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의 업적과 불로장생과 죽음, 어머니 조희(조태후)와 노애

역사이야기 2022. 4. 25. 20:50

진시황제의 중국통일과 업적, 불로초, 사망이유, 어머니 조태후와 노애의 불륜

 

진나라 -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7년

진시황제 -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6월 14일

 

기원전 221년 중국의 서쪽 변방에 있는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서는 역사상 가장 뜻깊은 대관식이 열렸는데, 바로 진시황제가 황제로 등극하는 대관식이었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최초의 통일군주라는 커다란 업적을 쌓았던 인물이며, 중국인들이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명으로 존경하는 황제이다.

 

젊고 야심만만했던 이 40세의 젊은이는 주나라 때 분열된 중국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통일군주로서의 위업을 쌓았고, 중국역사상 최초로 ‘황제’칭호를 사용한 인물이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하는 위대한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잔혹한 독재자로, 망상에 사로잡힌 광기어린 군주라는 오명도 함께 받고있는 인물이다.

 

진시황제는 왜 중국통일이라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독재자,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게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의 실체와 업적에 대해서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영정(진시황)이 나이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 제태후는 여불위를 승상에 임명해서 그로 하여금 전권을 휘두르게 하였는데,

승상 여불위는 영정(진시황)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 여불위가 나이 어린 영정(진시황)의 섭정을 맡아서 진나라의 최고 실세로서 자기맘대로 전권을 휘둘렀다.

 

이 여불위는 영정(진시황)의 어머니 조태후와 사실상 연인관계로 두사람은 영정(진시황) 몰래 만나서 두사람만의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고 있었다.

 

◆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태후와 여불위의 관계, 또다른 연인 노애

 

원래 영정(진시황)의 어머니 조희(조태후)는 몰락한 호족가문의 여인으로 태어났고, 본래 여불위의 애첩이었는데,

권력에 눈이 멀었던 여불위는 자신의 애첩 조희를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에게 상납하였고,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과 여불위의 애첩 조희가 관계를 맺어 낳은 아들이 영정(진시황)인 것이다.

 

그러니, 원래 여불위의 애첩이었던 조희(조태후)는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당연스럽게 태후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옛주인인 여불위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벼슬인 재상으로 임명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또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진시황제의 실제 아버지는 장양왕이 아니라 여불위라는 주장이 있다.

 

여불위가 자신의 애첩 조희를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에게 상납했는데, 그 이전에 조희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녀가 장양왕에게 시집을 가고난 후, 영정(진시황)을 낳았기 때문에, 진시황의 진짜 아버지는 장양왕이 아니라 여불위라는 것이다.

 

아뭏튼 여불위는 승상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궁궐에서 몰래 진시황의 어머니 조희와 지속적으로 정분을 나누었다.

그렇지만, 승상 여불위는 자신과 조태후의 관계를 많은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진시황제에 들키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희는 미색이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어서 그런지, 욕정 또한 매우 강했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에는 '시황제가 성인이된 후에도 어머니 조태후는 음탕함을 그치지않았고, 남몰래 근육질의 환관 노애를 자신의 정부로 삼아서 상간을 일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승상 여불위는 진시황제에게 들킬까봐 두려워서, 조희와의 관계를 끊고 자기 대신에 조희의 욕정을 만족시켜줄 다른 남자를 그녀에게 소개시켜줬는데, 그 남자가 바로 환관 노애였다.

 

그런데, 그것은 탐욕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권력의 세계에서 언제 터질지모르는 위험한 시한폭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희는 환관 노애와 궁궐에서 몰래 만나 서로 정을 통하였고, 두사람의 관계는 급기야 서로 뗄레야 뗄수 없는 내연관계로 발전했다.

 

그리고 조희와 환관 노애는 급기야 두명의 아들까지 낳고는 두사람은 함께 오랫동안 동거를 했다.

 

이제 환관 노애는 더 이상 진시황제에게 머리를 굽신거리는 환관이 아니었고,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희의 엄청난 총애를 받는 노애는 더 큰 권력을 꿈꾸게 되었다.

 

환관 노애는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희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을 야망을 갖고있었고,

급기야 노애는 군사 3,000명을 모아서 진시황을 갈아치울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같은 노애의 음모를 사전에 알아차린 진시황제는 여불위와 함께 먼저 군사를 일으켜서 환관 노애를 공격했고, 진시황제 친위군의 선제 군사공격을 받은 환관 노애는 결국 전투 끝에 체포되고 말았다.

 

환관 노애의 쿠데타를 진압한 진시황제는 쿠데타의 주역인 환관 노애와 그의 두아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자신의 어머니 조태후마저 태후의 지위를 박탈하고 가택에 감금시켜 버렸다.

그리고 장차 자신의 권력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승상 여불위 또한 함께 제거해버림으로써, 자신의 황권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승상 여불위는 진시황제의 명에 의해서 사천으로 유배를 갔는데, 유배가는 길목에서 진시황제가 내린 독주를 마시고 사망하고 만다.

즉, 진시황제는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 자신의 친아버지일 수도 있는 여불위를 냉혹하게 살해해버린 것이며, 권력은 아버지와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실천한 것이다.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고, 진나라 최고의 실권자인 여불위 제거에도 성공한 22살의 왕 진시황제는 이제는 그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군주로 올라서게 된다.

 

◆ 진시황제의 천하통일과 업적

 

이처럼 내부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한 진나라의 왕 영정(진시황제)은 이제 관심을 바깥으로 돌려서 중국을 통일하겠다는 거대한 야망을 품게되었고,

마침내 11년에 걸친 통일전쟁을 시작했으며, 진나라를 위협하는 주변의 국가들을 차례로 정벌해나갔다.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제나라, 연나라, 초나라 등 주변에 있는 여섯 개의 강국들에게 군사공격을 감행해서 이들 나라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 분열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면서, 통일제국 진나라의 황제로 우뚝 솟아오르게 된다.

 

진시황제는 능력만 좋으면 출신성분을 따지지않고 기꺼이 관리로 등용하는 등 현명한 왕도정치를 실천해나갔다.

 

이 시기에 진시황제는 법가사상가 이산, 병법에 통달한 장수 왕전, 토목기술자 정국 등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등용해서, 통일제국을 이룩하는데 중요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진시황제의 업적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전국의 도량형을 통일시켰다.

 

중국의 땅덩어리가 워낙 컸기 때문에, 각 나라나 각 지역들마다 도량형이 제각각 달라서 교역이나 조세를 거둘 때,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는데,

진시황제는 각 지역마다 제각각으로 다른 도량형을 한가지로 통일해서 보다 효율적인 교역과 거래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진시황제는 중국의 화폐를 한가지로 통일했다.

 

당시에는 중국의 각지역마다 서로 다른 화폐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다른 지역과의 무역이나 거래를 할 때에 큰 혼란이 야기될 수 밖에 없었는데, 진시황제는 중국 전국의 화폐를 표준화시키고 동일하게 통일함으로써, 다른지역과의 교역과 거래가 훨씬 수월하게 만들었다.

 

또한 진시황제는 중국전역에다 도로를 만들었고, 도로를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도로를 정비해서 군대나 관리의 파견을 쉽게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진시황제는 중국의 북부에서 남부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수로의 건설을 착수했는데, 비록 진시황제가 착수한 수로는 완공되지 못했지만, 후대에 수나라 양제때에 이 수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진시황제가 남북간 거대한 수로를 건설한 것은 조세와 물자의 운송을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진시황제는 중국의 한자를 통일시켰다.

 

이 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각 지역은 서로 다른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서의 해독도 제각각이었는데, 진시황제는 중국 전역의 제각각이었던 한자를 한가지로 통일함으로써, 문자해독의 단일화와 표준화를 이룩했다.

 

그리고 진시황제는 최초로 군현제를 실시했다. 이전의 나라인 주나라 때는 각각의 나라의 호족들로 하여금 그 나라를 독자적으로 다스릴 수 있게 했고, 주나라 왕실은 각각의 나라를 직접 다스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각각의 지역의 호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해주는 것을 봉건제라고 한다. 즉, 봉건제 하에서는 각각의 나라는 주나라왕실에서 직접 통치하지 않고, 각 나라의 제후가 스스로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했다.

