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고의 싸움천재, 시라소니의 싸움일화, 이성순과 김두한과의 대결

 

역대 우리나라에서 제일 싸움을 잘했던 최고의 파이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역대 우리나라에서 싸움을 가장 잘했던 최고의 싸움꾼은 누구일까?

 

조선 일제강점기때부터 해방된 시절, 이 때를 전후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했고, 싸움을 잘했던 싸움천재라는 사나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싸움을 잘했던 싸움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조선시대의 장길산과 임꺽정이 상당한 괴력을 지닌 싸움꾼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에는 우미관에서 최대의 주먹조직을 거느렸던 김두한, 김후옥, 신마적 같은 쟁쟁한 사나이들이 조선말기 암흑가의 대표적인 주먹으로 활동을 했었다.

 

그런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주먹, 최고의 싸움꾼으로 지목하는 한사람이 따로 있는데, 바로 시라소니 이성순이다.

 

혹자는 우미관에서 최고의 주먹조직을 거느렸던 김두한을 최고의 주먹이라고 주장하지만, 또다른 일각에서는 평안도 신의주출신의 싸움꾼 시라소니 이성순을 최고의 싸움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른 뛰어난 주먹들도 많이 존재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조선 최고의 싸움꾼은 김두한과 시라소니, 이 두사람 중 하나라고 보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주먹계에서 가장 강한 최고의 싸움꾼이라고 지목되고 있는 두사람 김두한과 시라소니 중 누가 더 쎈 주먹일까?

 

이 두사람간의 싸움의 우열을 정한다면, 우리나라의 최고의 주먹은 자동적으로 정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역대 우리나라의 최고의 주먹 즉, 최고의 싸움꾼은 김두한과 시라소니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사람이 1946년도에 실제로 서울에서 만나 대결을 펼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일제에서 해방된 직후, 우리나라의 최고의 싸움꾼이자 최고의 주먹황제 자리를 놓고 벌어졌던 김두한 대 시라소니의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먼저 김두한에 대한 케리어를 소개하고, 그 다음에 시라소니에 대한 케리어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김두한 대 시라소니의 대결에 대해 소개하기로 한다.

 

 

원펀치의 달인, 김두한

 

김두한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의 심장부인 경성(서울)의 최고의 노른자땅인 종로 우미관에서, 최고의 오야붕으로 군림했던 막강한 주먹이다.

 

김두한은 1930년대에 서울에서 가장 상권이 발달한 노른자위 땅이자, 번화가인 관철동에 있는 우미관일대에서, 당시 큰오야붕이라고 일컬어지던 구마적과 신마적을 번갈아 쓰러드리고는, 서울(경성)을 대표하는 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섰던 입지전적인 싸움꾼이었다.

 

김두한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쎄다고 명성이 자자했던 괴력의 사나이 구마적에게 감히 도전장을 던졌는데, 1934년경 불과 17세의 청소년이었던 김두한은 자신보다 10살이나 더 많은 구마적 고희경에게 도전장을 던졌고

조선극장 앞마당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김두한은 구마적에게 회심의 발차기 두방으로 구마적을 완전히 KO시켜버렸다.

 

자동차를 번쩍 들어올릴 정도로 엄청 힘이 좋았던 천하장사 구마적은 그 괴력과 깡으로 조선극장 기도부장 자리에 올라서, 종로 뒷골목에서 깡패들을 소탕하면서 최고의 오야붕으로 행세깨나 하고 있었는데

약관 17세의 김두한에게 덜미가 잡혀서, 종로 1인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부하와 함께 걷고있는 시라소니, 부하보다 한뼘 정도 더 키가 큰 시라소니의 키는 175cm이며, 김두한의 키는 176cm이다.

 

구마적을 물리친 김두한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37년도에 19살의 나이로 구마적과 함께 종로통의 양대 오야붕이었던 신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신마적은 종로의 YMCA에 들어가 운동부학생들을 모두 휘어잡고, 학생패의 우두머리가 된 입지전적인 학생패주먹이다.

 

신마적은 오직 주먹 하나로 YMCA 운동부의 난다긴다하는 학생패주먹들을 제압하면서, 학생패들의 우두머리에 올랐는데, 역시 힘이 천하장사인데, 유도실력 또한 매우 출중했다.

 

원래 이름이 엄동욱이었던 신마적은 종로 뒷골목에서 마주친 구마적과 팔씨름대결을 펼쳐서 무승부를 이루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구마적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마적의 칭호를 부여받아서 신마적으로 불렸으며, 구마적과 함께 종로통에서 양대 최고의 오야붕로 행세했던 대단한 주먹이었다.

 

김두한은 구마적을 깬 뒤 2년이 지난 후, 신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졌고, 종로 뒷골목 엔젤술집 앞에서 벌어진 두사람간 대결에서, 김두한은 신출귀몰한 발차기 세방으로 신마적을 그대로 KO시켜버렸다.

 

김두한은 잇뽕이라고 해서 주먹 한방 즉, 원펀치가 강하다고 알려졌지만, 실제싸움에서는 주먹보다 발차기를 더 많이 활용했다.

김두한의 발차기는 정말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나게 빠르고 위력적이였다.

 

구마적을 쓰러뜨렸던 것도, 김두한의 발차기 두방 아니었던가?

 

반면 신마적은 힘이 천하장사였고, 유도의 달인이었다. 신마적에게 한번 잡히기라도 하면, 번쩍 들어올려서 공중으로 내던져지기 때문에, 공중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충격으로, 왠만한 상대는 팔다리가 골절되거나, 허리가 부러져서 반병신이 되기 일쑤였다.

 

신마적은 이와같은 괴력의 유도실력으로 YMCA와 종로통의 수많은 건달을 제압하고 종로의 큰오야붕이 될 수 있었다.

 

드디어 김두한과 신마적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신마적이 먼저 달려와서 김두한을 낚아채기 위해 두팔을 벌렸다.

 

그런데, 그 순간 김두한은 잽싸게 공중으로 도약했고, 공중으로 뛰어오른 김두한은 양발차기로 신마적의 얼굴을 정통으로 걷어차버렸다.

김두한의 예기치않은 발차기를 얻어맞은 신마적은 그 충격으로 잠시 무릎을 끓었다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났다.

 

연이어서, 김두한이 또다시 왼발로 신마적의 가슴을 거쎄게 걷어찼고, 그 충격으로 또다시 무릎을 꿇은 신마적의 복부에 김두한의 세번째 발차기가 적중되었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신마적은 그대로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김두한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발차기 세번의 공격으로 신마적은 큰 충격을 받고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서울의 종로뒷골목의 주먹판도가 완전 뒤짚히는 엄청난 대사건이 벌어졌다.

