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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과 민비의 실제얼굴 초상화

역사이야기 2018. 3. 2. 15:38

 

을미사변명성왕후 죽음의 진실, 민비의 생존설과 사진

 

18511117~1895108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치욕스러운 사건으로, 일본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을비사변이라고도 불리우는 명성왕후 시해사건때에 명성황후가 죽지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명성황후는 조선 26대왕인 고종의 정비로써, 조선후기에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비운의 왕비다.

 

조선시대에서 명성황후처럼 파란을 많이 겪었던 왕비도 드물 것인데,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마다 크게 엇갈리고 있다.

 

조선 후기의 어려운 시기에 왕비에 올라서 개혁정책을 실시해서 일본의 침략에 맞섰던 현명하고 영특한 국모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일족을 끌어들여 엄청난 사치와 부정부패를 일삼아 국가재정을 파탄내고, 결국 나라를 망치게 한 요부라는 평가도 함께 받고있는 인물이다.

 

이렇게 고종의 정비 명성황후는 개혁을 단행했던 현명한 왕비라는 평가와 부정부패를 저질러서 국가를 파탄낸 요부라는 두가지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데,

명성황후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좀 더 세밀한 분석과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명성황후가 일본인 낭인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했다고 역사에서 배워왔다.

 

대부분의 역사서적에서 명성황후 민비는 1895년 궁궐에 침입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우리들도 민비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왔다.

 

그런데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해서 종전의 기록과는 다른 새로운 내용들이 나오고 있어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 당시,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자객들에 의해서 살해당하지 않았고, 명성황후는 궁궐의 뒷문을 통해서 몰래 궁을 빠져나가 살아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을미사변 120주년 기념특집으로 방송된 명성왕후를 다시보다에서도 이같이 명성황후가 을미사변 때에 죽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명성황후가 살아있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어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다.

 

명성왕후는 을비사변 때에 궁궐로 침투한 일반자객들을 따돌리고 숨겨진 암문을 통해서 몰래 궁궐밖으로의 탈출에 성공했으며, 궁궐밖 은밀한 은신처에서 몰래 살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민비시해사건 때에 죽은 여성은 민비가 아니고 민비처럼 변장한 궁녀라고 하며, 탈출한 명성황후는 남몰래 은신처에서 계속 살아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명성황후 민비가 살해당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쩌면 우리가 알고있던 민비시해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명성황후는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도 은밀한 은신처에서 안전하게 살아갔다고 하는 민비생존설이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을미사변민비시해설의 진실은?

 

명성황후가 살해되었다는 을미사변의 진실은 무엇인가? 기존의 이론대로 을미사변때에 명성황후 민비는 정말로 살해되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주장처럼 민비는 을미사변때에 죽지않고 살아남았을까?

 

 을미사변에 관한 기존의 학설과 자료들을 먼저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민비 시해사건으로 알려진 을미사변은 원래 조선후기 동학혁명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4년 민중들의 봉기에 의한 동학혁명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그 동학혁명의 봉기를 진압하겠다는 구실로 일본과 청나라가 동시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즉 동학혁명이 일본군대를 한반도로 끌어들이는 도화선이 되었고, 한반도에 군대를 진출시킨 일본은 동학군들을 전멸시키고 승리를 한 후, 점점 조선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높여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군대와 일본군대간의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서 청일전쟁이 벌어졌고,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머줨으로써,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조선에서 청나라를 몰아내고 주도권을 잡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하면서 점차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자,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손을 잡고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해 나간다.

 

이렇게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강한 연대를 맺고 일본을 견제해나가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조선진출의 커다란 장애물로 판단하고, 은밀하게 민비(명성황후)에 대한 제거계획을 세우게 된다.

 

명성황후 살해설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나갔다.

당시 일본의 힘이 날로 커져나가자, 일본의 침략야욕을 간파했던 명성황후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너무 커진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그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일본 못지않게 영향력이 컸던 러시아를 끌어들여서 일본을 견제할 계략을 세우게 된다.

