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김수로왕과 왕비 아유타국 허황옥(허황후)의 결혼과 정체, 인도 루트, 타밀어와 한국어의 공통점

 

오늘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즉, 왕비라고 알려진 허황후(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허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허황후가 어떻게해서 가야로 왔고, 가야의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었는지, 그리고 허황후(허황옥)가 어느나라 태생인지 등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고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요.

 

고대국가 시절 변한지방에 가야라는 나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부인으로 알려진 허황후의 정체와 그녀가 왜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는지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어요!

 

✦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

 

허황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김수로왕을 이야기해야 하겠지요.

김수로왕은 김해지역에서 금관가야를 건국한 가야국의 시조이지요. AD 1세기경에 건국된 금관가야는 그냥 ‘가야’ 또는 ‘가락국’이라고도 하며, 이 가락국은 김수로왕이 처음으로 건국한 나라랍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인데, 김해지역에 9간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었는데, AD 42년에 북쪽의 하늘에서 이상한 노래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서 밧줄에 묶인 금상자 하나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금상자안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나왔는데, 그 황금알이 갑자기 여섯명의 아린아이로 변했고, 그 어린아이 중에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쎈 아이가 바로 김수로였고, 김해지역의 수장인 9간이 김수로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김수로는 가락국(가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수로왕이 가락국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황금알에서 나온 김수로가 키가 무려 9척(2m)나 될 정도로 엄청나게 체격이 크고 힘이 장사였을 정도로 기골이 장대했기 때문에, 9간들이 그를 하늘에서 내려보낸 최고의 지도자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9간은 고대시대의 김해지역에서 각 지방을 다스리는 그 지역의 군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매우 비범한 모습으로 주변사람들에게 위엄을 떨치며 숭배의 대상이 된 김수로는 어렵지않게 가락국의 시조가 되었으며, 김해를 비롯한 6개 지역을 통합해서 6가야 연맹을 다스리는 최고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수로왕은 천신 이비가지와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고유의 천신사상이 나오는데, 우리 고대국가의 대부분의 시조들은 모두 천신의 아들 또는 손자라고 나오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고대국가 시조들의 공통점이며, 이것이 우리나라 고유의 ‘천신사상’입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의 아들일 정도로 귀하신 몸이니, 그가 땅을 다스리는 통치자, 즉 왕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하자면, 옛 변한지역을 다스리던 9명의 군장(9간)들에게 어느날 하늘로부터 한 계시가 전해졌습니다.

 

하늘로부터 9간들에게 "너희들에게 위대한 왕을 내려보내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9간들은 이 노래를 불러서 왕의 하강을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9간들이 이 노래를 부르자, 실재로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왔고, 그 황금알 중에서 제일 먼저 알을 깨고 나온 김수로가 9간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  김해지역에서가락국(금관가야)을 건국하게 됩니다.

 

이 때 9간들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구지가’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김유신장군도 김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금관가야의 10대왕 구형왕이 신라의 법흥왕에게 항복하면서 금관가야는 멸망했고, 금관가야의 왕족과 후손들은 모두 신라에 귀부하여 신라의 관리로 살아갔는데요.

 

신라에 항복한 구형왕의 3대손이 바로 김유신이며, 신라에 귀부하여 신라의 관리로 살아가던 김유신이 장군이 되어서 큰공을 세우고, 삼국통일의 큰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계보로 따지면,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 후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수로왕은 왕이된 후, 신라와 중국의 관제를 모방해서 가야의 관직을 설치하는 등 문무제도를 정비해나갔고, 소국이었던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의 영토분쟁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등 나름대로 업적을 쌓아나갔답니다.

 

여기서 궁금한 건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즉 왕비에 관한 사항입니다.

김수로왕의 부인은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 즉 허황후라고 합니다.

 

◆ 김수로왕의 부인이자 왕비인 허황후(허황옥)의 정체

 

허황옥(허황후)는 아유타국에서 가야국으로 와서 김수로왕의 부인 즉, 왕비가 되었고, AD 32년부터 AD 189년도까지 무려 158년간 살았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신화적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었다는 허황옥(허황후)는 어느나라 사람이고,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삼국유사에는 허황옥(허황후)의 고향은 인도 아유타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 기록을 근거로 사람들은 허황옥(허황후)이 인도에서 온 여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김해시에 수로왕비릉(허황후 묘)이 현존한다고 합니다. 이 삼국유사의 기록과 허황후의 묘를 근거로 해서 허황후가 실존인물이며, 그녀가 인도 아유타에서 온 여인이라고 합니다.

 

허황옥(허황후)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건무 24년에 9간이 왕을 접견할 때에 왕에게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까지 배필을 얻지 못했으니, 저의 신하들 딸 중에서 가장 예쁜 여인을 골라 대왕의 배필로 삼겠습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김수로왕은 ‘짐이 이곳으로 와서 왕이 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짝을 지어 왕후로 삼는 것도 하늘의 뜻이니, 경들은 너무 심려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유천간에게 명하여 준마를 대동하고 경주를 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색의 돛단배가 붉은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항행해왔습니다.

유천간 등 신하들은 이 소식을 곧바로 김수로왕에게 아뢰었고,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구간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가서 그들을 친절하게 맞이하게 했습니다.

 

구간들은 배에서 나온 한 아리따운 공주를 맞이하고, 그곳에 왕림한 김수로왕 앞으로 데려갔고, 공주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 부왕과 황후가 저에게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서 우리 두사람이 함께 천황을 보았는데, 천황은 가락국의 왕 수로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이 된 자로서, 그는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자이다. 나라를 건국하였지만 아직 배필을 만나지 못했으니, 공주를 그에게 보내어 그의 배필로 삼게하라”고 말한 후,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왕은 저에게 곧바로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고 명했고, 저는 멀리서 배를 타고와 이제야 왕의 용안을 가까이서 뵙게 되었습니다’ 라고 허황옥은 말했습니다

 

허황옥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한 김수로왕은 ‘나는 자못 성스러워서 멀리서 공주가 올 것을 미리 알고있었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나에게 찾아왔으니, 짐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허황옥과 곧바로 혼인식을 올리고, 그녀와 사흘밤낮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김수로왕은 허황옥이 타고온 배에 함께 타고있던 15명의 뱃사공에게 450필의 비단과 쌀 150섬을 주어, 본국으로 귀국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김수로왕은 아유타국에서 찾아온 허황옥을 자신의 부인인 황후로 삼고, 그녀를 궁궐로 데려가서 중궁에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가야국에 올 때, 특이한 탑 하나를 갖고왔다고 합니다.

 

허황옥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항행해갔을 때, 거쎈 파도와 풍랑에 막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부왕이 그녀에게 파사석탑을 싣고가라고 명했고, 그녀가 이 탑을 싣고가자, 풍랑이 멈추고 바다를 쉽게 건널 수 있어서 가야국의 땅에 정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파사석탑이 실제로 허황옥이 인도에서 갖고온 것인가에 대한 그 진위여부를 놓고 학계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만일 진짜로 허황옥이 파사석탑을 인도에서 갖고왔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허황옥(허황후)은 인도에서 온 공주가 맞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습니다.

 

파사석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며,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한 형태의 탑입니다. 또한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라고 합니다.