 

1930년대 후반 김두한은 19살의 나이로 종로통의 최고의 터줏대감이자, 최강의 오야붕이었던 구마적과 신마적으로 연이어서 쓰러뜨리면서, 종로 최고의 주먹으로 우뚝 솟아올랐다.

 

구마적과 신마적을 쓰러뜨린 김두한은 또다른 종로통의 강자인 뭉치, 제비, 김후옥 등을 모조리 제압하고, 명실공히 종로 최고의 주먹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구마적과 신마적 같은 종로통의 최강자들을 모두 물리친 김두한은 종로의 최고의 오야붕으로 등극했고, 이어 김두한은 자신의 주먹조직을 동원해서

왕십리와 광화문, 서대문과 마포, 그리고 영등포 등 서울전지역의 주먹조직들을 차례대로 정복해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두한은 서울암흑가의 헤게모니를 완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서울지역의 주먹계를 모두 평정했던 김두한은 서울에만 만족할 수 없었는데, 그는 조선전체를 대표하는 최고의 주먹이 되겠다는 엄청난 야망을 품고 있었다.

 

자신의 주먹조직을 계속 부풀려나갔던 김두한은 서울에 이어서, 수원과 대전, 그리고 대구, 광주, 목포, 부산, 심지어는 평양에까지 진출했다.

 

김두한조직은 조선의 대부분의 대도시들을 모두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이로써 조선의 주먹계를 모두 장악한 김두한은 명실공히 조선최고의 오야붕의 자리에 우뚝 솟아오르게 된다. 

약관 19세에 조선의 최고의 노른자땅인 종로 우미관의 오야붕으로 등극해서, 1940년도에는 조선전체의 주먹계를 평정하면서 조선 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섰던 김두한은 정말 대단한 입지전적인 싸움꾼이었고

그 당시만 해도, 그의 아성에 도전할 만한 주먹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김두한은 23살이었던 1940년도에 서울을 비롯해서, 대전과 대구, 광주, 목포, 그리고 부산과 북쪽에 있는 평양과 개성, 원산까지 거의 모든 주먹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는데

김두한은 한반도의 거의 대부분의 주먹계를 평정하는 엄청난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김두한이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모든 주먹계를 평정했지만,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곳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신의주였다.

 

김두한은 마지막 남은 신의주를 접수하기 위해, 두 동생인 병수털빠진 개고기를 돌격대장으로 해서, 부하들 수십명을 동원해 신의주로 파견했다.

 

일단 털빠진 개고기와 병수는 신의주의 오야붕이었던 정팔을 만나서, 협상을 벌였는데, 그 내용은 다른 지역들은 모두 김두한의 우미관 휘하로 들어왔으니, 신의주도 우미관 휘하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두목 정팔을 비롯한 신의주의 모든 주먹들이 김두한의 부하로 들어오라는 것인데, 정팔은 협상에서 확답을 피했고, 다음에 확답을 주겠다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렇게 신의주의 정팔이 시간이 필요하다고 확답을 피했고, 김두한의 동생들은 그대로 우미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난후, 신의주의 오야붕 정팔은 전혀 우미관에 확답을 주지않고 시간을 질질 끓기만 했다.

이렇게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는 정팔의 태도에 화가난 김두한은 신의주의 정팔에게 일주일안에 확답을 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정팔은 계속 확답을 주지않은 체 시간만 끌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그리고 평양까지, 한반도의 거의 모든 도시들을 평정해서 조선최고의 전국구주먹으로 등극해서 엄청난 기세를 떨치고 있던 김두한은

변방에 있는 작은 도시인 신의주의 오야붕 정팔의 미적거리는 태도에 엄청나게 화가 났다.

 

결국 김두한은 답장이 전혀 없는 정팔을 손 좀 보기로 결정하고병수와  털빠진 개고기를 투톱으로 해서 부하들 40명을 동원해 돌격대를 편성해서, 신의주로 출동시켰다.

  

사실 신의주의 오야붕 정팔은 명목상의 오야붕일 뿐, 신의주의 실질적인 오야붕은 바로 시라소니였다.

 

그런데, 시라소니는 일본경찰을 두들겨팬 사건 때문에, 체포령이 내려져서 신의주를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시라소니는 자신이 부재한 신의주의 오야붕 자리를 후배 정팔로 하여금 대행하게 했다.

 

  그러니까, 신의주의 두목으로 행세하고 있는 정팔은 바지두목일 뿐이고, 신의주의 진짜두목은 만주에 가있는 시라소니였던 것이다.

 

일전에 우미관 주먹패들이 신의주로 와서 정팔에게 김두한조직에 복속하라고 요구했을 때, 정팔은 자기멋대로 그 사항을 결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정팔은 의사결정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만주에 있는 진짜 오야붕인 시라소니의 제가를 받아야만 했다.

 

김두한동생들의 복속요구를 받았을 때에도, 정팔은 만주 봉천에 있는 시라소니에게 사신을 급파해서 답을 구했고, 시라소니는 복속불가라는 결정을 정팔에게 보내왔다.

 

그런데,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는 신의주 정팔의 태도에 분개한 김두한이 또다시 부하 40명을 출동시켰고

그들이 신의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정팔은 곧바로 만주에 있는 시라소니에게 밀사를 보내어 그의 도움을 요청했다.

 

김두한조직의 중간보스이자 직속부하인 병수와 털빠진 개고기를 대표로 해서, 김두한부하 40명이 위풍당당하게 신의주의 정팔사무실로 들이닥쳤다.

 

이번에는 김두한의 기라성 같은 부하 40명이 동원되었으니, 양측간의 엄창난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정팔의 조직만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역부족의 사태였다.

 

그런데, 만주에 있던 시라소니가 손살같이 정팔의 사무실로 찾아들어왔고, 정팔은 비로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라소니가 도착한 그날 저녁 때에, 김두한이 보낸 40명의 정벌군이 정팔의 사무실로 급습해 들어왔던 것이다.

 

정팔사무실로 찾아온 병수와 털빠진 개고기는 대뜸 정팔에게 우미관조직에 복속을 하라는 최후의 통첩을 하면서, 만일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신의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바로 그 때에 사무실 뒷방에 있던 시라소니가 불쑥 들어오면서, 김두한부하들에게 호통을 쳤다.

 

시라소니는 대뜸 병수와 털빠진 개고기에게 내레 신의주의 토박이 시라소니야! 너희들이 도대체 누구 간 데, 감히 신의주로 쳐들어와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기야

우리가 네들에게 빚이라도 졌네?, 아니면 네들이 이곳에서 빚받을 게라도 있는 거네?’ 이러게 말한 후, 

시라소니는 더이상 말썽부리디 말고, 조용히 사라디라우! 그냥 돌아간다면, 내레 이번 행패는 없었던 일로 할께야!’라고 일갈을 퍼부었다.

