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여황제 측천무후의 업적과 죽음, 3000명의 남총을 거느린 측천무후의 남성편력

 

중국역사에서 유일한 여황제가 한 명 있었는데, 바로 측천무후가 그 주인공입니다.

 

측천무후는 400명이나 되는 중국황제 중에서 유일한 여황제로서, 중국을 태평성대로 이끈 위대한 통치자라고 알려져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친아들마저 죽이고 여황제로 등극한 사악한 통치자라는 두가지의 서로 다른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오늘은 중국역사상 가장 잔혹한 황실역사의 주인공이자, 희대의 악녀라고 평가받는 측천무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혹자는 측천무후, 서태후, 여태후를 중국의 '3대 악녀'라고 부르는데, 이 세명의 악녀 중에서도 특히 측천무후의 잔인성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정말 대단한 악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욕망이 강했던 여태후와 서태후도 자신의 아들만큼은 죽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측천무후는 권력 획득을 위해서 자신의 친아들마저도 죽였을 정도로 그녀의 잔악성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이렇게 중국역사상 희대의 악녀라고 불리우는 측천무후이지만, 군주로 올라선 다음에는 관리를 공평하게 등용하고 비교적 통치를 잘해서 민생을 안정화시켰다는 긍정적인 업적도 갖고있는 정말 상반된 두 얼굴을 갖고있는 중국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측천무후는 중국역사상 가장 음탕한 요부라는 평가를 받고있는데, 그녀는 여황제가 되고난 다음에 수천명의 남총들을 궁궐로 끌여들여서 매일밤마다 후안무치의 향략을 즐겼으며,

자신의 하룻밤 쾌락을 위해 수많은 젊은 남성들을 희생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던 인물입니다.

 

희대의 음탕하고도 사악한 요부, 그리고 민생을 안정시킨 위대한 군주라는 두가지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고있는 여황제 측천무후의 구체적인 생애를 살펴보도록 하겠어요!

 

측천무후의 원래 이름은 ‘무조’인데, 무조는 636년 당나라 태종시절에 14살의 어린 나이로 궁궐에 입궁해서 태종의 궁녀로 생활을 시작하게됩니다.

 

측천무후의 원래 이름은 ‘무조’인데, 무조 즉 측천무후는 궁궐에 처음 들어갔을 때, 후궁중에서도 낮은 품계인 정 5품의 ‘재인’으로 봉해졌지요.

후궁 중에서도 품계가 낮은 측천무후였지만, 그녀의 미모만큼은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은 무조(측천무후)를 ‘무미랑’이라고 불렀는데, ‘무미랑’은 귀엽고 예쁜 낭자라는 뜻이었답니다.

 

이렇게 측천무후는 미모는 매우 빼어났지만, 아직 당 태종으로부터 인정을 받지못해서 하위직 후궁으로 일하고 있었는데요.

 

측천무후의 성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날 태종이 궁원으로 산책하러 나왔다가 말 한 마리를 보러갑니다.

이 말은 외국의 사신이 당 태종에게 조공으로 바친 말이었는데, 이 말이 어찌나 거칠고 사나운 지, 전혀 길들이지못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태종을 수행하면서 함께 그 궁원에 나왔던 무조(측천무후)와 태종이 이 사나운 말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게됩니다.

태종이 ‘이 말이 너무도 사나워서 어떻게 길들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자, 무조(측천무후)가 나서서 한마디 하게됩니다.

 

무조(측천무후)는 ‘이 말이 사람 말을 안 들으면, 먼저 철채찍으로 때려서 말을 듣게하고, 그래도 사람 말을 안 들으면, 철몽둥이로 때려서 말을 듣게하면 되고, 그래도 사람 말을 안 들으면 철칼로 찔러서 죽여버리면 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 말은 쓸모없는 말이기 때문이지요’라고 태종에게 말을 했습니다.

