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김수로왕과 왕비 아유타국 허황옥(허황후)의 결혼과 정체, 인도 루트, 타밀어와 한국어의 공통점

 

오늘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즉, 왕비라고 알려진 허황후(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허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허황후가 어떻게해서 가야로 왔고, 가야의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었는지, 그리고 허황후(허황옥)가 어느나라 태생인지 등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고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요.

 

고대국가 시절 변한지방에 가야라는 나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부인으로 알려진 허황후의 정체와 그녀가 왜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는지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어요!

 

✦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

 

허황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김수로왕을 이야기해야 하겠지요.

김수로왕은 김해지역에서 금관가야를 건국한 가야국의 시조이지요. AD 1세기경에 건국된 금관가야는 그냥 ‘가야’ 또는 ‘가락국’이라고도 하며, 이 가락국은 김수로왕이 처음으로 건국한 나라랍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인데, 김해지역에 9간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었는데, AD 42년에 북쪽의 하늘에서 이상한 노래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서 밧줄에 묶인 금상자 하나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금상자안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나왔는데, 그 황금알이 갑자기 여섯명의 아린아이로 변했고, 그 어린아이 중에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쎈 아이가 바로 김수로였고, 김해지역의 수장인 9간이 김수로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김수로는 가락국(가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수로왕이 가락국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황금알에서 나온 김수로가 키가 무려 9척(2m)나 될 정도로 엄청나게 체격이 크고 힘이 장사였을 정도로 기골이 장대했기 때문에, 9간들이 그를 하늘에서 내려보낸 최고의 지도자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9간은 고대시대의 김해지역에서 각 지방을 다스리는 그 지역의 군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매우 비범한 모습으로 주변사람들에게 위엄을 떨치며 숭배의 대상이 된 김수로는 어렵지않게 가락국의 시조가 되었으며, 김해를 비롯한 6개 지역을 통합해서 6가야 연맹을 다스리는 최고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수로왕은 천신 이비가지와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고유의 천신사상이 나오는데, 우리 고대국가의 대부분의 시조들은 모두 천신의 아들 또는 손자라고 나오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고대국가 시조들의 공통점이며, 이것이 우리나라 고유의 ‘천신사상’입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의 아들일 정도로 귀하신 몸이니, 그가 땅을 다스리는 통치자, 즉 왕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하자면, 옛 변한지역을 다스리던 9명의 군장(9간)들에게 어느날 하늘로부터 한 계시가 전해졌습니다.

 

하늘로부터 9간들에게 "너희들에게 위대한 왕을 내려보내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9간들은 이 노래를 불러서 왕의 하강을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9간들이 이 노래를 부르자, 실재로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왔고, 그 황금알 중에서 제일 먼저 알을 깨고 나온 김수로가 9간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  김해지역에서가락국(금관가야)을 건국하게 됩니다.

 

이 때 9간들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구지가’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김유신장군도 김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금관가야의 10대왕 구형왕이 신라의 법흥왕에게 항복하면서 금관가야는 멸망했고, 금관가야의 왕족과 후손들은 모두 신라에 귀부하여 신라의 관리로 살아갔는데요.

 

신라에 항복한 구형왕의 3대손이 바로 김유신이며, 신라에 귀부하여 신라의 관리로 살아가던 김유신이 장군이 되어서 큰공을 세우고, 삼국통일의 큰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계보로 따지면,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 후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수로왕은 왕이된 후, 신라와 중국의 관제를 모방해서 가야의 관직을 설치하는 등 문무제도를 정비해나갔고, 소국이었던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의 영토분쟁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등 나름대로 업적을 쌓아나갔답니다.

 

여기서 궁금한 건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즉 왕비에 관한 사항입니다.

김수로왕의 부인은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 즉 허황후라고 합니다.

 

◆ 김수로왕의 부인이자 왕비인 허황후(허황옥)의 정체

 

허황옥(허황후)는 아유타국에서 가야국으로 와서 김수로왕의 부인 즉, 왕비가 되었고, AD 32년부터 AD 189년도까지 무려 158년간 살았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신화적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었다는 허황옥(허황후)는 어느나라 사람이고,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삼국유사에는 허황옥(허황후)의 고향은 인도 아유타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 기록을 근거로 사람들은 허황옥(허황후)이 인도에서 온 여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김해시에 수로왕비릉(허황후 묘)이 현존한다고 합니다. 이 삼국유사의 기록과 허황후의 묘를 근거로 해서 허황후가 실존인물이며, 그녀가 인도 아유타에서 온 여인이라고 합니다.