 

그러자, 털빠진 개고기는 이게, 어디서 굴러먹던 말뼉다귀야! 시라소니고 뭐고 간에, 우리말을 안 듣는다면, 모조리 두들겨 패서, 병신을 만들어버릴꺼야!’라고 시라소니를 협박했다.

 

이말은 들은 시라소니는 그들에게 그렇다면 좋디, 나와 한판 붙어 보자우! 우리 부하들까디 희생시킬 필요는 없으니께니, 부하들은 빼고, 두조직을 대표해서 나와 너의 둘이 한번 붙어보자우!’ 이렇게 말했다.

 

시라소니의 제안대로, 시라소니와 김두한이 파견한 돌격대의 대장격인 병수와 털빠진 개고기가 대결을 벌이기로 했다.

 

사무실밖의 넓다란 공터로 나간 후병수가 먼저 주먹을 날려서 시라소니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렇지만 시라소니는 잽싸게 몸을 틀어서 병수의 주먹을 피했으며, 이번에는 그 다음에 옆에 있던 털빠진 개고기가 시라소니의 얼굴을 향해 오른발킥을 날렸다.

 

역시 시라소니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발차기공격을 피했는데, 이렇게 두 번의 공격을 피한 후, 시라소니는 곧바로 나간다라는 말을 외치면서 힘차게 달려나옴과 동시에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 공중으로 솟구치는 반동을 이용해서 시라소니는 전광석화 같은 박치기로 털빠진 개고기의 이마를 강하게 들이받아 버렸다.

하는 파열음과 함께 시라소니의 기습적인 박치기공격을 받은 털빠진 개고기는 그대로 고목나무처럼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옆에 있는 김병수에게 시라소니의 오른쪽주먹이 날아와 그의 복부를 정통으로 가격했고, ‘하고 고구라지는 병수의 턱에 시라소니의 왼발 무릎찍기공격이 연이어서 이어졌고

두 번의 연속공격을 받은 병수는 큰 충격을 받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김병수가 다시 일어나서 공격자세를 취하자, 시라소니는 달려가면서 두 번째의 박치기공격을 퍼부었고

시라소니의 박치기에 이마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김병수는 또다시 고꾸라져서 완전 실신하고 말았.

 

이렇게, 시라소니에게 두들겨맞고 쓰러진 병수와 털빠진 개고기는 김두한의 동생들 중에서도 주먹이 쎄기로 소문난 부두목급으로 동생들이었지만, 시라소니와의 싸움에서는 손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완전히 넉아웃되고 말았다.

 

이렇게 시라소니가 두명의 돌격대 대장들을 순식간에 제압해버리자,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김두한부하들은 시라소니의 실력과 위세에 눌려서,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때에 정팔이 미리 준비해둔 부하 20여명이 김두한부하들에게 돌진했고, 이로써 정팔부하들과 김두한부하들간에 치고박는 피터지는 전쟁이 벌어졌다.

 

김병수와 털빠진 개고기를 쓰러뜨린 시라소니는 다시 김두한부하들의 앞에 서서 돌격해오는 몇명의 덩치 큰 부하들을 박치기와 발차기공격으로 쓰러뜨렸고,

시라소니의 이같은 선제공격으로 사기가 크게 꺾인 김두한부하들은 전의를 완전 상실하고,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김두한이 신의주를 완전히 복속시키려고, 40명이나 되는 돌격대원들을 출동시켰지만

시라소니의 두둑한 배짱과 신출귀몰한 싸움실력에 완전히 기가 죽은 그들은 수십명의 부상자만 발생시킨 체, 전원이 도망치듯이 서울로 쫒겨오고야 말았다.

 

시라소니에게 엄청나게 두들겨맞고 돌아온 김병수와 털빠진 개고기는 김두한에게 ‘형님! 시라소니란 그놈, 얼마나 쎄고 빠른지, 도무지 당해내질 못하겠어요!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시라소니에게 당했던 김병수는 엄청 싸움을 잘했던 김두한조직의 베테랑급 파이터였다

 

김병수는 수많은 싸움꾼들과 싸워서 한번도 진적이 없을 정도로 싸움의 달인이었고, 그의 뛰어난 싸움실력을 인정한 김두한은 그를 자신의 경호책임자로 임명할 정도였다고 한다. 

 

종로판에서 싸움으로 다섯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싸움선수였던 김병수가 시라소니와의 싸움에서, 

제대로된 공격도 해보지 못하고 보기좋게 KO당하고 말았으니, 시라소니의 싸움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일각에서는 김병수를 종로일대에서 김두한에 이어서 두번째로 싸움을 잘하는 넘버2라고 평가할 정도이다. 김병수는 패싸움이 벌어질 때에, 너댓명은 혼자서 거뜬히 쓰러뜨리는 싸움의 달인이었다.

 

그렇게, 강했던 김병수가 시라소니와의 싸움에서 제대로된 실력 한번 발휘하지 못하고, 완벽하게 두들겨맞고 도망쳐왔으니, 김두한의 속이 한없이 타들어갔다.

  

40명이나 되는 돌격대원들을 파견하고도 시라소니 한사람에게, 두들겨맞고 쫒겨온 부하들을 보고, 김두한은 엄청 대노했고, 길길이 노발대발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두한은 더이상 부하들에게 맞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직접 부하들을 대동하고, 시라소니를 제거하기 위해서, 신의주로 찾아가게 된다.

  

조선역사상 걸출한 주먹이자, 싸움의 천재라고 불리워졌을 정도로 탁월한 싸움실력의 주인공 시라소니가 조선최강의 주먹조직인 김두한의 우미관조직과 싸움을 벌였서 당당히 이겼던 것이다.

 

시라소니는 동물적인 싸움감각과 탁월한 싸움기술을 이용해서, 신의주로 쳐들어온 김두한의 부하들을 흠찟 두들겨패서 완전히 쫒아버렸던 것이다.

 

이때에는 비록 시라소니가 김두한과 직접 맞대결을 펼치진 않았지만, 김두한조직의 사실상 2인자였던 김병수와 돌격대장인 털빠진 개고기를 혼자서 상대해 모두 KO시켰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성과였다.

 

조선천하의 주먹계를 거의 대부분 점령하다시피한 김두한조직의 조직원들을 다른 지역의 주먹패들은 대부분 복종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시라소니 만큼은 그들의 침투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고, 맞서서 싸웠다는 것 자체가 시라소니가 얼마나 배짱이 쎄고, 강한 싸움꾼인지를 증명해주는 좋은 실례라고 하겠다.