 

이 당시 무조(측천무후)는 나이 14살 밖에 되지않았는데 불구하고, 이 정도로 잔인한 말을 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잔인하고 비정한 성격을 가졌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무조가 후궁에서 황후로, 황후에서 여황제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때 이미 무조(측천무후)의 잔혹한 성정의 일단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 태종은 이 때 무조(측천무후)의 당돌하고도 잔인한 기질에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또한 별자리를 보면서 나라의 운세를 점치는 직무를 수행하는 태사령이 태종에게 무조의 관상이 장차 나라를 뒤짚어버리는 역모의 상이 강하다고 간하면서 그녀를 경계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즉, 태사령은 태종에게 무조(측천무후)를 후궁으로 삼을 경우, 장차 무씨에 의해 역모가 일어나서 후손들이 큰 화를 당할 뿐만아니라, 황실의 대가 끊어지게될 것이라고 조언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태사령의 예측은 태종이 죽고난 후, 그대로 적중하고 말았으니, 그의 미래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실로 놀라울 뿐입니다. 나중에 무조(측천무후)에 의해서 태종의 후손들이 황위에서 쫒겨나는 역성혁명이 실제로 발생하게 됩니다.

 

태사령의 이같은 말은 들은 태종은 그 때부터 무조(측천무후)를 멀리하게 되며, 그녀에게 황실 서가를 관리하는 관리직책을 주어서 일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무조(측천무후)가 경국지색의 빼어난 미모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태종의 승은을 얻지도 못했고, 태종의 자식도 출산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 측천무후, 당 고종의 후궁이 되면서 권력을 잡다

 

그렇지만, 권력의 욕심이 대단했던 무조(측천무후)는 장차 자신이 권력의 정점에 오를날을 학수고대하면서, 자기 특유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나갔습니다.

 

비록 무조(측천무후)가 태종의 승은은 얻지못했지만, 태종의 아들 고종에게 접근해서 온갖 교태와 간교를 다 부리면서 고종의 마음을 완전 사로잡아버렸습니다.

 

태종이 병을 얻어 병석에 눕게되면서, 무조(측천무후)는 태종의 병간호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태종의 병문안을 왔던 고종의 눈에 매혹적인 용모를 가진 무조가 들어왔고, 무조를 처음 본 고종은 첫눈에 그녀의 미모에 홀딱 반하게 됩니다.

 

그리고 태종이 죽고난 후, 고종은 첫눈에 반한 무조(측천무후)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고 싶었지만, 왕이 죽으면 그 왕을 모시던 후궁들은 모두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법도이었기 때문에,

무조(측천무후)도 황실의 법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조(측천무후)가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그녀를 잊지못해 수시로 절로 그녀를 찾아가서 무조(측천무후)와 사통을 나눴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종의 이러한 행위는 나중에 자신의 황가를 뒤엎어버리고 아들들을 희생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못한 정말 어리석은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후, 몇 년 동안 비구니로 지내온 무조(측천무후)에게 다시 황실로 복귀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오게됩니다.

 

고종이 절에 있는 무조(측천무후)를 총애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왕황후는 통크게 무조를 궁궐로 입궁시키는 조치를 취합니다.

고종의 정비인 왕황후는 당시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소숙비를 견제할 목적으로, 일부러 또다른 후궁 즉 무조(측천무후)를 입궁시켜서, 두 후궁사이에 암투가 벌어지도록 간교를 꾸몄던 겁니다.

 

그러자, 고종은 뛸 듯이 기뻐했고, 즉시 무조를 궁궐로 불러들여서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왕황후는 자신이 아들을 낳지못했기 때문에, 소숙비의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을 막기위해서, 일부러 소숙비의 정적이 될 수 있는 무조를 입궁시켰던 겁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왕황후의 조치는 나중에 엄청난 재앙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을 이 때만 해도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궁궐로 다시 복귀한 무조(측천무후)는 소의의 첩지를 받고 그 때부터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고종과 소숙비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고종과 왕황후의 사이도 멀어지게 만들었답니다.

 

왕황후의 입장에서는, 순한 토끼인줄 알고 궁궐로 불러들인 무조가 사실은 발톱을 숨기고있었던 매우 사나운 호랑이였던 겁니다.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게된 무조(측천무후)는 이 때부터 점차 본색을 드러내면서 교활한 술수를 부려서 자신의 경쟁자인 왕황후와 소숙비를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나가게됩니다.

 

무조(측천무후)는 고종의 후궁이 된 후, 자신이 황후가 되고자하는 야망을 갖고있었습니다. 무조(측천무후)가 황후가 되기위해서는 그녀의 최대의 라이벌인 왕황후를 어떻게든 제거해야만 했는데요.

 

무조(측천무후)는 왕황후를 제거하기 위해서 남들은 상상하지못한 아주 기상천외한 계략을 꾸미게됩니다.