 

허황옥은 파사석탑만 갖고온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종류의 다채로운 비단, 금과 은, 구슬과 옥, 유리구슬 장신구등 이루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부장품과 선물들을 갖고왔답니다.

 

 

◆ 허황옥(허황후)이 갖고온 파사석탑의 정체

 

금관성 호계사에 있는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가야에 속했을 때,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온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지금도 이 파사석탑은 원형 그대로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남아있는데요.

 

이 파사석탑의 정체를 살피는 것이 허황옥(허황후)이 실존한 인물인지, 그리고 그녀가 실제로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봅니다.

 

파사석탑은 5층으로 되어있고, 그 조각이 매우 기묘하며, 돌은 붉은 얼룩무늬가 나있고, 연한 재질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의 연구로 이 파사석탑의 돌이 한반도에는 존재하지않는 돌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파사석탑의 돌은 한반도에 나지않는 외국에서 들여온 돌이라는 겁니다.

 

고려대연구진이 파사석탑의 성분을 정밀 분석한 결과, 파사석탑의 재료인 붉은색의 탑돌이 한반도에는 없는 성분인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배달문화연구원장 허명철박사가 연구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파사석탑은 재료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인도의 아유타지방에서만 나오는 파사석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파사석탑의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발견되지않고, 인도의 동굴사원인 아잔타 엘로아나식에서 볼 수 있는 불탑의 형태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즉, 허황후가 갖고왔다는 파사석탑은 그 재질이나 형태가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인도의 재질인 것으로 밝혀졌답니다.

 

또한 중국기록에서도 파사석은 천축(인도)이 그 원산지라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파사석탑의 파사석 즉, 파사돌은 고대 인도 타밀어로도 똑같이 파사돌이라고 불렀습니다.

파사돌은 ‘부모’를 뜻하는 ‘파사’와 돌을 뜻하는 ‘돌’이 합쳐진 합성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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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 타밀어인 ‘돌’이 우리나라의 ‘돌’과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우리나라의 ‘돌’이라는 단어는 1세기경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후의 파사돌에서 유래한 말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고대 인도의 타밀지방에서는 자녀가 멀리 떠날 때, 부모가 자녀들의 평안과 신의 가호를 빌기위해서 몸에 부적과도 같은 파사돌(파사석)을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인도의 아요디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도지역에서는 마치 부적처럼 양미간 사이에 파사돌가루를 바르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바다의 노여움과 거친 풍랑을 막기위해서 부모가 허황옥(허황후)에게 주었다는 파사석탑의 내용과

인도 타밀지방에서 자녀의 안전을 지켜줄 목적으로 부모가 여행을 떠나는 자녀에게 파사석을 부적으로 준다는 풍습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은 내용을 근거로 하면, 허황옥(허황후)이 파사석탑을 부모로부터 받아 가야국으로 갖고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결론, 파사석은 한국에서는 전혀 나지않는 돌이고, 파사석의 재료가 인도의 아유타지방에서 난다는 점과 파사석탑이 형태가 인도의 불탑형태와 동일하다는 점,

또한 파사석이 인도에서 자녀의 안전과 평안을 기원하는 부적처럼 쓰인다는 점은 허황옥(허황후)이 인도에서 왔음을 증명해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인도북부에 있는 아요디아는 고대시기에 아유타국이 존재했던 지역입니다.

 

이 곳 아요디아지방에서는 상인들이 돌을 갈아서 만든 돌가루를 주민들에게 판매하고, 사람의 이마에 바르는 관습이 존재하는데, 주로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 이 돌가루를 이마에 바른다고 합니다.

이 돌가루를 이마에 바르면, 1년 한해동안 안녕과 평안을 이룰 수 있고,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돌가루가 바로 ‘파사석’입니다.

 

지금도 인도 아요디아에서 주민들이 파사석 돌가루를 이마에 발라서, 안녕을 기원하는 풍습이 남아있는데요.

이 아요디아지방이 바로 허황후의 고향인 아유타와 지명이 같은 지역입니다.

 

이 아유타지방(아요디아)에서는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허황옥이 항해의 안전을 기할 목적으로 파사석으로 만든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온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파사석 돌가루를 몸에 바르는 풍습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또한 고고학자의 연구분석에 의해서, 금관가야(가락국)가 위치했던 김해의 양동리고분에서 출토된 코발트블루 유리와 다크블루 유리의 화학적 구성물이 고대 인도 유리의 것과 일치함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랭턴 박사는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목걸이가 인도산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옛 가야지역의 고분에서 발굴된 유리구슬 목걸이류의 유물들이 인도산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것은 가야지방에서 발굴된 유리구슬 목걸이들이 AD 1세기경 허황옥(허황후)이 가야국의 김수로왕에게 시집올 때, 예물로서 갖고온 장신구들이 아닐까 합니다.

 

인도 동남쪽에 있는 항구 아리카메두에서도 코발트블루 유리가 많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김해지역과 인도 해안지역에서 똑같이 코발트블루 유리 장신구가 발굴되었다는 것은 고대 시기에 가야국과 인도가 서로 활발한 인적교류활동과 교역활동을 벌였다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김해 양동리고분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목걸이 유물을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그 시기를 측정한 결과, AD 1세기의 유물인 것으로 확인되었답니다.

 

AD 1세기면, 허황옥이 가야국을 방문한 연대인 AD 48년과 일치하는 연대입니다.

 

이처럼 삼국유사의 기록과 파사석탑의 유래,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여러 유물들과 흔적들을 근거로 살펴보면,

고대시기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허황후)이 가야국의 김수로왕에게 시집을 왔다는 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인도에서 한국까지의 거리가 직선상으로 약 5,000km나 되는 매우 먼거리인데요. 이처럼 고대시기에 인도의 공주가 5,000km 이상의 거리를 항행해와서, 가야국의 국왕에게 시집을 왔다는 것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도 허황후의 고향으로 알려진 타밀나두 주, 이곳에는 타밀어를 쓰는 칸야쿠마리지역이 있는데, 이곳의 예전지명은 아유타였다.

 

이것은 AD 1세기경에 인도의 아유타국과 우리 가야국이 인적교류와 물적교류를 포함해서 양국간 활발한 교역활동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원래 가야국은 항해술이 무척 발달해서 고대시기에 요서지방과 산둥반도, 일본등과 활발한 무역활동을 했던 해양무역국가로 유명한 나라이지요.

 

이처럼 고대시기에 주변의 여러나라들과 활발한 교역활동을 해왔던 해상무역국가 가야국이 동북아를 넘어 동남아지역인 인도에까지 진출해서,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교역활동 했다는 것이 허황후신화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가야가 인도의 한지역의 왕족인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은 가야국이 인도의 아유타국과 정치적 연맹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 1세기경 가야지방 고분에서 출토된 왕족유골의 주인공은 인도계

 

서울대 의대 서정선교수 연구팀은 AD 1세기경 가야시대의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 예안리고분 유골의 유전자DNA를 분석해보았더니, 인도의 남방인의 DNA와 매우 가까웠으며, 이들이 인도 남방지역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합니다.

 

1세기경, 가야지방 고분에서 발굴된 왕족유골의 유전자가 인도 남방인의 유전자와 흡사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즉, 가야국의 왕족에 인도 남방인의 혈통이 포함되었다는 겁니다.