 

단, 중앙에 있는 왕은 각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자인 제후만 임명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에 있는 왕은 각 제후국에 대한 통제력이 매우 약했고, 이 때문에 주나라 때에 각각의 나라들이 분열되면서, 전국시대 같은 내란전쟁이 벌어지게된 것이다.

 

봉건제도의 폐해를 잘 알고있는 진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의 황제가 각지역을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를 도입해서, 자신이 중국전역을 직접 통치했던 것이다.

진시황은 각지역마다 자신의 심복들을 직접 파견해서 자신의 명에 따라서 각지역을 다스릴 수 있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군현제’이다.

 

즉, 진시황제는 각지역에 대한 간접통치방식인 봉건제를 버리고, 직접통치방식인 군현제를 실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시황제는 업적도 많았지만, 그가 추진했던 정책 중에 잘못된 폐단도 많이 있었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들을 전부 불태워버렸고, 진시황제의 정책을 비판하는 지식인과 유학자 460명을 모두 생매장하는 ‘분서갱유’를 저질렀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진나라의 사상을 하나로 통일하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실시한 정책이었지만 너무도 잔인무도했다.

 

또한 진시황제는 그전까지만 해도 ‘왕’이라고 불리웠던 군주의 칭호를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중국의 모든 나라들을 통일한 자신에게 기존의 왕들과 똑같은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통일군주의 권위에 맞지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태황에서 ‘황’을 취하고, 삼황오제의 ‘제’를 택해서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었다.

 

◆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진시황제, 평생 불로초 찾기에 몰두

 

진시황제는 평생 죽지않는 불로장생을 꿈꾸면서도 또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하기 위해 여산에 진시황릉을 만들기 시작했고, 또한 자신의 왕궁인 거대한 아방궁을 지었다.

반응형

이 진시황릉과 아방궁을 짓는데 무려 70만명의 백성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진시황은 동서 700m, 남북 120m 크기의 엄청난 크기의 2층궁전인 아방궁을 건축했는데, 이 아방궁에는 무려 1만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크기라고 하니, 진시황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호화스럽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궁궐보다 더 큰 아방궁에는 중국전역에서 뽑은 1만명의 미인들을 모아놓았고, 진시황제는 매일같이 마음에 드는 미녀들을 골라 향락의 밤을 보냈다.

 

아방궁은 진시황이 젊은 미녀들과 향락을 즐기기 위한 그만의 은밀한 내실공간, 향락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제는 황후자리는 영원히 공석으로 남겨놓았는데, 그 이유는 어먼니 조태후의 음탕한 행위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으로 그는 또다시 어머니같은 음탕한 황후가 나올까봐, 아예 황후를 세우지않고 황후자리는 영원히 공석으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진시황에게는 후궁들은 많이 있지만, 황후는 단 한명도 없었다.

 

강력한 법률과 철저한 상호감시체제로 인해 두려움에 떨던 힘없는 백성들은 이러한 대규모공사에 동원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사하다가 죽고, 희생되면서, 많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진시황제는 북방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위해서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이 대역사에 백성 30만명이 동원되었다.

만리장성을 쌓는 과정에서 장성 아래에는 강제로 징용되어 노역하다가 죽은 남자들의 해골이 겹겹이 쌓여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 당시 중국에서는 만리장성 축조 시에는 결코 사내아이를 낳지마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만큼, 만리장성 공사 중에 많은 중국남자들이 희생당했다.

 

즉, 진시황제는 진시황제릉, 아방궁, 만리장성 등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100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수의 백성들을 강제 징용했고,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 중 수십만명이 엄청난 노역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어갔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분열된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던 중국의 존경받는 황제이지만,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동원한 수많은 백성들을 혹사시키고 죽게만듦으로써, 백성들의 엄청난 원성을 들었다는 점에서는 폭군 또는 독재자라는 평가도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고 절대권력을 차지했던 진시황제는 급기야 영원히 죽지않는 불로장생을 꿈꾸게 된다.

중국을 통일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된 진시황제는 그가 비록 절대권력을 갖고있었다고 해도 늙어가는 것과 죽음만은 피할 수 없었다.

 

재위 내내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주색잡기에 빠져서 점점 육체적으로 쇠락해가자, 진시황제는 불노불사의 명약을 찾게된다.

 

진시황제는 신선의 도술을 닦는다는 서복이라는 점술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서복은 진시황제에게 동해 한가운데 ‘봉래’ ‘방장’ ‘영주’라는 세 개의 신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영험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으로, 그곳에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로장생의 약초가 있다고 말했다.

 

서복은 진시황제에게 동남동녀 3천명을 내려주시면, 그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서 불로장생의 불로초를 구해다 바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진시황제가 하사한 3천명의 동남동녀와 3년 동안 먹을 곡식과 의복, 생필품등의 대규모 선단을 거느린 채, 서복은 동쪽땅을 향해 떠나갔다.

 

그런데, 서복이 말한 불로장생의 약이 있다는 삼신산 중 하나인 ‘영주’는 바로 지금의 제주도이고 영주산은 지금의 한라산이라고 한다. 즉, 제주도의 옛지명이 바로 ‘영주’이다.

 

옛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실제로 서복은 지금의 한라산에서 자신이 불로초라고 여기던 ‘영지버섯’ ‘금광초’ ‘옥지지’ 등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복은 이들 약초를 제주도 한라산부근에서 구했지만, 서복은 이들 약초가 결코 불로초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여기서 언급되는 ‘영지버섯’이 서복이 찾아낸 불로장생의 약초라고 하는데, 이 영지버섯은 결코 불로초가 아님은 우리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이 영지버섯이 불로장생의 약초라는 거짓된 선전이 유행한 적도 있기는 하다.

 

서복은 이들 약초를 갖고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다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서쪽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서귀포의 지명은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서복은 자신이 약속한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했지만, 특유의 교묘한 말솜씨로 진시황에게 거짓증언을 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서복은 ‘봉래산의 불로장생 약초을 찾았지만, 바닷속의 큰 괴물물고기가 나타나 방해하는 ㅂ바람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진시황에게 거짓증언을 했다.

 

이에 대해 진시황제는 서복에게 최강의 궁수들을 딸려보냈고, 또다시 서복은 이전과 같은 엄청난 선단을 거느리고 다시한번 불로초를 구하러 떠나갔다.

이처럼, 진시황제의 불로장생에 대한 열망은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대단했고, 그는 죽기 하루전까지도 불로초를 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결코 버리지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다시 불로초를 찾아 떠나간 서복은 그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진시황제에게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불로장생의 불로초를 서복으로서도 결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인데,

만약 서복이 또다시 불로초를 찾지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게되면, 그는 틀림없이 진시황제로부터 참혹한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복이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평탄하고 너른 땅(平原廣澤)’으로 바로 일본땅이다.

 

서복은 그 일본땅에 도착해서 낙후된 현지인들에게 농업과 어업, 의약, 주거문화 등의 선진문화를 전수해주었고, 서복일행은 그곳에서 토호노릇을 하면서 일본땅에 정착해서 살아갔으며, 다시는 중국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때 일본땅에 도착한 서복의 일행들은 신석기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수전농업을 하는 벼농사를 전수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을 서복일행을 일본의 경제발전을 이끌어준 ‘문화의 사자’로 칭송하고 있다고 한다.

 

불로초를 찾아떠난 서복일행이 다시 돌아오지 않자, 엄청난 배신감에 크게 노한 진시황제는 이 후 죄없는 방술사들 400명을 잡아들여서 모두 처참히 살해했다.

왜냐하면 불로초를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서복이 방술사였기 때문에, 서복 때문에 애꿎은 다른 방술사들 400명만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진시황제는 두 번씩이나 서복에게 엄청난 재물을 선사하면서까지 불로장생의 약을 구해오도록 요구했는데, 아마도 진시황제는 자신이 애써 이룩한 통일제국의 황제로서 자신의 절대권력을 쥐고 오랫동안 영화를 누리면서, 영원히 죽지않는 삶을 꿈꾸었던 것 같다.

 

이처럼, 진시황제는 평생동안 불로불사의 약초를 얻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천하를 통일한 영웅이었던 그도 결코 죽음은 피할 수 없게된 것이다.

 

그토록 불로장생을 원했던 진시황제는 기원전 210년도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진시황제는 불로불사의 명약이라고 굳게 믿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수은’이었다.

