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칭의 노래 만추’ '청춘무곡' 영화 스잔나 주제가, 추억의 홍콩 미녀여배우

 

1976년 허리우드극장에서 상영되어서 큰 인기를 끌었던 진추하의 사랑의 스잔나를 아시나요?

 

홍콩가수 진추하가 한·중 합작영화인 사랑의 스잔나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가 크게 히트함으로써 진추하는 우리나라와 동남아시아에서 톱스타로 급부상하였지요.

 

그런데 진추하가 출연해 크게 히트쳤던 영화 사랑의 스잔나의 원조가 되었던 또다른 영화가 있습니다. 

홍콩영화 사랑의 스잔나의 원조가 되는 영화가 따로 있는데, 그 영화는 바로 리칭이 출연한 스잔나라는 영화입니다.

 

1967년 홍콩의 쇼브라더스사에서 제작한 멜로영화 스잔나가 영화 사랑의 스잔나의 원조가 되는 영화이고, 주인공은 그당시 전형적인 홍콩미인이었던 리칭입니다.

 

리칭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스잔나는 진추하가 출연한 사랑의 스잔나보다 9년전에 먼저 만들어졌던 홍콩의 애절하고 슬픈 멜로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리칭은 60~7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여배우였고, 그녀는 영화 스잔나가 크게 히트하면서, 한국과 아시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스타덤에 오른 후, 60~ 70년대에 청순한 미모와 탁월한 연기력으로, 아시아의 수많은 남성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홍콩의 대표적인 미녀여배우였답니다.

 

사랑의 스잔나의 원조인 스잔나의 여주인공 리칭은 홍콩의 쇼브라더스사에 소속되어 수많은 무협영화에 단골여배우로 출연했기 때문에, 멜로영화보다는 70년대 유행했던 홍콩무협영화의 인기아이돌이었습니다.

 

리칭은 진추하보다 홍콩연예계의 선배이고, 리칭이 진추하보다 나이도 9살 연상입니다.

 

그렇지만 리칭은 홍콩영화의 전성시대였던 1960~70년대에 사실상 홍콩과 아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홍콩영화계의 전설적인 여배우이지요.

당시 리칭은 꽤 유명했던 명작품에 많이 출연하였고, 또한 홍콩 및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명배우이지요.

 

리칭이 60~70년대에 출연해서 히트했던 영화는 어미인’ ‘도검’ ‘스잔나’ ‘아랑곡의 혈투’ ‘철수무정’ '신외팔이검객' ‘14인의 여걸등 매우 많으며, 리칭이 출연했던 이 영화들이 한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당시는 홍콩영화의 전성시대였습니다.

 

리칭의 스잔나 포스터

 

홍콩영화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선두주자가 바로 여배우로는 리칭이고, 남자배우로는 왕우와 로례가 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아시아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송혜교보다 한수 더 높은 인기와 명성을 70년대에 누렸던 배우가 바로 리칭이지요.

 

70년대의 아이돌스타라고 할 수 있는 리칭은 동양적이고, 여성스러운 청순미를 지니고 있으며, 아주 탁월한 연기력을 지니고 있어서,

그녀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들은 엄청난 재미와 뭉클한 감동을 주었고, 그녀는 당시 홍콩 연예계에서 최고의 미인으로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리칭이 주연으로 열연을 펼친 홍콩멜로영화 스잔나1971년 우리나라 허리우드극장에서 개봉되었을 때, 무려 29만명의 관객을 동원해서 그해 최다관객동원과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답니다.

 

1971년도에 한국에서 개봉한 '스잔나'에서 리칭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이복언니와 애정의 삼각관계를 펼치다가, 갑자기 뇌종양에 걸려서, 뇌종양으로 시한부인생을 살아가는 비운의 여학생역할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지요.

   

이렇게 1971년도에 개봉된 영화 스잔나에서 불치병에 걸려서 6개월의 시한부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불쌍하고, 애절한 스잔나역을 리칭이 너무도 잘 소화해냄으로써,

수많은 한국관객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면서, 한국관객들의 눈물샘을 한없이 자극했었답니다.

 

영화 스잔나의 대히트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리칭신드롬현상이 발생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리칭의 인기는 대단했었답니다.