 

한 언어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인도 남부지역에서 사용하는 드라비다어(타밀어)와 우리말은 무려 1,000개가 어휘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도의 드라비다족이 고대시기에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어 인도 타밀어 한국어 인도 타밀어
엄마 엄마
아빠 아빠
아버지 아버치 아주머니 에자마니
나는 가다 가다
이것봐 잉게봐 사람 사남
이리와 잉게와
강가 갈비 갈비
쏘루 비단 비단

 

한국어 인도 타밀어
길쌈 길쌈
윷놀이 윳노리
팽이놀이 팡이노리
궁둥이 궁디

 

이외에도 한국어와 타밀어가 똑같은 말로는 아기를 달랠 때 쓰는 말로서 ‘도리도리’ ‘짝짜꿍’ ‘곤지곤지’ ‘죔죔’ ‘어부바’ ‘까꿍’ 입니다.

 

이처럼, 인도 남부의 타밀지역에서 쓰는 타밀어와 우리 한국어간에 유사한 말이 너무도 많은데, 무려 1,000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국어와 인도 타밀어가 유사한 것은, 고대시기에 한반도에 정착한 선주민의 일부가 인도 등 남방으로부터 이주해왔음을 증명해주는 유력한 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인도에서 이주해온 무리 중 하나가 허황옥(허황후)로 대표되는 아유타집단일 것이며,

허씨세력은 한반도남부의 유력한 정치세력인 가야국과 결혼동맹을 맺어서, 자신들의 정치적 귄위와 입지를 다졌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즉,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온 데로, 아유타국의 허황옥(허황후)과 김수로왕이 혼인을 맺음으로써,

인도 남방계의 정치세력과 한반도남부의 정치세력이 정치적 동맹관계를 결성하고, 가야지역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다고 보여집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후는 김수로왕과의 사이에 10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하며, 그 중 한명의 왕자가 김수로왕의 대를 이었다고 합니다.

 

허황후가 낳은 10명의 아들 중 장자 거등은 태자가 되어 김수로왕의 왕통을 이어받아 거등왕이 되었고, 두명의 왕자는 허황후의 요청으로 허씨 성을 물려받아서 김해 허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나머지 7명의 왕자는 모두 불교에 귀의하여 사원에 들어가 불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에는 허황후의 능이라고 전해지는 고분이 존재합니다.

 

결론적으로, 삼국유사에 김수로왕과 혼인한 여인으로 나오는 허황후는 여러가지 정황근거 상 인도 남부지역의 타밀나두에서 온 이주민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국유사에 허황후가 아유타에서 왔다고 소개하였는데, 인도 남부지역에 있는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가 옛날에는 ‘아유타’라고 불리웠다고 하는데, 허황옥(허황후)은 타밀지역에서 왔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1,000개가 넘는 한국말이 고대 타밀어와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허황후는 타밀어를 쓰는 지역에서 온 것이 거의 확실해보입니다.

 

허황후가 인도남부 타밀지역의 옛 ‘아유타’라고 불리우는 칸야쿠마리지역에서 가야국으로 이주해와서, 가야국의 왕족과 혼인을 맺어서 가야국의 왕비가 되고, 그녀와 측근들은 가야의 유력한 정치세력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허황후가 우리나라에 와서 정착하면서, 자신의 모국어인 타밀어를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시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현재 1,000개가 넘는 한국말이 타밀어와 일치한다는 점은 허황후의 인도 타밀지역 도래설의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인도에서 건너와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허황옥(허황후)에 대한 이야기와 허황후가 김수로왕과 혼인하게된 비사, 그녀의 정체, 그녀가 도래하게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소개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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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주몽부인 소서노의 업적과 죽음, 최후, 아들 온조와 권력투쟁

 

우리나라에서 고대시기에 두 개의 고대국가를 건국했던 여장부가 있었는데, 혹시 누구인지 아시나요?

 

고대시기에 고구려와 백제라고 하는 두 개의 고대국가를 건국했던 뛰어난 여성은 바로 소서노랍니다.

 

만주의 부족장의 딸 소서노는 주몽을 도와서 함께 고구려를 건국했고, 연이어서 아들 온조를 도와 백제를 건국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건국의 일등공신이었지요.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있어서 두 개의 고대국가를 건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뛰어난 정치가 소서노의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창업비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백제를 건국한 후에 벌어졌던 아들 온조와 소서노의 치열한 권력암투, 그리고 소서노의 최후에 대해서도 소개해드리겠어요!

 

고구려와 백제라고 하는 고대시기에 위대한 두 개의 국가를 세우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던 여걸 소서노와 그의 아들 온조 사이에 벌어졌던 백제왕실 내부의 치열한 음모와 책략,

권력다툼 등 그동안 숨겨져왔던 권력이면의 치열한 암투 이야기도 함께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그리고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소서노의 최후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기원전 18년경, 지금의 수도인 서울 부근에서 세워졌던 국가가 바로 백제입니다.

그리고 이 고대국가 백제를 건국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여장부가 바로 소서노이며, 그녀는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건국하는데도 커다란 기여를 한 여걸입니다.

 

이렇게 소서노는 고대시기에 고구려와 백제라고 하는 두 개의 국가를 건국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불세출의 뛰어난 여장부이고, 위대한 국가건국자였습니다.

 

오늘은 고구려에 이어 백제라는 두 개의 고대국가를 건국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소서노의 업적과 고구려와 백제건국 이야기, 그리고 소서노의 최후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일반에 알려지기로는 고구려를 건국한 건국자는 주몽이지요.

그런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바로 소서노입니다.

 

만일 소서노가 없었더라면,  고구려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비록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하더라도, 소서노가 경제적 지원을 하지않았더라면 주몽은 결코 고구려를 건국하지 못했을 겁니다.

 

원래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에 주몽은 동부여의 왕자였지요. 그런데 동부여에서 치열한 권력다툼이 발생하고, 권력다툼의 희생물이 된 주몽은 동부여에서 탈출해 남쪽으로 망명해왔습니다.

 

그런데 동부여에서 탈출해나올 때 주몽은 빈털터리로 쫒겨왔기 때문에, 국가를 세울 만한 기반이나 경제적 여건을 전혀 갖추지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한나라의 기틀이 될만한 막대한 경제적 후원과 막강한 군사력까지 아낌없이 지원해줌으로써,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줬던 인물이 바로 소서노였답니다

 

소서노는 부여의 왕자출신인 주몽이 국가를 건국할 수 있도록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다 대주었고, 주몽은 소서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서노는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소서노는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땅으로 내려와서 또다른 고대국가 백제를 건국했던 겁니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는 데에도 소서노가 상당한 규모의 경제적 후원을 했기 때문에, 온조가 어렵지않게 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대시기에 있어서 고구려와 백제라고 하는 2개의 국가를 건국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소서노는 당대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국가설계자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같이 국가건국에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소서노였지만, 그녀는 아쉽게도 남자와의 사랑에서는 두 번이나 실연을 당하는 등 성공하지못한 것같아 큰 아쉬움을 주고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소서노의 고구려와 백제 건국이야기와 함께 두남자와의 결혼, 그리고 소서노와 아들 온조와의 애증관계에 대해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 소서노, 주몽을 도와 고구려 건국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주몽은 원래 부여의 왕족이었지요.

