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홍길동전의 줄거리내용과 율도국의 위치, 만화영화

역사이야기 2020. 3. 8. 22:32

 

 허균의 홍길동전의 줄거리내용, 주인공 실존인물설, 만화영화

 

홍길동전은 조선시대의 최고의 문장가인 허균이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이지요.

 

허균이 광해군시절 공주목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과거시험 출제위원으로 있을 때에 시험부정에 연류되어서 부임 5개월만에 파직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답니다.

 

허균이 전북 부안에 유배를 갔을 때, 허균이 머물렀던 부안의 정사암터에서 그의 유명한 소설 홍길동전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허균은 조선시대의 뛰어난 시인이자,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문객인데, 광해군시절 때에는 동부승지와 예조판서라는 높은 벼슬도 했었던 조선의 유력한 정치인이자, 당대의 문장가로 명성이 매우 높은 인물입니다.

 

또한 허균이라는 인물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조선시대에 있어서 아주 획기적인 사회개혁을 주창했던 개혁주의자이자라는 사실입니다.

 

허균은 봉건사회의 악습과 신분차별제도의 철폐를 부르짖었던 개혁주의자이자 혁명이론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적서차별의 철폐를 부르짖었으며사회적인 평등과 민중으로부터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당대의 탁월한 개혁주의자였습니다.

 

신분차별제도와 서얼차별제도의 타파를 주장하고, 탐관오리의 척결을 주장했던 허균은 너무 급진적인 개혁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시대를 수백년 앞서간 뛰어난 사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 때에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반역자로 낙인찍혀서 사형당하고 말았답니다.

 

허균은 비록 역모사건에 연류되어 죽임을 당했지만, 그는 홍길동전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고

그가 남긴 홍길동전에는 그시대의 모순된 봉건주의적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사회개혁을 추진하려는 그의 심오한 사상을 남겨놓았답니다.

 

홍길동은 조선 세종시절에, 좌의정인 홍상직의 서얼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등 서자로서 심한 신분차별을 당한 후

집을 떠나서 도적집단의 소굴로 들어가서 신기한 도술을 부리는 등 그곳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둡니다.

 

그리고 홍길동은 무장조직 활빈당을 조직하여 그 조직의 우두머리가 된 후,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를 때려잡고

불상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의적활동을 벌였던 조선시대에 최고의 의적집단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홍길동은 단순한 도적패가 아니며, 탐관오리 같은 부패하고 사악한 관리들을 척결해나갔고

불쌍하고 소외된 백성들을 구제해주는 등 백성편에 서서 양반들의 부조리와 맞서 싸웠던 의적이자, 당대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길동이 만들었던 조직 활빈당(活貧黨)’은 그 의미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활동을 하는 집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허균이 홍길동의 주인공인 홍길동이 단순한 도적패가 아니라, 백성을 구제하고 도와주는 의로운 의적집단임을 명백히 정의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답니다.

 

홍길동이 우두머리가 되어 조직한 활빈당은 외형상으로는 남의 재물을 도적질을 하는 일종의 도적패인 것은 사실이지만, 홍길동과 활빈당은 항상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와 포악한 양반들의 재물만을 도적질하였고

그렇게 빼앗은 재물을 불쌍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등 서민들을 구제해주는 의로운 의적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홍길동은 단순한 도적패는 결코 아니며, 오히려 당대의 의로운 영웅이자, 정의의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탐관오리와 양반들의 횡포와 탄압으로 인해서 무자비한 수탈과 학대를 당했던 불행한 서민들의 가난과 설움은 홍길동의 의적활동으로 인해서, 많이 치유되고 구제를 받았다고 합니다.

 

, 홍길동은 탄압과 수탈을 당해서 가난한 서민으로 전락했던 불우한 백성들을 구제해주고, 도와줬던 그 시대의 정의로운 영웅이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국가에서 임명했던 지방의 탐관오리들은 온갖 가짜명목을 내세워서 백성들의 제물을 마구 수탈해갔기 때문에, 그들이 오히려 도적이나 다름없었고, 도적패라고 알려진 홍길동의 활빈당은 실제로는 도적이 아니라, 반대로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해주었던 서민들의 수호자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패하고 백성들의 수탈을 일삼았던 탐관오리와 양반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분배해주며, 도와줬던 홍길동을 어찌 도적패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백성들에게 온갖 구실을 붙여서, 그들의 재산을 탈취해갔던 지방수령들이야말로 진짜 도적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타락하고 부패했던 양반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척결하면서, 신분차별이 없고, 평등한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홍길동은 그시대의 정의로운 영웅인 겁니다.

 

그렇지만, 국가조정에서는 양반과 지방관서의 재물을 빼앗아가는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죠

조정에서는 홍길동을 사악한 도적패라고 규정하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군사를 출동시켜 전방위적인 군사공격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홍길동은 신기하고 영험한 도술과 무예를 발휘해서, 싸우는 족족마다 관군들을 모두 물리치고, 체포망을 빠져나갔습니다.

 

매번 엄청난 군사를 동원해서 공격해들어가도, 신기한 도술와 무예를 발휘하는 홍길동을 결코 잡을 수 없었던 조선조정은 마지막으로 홍길동을 회유하기 위해서 협상을 제안하게 됩니다.

 

왕은 홍길동에게 병조판서 자리를 재수하겠다는 제안하지만, 이러한 왕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홍길동은 자신의 모든 무리를 이끌고, 나라를 떠나겠다고 말하면서, 홀연히 사라집니다.

 

그 후, 홍길동은 바다 너머에 있는 섬으로 건너가서 그곳을 점령한 후, 자신의 나라인 '율도국'을 세웠고

그곳의 왕으로 등극한 홍길동은 30년 동안 그 나라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태평성대를 이룩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줄거리내용입니다.

