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주먹 시라소니 이성순 대 김두한의 실제 싸움대결, 이성순의 싸움실력, 기술, 키

 

 

시라소니 이성순은 싸움의 천재다. 역대 우리나라에는 유명한 싸움꾼들이 많이 있다. 임꺽정, 장길산, 구마적, 신마적, 김후옥, 김두한 등 쟁쟁한 싸움꾼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 중에 가장 강한 싸움꾼은 과연 누구일까?

엄밀히 말해서 이들 싸움꾼들 가운데, 가장 쎈 사람은 바로 시라소니 이성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라소니는 싸움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가장 쎈 상대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가서 꺾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싸움이라는 것은 서로 붙어보아야 누가 더 쎈 지를 알 것이 아닌가!’ 이것이 시라소니 이성순의 싸움철학인 것이다.

 

장안에 떠도는 소문이나 자자한 명성 보다는 직접 일대일 맞짱을 떠서 승리하는 자가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것이 시라소니가 갖고있는 평소의 싸움철학인 것이다.

 

시라소니는 실전 싸움을 통해서 조선과 만주 중국등지에서 수많은 국제적 주먹들을 물리치고 동양최고의 주먹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싸움꾼이다.

 

그렇게 수많은 실전경험을 통해서 진정한 최강자, 진정한 싸움꾼이라는 명성을 획득하면서 조선 최고의 싸움꾼이라고 불리워졌던 시라소니가 경성 최고의 주먹 김두한과 맞대결을 펼칠만한 사건이 1946년도 서울에서 벌어졌는데,

과연 북한 최고의 싸움꾼 시라소니와 남한 최고의 주먹 김두한간의 싸움(대결)에서 최후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여기서는 1946년도 서울(경성)에서 벌어졌던 남북한의 최고의 싸움꾼이라고 불리워졌던 두사람, 시라소니와 김두한의 싸움(대결)사건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 시라소니와 김두한부하들의 충돌

 

시라소니는 1936년도에 함경도에서 당시 최고의 싸움꾼이라고 불리워졌던 박두성에 도전해 일대일 맞대결에서 그를 쓰러뜨리면서 북한 최고의 주먹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었다.

 

당시 약관 21세에 불과했던 신의주출신의 시라소니는 안주에서 놀러운 건달들로부터 박두성이가 북한지역 최고의 주먹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 다음날 혈혈단신으로 안주로 찾아가서 박두성을 직접 만나, 그와 일대일 맞대결을 펼친 끝에, 공중걸이 박치기 연속공격으로 박두성을 KO시키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이 평안도 최고의 주먹 박두성과의 대결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시라소니는 북한지역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이 때부터 시라소니의 싸움신화가 시작되었다.

 

그 후, 시라소니는 힘없는 조선사람을 괴롭히는 일본형사를 때려눕힌 사건 때문에, 일본당국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지고, 그는 일제의 체포망을 피해서 만주로 떠나면서 만주, 중국등지에서의 유량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시라소니는 만주로 떠난 이후 주먹황제로서의 더욱 더 큰 명성을 떨치게 되었는데, 만주와 중국등지에서 마오, 하야시, 구로야마, 카네미야 등 국제적으로 유명한 거물급주먹들을 모두 물리치면서 중국대륙을 평정하는 등 동양최고의 주먹으로서 더욱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렇게 만주와 중국대륙에서 동양최고의 주먹으로 명성을 떨쳐나갔던 시라소니 이성순이 어느날 김두한 부하들과 한바탕 큰싸움을 벌이게된 사건이 발생했다.

 

1936년경 수도 경성에서 구마적과 신마적 등 최고의 오야붕들과 일대일 맞대결을 벌여서 이들을 모두 물리치면서 명실공히 경성최고의 주먹으로 우뚝 올라서게된 김두한!

 

약관 19세의 나이에 구마적과 신마적등을 물리치고 경성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선 김두한이었지만, 김두한은 결코 서울지역에서의 최고오야붕으로서만 만족할 수 없었다.

경성최고의 오야붕으로 우뚝 올라선 김두한의 야심은 바로 한반도 전체를 통할하는 조선최고의 오야붕이 되는 것이었다.

 

김두한은 야망이 무척 강한 매우 야심만한 인물이었고, 그는 결코 경성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조선 전체를 지배해는 조선의 최고오야붕이 될 야망을 갖고있었다.

 

김두한은 서울 뿐만아니라, 남쪽끝 부산에서 시작해서 북쪽끝 신의주까지 점령해서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의 오야붕이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김두한은 때로는 자신이 직접으로 나서서 싸웠거나, 때로는 부하들을 시켜서 지방의 도시들을 하나둘씩 점령해나갔다.

 

김두한의 우미관부대는 영등포와 광화문, 서대문, 왕십리와 마포 등 서울의 대부분을 점령한 뒤,
그들은 수원과 인천, 대전, 대구, 광주, 목포 등 지방의 대도시들을 하나둘씩 점령해나가면서, 우미관의 주먹조직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나갔다.

 

그리고 남쪽 끝에 있는 부산에는 자신의 죽마고우였던 친구이자 자신의 오른팔인 정진상과 50명의 부하들을 보내어서 부산주먹들을 모조리 무릎꿇리면서 마침내 부산지역마저 점령해버렸다.

 

그리고 김두한의 우미관조직은 북쪽의 개성과 원산을 점령한 후, 평양에도 자신의 부하들을 보내어서 이화룡과 담판을 벌이면서 이화룡으로부터 복속약속을 받아냈다.

당시 평양의 오야붕으로 있던 이화룡은 김두한의 부하들이 쳐들어와서 복속을 강요하자, 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평양의 이화룡의 입장에서는 김두한의 우미관조직에 저항하는 것보다는 그들과 적당히 손을 잡고, 평소에는 평양에서 얼마든지 독자적인 주먹활동을 할 수 있고,

단지 중대한 일이 발생할 경우에만 우미관과 협력해야한다는 김두한조직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해도 전혀 손해볼 것이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이화룡은 큰 무리없이 기꺼히 김두한의 복속요구에 순순히 응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조선의 대부분의 땅을 평정해나갔던 김두한의 우미관조직에게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지역은 바로 신의주였다.

 

때는 1940년도로 조선의 대부분 지역을 평정했던 김두한은 자신의 부하 40여명을 신의주로 급파했다.