그런데, 주몽출신에 대해 두가지 엇갈린 기록이 존재한답니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을 동부여의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공개토대왕비문에는 주몽을 북부여의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주몽은 원래 북부여의 왕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입니다.

 

그렇지만 유화부인이 주몽을 임신을 한 상태에서 해모수로부터 버림 받했고, 그녀는 다시 동부여의 금아왕과 재혼을 한 후, 동부여땅에서 주몽을 낳았기 때문에, 북부여의 왕자였던 주몽은 자연스럽게 동부여의 왕자로 신분이 바뀌게된 겁니다.

 

이렇게 유화부인이 두명의 왕과 관계를 갖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주몽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이 서로 다른 차이점이 발생하게된 겁니다.

 

주몽이 북부여의 왕자이든, 동부여의 왕자이든, 그가 부여의 왕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몽이 왕자로 있었던 동부여에서 치열한 왕위계승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주몽은 금아왕의 첩실부인의 아들로서 서자의 신분인데 반해, 금아왕의 정실부인의 아들이 두명이나 있었고,

정실부인의 맏아들인 대소왕자와 주몽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졌고,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주몽은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 동부여를 탈출해 남쪽지방으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주몽은 자신의 추종세력 몇 명을 이끌고 남쪽땅 졸본지역으로 내려왔고, 그 곳에서 새로운 국가를 창업할 야심찬 계획을 품었는데,

이같이 국가를 건국하는 데에는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필요한데, 그러한 인력과 자금을 지원해준 사람이 바로 소서노였습니다.

 

그당시 졸본지방을 다스리는 계루부의 연타발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소서노는 연타발의 둘째딸이었고, 한 부족을 다스리고 있던 군장 연타발은 풍부한 재산과 상당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졸본지역에서 나라를 건국하려는 야심을 품은 주몽은 연타발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함으로써 족장 연타발의 엄청난 인력과 풍부한 물자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는 연타발이 죽은 후, 소서노의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얻어서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부여에서 빈털터리 신세로 쫒겨났던 주몽에게 소서노가 지원해준 엄청난 자본과 인적자원은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며, 소서노는 고구려건국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졸본지역으로 온 주몽이 얼마나 가난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습니다. 처음 졸본에 도착한 주몽은 비류수가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강가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을 정도로 가난했던 주몽이 돈이 어디 있어서 천문한적인 자금과 물자가 들어가는 국가건국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만일 소서노의 경제적 후원이 없었더라면,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건국에 있어서 소서노는 단순한 지원자가 아니라 고구려건국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실세라고 할 수 있고. 고구려의 공동창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인인 연타발이 졸본지역의 부족장이었기 때문에, 연타발이 갖고있는 권력과 군사력도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우 궁금해하는 부분이 따로 있는데, 소서노가 주몽의 유일한 부인이었는가 하는 부분과 주몽이 소서노의 유일한 남자였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서노는 주몽의 유일한 부인이 아니며, 주몽도 소서노의 유일한 남편이 아니랍니다.

 

소서노는 주몽의 유일한 부인이 아니며, 주몽은 두명의 부인이 존재했었답니다

 

주몽은 동부여에 살고있을 때, 결혼을 한 예씨부인이 있었고, 주몽이 졸본지역으로 망명을 와서 또다시 소서노와 재혼했으므로 주몽에게는 부인이 두명 있는 셈입니다.

 

또한 소서노도 주몽을 만나기 전에, 이미 우태라는 남자와 결혼을 해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우태가 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일찍 과부가 된 소서노는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을 만나 서로 눈이 맞아 재혼을 했던 겁니다.

 

이렇게 주몽과 소서노는 둘다 이미 결혼했던 경력이 있는 상태에서 재혼을 했던 것인데, 문제는 새롭게 왕이된 주몽의 후계자 자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입니다.

 

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이된 주몽은 소서노의 내조를 받아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다져나가면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자신을 지원해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소생인 비류와 온조도 자신의 친아들처럼 아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하는데, 고구려왕인 주몽의 후계자인 태자 자리는 오직 하나뿐인데, 주몽의 아들은 셋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왕자들 간에 권력 갈등이 생길 여지가 존재했었답니다

 

그리고 고구려건국 후에 부여에 남아있던 예씨부인과 아들 유리가 졸본지역으로 주몽을 찾아왔고, 주몽은 예씨부인과 아들 유리를 큰 기쁨으로 맞이해주었다고 합니다.

 

친아들을 맞이한 주몽은 주저없이 자신의 친아들 유리를 태자로 책봉했고, 소서노의 소생인 비류와 온조는 태자책봉에서 제외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주몽의 입장에서 볼 때, 비류와 온조는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 소서노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의붓아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친아들인 유리를 왕의 후계자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태자책봉에서 제외당한 후, 왕위세습에 큰 기대를 품었던 소서노와 주몽 간에는 큰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요. 소서노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를 세우는 데 자신의 전재산을 투입해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던 소서노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자신의 아들이 태자책봉에서 탈락한 것에 대해 큰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도 역시 유리의 태자책봉에 대한 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형 비류는 동생 온조에게 ‘처음 부왕이 부여에서 쫒겨왔을 때,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서 나라건국의 기틀을 만들어주는 등 큰 위업을 세웠는데, 부왕이 왕위를 유리에게 물려줘서 유리가 왕이 되고 말았다’고 말하면서

부왕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 큰 불만을 품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나옵니다.

 

주몽의 첫 부인의 아들 유리가 태자가 되었을 때. 소서노와 비류, 온조가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 부분입니다.

 

결국, 주몽한테 커다란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낀 소서노는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 땅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소서노는 배다른 자식 유리가 왕이 된다면 자신과 두 아들의 앞날에 희망은 사라지고, 자신들의 신상에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고 걱정하게 되었고,

결국 두 아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한반도의 남쪽땅으로 이주해갔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주몽의 친아들인 유리가 태자가 되자, 크게 두려움을 느낀 소서노는 아들 비류와 온조 그리고 10명의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땅으로 내려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서노의 계획은 고구려의 영향이 전혀 미치지않는 남쪽 땅으로 내려가서 두아들에게 새로운 국가를 창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자는 것입니다

 

소서노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자금을 만들었고,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10여명의 신하를 대동한 채, 한반도의 남쪽 한강유역으로 이주해 갔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소서노가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이주해올 때에, 열명의 신하 외에도 수많은 백성들이 그녀일행을 따라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당시 소서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기원전 18년, 남쪽 한강부근으로 내려온 두아들 중 큰아들 비류는 인천부근에 있는 미추홀로 가서 나라를 건국했고, 둘째아들 온조는 한강부근에 있는 하남지역에서 백제라는 국가를 건국했습니다.