무조(측천무후)는 고종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낳았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딸을 이용해서 왕황후를 끌어내리려고 계략을 꾸몄습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이 딸을 낳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별궁으로 왕황후를 초청했고, 왕황후는 그녀의 출산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측천무후의 별궁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왕황후가 돌아간 직후, 자신의 별궁으로 고종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고종이 오기 전에 자신의 친딸을 목졸라 죽였습니다.

 

측천무후가 자신이 낳은 친딸을 죽이고난 후, 곧바로 고종이 들어왔고, 이 때에 측천무후는 자신의 숨진 딸을 고종에게 보여주면서, 왕황후가 다녀간 후 자신의 친딸이 숨졌다고 간하면서, 자신의 딸 살해범으로 왕황후를 지목했습니다.

 

즉, 측천무후는 자신의 최대의 라이벌인 왕황후를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이 낳은 친딸을 죽였고, 그리고 왕황후를 딸 살해범으로 누명을 씌웠던 겁니다.

정말 측천무후는 남들이 결코 생각할 수도 없는 기상천외하면서 사악한 계략을 꾸몄는데, 그것은 자신의 친딸을 스스로 죽인 것입니다.

 

측천무후가 자신의 죽은 딸을 부웅켜 안고서, 왕황후가 친딸을 죽였다고 말하면서 자신 앞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모습을 본 고종은 그녀의 말을 믿지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측천무후의 이 황당한 연기를 고지 곳대로 믿은 고종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었고, 왕황후를 살인죄로 처벌하게 되는데요.

측천무후는 자신이 스스로 친딸을 죽인 후, 그곳을 방문한 왕황후에게 죄를 뒤짚어씌워서 왕황후를 딸 살해범으로 누명을 씌우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자신이 황후자리를 독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친딸을 죽이다니! 정말 측천무후가 얼마나 잔인하고 표독스러운 인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측천무후의 연기에 속은 고종은 왕황후를 폐위시켜서 감옥에 가둬버리고, 곧바로 측천무후를 황후에 봉합니다.

이때 측천무후의 간계에 넘어간 고종은 소숙비마저도 왕황후의 공범으로 몰아서 폐위시켜 버렸습니다.

 

이렇게 교활한 술수를 부려서 두명의 라이벌들을 완벽하게 제거한 측천무후는 655년도에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됩니다.

원래 측천무후의 직위는 소의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측천무후의 품계는 수직상승해서 곧바로 황후로 봉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황후가된 후, 궁궐에는 온통 피바람이 불게됩니다. 측천무후는 황후가 된 후, 자신의 앞길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될 만한 장애물들은 거침없이 제거해나갑니다.

 

측천무후는 고종에게 간해서 왕황후와 소숙비에 대한 처분권을 백지위임받았고, 감옥에 갇혀있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끌어내 곤장 백 대씩 때리게 했고,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한 그녀들을 술독에 담가버렸고, 왕황후와 소숙비는 며칠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죽어갔습니다.

 

측천무후의 라이벌이었던 왕황후와 소숙비는 자신이 하지도않은 죄를 뒤짚어쓴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측천무후의 두 번째 목표는 기존에 있던 태자를 페위하고 자신이 낳은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기존에 고종과 다른 후궁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황태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측천무후는 평소에 뇌물을 많이 써서 여러 대신들과 환관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신들과 환관들을 조종해서 고종에서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상소를 올리게 했습니다.

측천무후가 황후가 되었으니, 측천무후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는 것이 법도에 맞다는 주장을 펼치도록 했던 것입니다.

 

결국, 측천무후의 계획대로 그녀의 아들 이홍이 태자의 자리에 오르게됩니다. 그리고 쫒겨난 태자는 측천무후가 보낸 자객에 의해서 암살을 당했습니다.

 

정치적 식견과 역량이 대단했던 측천무후는 점차 정사에 간여하기 시작했고, 측천무후는 자신의 앞날에 방해가 될만한 대신들을 차례로 제거해나갔습니다.

측천무후는 고종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무기와 그의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켰습니다.

 

또한 측천무후는 자신의 반대편에 서있던 대신들을 대역죄를 꾸미려했다는 거짓 누명을 뒤짚어씌워서 모두 처형해버렸습니다.