진시황제는 ‘수은’을 많이 복용했는데, 이 수은은 그의 생명을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진시황제의 수명을 단명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연단술을 연구하던 도술사들은 영원히 변치않는 물질에 불로장생의 성분이 있을 것으로 믿고서 진시황제에게 수은을 권했던 것이다.

 

진시황제는 평생 5차례 중국 전역을 순행했는데, 기원전 210년도에 마지막 순행을 떠났다. 그 마지막 순행을 하는 도중 진시황제는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고 만다.

 

이 마지막 순행길에서 진시황은 신하 조고에게 큰 아들 부소에게 줄 유서를 작성케 한다.

 

그리고 진시황제가 사망하자, 그를 호위하던 신하 조고는 숭상 이사와 서로 공모해서 유서를 위조하여, 진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를 태자로 삼고, 장자 부소와 장군 몽염에게 없는 죄를 뒤짚어씌워서 죽음을 명하는 내용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렇게 신하들의 농간으로 진시황제의 장자 부소와 충신 몽염은 죄를 뒤짚어쓴 채 사약을 마시고 사망했다.

 

그리고, 진시황제의 막내아들인 철부지 호해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는데,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호해가 황권을 잡은지 4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지 14년만에 통일제국 진나라를 멸망하고 만다.

 

이렇게 진시황제가 이룩한 통일왕국도 그가 죽음으로써, 15년만에 허무하게 무너져내리고 중국은 또다시 분열하고 만다.

 

 

반응형
Posted by 반헬싱
,

태종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 발생이유, 정도전과의 전쟁, 죽음

역사이야기 2022. 2. 14. 00:30

태종 이방원의 1, 2차 왕자의 난과 그 결과, 자녀들, 정도전 살해한 이유

 

이방원 - 1367년 6월 13 ~ 1422년 5월 30일

 

태조 이성계의 아들로서 조선건국에 커다란 기여를 한 이방원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큰 인기를 끌면서 방송되고 있습니다.

 

사극 드라마 ‘태종 이방원’은 kbs 방송국에서 12월 11일부터 계속 방영되면서 11%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의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데요.

 

과연 이방원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난세의 영웅인가, 아니면 왕권을 탈취한 탐욕스러운 쿠데타의 수장인가’ 라는 이방원에 대한 서로 다른 두가지 평가가 이어지면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은 우리 역사에 커다란 한획을 그었던 불세출의 영웅이면서, 동시에 왕권찬탈을 위해 왕자의 난을 일으킨 풍운아 태종 이방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방원에 대한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숨겨져있던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주고 있답니다.

 

이방원은 문무를 동시에 겸비한 걸출한 대장부로서, 형제 중에서 정치적 야망이 가장 크고 호전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는 영웅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졌는데요.

 

이방원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고 영특했으며, 공부를 잘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방원을 무인기질이 강한 장부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이방원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열심히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백면서생의 모범생이었답니다.

 

특히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시험에 급제한 뛰어난 재원이었지요. 이방원은 17살 때에 과거시험에 응시해서 7등으로 합격했답니다.

 

이방원이 전형적인 무인출신인 아버지 이성계집안에서 자라난 아들 중에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함으로서 아버지 이성계의 마음을 흡족하게했고, 이 젊었을 때의 이방원은 아버지에게는 총명하고 공부 잘하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었답니다.

 

이렇게 공부도 잘하고 효심 깊어서 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했던 효자이자, 모범생이었던 이방원이 몇 년 후에 엄청난 변모를 하게 되는데요.

 

바로 고려말에 정치적 격변기에 시중 최영과 수시중 이성계간의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발생한 ‘위화도회군’ 때문에, 이방원은 자의이든 타의이든 간에 엄청난 정치적 변란의 한복판에 뛰어들게 된답니다.

 

태조 이성계의 용모가 높은 코에 용의 얼굴을 하고있었는데, 그의 다섯번째 아들 이방원도 높은 코에다 비범한 용모를 하고 있어서, 아버지와 매우 닮았다고 합니다.

 

하륜은 이방원의 관상을 보고 매우 감탄했다고 하는데, 관상을 보는 재주가 있던 하륜은 이방원의 관상을 보고 장차 나라의 큰 인물이 될 영웅의 관상임을 간파했고, 그 때부터 이방원을 섬기는 일에 집중하게 된답니다.

 

◆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발생과 발생원인

 

1388년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에 의해서 위화도회군이라는 엄청난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우왕 14년에 우왕과 최영의 주도로 우리의 고토인 요동을 되찾는다는 기치 아래 요동정벌군을 편성했는데,

5만명의 요동정벌군의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가 좌군도통사인 조민수를 꾀여서, 압록강가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에 있는 우왕과 최영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성계가 국왕에게 반기를 들고 조민수와 함께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역으로 국왕이 있던 개경성을 공격하는 군사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성계가 5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자신을 임명한 우왕과 시중 최영이 있는 개경성을 공격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은 근위병을 이끌고 개경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결국 엄청난 군사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경성이 함락되면서,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 반란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에 의해서 각각 고양과 강화도로 유배되었지만, 1년 뒤에 처형당했고, 대타로 세워진 우왕의 아들 창왕도 1년 뒤에 처형당하고 맙니다.

 

이렇게 우왕과 창왕이 처형당한 후, 이성계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상승하였고,

이후 이성계는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조민수마저 살해하면서, 그는 고려조정의 최고실권자로 우뚝 솟아오르게 됩니다.

 

이성계는 형식적으로 공양왕을 왕으로 옹립했는데, 공양왕은 실권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왕이었고,

그는 재위된 지 3년 만에 이성계에 의해서 왕위 자리에서 쫒겨난 후 피살당하고 맙니다.

 

그럼, 이성계는 왜 위화도회군을 감행해서, 자신을 임명해준 우왕과 최영을 살해했을까요?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한 이유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않고, 요동으로 진격해서 군사공격을 감행했더라면, 오늘날 고구려의 옛땅인 만주는 우리의 영토로 편입되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감행함으로써, 우리의 고토인 요동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고, 우리나라는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성계는 우왕이 자신에게 요동정벌을 명했을 때부터, 소위 ‘4불가소’라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요동정벌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답니다.

 

그렇지만, 이성계의 ‘4불가소’는 명목상의 이유일뿐,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과 같은 친명파에 속한 신진사대부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 자신도 신진사대부의 영향을 받아서 고려조정의 대표적인 친명파의 일원이 되어있었답니다.

 

즉, 이성계의 ‘4불가소’에 나오는 내용의 하나인 ‘소국이 대국을 공격할 수 없다’라는 그의 입장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이성계는 대표적인 친명파였고, 중국(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도전과 조준 등 신흥사대부들과 같은 파벌을 형성하고 있던 이성계는 그들이 상국으로 섬기는 명나라를 공격하는 요동정벌에 결코 찬성할 수 없는 정치적 입장을 갖고있었고,

그래서 이성계는 결사적으로 요동정벌을 반대했던 것이고, 이러한 이성계의 요동정벌 반대는 정도전과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성계는 혼자서의 결정이라기 보다는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는 친명파 신진사대부들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위화도회군을 감행했다고 보는 것이 정답입니다.

 

또한 위화도회군을 한 또다른 이유로는 이성계세력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화도회군 직전에, 남은, 조인옥 등 신진사대부들이 군사를 되돌리자는 의견을 이성계에게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도전, 남은 등이 이성계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는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세력이 권력을 잡기 위한 계획적인 사전 공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와 이성계의 권력장악이라는 두가지 목적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군사반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사실상 유도한 장본인은 이성계와 친밀하게 지냈던 신진사대부의 수장 정도전인데요.

 

정도전은 고려말·조선초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혁명사상가로서,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왕조를 개국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조선왕조의 사상적 기반과 제도적 틀을 만들었던 조선건국의 일등공신이지요.

 

조선을 건국하는데, 한편으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사용되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정도전의 지식이 사용되었는데,

조선건국에 필요한 국가적, 사상적 이념과 제도적 틀을 만든 사람은 바로 정도전이었지요.

 

아마도 정도전이 없었으면,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않았을 것이고, 조선건국도 이뤄지지 않았을 겁니다.

 

평생 무장으로서만 살아왔던 이성계가 혼자만의 생각으로 조선을 건국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이성계가 국가를 혼자서 창업할 만큼 그룻이 큰 인물도 아니라고 봅니다.

