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혜숙의 미모와 근황, 결혼하지 않은 이유, 젊은시절 사진

연예인 핫토픽 2018. 3. 26. 21:37

 

배우 한혜숙의 출연작품과 독신의 삶을 사는 이유, 나이

 

70년대 청순하면서도 세련된 미모로 큰인기를 끌었던 미모의 여배우 한혜숙을 기억하시나요?

 

동양여성 답지않게 큰 키에 세련되고 청순한 미모로 70년대의 수많은 남성들을 설레이게 했던 당대의 미모얼짱인 한혜숙은 연기자로서 70년대를 풍미했던 인기높은 명배우랍니다.

 

70년대 초반 혜성처럼 우리 연예계에 등장했던 한혜숙은 각종 드라마와 CF모델을 휩쓸고 다니면서, 당시 우리 연예계에서 가장 세련되고 예쁜 미모의 여배우로 명성을 떨쳤답니다.

 

60년대를 주름잡았던 인기 트로이카 여배우들이 모두 은퇴하고 난 후, 무주공산이된 우리 연예계에서 혜성처럼 등장했던 한혜숙이 트로이카 여배우의 뒤를 이어서 새로운 세련된 미녀상을 선보이면서,

70년대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여배우로 큰 스포트라이터를 받았답니다.

 

그럼 70년대에 우리 연예사에서 큰 획을 그었던 대표적인 얼짱여배우 한혜숙에 대해서 포스팅해볼까 합니다.

 

한혜숙은 1970년도에 MBCKBS에 동시에 탤런트로 뽑히면서 연기자로 데뷔했는데, 한혜숙은 70년도에 MBC에 김자옥과 함께 데뷔해서 김자옥과는 동기 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혜숙은 그 이듬해에 KBS에 다시 탤런트로 데뷔하게 되는데, 당시 KBS TV드라마인 꿈나무오디션에 응모하여,

무려 3500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여주인공자리를 꿰차는 엄청난 일을 벌이면서, ‘꿈나무의 여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이 당시 꿈나무여주인공 응모경쟁률인 35001의 경쟁률에서 1위를 한 한혜숙의 기록은 아마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경쟁률기록이 아닐까 합니다.

 

그 당시 동양적인 미모를 중시하던 보수적인 풍토에서 한혜숙은 큰 키에 오똑한 콧날 등 서구적이면서 세련된 미모가 꿈나무여주인공으로 발탁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드라마 꿈나무는 당시 신세대계층인 고등학교 남학생과 여학생간의 순수하고 때묻지않은 우정과 사랑을 그린 학생드라마로,

그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주제와 참신한 내용으로 KBS에서 아주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명드라마였답니다.

 

이 드라마 꿈나무에서 첫주연을 맡은 한혜숙은 인기 미남배우 하명중과 함께 열연을 펼치면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여서, 안방극장의 인기스타로 급부상하게 된답니다.

 

당시 교복을 입고나온 한혜숙은 서구적인 세련미에 더해 청순하면서도 깔끔한 미모가 무척 돗보였고, 과거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미인계보를 이어나갈 신세대 미녀스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답니다.

 

드라마 꿈나무의 큰 히트로 스타덤에 올라서게 된 한혜숙은 그 이후 각종 인기드라마에 계속 출연하면서, 자신의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을 계속 어필해나가면서 인기스타의 자리를 굳혀나가게 됩니다.

 

70년대 전반 당시 한혜숙의 미모는 지금의 김태희의 미모에 비견될 정도로, 큰주목과 호평을 받았으며, 수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셀레이게 했습니다.

 

한혜숙은 백옥같이 하얀 살결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서양인같이 오똑한 메부리코와 초롱초롱한 눈 등 그 시대가 요구하는 샤프하면서도 세련된 미모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기에, 70년대를 대표하는 미녀스타라는 닉네임이 붙게되었답니다.