 

그런데,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작가가 만들어낸 단순한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존재했던 실존인물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허균은 1612년도 부안의 정사암터에서 책 '홍길동전을 집필했다고 알려졌는데,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실존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실제로 홍길동이라는 의적이 존재했었다고 하는데, 연산군 때에 탐관오리에 대항해서 봉기를 일으켰던 실존인물인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허균이 소설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겁니다.

  

홍길동이 실존인물이라는 근거

 

14901229일에 작성된 연산군 때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의금부 위관 한치형이 홍길동에 관해 왕에게 고했던 기록이 있는데

강도 홍길동이 갓꼭대기에 옥장식을 달고, 붉은 허리띠를 두른 옷차림을 한 채, 관군에 사로잡혔다고 보고하였다고 합니다.

 

이 연산군 때의 기록이 홍길동에 관한 첫번째 기록입니다. 그당시 홍길동은 도적이었답니다.

 

그리고, 1524년 중종 실록에 따르면, 조선조정에서 홍길동을 잡기 위해 대대적으로 토벌을 벌였는데, 활빈당은 충청도 공주지역에 산성을 쌓고, 토벌을 방어하며, 저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연산군일기의 연산군 6년 때 기록에는,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고 명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소설의 주인공으로만 알고 있던 홍길동은 조선왕조실록에 세 번이나 명문으로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모두가 비슷한 시기인 연산군 ~ 중종 때인 조선 중기시절에, 실제로 도적 홍길동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런 기록들을 근거로 볼 때에, 홍길동은 소설속의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연산군 시절에 실제로 도적으로 활동했던 실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모든 성씨의 유명인물의 기록인 만성대동보에도 함경도 경상절도사인 홍상직의 둘째아들이 홍길동이라고 기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허균의 홍길동전에서도, 홍길동의 아버지의 이름을 홍상직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실존인물인 홍상직과 이름이 같으며, 홍길동의 아버지 홍상직은 역사적 실존인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조선왕조실록과 만성대동보 같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인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길동은 15세기 연산군 때에 서자로 태어나서, 의적활동을 벌였던 실존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세기가 지난 16세기 때의 학자 허균이 실존인물 홍길동을 모티브로해서 홍길동전을 집필했던 겁니다.

 

또한 홍길동에 대한 또다른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데요.

일본에는 홍가와라라는 의적이 있었는데, 홍길동이 바로 홍가와라라는 것입니다.

 

홍가와라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활동하던 당대의 영웅이자, 그지역의 수령이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의 유구왕조 시절에는 조정이 일반백성에 대한 수탈과 탄압이 극심해서, 백성들이 살기 힘들었던 시대라고 합니다.

더욱이 궁핍한 생활을 하고있던 백성들은 엎친데 덮진 격으로, 도적때들의 잦은 출몰과 수탈로 더욱 힘들고, 피폐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혼란한 시기에 홍가와라라는 협객이 나타나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도적때들을 물리치고, 백성의 영웅으로 떠올랐다고 합니다.

 

홍가와라는 그지역의 도적때들을 소탕하고, 백성들을 탄압하는 유구왕조에 대항해서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그지역의 위대한 수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홍가와라라는 이름은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오키나와에서 일본식으로 불렀던 발음이라고 합니다.

 

, 유구왕조의 폭압에 맞서서 싸우고, 도탄에 빠졌던 오카나와의 백성들을 구제해주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던 당대의 영웅 홍가와라는 조선에서 건너간 홍길동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일본에는 원래 씨성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하며, ‘씨성은 타지역에서 이주해온 인물의 성씨라고 일본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지요.

 

그리고 오키나와는 옛날에는 유구국이라고 불리웠는데, 이 유구국이 홍길동이 세웠던 이상국가 율도국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홍가와라가 오키나와에 왔던 그 시기에 풍년기원 행사와 돌잔치행사, 줄다리기 같은 새로운 풍습이 생겨났는데

이러한 풍습들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는 없었던 풍습들이며, 조선의 고유의 풍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새로운 풍습들은 조선에서 오키나와로 건너간 홍길동과 그의 추종세력이 그곳에 새롭게 전수해준 풍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당시 홍가와라가 활동했던 본거지는 오키나와의 구지천성인데, 최근 구지천성에서 조선의 화폐인 해동통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구지천성의 해동통보도 홍가와라가 조선에서 건너간 홍길동이라는 것을 증거해주는 또다른 증거품일 수도 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근거들을 살펴볼 때, 홍가와라는 조선에서 자기 추종세력을 거느라고 건너간 홍길동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소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세운 이상국가 율도국은 일본의 오키나와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본의 학자들은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있고, 현재까지 홍길동이 오키나와의 홍카와라라는 주장에 대해, 학자들 간에도 열띤 찬반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오키나와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던 홍가와라일까요? 그리고 소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정말 오키나와일까요?

 

앞으로 학자들이 더욱 치밀하게 연구조사활동를 벌여서, 그 진위를 속시원히 밝혀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홍길동 만화영화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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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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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측천무후의 악행과 업적, 남성편력과 최후, 3000명의 남총

 

측천무후 624217~ 7051216

 

중국 왕실에는 역사적으로 여려명의 악녀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정말로 잔인하기로 소문난 악녀이자, 요부가 한명이 있는데, 바로 측천무후입니다.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마다 매우 엇갈립니다. 한편으로는 측천무후는 격동의 시기에 중국을 잘 다스리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서 중국을 태평성대로 이끈 여황제이자 여걸로 평가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무도한 독재자이자, 희대의 요부라는 평가도 받는 인물이랍니다.

 

저는 측천무후의 이런 엇갈린 평가 중에서 그녀가 중국을 태평성대로 이끈 위대한 여황제보다는 권력에 눈이 먼 무도한 독재자 내지는 희대의 요부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측천무후가 나라를 안정시키고 여러 가지 억접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너무도 많은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녀를 희대의 요부이자 악녀라고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원래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3대 악녀가 있습니다. 바로 여태후와 측천서태후, 그리고 측천무후가 그 주인공이지요.