 

신의주로 쳐들어간 40여명의 김두한부하들은 당시 신의주의 오야붕으로 있던 정팔을 만나서 담판을 지었다.

김두한의 부하들은 정팔에게 속히 우미관조직에 복속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정팔은 시간을 끌면서 속시원한 답변을 하지않은 채, 확답을 하지않았다.

 

정팔은 너무 갑작스러운 요구라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대해 김두한부하들은 일주일후에 우미관으로 결정사항을 통보해달라고 일주일간의 시간을 주면서 우미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신의주의 정팔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확답을 하지않으면서 계속 시간을 끌어나갔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도록 신의주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김두한은 자신의 왼팔이자 대단한 싸움꾼인 김경수와 털빠진 개고기 등 자신의 부하 40여명을 다시 신의주로 급파해서 정팔일행을 단단히 손보도록 했다.

 

정팔이 이토록 시간을 끌었던 이유는 바로 만주 봉천에 가있던 시라소니를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이당시 신의주의 두목으로 행세하고 있는 정팔은 단지 바지두목일 뿐이었고, 신의주의 진짜두목은 만주에 가있는 시라소니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스스로 김두한의 40명의 부하들을 상대하기가 벅차다고 판단한 정팔은 만주에 가있던 신의주의 진정한 오야붕인 시라소니에게 지원요청을 했던 것이다.

 

정팔의 지원요청을 들은 시라소니는 단번에 신의주로 돌아왔고, 정팔 사무실의 뒷방에 기거하면서 김두한 부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0년도 9월달의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늦여름의 저녘무렵에 정팔의 사무실로 건장한 청년들 40명이 들이닥쳤다.

바로 김두한의 부하들로서 김두한조직에서 김두한을 제외하고는 싸움으로 2인자라고 하면 서러워할 정도로 무서운 주먹을 휘둘러온 김경수와 털빠진 개고기, 그리고 김두한의 부하들 40명이 정팔사무실로 박차고 들어왔다.

 

이들은 정팔에게 ‘더이상 시간을 질질 끌지말고 김두한 우미관조직의 휘하로 들어올 것을 약속하라’고 말하면서 만일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않는다면, 신의주를 완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고 협박했다.

 

이것은 사실상 두목 정팔을 비롯한 신의주의 모든 주먹들이 김두한의 부하로 들어오라는 것인데, 정팔로서는 자존심상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정팔사무실 뒷방에 앉아서 이 이야기를 듣고있던 시라소니가 문을 박차고 나왔고, 그는 김두한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시라소니는 ‘내레 신의주 토박이 시라소니야, 너희들 어데서 굴러먹던 아새끼들이네! 너희들이 대체 누구간데 갑자기 신의주로 쳐들어와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기야?’ ‘더이상 신의주에서 말썽부리지말고 당장 꺼지라우! 너희들이 순순히 돌아간다면 내레 이번 행패는 없던 일로 할끼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두한의 오른팔인 김경수는 ‘이게 어디서 굴러먹던 말뼉다귀야! 조선천지를 전부 점령한 김두한의 우미관조직에 당장 들어오라우! 만일 우리요구를 듣지않는다면, 너희들 모조리 두들겨패서 완전 병신을 만들어줄꺼야!’라고 맞받아쳤다.

 

더 이상 말로서는 통하지않는다고 판단한 시라소니일행과 김두한부하들은 사무실 밖으로 나와서 결국 패싸움을 벌이게됐다.

 

사무실 밖에서 시라소니일행과 김두한부하 수십명이 서로 뒤엉켜서 한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에서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그러자, 갑자기 시라소니가 앞으로 나서면서 김경수와 털빠진 개고기에게 ‘너희들이 김두한조직의 대표자들인 것 같은데, 더 이상 부하들을 희생시키지말고 너희들이 직접 나와 맞승부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시라소니의 제안대로, 시라소니와 김두한이 파견한 돌격대의 대장격인 김병수와 털빠진 개고기가 대결을 벌이기로 했다.

 

김두하조직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정도로 주먹이 쎄다고 정평이 난 김경수가 먼저 시라소니에게 그의 오른쪽 강편치를 날렸다.

 

시라소니는 김경수의 강펀치를 고개를 숙여서 피한 후, 정광석화같은 박치기를 날려서 들이받아버렸다.

시라소니의 박치기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김경수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대로 뒤로 자빠져버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털빠진 개고기가 개거품을 물고 달려들면서 시라소니에게 강력한 왼주먹을 날렸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털빠진 개고기의 주먹을 살짝 피한 시라소니는 털빠진 개고기의 턱에 강력한 오른주먹을 날렸고, 주먹을 맞고 고개를 숙인 털빠진 개고기의 복부를 그대로 오른쪽무릎을 찍었는데, 그는 ‘억’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배를 부여잡고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조금 전에 시라소니의 박치기를 맞고 쓰러졌던 김경수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나서 공격자세를 취했다.

김경수는 털빠진 개고기를 쓰러뜨리고 한숨을 몰아쉬고 있던 시라소니에게 강력한 왼손주먹을 날렸고, 이를 보지못했던 시라소니가 그의 펀치를 정통으로 맞고 뒤로 쓰러졌다.

 

그런데, 뒤로 쓰러진 시라소니가 쓰러진 상태에서 강력한 박치기가 가해왔다.

시라소니는 김경수의 왼주먹을 턱에 얻어맞고 그 충격으로 뒤로 쓰러졌는데, 쓰러지는 반동을 이용해서 시라소니는 용수철처럼 땅으로부터 튕겨져나오면서 그대로 김경수의 이마를 들이받아버렸다.

 

‘쿵’하는 마찰음소리와 함께 시라소니는 몸전체를 수직으로 날려서 그대로 김경수의 이마를 들이받았고, 시라소니는 쓰러지려는 김경수의 복부를 다시한번 무릎찍기로 그대로 찍어버렸다.