 

그런데 인천쪽 미추홀로 가서 나라를 세웠던 비류는 소금기가 많고 습기가 많은 그 땅에서 편히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되고, 백성들이 굶주리는 등 큰 낭패를 겪게되자, 크게 낙심한 나머지 화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한강부근의 하남위례성을 도읍지로 정하고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성체가 견고할 뿐만 아니라, 토지가 비옥하고 모든 백성들이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됨으로서 국가의 기반을 확립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소서노가 남쪽 땅에서 국가를 건국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고 정했는데, 나라이름 ‘백제(百濟)’는 ‘백명의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 따라왔다’ 즉, 수많은 백성들이 즐겨이 따라왔다는 의미에서 백제라는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또한 소서노는 남쪽 땅에서도 주몽한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투입해서 온조의 백제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고, 그 결과 온조는 어렵지않게 국가를 건국할 수 있었고, 온조가 세운 백제는 크게 번창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소서노는 자신의 남편과 아들 두사람으로 하여금 두 개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할 수 있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던 건국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5,000년 역사 중에서 한 여인이 두개의 국가를 건국하는데 관여한 사례는 소서노가 처음이며,

소서노는 단순히 국왕의 부인이나 왕의 모후 외에도 두 개의 고대 국가 건설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설계자이자, 뛰어난 정치가였습니다.

 

 

◆ 백제건국의 일등공신 소서노의 최후와 미스테리한 죽음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의 도움을 받아 백제를 건국한 후, 성체를 튼튼히 만들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국가를 성공적으로 운영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시기에 북쪽의 국경지대에서는 말갈족이 끊임없이 쳐들어왔고, 국경지역을 어지럽혔습니다.

 

말갈족이 자주 북쪽의 국경을 넘어서 쳐들어왔는데, 이렇게 침략을 일삼은 무도한 말갈족은 백제의 존립과 안위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지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후 8년이 되었을 무렵, 말갈족 3천명이 국경을 넘어쳐들어와 거칠게 하남위례성을 포위해서 공격했지만, 온조와 백제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잠근 채 방어에만 전념했습니다.

 

10일 동안 하남위례성의 성벽을 공략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던 말갈족은 결국 식량이 떨어져서 스스로 후퇴하게 되었는데, 이때 온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가서 말갈족의 후미를 기습공격해서 대승을 거뒀습니다.

 

그 후에도 말갈족이 북쪽국경을 넘어서 계속 쳐들어왔지만, 온조가 친히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싸워서 말갈족들을 완전히 섬멸시켜 버렸습니다.

 

백제는 원래 그 조상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왕의 성씨를 부여씨로 정했고, 자신들의 원래 시조인 동명왕을 모실 수 있는 동명사당을 세워서 동명왕을 기렸습니다.

 

그런데 백제건국을 도와줬던 온조의 모친 소서노는 그 후에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백제건국 후 삼국사기에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딱 한번만 나오는데, 매우 이상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큰 논란이 되고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온조왕 본기의 기록 - 온조왕 13년에 서울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했고, 그리고 다섯마리의 호랑이들이 성안으로 들어왔고, 갑자기 왕의 어머니가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의 그 다음 기록에 의하면, 온조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요망한 징조가 자꾸 일어나 나라가 편할 날이 없고, 나름 형세가 매우 불안하니, 도읍지를 한강 남쪽으로 천도할 것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소서노가 죽었다는 기록이 소서노에 대한 마지막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매우 이상한 내용이 나오는데, 늙은 할멈이 갑자기 남자로 변했다느니, 또한 다섯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성안으로 들어왔다느니, 상식적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기록은 실제의 일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록은 온조왕 제위 13년경 백제의 도성 안에서 무슨 큰 이변이나 대사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이 기록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백제의 도성 안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면서 갑자기 안좋은 사변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가 갑자기 사망했고, 이같은 요망한 일이 자꾸 일어나니까, 온조왕은 수도를 다른 곳으로 천도할 것을 명했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을 본격적으로 의역해 풀이해보겠습니다.

 

여기서 ‘늙은 할멈’은 왕의 어머니 즉 소서노로 풀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권력 또는 권력자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섯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에서 호랑이들은 무서운 존재들 또는 강력한 무리를 의미하므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으로 풀이해볼 수 있습니다.

 

이 기록들을 서로 연결해 종합적으로 해석해보면,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가 권력의 정점에 서서 나라의 권력을 휘어잡고 통치해나갔는데, 이 당시 아들 온조와 어머니 소서노 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온조가 어머니 소서노의 옹위세력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군사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는 살해를 당했다고 보여집니다.

 

고구려를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백제를 세울 때에도 어머니 소서노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벡제가 건국된 후, 아들 온조보다 어머니 소서노에게 더 큰 권력이 집중되고 소서노가 사실상 권력을 독점해나가자, 권력에서 소외된 아들 온조가 큰 불만을 풀었을 겁니다.

 

아들 온조는 아무리 공로가 많은 어머니이지만, 이 나라의 왕은 엄연히 자신인데, 왕권을 어머니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어머니 소서노세력을 축출할 계획을 세웠을 겁니다.

 

결국 어머니의 전횡을 더이상 볼 수 없었던 온조는 성밖에서 군사들을 끌어들여 친위쿠데타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소서노를 권력의 정점에서 끌어내려 살해했을 것이고, 온조가 다시 왕권을 되찾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어머니 소서노의 권력독점에 항거한 아들 온조의 친위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며, 그 당시 군사들간의 전투과정에서 어머니 소서노가 살해당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기록에 온조왕이 성내에서 요상한 일이 일어나니까 도읍지를 다른 곳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요. 한 국가의 수도는 그렇게 손쉽게 천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큰 위기에 처할 정도의 큰 변란이나 쿠데타가 일어났을 경우에만, 부득이하게 수도를 천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기록을 의역해보면, 수도를 천도할 정도로 국가적으로 큰 쿠데타나 군사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서노가 고구려건국에 이어 백제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백제 건국 후 소서노세력과 아들 온조세력 간의 치열한 권력암투가 일어났고,

온조왕이 군사를 동원해 소서노세력을 척결하는 과정에서 어머니 소서노가 피살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이고, 주관적인 분석일 뿐, 실제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이 기록이 매우 이상하고, 너무 특이한 표현이 담겨있어서, 최대한 당시의 상황과 가깝게 해석해 본 것입니다.

 

이 해석이 사실이라면, 소서노는 정말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비극의 여주인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몽의 부인이면서 동시에 온조의 어머니로서 두 번씩이나 나라를 건국하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던 여걸 소서노!

그런데 그토록 위대한 업적을 세웠던 여걸 소서노는 남편과 아들 등 두 남자에게 두 번씩이나 배신을 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권력은 부인이나 어머니와도 결코 나눠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소서노는 국가를 두 번이나 건국하고서도 건국 후에는 남편과 아들에게 보기좋게 토사구팽당했던 불행한 여성이기에, 그녀의 최후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깝고, 슬프기만 합니다.

 

두 개의 나라를 세웠던 위대한 여장부 소서노 최후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하고 안타깝지만, 고대시기에 고구려와 백제라고 하는 두 개의 위대한 고대국가를 건국했던 소서노의 위대한 업적은 우리역사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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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

인현왕후 폐위사건과 이유와 복위사건, 왕비 초상화, 장희빈의 매질

역사이야기 2020. 9. 15. 23:38

 

인현왕후 폐비사건과 복위, 질투, 장희빈의 악행과 최숙빈의 폐비복원운동

 

사극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는 우리역사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며, 또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후궁으로 평가를 받고있는 장희빈은 숙종을 유혹해서 궁녀에서 왕비로 신분상승을 이룩하지만, 인현왕후와 최무수리를 핍박하고 저주한 죄로 인해 마침내 사약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오늘은 가장 인자한 왕비로 알려진 인현왕후와 사악한 요부로 알려진 장희빈을 둘러싸고 일어난 인현왕후 폐비사건과 장희빈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숙종의 사랑을 더 많이 받기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관계였는데, 사실 두여인은 그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서인세력과 남인세력의 정치싸움에 이용당한 측면이 매우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서인세력은 인현왕후를 숙종의 왕비로 천거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켜나갔고, 남인세력은 장희빈을 숙종에게 소개하면서 자신들이 정권을 잡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사실이다.

