜 얼굴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김개시는 어떻게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요?

 

역사기록에는 김개시가 ‘중전의 허락을 받아 왕의 잠자리를 모실 수 있었는데, 비방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다’고 광해군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개시가 비록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광해군의 사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김개시가 광해군과 종종 동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김개시는 왕과의 동침에서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사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 김개시만의 특별한 비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특별한 비법으로 광해군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상궁이 왕과 이렇게 동침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상궁이 왕과 동침하려면 먼저 왕의 후궁이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김개시는 상궁이면서도 왕과 계속 동침을 했으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궁 김개시는 중전이나 후궁보다도 광해군과 더욱 가까운 사이였고, 광해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아마도 광해군은 자신이 세자시절 때부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자신을 보듬어주었던 김개시에 대해 강력한 신임을 갖게된 것 때문에, 그녀에게 그토록 끌리게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광해군이 왕이된 후,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자신의 후궁이 될 것을 권했지만, 김개시는 후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상궁으로 영원히 남겠다고 말했습니다.

즉, 김개시는 자신은 광해군의 후궁이 되는 것보다는 그냥 광해군의 곁에서 상궁으로 남아 권력을 계속 누리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왕의 후궁이 되면, 왕의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릴 수 있고, 자신의 가문은 왕실가문으로 승격이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개시는 왜 후궁이 아닌 상궁으로만 남겠다고 요구했던 것일까요?

 

후궁은 자유롭게 정치활동도 할 수 없고, 궁밖으로도 나갈 수 없기 때문에, 김개시는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하기위해서, 그냥 상궁으로 남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김개시는 상궁으로서 정치활동을 자유롭게 하면서도, 광해군의 총애도 계속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상궁으로 남기를 원한 것 같습니다.

 

왕이 된 광해군은 자신이 세자인 시절에 자신 대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영의정 유영경을 제일 먼저 귀양을 보내버립니다. 그리고 6개월 후 유영경에게 자살을 명해서 그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이 왕이 된 후, 궁궐에서는 여러 가지 기이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영창대군의 처소안에 있는 소주방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영창대군의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에서 귀신의 울음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고 하며, 이러한 일이 몇 달동안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주방 궁녀들은 소주방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바로 김개시의 소행이었습니다.

계축일기에는 ‘김개시는 기회를 틈타서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못했고, 그녀는 저주물을 영창대군의 처소에 걸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상궁 김개시는 눈에 가시인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여러 음모를 꾸몄으나, 죽이지는 못했고, 대신 영창대군을 저주하는 저주물을 처소에 걸었다고 합니다. 이 계축일기는 그 당시 궁궐에 살았던 한 궁녀가 쓴 기록입니다.

 

귀신이야기도 김개시가 자신이 포섭한 궁녀들을 동원해서 밤마다 영창대군의 소주방에서 귀신울음소리를 내도록 사주하고 영창대군에게 겁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김개시는 일찍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궁녀들을 뇌물을 주고 포섭해놓았는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동태를 시시각각으로 감시하게 했고, 또한 그녀들을 시켜서 귀신울음소리를 내도록 사주했던 겁니다.

 

이렇게 김개시는 자신이 포섭한 궁녀들을 이용해서 영창대군을 해치려고 시도했던 겁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거처에서 큰불이 났습니다.