 

한혜숙의 키는 164cm인데, 한국여성의 평균신장이 지금보다 훨씬 작었던 70년대에 이 정도의 키는 지금의 170cm와 맞먹을 정도로 큰 키에 속했답니다.

그당시 TV안방극장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트로이카 세명의 여배우들이 있었는데, 바로 김자옥과 이효춘, 그리고 한혜숙이 그 주인공이었는데요.

 

이 세명의 미녀스타들이 우리 TV의 대부분의 드라마들의 주인공을 꿰차고 있었는데, 이 들 중에서 한혜숙이 가장 키가 컸고 몸매가 가장 글래머스하고 아름다웠답니다.

 

따라서 한혜숙은 이 시기에 세련된 미모와 더불어 큰 키와 글래머스한 몸매, 그리고 탄탄한 연기력까지 더해져서, 7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로 우뚝 올라설 수 있었답니다.

 

한혜숙은 신기록을 가장 많이 세운 여배우로 유명하답니다.

한혜숙이 70년대에 드라마 구미호춘향이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우리나라 여자연기자들이 톱스타로 올라설 수 있는 관문이 되는 드라마가 세편이 있는데요. 바로 구미호춘향이그리고 토지의 서희역이랍니다.

 

이 세편의 유명드라마는 워낙 유명한 명작품들이라서, 계속해서 리메이크되는 작품들이랍니다.

 

이 세편의 드라마에의 여주인공으로의 발탁은 톱스타가 될 수 있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이 세편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여배우들은 모두가 톱스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혜숙은 70년대에 구미호춘향이’ ‘토지에서 모두 여주인공자리를 맡았으며, 한혜숙은 1대 구미호, 1대 춘향이역을 맡은 원조배우랍니다.

 

한혜숙이 TV드라마에서 최초로 선보인 춘향이에서 최초로 춘향이역을 맡았다는 것은, 당시에 그녀의 미모와 인기가 얼마나 높이 평가를 받았는지를 여실히 증명해주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영화에서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인 김지미와 문희 같은 대스타들만이 춘향이역을 맡았었는데, TV드라마에서는 한혜숙이 춘향이역의 첫테이프를 끊은 것이라서, 당시 한혜숙의 비중은 최고의 스타인 김지미와 문희에 맞먹을 정도로 대단히 컷었다고 평가할 수 있답니다.

 

한혜숙은 드라마 토지에서 주인공 서희역할을 맡았는데, 역대 토지 드라마에서 한혜숙이 가장 서희역에 잘 어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가장 예쁜 서희였다고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당시 한혜숙과 같이 드라마에 출연했던 남자배우들 중에 한혜숙을 짝사랑했던 배우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한혜숙의 성격은 대단히 자존심이 강하고 도도한 성격이었으며, 외모와는 달리 매우 직선적이면서 보수적인 성격을 가진 한혜숙은 주변의 따르는 남자배우들을 모두 멀리했고

자신에 대해 철저히 관리했기 때문에, 당시에 한혜숙은 스캔들 없는 배우로 유명했답니다.

 

당시 일반인 중에도 한혜숙을 짝사랑하고 스토킹하는 남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한 남성은 70년대 당시 거의 매일같이 한혜숙의 집을 찾아와서 그녀를 미행했으며, 심지어 한혜숙의 집 담벼락에 한혜숙의 이름을 적고 빨간 토마토로 하트모양을 새겨넣어서, 한혜숙을 깜짝 놀라는 만드는 소동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70년대 당시 한혜숙은 많은 남성배우들과 일반남자들의 커다란 로망의 대상이었답니다.

 

지금은 수많은 매이커의 화장품들이 많이 있지만, 70년대 전반 당시에는 화장품은 3개 정도 밖에 없던 시절이라서,

최고미녀로 공인받을 수 있는 ‘CF의 꽃화장품모델에 발탁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한혜숙은 데뷔한 지 1년밖에 안된 1971년도에 당시 가장 인기좋았던 화장품인 아모레 하이톤화장품의 전속모델로 발탁되었고, 73년도까지 무려 3년 동안 아모레 화이톤화장품의 CF모델로 활동을 이어나갔답니다.

