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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도적 임꺽정의 난, 의적인가, 도적인가, 일대기와 서림

역사이야기 2023. 7. 20. 18:09

조선의 3대 도적(실존인물) 임꺽정의 난, 의적인가, 도적인가, 임꺽정의 일대기

 

16세기 조선을 뒤흔들어놓았던 대도적 임꺽정! 임꺽정은 장길산, 홍길동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적이라고 불리우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임꺽정은 다른 도적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임꺽정은 관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여서 승리했을 뿐만아니라, 조선임금조차도 벌벌 떨게했을 정도로 한 나라를 완전 뒤짚어놓을 만큼 엄청난 전과를 이룩해놓았던 도적은 조선역사상 전무후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임꺽정은 과연 로빈훗 같은 의적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욕스러운 도적이었을까요?

 

사람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임꺽정은 의로운 일은 한 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연 역사기록에도 임꺽정을 정의로운 의적으로 기록되어있을까요?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꺽정을 의적으로 알고있지만, 실제의 기록에는 임꺽정은 백성과 관군을 대상으로 약탈과 살인, 방화 일삼았던 포악한 도적패의 수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꺽정을 의적과는 거리가 먼 포악한 도적, 반란의 수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 기록 자체가 백성이 쓴 것이 아니라, 왕과 조정대신들의 입장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왕실과 조정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기록 자체는 역사의 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의 기록을 100%로 다 맞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도 임꺽정이라는 인물을 파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임꺽정이라는 인물과 그가 일으킨 난을 사실에 입각해서 객관적으로 그려볼까 합니다.

 

과연 임꺽정은 정말로 의로운 의적인지, 아니면 포악한 도적인지의 판단과 그리고 임꺽정의 난은 어떠한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갖고있는지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려고 합니다!

 

◆ 임꺽정의 난

 

16세기 중반, 임꺽정은 황해도일대에서 도적대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던 대단히 큰 규모의 도적집단이었습니다.

 

1559년 3월, 대낮에도 임꺽정 도적패가 출현해 관군을 공격해 죽이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으면서 큰 혼란을 일으켰고, 그 소식이 조선임금(명종)에게까지 보고되면서 조선 조정은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명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황해도에 임꺽정의 도적패가 크게 일어나서, 낮에도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고 관가를 에워싸고 관가의 포졸들을 죽일 뿐아니라, 옥문을 부수고 수감된 죄수들까지 빼앗아갔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에, 16세기 중반 황해도에서 일어난 임꺽정의 난이 얼마나 크고 대단했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임꺽정의 난에 큰 위기를 느낀 조정은 곧바로 ‘도적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황해도의 수령들을 전부 무관으로 교체한 후, 임꺽정일당에 대한 토벌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이 임꺽정을 추격하다가 오히려 임꺽정 도적패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은 임꺽정이 단순한 도적패가 아니라, 국가 공권력에 도전하는 반국가 세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임꺽정의 난의 발생이유

 

‘임꺽정의 난’은 조선시대에 일어난 최초의 난이며, 조선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최대 규모의 난입니다. 또한 임꺽정의 난은 최장기간에 걸쳐서 일어난 농민들의 반란이었습니다.

 

‘임꺽정의 난’은 소상인과 수공업자, 농민 등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아서 그 규모가 확대되어나갔기 때문에, 임꺽정의 난을 단순한 도적패의 난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조직적인 농민저항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임꺽정의 난’은 황해도뿐만 아니라, 평안도, 강원도까지 그 판세가 확대되어 나갔기 때문에, 명종을 위시로한 조정에서는 정권차원에서의 커다란 위기의식을 갖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임꺽정의 난이 그 세력이 커지고 점점 확대되어 나가자, 위기를 느낀 조선조정은 임꺽정을 ‘반역의 괴수’로 선포하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게됩니다.

 

이렇게 황해도와 평안도, 강원도 등 3도를 넘나들면서 관군들을 압도할 정도로 큰 위세를 떨친 임꺽정의 난은 도대체 왜 일어났던 걸까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던 이유는 바로 조선 권세가들의 수탈과 횡포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 머리부터 나오지않고 다리부터 나오는 등 거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태어날 때, 거꾸로 나오는 걸 보고, 혹시 이 아이가 커서 나라를 뒤짚어업는 큰 일을 하지않을까 하는 주변사람들의 우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꺽정의 어머니가 세상을 올바르게 살라는 의미로 이름에 정(正)자를 넣어서 이름을 ‘임꺽정’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명종실록에 나오는 바로는 원래 이름은 ‘임거질정’인데, 편의상 임꺽정으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임꺽정의 신분은 백정이었는데, 백정은 조선시대의 하층민으로서, 주로 들판에 널린 갈대를 베어다가 그것으로 고리나 갓, 짚신 등의 생필품을 만들어 생활을 하는 천민 수공업집단이었습니다.