명성황후는 당시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할 만한 큰 파워를 지니고 있었다고 판단했고, 또한 러시아는 한반도에 큰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서로간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베베르공사를 자주 불러 국사를 논의하는 등 연대를 강화해나갔고, 이에 소외감을 느낀 일본은 러시아를 우대하는 조선국모 명성황후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결국 명성황후 제거계획을 세운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표면적인 이유는 조선이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와 연대를 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장해요소인 명성황후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종보다는 민비가 머리가 더 영특했고 정치적, 군사적 전술전략이나 식견이 높았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민비를 제거하지 않을 경우 조선을 침략하는 데에 많은 방해를 받게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뭏튼 일본은 한반도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여긴 명성황후의 시해계획을 세웠고, 1895108일 일본낭인들을 경복궁에 난입시켜서 건청궁에 있던 명성황후 민비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불로 화형시키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명성황후 시해는 군인출신으로 강경파에 속하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진두지휘했고, 40명의 일본낭인들을 끌어들여서 전격 실행에 옮겼다.

 

그렇지만 명성황후의 시해는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지시를 내렸다고 알려져 있고, 그 실해계획을 처음 세운 자는 이노우에 전공사였다.

 

결국 명성황후 시해인 을미사변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공사의 합작품이며, 일본정부가 승인해서 이뤄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민비살해의 최일선에 있었던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와 일본낭인 40명은 일본정부가 세운 민비시해 계획을 실행시킨 하수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1895108일 새벽 5시경, 미우라공사의 지시로 일본군대의 2개 대대가 경복궁 수비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곧바로 궁궐안으로 쳐들어가서 두 개의 대궐문은 장악했다.

 

일본군대가 갑자기 기습적으로 경복궁으로 쳐들어왔고, 궁궐수비대는 일본군대의 공격을 막으려고 싸웠지만 곧바로 패퇴해서 물러났는데,

이당시 일본군대의 공격에 대항해 싸우던 경비대장 홍계훈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이 당시 일본군대의 공격으로 성문이 열리는 데에는 고작 15분밖에 안 걸렸다고 한다.

이렇게 일본군대가 손쉽게 궁궐의 성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수비대의 일부지휘관이 일본군과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일본군대가 조선수비대를 물리치고 경복궁의 두 개의 성문을 열어제낀 후에, 곧이이서 일본낭인 40명이 궁궐로 침투해 들어갔다.

 

40명의 일본낭인들은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의 옥호루로 들어가서 명성왕후를 찾았지만, 민비를 찾는 데에 실패하자, 그곳에 있던 두명의 궁녀를 본보기로 살해했다.

그러자 민비는 복도로 뛰쳐나갔고, 민비를 알아본 일본낭인들이 민비의 뒤를 쫒아가서 붙잡았다.

 

그리고 일본낭인들은 민비를 쓰러뜨리고 민비를 발로 짓밟은 후에, 칼로 민비의 복부와 옆구리를 세 번 찔러서 살해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낭인들은 민비의 시신을 건청궁의 동쪽 바깥으로 끌어낸 후, 그 시신에 휘발유를 붓고는 화형을 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당시 민비는 45세의 한창 나이였는데, 잔혹하고 무도한 일본낭인 패거리들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명성황후를 척살한 일본낭인들을 곧바로 고종의 침소에까지 쳐들어가서, 고종을 협박해서 죽은 명성황후의 폐비조서를 내리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일본낭인들이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폐비시키라고 강요했지만, 고종은 이같은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명성황후를 죽인 후에 일본은 조선에 친일파 김홍집을 내세워 친일내각을 세웠고, ‘을미개혁이라는 일본식 개혁정책을 단행한다.

그리고 일본의 조종을 받은 김홍집내각은 고종을 겁박해서 명성황후를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렇게 명성황후가 죽은 후에는 고종은 실권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왕으로 전락했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본격화하고 일본은 조선을 서서히 침몰시켜간다. 