 

한양천도와 조선궁궐의 구조를 만든 것도 정도전이었고, 조선에 유교적 국가이념을 정립한 것도 정도전이었고, 조선의 최초의 법전인 ‘조선경국전’을 집필한 사람도 바로 정도전이었지요.

 

고려말에 권문세족들이 권력을 독점해나갔고, 권문세족들의 강권정치로 인해서 정치적으로 소외당해왔던 정도전과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뭔가 든든한 뒷배경을 필요로 하고있었답니다.

 

권문세족의 파워에 밀려서 권력의 상층부로 진입하지 못하고 소외당하였던 정도전, 조준 등의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상승시킬 강력한 뒷배경이 필요했는데,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이 주목한 사람은 바로 동북면도통사로 있는 이성계였습니다.

 

정도전은 고려 공민왕시절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급진개혁가였으나, 공민왕이 죽은 후 그가 꿈꾸웠던 정치, 사회개혁이 중도에서 하차하는 좌절을 맞보았고,

매우 급진적이고 강경한 개혁정치를 추진했던 정도전 및 조준 등 신흥사대부들은 그당시 권력을 잡고있던 보수권문세족들의 견제공작에 의해서, 일제히 정계에서 축출당하고 유배를 가게됩니다.

 

그렇게 정치적, 신분적으로 암울한 상태에 놓였던 정도전은 동북면에서 확고한 군사력기반을 갖고있던 이성계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성계에게 고의적으로 접근해 회유함으로써,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과 이성계는 서로 정치적 동맹관계를 맺게됩니다.

 

고려말 우왕 시기에, 최영과 이성계가 서로 연합해 군사를 일으켜서 그 당시 권력의 최고실세였던 이인임에게 군사공격을 감행한 후, 이인임을 축출시켰답니다.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권력자였던 이인임세력을 축출된 후, 정권을 획득해 공동정권을 형성한 최영과 이성계는 한동안 불안한 공동정부를 이끌어나가게 되는데요.

이 시기에 최영은 시중으로, 이성계는 수시중의 지위를 획득하고, 두사람은 일시적인 정치적 동반자관계를 맺게 되었지요.

 

그런데, 고려 우왕 때 최고의 권력층에 있던 이 두사람, 최영과 이성계가 요동정벌이라는 문제를 두고 서로 충돌하는 관계가 되고, 서로 돌아서게 된답니다.

 

친원파였던 최영과 친명파였던 이성계, 이처럼 두사람은 처음부터 서로 정치적 이념이나 정치적 색깔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두사람은 외형적으로는 동맹관계였지만, 처음부터 나중에 폭발할 수 있는 갈등의 불씨를 갖고있었답니다.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소외를 당해왔던 정도전은 군사적 기반과 정치적 기반을 모두 갖고있던 이성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두사람은 서로 끈끈한 동맹관계를 형성했는데요.

 

무엇보다도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필요했던 정도전은 위화도회군이 일어나기 5년전인 1383년도에 당시 동북면도통사로 있던 이성계장군을 찾아갔고, 그를 회유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자신의 백그라운드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때 이미 정도전은 고려의 국운이 쇠하였기 때문에, 새왕조의 개창의 필요성을 이성계장군에게 역설하고, 토의를 했다고 합니다.

즉, 정도전은 평생 충직한 무인으로 살아온 이성계장군의 가슴에 바람을 집어넣은 것이지요.

 

정도전은 자신의 정치적 도약을 위해서 이성계가 갖고있는 군사적 기반을 이용하기 위해 이성계를 회유한 것이랍니다~

 

정도전의 회유에 이성계장군이 넘어갔고, 이후부터 정도전, 조준, 남은 같은 신진사대부들은 이성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정치적 동반자관계, 즉 동맹관계가 맺게됩니다.

 

이 후 우왕과 최영에 의해서 요동정벌정책이 추진되었고, 요동정벌군 우군도통사로 이성계가 임명되자,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뒤에서 조종해서 위화도회군이 일으켰고, 이 위화도회군을 절호의 기회로 삼았던 신진사대부·이성계 동맹세력은 그때부터 국가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보에 나서게 된답니다.

 

여기까지가 위화도회군이 일어나게된 이유와 역사적 배경이랍니다. 즉, 위화도회군은 신진사대부와 이성계군부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군사정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실권을 잡게되었고, 창왕을 죽인 후 공양왕을 세운 후, 정도전,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은 과전법을 실시하는 등 대대적인 전제개혁을 단행하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 당시 이성계의 첫째부인 한씨의 다섯번째 아들인 이방원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서, 아버지 이성계의 무장세력과 정도전의 신진사대부 세력간의 중요한 매개체역할을 담당했답니다.

 

이때 정도전의 사대부세력과 이방원은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는 새로운 왕조창업을 위한 치밀한 물밑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이를 눈치챈 정몽주가 그들의 물밑작업에 제동을 걸게됩니다.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지는 낙상사고를 당해서 앓아눕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때를 기해서 정몽주는 공양왕에 정도전과 조준에 대한 탄핵상소를 올렸고. 이성계의 최측근인 정도전과 조준을 유배보내버립니다.

 

정몽주는 고려의 왕실을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고려의 충신이었고, 정도전과 조준은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만들고자 했던 역성혁명 음모론자들이었답니다.

 

따라서 정몽주는 이성계일파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강화되면서 역성혁명의 움직임이 감지되자, 고려왕실을 지키기 위해서 먼저 선수를 쳐서, 이성계의 최측근인 정도전과 조준을 탄핵해서 유배보내버린 것입니다.

 

즉, 고려왕실을 지키기위해서 고려왕실의 최대의 위협인물인 이성계의 오른팔과 왼팔인 정도전과 조준을 미리 축출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전면에 나서서, 자신들과 정반대의 노선을 걷고있는 정몽주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이방원은 자신의 심복을 시켜서, 이성계의 병문안을 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 다리위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해서 살해해버립니다.

이방원이 보낸 자객이 선죽교부근에 잠복해 있다가, 말을 타고 지나가던 정몽주에게 기습적으로 접근해서 칼을 휘둘러 살해해 버렸답니다.

 

이는 이성계에게 알리지않고 이방원 혼자서 정몽주를 제거한 것이었고, 권력찬탈의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축출함으로써, 이후 이성계의 정권인수작업은 탄력을 받게됩니다.

 

이성계세력의 정몽주제거는 그들의 왕권찬탈 혁명을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몽주는 고려왕실을 끝까지 보호하려고 했던 고려충신파의 핵심인물이었고, 역성혁명을 결사적으로 반대해왔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지요.

 

◆ 이성계의 조선건국과 이방원의 야심

 

이방원이 자신들의 권력장악에 최대 방해요소인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이후 이성계의 왕위옹립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나갑니다.

 

이 후 이성계와 연대한 신흥사대부세력은 과전법시행 등 전제개혁을 단행함으로서, 새왕조 개창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구요.

 

이러한 시기에 이방원은 이성계의 신흥무장세력과 정도전등의 신진사대부세력 사이에서 중요한 매개체역할과 조정자역할을 담당하면서, 새로운 왕조개창작업을 주도해나갔습니다.

 

결국, 1392년 이성계세력은 고려의 마지막임금인 공양왕을 왕위에서 끌어내려 축출한 후,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면서, 새로운 국가 조선을 건국했답니다.

이때 조선의 초대임금이 된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고, 이방원은 26세였고, 그리고 정도전은 51세였답니다.

 

그런데, 이성계세력이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해나가자, 지조를 목숨같이 여기고있던 임선미, 조의생 등 고려유신들은 이러한 역성혁명에 크게 반발했고,

이들 72명의 고려유신들은 조선조정에의 동참를 거부하면서 관덕산기슭에 있는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높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유능한 선비들이었고,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서 얼마든지 조선조정에 들어가 높은 관직을 얻어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지식인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를 거부한 채, 고려왕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서,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했던 고려의 충신들이었지요.

 

그런데, 이성계세력은 자신들의 새왕조 개창에 반대하면서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한 고려유신들의 저항이 장차 백성들에게 크게 파급되어 저항세력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감을 갖게되었고,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작업에 착수하는데요.