 

이들 3대 악녀들은 중국조정의 권력을 찬탈하고는 황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국정을 농락하고

충신들을 죽이는 전횡을 일삼았으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천하를 쥐락펴락했던 중국의 무도한 권력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 세명의 여성들은 중국역사에 한획을 그을 만큼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후대의 사가들은 여태후와 서태후, 측천무후를 일컬어 중국의 3대 악녀라고 정의를 내렸답니다.

 

서태후와 측천무후는 아들을 쫒아내거나, 죽여서 자신이 스스로 여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악업을 행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여태후는 아들인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고, 엄청난 전횡을 일삼았던 인물이랍니다.

 

그런데 이 3대 악녀 중에서도 가장 스케일이 크고 놀라운 기행일 일삼은 악녀는 바로 측천무후입니다

 

셋 중에서 다른 두명은 황제의 모후로써, 섭정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했지만, 측천무후는 자신이 직접 황제의 보위를 차지하고, 천하를 제멋대로 좌지우지했던 인물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측천무후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황제이며, 중국에서 유일한 여황제라는 신기록을 세운 여성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측천무후가 셋 중에서 가장 대단한 여걸이라고 할 수 있지만 -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공포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가장 잔인한 폭군이라고도 팡가할 수 있습니다.

 

측천무후가 아무리 내치를 잘하고 태평성대를 이룬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자신의 친아들을 죽이는 퍠륜으 저질렀다는 사실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악행이랍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중국의 왕실인물 중에서 남색을 가장 많이 밝힌 호색가로도 유명하답니다.

 

측천무후는 나이 60세에 황제의 보위에 오른 후, 수많은 젊은남자들을 뽑아 남총을 만들고, 그 남총들을 매일같이 갈아치우면서, 밤마다 동침했을 정도로 엄청난 정욕을 불살랐던 희대의 요부라는 오명을 남긴 인물이랍니다.

 

그럼,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이자, 희대의 요부인 측천무후의 업적, 악업 등 그녀의 생애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측천무후의 생애와 업적, 악업

 

측천무후의 이름은 '무조'이며, 그녀는 지방태수였던 무사확의 둘째딸로 태어났고, 14살 때에 궁녀로 자원해서 궁궐로 들어와서 살았답니다. 

 

측천무후가 미인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녀의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답니다.

측천무후의 원래의 이름은 '무조'이지만, 그녀가 궁궐로 들어온 후에는 '무미랑'이라는 예명으로 불리웠는데, '무미랑'이라는 뜻은 '무씨성을 가진 아름다운 낭자'라는 뜻입니다.

 

측천무후 즉 무조가 궁궐에서 '얼굴이 예쁜 낭자'라는 뜻의 '무미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또한, 측천무후(무조)가 궁녀가 된 것도, 그녀의 얼굴이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예뻤기 때문에, 궁녀가 되라는 주위사람들이 유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색이 뛰어난 측천무후(무조)는 궁궐로 들어온 후부터, 궁녀로서는 만족하지 못하고, 황후가 되고자하는 엄청난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측천무후는 당시 당나라의 황제인 당태종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교묘한 술수를 부려서, 당태종의 환심을 얻는데에 성공합니다.

 

그녀는 당태종의 내관을 매수해서 당태종이 자주 다니는 곳을 알아내고는, 그 곳에 자주 출몰해서 당태종과의 조우를 시도했답니다.

 

이 당시 무조는 궁궐에서 하찮은 궁녀의 지위에 불과했기에, 황제의 총애를 전혀 받지못하고, 밤마다 독수공방을 하면서 혼자서 외롭게 지냈답니다.

 

어느날, 당태종이 자주 찾는 궁궐의 연못가를 찾아간 측천무후(무조)는 그곳에서 당태종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결국 당태종과 조우하게 됩니다.

 

당시 당태종이 재후국에서 조공으로 보내온 사나운 말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당태종은 그 사나운 말을 보면서, 이 말을 어떻게 길들여야 할지 고민하면서 탄식하고 있었는데요.

 

이때 홀연히 무조(측천무후)가 나타나서 당태종에게 다가가서, 당돌하게 말했습니다.

 무조(측천무후)는 당태종에게 세가지만 있으면, 그 사나운 말을 충분히 길들일 수 있다고 말했답니다.

 

당태종은 무조에게 그 세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무조(측천무후)는 쇠채찍과 쇠망치, 비수 세가지 물건만 있으면, 사나운 말을 충분히 길들일 수 있습니다

 

무조는 당태종에게 먼저 쇠채찍으로 사나운 말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서 말을 듣게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쇠망치로 더 아프게 때리면 말을 들을 겁니다. 

 

만일 그래도 말을 듣지않는다면, 그 말을 전혀 쓸모가 없는 말이므로, 비수로 찔러 죽이면 됩니다'라고 무조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당태종은 이렇게 자신에게 명쾌하게 답변을 한 무조(측천무후)의 영특함을 보고, 그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궁녀에 불과했던 그녀에게 정 5품에 해당하는 '재인'이라는 후궁지위를 하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조가 당태종의 후궁이 되었지만, 당태종은 그녀와 잠자리만큼은 하지않았습니다.

 

천문지리를 보면서 미래의 운세를 점치는 벼슬아치인 태사령은 무조(측천무후)가 장차 왕조를 뒤엎을 역모를 일으킬 반골의 기질을 갖춘 인물이니, 당태종에게 그녀를 가까이하지 말 것을 권고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조(측천무후)는 당태종의 후궁이었지만, 전혀 당태종의 총애를 얻지못하는 불우한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당태종이 병을 앓아서 병석에 누울 때에, 무조는 태종의 병간호를 했었는데, 태종의 병문안을 왔던 아들 이치(훗날 고종)는 무조의 미색을 보고, 첫눈에 홀딱 반해서, 그녀를 마음에 품게된답니다.

