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영화의 중흥기였던 60,70년대에 우아한 미모와 요염미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윤정희가 만 79세 나이로 19일 사망했습니다.
윤정희는 오랫동안 앓아왔던 그녀의 고질병인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윤정희는 프랑스 파리에서 남편 백건우와 함께 살아왔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파리에는 그녀의 딸 백진희씨도 근처에 살고있는 것으로 알려져왔습니다.
윤정희는 1월 19일 그동안 앓아왔던 알츠하이머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하며, 그녀의 장례식은 프랑스 파리의 한 성당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진다고 합니다.
또한 윤정희의 유해는 그녀가 오랫동안 살아왔던 파리 인근의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윤정희는 우리나라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던 부흥기인 60~70년대를 풍미했던 아름다운 미모와 연기력을 동시에 갖춘 대표적인 인기여배우였지요.
◆ 윤정희의 프로필과 경력
- 프로필 -
본명 - 손미자
출생일 - 1944년 7월 30일
출생지 - 경남 부산
사망일 - 2023년 1월 19일. 79세(80세) 나이로 사망
사망지 - 프랑스 파리
키 - 160cm
가족 - 남편 백건우와 딸 백진희
학력 - 전남여자고등학교
조선대학교 영어영문과 중퇴,
우석대학교 사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연극영화학과 석사학위 취득
종교 - 가톨릭
데뷔 - 1967년 ‘청춘극장’으로 데뷔
마지막 영화 - 2010년 ‘시’
출연영화 수 - 280여편
1967년 윤정희는 우석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우리 영화계에 입문했는데, 67년 영화 ‘청춘극장’의 오유경역할로 데뷔했습니다.
윤정희는 데뷔할 당시, 무려 1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동영화사의 영화 ‘청춘극장’의 주인공으로 선발되었다고 하니, 당시 윤정희의 저력과 인기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 후 윤정희는 영화 ‘안개’ ‘까치소리’ ‘내시’ ‘이조여인 잔혹사’ ‘감자’ ‘독짓는 늙은이’ ‘물망초’ ‘아빠안녕’ ‘비운의 왕비’ '무녀도' 등 수많은 걸작품에 출연해서 당대의 대표적인 미녀여배우로 크나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윤정희는 데뷔 후 7년동안 280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다작배우로도 유명했는데, 그녀는 1년에 40편의 영화를 찍었을 정도로 왕성한 연기활동을 벌였습니다.
또한 윤정희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미남배우 신성일과도 99편의 영화를 함께 찍었을 정도로 신성일-윤정희 콤비활동으로도 유명하답니다.
60년대에 윤정희는 문희와 남정임과 함께 그 시대를 대표하는 '트로이카 3인방'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윤정희는 두 여배우와는 달리 매우 폭넓은 배역을 맡아 연기했는데, 그녀는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며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내는 능력을 지녔으며, 우리영화사에 남을 만한 굵직굵직한 여러 걸작품에 출연, 명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있는 여배우이지요.
주로 통통 튀는 소녀같이 발랄한 연기를 선보인 남정임, 주로 우수에 빠진 비련의 여주인공을 맡아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문희와는 다르게 윤정희는 여성스러운 청순한 역할과 요염하면서도 관능적인 요부의 역할 등 보다 폭넓은 연기의 스펙트럼을 지녔다는 점에서, 60~70년대의 진정한 '연기의 화신'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윤정희는 지적인 세련된 미모와 우이한 이미지로 영화의 품격을 한층 높여놓았다는 평도 함께 받고있지요.
윤정희는 1967년도에 데뷔해 2010년 마지막 영화 ‘시’에 출연할 때까지 43년동안이라는 오랜 연기활동을 해왔으며,
대종상 여우주연상 3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3회, 백상예술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3회 수상 등, 총 54개의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 윤정희의 결혼과 남편 백건우
윤정희는 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도 대학졸업 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에 전념하면서, 당시 최초로 석사학위를 따낸 최초의 여배우라는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또한 윤정희는 1973년도에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교으로 유학을 떠난 후, 학업와 영화를 병행하는 등 학구파 여배우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윤정희는 프랑스유학 중이던 시절,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만나 은밀한 교제를 이어왔으며,
1976년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전격 결혼했으며, 그 이듬해에 딸 진희를 낳았고, 윤정희와 남편 백건우는 잉꼬부부라고 불리울 정도로 상당히 금슬이 좋았다고 합니다.
결혼한 후에도, 윤정희는 파리와 한국을 오가면서 2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간간히 연기활동을 지속해왔는데,
2010년도에는 16만에 처음으로 다시 영화계에 컴백해 ‘시’라는 영화에 출연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면서, 큰 호평을 받았답니다.
그리고 윤정희는 이 영화 ‘시’의 여주인공으로 칸영화제에 초대되어 10분동안 기립박수를 받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답니다.