 

두문동유신들이 자신들이 세운 새왕조의 기틀을 구축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한 이방원은 직접 자기수하들을 이끌고 두문동으로 쳐들어갔고,

선비들이 사는 두문동에 불을 지르는 화공을 감행함으로써, 두문동선비들을 모두 학살해버렸답니다.

 

이방원이 얼마나 야심만만하고 과격하고 급진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원은 좋게 말하면 과단성 있고, 추진력이 강한 사내대장부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너무 과격하고 잔인한 성향을 지닌 호전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이방원의 이러한 행동의 도덕성여부는 차지하고라도, 이방원이 새왕조 개창에 반대하는 정몽주와 두문동선비 등 여러 반대세력들을 제거한 것이 결과적으로 조선개국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도전과 이방원 등 두사람의 공이 가장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신진사대부들과 이방원, 이성계의 합작으로 모든 방해요소들을 제거한 후, 1392년 마침내 조선이 건국되었고, 이성계는 조선의 제1대 국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의 왕으로 올라선 이성계는 정도전과 협의 하에 둘째부인 강씨의 아들인 방석을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로 책봉했답니다.

 

태조 이성계가 첫째부인의 소생인 여섯명의 아들을 제외하고 둘째부인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고, 이 때문에 엄청난 파란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같이 둘째부인의 소생인 11살의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실부인의 아들이 여섯명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실부인의 어린 아들을 왕의 후계자로 삼다니' 하면서 이방원은 크게 분노하였고, 엄청나게 반발을 하게됩니다.

 

이방원은 방석의 세자책봉은 정도전이 꾸민 음모라고 생각했는데요.

 

정도전이 자신이 다루기 쉬운 나이 어린 방석을 왕위에 올려놓고, 자신이 재상이 되어 어린 방석을 마음대로 휘둘러서 자신이 영원히 국가권력을 독점해나가려는 의도를 갖고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원은 방석의 세자책봉 뒤에는 정도전이 있고, 정도전이 앞으로 국가권력을 독점해나갈 것이라고 크게 우려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더 정도전을 경계하게 되었답니다.

 

이방원과 정도전은 원래 조선건국이라는 새왕조 개창에 있어서는 서로 정치적 동지였습니다.

 

이방원과 정도전은 이성계를 국왕으로 옹립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양대기둥이었는데,

이방원이 개국의 주역을 결정하는 공신책록과 세자책봉에서 소외당하는 등 쇠락의 길을 걷는 반면,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권력의 중추에 서서 새 왕조창업을 주도해나가게 됩니다.

 

이방원은 조선건국공신 책록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은 이방원이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왕조건설에 함께 뛰었던 정도전, 조준, 배극렴 등 신진사대부들은 조선건국 공신에 책록되었지만,

누구보다도 조선건국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이방원만이 조선건국공신에서 제외됨으로써, 이방원은 크게 분노했고, 자신을 제외시킨 정도전에 대해 심한 적개심을 갖게됩니다.

 

원래 정치적 동지였던 이방원과 정도전은 이 때부터 서로 정반대의 길을 가게되면서,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방원과 정도전은 이제 조정의 최고권력을 놓고 다투는 정치적 라이벌이 되었답니다.

 

- 정도전의 업적 -

 

조선이 건국된 후, 신진사대부의 거장인 정도전은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는 것을 주도해나갔으며,

경복궁, 근정전, 사정전, 숭례문, 숭인문등 조선의 모든 궁궐과 전각의 이름을 지었고, 유교적인 국가이념과 유교적 정치체제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최초의 법전인 조선경국전을 집필하는 등 조선왕조의 제도와 기틀을 완비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조선조정의 최고실력자로 급부상했답니다.

 

즉, 조선건국의 기틀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이 신하중에서는 최고의 실력자가 된 것이지요.

 

이렇게 제신 중의 최고실력자가 된 정도전은 자신의 권력유지에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있는 왕족세력들, 특히 이방원 같은 왕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답니다.

 

특히, 야심만만하고 과격한 성정을 지닌 이방원을 심하게 견제하게 되었는데요.

조선초기만 해도 왕자 등 왕족들이 자신들의 사병을 보유할 수 있게 되어있었습니다.

 

정도전은 병권에 대한 중앙집중체제를 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왕족들이 보유하고있는 사병들을 모두 중앙군사로 흡수해서 국가에서 통합관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사병혁파’를 주장했습니다.

 

즉, 정도전은 왕족들의 사병혁파를 제창했습니다. 이 ‘사병혁파’는 자체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이방원 같은 왕자들의 힘을 약화시킬 의도로 시행된 제도이지요.

 

◆ 이방원의 제1차, 2차 ‘왕자의 난’ 발생과 발생원인

 

정도전이 이렇게 조정의 모든 것을 주도해나가면서, 왕자들을 심하게 견제해나가자,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큰 불만을 품게되었습니다.

 

이방원은 자신이 정몽주와 고려유신 등 저항세력들을 제거하는 등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서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도록 큰 기여를 한 일등공신이었는데, 정도전의 모략 때문에 자신은 철저히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고 판단했답니다.

 

더욱이 정실의 아들이 여섯명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첩실의 소생인 방석이 세자가 된 것도 정도전의 음모 때문이라고 판단했답니다.

 

방석을 세자로 앉힌 후, 세자 방석을 등에 업은 정도전이 조정의 모든 국사를 독점해나가면서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이방원은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또한 정도전세력이 왕자들이 갖고있는 사병을 빼앗아서 힘을 빼놓는다고 하니,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위기감과 불만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답니다.

 

자신들의 군사적 기반인 사병을 빼앗은 후에, 정도전이 곧 자신을 숙청할 수도 있다고 이방원은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정도전은 당시 재상급에 해당하는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판삼사사는 삼사를 아우르는 최고의 벼슬이었습니다.

즉, 정도전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최고사정기관들을 총괄 관리하는 최고위직의 수장이었고, 이는 왕 다음의 2인자였습니다.

 

정도전은 국왕의 독주를 막고 재상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정사를 펼쳐나가는 ‘재상중심의 정치체제’를 목표를 삼고있었지요.

 

반면, 이방원은 정도전의 재상중심의 정치체제에 극렬한 반대입장을 갖고 있었는데, 이방원은 재상이 아닌, 국왕이 모든 정사를 독주하는 ‘국왕중심의 정치체제’를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이렇듯, 이방원과 정도전은 국가운영방식에서부터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었답니다.

 

정도전이 추구하는 ‘재상중심의 정치체제’는 왕권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정도전은 왕권강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할 숙적이자, 정적 1호였던 겁니다.

 

이렇듯 이방원과 정도전은 왕권강화냐, 재상의 권력강화냐를 놓고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갖고있었고,

조선건국 초기부터 이 두사람은 서로 권력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라이벌이었습니다.

 

단지, 두사람의 권력투쟁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하는 그 시기만 남겨놓았던 상태였죠.

거기다가,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와 합작으로 둘째부인의 소생인 방석을 후계자로 책봉하자, 이방원의 분노와 불만을 크게 팽배하게 됩니다.

 

또한 이방원의 힘의 원천인 사병까지 혁파하는 조치를 취하자, 이방원의 분노는 폭발하고 맙니다.

정도전이 이방원 등 왕자들의 병권을 빼앗는 조치를 취한 것은 왕자들을 일반 평민들과 같은 하찮은 존재감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다름없었지요.

 

또한 정도전은 진법을 만들어서, 제2차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작전을 감행합니다.

정도전이 만든 진법은 외적을 상대로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를 실행하는 군사병법인데, 이 진법은 사실상 요동정벌을 목표로 해서 만들어진 군사전략입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추진할 것을 건의했고, 태조가 이를 승낙함으로써 제2차 요동정벌계획이 시행된답니다.

 

원래 요동정벌은 고려 우왕과 최영이 추진했던 북진정책이었는데, 그 때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소국이 대국을 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요동정벌을 격렬히 반대했고, 그래서 위화도회군을 감행했던 것인데요.

 

이제 자신들이 정권을 잡고 난 후, 과거에 자신들이 격렬히 반대했던 요동정벌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것은 엄청난 궤변이며, 정말 역사의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도전이 건의해서 새롭게 추진하는 요동정벌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군사전략전술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진법’이었고,

정도전은 진법훈련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궁궐내외의 모든 병사들을 모아서 대대적인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정도전이 주도하는 진법훈련에 이방원 같은 왕자들의 사병들이 수시로 불참하는 등 군례를 위반하는 일들이 빈번히 벌어졌고, 군기가 매우 문란해졌답니다.