 

이렇게 시라소니가 조선최대의 주먹조직에 맞서서 싸웠던 것은 자신이 김두한을 능가할 정도의 싸움실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자신감을 갖고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시라소니는 싸움에 대한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며, 자신보다 더 강하고 쎈 싸움꾼이 있다고 하면, 반드시 그를 찾아가서 자웅을 겨루어서, 그를 꺾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다.

시라소니는 자신보다 더 강한 싸움꾼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싸움의 자존심이 엄청 강한 사람이다.

 

함경도 최고의 주먹인 박두성을 혈혈단신으로 찾아가서, 그에게 도전해 그를 쓰러뜨리면서, 함경도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던 시라소니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어쩌면 조선 최고의 주먹조직의 오야붕인 김두한과의 맞대결을 속으로 꿈꾸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다른 주먹들이 깎듯이 대접해주고 복종했던 김두한부하들을 개패듯이 두들겨패서 쫒아버렸던 것이 아닌가?

 

결국, 김두한은 이십여명의 부하들을 대동하고, 시라소니를 손보기 위해서 신의주로 출발했다.

김두한일행이 열차를 타고 신의주역에 도착해서, 길잡이 김병수를 필두로 해서 곧바로 정팔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두한이 찾아갔을 때에, 신의주의 정팔사무실에는 시라소니는 없었고, 그는 이미 만주로 떠난 후였다.

그곳에서 시라소니가 만주의 봉천지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안 김두한은 부하들을 대동하고, 다시 열차를 타고, 시라소니를 찾아서 만주 봉천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만주 봉천역에 도착했던 김두한에게 일본경찰이 불신검문을 실시했고, 김두한의 저고리안쪽에서 날카로운 칼이 발견되었다.

 

일본경찰은 그가 김두한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김두한은 경성에서 요주의인물로 낙인찍힌 상태였고, 경성을 벗어날 수 없는 여행금지령이 내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즉시 일본경찰에 의해 칼을 압수당한 채, 곧바로 경성(서울)으로 환송되고 말았다.

 

 이렇게 김두한이 만주 봉천까지 찾아가서, 시라소니와 대결을 벌일 뻔했지만, 일본경찰의 불신검문에 걸려서, 되돌아오는 바람에, 시라소니와 김두한의 역사적인 맞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 당시 김두한이 경찰의 불신검문에 걸리지 않았다면, 조선최고의 주먹자리를 놓고 만주에서 김두한과 시라소니의 역사적인 맞대결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두사람의 대결이 끝내 이뤄지지 못한 점이 무척 아쉽게 생각된다.

 

이 당시 만일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실제로 만나서, 최고의 주먹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뤘다면, 과연 누가 이겼을 것인가?

 

만일 시라소니가 이겼다면, 김두한은 어렵게 이룩해놓은 조선최강의 주먹조직의 두목자리를 내려놓게 되는 엄청난 수모를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김두한이 싸움에서 이겼다면, 시라소니의 자존심은 무척 상하겠지만, 원래 조직자체를 만드는 것을 싫어하고, 혼자서만 독불장군처럼 유유자적하면서 돌아다니는 그였기에

그다지 큰 손실은 없었을 것인데, 그대신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타이틀을 상실했을 것이다.

 

두사람 모두 최고의 싸움베테랑들이었기 때문에, 1940년대 당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주먹, 최고의 싸움꾼을 가릴 수 있는 김두한과 시라소니의 한판 대결이 성사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이 때로부터 6여년의 시간이 흘러 우리나라가 해방이 된 이후인 19462월경, 서울 종로의 우미관바에서 시라소니와 김두한은 마치 운명처럼 서로 조우하게 되었고

또다시 두사람 간의 운명을 건 대결이 벌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지금까지 지면이 너무 길어져서, 더이상 게시글을 쓰기가 곤란한 상황입니다.

김두한과 시라소니의 대결 2부는 다음의 게시글에서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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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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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고의 주먹 김두한의 싸움실력, 신마적과 대결

사랑방 이야기 2018. 1. 15. 15:36

야인시대의 최고의 주먹, 김두한의 싸움기술, 신마적과의 실제싸움

 

조선 최고의 주먹은 누구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들 사이에 가장 재미있는 주제가 싸움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실제로 역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주먹은 누구일까 하고 판단해본다면, 여러명의 기라성같은 싸움꾼들이 떠오르곤 한다.

 

조선시대에 장길산과 임꺽정 등이 자기지신의 나와바리를 구성하고, 당대의 제일 강한 장사로 그 시대를 풍미했다.

 

그런데 조선 최고의 주먹을 논할 때에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 한사람 있다. 바로 일본 강점기 때에, 경성의 한복판인 우미관골목을 지배했던 경성의 오야붕 김두한이 그 주인공이다.

 

조선 후기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시절,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달래가면서, 주먹 하나로 포악한 일본야쿠자들과 내노라하는 강자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경성 최고의 오야붕으로 우뚝 솟아오른 인물이 바로 김두한이다.

 

김두한은 해방 전 일본강점기 시대에 남한지역에서 기라성 같은 강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조선 최강의 주먹으로 떠오르면서 경(서울)의 주먹세계를 평정한 후,

나중에는 한반도 전지역으로 자신의 주먹세계를 열어나갔던 불세출의 주먹이자 싸움꾼이었다.

 

 

김두한이 조선 최고의 주먹으로 등극하기 전에, 먼저 경성(서울)의 최고의 주먹으로 등극하게된 계기는 1930년대 당시 최강의 주먹이라고 불리우던 두사람 즉, 구마적과 신마적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두한을 조선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서게 했던 그 발판이 된 두 인물, 구마적과 신마적과 김두한간에 벌어졌던 일화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두한, 구마적 고희경에게 도전장을 던지다

 

원래 김두한은 만주에서 독립활동을 벌이던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사령관이었던 김좌진장군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일본경찰로부터 독립군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혹독한 탄압을 받았던 어머니가 병사하는 바람에, 김두한은 외갓집에 맡겨져 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외갓집에서 가출했던 김두한은 수표교 다리밑에서 거지생활을 하다가, 나이가 좀 들면서 청소년 시절에는 우미관에서 곰탕집을 운영하는 원노인으로부터 도움과 지원을 받아서. 우미관부근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우미관에서 곰탕집을 운영하면서 남몰래 독립군 지원활동을 하고 있었던 원노인은 김두한이 김좌진장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후에, 김두한에게 종종 곰탕국을 끓여주면서, 청소년기의 김두한을 여러모로 보살펴주곤 했다.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던 김두한이었지만, 그는 원노인이 종종 끓여주는 영양만점의 곰탕과 설렁탕을 먹으면서 거대한 기골과 강인한 체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김두한은 원노인의 주선으로 종로에 있는 당수도장에 입관해서 2년 간 무술을 연마해나갔는데, 훗날 김두한의 뛰어난 발차기실력과 싸움실력은 바로 이 당수도장에서 수련하면서 키웠던 무예연마의 결과라고 본다.