 

시라소니의 정광석화와도 같은 박치기에 이른 무릎찍기에 그대로 당한 김경수를 그대로 다시한번 쓰러졌고,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김경수와 털빠진 개고기는 김두하조직에서 김두한 다음으로 주먹이 쎄다고 알려진 김두한주먹조직을 대표하는 주먹들인데도 불구하고,

시라소니와의 맞대결에서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시라소니의 박치기와 무릎찍기 기술에 걸려서 싸움이 시작된 지, 10분 만에 그대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시라소니가 돌격대장 두명을 완전히 재압해버리자, 나머지 김두한부하들은 시라소니의 실력과 위세에 눌려서 더 이상 공격을 못하고 그만 기가 꺽이고 말았다.

 

이때에 정팔의 부하들 30여명이 김두한부하들에게 돌진했고, 이로써 정팔부하들과 김두한부하들 간에 치고박는 피터지는 전투가 벌어졌다.

사기가 크게 꺾인 김두한부하들을 패싸움에서 점점 수세에 몰리면서 후퇴하더니, 전의를 완전 상실한 체, 그대로 모두 달아나버렸다.

 

1940년도에 벌어진 정팔조직과 김두한조직의 한바탕 패싸움에서, 시라소니의 신출귀몰한 실력 덕분에, 정팔조직이 완벽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한반도의 대부분의 지역을 재패한 김두한은 마지막 남은 신의주를 점령하기 위해서 자신의 선별된 부하 40명을 신의주로 파견해서 패싸움을 벌였지만,

시라소니의 두둑한 배짱과 신출귀몰한 싸움실력에 완전히 기가 죽은 그의 부하들은 수십명의 부상자만 발생시킨 체, 전원이 도망치듯이 서울로 쫒겨오고야 말았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김두한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서 노발대발했다.

지방으로 진출했던 김두한부대는 이때까지 단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이 승승장구해왔다.

 

서울을 비롯해 수원, 인천, 대전, 대구, 목포, 광주, 부산지역까지 완전 점령하였고, 그뿐만 아니라, 북쪽의 개성과 원산, 평양까지 점령하면서 패배를 전혀 몰랐던 김두한부대는 완전히 연전연승해나가는 무적함대 그 자체였다.

 

그렇게 완전 승승장구하면서 한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해왔던 김두한부대가 저 국경의 조끄마한 도시 신의주에서 김경수와 털빠진 개고기라는 두 거물급 주먹들이 시라소니라고 하는 이상한 놈에게 덜미가 잡혀서 완전 개박살나고 말았다니, 김두한으로서는 참으로 믿기가 힘든 사실이 아닐 수가 없었다.

 

김경수 등 김두한부하들은 김두한에게 ‘그 시라소니라고 하는 놈은 어찌나 빠르고 센지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싸운 놈 중에서 이렇게까지 쎈 놈은 정말 처음 봅니다.’라고 말했다.

 

김두한의 경호책임자로 임명될 정도로 김두한조직에서 싸움실력을 인정받았던 김경수가 시라소니와의 맞대결에서 제대로된 공격도 해보지못하고 보기좋게 KO당하고 말았으니, 시라소니의 싸움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두한조직의 사실상 2인자였던 김병수와 돌격대장인 털빠진 개고기를 시라소니 혼자서 상대해서 그들 모두를 완벽하게 KO시켰다는 것 자체는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조선천하의 주먹계를 거의 대부분 점령하다시피한 김두한조직에게 다른 지역의 주먹패들은 대부분 복종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시라소니 만큼은 그들의 침투를 결코 용납하지 않고, 맞서서 싸웠다는 것 자체가 시라소니가 얼마나 배짱이 쎄고, 강한 싸움꾼인지를 증명해주는 좋은 실례라고 하겠다.

 

여기서 참고로 시라소니의 키는 176cm이고, 김두한의 키도 176cm이어서 두사람이 키가 똑같다.

나이는 시라소니가 1916년생으로 1918년생인 김두한보다 2살이 더 많다. 1940년도 당시 김두한은 23인데 반해, 시라소니의 나이는 25살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김두한은 더 이상 부하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시라소니라는 놈을 직접 손보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신의주를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김두한은 자동차 스프링을 갈아서 엄청 날카로운 칼을 만들었고, 그 칼을 가슴속에 넣어둔 체, 부하 수십명을 대동하고 열차를 타고서 시라소니를 요절내기 위해 직접 신의주로 찾아갔다.

 

김두한일행이 신의주에 도착해 시라소니의 행적을 알아보았지만, 그 당시 시라소니는 이미 신의주를 떠났고, 만주 봉천으로 가있었다.

시라소니가 만주 봉천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김두한일행은 다시 열차를 타고서 봉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만주 봉천역에 도착한 김두한일행에게 갑자기 일본경찰들이 들이닥쳐 불심검문을 실시했고,

그 불신검문에서 김두한의 가슴속에 숨겨져있던 칼이 발각되었고, 그 때문에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만나보지도 못한 체, 그대로 경성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경성에서 일본경찰로부터 요주의인물로 낙인찍힌 김두한은 여행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였고, 열차에서 일본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 김두한은 일본경찰에 의해서 곧바로 경성으로 압송되고 말았다.

 

일본경찰의 개입으로 인해서, 남한지역의 최고의 싸움꾼으로 군림했던 김두한 대 북한지역의 최고의 싸움꾼인 시라소니간의 조선 최고의 주먹자리를 놓고 일대일 맞승부를 벌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만일 이 때에 김두한이 일본경찰의 불신검문에 걸리지않고 봉천으로 시라소니를 찾아가서 시라소니와 실제로 맞대결을 벌였다면, 과연 누가 이길 수 있었을까?

 

이 당시 김두한이 경찰의 불신검문에만 걸리지 않았다면, 조선최고의 주먹자리를 놓고 만주에서 김두한과 시라소니간의 역사적인 맞대결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두사람의 대결이 일본경찰의 개입으로 인해 끝내 이뤄지지 못한 점이 무척 아쉽게 생각된다.

 

그런데, 김두한 대 시라소니의 대결은 이로부터 6년이 지난 1946년도에 서울 한복판인 우미관에서 또다시 벌어지게된다.

 

1946년 2월경, 서울 종로 우미관에 있는 종로회관에서 시라소니와 김두한은 마치 운명처럼 서로 조우하게 되었고, 또다시 두사람 간의 운명을 건 맞대결이 벌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펼쳐지게된다.