 

일본의 에조보고서에 의하면, 일본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명성황후에게 윤간과 시간을 자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렇게 일본낭인들을 동원해서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나중에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의 열강들이 강력히 항의를 하자, 일본은 명성황후 살해의 주범인 미우라공사와 낭인들을 일본 히로시마법정에 세워서 재판을 받게 했다.

 

그렇지만 이 재판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재판이었고, 1년이 지난 후에 미우라공사와 40명의 낭인들은 모두 무죄로 석방되었다.

 

여기까지가 여태까지 정설처럼 내려왔던 명성황후살해설의 내용이다.

   

명성황후 생존설

 

그런데 명성왕후가 생존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외국공관의 문헌사료들이 여러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로써 을미사변이후에도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생존했다는 명성황후 생존설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을미사변직후에도 명성황후 민비가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기록들이 외국공관의 여러 보고서들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아래의 내용들은 명성황후의 생존을 암시하는 당시의 외교문서의 기록들이다.

 

1895을미사변직후에 뉴욕타임스지는 고종은 명성황후가 을미사변 때에 죽지않고 기생복장으로 변장을 한 채, 궁권을 빠져나갔다고 믿고 있다고 보도를 했다.

 

또한 189662일에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라돌린이 독일본국에 올린 보고서의 내용에 의하면, ‘을미사변 직후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명성왕후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되어 있다.

 

이 독일대사 보고서는 명성황후가 죽었다는 을미사변 날짜보다 8개월이 지난후에 작성된 것이어서, 독일대사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시점으로부터 8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민비가 살아있다고 확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이 을미사변이 일어난 당시나 그 후에 조선에 주둔했던 외교관들의 여러 가지 보고서에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살아있었다는 내용들이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을미사변이 일어날 당시에 일본낭인들이 궁궐로 쳐들어와서 민비가 있는 침소에까지 들이닥쳤지만, 명성황후는 이미 변장을 하고 암문을 통해서 달아나 버렸고, 명성황후 복장으로 갈아입은 궁녀가 대신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장을 한 채 궁궐밖으로 피신했던 명성황후는 한동안 은신처에 숨어서 살아갔다는 암시내용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외교문서들에 따르면,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에 러시아대사관을 비롯해서 독일대사관, 프랑스대사관. 미국대사관 등 대부분의 열강 외교관들은 을미사변당시에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피신해서 살고있다고 강력히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외교관들이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살아있다고 믿었던 이유는 첫째 민비의 시신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왕실의 모든 일들을 기록하는 승정원일기에도 민비(명성황후)가 죽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정사의 어디에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죽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고종도 명성황후가 죽은 후에 한참동안 명성황후에 대한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의 국모가 죽었는데도 장례를 치르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한다는 것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아마도 고종이 명성황후의 장례를 오랫동안 연기해온 것은 민비가 살아있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일본이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강행하려고 하자, 고종은 러시아의 베베르공사에게 가짜인골을 가지고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종은 명성황후가 죽지않았다고 굳게 믿고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고종이 명성황후의 가짜장례식을 저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정황들이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살아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이뤄진 것들이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뒤인 1897년도에 치러지게 된다.

 

한국의 사학자들 중에도 을미사변당시 명성황후가 살해당했다고 믿지 않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밖으로 피산한 명성황후가 은밀한 곳에 숨어서 살고있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외교기록이 또하나 존재한다. 바로 을미사변을 주도했던 책임자로 알려진 미우라공사의 보고서인데,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3일이 지난 후에 미우라공사가 일본내각에 보낸 보고서의 내용이 있다.

 

이 보고서에서 미우라는 조선왕실에서는 왕후의 소재가 불분명하다고 말하고 있고, 민간에서는 왕후(명성황후)가 혼란이 일어났을 때에, 멀리 피신해서 살고있다는 설이 많이 나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을미사변을 주도했던 미우라공사마저도 명성황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전혀 알지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우라공사가 조선왕실에 명성황후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조선왕실에서는 명성황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3일이 지난 후의 시점이었는데, 이같은 미우라공사의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조선왕실에서는 명성황후의 죽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가 있다.