 

당수는 일본의 무술인데, 지금의 가라데의 전신이라고 보면 되며, 일제시대 때에는 보통 가라데를 당수라고 많이 불렀다.

 

그런데 이렇게 김두한을 물신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원노인이 사망하면서, 김두한은 자신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과거 어린 시절에 거지생활을 하던 자신을 친자식처럼 돌봐줬던 원노인 때문에 김두한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미관골목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원노인이 사망 한 후에도 김두한은 계속 우미관 뒷골목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원래 술집이 많고 번성한 유흥가에는 깡패들이 극성을 부리기 마련이다. 돈이 많이 몰리는 유흥가에서는 주먹들이나 깡패들이 많이 몰려들기 마련이고, 유흥가와 돈, 주먹들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들로서, 서로 유기적인 밀착관계를 맺기 마련이다.

 

술집은 그지역의 최고 주먹에게 돈이란 세금을 상납하게 되고, 그 댓가로 주먹들은 그 술집에서 난동부리는 술꾼이나 건달로부터 그 술집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1930년대 당시 우미관 뒷골목은 서울에서 고급술집들이 가장 많은 서울 최대의 번화가였기 때문에, 내노라하는 주먹들이 여러명 몰려있었다.

 

조선극장과 우미관바, 종로회관, 그리고 각종 요리집, 술집과 까페등 고급스럽고 화려한 유흥주점들이 즐비해 있는 우미관골목은 이 당시에는 조선 최고의 상권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달콤한 꿀이 많이 있는 꽃밭에는 꿀벌들이 많이 꼬이는 것처럼, 서울 경제의 일번지라고 할 수 있는 우미관골목에 당대의 기라성 같은 주먹들이 여러명 포진해 있었다.

 

 

우미관 뒷골목에는 힘좋고 싸움 잘하는 오야붕 여러명이 군웅할거 하고 있었는데, 그시대의 오야붕들로 구마적, 신마적, 뭉치, 제비 등이 우미관 뒷골목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외에도 김기환이라는 걸출한 주먹도 있었는데, 그는 몇 년 뒤에 일본형사를 때린 죄목으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난 후, 오랜 감옥생활을 하게되면서, 우미관을 떠나있게 된다.

 

이들 오야붕들은 우미관에서 각기 각자의 주먹조직과 나와바리를 형성하면서, 오야붕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종로 우미관 뒷골목의 오야붕 중에서 가장 강했던 최고의 오야붕이 두사람 있었는데, 바로 구마적과 신마적이 그 주인공들이다.

 

김두한은 원래 우미관의 한 모퉁이를 관할하고 있는 김기환의 주먹조직 밑으로 들어가서 그 조직원으로 있었는데, 야심이 강한 그는 김기화조직으로부터 서서히 독립해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김두한은 원래 야심이 무척 강한 사람으로, 자신이 장차 우미관 최고의 주먹이 되고자 했던 야심만만한 인물이다.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항상 최고가 되고자 했던 김두한은 결코 남의 밑에서 안주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가 김두한은 1930년대에 176cm로 키도 큰 편이고, 집안 내력 자체가 통뼈에다가 기골이 장대했고, 힘도 상당히 강했다고 한다.

또한 김두한은 수년간 당수(가라데)를 배우고 연마했기 때문에, 주먹도 강했고 특히 발차기실력이 아주 뛰어났다.

 

그런 김두한은 우미관 뒷골목시절의 김기관조직에 가담해 있을 때부터, 뛰어난 싸움실력을 선보인 바가 있었다.

 

 

 

김두한은 나이 16세 때에 벌써 우미관 뒷골목에서 두명의 건달들을 때려눕혔고, 또한 관철동 야시장에서 김기환주먹조직의 중간보스급 건달과 일대일 맞대결을 펼쳐서 군말없이 그를 때려눕힌 적이 있다.

 

나이 고작 16살 밖에 안된 그가 이렇게 뛰어난 싸움실력을 발휘한 것을 알게된 오야붕 김기환은 그 때부터 김두한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나중에는 김두한을 자신의 후계자감으로 생각했을 정도다.

 

김두한은 김기환 밑에 있을 때에도 그 조직하에서 자신만의 별동부대를 따로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었고, 김기환조직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우미관에서 김두한이 싸움실력이 좋다는 소문과 함께 김두한이 동생들을 관대하게 잘 대해준다는 소문이 함께 나면서, 김두한 밑으로 동생급 건달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1934년경 김두한이 17세 되던 해에 벌써 그는 부하 30명을 거느린 소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김두한은 이 시기에 벌써 자신이 장차 종로와 우미관의 최고의 오야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김두한이 종로와 우미관의 최고오야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꺾어야될 두명의 강자가 있었다.

 

역대 우미관 뒷골목에는 가장 강한 주먹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구마적과 신마적이 버티고 있었고, 김두한은 이들 두명의 강자들을 꺾지 않는다면 결코 우미관의 최고주먹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김두한이 먼저 꺾어야 할 상대는 당시 우미관바와 조선극장에서 기도주임을 하고 있는 큰오야붕 구마적 고희경이었다.

 

 

조선극장에서 기도주임을 하면서, 우미관의 오야붕으로서 큰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구마적은 힘이 상당히 쎈 천하장사였다.

그는 팔씨름을 해서 우미관 뒷골목의 힘쎈 건달들을 모두 제압했을 정도로 힘이 쎄기로 유명했다.

 

구마적이 얼마나 힘이 쎄냐하면,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구마적이 한 때 종로 3가에 있는 자동차정비소에서 일했었는데, 그 당시 구마적은 동료와 함께 고장난 자동차를 수리한 적이 있었다.

 

그 자동차는 바퀴가 고장이 나사 자동차를 떠올린 상태에서 수리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구마적이 두손으로 그 거대한 자동차의 앞부분을 번쩍 들어올렸고, 다른 동료는 구머적이 차를 들어올린 동안에, 그 자동차의 앞바퀴를 갈아줬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구마적의 엄청난 괴력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날에 일어났는데, 그 다음날 또다른 고장난 자동차를 수리할 때에, 구마적은 이번에는 아예 한손으로 자동차의 앞부분을 들어올렸고, 다른 한손으로는 담배를 잡고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왼손으로 담배를 잡고 피우면서, 다른 오른손으로 자동차 앞부분을 들어올리고 있었다고 하며, 이를 보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소문이 퍼졌고,

많은 건달들이 구마적의 괴력에 엄청 놀랐을 뿐만 아니라, 그를 만나면 굽신굽신거리면서 형님으로 대우해주었다고 한다.