다행히도 궁녀들이 잽싸게 불을 끄는 바람에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불도 사실은 김개시의 계략으로 불이 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불상사 때문에,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은 언젠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무서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단의 배후에는 바로 김개시가 있었고, 김개시는 여러 가지 모략과 음모를 꾸며서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해칠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후광을 등에 업고 점점 더 대담하게 활개를 치면서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김개시의 입장에서는, 선조의 정실부인과 적장자인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이 광해군의 가장 큰 위협세력이라고 판단하고, 그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1613년 4월, 문경새제에서 강도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문경새제에서 은을 실고가던 상인이 강도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은상강도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가장 먼저 체포된 강도 박응서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박응서가 옥 중에서 광해군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상소문에 ‘은화를 모아서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하려고 하였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는데요. 이 강도 박응서는 뜻밖에 자신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자백을 한 것이어서 조정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또한 이 박응서는 반역을 통해서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만들고, 인목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고자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같은 사실이 밝혀지자, 크게 대노한 광해군은 역모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드리고, 역모를 뿌리뽑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역모관련자들을 잡아들여서 추국이 진행되었는데, 심문을 받던 한 관련자는 역모의 수장이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이라고 밝혔습니다.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은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정했지만, 광해군은 김제남을 역모의 수괴로 인정해서 처벌을 내렸습니다.

 

사실 강도 박응서가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세우겠다는 역모는 순전히 거짓증언이었습니다. 강도 박응서는 옥에 갇힌 후,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이같은 거짓증언을 했던 것입니다.

 

강도 박응서에게 이같은 거짓증언을 사주한 사람은 바로 이이첨이었습니다.

이이첨은 광해군정권의 예조판서로 있는 인물이며, 광해군정권의 핵심인물이었습니다.

 

이이첨은 광해군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영창대군과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같은 거짓된 음모를 꾸몄던 겁니다.

 

또한 이이첨을 뒤에서 사주했던 인물이 바로 김개시였습니다.

김개시와 이이첨은 서로 광해군의 후광으로 권력을 나눠먹으면서 이같은 거짓된 흉계를 꾸며서, 광해군의 라이벌인 영창대군과 그 추종세력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역모사건으로 광해군은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드리라고 명령했고, 잡아들인 관련자들을 상대로 엄청난 고문과 추국을 가했으며, 결국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에게는 역모의 주동자라는 죄명을 씌워서 사약을 내렸고, 인목대비의 어머니는 유배를 보냈으며, 남자형제들은 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

 

인목대비의 집안이 완전 몰살당했습니다. 그리고 나이 어린 영창대군은 폐서인시킨 후,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얼마 후, 김개시는 다음내용이 적힌 편지 한 장을 광해군에게 올립니다,

그 편지에는 ‘영창대군을 잘 길러뒀다가, 명나라장수가 오면 문을 열고 고이 모셔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김개시의 설명에 따르면, 인목대비가 이 편지를 써서 영창대군쪽으로 몰래 보내려했던 밀서였는데, 김개시의 부하들에게 발각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목대비가 주도한 것으로, 명나라장수와 결탁해서 영창대군을 옥에서 빼내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김개시가 만든 가짜편지였습니다. 김개시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 가짜로 만든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가 적발된 후, 10일 후에 영창대군은 뜨거운 방에서 쪄죽는 끔찍한 일이 발생합니다.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엄청 오열했습니다.

 

광해군의 폭거는 이뿐만이 아니었지요. 광해군세력은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도 해칠 생각을 하고있었지요.

 

광해군의 오른팔인 이이첨은 신하들을 부추켜서 인목대비를 폐모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동방예의지국이었던 조선에서 어머니를 폐위시킨다는 주장에 광해군도 처음에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고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1618년 다시 폐모론이 제기되었지요. 5년이 지난 후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 대신들은 또다시 인목대비를 폐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결국 광해군은 대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인목대비를 폐모시키고, 그녀를 서궁에 유폐시켜버렸습니다.

 

그러니까, 1618년도에 광해군에 의해서 인목대비는 대비에서 폐위되었고, 서궁(덕수궁)에 유폐되어 버렸습니다.

 

광해군은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어머니를 폐하고, 자신의 동생을 죽이는 ‘폐모살제’라는 만행을 저지르는 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광해군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키는, 광해군 자신을 폭군으로 만드는 엄청난 만행이었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모살제’를 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하고 설계한 인물이 바로 ‘김개시’였습니다.