 

허황옥(허황후)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건무 24년에 9간이 왕을 접견할 때에 왕에게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까지 배필을 얻지 못했으니, 저의 신하들 딸 중에서 가장 예쁜 여인을 골라 대왕의 배필로 삼겠습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김수로왕은 ‘짐이 이곳으로 와서 왕이 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짝을 지어 왕후로 삼는 것도 하늘의 뜻이니, 경들은 너무 심려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유천간에게 명하여 준마를 대동하고 경주를 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색의 돛단배가 붉은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항행해왔습니다.

유천간 등 신하들은 이 소식을 곧바로 김수로왕에게 아뢰었고,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구간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가서 그들을 친절하게 맞이하게 했습니다.

 

구간들은 배에서 나온 한 아리따운 공주를 맞이하고, 그곳에 왕림한 김수로왕 앞으로 데려갔고, 공주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 부왕과 황후가 저에게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서 우리 두사람이 함께 천황을 보았는데, 천황은 가락국의 왕 수로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이 된 자로서, 그는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자이다. 나라를 건국하였지만 아직 배필을 만나지 못했으니, 공주를 그에게 보내어 그의 배필로 삼게하라”고 말한 후,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왕은 저에게 곧바로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고 명했고, 저는 멀리서 배를 타고와 이제야 왕의 용안을 가까이서 뵙게 되었습니다’ 라고 허황옥은 말했습니다

 

허황옥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한 김수로왕은 ‘나는 자못 성스러워서 멀리서 공주가 올 것을 미리 알고있었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나에게 찾아왔으니, 짐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허황옥과 곧바로 혼인식을 올리고, 그녀와 사흘밤낮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김수로왕은 허황옥이 타고온 배에 함께 타고있던 15명의 뱃사공에게 450필의 비단과 쌀 150섬을 주어, 본국으로 귀국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김수로왕은 아유타국에서 찾아온 허황옥을 자신의 부인인 황후로 삼고, 그녀를 궁궐로 데려가서 중궁에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가야국에 올 때, 특이한 탑 하나를 갖고왔다고 합니다.

 

허황옥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항행해갔을 때, 거쎈 파도와 풍랑에 막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부왕이 그녀에게 파사석탑을 싣고가라고 명했고, 그녀가 이 탑을 싣고가자, 풍랑이 멈추고 바다를 쉽게 건널 수 있어서 가야국의 땅에 정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파사석탑이 실제로 허황옥이 인도에서 갖고온 것인가에 대한 그 진위여부를 놓고 학계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만일 진짜로 허황옥이 파사석탑을 인도에서 갖고왔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허황옥(허황후)은 인도에서 온 공주가 맞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습니다.

 

파사석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며,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한 형태의 탑입니다. 또한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라고 합니다.

 

허황옥은 파사석탑만 갖고온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종류의 다채로운 비단, 금과 은, 구슬과 옥, 유리구슬 장신구등 이루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부장품과 선물들을 갖고왔답니다.

 

 

◆ 허황옥(허황후)이 갖고온 파사석탑의 정체

 

금관성 호계사에 있는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가야에 속했을 때,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온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지금도 이 파사석탑은 원형 그대로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남아있는데요.

 

이 파사석탑의 정체를 살피는 것이 허황옥(허황후)이 실존한 인물인지, 그리고 그녀가 실제로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봅니다.

 

파사석탑은 5층으로 되어있고, 그 조각이 매우 기묘하며, 돌은 붉은 얼룩무늬가 나있고, 연한 재질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의 연구로 이 파사석탑의 돌이 한반도에는 존재하지않는 돌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파사석탑의 돌은 한반도에 나지않는 외국에서 들여온 돌이라는 겁니다.

 

고려대연구진이 파사석탑의 성분을 정밀 분석한 결과, 파사석탑의 재료인 붉은색의 탑돌이 한반도에는 없는 성분인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배달문화연구원장 허명철박사가 연구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파사석탑은 재료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인도의 아유타지방에서만 나오는 파사석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파사석탑의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발견되지않고, 인도의 동굴사원인 아잔타 엘로아나식에서 볼 수 있는 불탑의 형태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즉, 허황후가 갖고왔다는 파사석탑은 그 재질이나 형태가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인도의 재질인 것으로 밝혀졌답니다.

 

또한 중국기록에서도 파사석은 천축(인도)이 그 원산지라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파사석탑의 파사석 즉, 파사돌은 고대 인도 타밀어로도 똑같이 파사돌이라고 불렀습니다.