결혼 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유럽에서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치는 남편 백건우의 내조를 하면서 프랑스 파리에서 금슬좋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왔던 윤정희 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윤정희가 행복한 여생을 즐기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 윤정희의 사망과 사망이유
그런데, 2019년도에 이렇게 피아니스트 남편의 외조를 받으면서 금슬좋게 살고있을 거라고 여겨졌던 윤정희에 관한 매우 안좋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2019년 11월, 남편 백건우에 의해서, 윤정희가 10년 동안 알츠하이머병을 앓아왔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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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는 ‘치매’라고 불리우는 알츠하이머병은 자신의 모든 기억들을 잃어버리는 무서운 정신질환으로,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을 하기 곤란할 정도로 기억력, 인지능력, 사고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무서운 망각의 질병입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윤정희는 자신의 남편은 물론 딸마저도 알아보지못한다고 하며, 윤정희는 딸 진희씨에게 ‘왜 나한테 엄마라고 부르냐’고 말하면서 딸을 전혀 알아보지못했다고 합니다.
남편 백건우에 의하면, 윤정희는 이미 10년전부터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고 하는데, 그녀가 영화 ‘시’에 출연해 연기할 당시에도 이미 알츠하이머병의 초기증상이 시작되었다고 하며, 그녀의 기억력저하로 인해 긴대사를 벽에 적어놓고 읽으면서 촬영에 임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 영화 ‘시’가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으며, 이 영화촬영 이후부터 그녀는 본격적인 알츠하이머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병세는 더욱 심각해졌고, 2019년도 윤정희의 모친상을 당하여 귀국했을 때에는 윤정희가 한국에서 머물 요양원을 알아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윤정희가 워낙 유명인사라서 그녀가 한국의 요양원에서 지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가족들은 파리에 사는 딸 백진희의 집근처에 윤정희의 거처를 마련해서, 간호사들과 가족이 함께 그녀를 돌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윤정희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던 2022년에는 한국에 있는 윤정희의 형제들이 백건우씨와 딸을 상대로 윤정희후견인 지위변경 소송을 제기하면서, 윤정희 가족간에 골육상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윤정희의 동생 손씨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있는 윤정희가 배우자인 백건우로부터 2년간 방치되어있다고 주장하면서, 딸을 윤정희의 후견인으로 지정해서는 안된다면서 후견인지위 이의신청 소송을 제기했고,
백씨는 윤정희의 형제들이 연주비를 횡령했다고 고소하는 등 가족 간의 소송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법원은 제2심에서 윤정희 동생의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프랑스 법원은 딸 백진희씨에게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의 성년 후견인지위를 승인해주었답니다.
이렇게 윤정희가족 간에, 앓고있는 윤정희를 둘러싸고 후견인지위 변경소송이라는 골육상쟁이 벌어지면서, 윤정희를 사랑하는 많은 대중들의 가슴을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023년 1월 19일, 결국 알츠하이머병을 오랫동안 앓아왔던 윤정희는 프랑스 파리의 집에서 남편과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남편 백건우의 말에 따르면, 윤정희는 딸 백진희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참고로, 윤정희의 딸 백진희(46세)는 파리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아한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60,70년대를 풍미했던 1세대 트로이카 여배우로서 큰 인기와 명성을 떨쳤던 윤정희라는 큰 별이 지게되어, 정말 안타까움과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비록 윤정희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혼을 불사르면서 열연했던 주옥같은 그녀의 수많은 영화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았으니, 남겨진 그녀의 영화들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아야할 것 같습니다!
천상의 목소리로 아름답고 황홀한 세상을 노래한 가수로 70년대에 가장 큰 명성을 떨쳤던 남매듀엣 가수가 있었는데, 바로 '카펜터스'입니다.
카펜터스는 그야말로 70년대에 신이 빚은 가장 아름답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녔다는 찬사를 받았던 미국의 듀엣가수죠!
남매로 구성된 카펜터스에서 목소리를 담당했던 여동생 카렌 카펜터는 당대에 가장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가수로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카펜터즈는 특히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카펜터즈의 노래는 쉽고 아름다운 멜로디, 예쁜 노랫말과 더불어 카렌 카펜터의 감미롭고 우아한 보컬 때문이며, 이러한 아름답고 독특한 보컬은 카펜터스만의 전매특허였습니다.
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의 카펜터스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죠! 7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수많은 레코드점과 음악다방에서는 카펜터스의 노래가 매일같이 흘러나왔을 정도로 카펜터즈의 인기는 엄청났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오빠의 반주에 맞춰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여동생 카렌 카펜터의 노래는 그야말로 황홀경 그 자체였고, 천상의 목소리라고 할 정도로 너무도 아름다웠답니다.