 

임꺽정도 갈대를 베어다가 갓과 짚신을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이렇게 양주에서 생활을 해나가던 임꺽정과 그 일행은 더 많은 갈대와 개활지가 있는 황해도 일대로 이주해갔고,

황대도 개활지에 널려있는 갈대를 가져다가 생필품을 만들어 팔면서, 그 때부터 황해도에서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황해도에는 임꺽정의 고향인 양주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갈대밭이 있었기 때문에, 임꺽정과 일행은 이 황해도 연안에 터를 잡았고, 그곳에 널려있는 갈대로 생필품을 만들면서 생활의 안정을 이루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나이 어린 명종을 대신해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섭정을 했던 시기였고, 외척세력인 윤원형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농단하면서, 권력층의 비리와 부정부패가 극심했던 시기였습니다.

 

원래 갈대밭이 무성한 개활지들은 주인없는 땅으로, 누구든지 이곳의 갈대를 가져다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 당시 새롭게 권력을 장악했던 권세가들이 농간을 부려서, 황해도의 주인없는 개활지들을 양반과 권세가들의 소유지로 귀속시켜 버렸습니다.

 

그 결과, 황대도 개활지에서 갈대를 가져다가 생필품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던 임꺽정과 그 일행은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입게되었지요.

 

원래, 주인없는 갈대밭이 졸지에 양반들의 소유지로 탈바꿈하면서, 임꺽정 등 수공업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갈대밭으로 빼앗기고 거리에 나앉게되었습니다.

 

즉, 권력층과 결탁한 권세가들이 욕심을 부려서, 서민들이 생계를 이어왔던 갈대밭을 국가공권력을 이용해 강제로 빼앗고, 자신들의 소유지로 탈바꿈시켜버린 겁니다.

 

이렇게, 포악한 권세가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하층민들은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거나, 유랑민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권세가들의 수탈 때문에, 생계의 터전을 빼앗겼던 서민들 중의 한사람이 바로 임꺽정이었습니다.

 

조선 권력층의 횡포와 수탈 때문에, 강제로 갈대밭을 빼앗기고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임꺽정일행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말도안되는 세도가들의 횡포에 대해 엄청 끓어오르는 분노의 표출과 항거가 아니었을까요?

 

이 때에 임꺽정은 자신처럼 권세가들의 횡포와 수탈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규합해서 도적집단을 만들었고,

자신은 그 도적집단의 수괴가 되어 황해도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관아와 민가의 재물을 훔치고, 약탈하는 등 난을 일으키면서, 도적활동을 시작해나갔습니다.

 

♥ 임꺽정의 신출귀몰한 도적활동과 관군의 반격

 

도적을 잘 잡기로 소문난 평안도 개성의 포도관이 포졸들을 이끌고 임꺽정을 잡기위해서 새벽에 황해도의 임꺽정무리의 본거지를 급격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포도관이 임꺽정의 반격을 받아 화살 7대를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해버렸고, 그의 부하들도 전멸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임꺽정의 명성은 조선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으며, 임꺽정은 졸지에 도적단의 우두머리에서 관리를 죽인 범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1559년경, 임꺽정의 도적집단의 규모는 엄청 커졌는데, 그의 무리는 황해도는 물론 함경도, 경기도 일대까지 진출해서 관아와 민가를 습격해서 재물을 약탈하고 방화를 일삼았으며, 심지어는 관아를 지키는 포졸들을 죽이는 등 살상도 자행했습니다.

 

이 당시 임꺽정 도적집단의 활동영역은 황해도를 비롯해 함경도와 강원도까지 이르는 등 전국구 도적집단으로 확장되었는데,

임꺽정 도적집단이 이렇게 그 세력판도가 커지게된 데에는, 그곳의 일부 아전과 백성들이 호응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지방의 일부백성들은 자신들의 등꼴을 빼먹는 포악한 탐관오리들을 임꺽정 무리가 대신 응징해주는 것에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임꺽정무리의 활동에 호응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특히, 임꺽정무리는 평안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숨어있다가, 으슥한 산길에서 값진 재물들을 싣고가는 상인들을 급습해서 귀한 물건들을 빼앗곤 했습니다.