 

◆ 서울 경성에서의 시라소니 대 김두한의 대결

 

신의주에서 활동하던 정팔이 공산당의 탄압을 이기지못하고 동생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내려왔고, 정팔은 명동의 중앙극장을 무대로 해서 조직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런데, 명동의 또다른 세력인 이화룡일파에게서 힘과 위세에서 밀리면서 그 존재감이 쇠락해지게된 정팔의 중앙극장파는 자신들의 세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신의주에 있는 시라소니를 모셔올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황병관, 맨발의 대장 같은 거물급주먹들이 많이 포진하고있는 명동파가 정팔의 중앙극장파를 파워면에서 압도해나가자, 수세에 몰리게된 중앙극장파의 정팔은 힘의 균형을 이루기위해서 신의주로 특사를 급파해서 시라소니를 급하게 모셔오게 된 것이다.

 

경성으로 온 시라소니는 오자마자 ‘디금 서울에서 누가 제일 쎄디?’라고 일갈하면서 서울의 주먹세계의 일인자에 대한 자신의 지대한 관심을 피력했다.

 

또한 시라소니는 명동에서 활개치고 있던 이화룡파의 기를 꺾어놓기 위해서 일부러 이화룡의 본거지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당시 2인자 행세를 하고있던 맨발의 대장 이영순에게 일대일 맞대결을 신청했다.

 

맨발의 대장 이영순은 키가 190cm나 되고 발의 크기가 37cm나 되는 그야말로 엄청난 괴력을 갖춘 거인이었다.

싸움에서 발차기가 주특기인 맨발의 대장은 한 싸움에서 자신의 오른발로 상대방을 걷어찼고, 그 상대방이 쓰러지면서 뇌진탕을 일으켜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의 발차기 한방에 상대방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한 맨발의 대장은 그 이후부터는 싸울 때는 꼭 신발을 벗고 싸우는 버릇이 생겼다. 그만큼 맨발의 대장의 발차기킥의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이화룡파의 본거지를 찾아간 시라소니는 대뜸 맨발의 대장에게 자신과 일대일 맞대결을 벌이자고 제안을 했다.

맨발의 대장이 흔쾌히 응하지않고 조금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자, 시라소니는 그에게 겁쟁이라고 놀리면서 약을 올렸다.

 

그러자, 오기가 발동한 맨발의 대장은 시라소니의 맞대결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두사람은 시공관 뒷골목에서 일대일 맞대결을 벌이게됐다.

 

서로 10m를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시라소니 대 맨발의 대장, 그러자 시라소니는 ‘자 간다!’라고 외치면서 동시에 4m를 달려나가면서 그대로 공중걸이 박치기로 맨발의 대장의 이마에 들이받아버렸다.

‘딱’ 하는 둔탁음과 함께 맨발의 대장의 ‘악!’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쓰러지는 맨발의 대장의 가슴팍에 또다시 시라소니의 오른발 무릎찍기가 작렬했다.

 

시라소니는 불과 2초 사이에 공중걸이 박치기와 무릎찍기의 공격을 동시에 가했고, 이를 얻어맞은 맨발의 대장은 제대로된 공격 한번 못해보고 그대로 대자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오른발킥 한방으로 상대방을 뇌진탕을 일으키게 한다는 맨발의 대장이 자신의 주특기인 킥을 전혀 사용해보지도 못한 체, 시라소니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박치기와 무릎찍기 연속공격을 받고 그냥 대자로 뻗어버리는 개망신을 당하고만 것이다.

 

뻗어버린 맨발의 대장은 한참동안 일어나지 못한 체 혼절해 있었는데, 비로서 10분이 지난 후에 겨우 일어난 맨발의 대장에게 시라소니가 다가가서 ‘영순이, 고마워, 덕분에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내레 몸 한번 잘 풀었어, 내레 오늘 술한잔 사갔어!’라고 말했다.

 

시라소니가 이화룡파의 실력자 맨발의 대장을 KO시키면서, 명동에서 이화룡파와 정팔파간의 세력균형이 이뤄지게 되었고, 이화룡파는 더이상 정팔파를 무시할 수 없게되었다. 극적으로 이화룡파와 정팔파간의 화해모드가 형성되었다.

 

1946년의 어느날, 시라소니는 신의주출신의 고향친구이자 역도선수인 이영환과 함께 술을 마시러 우미관에 있는 종로회관으로 들어갔다.

시라소니가 서울에 온 후, 김두한의 아성이자 아지트인 우미관입구에 있는 종로회관을 방문한 것인데, 이것은 어찌보면 시라소니가 김두한의 나와바리를 침범한 것이나 다름 없다.

 

이 당시는 주먹조직들간의 나와바리가 형성되어 있었고, 상대방의 나와바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지역 주먹조직의 사전허락을 받아야하는 시대였다.

시라소니가 사전허락도 전혀 없이 김두한의 본거지인 종로회관으로 들어간 것은 어찌보면 김두한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시라소니가 다른 장소도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김두한의 아지트인 종로회관을 찾아간 것을 두고, 시라소니의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시라소니는 자신보다 쎄다는 사람이 있으면, 기어코 그를 찾아가 도전해서 반드시 꺾어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다!

싸움에 있어서 자존심이 엄청 쎈 시라소니는 자신보다 더 강한 주먹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스스로 그 강자를 찾아가 꺾어놓음으로써 스스로 일인지하(一人地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싸움꾼으로 남길 원했다.

 

이 당시 시라소니가 우미관의 종로회관에 들어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쫙 퍼졌고, 그 소식은 꼬붕들에 의해서 김두한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 당시 김두한은 서대문에서 지인들과 만나 술 한잔 걸치고난 후, 다시 우미관본거지로 돌아왔을 때였다.

우미관극장으로 들어간 김두한은 동생들에게 ‘어이, 오늘 종로회관에서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라고 말했고, 동생들은 ‘멀리 갈 것 없이 그냥 이곳에서 막걸리나 한잔 마시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두한은 다시 ‘아냐, 오늘을 그냥 종로회관에 가서 술마시고 싶어!’라고 동생들을 종용했고, 결국 김두한을 위시로 해서 신영균, 문영철, 김무옥, 김삼수, 홍만길, 종로꼬마, 털빠진 개고기, 김관철, 김경수 등 그의 동생들 10여명과 함께 종로회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김두한일행이 종로회관으로 들어섰고, 김두한과 잘 알고지내던 역도선수 이영환은 김두한을 보고 인사를 나눴다.