 

그런 구마적이 엄청난 괴력을 바탕으로 우미관 뒷골목에서 여러 건달들을 힘과 싸움으로 제압하고는 우미관 최고의 오야붕으로 등극했고, 그는 최고의 오야붕에 걸맞게 조선극장의 기도주임으로 취임해 있었다.

 

당시에는 최고의 주먹이 그지역의 가장 큰 극장의 지배인이나 기도주임으로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니까 종로 아니 서울에서 가장 큰 극장인 조선극장의 사실상 지배인이었던 구마적은 종로 최고의 주먹으로 대우받게 된 것이다.

 

 

김두한이 종로와 우미관의 최고의 오야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마적이라는 산을 넘어야만 했다.

 

당시 1934년도로 우미관의 소조직을 거느리고 있던 김두한은 나이가 고작 17세인데 반해, 구마적 고희경은 30살로 김두한보다 11살 가량 더 많은 큰 형님뻘 되는 오야붕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두한은 구마적에게 기어코 도전하고야 만 것이다. 그당시 종로에서 이름을 쩌렁쩌렁 울렸던 구마적은 조선극장에 몰래 들어와 공짜구경을 하던 청소년들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곤 했다.

 

일제치하에 가난했던 시절이라, 집없는 부랑자나 고아가 많았던 시절에, 집없는 아이들이 때로는 조선극장에 들어가 몰래 잠을 자기도 했는데,

이렇게 몰래 들어갔던 걸린 사람들은 서슬퍼런 구마적에게 걸려서 엄청나게 얻어맞고 쫒겨나기 일쑤였다.

 

그런데 김두한의 부하들 몇 명이 바로 구마적에게 걸려 두들겨맞았던 것이다. 그런 소식은 곧바로 김두한의 귀에 들어갔고, 김두한은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7살이나 많은 대선배를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대선배를 주먹으로 쓰러뜨릴 때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주먹세계에서 다른 건달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다른 건달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아야만, 자신의 주먹조직을 더욱 크게 확장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마적이 자신의 동생 여러명을 흠씬 두들겨 패버린 것이며, 김두한에게는 구마적에게 도전할 좋은 기회가 생긴 것이다.

 

 

김두한은 곧바로 조선극장의 기도주임실로 구마적을 찾아갔고, 구마적에게 잠깐 이야기하자고 말을 건냈다.

그러자 구마적은 나이도 어린 놈이 감히 자신에게 뭘 볼게 있다고 아는 체하냐면서 욕을 해댔다고 한다.

 

그러자 김두한은 제가 형님의 아지트인 조선극장에서 형님을 패면, 형님의 체면이 떨어질 것이니, 조용한 바깥으로 나가서 일을 치릅시다고 말하면서, 노골적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천하의 구마적에게 김두한이 먼저 도전장을 던진 것이고, 이로써 두사람은 우미관 뒷골목의 조선극장의 뒷마당으로 나갔고, 김두한 대 구마적간의 맞대결이 벌어졌다.

 

조선극장 뒷마당으로 나가자 마자, 김두한이 먼저 신속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김두한의 발차기기술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하다고 한다.

 

 

특히 공중으로 붕 날라서 차버리는 김두한의 발차기는 엄청 위력적이고 강했다고 한다. 김두한의 이런 발차기기술은 그가 당수도장에서 수 년간 피땀흘리면서 수련해서 얻었던 고급싸움기술이다.

 

 

조선극장 뒷마당에 나가자 마자, 김두한이 재빠르게 몸을 날려서 두발로 구마적은 안면을 강타했고, 난데없는 김두한의 이단발차기를 얻어맞은 구마적은 !’ 하면서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쓰러진 구마적이 몸을 일으켜서 일어나자, 그가 일어나는 순간 김두한의 두 번째공격인 오른발 발차기 공격이 구마적의 턱에 그대로 적중되었고, 또다시 충격을 받았던 구마적은 그대로 KO되고 말았다.

 

김두한은 우미관골목에서 최고의 오야붕 행세를 하던 구마적을 단 두 번의 발차기 공격으로 침몰시켜 버린 것이다.

 

 

  종로의 주먹세계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우미관 뒷골목에서 오랫동안 최고의 오야붕으로 군림했던 천하장사 구마적이 고작 17살의 나이 어린 김두한에게 주먹 한번 내뻗지 못하고, 단 두방이 발차기공격으로 완벽하게 KO패당하고 만 것이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우미관은 물론 종로와 서울 일대로 퍼져나갔고, 주먹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 되었다.

 

약관의 김두한이 싸움으로 잔뼈가 굵은 오야붕 구마적을 쓰러뜨렸다는 소식은 당연히 우미관의 또다른 오야붕 신마적의 귀에도 들어갔다.

 

신마적은 이소식을 듣고서 나이도 한참 어린 녀석이 버르장머리 없이 감히 대선배를 쓰러뜨리다니, 정말로 당돌한 녀석이다!, 언젠가는 내가 손을 보아야겠다라고 동생들 앞에서 큰소리쳤다고 한다.

 

구마적과 신마적은 서로 다른 주먹조직을 갖고 있었지만, 서로 대립하기 보다는 서로 호형호제하면서,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신마적은 자신보다 2살이 많은 구마적을 예의상 형님으로 불러주었고, 구마적도 신마적의 실력을 인정하고는 그를 섭섭지않게 대우해주고 있었다.

 

구마적이라는 큰 산을 넘은 김두한은 자신이 우미관골목의 최고의 오야붕이 되기 위해서는, 신마적이라는 또다른 큰 산도 넘어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김두한과 신마적 엄동욱의 대결

 

김두한과 신마적의 대결에 앞서 신마적이 어떤 인물인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마적은 다른 주먹들과는 달리 상당히 먹물을 많이 먹는 인텔리출신의 주먹이었다.

 

 

신마적의 본명은 엄동욱으로 원래 보성전문(지금의 고려대학교)2년 중퇴하였다가, 일본에 유학까지 갔다가 돌아온 유학파였으니, 주먹치고는 상당한 인텔리에 속하는 희한한 주먹이다.

그런데 신마적은 힘과 싸움에 있어서는 천하에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인물이었다.