 

이에 진법훈련에 불참하는 이방원 등 왕자들을 문책해야한다는 문책론이 정도전세력에 의해서 비등하게 올라왔고,

이에 이방원 등 왕자들은 큰 위협을 느끼게 되고, 이로써 양세력간에 갈등이 최고조로 올라가게 된답니다.

 

즉,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정도전이 진법훈련에 불참한 자신을 처벌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커다란 위기감을 갖게되었는데,

이렇게 긴박한 상황에서 이방원은 자신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서 정도전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됩니다.

 

이것이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 발생의 배경원인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건국공신 책록 제외와 태자책봉 제외, 그리고 사병혁파 등으로 정도전에게 큰 불만을 품고있던 이방원이 진법훈련 불참으로 인해서 처벌 받게될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먼저 정도전을 축출하기 위한 선제 군사공격을 감행했던 것이 ‘1차 왕자의 난’이랍니다.

 

이 시기에 마침 태조 이성계가 갑작스럽게 병이 나서 병석에 눕게되면서, 아버지 병문안을 위해서 이방원 등 모든 왕자들이 궁궐에 입궐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태조 이성계가 병석에 눕는 등 조정에 혼란스러운 사태가 발생하자, 이같은 혼란한 상황에서 혹시나 왕자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우려를 한 나머지,

정도전은 이방원 등 왕자들이 준동하지못하게 하기위해서, 이들 왕자들을 궁궐안에 가둬놓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형들과 함께 궁궐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족들과 함께 궁궐 안에 연금되는 상황에서, 정도전세력이 자신들을 도륙낼 것이라고 판단한 이방원은 화장실에 간다고 말하고는 남몰래 궁궐에서 빠져나와서, 자신의 집으로 도주하게 됩니다.

 

이 때 다른기록에는 궁궐에 연금된 이방원이 부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궁궐에서 빠져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방원은 궁궐에서 일시적인 연금상태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고, 자신의 집으로 가서 정도전에 대한 군사공격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이방원의 집에는 그의 부하 이숙번과 조영무, 이화, 박포 등 이방원의 측근들을 비롯한 완전무장한 수십명의 군사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또한 태조 이성계의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등 왕족들도 함께 참여해서 군사정변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답니다.

 

1398년 8월 26일, 이방원은 하륜, 이숙번등과 작전을 짠 후, 곧바로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정도전의 집으로 쳐들어갔고, 그의 집에 있던 정도전을 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있던 남은 등 그의 측근들까지 척살하였습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척살한 명분은 정도전이 반역을 꾀했다는 것인데, 그 날 정도전은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한가로이 술을 마시고 있었을 뿐, 전혀 역모행위를 하지않았습니다.

 

정도전 반역운운은 이방원이 자신의 군사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꾸며낸 거짓된 명분이었지요.

 

정도전일행을 살해한 이방원의 군사들은 그 여세를 몰아서 궁궐로 쳐들어갔고, 태조 이성계를 겁박해서, 세자 이방석을 밖으로 불러낸 뒤,

세자 이방석과 그의 형 이방번을 살해한 후, 정권을 장악하게 된답니다.

 

군사위협을 통해서 태조 이성계의 항복을 받아낸 이방원은 태조의 왕권을 둘째형 이방과(큰형이 사망함으로써, 장자의 자격 승계)에게 양위하게 하고, 이성계를 태상왕으로 봉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만든답니다.

이때 태조로부터 왕권을 넘겨받은 이방과가 바로 조선의 2대임금 정종입니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이복동생에게 잘못 이양된 왕세자 자리를 자신의 맏형인 이방과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정당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자신의 군사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답니다.

 

왕세자 자리는 여덟째 아들인 방석에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적장자인 방과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당하다는 적장자승계의 원칙을 주장한 것이지요.

 

이처럼, 왕자의 난을 통해서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과를 정종으로 옹립했고,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으로 봉해서 뒷전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400년에도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납니다.

2차 왕자의 난은 이성계의 넷째아들 이방간과 다섯째 아들 이방원간의 왕세자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벌어진 형제간의 왕위계승 다툼이었습니다.

 

1차 왕자의 난의 승리로 이방원이 권력의 실권자로 우뚝 솟아오르면서 정종의 세자로 유력해지자,

방원의 친형인 이방간이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을 품게되었고, 결국 이방간과 이방원이 서로 왕위계승을 놓고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됩니다.

 

그런 와중에 이방간이 이방원을 치기 위해 먼저 군사를 일으켰고, 이 사실을 눈치챈 이방원이 이에 대응하면서, 개경 선죽교에서 서로의 군사를 동원해서 두세력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숙번, 이맹종, 이저와 이화 등 맹장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이방원의 군사가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면서 도망가는 방간의 군사를 추격해 궤멸시켰고,

마지막에 방간을 사로잡으면서 전투는 이방원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2차 왕자의 난의 결과, 이방간은 유배형에 처해지게 됐고, 또다시 승리한 이방원은 정치적 위상이 더욱 견고해지면서, 그는 곧바로 왕세자 지위를 획득하게 된답니다.

아들 즉, 후계자가 없는 정종으로부터 동생인 이방원이 다음 보위를 이을 수 있는 세자의 지위를 부여받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왕세자가 된 때로부터 불과 9개월 후에 정종은 이방원에게 자신의 왕위마저 넘겨주었는데, 왕위를 넘겨받은 이방원이 바로 조선의 3대왕 태종이랍니다.

 

이 당시 권력구조는 조정의 모든 권력은 이방원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정종은 아무런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왕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실권도 없는 왕위에 눌러앉아 있으면서,

이방원과 그의 측근들로부터 눈총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서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는 것이 더 낮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종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동생에게 왕권을 양위하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이방원이 군사반란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가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을 안정시킴으로 인해서,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또한 태종 이방원을 높이 평가하는 또다른 부분은, 그로부터 조선역사상 최고의 위대한 성군인 세종이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슬하에 양념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등 세아들을 낳았는데, 셋째아들 충녕대군이 태종의 다음 보위를 잇는 세종이 된답니다.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이라는 군사반란을 일으켜 집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왕이 됨으로써, 그로부터 조선역사상 최고의 성군인 충령대군이 태어날 수 있었고,

그 충령대군이 왕(세종)이 되어 한글창제 등 훌륭한 문화유산을 만들었고, 모범적인 성군정치를 펼침으로써, 조선이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방원의 왕자의 난은 결과적으로 우리국민들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대한 평가

 

태종 이방원은 원래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고 영특했고,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격하고 호전적이면서 야심만만한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자신의 아버지 이성계를 왕위에서 쫒아내고,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도륙하는 등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찬탈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을 안정화시킴으로서 그의 집권이후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나라의 안정된 기반을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함께 받고 있습니다.

 

저는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게 잘못이 있다기 보다는, 애초부터 첫째부인 소생의 왕자들을 제외시키고, 둘째부인의 소생을 왕의 후계자로 삼은 이성계에게 더 큰 잘못이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 성장한 정실의 아들이 여섯명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11살밖에 안된 그것도 둘째부인의 아들을 무리하게 세자로 책봉하는 어리석은 결단을 내린 이성계에게 원죄가 있다고 판단되며,

이러한 이성계의 잘못된 결단 때문에 애초부터 왕자들의 쿠데타가 일어날만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라, 왕의 후계자를 잘못 선택한 태조 이성계에게 진짜 잘못이 있었다고 봅니다.

원래 왕의 세자 자리는 적장자(큰아들)에게 주는 것이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이자, 당연한 관행이기 때문이지요.