두사람이 인사를 나누자, 이영환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시라소니가 김두한일행쪽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김두한의 왼팔 김경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김두한에게 ‘형님, 저놈이 바로 시라소니예요!’라고 말했다.

과거 6년전, 김두한대원들을 이끌고 신의주까지 가서 직접 싸웠던 시라소니의 얼굴을 톡톡히 기억하고 있던 김경수가 그곳에 와있던 시라소니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해낸 것이다.

 

그러자,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노려보면서 ‘네놈이 시라소니야, 너 이새끼, 일전에 신의주로 내려간 내 동생들을 때리고 박살냈다며!

네놈이 감히 호랑이굴로 제발로 쳐들어와, 너 오늘 정말 잘 만났다!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이 될 줄 그리 알아!’라고 일갈했다.

 

사실 김두한은 이날 꼬붕의 보고를 통해 시라소니가 종로회관으로 들어온 것을 이미 알고있었고, 그래서 싸움 잘하는 중간보스급 동생 10명을 거느리고 종로회관에 들어온 것이다.

김두한은 시라소니에게 일갈을 퍼부어서 과거에 자신의 동생들을 두들겨팼던 그를 혼내주고 손을 봐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시라소니가 ‘네가 김두한이냐!’라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시라소니는 김두한에게 ‘어라, 이게 서울인사법이라고 이거지, 내레 경성의 최고오야붕이 김두한이라는 얘긴 많이 들었디, 그런데, 님자가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 욕지거리를 하다니, 처음 신고식치고는 이거 좀 심하구만!’

 

내레 일전에 서울의 똘마니들이 신의주에 와서 하도 설치길래, 손 좀 봐준 것 뿐인데, 그것이 못마땅하다면 이거 잘 됐구먼,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 누가 더 쎈디 밖으로 나가서 한번 붙어보자우!’라고 말하면서 김두한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라소니가 이렇게 도발적인 말을 하자, 김두한부하들이 모두 일어났다. 그리고 그 부하들 중에서 김두한의 경호를 맡고있던 김관철이 시라소니를 향해 돌진했다.

 

덩치가 남산만 한 김관철은 시라소니를 향해 달려갔고, 솥뚜껑만한 오른쪽주먹을 시라소니의 턱을 향해 날렸다.

그러자, ‘퍽’하는 둔탁음이 울렸고, 그 이어 ‘윽!’하는 소리와 함께 김관철의 거구의 몸이 그래도 거꾸러지고 말았다.

 

분명히 주먹을 내뻗은 사람은 김관철인데, 오히려 대자로 뻗어버린 사람은 시라소니가 아닌 김관철이었다.

 

시라소니는 김관철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오는 김관철을 향해 공중으로 치솟으면서 박치기를 가했고, 박치기를 맞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김관철의 옆구리에 그대로 무릎치기로 찍어버린 것이다.

 

시라소니의 연속공격을 받은 김관철은 고목나무 쓰러지듯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시라소니의 공격에 키 185cm에 몸무게 120kg이나 되는 거구의 김관철이 쓰러지자, 김두한과 그의 동생들은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10여명의 김두한의 동생들은 시라소니를 한꺼번에 공격하기 위해 김두한의 그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시라소니와 김두한일행 간의 누가 먼저 공격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태가 잠시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김두한으로부터 뜻밖의 다음과 같은 말이 터져나왔다. 김두한은 갑자기 껄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시라소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시라소니란 사람이 우리구역에 들어왔다기에 어떤 사람인가 한번 보고싶어서 이렇게 나왔던 겁니다’라고 말하면서,

김두한은 ‘안 그래도 시끄러운 세상인데, 우리까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지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명동의 이화룡과도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고있습니다. 저보다 연배이시니 앞으로 제가 형님으로 대우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시라소니에게 화해를 권했고, 시라소니도 흔쾌히 김두한의 화해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두사람은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두한과 시라소니는 그 날 종로회관에서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시면서 함께 밤을 지세웠다.

 

이렇게 시라소니와의 대결을 펼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김두한은 싸움 대신 화해하는 쪽을 택했다. 김두한은 싸움도 잘하지만, 싸움 못지않게 두뇌회전과 상황판단이 무척 빠른 사람이다.

 

김두한은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활동하는 시라소니와 싸워서 이겨야 본전이고, 만일 진다면 오야붕자리를 포함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마는 상황에서,

그를 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적당히 구슬려서 그와 협력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욱 이로울 것이라는 판단을 했고, 그 결과 김두한은 시라소니와의 화해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 때의 상황을 놓고 많은 호사가들은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비굴하게도 무릎을 꿇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자신의 경호원 김관철을 단 두방의 공격으로 KO시키는 장면을 본 후,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겁을 먹고 시라소니와의 맛대결을 회피한 것이라고 평가를 한다.

 

시라소니가 김두한의 나와바리 한복판에 들어가서 10명이 넘는 김두한일행과 당당하게 맞서면서 김두한으로 하여금 싸움을 회피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시라소니의 두둑한 배짱과 용력만큼은 정말 대단하다고 본다.

 

아뭏튼 시라소니가 분명히 김두한에게 도전을 했고, 이 도전을 김두한이 회피했기 때문에, 비록 두사람이 싸우지 않았더라도, 사실상 승부는 낫다고 보며, 분명히 시라소니의 판정승이라고 본다.

 

만일 이때에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화해를 청하지않고 대결을 펼쳤다면, 과연 누가 이겼을 것인가?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을 수 있지만, 만일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일대일 맞대결을 펼쳤다면, 시라소니가 김두한을 KO시켰을 것이라고 본다.

 

김두한은 ‘잇뽕’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주먹 한방의 위력이 매우 대단한 사람이며, 발차기도 잘하는 싸움의 달인이다.

그런데, 김두한은 주로 일대일싸움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시라소니는 천진에서 카네미야일당과 40 대 1의 대결을 벌여서 이겼던 사람이다.

 

김두한이 비록 일대일싸움을 잘하는 싸움의 달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전적에서 보듯이 시라소니는 수십명과 대결을 펼쳐서 모두 물리쳤을 정도로 싸움기술에 있어서는 신과도 같은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고 엄청 빠른 사람이다.