 

그리고 태종이 죽은 후에, 태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고종은 절에 들어간 무조(측천무후)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여서 자신의 후궁으로 삼아버립니다.

 

 무조는 태종으로부터는 성은을 입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인 이치(고종)의 눈에 띄여서 후궁인 소의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고, 고종의 뜨거운 총애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무조(측천무후)는 결코 황제의 후궁지위에 만족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엄청나게 야망이 큰 여걸입니다.

그녀는 후궁보다도 더 큰 권력인 황후의 자리를 탐냈고, 현재의 황후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후가 될 엄청난 음모를 꾸미게 된답니다.

 

당시의 상황은, 고종의 정비인 황후 왕씨와 후궁인 숙비 소씨간의 고종의 총애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고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있는 숙비 소씨를 견제하기 위해서황후 왕씨는 절에 있던 무조(측천무후)를 궁궐로 불어들여서, 고종과 가깝게 지내도록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황후 왕씨의 행동은 엄청난 실수를 한 것으로서, 엄청난 야심가인 무조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으로, 황후는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랍니다.

 

고종의 후궁이된 무조는 이후에 새로운 음모를 꾸며서, 황후 왕씨를 자신의 딸을 죽인 살해범으로 몰아서, 사약을 받게 만들었답니다.

 

무조는 고종의 성은을 얻어서 딸을 낳았는데, 그녀는 자신의 딸을 아무도 몰래 목을 졸라서 죽였고

이 죽은 딸이 있는 방으로 황후 왕씨와 고종을 순차적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도착한 황후 왕씨가 자신의 죽은 딸과 함께 있게 만들었고, 뒤이어 도착한 고종에게, 황후 왕씨가 자신의 죽은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무조는 황후 왕씨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황후를 모함했습니다.

 

즉 무조는 교묘하게 황후와 자신의 죽은딸이 함께 있는 상황을 만들어서, 황후 왕씨를 자신의 친딸 살해범으로 몰고갔고, 

고종은 연극을 하는 무조(측천무후)의 말에 넘어가서, 측천무후의 고변을 믿고 황후를 공주살해범으로 처형해버렸습니다.

 

측천무후 초상화

 

또한 무조(측천무후)는 고종의 총애를 받고있던 숙빈 소씨에게도 똑같은 누명을 씌워서 죽여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무조(측천무후)는 갖은 권모술수를 다 부려서 자신의 라이벌들을 다 제거해버리고, 황후의 자리에 올랐고, 고종과의 사이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서 기르게 됩니다.

 

이렇게 황후의 자리에 오른 무조(측천무후)는 황후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아먕을 품게되었고, 더 큰 권력을 추구해나갑니다.

무조(측천무후)는 고종이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게되자, 고종을 대신해서 섭정을 펼쳤고, 점차적으로 권력을 독점해나갔답니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조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대신들을 집중적으로 고위관직에 임명해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강화시켜나갔고, 자신을 반대하는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해나갔답니다.

 

건국공신이었던 장손무기와 저수량등의 충신들을 측천무후는 반역의 누명을 씌워서 숙청해버렸답니다.

 

이처럼 측천무후는 고종이 앓아누운 사이에, 스스로 섭정을 통해서, 무수한 정적들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도록 조치를 취했던 겁니다.

측천무후의 정치력과 권모술수가 얼마나 능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측천무후의 야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지요. 그녀는 궁극적으로 황제인 아들를 몰아내고, 자신이 여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을 원하고 있었거든요.

 

측천무후는 656년 자신의 장남 이홍을 황태자 자리에 올려놓았는데, 얼마 지나지않아, 그녀는 자신의 친아들인 이홍의 식사에 독을 넣어서 친아들을 독살시켜버립니다.

 

이홍이 죽은 후, 측천무후는 자신의 둘째아들인 이현(李賢)을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했답니다.

그런데 새로운 황태자가 된 이현이 너무도 똑똑했기 때문에,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는 데에 위기의식을 느낀 측천무후는 이현을 여색을 밝힌다는 거짓누명을 씌여서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켜 버렸답니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폐위된 이현을 먼 곳으로 유배보내 버렸는데, 유배간 이현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자살을 강요했고, 이현은 결국 유배지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권력에 눈이 먼 측천무후는 자신의 친아들 두명을 거짓 누명의 씌워서 폐위했을 뿐 아니라, 죽여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친아들마저도 권력의 걸림돌로 생각하고는 죽여버리는 엄청난 패륜을 저질렀답니다.

 

그런데 측천무후는 두아들들을 페위시키고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은 그녀의 셋째아들 이현(중종)을 단 3개월 만에 외척세력을 끌어들인다는 명분을 붙여서, 또다시 폐위시켜버립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막내아들 이단을 새로운 황제(예종)로 책봉했고, 자신은 황태후가 됩니다.

 

그런데 새로운 황제가 된 이단(예종)은 허울만 황제일 뿐, 모든 실권을 측천무후가 전부 다 행사했고, 예종은 꼭두각시황제에 불과했답니다.

 

꼭두각시 황제가 된 이단(예종)도 언제 어머니에게서 폐위를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 자신의 황제자리를 어머니인 측천무후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이로써 690년, 측천무후는 67세의 나이에 아들을 몰아내고 여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나라이름을 당나라에서 주나라로 바꾸어버립니다.

 

과거에, 태사령이 고종에게 무조를 가까이하면, 나중에 그녀가 역성혁명을 일으킨다고 경고했는데, 태사령의 그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고 말았습니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67세였고, 그녀는 황제가 된 후에 15년 동안 주나라를 강력하게 통치해갔습니다.