이 때에 상인들이 빼앗긴 물건들은 상당수가 만주와 평안도에서 양반사대부들에게 비싼값에 팔려가는 값지고 귀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값진 물건들을 많이 확보하게된 임꺽정무리는 그 재물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확대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임꺽정일당이 관리를 죽이는 등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어나가자, 조선 조정에서는 본격적인 임꺽정 토벌작전에 나서게됩니다.

 

관군은 임꺽정무리를 토벌하기 위해서 황해도 봉산에 있는 그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임꺽정과 일행은 미리 그 사실을 알고서 다른 지역으로 피해버렸습니다. 이렇게 관군과 임꺽정무리 사이에 서로 쫓고 쫓기는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임꺽정 도적집단은 관군의 집요한 추격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관군에게 붙잡히지 않고 계속 그들의 조직과 전열을 유지해나갔습니다.

 

임꺽정의 난이 일어난 지, 무려 3년동안 조정에서 파견한 관군의 추격과 공격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꺽정 도적집단은 꼬리를 잡히 않고, 계속 피해나갔는데요.

 

어느날, 마을의 한 남자가 임꺽정무리의 위치를 몰래 관군에게 밀고했습니다.

 

한 부락민의 밀고로 인해서, 임꺽정 도적집단은 그들의 본거지를 관군에게 급습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임꺽정 도적집단은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간신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그 후 임꺽정 일행은 그 밀고자를 찾아내어 밀고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처형해버렸습니다.

 

이렇게 임꺽정은 자신의 존재나 위치를 관군에게 밀고한 밀고자는 가차없이 죽여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밀고자를 응징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제2의, 제3의 밀고자가 계속 속출하게 되고, 그러면 임꺽정 도적집단은 파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임꺽정 도적집단은 자신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배신자나 밀고자들에게 가차없이 보복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임꺽정은 의적인가, 도적인가?

 

임꺽정무리는 약탈의 대상을 특정하진 않았는데, 그들은 관청이나 관아는 물론 일반 민가도 습격해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만약 불복하거나 항거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살해해버렸습니다.

 

이점은 임꺽정 일행이 의적이다 라는 평가에 대해 의문점을 갖게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임꺽정 일행이 민가와 관청을 급습해서 재물을 약탈하고, 살상을 자행하는데도, 사람들은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신고하지 않았고, 지방수령도 역시 보복이 두려워서 체포하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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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이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처참히 살해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아무도 그의 무리를 신고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임꺽정이 난을 일으킨 지 3년이라는 오랜기간 동안 관군에 붙잡히지 않고, 계속 세력을 확산시킬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꺽정 집단은 원래 황해도 봉산과 구월산일대에서 활동했는데, 관군이 집요하게 공격해오는 바람에, 그들의 본거지를 평안도의 맹산지역으로 옮겼습니다.

 

임꺽정무리가 평안도 맹산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은 관군은 이번에는 맹산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관군의 도착이 또다시 한발 늦었고, 관군이 도착하기 전에 임꺽정무리는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습니다. 그리고 임꺽정무리는 곧바로 강원도 이천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렇게 임꺽정무리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신출귀몰하게 관군들의 추격을 멀찌감치 따돌렸습니다.

 

명종은 임꺽정을 잡지못한 지방관들을 가차없이 파직했고, 그리고 새로운 지방관을 파견해서 다시 임꺽정 일당을 잡도록 독려했습니다.

그렇지만, 새로 부임한 지방관들도 황해도와 평안도, 강원도를 넘나들면서 신출귀몰하게 피해다니는 임꺽정무리를 토벌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임꺽정 무리는 평소에는 상인으로 변장해서 지역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관군과 사람들의 눈을 피했는데, 이러한 임꺽정 무리의 변장술도 관군에 쉽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는 또다른 요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임꺽정은 매우 지능적이고 전략적으로 관군들을 따돌렸고, 이로 인해 임꺽정의 세력은 더욱 커졌고, 그들의 활동반경도 황해도와 평안도, 강원도 등지로 더욱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임꺽정무리가 오랫동안 관군들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임꺽정 무리는 관청과 관군, 마을 곳곳에 자신들이 파견한 밀정(정보원)을 미리 숨겨놓고 있어서, 관군의 추격정보를 사전에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이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임꺽정이 곳곳에 자신의 정보원들을 숨겨놓았기 때문에, 관군이 임꺽정의 근거지를 습격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미리 그 추격정보를 전해 듣고 다른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 임꺽정의 한양 진출과 책사 서림의 체포

 

1560년 10월 28일, 임꺽정이 이미 한양에 소굴을 만들어서 잠입해있다는 이야기가 조정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명종은 명을 내려서 도성 한양의 성문 경비를 강화하고, 한양을 다섯권역으로 나눠서 수색과 정찰을 하도록 지시했는데요.