파사돌은 ‘부모’를 뜻하는 ‘파사’와 돌을 뜻하는 ‘돌’이 합쳐진 합성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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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 타밀어인 ‘돌’이 우리나라의 ‘돌’과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우리나라의 ‘돌’이라는 단어는 1세기경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후의 파사돌에서 유래한 말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고대 인도의 타밀지방에서는 자녀가 멀리 떠날 때, 부모가 자녀들의 평안과 신의 가호를 빌기위해서 몸에 부적과도 같은 파사돌(파사석)을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인도의 아요디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도지역에서는 마치 부적처럼 양미간 사이에 파사돌가루를 바르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바다의 노여움과 거친 풍랑을 막기위해서 부모가 허황옥(허황후)에게 주었다는 파사석탑의 내용과

인도 타밀지방에서 자녀의 안전을 지켜줄 목적으로 부모가 여행을 떠나는 자녀에게 파사석을 부적으로 준다는 풍습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은 내용을 근거로 하면, 허황옥(허황후)이 파사석탑을 부모로부터 받아 가야국으로 갖고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결론, 파사석은 한국에서는 전혀 나지않는 돌이고, 파사석의 재료가 인도의 아유타지방에서 난다는 점과 파사석탑이 형태가 인도의 불탑형태와 동일하다는 점,

또한 파사석이 인도에서 자녀의 안전과 평안을 기원하는 부적처럼 쓰인다는 점은 허황옥(허황후)이 인도에서 왔음을 증명해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인도북부에 있는 아요디아는 고대시기에 아유타국이 존재했던 지역입니다.

 

이 곳 아요디아지방에서는 상인들이 돌을 갈아서 만든 돌가루를 주민들에게 판매하고, 사람의 이마에 바르는 관습이 존재하는데, 주로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 이 돌가루를 이마에 바른다고 합니다.

이 돌가루를 이마에 바르면, 1년 한해동안 안녕과 평안을 이룰 수 있고,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돌가루가 바로 ‘파사석’입니다.

 

지금도 인도 아요디아에서 주민들이 파사석 돌가루를 이마에 발라서, 안녕을 기원하는 풍습이 남아있는데요.

이 아요디아지방이 바로 허황후의 고향인 아유타와 지명이 같은 지역입니다.

 

이 아유타지방(아요디아)에서는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허황옥이 항해의 안전을 기할 목적으로 파사석으로 만든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온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파사석 돌가루를 몸에 바르는 풍습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또한 고고학자의 연구분석에 의해서, 금관가야(가락국)가 위치했던 김해의 양동리고분에서 출토된 코발트블루 유리와 다크블루 유리의 화학적 구성물이 고대 인도 유리의 것과 일치함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랭턴 박사는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목걸이가 인도산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옛 가야지역의 고분에서 발굴된 유리구슬 목걸이류의 유물들이 인도산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것은 가야지방에서 발굴된 유리구슬 목걸이들이 AD 1세기경 허황옥(허황후)이 가야국의 김수로왕에게 시집올 때, 예물로서 갖고온 장신구들이 아닐까 합니다.

 

인도 동남쪽에 있는 항구 아리카메두에서도 코발트블루 유리가 많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김해지역과 인도 해안지역에서 똑같이 코발트블루 유리 장신구가 발굴되었다는 것은 고대 시기에 가야국과 인도가 서로 활발한 인적교류활동과 교역활동을 벌였다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김해 양동리고분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목걸이 유물을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그 시기를 측정한 결과, AD 1세기의 유물인 것으로 확인되었답니다.

 

AD 1세기면, 허황옥이 가야국을 방문한 연대인 AD 48년과 일치하는 연대입니다.

 

이처럼 삼국유사의 기록과 파사석탑의 유래,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여러 유물들과 흔적들을 근거로 살펴보면,

고대시기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허황후)이 가야국의 김수로왕에게 시집을 왔다는 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인도에서 한국까지의 거리가 직선상으로 약 5,000km나 되는 매우 먼거리인데요. 이처럼 고대시기에 인도의 공주가 5,000km 이상의 거리를 항행해와서, 가야국의 국왕에게 시집을 왔다는 것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도 허황후의 고향으로 알려진 타밀나두 주, 이곳에는 타밀어를 쓰는 칸야쿠마리지역이 있는데, 이곳의 예전지명은 아유타였다.

 

이것은 AD 1세기경에 인도의 아유타국과 우리 가야국이 인적교류와 물적교류를 포함해서 양국간 활발한 교역활동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원래 가야국은 항해술이 무척 발달해서 고대시기에 요서지방과 산둥반도, 일본등과 활발한 무역활동을 했던 해양무역국가로 유명한 나라이지요.