 

만일 시라소니와 김두한이 일대일 맞대결을 펼쳤다면, 시라소니가 엄청 빠른 스피드를 이용

해서 쏜살같이 달려들어 공중걸이 박치기로 김두한을 KO시킬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시라소니의 정광석화와도 같은 박치기공격에는 김두한의 강한 주먹도 무용지물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몸전체의 체중을 실어서 날아가서 받아버리는 공중걸이 박치기는 주먹 위력의 3배~5배 이상의 위력을 지니고 있으며, 김두한이 내뻗는 주먹보다 시라소니의 박치기의 위력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만일 두사람이 실제 대결을 벌인다면 여지없이 시라소니의 KO승으로 끝이 난다고 본다.

 

그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두뇌회전이 빠른 김두한이 자신에게 도전의사를 피력한 시라소니에게 적당히 화해를 요청해서 그 위기를 피해나갔다고 본다.

 

한국 최고의 주먹황제라고 불리워졌던 김두한과 동양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명성을 떨쳤던 시라소니간의 맞대결이 벌어질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김두한의 석연치않은 기권으로 두사람간의 역사적인 맞대결이 이뤄지지않음으로써 진정한 한국 최고의 주먹을 가려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척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만일 이 때에 김두한과 시라소니간의 일대일 맞대결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정말 승자가 누가 되었을지 무척 궁금하기만할 뿐이다.

 

 

 

반응형
Posted by 반헬싱
,

후배 강제 성추행한 국가대표 피겨선수는 누구, 이해인의 해명, 자격정지 징계

 

5월 15~28일 이탈리아로 전지훈련을 떠난 우리 피겨대표팀 선수들 간에 성추행논란이 발생했습니다.

 

해외 전지훈련 동안 합숙소에서 술을 마시고 미성년자 후배에게 강제성추행한 일이 발각되어서 여자피겨 국가대표선수 두명이 자격정지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여자 피겨 국가대표선수들은 이탈리아 바레세에서 전지훈련을 진행하는 동안 숙소에서 술을 먹은 사실이 들어나면서 즉각 대한빙상경기연맹 스포츠공정위원회에 회부되었지요.

 

음주는 경기력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훈련기간 동안 음주는 금지되는 행위이지요.

 

그런데, 스포츠공정위원회는 이들에 대해 조사하는 도중, 성적 가해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스포츠공정위원회는 지난 19일 회의를 열고, 성적 추행을 일삼은 두 여자 피겨대표선수들에게 중징계를 내렸는데요.

 

그 때 스포츠공정위원회로부터 중징계를 받은 선수 중 한명이 바로 이해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해인 스스로 자신의 SNS에 이같은 사실을 시인하는 글을 올렸기 때문이지요.

 

이 당시 이해인은 강제추행 혐의로 스포츠공정위원회로부터 3년의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고, 다른 또한명의 여자 피겨선수는 1년의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해인선수는 자신의 성추행혐의에 대해 전면 부정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해인은 ‘음주를 한 행위는 인정하지만, 강제추행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습니다.

 

이해인은 ‘강제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후배 A씨와는 연인사이였다’고 밝혔습니다.

 

이해인은 ‘전지훈련 도중 술을 마신 것은 명백한 저의 잘못이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남자 후배에 대한 강제 성추행혐의에 대해서는 강력 부인했습니다.

 

이해인은 ‘후배 A씨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던 연인관계로 A씨와 애칭을 담아 주고받은 메시지도 여러개 간직하고 있다. 그 일을 성추행이라고 보도하는 기사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아프고 괴로웠다’라고 말했습니다.

반응형

‘A씨와은 미성년자일 때부터 교제를 시작했기 때문에 경각심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A씨에 대해 성적 가해행위나 성추행은 전혀 없었고,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이해인은 ‘후배 A씨와는 연인관계였으나, 이러한 사실을 대한빙상연맹에 알리지않았고, 연맹은 두사람이 연인관계라는 사실을 알지못했기 때문에 사실관계를 오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해인은 ‘다가오는 밀라노 올림픽이 정말 너무나도 간절하게 바라던 경기였는데, 이번 자격정지 처분으로 사실상 도전해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이 많이 슬프고 절망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해인은 자신의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서 ‘후배 A씨와 연인관계에서 있었던 가벼운 스킨쉽이었다. 이 행위는 연인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장난이나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충분히 다시 소명하고 잘못된 음주부분에 대해서는 선처를 구할 생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빙상연맹은 자체조사를 벌여서 이해인선수에게는 3년의 자격정지 징계를 내렸고, 사진을 촬영한 혐의를 받고있는 여자선수 B씨에게는 1년의 자격정지 징계를 내렸습니다.

또한 미성년자 선수 A씨에게는 이성선수 숙소를 방문한 것은 강화훈련 규정위반이라는 판단아래 견책처분을 내렸답니다.

 

이렇게 후배 선수에게 성추행과 불법 촬영 혐의로 중징계를 받았던 이해인과 또다른 여자선수는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에 재심의를 신청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강제추행 혐의로 중징계를 받은 이해인은 국제빙상경기연맹의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싱글에서 은메달을 따낸 우리나라 피겨의 간판급 선수입니다.

 

그렇지만, 이해인선수는 이번에 후배선수에 대한 강제추행 혐의로 인해서 3년의 자격정지 징계를 받아서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대회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반헬싱
,

60년대 트로이카여배우 남정임의 영화와 결혼, 남편, 사망원인

카테고리 없음 2024. 6. 26. 10:36

60년대 트로이카여배우 남정임의 영화와 남편, 사망원인

 

남정임 1945년 7월 21일 ~ 1992년 9월 2일. 48세에 유방암으로 사망

 

오늘은 1960년대에 청춘배우로 큰 인기를 끌었던 남정임에 대해 소개해볼까 합니다.

우리나라 영화의 가장 큰 중흥기는 60년대이지요. 이 시기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가장 크게 번성했던 시기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60년대에는 대단한 스타들이 많이 배출되었답니다.

 

남성배우들은 신성일을 비롯해 신영균, 남궁원, 최무룡 등 거물급배우들이 이 시기에 활동하면서, 우리영화계의 중흥을 이끌어나가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여배우로는 최은희, 김지미 같은 고전미인상을 가진 여배우들이 60년대에 주연배우로 활동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고전미인상과는 다른 신선감있고 세련된 여배우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답니다.