 

그런데, 이 때에 드디어 관군은 임꺽정의 근거지를 알아낼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을 한명 찾아내는데 성공합니다.

관군은 한양에 몰래 숨어있는 임꺽정의 부하 서림을 전격 체포했습니다.

 

서림은 임꺽정집단에서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내는 임꺽정의 일급 브레인이자, 임꺽정집단의 가장 뛰어난 책사였습니다.

이 책사 서림이 한양에서 염탐활동을 하다가 관군에게 전격 체포되었습니다.

 

임꺽정의 책사 서림이 붙잡히면서, 관군은 비로서 임꺽정을 잡을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요.

 

조정은 임꺽정의 소재와 근거지를 알아내기 위해 서림을 집요하게 심문했지만, 처음에 서림은 임꺽정의 근거지를 발설하지않고 완강히 버텼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죄를 사해주고, 벼슬까지 내려주겠다고 제안하며 끈질기게 회유하자, 결국 서림은 임꺽정의 근거지와 소재지를 자백하고 말았습니다.

 

서림은 조정 수사관에게 ‘임꺽정이 이미 한양을 빠져나가서 황해도에 있다’고 제보해주었고, 또한 임꺽정일행이 26일 새 봉산군수 이흠례를 죽이기로 계획을 세웠다고 알려줬습니다.

 

이흠례는 전에 임꺽정의 부하들을 수도없이 많이 잡아넣었던 임꺽정의 숙적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흠례가 제발로 걸어들어와서 봉산군수로 부임한다고 하니, 임꺽정으로서는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흠례를 쳐부술 계획을 세웠던 겁니다.

 

이같은 정보를 전해들은 명종은 자신의 호위대장인 정수익을 임꺽정 토벌대 대장으로 임명하고, 임꺽정토벌을 명령하면서 그의 군사를 황해도로 출격시켰습니다.

 

◆ 임꺽정 도적 60 대 500명 관군의 전투와 대승

 

1560년 11월 26일, 정수익 토벌대는 총 5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황해도 봉산에 집결한 후, 곧바로 임꺽정의 근거지가 있는 평상군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토벌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임꺽정 등 7명의 도적들은 곧바로 산속 깊은 계곡으로 달아났습니다.

 

500명의 토벌군은 계곡주위를 포위한 채, 한발짝 한발짝씩 앞으로 전진하는 순간, 계곡위에서 ‘훵’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수십발의 화살이 날아왔고, 전진하는 포졸들을 하나둘씩 쓰러뜨렸습니다.

 

이날 높은 계곡위에서 매복해있던 임꺽정과 부하 60여명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토벌군들을 향해 마치 비오듯이 활을 쏘아댔습니다.

계곡위에서 한 순간에 수백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왔고, 산위를 오르던 포졸들은 화살에 맞아 추풍낙옆처럼 쓰러져갔습니다.

 

사실, 이날 근거지에 남아있었던 대원들은 임꺽정이 일부러 심어놓은 미끼였고, 이 대원들이 도망치면서 임꺽정부대가 미리 매복해있던 계곡쪽으로 토벌군들을 유인해왔던 겁니다.

 

이렇게 매복지점으로 들어온 관군들을 미리 포위 매복해있던 임꺽정 대원들이 동시에 화살세례를 퍼부었고,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았던 정수익의 토벌대원들 500명은 모두 전멸해버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전에 임꺽정이 고안해낸 계략이었으며, 관군을 유인해서 함정에 빠뜨려놓은 다음, 미리 매복해있던 대원들이 관군에게 기습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이 탁월한 임꺽정의 유인 기습공격 전략으로, 500명의 토벌대원들은 전부 전멸했다고 합니다.

 

왕의 최정예군 500명이 고작 60명의 도적패에게 처참히 패배했습니다.

 

이것도 임꺽정이 관아에 숨겨놓았던 정보원으로부터 정보를 전달받았던 것이 이같은 기습게릴라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임꺽정은 여러 곳곳에 자신의 정보원들을 숨겨놓았고, 그들로부터 서림이 체포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토벌대가 쳐들온다는 정보도 미리 알고있었던 것입니다.

 

이같이 최정예 토벌대와의 싸움에 대승을 거둔 임꺽정일행은 그 토벌대가 타고온 말을 타고서 다시 그 지역을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한낱 도적에 불과한 임꺽정이 왕이 파견한 최정예 토벌군을 전부 몰살시킬 정도로 대승을 거둔 것을 보면, 임꺽정은 단순한 도적패가 아니라, 정말 대단한 지략가이자, 뛰어난 전략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처절히 깨진 명종은 또다시 임꺽정을 토벌하기 위해서 임꺽정토벌 전담부서인 ‘순경사’를 설치하고, 잘 조련된 정예 군사들을 임꺽정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황해도와 강원도로 또다시 출정시켰습니다.