김개시는 광해군이 ‘폐모살제’를 행하도록 광해군을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희대의 요부이자 악녀였습니다.

 

광해군이 왕이 된 후, 광해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김개시는 엄청난 권력을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오른팔이자, 광해군의 측근 중의 최측근으로서, 광해군이 국가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그녀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던 실세였습니다.

 

‘연려실기술’에는 ‘‘정사를 열 때마다 김상궁(김개시)가 붓을 들어 마음대로 결정하고, 임금도 마음대로 못하였다’라고 기록될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광해군 재위 때에, 임금이 정사를 결정할 때마다 김상궁이 자기뜻 대로 결정했고, 광해군은 김상궁의 뜻에 따르고 반대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광해군 재위 때에, 김개시가 얼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개 상궁인 김개시가 자기 마음대로 나라의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겁니다. 그리고 김개시는 돈을 받고 관직을 파는 매관매직을 밥먹듯이 자행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개시가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던 것은, 광해군의 총애와 후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광해군은 김개시를 무척 신뢰하고 총애했기 때문에, 김개시가 매관매직을 하고 국정을 농락해도 그냥 눈감아주었고, 그녀의 만행을 모른 척했습니다.

 

◆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국왕에서 폐위되다!

 

김개시가 국왕 광해군의 최측근임을 아는 사람들은 금은보화와 돈을 싸들고 와 김개시에게 갇다바치면서, 벼슬자리를 청탁하는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났습니다.

김개시는 이러한 막대한 뇌물들을 챙기면서, 광해군을 구슬려서 관직을 주도록 했습니다.

 

김개시의 세도가 이렇게 막강해지자, 심지어 후궁들도 김개시에게 뇌물을 싸들고 와서 임금과의 잠자리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김개시가 광해군의 동침상대까지 결정했다고 하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후궁도 김개시에게 재물을 갖다바쳐야 광해군과 잠자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왕과 가장 가까운 후궁마저도 김개시의 결정에 따라, 왕과 동침을 할 수 있었다고 하니, 김개시의 권력과 세도가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김개시는 중전보다도 더 높은 엄청난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겁니다. 광해군 재위 때, 김개시는 한마디로 말해 국가권력의 최고의 실세였습니다.

 

그런데, 1622년 12월 일부 신하들이 광해군에게 ‘이귀와 김자점이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중요한 상소를 올렸습니다.

즉, 이귀와 김자점이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올린 건데요.

 

이귀와 김자점은 한 때 광해군 밑에서 일을 한 대신들이지만, 이 당시 그들은 정치적으로 소외된 인물이었습니다.

이귀와 김자점이 인목대비편에 서서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일부 대신들이 광해군에 고해바친 것인데요.

 

그런데, 광해군은 이러한 역모 주장에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떠도는 소문만으로 옥사를 일으킬 수 없다’라고 말하며, 무시해버렸습니다.

 

광해군은 왕이된 이후에 많은 역모 고변이 일어났고, 그 때마다 광해군은 직접 추국에 나서서 관련자들을 철저히 처벌해왔는데, 이상하게도 이번 역모 고변에는 광해군은 전혀 반응을 하지않았습니다.

 

과거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던 광해군이 이번 역모 고변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었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김개시 때문이었습니다. 이같은 역모 고변이 들어오자, 광해군은 곧바로 김개시에게 어떻게 대처할 지를 물어보았는데,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고 합니다.

 

‘가소롭습니다. 김자점은 충성스럽고 한미한 선비에 불과한데, 그가 무슨 권력이 있어서 역모를 모의한단 말입니까?’라고 역모고변을 일축했다고 합니다.

김개시의 이말을 들은 광해군은 이귀와 김자점의 역모 모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즉, 김개시는 이귀와 김자점은 충신이며, 또한 세력이 너무 약해서 결코 역모를 일으킬 위인이 못된다는 광해군에게 조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광해군에게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엄청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냥 우습게 넘겨버렸던 이귀와 김자점이 궐내의 군사들와 결탁해서, 실제로 역모를 일으켰습니다.