 

나중에 톱스타로 활동했던 유지인과 정윤희 등도 모두 화장품 전속모델 출신들이랍니다. 지금이나 과거나 여자연기자가 화장품모델에 나온다는 것은 톱스타로 가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혜숙은 화장품광고 외에도 여러 종류의 CF광고에 많이 출연했는데, 섬유회사 광고, 이불광고, 파이롯트 만년필광고, 비바라 샴푸광고 등

1970년대 내내 수많은 CF광고들에 출연했는데, 한혜숙은 그야말로 70년대 CF의 여왕이나 다름없었답니다.

 

이렇게 멋지고 새련된 미모로 각광받았던 한혜숙은 그 후 꽃피는 팔도강산’ ‘노다지등 유명드라마에 계속해 주연급으로 출연해서 높은 인기를 계속 이어나가게 된답니다.

 

  토지의 한혜숙

 

그런데 한혜숙의 아킬레스건이 하나 있습니다. 한혜숙은 TV드라마에서는 높은 인기를 끌면서 그녀의 출연드라마들도 크게 히트를 쳤지만, 영화쪽에서는 별로 큰 활동을 펼치지 못했답니다.

 

한혜숙이 본격적인 연기를 펼쳤던 70년대 중반 이후의 우리영화계는 전통영화가 시들어갔고, 새로운 장르인 여자호스티스 영화와 애로영화들이 주류를 이었던 시기랍니다.

 

한혜숙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김자옥 등은 호스티스 영화에 곧잘 출연해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한혜숙은 보수적인 성격 탓에 이런 호스티스영화에 출연을 고사하거나 벗는 연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별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으며, 한혜숙이 출연한 영화도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관이 뚜렷하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한혜숙의 성격탓에, 그녀는 TV드라마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지만, 아쉽게도 영화배우로서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답니다.

 

한혜숙이 출연한 영화 상록수’ ‘족보’ ‘최후의 증인같은 영화들은 작품성은 뛰어났지만, 사회문제를 다루는 교시적인 성격의 영화들이라서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답니다.

 

그렇지만 한혜숙은 TV드라마에는 계속 출연하면서 뛰어난 연기자로서의 명성을 계속 이어나갔는데, 70년대를 넘어 80년대, 90년대, 2000년대까지 왕성한 연기활동을 벌어나갔답니다.

 

  한혜숙은 80년대, 90년대를 아우르면서 계속 연기활동을 이어나갔는데, ‘황금의 탑’ ‘금잔화’ ‘이 여자가 사는법’ ‘천사의 분노

그리고 2000년대에도 한혜숙은 인어아가씨’ ‘왕꽃선녀님’ ‘하늘이시여등 명작품에 출연해서 중후하고 후덕한 연기력을 선보이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기도 했답니다.

 

특히 한혜숙은 2005년도의 인기드라마인 하늘이시여에서 개성있고 인상적인 명연기를 선보임으로써, SBS 연기대상 시상에서 대망의 대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답니다.

 

젊었을 때에는 빼어난 미모로 한몫했던 한혜숙은 2000년대 이후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는 기품있고 중후한 연기력으로 다시 큰 각광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70, 80년대의 우리연예계의 대표적인 미인여배우로 각광을 받았던 한혜숙에게 한가지 의문점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있답니다.

 

그렇게 높은 인기와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던 그녀가 지금까지도 계속 독신으로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시대를 풍미했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가졌다면, 벌써 진작에 재벌가의 며느리로 들어갔어야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한혜숙은 60이 넘은 지금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의혹스러운 부분이랍니다.

   

한혜숙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이유

 

70, 80년대 세상을 뒤흔들었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와 안방극장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던 한혜숙이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가 무척 궁금하기 짝이 없답니다.