 

이와같은 서인과 남인의 정치게임에 의해서 숙종의 여인으로 발탁되었지만,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한 지아비를 사이에 놓고, 지아비의 더 많은 사랑을 받기위해서 서로 시기하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비련의 여인들이었다.

 

 장옥정(장희빈)은 역관출신인 장형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궁궐로 들어와 장렬왕후의 궁녀로 있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서 단번에 후궁의 첩지를 받았던 인물이다.

 

역사기록에도 장옥정의 미모가 상당히 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장옥정은 우리 조선시대의 후궁 중에서 가장 미모가 탁월한 인물이 아닌가 사료된다.

 

숙종실록의 기록에 보면, ‘나인으로 뽑혀서 궁중으로 들어온 장옥정은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장옥정의 빼어난 미색을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옥정의 아름다운 미모에 홀딱 반해서 그녀를 숙원으로 봉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소의, 숙원, 희빈으로 승급시켜 주면서 장옥정을 상당히 총애하였다.

 

 

그렇지만, 장옥정(장희빈)이 숙종의 눈에 띄여서 숙종의 총애를 받게되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그녀의 성품이 극악하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장옥정을 쫒아냈고, 그 후 장옥정은 6년 동안 사가에서 외롭게 지내게 된다.

 

사실 이 때에 남인과 가까웠던 장옥정(장희빈)이 궁궐에서 쫒겨났던 이유는 서인세력이었던 명성왕후와 그녀의 오라버니인 김석주가 남인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때문이었다.

 

좌측이 인현왕후의 초상화이고, 우측이 장희빈의 초상화이다. 초상화에서 보듯이 인현왕후는 후덕한 인상을 가졌고, 장희빈은 요염하면서도 표독한 인상을 지녔다

 

당시 남인과 정적관계였던 명성왕후와 서인세력이 남인의 정계진출을 막기 위해서, 남인과 가까웠던 장옥정을 내쳤던 것이다.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관계, 숙종의 사랑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과 암투

 

장옥정을 출궁시켰던 1681년도에 왕비간택령이 내려지고, 서인세력의 추천으로 민씨(인현왕후)가 숙종의 계비가 되어 궁궐로 들어오고, 왕비로 책봉된다.

 

서인세력과 남인세력간의 정치적인 세력다툼으로 궁궐에서 쫒겨난 장옥정은 6년 동안 사가에서 지내면서 커다란 원한을 품었을 것이며, 숙종이 다시 자기를 부를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절치부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1686년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가 열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첫사랑인 장옥정(장희빈)을 궁궐로 다시 입궁시켰으며

6년만에 다시 궁궐로 돌아온 장옥정은 또다시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숙원으로 봉해지면서 그녀의 위세가 기고만장해진다.

 

이렇게 다시 궁궐로 환궁한 장옥정이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되자, 당연히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현왕후와 다시 후궁이된 장희빈 사이에 숙종의 사랑을 둘러싸고, 치열한 갈등과 암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과거 여러 사극드라마에서 인현왕후가 마음이 어질고 인자한 성품을 지닌 덕망놓은 왕비로 묘사되어 왔는데, 실제로도 인현왕후가 과연 덕망 높고 인자한 성품을 지녔을까?

 

실제 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인현왕후의 실제모습은 우리가 그동안 알고있었던 후덕한 성품의 인현왕후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서 놀라움을 주고 있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장희빈을 실제로는 많이 시기하고 질투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간특한 성품을 지닌 여인이기에, 궁밖으로 쫒아내야 한다고 숙종에게 직접 간언한 적도 있었다.

 

조선 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덕망 높고 인자한 성격의 인현왕후의 모습과 많이 달라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 인현왕후의 고변, 자신의 꿈속에서 본 장희빈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이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자신의 어젯밤에 꾼 꿈 이야기를 했는데, ‘명성왕후(숙종의 모친)가 꿈에 나타나 저[인현왕후]에게 계시를 내리셨는데

장옥정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의 사주를 받고서 입궁했으니, 하루빨리 장옥정을 궁밖으로 내쫒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인현왕후는 장옥정의 팔자에는 본래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공이 없을 것이다라고 숙종에게 간언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에 기록된 부분으로서, 장희빈(장옥정)이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이를 시기한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비난하고 간언하는 내용이어서

인현왕후가 실제로는 장희빈을 상당히 많이 시기질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인현왕후의 이러한 간언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왠일인지 장희빈의 손을 들어준 것 같다.

 

당대의 미인이었다는 장희빈

 

이러한 인현왕후의 장희빈디스가 있은 후, 168810월 소의로 승격한 장희빈은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생산해냈고, 그 때까지도 아들이 없었던 숙종은 첫아들을 얻고 뛸 듯이 기뻐했다. 이 때 낳은 장희빈의 아들이 나중에 경종이 된다.

 

아들이 하나도 없었던 숙종의 첫아들을 낳아준 장옥정은 그 공로로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하였고, 장희빈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고,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장희빈이 아들을 낳지못할 것이라고 장희빈악담을 늘어놓았던 인현왕후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숙종은 더욱더 인현왕후를 찾지않게 되었다.

 

그리고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곧바로 원자로 책봉하는 교서를 내렸는데, 이에 송시열 등 서인세력이 반대를 하자크게 분노한 숙종은 송시열, 김수항 등 서인세력을 정권에서 축출하고 남인중심의 조정을 다시 부활시켰다.

 

이것이 기사환국인데, 숙종과 남인세력은 승정원과 사간원, 사헌부의 3사와 조정의 핵심요직에서 서인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남인으로 대체했는데

서인의 거두이자 인현왕후의 친척인 송시열을 제주도로 유배당한 후, 사약을 내려 사사했다.

 

이렇게 대대적인 정계개편이 일어나자, 가장 난처한 처지에 빠진 것은 인현왕후였고, 인현왕후는 아무런 백그라운드가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자신의 지지세력이었던 송시열 등의 서인세력이 대거 폭망한 상태이고, 장희빈은 원자를 낳아서 후궁 최고의 품계인 빈의 자리에까지 올라가는 등 기세등등해졌다.

 

한술 더 떠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짐승이 환생한 사람이니, 절대 아들을 낳지못할 팔자라고 말했던 그녀의 언동을 비난하면서, 그녀가 교사스럽고 간특한 부인이라며, 왕후에서 폐위시킬 것을 명했다.

 

숙종은 표면적으로는 인현왕후가 투기를 일삼고 덕이 없으니 왕후의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인현왕후를 폐위시켰지만

사실은 그동안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던 서인세력의 뿌리를 완전 뽑기 위해서, 서인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를 왕후의 자리에서 폐위시켰던 것이다.

 

1689년 서인정권의 몰락과 함께 인현왕후는 거짓을 고변하고, 왕을 조롱하고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폐서인되어서, 궁궐밖으로 쫒겨나 사가에 연금되었다.