 

1623년 3월 11일날, 후궁들을 옆에 끼고 잔치를 즐기던 광해군이 궁궐쪽문으로 달아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됩니다.

실제로, 이귀와 김자점이 역모를 일이켰고, 그들은 군사를 일으켜서 궁궐로 쳐들어갔습니다.

 

이귀, 김류, 김자점, 이괄 등 서인세력들이 주도해서 군사를 일으켰고, 이들은 1,000여명의 군사들은 동원해서 궁궐로 쳐들어갔고, 궁궐을 장악해버렸습니다.

반란군이 궁궐로 쳐들어오자, 광해군은 내시의 등에 업혀서 도망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광해군은 궁궐에서 벗어나 민가에 숨어들었지만, 곧 군사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궁궐로 다시 잡혀들어옵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광해군은 왕에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을 보위했던 이이첨과 김개시는 반정이 일어난 바로 그날 반정세력에 의해서 처형당했습니다.

 

광해군은 왕으로 봉해진 지 15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고, 1641년 67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보에 밝았던 김개시가 사전에 반란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김개시는 모든 궁궐 곳곳에 자신의 심복들을 파견해서 수많은 정보들을 수집해왔을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었는데, 과연 그런 김개시가 역모가 일어난다는 것을 사전에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김개시가 역모가 일어날 것은 사전에 알았다고 주장합니다.

 

즉, 역모가 일어나기 직전에 역모 정보가 누설되어서, 김개시측이 반정세력들을 검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김개시는 반정세력으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해서 반정세력을 물리칠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김개시가 이귀와 김자점의 역모 모의를 눈감아주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가 김자점의 뇌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을 무척 좋아했던 김개시는 김자점의 뇌물을 많이 받았고, 그 뇌물의 영향으로 김자점의 역모 모의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던 겁니다.

 

한 때, 광해군에게 그렇게 충성을 다했던 김개시가 광해군을 폐위하려는 역모에 뇌물을 받고 눈감아줬다고 하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돈을 좋아하는 인물은 처음 봅니다. 그렇지만, 뇌물을 받고 역모를 눈감아줬던 김개시는 결국 역모가 일어난 바로 그날에, 제일 먼저 반정세력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김개시는 반정세력의 첫 번째 척결대상이었습니다.

 

반정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역모가 일어난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도 불구하고, 김개시의 조언을 믿고 전혀 대비책을 세우지않은 광해군은 결국 왕위를 빼앗기는 엄청난 낭패를 보게됩니다.

 

광해군은 자신의 권력이 안정화되었다고 너무도 방심했던 것일까요? 그는 3 개월전에 들어온 역모의 고변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던 것이 그같은 엄청난 불행을 자초하게된 것입니다.

 

- 광해군의 폐위이유 -

 

광해군은 왕이된 이후, 백성들을 동원해서 엄청난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창덕궁가 창경궁, 덕수궁, 인경궁 등을 지었는데, 이 때 동원된 백성들의 삶을 엄청 피폐화시켰고, 궁궐공사에 들어간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엄청난 원성을 샀습니다.

 

또한 광해군은 ‘폐모살제’를 일으켜서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임으로써, 선비와 사대부들의 엄청난 반발과 비판을 받았는데, 이러한 광해군의 실정과 부도덕성 때문에 그에게 실망한 서인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광해군을 폐위시켰던 겁니다.

 

참고로, 반정세력들이 역모를 일으킬 때, 광해군을 폐위시킨 폐위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광해군은 잦은 옥사를 일으켜서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

제조지은 망각 -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인 금나라를 섬겼다는 것,

폐모살제(廢母殺弟) -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모시키고 이복 동생을 죽였다는 것,

그리고 엄청난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백성들의 삶을 피폐화시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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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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