황태자 자리에 오른 측천무후의 아들 이홍은 고종의 총애를 받았을 뿐만아니라, 대신들로부터도 신임을 두텁게 받고있어서, 황제가 되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고종은 병이 위독한 상태이어서, 고종이 자신의 황위를 맏아들 이홍에게 물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차기 황위 계승이 유력했던 이홍이 궁궐에서 고종과 측천무후와 함께 식사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원인모를 병으로 경련을 일으키면서 죽고말았습니다. 이 때 장남 이홍의 나이 고작 24살이었습니다.

 

소숙비의 두 딸이 유폐되어 40살이 넘도록 시집을 못가고 있자, 측천무후의 장남 이홍은 그녀들을 불쌍히 여겨서 시집갈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었는데, 이것을 못마땅히 여긴 측천무후가 이홍의 밥에 독약을 넣어 독살시켰다고 합니다.

 

장남 이홍은 측천무후의 심기를 잘 못 건드렸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게되었습니다.

이홍이 죽고난 후, 측천무후의 둘째아들인 이현을 황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런데 황태자가 된 두 번째 아들 이현(李賢)은 여색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고, 어머니의 잔인한 숙청작업에 불만을 표기하곤 했습니다.

이 때문에 측천무후의 심기를 자극했고, 측천무후는 이현(李賢)을 태자간 된 지 5년만에 반역죄로 몰아서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2,300리 떨어진 머나먼 파주로 유배보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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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배지에서 둘째아들 이현(李賢)은 ‘황대과사’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의 내용이 측천무후의 귀에 들어갔고, 자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시라고 판단한 측천무후는 사신을 유배지로 보내서 이현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살하도록 유도했고, 결국 그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둘째아들이 죽고난 후, 측천무후는 셋째아들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책봉했는데요.

셋째아들 이현(李顯)은 형들과 달리 매우 유약한 성격을 가진 아들이었고, 어머니 측천무후의 말에 잘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683년 고종이 56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셋째아들 이현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황제에 올랐고 그가 바로 중종입니다.

고종이 죽고난 후, 심약한 아들을 허수아비황제로 삼은 측천무후는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모든 정사를 자신의 뜻대로 펼쳐나갔습니다.

 

이 때부터 측천무후는 서서히 자신의 대권을 향한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측천무후의 세 번째 목표는 자신이 직접 여황제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셋째아들 이현(李顯)은 황제가 되면서 마음이 돌변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장악한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고 싶어했습니다.

 

이때 중종 이현은 장인인 위현정을 재상으로 임명하려 했으며, 이 때에 이현의 처인 황후 위씨와 그녀의 아버지 위현정이 중종의 황권강화를 위해서 모의하는 것을 눈치 챈 측천무후는 셋째아들 이현(李顯)을 국정을 농단한다는 이유로 전격 폐위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자신의 넷째아들 이단을 대신 황제로 책봉했는데, 그가 바로 예종입니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책봉한 막내아들 이단 또한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습니다.

측천무후는 이단 즉 예종을 황제로 책봉했지만, 그를 궁궐 안에 가둬놓고 다른 대신들을 일체 만나지 못하도록 외부와의 교류를 일체 차단시켰습니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된 막내아들 이단을 사실상 감금시켜버렸던 것이며, 막내아들 이단은 황제로서 그 어떤 권력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측천무후가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면서 자신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좌지우지해나가자, 그녀의 전횡에 반대하는 지방호족세력들이 저항하면서, 군사반란까지 일어났습니다.

 

684년 양주의 이세적의 손자 서경업이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장안으로 진군했는데, 측천무후는 즉시 30만의 군사를 모아서 진압군을 파견했고, 진압군의 공격으로 서경업의 반란은 40일만에 평정되었습니다.

 

◆ 측천무후, 여황제로 등극

 

반대파의 반란을 모두 진압하면서 실권을 욺켜잡은 측천무후는 자신을 반대하는 공신들을 모두 역모를 일으켰다는 거짓 죄명을 씌워서 대대적으로 숙청해버렸습니다.

이렇게 반대파 공신들을 모두 제거한 측천무후는 그들이 사라진 빈자리에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측근들을 대신 채워넣어서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로써, 자신의 황제즉위에 걸림돌이 될만한 장애물들을 모두 제거한 측천무후는 690년, 막내아들 예종으로부터 황위를 넘겨받아서 67세의 나이에 여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나라이름을 ‘주’로 고치고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갔는데, 이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여황제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며, 나라이름도 당에서 주로 바뀝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친아들 네명을 죽이거나, 제거해버렸습니다.