 

그리고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전국의 관공서에 암행관리나 밀정을 파견해서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죽이는 등 엄청난 공포정치를 펼쳐나갔습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친자식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최고권력을 획득했던 탐욕스러운 못된 권력의 화신입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측천무후가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죽였던 사람은 공식적으로는 93명이며, 비공식적으로는 200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측천무후의 지시를 받거나, 그녀의 정책추진 과정에서 관리들이 죽인 사람들은 7,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측천무후의 업적

 

그렇지만, 이렇게 잔악스러운 행동을 한 측천무후지만, 그녀는 정치만큼은 잘 이끌어나갔고,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었다는 역사가들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측천무후는 과거제도를 개편함과 동시에 인재들을 골고루 등용하고 적제적소에 인재들을 배치함으로써, 나라를 안정화시켰답니다.

 

그녀는 정인걸, 장간지 같은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정치를 안정적으로 잘 수행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고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승려들을 육성하고 사원들을 건립하는 등 불교를 증흥시켜 나갔고농업생산력 강화와 민생회복에 힘써서,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고, 국가를 안정된 반석위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국방에도 힘을 써서 군사력을 더욱 확충하고 강화시켜나갔고, 천적인 고구려를 토벌해서 당나라영토를 크게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고구려가 측천무후의 당나라에 의해서 망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랍니다.

 

이렇게 측천무후는 공로와 악업이 함께 있는 인물어어서, 그녀에 대한 평가는엇갈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측천무후의 남성편력, 남총

 

그런데 측천무후는 여황제에 오른 후, 남색을 무척 많이 밝혔다고 하며, 엄청난 쾌락을 즐겼다고 합니다.

 

여황제로 등극한 후, 측천무후는 중국전역에서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모집해 궁궐로 모아들였고, 그 젊은 남총들과 엄청난 향락생활을 즐기면서 음탕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남총이라는 기관을 만들어서, 중국 전역에서 무려 3,000명의 젊은 남성들을 남총으로 뽑아서 궁궐로 입궁시켰답니다.

 

측천무후가 뽑았던 남총의 조건은, 젊은 남성일 것, 미모가 수려할 것, 키가 크고 풍체가 좋을 것 등의 세가지 요건을 갖춘 젊고, 잘생긴 남성들을 주로 뽑았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궁궐속 은밀한 곳에 공학부라는 기관을 설치해놓고, 젊은 남총들 3,000명을 배치했고, 그곳에서 밤마다 젊은 남성들을 번갈아가며 동침하면서, 뜨거운 정욕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자리에서 그녀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 남성들은 곧바로 죽임을 당했을 정도로 측천무후는 정욕도 대단했지만, 동시에 아주 잔인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특히 장씨형제를 아주 총애했다고 하는데요

 

장씨형제는 장종창과 장역지형제인데, 그들은 사대부인 복각시랑 장구청의 아들이며

스무살도 채 되지않은 잘생긴 미소녀들인데, 장씨형제는 측천무후의 지극한 총애를 받아서 그녀와 자주 동침했다고 합니다.

 

장씨형제는 피부가 매우 하얗고 외모가 상당히 잘생겼다고 하며, 이들은 궁궐에 갈 때에는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고,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고, 입에는 정양이라고 하는 입냄세를 제거하는 향수를 뿌리고 가서 측천무후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장씨형제는 원래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의 정부였다고 하며태평공주가 어머니인 측천무후에게 아첨하게 위해서 자신의 애인인 이들 장씨형제를 측천무후에게 상납해 남총으로 삼도록 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장씨형제에게 늙은 자신을 대신해서 정사를 담당하도록 막강한 권한을 주었습니다.

 

이 장씨형제는 측천무후의 후광을 등에 업고, 백성들에게 엄청난 횡포를 부렸으며, 국정을 마음대로 농락하고, 막대한 국가재정을 자신들의 사금고로 빼돌리는 등 엄청난 전횡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측천무후는 여황제가 된 이후,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천명의 젊은 남성들을 번갈아 바꿔가면서 정욕을 채웠다고 하니, 정말 대단히 음탕한 요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남성편력을 자랑하는 요부 중의 최대의 요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측천무후의 최후와 죽음

 

이처럼 중국역사상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측천무후의 말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측천무후는 자기 스스로 당나라를 멸하고, 무씨의 나라인 주나라를 만들었는데, 자신의 후계자 또한 무씨성을 가진 사람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조카인 무씨성을 가진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 지, 아니면 아들인 이현에게 황위를 물려줄 지를 놓고, 고심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병을 않아서 병석에 누워있던 705년도에, 제상 장간지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쳐들어왔습니다.

 

재상 장간지는 측천무후를 협박해서 다시 당나라를 복원시킬 것과 무씨가 아닌 아들 이현에게 황위를 물려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측천무후는 장간지의 요구대로 따랐다고 합니다.

 

결국, 측천무후가 세운 주나라는 건국한 지 15년만에 없어지고 다시 당나라로 복위되었고,

측천무후의 셋째아들 이현(중종)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병들고 노쇠해진 측천무후는 이제 더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705년도 측천무후는 자녀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유언을 남긴 후에 82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측천무후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자신의 묘비에 어떤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도 권력욕심이 많았던 그녀가 자신의 묘비에 자신의 업적을 새겨넣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 무척 이색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측천무후가 자신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를 넣지말라고 한 것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반성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일각에서는 측천무후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서 나라의 발전을 이루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현명한 군주였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측천무후는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숙청했던 잔인한 군주였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권력을 얻기위해서, 자신의 두아들과 한명의 친딸을 죽인 패륜을 저지른 사실은 결코 지울 수가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의 안정을 이루고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명목하에, 자신의 친자식과 수많은 백성을 죽이는 행위를 결코 용납될 수 없고, 결코 합리화되어서는 안되는 패륜행위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측천무후가 정치를 잘했다는 몇가지 업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3대 악녀 중에 가장 최악의 악녀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다른 악녀들은 정적들은 죽였어도, 자신의 친자식만큼은 죽이지 않았는데, 측천무후는 자신의 친자식마저 인정사정없이 살해해버리는 끔직한 패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그녀의 최대의 약점이자 만행인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친자식을 죽인 이유는 권력의 욕심 때문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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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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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이야기의 진실, 서동요의 해석, 사택왕후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는 세기적인 러브스토리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실제로 존재했던 일이었을까요?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만큼 감동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또 없을 것 같아요!