 

인현왕후가 궁궐밖으로 쫒겨나자 마자, 장희빈은 왕비로 승격되었고, 장희빈의 아들 윤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서인과 남인의 정권투쟁과 장희빈의 원자생산으로,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여인의 위치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으며, 장희빈은 자신의 아들은 왕세자가 되고 자신은 국모의 자리에 올랐는데 반해인현왕후는 왕후의 자리에서 쫒겨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왕후에서 서인으로 강등된 인현왕후의 처참한 몰락은 숙종의 변덕스럽고 히스테릭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인세력의 지나친 권력집중화를 견제하기 위한 숙종의 정치적 고려 때문에 이뤄진 참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확히 판단한다면,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것은, 자신이 총애하고 자신의 왕자를 잉태한 장희빈을 국모로 올리기 위한 고도의 계략이었다고 판단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숙종은 자신의 아들을 잉태한 희빈 장씨를 엄청나게 총애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최숙빈 독살음모 사건과 인현왕후의 왕후 복귀

 

그런데, 4년 뒤에 또다른 대역전이 일어나게 된다.

 

인현왕후를 폐서인으로 만들고, 왕후의 자리에 올랐던 장옥정은 4년 뒤에 희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후로 복귀하는 대반전이 일어난다.

 

인현왕후는 23살에 왕비에서 폐위가 되어, 폐가에 연금되어 6년 동안 고통스러운 폐서인생활을 하게된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난 후, 한양 장안에는 아이들의 입에서 이상한 노래가 퍼져나오게 된다.

 

‘미니리는 사철인데, 장다리는 한철일세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를 이르는 말이고, ‘장다리는 장희빈을 이르는 말인데, 즉 인현왕후는 사철내내 싱싱한데, 장희빈은 한철에 꺾이고 만다는 내용의 노래가 장안에 온통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장희빈의 세상은 한철이이서 꺾이고 말지만, 곧 인현왕후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말이다.

장희빈이 곧 왕에 의해서 짤리고, 인현왕후가 다시 복귀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김만중이 쓴 사씨남정기의 대대적인 유포로 미색을 이용해서 왕을 유혹하고 왕후를 쫒아낸 장희빈의 못된 행각을 비난하는 여론이 유생들과 백성들 사이에 폭넓게 퍼져나오게 된다.

 

또한 궁궐내에서도 궁녀들 사이에 당언문이라는 문서가 나돌고 있었는데, ‘당언문에는 중전 장씨(장옥정)는 반드시 물러나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권력에서 밀려났던 서인세력에 의해서,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이 이처럼 물밑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궁궐의 한적한 궁녀의 방에서 당시의 정치지형을 완전 뒤바꿀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다.

 

한밤 중에 궁궐시찰에 나섰던 숙종은 한 궁녀의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그 방문을 열어보았다.

그 방안에는 한 궁녀가 인현왕후의 생일상을 차려놓고, 인현왕후의 생신을 기리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바로 최무수리였다.

 

그녀는 한 때 자신이 모셨던 인현왕후의 생신날이 되자, 생일상을 차려놓고 인현왕후의 생일의식을 혼자서 치르고 있었다. 이 여인이 바로 나중에 영조의 어머니가 되는 최무수리였다.

 

 이것을 본 숙종은 최무수리의 갸륵한 정성에 크게 감탄하였고, 최무수리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 숙종은 그날밤 그녀의 방에서 함께 잠을 자면서 최무수리에게 성은을 내린다.

 

이러한 최무수리의 행동이 서인세력에 의한 짜여진 각본에 의한 행동이다, 아니다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 서인세력에 속했던 최무수리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기 위해서 행했던 일종의 인현왕후 복위운동이었다고 판단된다.

 

 아뭏튼 이것이 짜여진 각본이든, 우연한 사건이든 간에, 자신이 한 때 모셨던 인현왕후를 잊지못하고, 폐서인된 옛주인의 생신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남몰래 생신축하 의식을 치렀던 최무수리의 지극한 마음씨가 너무나도 가상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최무수리는 졸지에 숙종의 성은을 입어서, 숙원의 첩지를 받고 전격 후궁으로 승격된다.

 

원자를 생산하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면서 더 이상의 정적이 없게된 장희빈의 위세는 하늘로 솟구칠만큼 대단했고 기고만장했는데,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장희빈에게 엄청난 타격을 안겨줄 대단한 연적이 출현한 것이다.

 

숙종이 장희빈 외에도 최무수리를 총애하게된 것인데, 숙종은 최무수리에게 숙빈의 첩지를 내렸고, 그녀를 총애하였다.

 

이로써, 장희빈에게는 최숙빈이라는 강력하고도 새로운 연적이 생긴 것이다.

 

장희빈의 새로운 라이벌 최숙빈의 등장으로, 장희빈과 최숙빈 사이에 숙종의 총애와 권력을 놓고, 치열한 궁중암투가 전개되어 나간다.

 

이처럼 숙종이 최숙빈을 총애하자, 이를 눈치챈 장희빈은 최숙빈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어느날 최숙빈을 불러다가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핑계로 그녀에게 심한 매질을 가했다.

 

장희빈이 최숙빈에게 심한 매질을 한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숙종은 장희빈의 태도를 크게 질타하면서, 이때부터 숙종의 마음은 장희빈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후에 최숙빈은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은밀하게 계속 전개해 나갔는데, 그녀는 자신을 총애하는 숙종에게 인현왕후에 대한 덕담을 이야기하면서, 인현왕후에 대한 숙종의 마음을 서서히 누그려 뜨려나가는데 힘썼다.

 

그리고 숙종은 최숙빈에게 또다시 숙원의 첩치를 내렸고, 최숙원은 마침내 숙종의 아들을 출산하면서, 더욱 큰 총애를 받았다. 그녀가 출산한 아들이 나중에 조선의 21대 왕으로 등극하는 영조이다.

  

1694년도에 김춘택 등 서인세력이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모의하다가, 남인세력에게 발각되어서 김춘택 등 수십명의 서인들이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당시 정권을 잡은 남인의 영수이자 우상이었던 민암은 김춘택 등 수많은 서인들을 검거하는 등 대규모 옥사를 치렀는데

이 때에 숙종은 또다시 마음의 변심을 일으켜, 갑자기 남인의 거두인 민암을 파직 처형하고, 남인세력을 모두 권력에서 축출해버렸다.

 

 그리고 숙종은 남구만, 박세채 등의 소론(서인)인물들을 등용해서 새롭게 인사개편을 단행하고, 장옥정을 왕후에서 희빈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이것을 갑술환국이라고 부르는데,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권은 다시 남인에서 서인세력에게로 넘어가게 되며, 장옥정은 왕비의 지위를 잃고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만다.

 

그런데, 숙종은 자신이 스스로 왕후로 책봉했던 장옥정을 왜 희빈으로 강등시켰던 것일까? 그리고 남인세력을 축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갑술환국이 일어나게된 이유는 장희재에 의한 최숙빈 독살음모사건 때문이었다.

 

갑술환국이 일어나기 얼마전에, 장옥정의 오라버니이자 한성 부좌윤인 장희재는 최숙빈이 아이를 회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커다란 음모를 꾸몄는데, 그것은 궁녀를 시켜 최숙빈을 독살하는 것이었다.