오빠 리처드 카펜터와 여동생 캐런 카펜터로 구성된 2인조 남매듀오 ‘카펜터스’는 1969년도에 ‘Ticket to Ride’로 데뷔한 후,
'Close to you' ‘Top of the World’ ‘Yesterday Once More’ ‘Only Yesterday’ ‘I Need To Be In Love’ 등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발표하며, 미국과 유럽는 물론 한국 등 아시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답니다.
특히 카펜터즈가 73년도에 발표한 ‘Top of the World’는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르면서 카펜터즈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고, 이후 수많은 히트곡들을 발표한 카펜터스는 70년대 소프트록의 선두주자로 우뚝 솟아올랐지요.
남매듀오 카펜터스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여동생 카렌 카펜터인데, 그녀는 신이 빚은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고,
카렌 카펜터가 부드럽고 로멘틱한 목소리로 부른 수많은 노래들이 미국을 넘어 유럽과 아시아에서 엄청난 대히트를 쳤고, 카펜터스의 음반은 전세계적으로 1억장 이상 팔렸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신이 빚은 목소리’ ‘천상의 목소리’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목소리’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의 화신 카렌 카펜터는 노래뿐만 아니라, 역대 최고의 여성드러머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드럼연주 실력도 갖고있었답니다.
카펜터즈는 아바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그룹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천상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70년대를 주름잡았던 카펜터즈가 1983년 돌연 해체되었는데, 그 해체이유는 놀랍게도 여동생 카펜 카펜터가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여동생 카렌 카펜터의 사망원인, 거식증과 다이어트
83년도에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의 디바 카렌 카펜터가 세상을 떠났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카렌 카펜터가 34살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전세계의 수많은 팬들은 그녀의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했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사망원인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80년도에 토마스 제임스 버리스와 결혼까지 하면서 안락한 가정을 꾸렸던 카렌 카펜터는 왜 34살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게된 걸까요?
놀랍게도 카렌 카펜터의 목숨을 앗아간 건 그녀의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증이 그 근본원인이라고 합니다.
카렌 카펜터는 163cm의 키에 몸무게가 65kg 정도의 평균적인 몸매였는데, 그녀는 스스로 살이 많이 쪘다고 항상 자책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외관상으로 보았을 때에도 카렌 카펜터는 날씬하고 비율 좋은 몸매라고 느껴지는데요. 그러나, 카렌 카펜터 자신은 늘상 자신의 몸이 뚱뚱하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몸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답니다.
자신의 몸이 너무 살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몸매에 열등감을 갖고있었던 카렌 카펜터! 그것은 자신의 몸이 매우 뚱뚱하다는 강박증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카펜터즈 초창기에는 카렌 카펀터는 자신없는 몸을 가리기위해서 드럼 뒤에 숨어서 공연을 했습니다.
그러나 카펜터즈의 인기가 높아지자, 오빠 리처드의 간곡한 요구로 카렌 카펜터는 어쩔 수 없이 드럼을 버리고 노래를 불러야했습니다.
카펜터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공연을 많이 할수록 카렌 카펜터는 자신의 뚱뚱한 몸을 다이어트 해야한다는 강한 강박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카렌 카펜터는 다이어트를 시작했는데, 매일같이 하루 8잔의 물을 마시고 다른 영양소들은 식단에서 배제한 채, 오직 단백질위주의 식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혹독한 다이어트를 한 카렌 카펜터는 마침내 10kg을 감량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렌 카펜터의 다이어트 강박증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한번은 그녀의 팬이 그녀의 공연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는데, 그 사진속 카렌 카펜터의 모습은 누가보더라도 날씬한 몸이었지요.
그렇지만, 그 사진속 자신의 몸매를 본 카렌 카펜터는 너무 살쪄서 보기 역겹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살찐 모습을 지적해주지않은 오빠 리처드를 심하게 원망했다고 합니다.
오랜 다이어트를 해서 체중 10kg을 감량해서 날씬한 몸매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카렌 카펜터는 자신이 뚱뚱하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지못했고, 음식을 거부하는 거식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몸무게 65kg에서 10kg을 감량하고 55kg이 되어서 누가 보더라도 날씬한 몸매가 되었는데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강한 강박증을 갖고 있었고, 오랫동안 심한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1979년도가 되자, 카렌은 다이어트강박증이 더욱 심해졌고, 이때부터는 무작정 굶는 잘못된 다이어트를 시도했습니다.
결국 카렌 카펜터는 심한 다이어트로 인해 음식냄새만 맡아도 토할 정도로 극심한 음식거부증에 시달렸습니다.
이 시기에, 카렌 카펜터의 다이어트강박증을 더욱 심해져서 자신이 제일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정신착란증세까지 생겼으며, 이 때문에 그녀는 더욱 더 다이어트에 매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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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랫동안 극심한 다이어트를 시도한 카렌 카펜터는 제대로 먹지못해서 영양실조에 걸렸고,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80년대 이후 카렌 카펜터는 거식증과 심한 다이어트로 그녀의 몸무게는 40kg이 채 되지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렌 카펜터는 다이어트를 멈추지않았고 그녀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갔습니다.