 

미모가 안된다면 모르겠지만, 70년대 초반에 35001의 경쟁률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얼짱미모를 보유한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결혼하지 않았을까요?

 

한혜숙이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표면적인 이유는 두가지 정도 된답니다.

 

하나는 그녀의 가정환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또다른 하나는 그녀의 종교적인 신념 때문이라고 여겨진답니다.

 

한혜숙은 1951년도 부산에서 5자매 중 맏딸로 태어났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척 엄격한 성향을 갖고 있어서, 어려서부터 한혜숙을 엄격하게 훈육했다고 합니다.

 

또한 한혜숙은 29세의 나이에 가장이었던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20대 중반의 한혜숙에게는 부양해야할 4명의 여동생들이 있었으며, 그 당시 한혜숙은 4명의 여동생들을 모두 양육하고 교육시켜야할 사실상의 가장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한집안의 가장이 된 한혜숙은 자기자신을 철저하고도 엄격하게 관리해나갔으며, 오직 일과 가족부양에만 전념해나갔다고 합니다.

 

가족들을 모두 책임져야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사로잡힌 한혜숙은 연기활동을 하면서도, 근검절약을 해나가면서 동생들을 모두 양육해나갔고 대학까지 보내는 등 가족들 부양에 전력을 다했다고 합니다.

 

타고난 성격 자체가 보수적이면서 완고한데다가 동생들 부양에만 신경을 집중시켰던 한혜숙은 어쩌면 연애라는 것을 사치라고 느꼈을 수도 있었다고 보여진답니다.

이렇게 동생들 부양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기자신에게 너무도 엄격했던 한혜숙은 많은 남성들의 프로포즈를 전부 거부했을 것으로 보여진답니다.

 

한혜숙이 현재까지 독신으로 있지만, 사실 한혜숙도 젊었을 때에는 연애를 전혀 안한 것은 아니랍니다.

 

한혜숙이 스스로 밝혔던 내용인데, 그녀는 젊었을 때에 3번 정도 연애를 했었다고 합니다.

70, 80년대의 대표적인 미인이었던 그녀가 아무리 성격이 엄격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한번도 연예를 안할 수가 있겠어요?

 

, 젊었을 때의 한혜숙은 총 세명의 남자들과 연애를 했었고 그 중에는 좋은 감정을 가졌던 상대도 있었다고 해요.

그들 중에는 소위 7공자에 해당하는 대단한 스펙을 지닌 남자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남자가 어찌나 끈덕지게 한혜숙을 쫒아다니면서 끈적댔는지, 한혜숙은 이 남자의 그런 끈질긴 대쉬에 오히려 질려버렸다고 합니다.

 

다른 여자들은 어느정도 배경이 좋은 남자가 자신을 끈질기게 대쉬해오면 좋아했을텐데, 한혜숙은 보통여자들과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여성이랍니다.

 

자신을 좋다고 끈덕지게 데쉬해오던 배경이 좋은 7공자에게 한혜숙은 너무 질린 나머지 보기좋게 차버렸다고 합니다.

 

그 때에 못이기는 척 하면서, 그 남자의 대쉬를 받아줬더라면, 한혜숙은 지금쯤 아들 딸 낳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있었을 겁니다.

 

 이것은 한혜숙의 성격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녀는 엄격하고 완고하고 깐깐하면서, 상당히 콧대가 센 성격이었답니다.

 

이렇게 깐깐하고 완고한 성격을 지닌 한혜숙은 남자들에게 고분고분하길 바라는 그 당시의 남자들의 취향에는 잘 맞지 않았던 겁니다.

 

70~8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여자가 어느정도 남자들에게 고분고분하면서 순종하는 스타일이 대세였던 시대였으며, 남자들은 그렇게 순종적인 여자들을 좋아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지요.

 

한혜숙의 성격의 또다른 단면을 보여주었던 사건으로 경비구타사건이 있답니다.