 

신마적은 일본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1930년경부터 서울 종로의 YMCA로 들어가서 운동부학생들을 모두 제압한 후, YMCA 학생패들의 우두머리로 올라섰던 대단한 싸움꾼이다.

 

신마적은 YMCA에 들어가자 마자, 원래 YMCA 운동부의 우두머리였던 강펀치의 소유자 해학기를 군말없이 쓰러뜨리고, 새로운 YMCA의 학생패의 오야붕으에 올라섰던 것이다.

 

신마적은 당시 180cm의 키에 떡 버러진 어깨에다 힘과 완력이 무척 쎘으며, 일본에서 배운 유도와 씨름실력이 수준급 이상인 당대의 뛰어난 싸움꾼이었다.

 

우미관골목에서 최고의 주먹은 구마적이 아니라 신마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단지 신마적이 자신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은 구마적을 형님이라고 예우했을 뿐이지, 싸움실력에 있어서는 오히려 한 수 위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두사람간에는 일화가 있는데, 바로 팔씨름대결이 그것이다. 우미관 뒷골목에서 구마적과 신마적이 우연히 맥주집에서 만나 시비가 붙었던 적이 있었다.

 

1930년대 전반 구마적이 엄청난 힘을 과시하면서, 우미관 뒷골목을 누비고 다닐 때에, 지역유지들과 어울려서 한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술집에 신마적이 동생들을 데리고 들어왔다가, 술에 거나하게 취한 구마적으로부터 시비를 당했다.

 

구마적은 신마적이 자신의 아지트인 술집에 학생패거리를 데리고 들어오자 아니꼬운 마음이 생겼던 것이고, 구마적은 주변 지인들이 보는 상황에서 신마적에게 시비를 걸었다.

 

 

 

구마적은 신마적에게 요즘 힘도 없는 애들이 우루루 패거리를 몰고다니면서, 잘난 체 하고 다니는 데 정말 볼쌍 사납다!’라고 신마적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이 말은 듣은 신마적은 구마적에게 다가가서, 자신이 뭘 잘못했는가 하고 되물으면서 두사람간에 시비가 빚어졌다.

 

그러자 구마적이 신마적에게 자신과 팔씨름을 해서, 네가 얼마나 힘이 좋은지를 증명해보이라고 일갈을 건넸다.

 

지역유지들과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에 구마적과 신마적의 팔씨름대결이 벌어졌는데, 놀랍게도 신마적이 천하장사인 구마적을 팔씨름으로 꺾었다고 한다.

 

자동차의 앞부분을 손으로 잡고 번쩍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천하장사인 구마적을 신마적이 팔씨름으로 당당히 꺾은 것이다.

자기 스스로도 엄청나게 놀란 구마적은 신마적의 힘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고, 자신에게 이긴 신마적을 구마적은 새로운 마적이라는 의미로 신마적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고희경을 구마적으로, 엄동욱은 신마적으로 구분해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원래 고희경은 그냥 마적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었는데, 그런데 새로운 마적이 나타났으니, 자신은 ()’ 자를 붙여서 구마적이 된 것이다.

 

신마적이 힘이 천하장사인 구마적을 팔씨름에서 이겼다는 일화를 보더라도 신마적이 얼마나 힘이 쎈 괴력의 소유자인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마적은 유도의 고단자로서, 유도실력이 상당해서 그와 싸움이 붙은 왠만한 상대들은 그에게 한번 붙잡힐 경우엔 공중으로 집어던져졌다가 떨어져서 팔다리에 골절상을 당하게 마련이다.

 

즉 신마적은 힘과 유도실력, 주먹의 삼박자를 지닌 당대의 탁월한 싸움꾼이었고, 그가 일본 유도부 학생패거리들을 두들겨팬 사건은 그를 우미관의 최고의 주먹의 자리에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1933년경 신마적은 우미관 뒷골목의 맥주집에서 동생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맥주집에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는 일본인 유도부학생패거리들이 몰려들어왔다.

 

그리고 이 일본인 유도부패거리들은 그 술집에서 서빙을 하던 햔국여성에게 다가가 성희롱을 하는 몰쌍 사나운 상황이 벌어졌고, 이를 말리는 술집주인에게 폭행까지 해댔다.

 

평소에 직선적이고 성격이 불같은 신마적이 이런 일본학생들의 조선여성을 희롱하는 짓거리를 보고 엄청난 분노를 느꼈고, 그 일본유도부 패거리들을 제지하면서, 신마적과 10명의 일본유도부 패거리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신마적은 맨앞에 있던 덩치좋은 일본학생을 주먹을 날려서, 곧바로 쓰러뜨리고, 옆에 있던 다른 일본학생 두명을 업어치기로 쓰러뜨렸다.

 

신마적은 또다른 일본학생들을 발차기와 주먹으로 연거푸 쓰러뜨리면서, 또다른 일본학생의 허리춤을 붙잡고 공중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공중으로 날아간 그 일본학생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기절해버렸고, 신마적의 괴력에 의해서 7명이나 되는 일본유도부 학생들은 순식간에 대자로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남아있던 일본유도부 학생들은 신마적의 괴력에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고 그대로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동생들이 개입할 여지없이 신마적 혼자서 10여명의 일본 유두부학생들을 제압해버린 것이다.

 

신마적의 이런 가공할만한 싸움이야기가 우미관 일대에 퍼지면서, 신마적은 구마적과 함께 우미관골목의 최고의 오야붕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종로와 우미관 골목의 최고의 주먹을 꿈꾸고 있던 김두한은 구마적을 쓰러뜨린지 2년 후인 1936년 초겨울날, 19세의 나이로 자신보다 9살이 나 많은 신마적에게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김두한이 신마적에게 도전해서 화려한 발차기공격을 퍼부으면서 신마적을 공격하는 멋진 장면들이 연출된 적도 있었다.

 

 

구마적은 이미 쓰러뜨렸으니, 이제 남아있는 마지막 거물인 신마적을 아예 확실하게 요절내고 난후, 자신이 종로바닥의 최고의 옥좌에 등극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렇게 기회를 엿보던 김두한에게 어느날 신마적과 싸울 만한 명분이 생긴 것인데, 우미관골목에서 자신의 동생 두명이 신마적에게 인사를 제대로 안했다는 이유로 흠씬 두들겨맞고 돌아온 것이다.

 

평소엔 점잖다가도 술만 먹고 나면 성질이 매우 난폭해지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신마적이 또다시 주먹을 휘두렀던 것이다.

 

김두한은 동생이 두들겨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동생들을 데리고 우미관 뒷골목의 엔젤맥주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엔젤맥주집에서 10여명의 동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있는 신마적에게 곧바로 다가간 김두한은 형님, 나이 드신 형님이 힘없고 저항할 능력없는 어린 동생들을 두둘겨패는 것은 형님으로서 도리가 아니지요.