60년대에 새롭게 우리영화계에 세명의 여배우들이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요.

 

바로 60년대 트로이카 또는 1세대 트로이카라고 불리우는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 3인방들이랍니다.

 

과거의 인기여배우 최은희, 김지미가 우리한국의 전통적인 미인상이었다고 한다면,

이들 트로이카 3인방은 좀 더 개성있고 세련된 미모를 발산하는 미녀여배우들로서, 60년대 우리영화계에 신선감을 안겨다주면서, 우리영화산업의 번영을 이끌어나갔던 주역들이랍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세련된 미모와 청순한 미모로 남성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여배우가 있었는데, 바로 60년대 청순미의 아이콘인 남정임이랍니다.

 

1세대 트로이카 여배우 삼인방은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미녀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1세대 트로이카 여배우중에서 문희를 최고의 미인으로 꼽는 경향이 있지요.

 

그렇지만, 가장 개성있는 연기력을 선보이면서, 가장 청순한 미모를 발산했던 남정임도 출중한 미모를 갖고있었고, 그 당시 대중적으로 커다란 인기를

끌었던 게 사실이랍니다.

 

문희와 윤정희는 보편적인 미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정임은 두 미녀여배우와는 다른 신선함과 세련미를 갖추고 있었고, 트로이카 3인방 중에서 가장 청순한 미녀로 평가되면서, 유독 젊은이들의 큰 사랑을 받아왔던 여배우입니다.

 

그러니까, 트로이카 세명의 여배우들이 모두 예쁜 건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남정임이 가장 세련된 미모를 갖추고 있었고, 가장 개성있는 캐릭터를 갖고 있었기에 그녀는 유독 젊은남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60년대에 가장 청순한 미모를 발산하며 수많은 청춘영화들에 출연해서, 높은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남정임은 60~70년대에 가장 개성있는 여배우, 가장 청순한 미녀여배우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의 청순미인은 이영애이고, 2010년대의 청순미인은 정유미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청순미인의 시발점은 바로 60, 70년대를 풍미했던 남정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녀는 청순미녀의 레전드급이랍니다.

 

남정임은 60, 70년대에 수많은 청춘영화에 출연해서 ‘청춘물의 아이콘’으로 불리면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던 당대의 톱스타였답니다

.

문희가 슬픈 멜로영화에 주로 출연하면서, 슬프고 비련한 여주인공 역할을 많이 했던 반면,

남정임은 청춘영화에 출연해서 명랑하고 발랄한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으며, 청춘스타의 아이콘같은 존재감으로 각광을 받았답니다.

 

◆ 남정임의 영화들

 

남정임은 1966년도에 영화 ‘유정’으로 데뷔했고, 그 후 ‘학사기생’ ‘망향’ ‘빙점’ ‘어느 여배우의 고백’ ‘풍운의 검객’ ‘초연’ ‘일월’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60, 70년대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여배우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특히 남정임은 로맨스멜로영화에도 많이 출연했지만, 그 시대에 실험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검객무협영화와 형사액션영화에도 많이 출연해서, 다양한 연기활동을 펼침으로써, 많은 남성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답니다.

 

67년도의 ‘풍운의 검객’ 69년도의 ‘십오야’와 70년대의 ‘팔도검객’ 등의 영화는 흥미와 감동을 동시에 안겨주는 박진감 넘치는 검객무협영화로서, 남정임은 이런 검객뮤협영화에 출연하여 멋진 검객여전사의 색다른 매력을 선보여서 특히 젊은 남성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60년대 당시에 홍콩에서는 검객무협영화가 많이 유행했었는데, 홍콩무협영화에 영향을 받았던 우리나라 영화계에도 한국토종의 검객무협영화들이 많이 제작했었고,

박노식과 남정임이 주연으로 많이 출연하면서, 한국무협영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형성되기도 했답니다.

 

이러한 검객무협영화들은 단순히 흥미만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가슴에 찡하게 만드는 감동을 함께 선사해주는 대단한 명작품들로서,

개성있는 캐릭터가 강한 남정임이 열연함으로써,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었답니다.

 

남정임이 이러한 검객무협영화에 신비로운 검술을 선보이는 여전사로 출연해 열연을 펼침으로써, 그 당시 젊은 남성들로부터 커다란 인기를 끌었답니다.

 

개성있는 캐릭터가 강했던 남정임이었기에 이같은 고난도의 검객여전사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었고, 만약에 문희나 윤정희가 이같은 검객무협영화에 출연했더라면, 소화하기가 매우 힘들었을 겁니다.

 

특히 ‘팔도검객’과 ‘심오야’에서 현란한 검술을 선보이면서 악당들과 검술대결을 펼쳤던 남정임은 ‘검객여전사’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신비롭고도 신선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많은 남성들로부터 뜨거운 환호를 불러일으켰답니다.

 

60~70년대에 멜로연기 뿐만아니라, 액션연기도 함께 완벽하게 연기했던 여배우로는 단연 남정임이 최고였답니다.

그런점에서 남정임은 다른 여배우들과는 차별화될 수 있었고, 가장 개성이 강한 여배우로 각인될 수 있었답니다.

 

청순한 미모의 여배우가 칼을 손에 쥐고, 현란한 무술을 연기하면서 멋진 스펙터클을 선보인다면, 젊은 남성들로부터 인기를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반응형

남정임은 로맨스영화, 검술무협영화, 액션형사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해서 연기의 폭을 넓혀갔으며,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 중에는 당대의 명작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남정임은 사극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그녀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68년도의 영화 ‘요화 장희빈’이랍니다.

 

이 ‘요화 장희빈’은 남정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모든 여배들이 가장 선호하는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절세의 미인인 ‘장희빈’역을 맡는 것이랍니다.

 

당대의 가장 빼어난 미녀여배우에게만 배역이 주어진다는 ‘장희빈’역을 남정임이 당당히 꽤참으로써, 그녀가 60년대 중후반을 대표하는 당대의 최고 미녀여배우로 각인될 수 있었답니다.

 

1대 장희빈은 김지미였고, 남정임은 김지미의 뒤를 이어서 2대 장희빈역을 연기함으로써, 60년대의 대표적인 미녀여배우로 각인될 수 있었답니다.