 

오늘은 우리역사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큰 감동을 주었던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를 한번 재조명해볼까 합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졌던 데로 서동요의 주인공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가 맞는 것일까, 또한 두사람이 실제로 만나 사랑을 나누면서 결혼을 했던 것이 사실인지 심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어요!

 

그럼 먼저 서동요의 내용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어요!

서동요는 훗날 백제 무왕이 될 서동이 신라의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서, 서라벌로 가서 어린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부르게 함으로써,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만들어준 동요입니다.

 

서동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선화공주는 남몰래 정을 통하면서, 밤마다 서동이 도련님을 몰래 안고 간다

 

이 서동요의 내용은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이라는 외갓남자를 만나서 정을 통한다는 것으로, 선화공주의 대단히 문란한 사생활을 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은 원래 어렸을 적에는 가난뱅이의 아들이었어요. 서동은 백제땅 오금산 아래에 있는 허름한 집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갔던 가난뱅이였답니다.

 

설화에서는 과부인 어머니와 연못가의 용이 관계를 맺어서 서동이 태어났다고 알려졌는데요. 그렇게 신분은 미천했지만, 서동은 어려서부터 아주 비범하고 총명했으며,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면서 열심히 살아갔다고 합니다.

 

서동은 산에서 서여 즉 마를 캐어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으로 서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로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소문을 듣고서, 서동은 그 선화공주를 마음에 품게 되었고,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만들기 위해서 교묘한 계략 하나를 꾸며내었답니다.

 

신라 경주로 간 서동은 아이들을 마를 주고 꾀어서 서동요라는 노래를 지어서 부르게 했습니다. 서동은 선화공주가 몰래 서동이와 사귀어 정을 통하고는 밤마다 몰래 서동을 안고간다는 아주 외설스러운 내용의 노래를 지어서 퍼뜨렸던 겁니다.

 

선화공주에 관한 음란한 내용이 담긴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경주 도성내에서 널리 퍼지게 됐고, 급기야 궁궐에까지 이 노래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를 전해들은 신라의 대신들은 문란한 생활을 한 선화공주애개 벌을 내려야 한다고 진평왕에게 강력히 상소를 했고, 크게 분노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귀양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선화공주는 서동요라는 노래 때문에, 억울하게 궁궐에서 쫒겨나서 귀양을 가게되었는데요. 선화공주가 귀양을 가는 길목에 바로 서동이 기다리고 있었고, 서동은 귀양가는 선화공주의 경호를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만나게 된 서동과 선화공주는 첫눈에 서로에게 홀딱 반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두사람은 백제땅으로 건너와서 결혼을 했습니다.

 

이부분을 삼국유사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선화공주가 귀양처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맞이하여 모시고 가겠다고 말하자, 선화공주가 기뻐하여 그를 따르게 되었다' ~

 

서동은 착한 선화공주를 문란한 여자로 모함을 해서 궁궐에서 쫒겨나게 만들었고, 궁에서 쫒겨난 그녀를 손쉽게 자신의 아내를 만들었던 권모술수가 능했던 나쁜남자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네요.

 

그런데 서동은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난 후, 엄청나게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된답니다. 서동에게 시집을 온 선화공주는 궁궐을 떠날 때 어머니가 몰래준 황금 한자루를 갖고 왔습니다.

 

선화공주가 갖고온 황금을 통해서 그 황금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라는 것을 알게된 서동은 자신이 매일같이 마를 캐던 금오산에 금이 넘쳐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금오산에 엄청난 양의 금덩이를 캐내게 된답니다.

 

엄청난 양의 황금을 손에 쥔 서동은 신라 진평왕에게 황금을 선물로 주어서 진평왕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고, 또한 백제 대신들과 백성들로부터도 신망을 받게 된 서동은 마침내 백제의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백제의 30대임금 무왕입니다.

 

여기까지의 서동에 관한 내용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서동이 과부의 아들이라는 삼국유사 내용과는 달리 백제 29대왕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아뭏튼 서동은 백제 무왕이라는 것이고, 무왕은 바로 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의 부왕입니다. 그렇다면 의지왕은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였다고 추론할 수도 있지요,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격언처럼, 금오산 아래의 연못가에 살았던 가난한 서동이 선화공주를 아내를 맞이한 후, 백제의 무왕으로 벼락출세하게 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바로 서동설화입니다.

 

이렇게 선화공주를 만난 서동은 벼락출세해서 나중에 백제의 왕이 되었으니, 서동은 왕권과 예쁜 부인이라는 두마리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던 대단한 행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동은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두가지를 한꺼번에 모두 획득하게 되었으니, 모든 남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상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서동은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익산에다 미륵사라는 절을 창건하게 된답니다. 여기까지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그린 서동설화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서동설화의 내용처럼, 서동이 나중에 무왕이 된다는 것과 무왕의 아내가 선화공주였다는 것이 정말 역사적 사실일까요?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이 나중에 백제의 무왕이 된다는 것과 그의 부인이 신라출신의 선화공주라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서동설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각에서 서동설화에 대한 또다른 주장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서동설화에 나오는 것처럼, 백제 무왕의 부인이 선화공주가 아니라는 반전의 증거가 강력히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전북 익산 미륵사에 있는 미륵사지석탑이 붕괴될 우려가 있어서, 2009년도부터 미륵사지석탑에 대한 해체 및 복원사업을 실시했습니다.

미륵사지석탑이 너무 노후화되어 붕괴되기 전에, 석탑의 돌들을 모두 떼어내어서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미륵사지석탑을 해체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석탑기둥의 하단부에서, 금동사리외호금제 사리봉안기가 출토되었습니다.