제가 오늘은 형님을 좀 때려야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신마적에게 도전한 것이다.

 

성질이 불같은 신마적은 김두한의 당돌한 이 말을 듣고는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엄청나게 화를 냈다고 한다.

 

원래 신마적은 다리춤에 단도 두자루를 달고 다닌다고 하며, 김두한도 단도 한자루를 몸에 숨기고 다녔다고 한다. 왜냐하면 경성에 진출한 일본야쿠자들이 으레 단도나 검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김두한의 제의로 서로가 갖고있는 칼을 동생들에게 맡기고, 맥주집 앞마당으로 나간 두사람, 김두한 대 신마적간의 역사적인 싸움대결이 펼쳐졌다.

 

김두한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신마적과 거리를 넓히고 싸워야 했고, 신마적에게 붙잡히지 말아야만 했다.

 

괴력이 천하장사인 신마적에게 팔이나 허리춤이 붙잡히는 순간에는 그대로 공중으로 던져져서 떨어지게 되므로, 그렇게될 경우에는 팔이나 다리, 허리에 골절상을 입어서 그대로 KO패당하기 십상이다.

 

김두한은 최대한 신마적과 거리를 넓게 벌리면서 외곽을 돌면서 기회를 보았고, 이 때에 신마적이 김두한을 잡기 위해서 달려 들어왔다.

이 순간 김두한은 재빠르게 공중으로 몸을 도약했고, 곧바로 오른발로 신마적의 안면을 강타했다.

 

공중으로 솟구쳐서 내려오는 탄력을 이용한 김두한의 강력한 발차기가 그대로 신마적의 양미간을 강타했고, 큰 충격을 받은 신마적은 그대로 쓰러졌다.

 

자신도 모르게 쓰러졌던 신마적은 곧바로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김두한의 왼발이 일어나는 신마적의 가슴팍을 거쎄게 걷어차버렸고, 연달아서 김두한의 오른발킥이 신마적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이 두 번의 발차기공격으로 신마적은 또다시 바닥으로 쓰러져버렸다.

 

충격을 상당히 받은 신마적이었지만, 또다시 신마적은 바닥을 집고 일어났다.

 

이번에는 김두한이 마지막 공격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2년전에 구마적을 한방에 쓰러뜨린 그의 독보적인 무기인 이단발차기였다. 김두한은 온몸의 힘을 다 모아서 회심의 이단발차기를 신마적의 안면에 날렸다.

 

김두한이 몸전체의 체중을 실어서 공중으로 몸을 날려, 그대로 두발로 신마적의 안면을 강타한 것이다.

김두한의 이단발차기가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신마적의 안면을 강타했고, 신마적은 그대로 뒤로 튕겨져 나가면서 땅바닥에 쓰러졌고, 세 번째로 쓰러진 신마적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공방이 벌어질 줄 알았던 김두한과 신마적의 대결은 뜻밖에도 김두한의 일방적인 KO승으로 끝이 났다.

김두한이 뛰어난 두뇌플레이와 탁월한 싸움기술을 발휘해서, 우미관의 최고의 싸움꾼인 신마적을 완벽하게 KO시켜 버린 것이다.

 

쓰러진 신마적은 동생들에 의해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신마적은 턱이 골절되고 갈비댓 4대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3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193619세의 나이로 김두한이 드디어 우미관 최고의 주먹 신마적을 꺾고, 종로의 최고의 주먹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종로의 가장 큰 보스이자 양대산맥이었던 구마적과 신마적을 모두 다 쓰러뜨린 김두한은 이제 명실공히 종로의 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종로통에는 구마적과 신마적 말고도 또다른 거물주먹들이 있었는데, 종로골목에서 또다른 거물싸움꾼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가라데의 고수인 뭉치와 괴력의 싸움꾼인 제비가 있었다.

 

김두한은 신마적을 쓰러뜨린 후에, 뭉치와 제비에게도 도전장을 던지고, 이들과 일대일 맞대결을 펼쳐서 이들을 보기좋게 KO시켜 버렸다.

 

김두한은 종로에서 가장 쎈 오야붕들인 구마적과 신마적, 뭉치, 제비등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종로의 최고의 오야붕으로 우뚝 솟아올랐다.

 

그런데 야망이 원체 컸던 김두한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고, 서울 전지역의 주먹세계를 점령하길 원했다. 항상 최고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했던 김두한은 종로를 차지한 후에도, 서울전역으로 자신의 주먹나와바리를 확장해나갔다.

 

이후에 김두한은 시구문의 역도 씨름패들에게 도전해서 모두 쓰러뜨렸고, 동대문패와 서대문패(동양극장)에 쳐들어가서 모조리 쓰러뜨렸으며,

그 외에도 스카라극장과 국도극장파, 사지골패와 한강장사패들도 모두 쓰러뜨리면서, 서울의 전지역을 자신의 나와바리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의 거침없는 주먹행보는 여기서 끝이 나지 않았는데, 서울을 점령한 후에도 김두한은 자신의 주먹조직을 전국으로 확장시켜 나갔다.

 

인천을 시작으로 해서 수원, 용인, 청주, 전주, 광주, 목포, 부산까지 거의 남한지역 대부분을 자신의 주먹나와바리로 만드는데 성공했을 뿐만아니라, 그 후에는 북쪽으로 진출해서 개성과 평양을 점령하였고, 안주에 이어 급기야는 신의주에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김두한은 고작 23세 때인 1940년도에 한반도 거의 대부분의 대도시들을 자신의 주먹나와바리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조선 최고의 전국구주먹으로 성장해 있었다.

김두한은 고작 23세 때에 마침내 자신이 꿈꾸워왔던 조선 최고의 주먹으로 우뚝 솟아오르게 됐다.

 

김두한이 신의주로 진출할 때에는 신의주의 최고의 싸움꾼인 시라소니를 만나게 되고, 김두한의 부하들이 시라소니에게 엄청나게 두들겨맞고 돌아오게 된다.

 

김두한동생들이 시라소니와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게시글을 올려서 소개하기로 하겠다.

 

한편 김두한에게 두들겨맞고 만신창이가 된 신마적은 1937년 초에 7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게 된다.

신마적은 만주 봉천에서 자신만의 거대한 주먹조직을 만들었고, 만주에서의 제2의 주먹신화를 활짝 열어나간다.

 

만주 봉천에서는 시라소니가 신마적의 나와바리(구역)에 나타나서, 시라소니와 신마적간의 알력과 대결이 펼쳐지기도 하는 등 흥미진진한 싸움전설들이 또다시 만들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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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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