 

참고로 3대 장희빈은 좀 의외지만 윤여정이 맡았고, 4대 장희빈은 이미숙, 5대 장희빈은 전인화였습니다.

 

역대 장희빈 중에서, 미모와 연기력, 개성을 모두 함께 갖추고 있었던 남정임이 가장 예뻤다고 느껴집니다.

 

경기도 광주출생으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다니고 있었던 남정임은 1965년도에 실시한 영화 ‘유정’의 여주인공 공개모집에 응모하여, 무려 13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당선되었는데, 그녀의 출중한 미모가 여주인공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후문입니다.

 

그러니까, 남정임은 첫 데뷔작부터 여주인공을 맡았을 정도로 그녀의 빼어난 미모는 대단했었답니다.

원래 이름이 이민자였던 그녀는 데뷔작 ‘유정’에 출연하면서, 여주인공 이름인 ‘남정임’을 자신의 예명으로 삼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리고 남정임은 해마다 30여편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그녀가 은퇴한 1971년도까지 총 250편의 영화에 출연했답니다.

 

그녀는 미모만 출중한 것이 아니라, 연기력도 대단히 우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66년부터 그녀가 은퇴한 71년도의 6년 동안이 남정임의 최고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6년동안 250편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했을 정도로, 화려한 영화활동을 벌였던 남정임은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초절정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화에서는 큰 인기와 명성을 떨쳤던 남정임이지만, 그녀의 사생활만큼은 예상외로 행복하지만은 않았답니다.

 

◆ 남정임의 결혼과 이혼, 폭행스캔들

 

인기절정인 1971년도에 남정임은 재일교포 임방광과 결혼을 하면서, 영화계에서 은퇴를 하게 된답니다.

 

당시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고있었던 남정임은 성공한 재일교포 출신의 사업가 임방광과 세종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1,000명이 넘는 그녀의 팬들이 결혼식장에 몰려오는 등 그녀의 호화로운 결혼식도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화려한 결혼식은 3년만에 파경을 맞게 된답니다. 남정임은 남편 임방광의 사업부진으로 인해서 서로간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고, 결국 남편과 이혼한 남정임은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답니다.

 

남정임이 첫남편 임방광과 이혼한 구체적인 사연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결혼해서 남편이 사는 일본의 시댁으로 들어가 살았던 남정임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정임은 남편의 시댁에서 운영하는 도쿄의 한식당(불고기집)에 종종 동원되어서 서빙일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특히 시부모님이 그녀를 식당으로 불러내어 서빙일에 그녀를 마구 부려먹었다고 하며,

이러한 고된 시집살이와 남편의 무책임한 행동이 부부간의 갈등을 증폭시켰고, 결국 남정임은 남편과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3년만에 이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답니다.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렸지만 허망하게 이혼하고 돌아온 남정임은 1976년도에 영화계에 다시 복귀했고, 영화 ‘나는 고백한다’에 출연하면서 재기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답니다.

그리고 남정임은 드라마에도 출연하는 등 이혼 후에 다양한 연기활동을 펼쳐나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결혼실패 후에,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대중들의 반응은 무척 싸늘했답니다.

그녀가 복귀한 후,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 모두 흥행에 실패하였고, 그녀는 과거와는 달라진 영화판도에 적응을 못하면서, 실의에 빠지게 된답니다.

 

남정임은 77년도에 드라마 ‘여고동창생’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 드라마에 출연할 당시에,

갑자기 뜻밖의 폭행사건이 터지게 된답니다.

1977년 1월27일, 남정임은 칼에 머리가 찔리고 얼굴과 몸에 심한 타박상을 입게 된답니다.

 

경찰이 출동하였고, 경찰조사가 이뤄지게 되었는데, 그 조사에서 남정임은 오빠에게 얻어맞아서 상처가 생겼다고 진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정임의 상처가 너무 심했고, 그녀의 가족들마다 서로 다른 진술을 하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한 경찰은 보다 심도놓은 수사를 벌였답니다.

 

경찰의 치밀한 수사 끝에, 오빠에게 맞았다는 남정임과 오빠의 진술은 거짓임이 드러나게 되었답니다.

남정임은 오빠에게 맞은 게 아니라, 그녀의 애인이자 동거인이었던 노승주에게 얻어맞았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겁니다.

 

남정임은 자신의 집에서 학원이사장 출신인 애인 노승주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밤에 늦게 귀가하고 거짓말을 한다는 이유로 노증주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남정임의 연기생활이 파탄이 날까봐, 그녀와 오빠는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결국 거짓증언을 한 남정임과 오빠는 공무집행방해죄가 적용되어, 경찰에 입건되어 형사재판까지 받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이같은 남정임의 폭행스캔들이 언론에 보도되고 세상이 떠뜰썩해지면서, 그녀에게 매스컴의 호된 비판이 쏟아졌답니다.

이 스캔들이 터진 당시에 남정임은 일본에 있는 남편과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고, 그냥 별거만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답니다.

 

그래서 남정임은 매스컴으로부터 더욱 심한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던 겁니다.

이처럼 사회적인 지탄을 받게 되자, 남정임은 약을 먹고 자살까지 시도하게 된답니다.

 

결국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남정임은 드라마에서 하차하고 방송출연정지를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남정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폭행사건의 주범인 애인 노승주와 1978년도에 재혼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답니다.

 

노승주와 결혼한 후 남정임은 연예계에서 은퇴하였고, 남편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낳아 기르면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남편 노승주는 대한도시가스 대표이사를 맞는 등 성공가도롤 달려갑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나 봅니다. 한번의 결혼실패 후, 다시 재혼해서 안락한 삶을 살아갔던 남정임은 1989년도에 갑자기 유방암에 걸리게 된답니다.

 

유방암에 걸린 그녀는 3년동안 병마와 싸우면서 재기의 꿈을 꾸었지만, 그녀는 결국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1992년도 사망하고 말았답니다.

 

암과 투병하는 와중에서도 남정임은 자신의 일생을 담은 영화를 찍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아쉽게도 남편과 두자녀를 남겨놓고는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남정임은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까지 출중한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당대의 신데렐라 같은 여배우였답니다.

 

그녀의 연기활동 시기는 짧았지만, 그녀는 200편이 넘는 주옥같은 명작들을 남겨놓았고, 60, 70년대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여매우로 많은 대중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반헬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