 

이렇게 70년대 초반 영화 스잔나로 우리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던 리칭은 우리나라영화계에 전격 진출하게 됩니다.

70년대 당시 한국 최고의 감독이었던 신상옥감독이 리칭을 우리나라로 스카우트해서, 리칭은 한국에서 영화 3편을 찍기도 했답니다!

 

신상옥감독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리칭은 1972년도부터 73년도까지 국내에 체류하면서 리칭의 여선생’ ‘반혼녀’ ‘흑야광주의 세편의 한국영화에 출연했는데, 이 세편의 영화들도 당시 한국에서 상당한 흥행성공을 거두었답니다.

 

이 중 리칭이 신성일과 함께 타이틀롤을 맡은 영화 리칭의 여선생이 제일 크게 히트를 쳤답니다.

 

리칭의 사망과 사망원인

 

최근에 리칭의 근황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매우 슬픈 소식이랍니다.

리칭이 2018년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리칭은 2018년도 홍콩섬 빡콕(北角)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홀로 숨져있는 것을 출동한 경찰이 발견했다고 합니다.

 

리칭은 이 아파트에서 아주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아왔다고 하는데, 최근에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않자, 이상하게 생각한 주변사람들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리칭의 죽기 직전의 최근사진

 

경찰이 출동해서 잠궈진 문을 뜷고서 아파트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에 쓰러져 숨져있는 리칭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왕년의 아시아의 최고미녀스타였던 리칭이 71세의 나이로 자신의 집에서 고독사한 것으로 밝혀져서, 그녀를 좋아했던 수많은 홍콩의 올드팬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경찰이 그녀의 아파트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갔을 때, 리칭은 이미 죽은 지 일주일 정도 지난 상태였고, 그녀는 아무도 곁을 지켜주는 사람없이 혼자서 외롭게 죽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리칭은 이 아파트에서 오랫동안 혼자서 살아왔다고 하는데요.

 

리칭의 사망원인은 무었이었을까요?

주변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리칭은 몇 년 전에 암에 걸려었다고 하며, 그녀는 오랫동안 암투병을 해왔다고 합니다.

리칭이 7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된 원인은 암이 악화된 것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리칭이 살았던 그 아파트는 임대아파트였다고 합니다.

또한 리칭은 만년에 돈이 없어서 임대아파트의 임대료도 수개월 이상 밀려있었다고 하며, 그 때문에 아파트주인으로부터 아파트를 비워달라는 요구를 받아왔었다고 합니다.

 

리칭이 얼마나 곤궁했으면, 왕년의 아시아의 톱스타가 수개월 이상 동안 임대료를 밀렸을까요?

 

리칭이 자기집이 아닌 임대아파트에 살았다는 것도 팬들에게는 슬픈 소식이지만, 그녀가 죽을 때에 아무도 그녀의 곁을 지켜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리칭은 홍콩에서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리칭은 왜 독신으로 살아왔을까요?

 

리칭은 60~70년대에 총 54편의 홍콩영화에 출연했는데, 그녀의 영화들이 대부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크게 히트했고,

녀는 아시아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그녀는 아시아의 톱스타로서 큰 인기와 명예와 부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리칭은 70년 후반부터 점점 쇠락해져갔습니다. 리칭은 1979년도에 그녀의 애인이었던 버스회사 사장인 뇌각화(雷覺華)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83년도에는 그녀의 마지막 의지처였던 어머니마저 사망하면서, 그녀는 또다시 엄청난 충격에 휩쌓이게 됩니다.

 

이 시기에 리칭은 영화계에서 완전 은퇴하고 난 후, 그 후부터 마음의 상처를 잊기위해서 도박에 빠지게 됩니다.

 

리칭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마카오에 있는 카지노도박장에 거의 매일같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녀는 수년간 마카오에 드나들면서,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날려버렸습니다.

 

이렇게 거의 모든 것을 잃고난 후, 리칭은 그 충격의 후유증과 우울증에 걸려서 그 후에도 계속 독신을 고집하면서, 홍콩의 임대아파트를 전전하면서 매우 궁핍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첫사랑의 죽음의 충격에다가, 도박장에서 전재산을 탕진하면서 받은 충격때문인지,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갔다고 알려졌습니다.