 

, 조선왕실에서도 명성황후가 살해되었다는 것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명성황후가 어딘가로 피신해서 살고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고종은 그 누구에게도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것은 명성황후가 궁궐을 탈출해서 은신처에 몰래 숨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을미사변이 발생했을 당시, 시위대 연대장인 이학균이 고종에게 왕비마마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여쭈었을 때, 고종은 걱정마라, 왕비는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다고 답하면서 이학균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같은 이학균의 증언은 러시아의 베베르공사의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외교문서들을 종합해서 판단해보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는 죽은 것이 아니라, 궁궐을 탈출해 은밀한 곳으로 도망가서 살고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왕후가 일본낭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당시의 정사의 기록에도 명성왕후가 죽었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그러니까 을미사변 때에, 40명의 일본낭인들은 궁궐로 쳐들어갔고, 민비의 처소로 쳐들어가서 어떤 여성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죽였던 여인은 궁녀였고, 민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미 1882년 임오군란 때에 군인들의 난동으로 죽을 뻔했지만, 탈출에 성공해서 살아났던 민비다.

 

한번 죽을뻔 했던 경험을 한 민비는 또다시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피신할 수 있는 은밀한 피신처를 미리 확보해놓았을 것이고,

1895년 일본낭인들이 궁궐로 쳐들어왔을 때에는, 궁녀들의 도움을 받고서 기생으로 변장해서 신속하게 피신처로 달아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민비의 처소인 건청궁의 옥호루로 쳐들어갔던 일본낭인들은 이미 탈출하고 없는 민비를 찾지못하자, 민비 대신 궁녀를 살해했고 그 죽인 궁녀를 불에 태워서 민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추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 민비를 찾지못한 일본낭인들은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을 두려워해서, 일부로 궁녀를 죽이고 마치 민비를 죽인 것으로 위장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을미사변을 진두지휘했던 미우라공사 마저도 민비가 죽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논리로만이 그때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낭인들이 일본에 돌아가서 술집에서 자신들이 조선의 왕후를 죽였다고 자랑질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서 거짓말로 객기를 부렸다고 본다.

일본낭인들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해한 여성이 궁녀인지 민비인지를 전혀 알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여라가지 외교기록들을 살펴보면, 을미사변 때에 명성황후가 죽지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그렇지만 을미사변 때에 명성황후가 사망했는지, 아니면 살아남았는지를 속단할 수는 없으며, 현재로서는 아무도 그 진실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일부사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해서,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것으로 믿어왔다.

 

그렇지만 을미사변 당시의 여러나라의 외교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명성황후가 살해당했을 가능성 보다는,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쓰레기 같은 일본낭인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높여놓기 위해서, 궁녀를 죽이고 나서 마치 왕후를 죽인 것처럼 허풍떨고 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에 많은 사람들(한국사람들+일본사람들)켸속 속아왔던 것이다.

 

19세기말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던 그 어려운 시기에 명성황후는 일본의 침략의 야욕을 미리 눈치채고, 일본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서 러시아를 이용해서 일본을 견제하는 등 조선이 생존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강구해왔던 현명한 왕후였다.

 

일본의 침략을 대국인 러시아를 이용해서 분쇄하고자 했지만, 이미 조선의 국력이 너무나도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의 주권을 지키고자 했던 명성황후의 한맺힌 노력과 수고는 안타깝게도 물거품이 되고야 말았다.

 

1990년대 일본의 국력은 동아시아에서 최강의 지위에 있었고, 조선의 국력은 최하위로 떨어져 있었기에, 명성황후가 추구했던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은 안타깝게도 끝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명성황후가 사라지고 난 후에, 조선은 일본의 침략의 마수에 걸려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명성황후가 이미 오래전에 예측했던 데로, 일본은 결국 조선을 합병하고만 것이다.

 

그 당시 조선의 국력이 좀 더 강해서 명성황후의 개혁정치와 실리외교에 뒷받침을 해주었다면, 어쩌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시대를 잘못 태어난 명성황후가 너무나도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이미 조선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상태라서, 명성황후 한사람의 힘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늦어버린 것이다.