 

남치근을 대장으로 하고 서림을 책사로 함께 대대적인 정예 토벌대를 편성해서, 또다시 임꺽정이 있을 만한 황해도로 출격시켰습니다.

 

남치근 토벌대는 황해도일대에서 4개월 넘도록 수색활동을 벌였고, 특히 임꺽정소굴이 있다는 구월산일대를 샅샅이 수색해나가던 중, 임꺽정도적패의 일부 단원들이 하나둘씩 투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관군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추격과 겨울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추운 산속에서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되자, 임꺽정도적패의 단원들이 항복하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많은 수의 도적 단원들이 항복해왔습니다.

 

4개월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토벌대가 끈질기게 추격해왔고, 추운 겨울철에 산속에서 도망치면서 식량도 떨어지고 몸도 얼어붓는 등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되자, 많은 수의 임꺽정 단원들이 투항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관군은 투항한 임꺽정도적패의 단원으로부터 임꺽정이 숨어있는 산채의 위치를 알아냈고, 그 산채를 찾아내어 완전 포위해버렸습니다.

 

토벌대가 그 산채를 습격해 들어가자, 그 안에 숨어있던 임꺽정은 뒷문을 통해 재빨리 집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임꺽정은 계곡 아래에 있는 한 민가로 숨어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토벌대가 또다시 추격해서 임꺽정이 숨어있는 민가를 포위했고, 결국 그 민가에 숨어있는 임꺽정을 알아본 서림의 제보로 인해 임꺽정은 전격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체포된 임꺽정은 15일 뒤에 전격 처형되었습니다.

 

지난 3년동안 조선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은 끈질긴 저항과 도주 끝에 마침내 토벌대에 의해 체포된 후, 끔찍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명종이 보낸 500명의 정예토벌대를 전부 몰살시켰을 정도로 그토록 강했던 임꺽정 도적집단이었지만, 관군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추격과 겨울철 얼음장추위와 굶주림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와해되어버렸습니다.

 

◆ 임꺽정의 난의 의미

 

그렇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조선 권세가들의 탐욕과 수탈 때문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정답니다.

 

조선 권세가들이 주인없는 땅이었던 황해도의 갈대밭을 자신들의 땅으로 소유화하자, 그곳에서 터전을 일구면서 먹고살아가던 황해도 하층민들이 임꺽정을 중심으로 뭉쳐서 권세가들의 수탈에 항거해서 난을 일으켰던 겁니다.

 

만일 조선 권세가들이 하층민들의 땅과 생활터전을 강제로 수탈하지 않았더라면, 하층민들의 갈대밭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임꺽정의 난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꺽정의 난을 단순히 도적패의 난동이라고 볼 수는 없고, 권세가들의 탐욕과 횡포 때문에, 권세가들의 수탈에 항거하기 위해서 일어난 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도록 만든 것은 조선 권문세가들의 탐욕과 수탈이 그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이나 그 어떤 역사기록에도 임꺽정이 양반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의적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임꺽정을 로빈훗 같은 의적이라고 보기에는 다시 무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권력을 가진 왕과 조정대신들의 입장에서 쓴 기록이기 때문에, 100%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즉,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없지만, 임꺽정 일행이 자신들이 빼앗은 재물을 자기단원들에게 골고루 분배했을 것이고, 자기집단에 호응해주는 일부 백성들에게는 나눠줬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됩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는 임꺽정이 양반집이나 관아를 습격해 재물을 빼앗아서 그 재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선행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내려오고 있는데요.

 

그렇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자신들에게 칼을 겨누는 임꺽정을 미화하기 위해서, 임꺽정집단의 선행을 고의적으로 역사기록에 빼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임꺽정무리가 포악한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그들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단원들이나 일부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이야기는 비록 역사기록에는 없다고 하더라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꺽정의 난은 단순히 도적패의 난동이라기 보다는 포악한 조선 권문세가들의 횡포와 수탈에 항거해서 일어난 조선 하층민들의 민중봉기 또는 항거라고 규정할 수 있겠습니다.

 

항상 조선 권세가들의 횡포와 수탈에 억눌려지내왔던 조선 하층민들이 권세가들의 도를 넘는 노골적인 수탈행위에 더 이상 참지못하고 임꺽정을 중심으로 뭉쳐서 민중적 항거로서 일어난 것이 바로 ‘임꺽정의 난’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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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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