 

이같이 이성계가 적장자에게 세자 자리를 내려주는 적법한 관행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둘째부인의 소생인 어린 아들에게 세자 자리를 내준 것이 이성계가 자초한 엄청난 실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원의 '왕자의 난'은 노망난 아버지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왕권이 뒤바꾼 상태를 자신의 결단과 과감한 조치로 바로잡았던 정변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방원의 군사행동이 정당했다고 하더라도, 나이 어린 두 동생들을 그냥 유배 보내도 될 것을 굳이 살해했다는 점은 크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세자로 책봉된 것은 배다른 동생 이방석의 뜻이 아니라, 노망난 아버지 이성계의 뜻이었고, 이성계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자가 된 11살베기 이방석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흥미로운 아이러니한 사례가 하나 있는데요.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그 해로부터 10여년 전에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감행할 때에, 고려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역적으로 규정했는데,

우왕의 친위군에 의해서 인질이 되거나, 보복살해당할 위험에 처했던 강씨부인과 이복동생(방석과 방번)들을 이방원 자신이 직접 찾아가서 구출해주었는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이방원은 왕위계승투쟁에 휘말리면서 계모 강씨부인과 사이가 나빠지고, 이복동생들을 자신이 직접 죽이는 전과 상당히 모순된 사건을 일으켰다는 점도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눠가질 수 없다고 하는데, 당연히 권력은 형제지간에도 나눠가질 수 없으며, 권력 앞에서는 형제지간도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반헬싱
,

옷소매 붉은 끝동의 진짜 주인공 정조와 성덕임의 사랑과 승은, 의빈 성씨의 죽음과 자녀

 

MBC 사극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7%가 넘는 폭발적인 시청률을 자랑한 ‘옷소매 붉은 끝동’은 정조와 성덕임의 진솔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사극드라마이지요.

 

조선 제22대 왕이자, 개혁군주였던 정조 이산은 부인과 여러명의 후궁이 있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바로 ‘성덕임’이었답니다.

 

정조 이산은 평생동안 한명의 왕비와 네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정조가 가장 총애하였고,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성은 바로 ‘성덕임’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성덕임은 정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감이자 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조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알려진 성덕임은 정조의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했을 정도로, 소신있고 당찬 여성이었습니다.

 

왕의 ‘승은’은 왕의 요구로 잠자리를 함께 하고난 후, 후궁의 첩지를 받는 일을 말하는데, 궁궐에 사는 모든 궁녀들의 소원이 바로 왕의 승은을 입어서 입신양명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궁녀 성덕임은 당차게도 정조의 승은은 15년간 두 번이나 거절한 일화로 유명하답니다.

 

성덕임이 정조의 구애를 두 번이나 거절한 이유는 자신과 친밀했던 왕비이자 슬하에 자식이 없던 효의왕후를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덕임은 10살 때에 궁녀로 궁궐에 들어와서 혜경궁 홍씨의 처소에 있으면서 혜경궁 홍씨의 양녀처럼 보살핌을 받으면서 궁궐에서 생활했는데,

같은 시기에 궁궐에 들어온 효의왕후와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왕세손 시절이었던 1776년 정조는 성덕임에게 승은을 요구했는데, 성덕임은 세손빈(후의 효의왕후)이 자식을 낳지못하고 있는데, 제가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정조의 승은을 죽음을 맹세하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780년도에 왕이된 정조가 두 번째로 성덕임에 게 승은을 요구했으나, 성덕임은 똑같은 이유로 또다시 정조의 승은을 거절했답니다.

 

이에 화가난 정조가 성덕임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그때서야 성덕임은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이고, 정조의 후궁이 되었답니다.

 

여기서, 성덕임이 정조의 승은을 거절한 이유가 궁금해진답니다.

 

그녀는 왜 한 나라의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승은을 거절했던 걸까요? 다른 여인들은 왕의 후궁이 되지못해서 안달이 나있는데 말이죠.

 

 

당시 왕의 승은을 거절하는 것은 엄청난 불경죄로 죽음으로서 죄값을 치러야할 큰 죄였지만, 정조는 성덕임의 뜻을 받아들이고 더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성덕임은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와 친밀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지못하고 왕비로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녀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성덕임은 왕의 승은을 목숨을 걸고 거절했던 겁니다.

 

자신과 친한 효의왕후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 또한 효의왕후와의 권력암투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성덕임이 정조의 승은을 거절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면에서 성덕임은 조선여자로서는 드물게 소신있고 의롭고, 주관이 강했던 여성이라고 판단됩니다.

 

또한 성덕임은 머리가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던 여성이었는데, 21살 때에 성덕임은 ‘곽장양문록’이라는 고전소설을 한글로 필사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정조는 자신이 쓴 그녀의 ‘묘지명’에서, 성덕임은 단정하며 머리가 총명할 뿐만아니라, 재능과 기술, 예술까지 두루 갖춘 뛰어난 여인이라고 칭송할 정도로, 정조는 성덕임의 뛰어난 재능과 높은 인품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자신의 나이 30이 될 때까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왕실의 번성을 위해서 후손이 급하던 시기였답니다.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자녀를 낳지못했고, 정조의 첫 번째 후궁인 원빈 홍씨(홍국영의 누이)는 아이를 낳지못하고 병으로 사망했던 시기였지요.

 

원자의 출산이 나라의 존립과 관계되는 일이니만큼, 자식이 하나도 없었던 정조로서는 원치도 않는 다른 후궁을 얻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이 과거에 사랑했던 여인인 성덕임을 후궁으로 책봉해서 자신의 자녀를 낳게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정조는 자신을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15년 후에 또다시 두 번째 프로포즈를 한 것을 보면, 정조가 진실로 성덕임을 사랑했었고,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그녀를 잊지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는 ‘지금까지 성덕임을 후궁의 반열에 둔 지 20년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정조가 첫번째 프로포즈를 한 지 15년이 지난 상태에서 성덕임에게 후궁책봉을 했고,

또한 의빈 성씨를 후궁에 책봉한 지 5년이 지난 시점에 쓴 묘지명이기 때문에, 정조가 성덕임에게 처음 승은을 내렸다가 거절당한 시점부터 15년간 내내 그녀를 마음속으로 후궁으로 대우를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한 나라의 최고의 권력자인 왕이 자신을 거절했던 여인을 15년 동안 마음속으로 사랑해왔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15년 동안 전혀 변치않고 이어왔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래서, 정조가 평생동안 진정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여인은 성덕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조는 자신을 두 번이나 거절한 성덕임을 무리를 해서 결국 자신의 후궁으로 책봉하였고, 그리고 성덕임은 정조의 승은을 받아서 귀한 원자(문효세자)를 출산했습니다.

 

자손이 하나도 없었던 정조에게 아들(문효세자)을 낳아주었으니, 정조와 왕실은 후사를 이을 수 있게 되어서 그녀에게 크게 만족했고, 성덕임은 정3품 소용에서 정1품인 의빈이 되었답니다.

또한 성덕임은 2년 후 딸을 낳아서, 후사가 없었던 정조에게 1남 1녀의 귀중한 자녀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 성덕임의 죽음과 사망원인

 

이렇게 성덕임은 정조의 왕자와 옹주를 낳아 왕실의 후사를 이어주면서, 두사람은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녀의 행복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성덕임이 낳은 문효세자는 1786년 다섯 살 때에 돌연 홍역으로 사망했고, 성덕임 또한 아들이 죽은 지 4개월 후에 셋째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애석하게도 사망하고 말았답니다.

 

성덕임은 정조의 성은을 입은 지 5년 만에 34살의 젊은 나이로 원인모를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성덕임은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태기가 불안정하고 속이 답답하고 신체에 큰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며, 이러한 증상이 가속화한 상태에서 어떤 자극에 의해 쇼크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34살에 사망한 성덕임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옹주 또한 일찍 죽어서 그녀의 후손은 완전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조는 자신이 진실로 사랑했던 의빈 성씨를 보내고난 후, 자신의 슬픔과 한을 담은 어제비문을 남겼습니다.

 

성덕임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돌고 있습니다.

 

성덕임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셋째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태기가 안정되지못하고, 가슴이 부어오르는 통증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그 이상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빈 성씨의 사망과 관련하여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의 두번째 후궁인 화빈 윤씨가 독을 써서 성덕임을 죽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투기심이 강한 화빈 윤씨가 아이를 임신한 의빈 성씨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낀 나머지, 독을 탄 약물을 성덕임에게 먹게해서 죽였다고 하며, 정조가 화빈 윤씨에게 죄를 물어서 내쫒았다고 하는데요.

 

그렇지만, 이 독살설은 승정원일지 같은 정사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황윤석의 이재난고에만 나오는 기록 즉, 정사가 아니라 야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100%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화빈 윤씨가 의빈 성씨를 독살한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왕조실록 같은 정사에 기록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화빈 윤씨의 독살설은 왕조실록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로 인정하기 곤란한 측면이 있습니다.