측천무후는 결국 여황제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 두명은 죽여버리고, 나머지 두명의 아들은 권좌에서 축출해버렸던 겁니다.

 

자신의 권력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친아들들까지 희생시켰을 정도이니, 그녀의 권력욕심과 탐욕이 얼마나 대단한 여성이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관리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혹리라는 비밀감시제도를 만들었고, 남들의 비리를 먼저 고발하는 사람에게 승진의 기회를 주는 등 관리들 사이에 충성경쟁을 유도하고, 서로 밀고하게 하는 악랄한 통제정치를 실시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밀고'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관리들이 경쟁적으로 서로를 밀고하게 하고, 서로 감시하게 만듦으로서, 자신의 반대파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가는 등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켜나갔습니다.

측천무후는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무소불위의 철권통치를 해나갔지만, 백성들에 대한 통치는 비교적 잘 해서 민생을 크게 안정시켰습니다.

 

측천무후는 과거제도를 확대 시행하면서 문벌귀족집단이 고위직을 독점해오던 폐단을 없애고 널리 인재를 고르게 등용했고, 일원적인 통치시스템 구축과 사회안정을 이룩해나갔습니다.

 

또한 측천무후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기위해 ‘진실의 함’이라는 투고함을 만들어 운영하는 등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쳐나갔습니다.

이 시기에 측천무후는 민생회복과 생산력 강화를 국정운영의 기본틀로 삼고, 백성을 위한 통치를 해나갔으며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일을 잘하는 관리와 일을 못하는 관리를 확실히 구분짓고, 잘하는 관리에겐 인센티브를 주고, 잘못하는 관리는 직책에서 퇴출시키는 등 공정하고 적법한 인사관리를 해나가는데 힘썼습니다.

 

그녀는 적인걸, 장간지 같은 명재상들을 등용해서 민생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 태평성대를 이룩해나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측천무후가 백성을 잘 돌보고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것은 그 당시의 인구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고종 652년에 나라의 총 가구수가 385만호인데 반해,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어 통치하는 시기인 705년도의 총 가구수는 600만호로 거의 두배 정도 인구가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인구수가 크게 증가한 것은 측천무후가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고,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측천무후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칼바람을 일으키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축출해나가는 비정함과 잔인함을 보여주었지만,

그녀는 뛰어난 통치술을 발휘해서 백성들의 민생을 안정화시키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보살피는 등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측천무후의 최후, 죽음

 

67세의 늦은 나이에 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많이 썼는데, 여성에게 좋다고 알려진 익모초를 즐겨먹었는데, 익모초는 노화를 방지해주고 항암효과가 좋으며, 피부질환에 효능이 좋은 약초라고 합니다.

또한 측천무후는 건강을 위해 도교의 양생술 수련도 많이 했으며, 특히 불로장생을 위해서 젊은 남자들을 데려와 합궁을 했습니다.

 

원래 도교의 양생술에는 젊은 남자들을 가까이 두고 성생활을 하면, 젊은 남자의 양기를 받아 젊음을 회복하거나,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측천무후는 ‘공학감’이라는 관청을 두어서 전국의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모아서 궁궐로 데려왔는데,

이렇게 선발된 잘생긴 남성들을 ‘남총’이라고 불렀으며, 이렇게 그녀를 밤에 시중들기 위해 끌어들인 남총의 수는 무려 3,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불로장생과 쾌락을 위해서 이들 수많은 남총들을 자신의 침소로 데려와서 밤마다 남자들을 번갈아 바꿔가면서, 매일같이 뜨거운 정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특히 측천무후가 매우 총애했던 남총은 그녀가 73세에 만났던 장씨 형제들이었는데,

장씨 형제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매우 잘생겼을 뿐만아니라, 재주도 뛰어나고 능력도 좋았으며, 피리를 잘 불어서 측천무후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측천무후는 장씨형제를 매우 총애해서 자신의 침실수발을 들게 했을 뿐만아니라, 높은 벼슬과 특권을 주어서 자신을 옆에서 보좌하게 했습니다.

측천무후 재위기간 그녀의 총애를 듬뿍 받았던 장씨형제가 최고의 실세가 되어 엄청난 위세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재위 후반기에 측천무후가 남총에 너무 깊이 빠지면서 그녀의 지지세력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그녀의 권력기반에 누수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총애를 받던 장씨형제들이 측천무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남용하면서, 국정을 독점해나갔습니다.