 

리칭이 오랫동안 혼자 살면서 싸구려 임대아파트를 전전하면서 매우 궁핍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갔다는 슬픈 소식은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답니다.

 

결국 리칭은 이렇게 독신으로 살아가다가, 임대료도 내지못한 임대아파트에서 외롭게 혼자 고독사라고 말았습니다.

 

   70년대에 홍콩출신의 아시아의 최고미녀스타가 임대아파트에서 혼자서 고독사하고 말았다니, 정말 믿겨지지 않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리칭이 고독사하고 말았지만, 왕년에 그녀를 사랑했던 수많은 팬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으니, 그녀는 죽어서도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싶습니다. 

 

리칭은 영화 스잔나에서 영화주제가를 직접 불러서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는데요. 리칭이 극중에서 직접 불렀던 노래가 만추의 노래’와 '청춘무곡''입니다.

 

리칭이 불렀던 스잔나 주제가 만추의 노래는 자신이 뇌종양이라고 하는 불치병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애절한 마음으로 표현하는 슬픈 노래입니다.

 

아래 동영상은 리칭이 직접 부른 만추’와 '청춘무곡'입니다.

그럼 70년대 초 홍콩의 대표적인 청순미인이었던 리칭이 부르는 스잔나 주제가 만추’ '청춘무곡'을 한번 감상해보도록 하지요!

 

리칭의 '만추의 노래' 동영상

 

 

 

 

 

 

 

리칭의 '청춘무곡' 노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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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미녀여배우 리칭의 스잔나 주제가 만추노래 동영상

 

리칭은 60, 70년대를 대표하는 홍콩미녀 여배우입니다.

한류가 태동하기도 훨씬 전, 60~70년대에는 홍콩의 무협영화가 아시아에서 크게 인기를 끌던 시기랍니다.

 

70년대에는 홍콩영화, 홍콩노래, 홍콩영화배우들이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지금의 K-POP과 한류영화가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끄는 것처럼 말이지요.

 

특히 70년도에 청순하게 생긴 한 홍콩여배우가 출연한 멜로영화가 우리나라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답니다.

 

홍콩여배우 리칭이 주연으로 열연한 스잔나라는 영화가 허리우드극장에서 개봉되어 수많은 젊은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면서 큰 히트를 기록했답니다.

 

70년도 당시 영화의 손익분기점이 3만명이던 시절에 리칭의 스잔나는 무려 29만명이라는 놀라운 관객동원을 기록했는데요.

 

리칭이 출연한 스잔나는 그해 최다 관객동원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면서, 우리나라에서 초절정의 인기를 끌었답니다

 

이 영화에서 청순한 미모를 발산하면서 시한부삶을 사는 가련한 여주인공 스잔나(샨샨)’을 연기했던 리칭은 단번에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을 사로잡으면서, 아시아의 영웅으로 우뚝 솟아올랐습니다.

 

영화 스잔나에서 뇌종양에 걸려서 6개월의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불행한 여주인공을 열연했던 리칭은 미모면에서나 연기력면에서 아주 탁월한 재능과 존재감을 보여주었답니다.

 

단발머리에 커다란 눈망울과 오똑한 콧날에 도도한 미소를 풍기는 리칭의 청순한 미모는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의 가슴을 단번에 사로잡아버렸답니다.

 

70년대 전반기에 리칭 신드롬현상과 스잔나 신드롬현상이 거세게 일어났을 정도로 그 당시 리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핫한 아이돌이었답니다.

 

매력적이고 청순한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던 리칭은 홍콩에서는 와와영후(娃娃影后)’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답니다.

와와(娃娃)’는 인형처럼 예쁜 여자아이를 일컫는 말로서, ‘와와영후는 인형처럼 예쁜 영화계의 여황후라는 의미랍니다.

 

리칭은 60~70년대에 와와영후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을 정도로 홍콩에서도 미모와 연기력으로 인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1970년도를 전후한 시기에, 홍콩에서는 리칭과 하리리가 서로 최고의 미인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을 정도랍니다,

 

리칭은 홍콩의 최대의 영화사인 쇼브라더스사에 소속되어서 약 16년 동안 인기여배우로 활동했었지요.