 

금동사리외호는 사리를 넣어두는 금으로 만든 함이고, 금동 사리봉안기는 미륵사를 세우게 된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글귀가 세겨져 있는 금동판이랍니다.

 

그런데 이 금동 사리봉안기의 기록에 의하면, 미륵사를 세운 사람은 무왕의 부인인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합니다.

 

기존에는 미륵사를 세운 사람이 선화공주라고 알려졌었지요. 미륵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선화공주가 사자사라는 절로 가는 도중에 길가의 연못속에서 솟아오르는 미륵삼존상을 목격했다고 하며,

이 미륵삼존상을 모시기 위해서 선화공주의 강력한 건의로 무왕이 미륵사를 건립했다고 합니다.

 

무왕은 익산에 새로운 왕궁터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고, 선화공주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익산에 왕궁과 함께 웅장한 규모의 미륵사라는 절을 건립했습니다.

 

무왕은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고, 전북 익산에 미륵불국토의 세상을 열기 위해서 미륵사를 지었던 것이고. 아예 수도를 익산으로 천도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왕은 야심차게도 익산에다 웅장한 규모의 왕궁과 불탑, 그리고 미륵사를 지었고, 수도를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시도했던 겁니다.

그런데, 신하들의 반대로 무왕의 익산천도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익산에는 거대한 규모의 왕궁터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아뭏튼 선화공주의 제안에 따라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지요.

 

그런데, 2009년 미륵사지석탑 해체과정에서 나온 금제 사리봉안기에는 분명히 미륵사를 세운 사람은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후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세웠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내용과 배치되는 내용이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기록보다 당대의 기록이 더욱 우선시되기 때문에, 640년 후에 쓰여진 삼국유사의 기록보다는 당대에 기록된 금제 사리봉안기의 기록이 더 우선시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세운 것이 아니라, 금제 사리봉안기의 기록에 나온대로 사택왕후가 미륵사를 세웠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택적덕은 백제의 최고 품계인 좌평으로 있었던 명문가의 귀족으로서, 백제정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권세높은 귀족인데, 그의 딸이 바로 무왕의 부인 사택왕후입니다.

 

결국 무왕의 진짜 부인은 신라에서온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후라는 것이며, 미륵사를 창건하도록 한 사람도 바로 사택왕후라는 겁니다.

이것이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이 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세웠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내용은 거짓된 내용일까요?

선화공주와 관련된 내용은 아마도 서동설화가 오랜기간 동안 구전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내용이 변형되고 와전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어쩌면 금제 사리봉안기의 기록대로 사택왕후가 무왕의 정비이고, 선화공주가 무왕의 첩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는 무왕과 먼저 결혼한 선화공주가 일찍 죽고, 사택왕후가 후처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서동이라는 인물도 과연 무왕이 맞는 걸까요? 서동설화를 소개한 삼국유사의 무왕편에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어서, 서동이 무왕이라는 것을 강력히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서동의 주인공은 백제의 무강왕이라고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또다른 설명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백제에는 무강왕이라는 임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무강왕과 앞글자가 비슷한 무왕을 무강왕으로 추정했을 겁니다.

 

 

서동이 동성왕이라는 가설

 

다른 일각에서는 서동이 무왕이 아니라, 동성왕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동이 무왕일 경우에는, 여러가지 현실적인 모순점들이 많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무왕은 왕이 된 지 3년째 되던 해부터 재위기간 40년 동안 계속해서 총 16번이나 신라와 격렬한 전쟁을 벌였고, 대부분 무왕이 먼저 신라에 쳐들어간 전쟁들이었습니다. , 무왕에게는 신라와 신라의 왕은 반드시 죽여야할 적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무왕이 진짜 서동이라면, 신라의 왕은 장인이고 신라는 처갓집이 있는 왕후의 고향이지요.

그리고 무왕이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는 국혼까지 맺은 신라와는 친교를 맺고, 서로 동맹국가처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무왕은 자기부인의 친정아버지인 신라의 진평왕과 친교를 맺기는커녕, 엄청나게 격렬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점이 매우 이상한 점이며, 이런 점 때문에 혹시 무왕이 서동이 아닐 수도 있다는 반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백제의 무왕은 국혼까지 맺은 장인의 나라와 16번씩이나 피말리는 전쟁을 계속 벌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욱이 무왕의 4대 조상인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신라군에게 처참한 죽임까지 당했습니다.

 

554년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한 때부터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깨어졌고, 이때부터 백제와 신라는 서로 철저한 원수지간이 되어버렸습니다.

 

554년 이후, 백제인에게 신라는 성왕을 죽이고 배신한 원수 같은 나라로 인식되었는데, 백제왕족인 서동이 신라의 도성까지 들어가서 구혼한 끝에, 신라공주와 결혼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동성왕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제의 동성왕 때에는, 백제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서, 백제는 신라와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동성왕이 스스로 신라의 소지왕에게 요청을 해서 신라귀족 비지의 딸과 혼인을 맺음으로써,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졌고, 동맹관계가 성립되었던 겁니다.

 

이 시기에 백제 동성왕이 신라귀족의 딸과 혼인을 해서 백제와 신라가 동맹관계를 멪는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동성왕편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 당시는 북쪽에 가장 크고 강한 국가인 고구려가 있었고, 고구려가 남진정책으로 백제의 첫번째 수도인 한성을 빼앗아가는 등,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백제는 전략적으로 고구려에게 함께 대항할 동맹국으로서 신라가 필요했던 것이며, 동성왕의 요청으로 백제와 신라가 결혼동맹을 맺고 함께 고구려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백제와 신라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동성왕 때가 서동설화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 서동설화의 주인공 서동은 백제의 무왕이 아니라, 신라귀족의 딸과 결혼까지한 동성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지요.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수없이 많이 치른 무왕보다는 신라의 최고위직 귀족의 딸과 결혼까지 해서 동맹관계를 맺은 동성왕이 서동에 더 적합한 인물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동성왕과 혼인을 한 여성은 신라귀족 이찬 비지의 딸인데, 그녀의 조상 중에는 왕족의 혈통도 일부 섞여있기 때문에, 서동과 결혼한 신라공주는 백제귀족 비지의 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본에 전래되어 내려오는 설화 중에 마나노장자 설화가 있는데, 이 마나노장자 설화의 내용이 백제의 서동설화와 매우 유사합니다.