 

측천무후가 연로해지면서 정사를 점점 멀리했고, 대신 장씨형제에게 정사를 위임했습니다. 이렇게 측천무후가 정사를 돌보지않고 대신 장씨형제가 국정을 독점해나가자, 정사에서 소외된 기존 원로대신들의 불만이 팽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측천무후가 건강이 악화돼 병석에 눕고 장씨형제의 국정농단이 더욱 심각해지자, 평소에 측천무후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있던 대신들이 드디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705년 측천무후가 황제가 된 지 15년째가 되던 해에, 측천무후가 여황제에서 퇴출되는 대사변이 일어나게됩니다.

 

705년, 측천무후가 건강이 악화되어 병상에 눕게되자, 재상 장간지가 군사를 모아 측천무후의 두 아들을 앞세워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궁궐로 침입해들어왔습니다.

이 때 쿠데타군에 동조했던 왕자는 측천무후의 셋째아들 이현(중종)과 이단(예종)이었고, 그들은 측천무후에게 버림을 받고 황제의 자리에서 쫒겨났던 아들이었습니다.

 

쿠데타군이 군사정변을 일으킨 명분은 간악한 장씨형제가 역모를 일으키려하니 이를 진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쿠데타군은 궁궐로 처들어와서 제일 먼저 장씨형제를 죽이고 그 시신을 궐문 앞에 효시했습니다.

 

또한 쿠데타를 일으킨 재상 장간지는 측천무후를 압박해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할 것을 요구했고,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를 셋째아들 이현에게 물려주면서 스스로 퇴위해버렸습니다.

 

이 때 쿠데타군은 측천무후를 권좌에서 퇴위시켜버렸지만, 그녀가 새로이 등극한 황제 이현(중종)의 친어머니이기 때문에, 처벌하지는 않았고, 대신 그녀에게 실권이 없는 태상황제의 직위를 부여해서 별궁에서 편안히 살도록 허용했습니다.

아무리 측천무후를 황제의 자리에서 쫒아버렸다고 해도, 황제의 친어머니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측천무후가 폐위되고 아들 이현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주나라에서 다시 당나라로 복원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측천무후는 아들과 딸을 모아놓고 몇가지 유언을 남긴 체,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숨을 거뒀습니다.

 

이 때 측천무후가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가문인 무씨가문을 잘 돌봐달라는 것과, 자신의 손에 죽은 폐황후 왕씨와 소숙비 일가를 사면 복권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앞으로 자신을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해줄 것과 자신의 묘비명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말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왜 자신의 묘비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을까요? 그 이유는 측천무후는 자신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 내리지않고, 훗날 후대사람들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여집니다.

 

즉, 측천무후는 자신의 업적은 후대의 지식인들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평가해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명의 딸과 두명의 아들을 죽이고, 두명의 또다른 아들들을 유배시키는 등 잔인하고 패륜적인 행동을 행했던 사악한 요부 측천무후는 8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두가지의 서로 상반된 평가를 함께 받는 황제인데요,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친자식까지 죽은 천하의 사악한 요부라는 평가와 함께, 정사를 잘 돌보아서 민생을 안정화시키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위대한 여황제라는 평가가 그것이지요.

 

측천무후가 비록 민생을 안정시키고 여러가지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황제가 되기 위해서 너무도 많은 대신들의 피를 희생제물로 삼았을 뿐만아니라,

친자식마저 희생시키는 등 잔인하고 패륜적인 행동을 일삼았다는 점 때문에, 후대의 사가들은 그녀를 위대한 여황제보다는 사악한 악녀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측천무후는 한나라의 여태후, 청나라의 서태후와 함께 ‘중국의 3대 악녀’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인구를 두배 정도 늘렸을 정도로 풍요로운 나라를 만드는 등 통치를 비교적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강화를 위해서 수많은 악행들을 저질렀던 측천무후였기 때문에,

‘성군’이라는 명예를 얻지못하고 중국의 영원한 ‘3대 악녀’라고 불리울 수 밖에 없었던 측천무후의 파란만장한 일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중국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초의 여황제로 군림한 측천무후를 성군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사악한 악녀라고 생각하시나요?

 

소문내기 활동을 하면서 해당 광고업체로부터 경제적 대가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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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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