 

조선의 국력이 이렇게까지 약화되었던 것은 명성황후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종을 대신해서 섭정을 펼치고 쇄국정치를 강행했던 대원군 때문이라고 본다.

 

대원군이 집권했던 1862년부터 1873년도의 11년 동안의 이 시기가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시기였다.

약 대원군은 이 소중한 시기에 개화를 해서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국력을 키웠더라면, 우리조선이 그토록 일본에게 손쉽게 합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집권한 대원군은 정적들을 제거하고 서원을 철폐하는 등 정치문제에만 집중했고, 부국강병에는 너무 소홀했고,

오로지 쇄국정책만을 고수함으로써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상실했고, 조선은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고종과 민비가 대원군으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았을 때에는 이미 조선의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고, 일본은 결코 넘볼 수 없는 아시아 최강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따라서 대원군이 더 빨리 정권을 고종과 민비에게 넘겨주었더라면, 그리고 고종과 민비가 더 빨리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 지도 모르며, 일본의 식민지배에의 예속을 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명성황후의 초상화와 사진

 

2017814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다보성겔러리에서는 광복 72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명성황후 초상을 공개되었다.

 

이 특별전시회에서 과거에 나돌았던 명성황후 초상화와는 다른 전해 새로운 초상화를 공개했는데, 명성황후가 왕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있는 모습이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다보성갤러리가 공개한 명성황후 초상화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이 공개한 새로운 명성황후 초상화는 명성황후가 두손을 가지런히 모은 상태에서, 머리에는 하얀두건을 쓰고 하얀빛의 평상복을 입고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초상화이다.

 

여태까지 알려진 명성황후 초상화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서 매우 단아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명성황후의 새로운 초상화는 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에서 출토한 것이라고 하며, 여러사람들을 거쳐서 다보성갤러리가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이 초상화의 뒷면에 부인초상이라는 글자가 씌여져 있는데, 원래는 부인초상글귀 위쪽에 閔氏(민씨)’라는 글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지워졌다고 한다.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은 이 초상화에 閔氏(민씨)’라는 글자와 이 여인인 고급 가죽신발을 신었다는 점을 들어서, 명성황후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 초상화는 이승만대통령이 집필한 책 독립정신에 나오는 명성황후 사진과도 매우 닮아있다는 점을 근거로, 명성황후의 진짜 초상화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학계에서는 이 초상화가 명성황후의 초상화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명성황후의 초상화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은 이 초상화가 최초에 운현궁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을 들어서, 명성왕후의 초상화가 맞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고학전문가들과 역사학자들이 보다 치밀한 분석조사를 벌여서 이 초상화의 진위여부를 정확하게 판별해주길 바란다.

 

과거부터 명성황후의 초상화는 여러장이 나돌고 있다.

   

과거에 명성황후의 초상으로 알려진 사진들

 

이 사진은 과거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졌던 명성황후의 사진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사진이다.

그런데 이 사진은 1890년대에 민간에 떠돌아다니던 일반 궁녀의 사진이라고 하며, 실제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 사진은 외국에서 살해당한 왕비라는 명칭으로 나돌았던 사진이며, 과거 우리교과서에도 명성황후의 모습으로 실리기도 했던 사진이다.

 

그렇지만 이 사진은 1894년도의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에서 궁녀의 모습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 사진 역시 명성황후의 진짜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 사진은 이승만이 쓴 책 독립정신에 수록된 사진인데,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직접적으로 지목되있는 유일한 사진이라고 한다.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직접 지목된 사진이기 때문에,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사진은 일제시대 때부터 1980년도까지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가장 널리 알려졌던 사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궁녀생활을 했던 여성의 말에 의하면, 이 사진도 실제 명성황후는 아니라는 평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일반에 알려진 명성황후의 사진들 대부분이 실제 명성황후가 아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이 공개한 사진이 진짜 명성황후의 초상일 가능성이 현재로서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김관장의 주장대로 그 사진이 운현궁에서 흘러나온 것이 맞다면, 이 사진이야말로 실제 명성황후의 초상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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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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