반응형

다만, 화빈 윤씨가 왕비와 의빈 성씨에 대해 질투를 심하게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명문가의 자재인 화빈 윤씨가 정조의 후궁이 된 후, 아들을 출산하지 못했는데, 자신보다 더 늦게 후궁이 된 성덕임이 아이를 두명이나 출산을 했을 뿐만아니라, 또다시 셋째아이까지 임신을 하자,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투기를 했을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화빈 윤씨세력이 의빈 성씨를 중상모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 보면,  화빈 윤씨가 성덕임에게 못된 해코지를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화빈 윤씨가 상상임신을 해서 산실청까지 세웠을 정도라고 하는데, 아기를 낳지못하는 화빈 윤씨가 정조가 총애하는 효의왕후와 의빈 성씨를 심하게 투기를 했기 때문에, 정조는 화빈 윤씨에게 죄를 물어서 대궐에 따로 방을 만들어 그곳에 연금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식을 낳지못하고 정조의 사랑을 받지못했던 화빈 윤씨가 자녀를 세명이나 임신한 의빈 성씨를 심하게 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함까지 했기 때문에, 아마도 화빈 윤씨가 성덕임에게 독을 써서 독살했다는 루머가 생겨난 게 아닌가 합니다.

 

아뭏튼 문효세자가 다섯 살이 된 후 갑자기 사망했고, 그로부터 4개월 후에 성덕임도 함께 사망했는데요. 

 

의빈 성씨와 그의 아들 문효세자 모두 원인모를 병에 걸려서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자, 의빈 성씨와 연적관계에 있던 화빈 윤씨와 외숙부 조시위가 함께 성덕임을 저주하고 독살했다는 의혹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의빈 성씨에게 심하게 질투하고 모함했던 화빈 윤씨의 외숙부 조시위가 성덕임을 독살한 주인공으로 의심받았는데요.

 

실제로 화빈 윤씨의 외숙부 조시위는 상상임신을 한 화빈 윤씨를 위해 산실청을 30개월 동안이나 주관해서 문효세자의 세자책봉을 늦추려고 했고,

또한 그가 주도해서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에게 약을 잘못 올리게 했다는 의혹을 받게되었고, 결국 조시위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죽음에 연류되었다는 이유로 위리안치되었습니다.

 

의빈 성씨와 아들 문효세자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 두사람의 죽음과 관련해서 성덕임을 심하게 질투했던 그녀의 연적 화빈 윤씨의 외숙부 조시위가 약을 잘못 올리게 했다는 의심을 받고 유배당했다는 사실만 존재한답니다.

 

그렇게도 정조의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하면서 평생 궁녀로서 독신으로 삶을 살아가려했던 성덕임은 정조의 끈질긴 승은요구를 더이상 거절할 수 없어, 결국 정조의 후궁이 되어 왕의 사랑을 듬뿍 받는 빈으로서 화려한 삶을 살아갔지만,

자신이 낳은 왕자와 딸이 모두 원인모를 병으로 사망하고, 자신도 임신 도중 사망하고 만 비운의 여인이 되고야 말았답니다.

 

자신과 친한 관계였던 자식을 못낳는 효의왕후를 배려하기 위해서 정조의 승은요구를 두 번이나 거절했던 배려심 많고 의로운 성품을 지녔던 성덕임이 34살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고 말아 정말 애절하고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왜 악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오래 살게 하시고, 착한 사람들만 일찍 데려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의빈 성씨는 자신이 죽는 순간에도 정조에게 효의왕후와 함께 꼭 후사를 맺으시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효의왕후를 끝까지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니,

정말 의빈 성씨는 후궁치고는 상전에 충성을 다하는 성품이 의로운 착한 여인이라고 하겠습니다.

 

◆ 성덕임의 죽음에 슬퍼하면서 정조가 묘지에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 내용

 

다음은 정조가 성덕임의 묘지에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의 내용인데, 성덕임이 죽은 것을 슬퍼하는 정조의 마음속 깊은 곳에 한맺힌 절규라고 보시면 됩니다.

 

‘의빈 성씨가 사망하기 전날에 울면서 내게(정조) 말하기를 “자주 정전에 들러서 (효의왕후)와 함께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곧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의빈 성씨는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아 기르지못한 것을 항상 근심하면서 탄식했다’

 

- 다른 후궁 같으면 왕이 왕비를 자주 만나면, 심한 질투를 하고 저주까지 하는 후궁들이 많은데, 의빈 성씨는 정조에게 효의왕후와 자주 만나서 관계를 맺고 후사를 맺으라고 요구를 합니다,

질투는커녕 왕비의 후사 없음을 항상 근심했다고 하니, 성덕임의 충절과 의로움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의빈 성씨는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또한 의빈 성씨는 죽음에 임박했어도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한결같은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회임)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빈은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또한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아! 빈의 죽음이 너무도 슬프다! 빈이 죽었으니, 장차 내가 어찌 구하고, 어디에 기대고,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통하며 비참한 마음을 어찌 위로하고, 어찌 달래겠는가? 이에 있어서 지금의 슬픔이 거의 예전의 일보다 심하다’

 

‘아아! 빈은 후궁으로 있으면서 마땅히 사람이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되어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박복한 운명이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 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 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다.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빈이 죽음으로써 마음 한가운데가 참으로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는 진짜 이승을 떠나는구나’

 

위의 글은 정조가 죽은 성덕임을 위해 쓴 묘지명 내용의 일부인데, 정조가 얼마나 의빈 성씨를 사랑했는지, 또한 정조가 그녀의 죽음을 얼마나 슬퍼하고 애통해했는지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정조가 총명하고 검소하며, 예의 바르고 의로운 성품을 지닌 성덕임을 얼마나 존경하고 흠모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왕의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았던 후궁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정조의 ‘어제의빈묘지명’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성덕임이 정조의 승은요구를 거절했던 것은 자신과 친했던 효의왕후가 자녀를 출산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효의왕후를 배려하는 마음 때문에, 그녀가 정조의 추상같은 승은요구를 간절한 마음으로 거절했던 겁니다.

 

다른 궁녀들은 왕의 후궁이 되기위해서 온갖 술수를 다 부리는데도, 성덕임은 왕비의 후사를 위해서 자신을 낮추고 왕의 성은도 거절했던 의롭고 반듯한 여성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후궁들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왕비를 모함할 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서슴치 않는데,

의빈 성씨는 질투는 커녕 정조에게 효의왕후를 자주 찾아 후사를 만들라는 요청을 했을 정도로, 왕비를 위하고 배려하는 배려심과 충절이 뛰어났던 여인이었습니다.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무당까지 불러서 인현왕후를 저주했던 장희빈과 비교해볼 때에, 성덕임의 의롭고 뛰어난 성품이 얼마나 대단하고 존경스러운지를 생각할 때, 그녀의 이른 죽음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정조는 의빈 성씨의 유언대로 그녀의 묘를 아들 문효세자의 바로 옆자리에 안장해주었다고 합니다.

 

◆ 정조의 초상화와 의빈 성씨의 초상화

 

정조의 어진 초상화는 존재하지만, 아쉽게도 의빈 성씨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고있습니다. 정조의 초상화는 김흥도가 그린 것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에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이길범화백이 상상으로 그린 초상화가 남아있습니다.

 

정조의 외모는 할아버지 영조가 ‘너의 용모는 매우 뛰어나서 이 나라의 무궁한 복과 다름없다’고 칭찬할 정도로 매우 잘생긴 미남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정조의 아들인 순조실록에 쓰인 기록에 의하면, 눈자위가 평퍼짐하고 콧날이 오똑하며, 이마가 반듯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이길범화백이 정조 어진 초상화를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성덕임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성덕임의 초상화라고 알려진 초상화가 있어서 여기에 실었습니다.

 

성덕임은 정조가 침이 마를 정도로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예의 바르고 반듯한 성품을 지녔다고 칭찬을 했는데요.

정조가 무려 15년 동안 구애를 해서 간신히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을 정도로, 정조가 무척 사랑했던 여인인 것을 보면, 성덕임은 용모가 여성적이면서 청순가련한 미인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답니다.

 

드라마 ‘이산’에서 한지민이 의빈 성씨역을 맡았는데, 아마도 의빈 성씨의 초상화는 한지민처럼 단아하면서도 청순한 미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답니다.

 

 

반응형
Posted by 반헬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