1964년대 영화 옥당춘으로 데뷔했고, 1967년 찍은 스잔나가 홍콩과 아시아에서 유례없는 큰 히트를 치면서, 홍콩을 대표하는 미녀여배우로 우뚝 솟아올랐답니다.

 

그 후에도 리칭은 도검’ ‘철수무정’ ‘아랑곡의 혈투’ ‘12인의 여걸같은 유명한 홍콩무협영화에 계속 출연해서, 아시아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요.

 

당시 신필름을 이끌고 있었던 우리나라의 신상옥감독이 1972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유독 높았던 리칭을 전격 스카웃했고,

리칭을 한국으로 불러온 신상옥감독은 리칭을 주연으로 해서 리칭의 여선생’ ‘흑야광주’ ‘반혼녀등 세편의 영화를 제작해서 상영해서 크게 히트를 쳤답니다.

 

이 당시 우리나라에서 세편의 영화를 찍었던 리칭은 매우 높은 게런티를 받고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리칭은 영화 스잔나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서 제12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럼 리칭의 개인 신상정보를 소개해드리지요.

 

홍콩배우 리칭은 1948년생으로 지금 나이가 71세입니다. 젊었을 시절의 리칭은 키 160cm의 중간키에 몸무게는 49kg으로 좀 통통하면서 귀여운 스타일이랍니다.

물론 지금은 매우 많이 통통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리칭은 애인이었던 후인교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죽는 바람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1983년도에 배우에서 은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리칭은 오랫동안 홍콩에서 독신으로 살아갔다고 합니다.

 

리칭의 대표작 스잔나는 리칭이 1967년도에 홍콩에서 촬영했던 영화인데요. 이 당시 리칭의 나이가 꽃다운 20살의 나이였습니다.

 

리칭의 스잔나는 리칭이 톱스타로 급부상하는 계기가 된 그녀의 불후의 역작이자, 대표작이랍니다.

 

70년도에 우리나라에 상영되어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눈물을 이끌어냈던 리칭의 스잔나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주인공 샨샨(리칭역)’은 이복언니 샤오팅의 잘생긴 남자친구 팅난을 사이에 두고 심한 질투심을 느낍니다.

 

샨샨(리칭역)’은 평소에 같은 고등학교에서 항상 자신과 1등과 2등을 다투는 라이벌관계였던 배다른 언니 샤오팅에게 심한 시기심을 느끼고, 온갖 유혹을 다해서 마침내 언니의 남자친구를 빼앗아오게 됩니다.

 

사사건건 라이벌관계였던 착한 언니 샤오팅을 못살게 굴고 남자친구까지 빼앗아오면서, 자기만족에 빠져있던 이기적인 주인공 샨샨(리칭역)’은 어느날 심한 두통증세를 느끼고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자신이 6개월이라는 짧은 시한부인생을 살게된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이제 막 피어나는 꽃과 같은 19살 나이에 앞으로 6개월의 시한부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은 샨샨(리칭역)’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때부터 샨샨(리칭역)’은 과거 자신의 잘못된 행동들을 되돌아보고 깊이 반성을 하면서, 남은 여생을 참회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답니다.

 

특히 자신이 빼앗아온 언니의 남자친구를 다시 언니품으로 되돌려 보내고, 마지막 남은 몇 개월 동안 남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새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고아들을 위한 무료연극회를 열어 연극을 하는 동안, ‘샨샨(리칭역)’은 실제 여주인공처럼 진짜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연극연기 도중 갑자기 쓰러진 샨샨(리칭역)’은 결국 응급실로 옮겨져서 사랑하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는, 19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아래는 영화 스잔나의 주제곡인 만추청춘무곡인데, 특히 스잔나의 주제가인 만추70년대 당시 우리나라에서 정훈희가 번안해서 불러서 대단히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리칭의 스잔나주제곡 만추노래 동영상

 

 

 

 

 

 

리칭의 스잔나삽입곡 청춘무곡노래 동영상

 

 

 

 

 

 

홍콩에서 찍힌 최근의 리칭 모습 사진, 나이 70세에 접어든 리칭 사진, 왕년의 스타도 세월은 비켜갈 수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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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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