 

마나노장자는 어릴 적부터 숯을 굽는 아이로 불렸다. 그런데 나라국의 다마쓰공주는 신으로부터 장래에 숯굽는 아이가 남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전해듣고, 여러지역을 돌아다닌 끝에 숯굽는 소년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 소년에게 청혼을 해서 두사람은 혼인을 하고 부부가 된다.

 

다마쓰공주와 혼인을 한 그 소년은 산속에서 엄청난 양의 황금을 발견해서 큰 부자가 되었고, 만석꾼이라는 의미의 마나노장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 후에 마나노장자는 불교에 깊이 심취하였는데, 백제에서 온 승려 연성법사에게 의뢰해서 연성사라는 큰 절을 건립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일본의 마나노장자 설화의 내용인데, 마나노장자 설화는 소년이 황금을 발견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점과 소년이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 그리고 큰 절을 세웠다는 점이 모두 백제의 서동설화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나노장자 설화는 백제에서 전래된 서동설화를 본따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마나노장자 설화의 주인공 마나노장자는 6세기 초반에 일본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백제의 서동설화가 일본의 마나노장자 설화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서야 합니다.

 

그런데, 마나노장자는 6세기 초반의 인물인데, 서동을 무왕으로 규정할 경우 무왕은 7세기 전반의 인물이기 때문에, 서동설화가 마나노장자 설화보다 더 늦은 시기가 되므로, 서동을 무왕으로 규정할 경우에는 시기적으로 맞지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서동설화가 일본에 전래되어서 그 영향으로 마나노장자 설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서동설화의 시기가 마나노장자 설화의 시기보다 무조건 앞서야 합니다.

 

그런데 서동을 동성왕으로 규정한다면, 동성왕의 활동시기가 479년에서 501년까지이므로, 6세기 전반의 마나노장자 설화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기 때문에, 시기적인 면에서 동성왕이 서동이라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마나노장자 설화에 영향을 주었던 서동설화의 주인공 서동은 무왕보다는 동성왕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 서동설화의 서동은 무왕보다는 동성왕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여지며, 그리고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딸 선화가 아니라 신라 귀족 비지의 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강성한 고구려의 침략의 위협과 잦은 내란으로, 나라가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백제의 24대 왕으로 즉위한 동성왕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신라와 국혼을 치러서 굳건한 동맹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위협에 대해 백제와 신라가 공동으로 대처함으로써, 국가안보를 더욱 튼튼할 할 수 있었고, 그리고 이같은 안정된 기반을 토대로 해서 백제를 다시 부흥시켜나가게 됩니다.

 

사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인 장수왕의 시기였는데, 고구려의 장수왕이 강력한 남진정책을 추진하는 바람에, 백제의 첫번째 수도인 한성을 빼앗기고, 백제가 웅진천도를 하는등 남쪽으로 계속 밀려나는 아주 위태로운 상황이었답니다.

 

그래서 동성왕은 신라귀족의 딸과 혼인을 함으로써 신라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백제는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의 강력한 남쪽공략에 공동방어전선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던 겁니다.

이같은 논리에서 볼 때에 서동설화의 서동은 동성왕이며, 선화공주는 신라귀족 비지의 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서동설화의 서동을 동성왕이라고 규정하면,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아귀가 딱 들어맞기 때문에, 일부학자들은 서동을 동성왕으로 보고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하나의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삼국유사의 흥법 법왕금살편을 보면, 무왕이 35년에 걸쳐서 왕흥사를 완성하였는데, 이 왕흥사라는 절이 미륵사다 라는 기록이 나온답니다.

 

, 삼국유사에는 미륵사를 건립한 왕이 무왕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동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과 상통하므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는 서동이 무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두가지 이율배반적 사실이 서로 상충하고 있어서,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역사적 상황으로 볼 때에는 서동이 동성왕일 가능성이 높지만, 순수한 기록상으로만 볼 때에는 서동이 무왕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동요와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서, 우리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사랑을 나누었던 한국판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제인물이 누구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서동의 실제인물이 무왕인지 동성왕인지를 놓고 계속해서 열띤 논쟁이 이어지고 있고, 선화공주 또한 진평왕의 딸 선화인지, 신라귀족 비지의 딸인지를 놓고 역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랍니다.

 

제가 보기에는 서동의 실제인물은 그 시대적인 상황으로 보면, 동성왕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되는데요.

 

한자어 서동의 우리식의 음이 맛동또는 마동인데, 동성왕의 이름인 마대, 모도와 엇비슷하다는 점과 우리역사서에 백제왕이 신라왕족과 결혼했다는 유일한 기록이 바로 동성왕과 신라귀족 비지의 딸의 결혼이라는 점등이 서동이 동성왕일 것이라는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백제 무왕이 수많은 치열한 전쟁을 벌일 정도로 적대관계에 있었던 적국 신라의 공주와 결혼한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않는다고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400여년 전에 이뤄졌던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는 우리역사상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로맨스의 주인공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제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제인물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우리학계에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지못하고 있으며, 치열한 논쟁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보다 더 심도높은 연구분석을 통해서,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제인물이 누구인지가 속시원히 밝혀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음속에서는 실제 역사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1400년 동안 서민들 사이에 인기리에 전해져 내려왔던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진짜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게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국경과 신분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애틋한 사랑을 나눴던 두사람의 사랑이야기가 너무도 아름답고, 우리들 가슴속에 뭉클한 감동을 주고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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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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