◆ 카렌 카펜터의 결혼, 갑작스러운 죽음, 사망원인
카렌 카펜터의 건강을 염려한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서, 뭔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결혼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생기고 소중한 아이가 생기면, 자신의 몸매에 대한 나쁜 집착이나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요.
1980년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카렌 카펜터는 결혼을 결심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됩니다.
마침내, 카렌 카펜터는 1980년 8월, 토마스 제임스 버리스와 결혼식을 올리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두사람의 관계는 아이출산 문제로 2년 만에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카렌 카펜터는 결혼 후 아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녀의 남편 토마스 제임스는 이미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카렌 카펜터의 결혼목적 중 가장 우선순위는 토끼같은 소중한 아기를 갖는 것이었는데, 남편 토마스의 결혼목적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토마스는 이미 결혼전에 정관수술을 받은 상태라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고, 자신의 그러한 사실을 숨긴 채, 카렌 카펜터와 결혼한 것입니다.
남편 토마스의 결혼목적은 오직 톱스타인 카렌 카펜터가 벌어들인 돈과 재산뿐이었고, 사랑받는 아내이자 엄마가 되고자하는 카렌의 바램을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자신이 남편으로부터 사기결혼을 당했다고 생각한 카렌 카펜터는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고, 그녀는 또다시 심한 거식증과 섭식장애, 식욕부진에 빠지게 되었고, 그녀의 건강은 더욱 더 나빠졌습니다.
다시 거식증이 도진 카렌은 설사약과 구토약 등 각종 약물을 하루 100알까지 먹었다고 하며, 그녀의 몸무게는 걸어다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37kg의 깡마른 몸이 되었고, 그녀의 건강 또한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카렌 카펜터는 오빠와 가족, 동료들의 권유로 뉴욕의료센터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으면서 그녀의 상태가 다시 호전될 수 있었지요.
그녀는 뉴욕의료센터에 두달 간 입원치료를 받으면서 15kg 정도 몸무게를 불려서 몸무게가 49kg까지 늘어났고, 건강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1983년 2월 1일, 집으로 돌아온 카렌은 부모님, 오빠와 함께 자신의 이혼을 상의하였고, 아울러 카펜터스의 향후 활동계획을 논의했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변사람들은 카렌 카펜터가 병원치료를 받은 후 건강이 다시 회복되었다고 생각했고, 곧 그녀가 오빠와 함께 공연투어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감을 갖게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이렇게 카펜터스의 향후 활동계획을 짰을 정도로 활기를 되찾은 카렌 카펜터는 그 때로부터 이틀 후인 2월 3일날 자신의 집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카렌 카펜터는 가족들에 의해서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그녀는 병원에 이송된 지 20분만에 사망하고 말았답니다.
카렌 카펜터의 사망원인은 ‘거식증에 의한 급성 심부전’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이어트와 거식증으로 인한 극도의 저체중에 의한 건강악화와 급성 심부전 발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모든 장기들은 설사약과 구토약 등 각종 약물들의 잦은 복용으로 대부분 망가져있었다고 합니다.
즉, 카렌 카펜터는 너무 심한 다이어트로 인해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태에서, 10kg 이상 하락과 상승을 반복하는 등 극심한 체중변화를 심장이 이기지못해 급성 심부전이 발병해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아름답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카렌 카펜터는 거식증이라는 석연치않은 이유로,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아, 전세계의 수많은 팬들의 가슴을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꾀고리 같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여가수를 과연 또다시 만날 수 있을지 강한 의문이 들 뿐입니다!
사실, 카펜터즈가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70년 중후반 들어서서 템포가 빠른 디스코류의 댄스음악이 급부상하면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고,
서정적인 카펜터스의 음악은 더이상 세련되지않은 음악,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으로 여겨졌는데, 카렌 카펜터는 이런 트렌드의 변화조차 자신의 몸매가 뚱뚱하기 때문이라고 본인의 외모탓으로 여기면서, 자신을 심하게 학대한 것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 근본원인이 아닐까 판단됩니다.
카펜터즈는 역대 미국가수 중 최고의 가창력 보유자, 최고의 아름다운 목소리 보유자라는 평가는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있으며, 70년대 이후 최고의 노래실력을 지닌 넘버원의 듀엣가수라는 넘사벽이라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카렌 카펜터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기에 신이 심한 질투심을 느껴 그녀를 빨리 저세상으로 데려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여가수를 언제 또다시 볼 수 있을지, 하느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오늘은 70년대에 최고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 시대를 아름답게 수놓았던 최고의 보컬리스트 카렌 카펜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