 

이처럼 고대시기에 주변의 여러나라들과 활발한 교역활동을 해왔던 해상무역국가 가야국이 동북아를 넘어 동남아지역인 인도에까지 진출해서,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교역활동 했다는 것이 허황후신화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가야가 인도의 한지역의 왕족인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은 가야국이 인도의 아유타국과 정치적 연맹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 1세기경 가야지방 고분에서 출토된 왕족유골의 주인공은 인도계

 

서울대 의대 서정선교수 연구팀은 AD 1세기경 가야시대의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 예안리고분 유골의 유전자DNA를 분석해보았더니, 인도의 남방인의 DNA와 매우 가까웠으며, 이들이 인도 남방지역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합니다.

 

1세기경, 가야지방 고분에서 발굴된 왕족유골의 유전자가 인도 남방인의 유전자와 흡사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즉, 가야국의 왕족에 인도 남방인의 혈통이 포함되었다는 겁니다.

 

한 언어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인도 남부지역에서 사용하는 드라비다어(타밀어)와 우리말은 무려 1,000개가 어휘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도의 드라비다족이 고대시기에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어 인도 타밀어 한국어 인도 타밀어
엄마 엄마
아빠 아빠
아버지 아버치 아주머니 에자마니
나는 가다 가다
이것봐 잉게봐 사람 사남
이리와 잉게와
강가 갈비 갈비
쏘루 비단 비단

 

한국어 인도 타밀어
길쌈 길쌈
윷놀이 윳노리
팽이놀이 팡이노리
궁둥이 궁디

 

이외에도 한국어와 타밀어가 똑같은 말로는 아기를 달랠 때 쓰는 말로서 ‘도리도리’ ‘짝짜꿍’ ‘곤지곤지’ ‘죔죔’ ‘어부바’ ‘까꿍’ 입니다.

 

이처럼, 인도 남부의 타밀지역에서 쓰는 타밀어와 우리 한국어간에 유사한 말이 너무도 많은데, 무려 1,000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국어와 인도 타밀어가 유사한 것은, 고대시기에 한반도에 정착한 선주민의 일부가 인도 등 남방으로부터 이주해왔음을 증명해주는 유력한 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인도에서 이주해온 무리 중 하나가 허황옥(허황후)로 대표되는 아유타집단일 것이며,

허씨세력은 한반도남부의 유력한 정치세력인 가야국과 결혼동맹을 맺어서, 자신들의 정치적 귄위와 입지를 다졌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즉,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온 데로, 아유타국의 허황옥(허황후)과 김수로왕이 혼인을 맺음으로써,

인도 남방계의 정치세력과 한반도남부의 정치세력이 정치적 동맹관계를 결성하고, 가야지역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다고 보여집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후는 김수로왕과의 사이에 10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하며, 그 중 한명의 왕자가 김수로왕의 대를 이었다고 합니다.

 

허황후가 낳은 10명의 아들 중 장자 거등은 태자가 되어 김수로왕의 왕통을 이어받아 거등왕이 되었고, 두명의 왕자는 허황후의 요청으로 허씨 성을 물려받아서 김해 허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나머지 7명의 왕자는 모두 불교에 귀의하여 사원에 들어가 불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에는 허황후의 능이라고 전해지는 고분이 존재합니다.

 

결론적으로, 삼국유사에 김수로왕과 혼인한 여인으로 나오는 허황후는 여러가지 정황근거 상 인도 남부지역의 타밀나두에서 온 이주민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국유사에 허황후가 아유타에서 왔다고 소개하였는데, 인도 남부지역에 있는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가 옛날에는 ‘아유타’라고 불리웠다고 하는데, 허황옥(허황후)은 타밀지역에서 왔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1,000개가 넘는 한국말이 고대 타밀어와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허황후는 타밀어를 쓰는 지역에서 온 것이 거의 확실해보입니다.

 

허황후가 인도남부 타밀지역의 옛 ‘아유타’라고 불리우는 칸야쿠마리지역에서 가야국으로 이주해와서, 가야국의 왕족과 혼인을 맺어서 가야국의 왕비가 되고, 그녀와 측근들은 가야의 유력한 정치세력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허황후가 우리나라에 와서 정착하면서, 자신의 모국어인 타밀어를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시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현재 1,000개가 넘는 한국말이 타밀어와 일치한다는 점은 허황후의 인도 타밀지역 도래설의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인도에서 건너와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허황옥(허황후)에 대한 이야기와 허황후가 김수로왕과 혼인하게된 비사, 그녀의 정체, 그녀가 도래하게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소개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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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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