 

숙종의 마음이 장옥정에게 점점 식어가고, 최숙빈에게 뜨거워져가는 상황에서, 숙종의 총애를 받는 최숙빈이 왕자라도 낳게된다면, 왕후 장씨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장옥정의 오빠인 장희재는 나중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최숙빈을 독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고, 이러한 장희재의 독살음모가 서인 김춘택에게 발각되었고, 김춘택의 고변으로 숙종이 알게된 것이다.

 

장희재의 최숙빈 독살음모사건을 접한 숙종은 크게 대노했으며, 곧바로 장희재를 체포하고 남인세력을 몰아낸 후, 다시 서인의 일파인 소론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장옥정을 희빈으로 강등시킨 후, 숙종은 폐위시켰던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복원시키고, 궁궐로 환궁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인현왕후는 폐비되어서 사가에 쫓겨났다가, 6년 만에 다시 왕비로 복위되어서 궁궐로 돌아오게 되는 대반전이 일어났다. 

왕세자를 낳아 기세등등했던 장희빈은 왕후의 자리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쫓겨났던 인현왕후는 다시 왕후의 자리로 복원되는 등 엄청난 대반전이 일어났다.

 

이처럼, 인현왕후가 폐위된 지, 6년 만에 다시 왕후로 복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최숙원과 김춘택 등 서인세력이 꾸준히 추진해왔던 인현왕후 복위운동이 성공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궁궐에서 단지 물을 길어나르는 무수리였던 최숙원은 숙종의 환심을 사고 숙종의 마음을 녹이는 등 꾸준한 폐비복위운동을 전개해나간 끝에

마침내 정적인 장희빈을 왕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폐위되었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시 숙빈 최씨가 서인 김춘택과 전략을 함께 모의해서 남인정권을 무너뜨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을 보더라도 최숙빈이 정치적으로 서인측에 속해있었고,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부분이다.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사건과 인현왕후 사망

  

1701년 음력 814, 오랜 지병을 앓던 인현왕후가 사망하였다.

숙종의 명령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그녀가 궁궐로 돌아온 후, 그녀는 오랜 유폐생활로 인해 병을 얻어서 앓아누웠다.

 

그리고 숙종은 인현왕후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최숙빈에 대한 애정이 커서 인지, 그 때부터 장희빈을 찾지않았다.

숙종은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킨 후부터 단 한번도 장희빈의 처소를 찾지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현왕후는 궁궐로 돌아온지 7년만에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는데, 이 때의 그녀의 나이는 고작 35세였다.

 

 6년 동안의 유폐생활 후, 궁궐로 복귄한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보낸 궁녀들의 감시활동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 때문에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희빈이 보낸 궁녀들이 인현왕후의 침실에까지 들어와서 인현왕후의 침전에까지 자주 왕래하였고, 심지어 문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침실안을 엿보는 행동까지 했다고 한다.

 

인현왕후는 '지금 나의 병증세가 매우 이상한데, 주위사람들이 말하기를 "귀신의 저주가 있다"고 한다'고 그녀는 오빠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장희빈이 자신의 궁녀들을 인현왕후의 침전까지 보내어서 그녀를 감시하게 하고 핍박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장희빈의 과도한 도발행위 때문에, 인현왕후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인현왕후가 젊은 나이에도 이상하게 병세가 갈수록 악화된 것은 누군가가 즉, 장희빈이 그녀를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소문이 궁중안에 파다하게 나돌았다고 하며,

결국 인현왕후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원인모를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인현왕후가 젊은 나이에 의혹스러운 죽음을 당하자, 장희빈과 새로운 라이벌관계가 된 최숙빈은 숙종에게 장희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변했다.

 

 장희빈이 자신의 처소에 몰래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매일같이 벌이고 있다.

인현왕후가 죽은 것은 사실 장희빈의 저주굿 때문이라고 ~

 

즉, 장희빈이 매일같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했기 때문에, 인현왕후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원인모를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희빈의 처소인 취선당의 한쪽에 신당이 있는 것이 실제로 발견되었고, 그 신당에서 굿을 벌인 흔적도 발견되었다.

 

이와같은 여러 정황들을 발견한 숙종은 최숙빈의 고변에 동조해서 장희빈이 몰래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시해하기 위한 저주굿을 벌였다고 대신들 앞에서 발표하였다.

 인현왕후가 죽은 같은 해인 1701년 10월 숙종은 장희빈에게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로 사약을 내려서 사사했다.

 

이렇게 장희빈이 사사되자, 결국 최후의 승자의 자리는 최숙빈에게 돌아갔다.

 

사실, 숙종에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몰래 고변한 사람은 최숙빈이었고, 

최숙빈은 궁녀때부터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벌여왔으며, 후궁이 된 후에는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의심을 받고있는 장희빈을 몰락시키기 위해서 서인세력과 함께 장희빈축출운동을 벌여왔던 인물이다. 

 

즉, 장희빈이 사사된 것은 최숙빈과 서인세력의 은밀한 계획하에 성사된 것이다.

 

 그러니,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라이벌전의 최후승자는 장희빈도 인현왕후도 아닌 최숙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현왕후가 죽고난 후 장희빈이 살아있을 경우에는 세자를 낳은 장희빈의 권세가 계속 높아질 것이고,

왕자를 낳은 최숙빈은 장희빈과 세자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계속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가게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최숙빈은 세자를 등에 업은 장희빈에 의한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최숙빈의 계산과 서인들의 계산이 딱 맞아떨어져서, 결국 서인세력의 비호를 등에 업은 최숙빈은 장희빈의 저주굿을 숙종에게 밀고함으로써, 자신의 최대의 라이벌인 장희빈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즉, 인현왕후의 복귀와 장희빈의 사사는 새롭게 숙종의 후궁으로 올라선 최숙빈의 계획하에 이뤄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희빈이 죽고난 후, 장희빈의 아들 윤이 숙종의 뒤를 이어서 왕(경종)이 되지만, 몸이 매우 약했던 경종은 즉위 4년 만에 사망하고,

결국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이 새로운 왕 영조로 등극하게 되었으니, 숙종 시기에 궁궐여인들의 암투에서는 최숙빈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대한 질투와 정치적인 이해득실 때문에, 왕비에서 폐위되는 비극을 겪었고,

장희빈은 인현왕후의 복위로 인해 왕후의 자리를 상실한 후, 질투심 때문에 행한 저주굿 때문에, 왕후자리에서 쫒겨나고 사사를 당했다.

 

그리고 최숙빈은 인현왕후 복위운동의 성공으로 숙빈의 자리에 올랐고, 장희빈의 저주행위를 밀고함으로써, 연적인 장희빈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숙종시절 궁중여인들의 암투에서는 두 여인은 숙종의 총애를 받고자하는 질투심 때문에 왕후에서 폐위되고 죽음을 당했지만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최숙빈은 인현왕후 복위운동의 최대수혜를 받아서 숙원으로 승진했을 뿐 아니라, 장희빈축출에도 성공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영조)으로 만드는 등 최후의 승자가 됐다.

 

그렇지만 냉혈한인 숙종은 세 여인들을 오직 왕권강화를 위한 도구로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여자는 사랑에 울고, 남자는 권력에 웃는다는 말이 귓가를 멤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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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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