 

1981년도에 여의도 방송국에 출입할 당시에는 방송국 경비의 파워가 막강했었다고 합니다.

 당시 방송국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모든 연기자들은 명찰을 달고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며, 경비가 매일같이 엄격하게 명찰을 검사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연기자라고 하더라도, 명찰을 달고있지 않으면 경비는 그 연기자를 결코 방송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을 정도로, 경비들이 매우 깐깐하게 통제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혜숙이 명찰을 달지않고서 방송국으로 들어왔고, 당연히 경비는 명찰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답니다.

 

그 당시가 1981년도라 한혜숙은 유명텔런트라서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알고있었을 때였지요.

 

한혜숙은 자신에게 명찰제시를 요구하는 경비에게, ‘나는 한혜숙인데, 당신,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라고 말했고, 그 경비는 당신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고 말하면서, 계속 명찰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자, 두사람간에 심한 말다툼이 벌어졌고, 그 경비가 끝까지 출입을 막아서자, 화가난 한혜숙은 자신의 구두의 뾰쭉한 힐로 그 경비의 머리를 때렸다고 합니다.

어렇게 한혜숙의 구두굽으로부터 얻어맞은 경비는 머리에 피까지 흘렸댜고 합니다.

 

한혜숙의 성격이 얼마나 대쪽 같고 도도하며, 깐깐한 성격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이 이야기는 텔런트 김형자가 직접 전해들었던 그 당시에 매우 유명했던 실화라고 합니다.

 

한혜숙은 독실한 불교신자로도 유명하답니다.그녀의 어머니가 불교신자였고,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명한 사찰을 많이 내왕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답니다.

 

한혜숙은 계속해서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리면서, 자신을 보다 더 엄격하고도 철저하고 관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혜숙은 성격자체가 워낙 깐깐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였답니다.

그녀는 자신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엄격하게 관리해왔기 때문에, 그러한 그녀의 완벽주의와 종교적 신념 때문에 남자들과의 만남을 멀리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답니다.

 

이것은 종교적 신념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기 힘든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녀들은 하나님과 결혼했다고 생각하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고 수녀원에서 절개를 지키며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아간답니다.

 

절에 계속 다니면서 불공을 많이 들여왔던 한혜숙도 마치 수녀들처럼, 자신이 부처님과 결혼했다고 생각하면서 동생들 부양과 불공에만 전념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답니다.

 

실제로 한혜숙은 자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자신은 비구니가 될 것이라고 방송에서 말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 한마디야말로 한혜숙이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온 진짜이유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혜숙은 미국 센디에이고에 대규모의 땅을 구입해서, 그곳에다 절을 짓도록 그 땅을 불교계에 무상으로 기부했다고 합니다.

 

다음생에서는 연기자 되지 않고, 비구니가 되겠다고 하는 그녀의 말한마디가 가슴에 찡하게 울려퍼진답니다.

그 정도로 한혜숙은 불교적인 신앙심이 무척 강하다고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들을 종합해본다면, 한혜숙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자연스럽게 도출되어 나온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엄격한 교육과 스파르타식 규율, 타고난 보수적이면서 완벽제일주의 성격, 그리고 불교의 금욕주의적 신념과 가치관, 이런 제요인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한혜숙으로 하여금 자신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스스로 금욕적인 생활을 몰두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남자들을 멀리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특별한 이유와 환경 때문에, 70년대를 대표하는 미녀스타였던 한혜숙은 안타깝게도 60이 넘은 지금까지도 독신으로 살아오게 된 것이랍니다.

 

물론 안타깝다는 것은 우리의 판단일 뿐이고, 독신으로 살고있는 한혜숙 자신은 스스로 현상태에 만족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한혜숙은 자신이 죽기 전에 암자를 하나 지어 보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적도 있으며, 그곳에 복지시설을 하나 지어서,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적도 있답니다.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면서 이런 특별한 사상을 갖고있는 한혜숙은 아뭏튼 보통 사람은 절대 아니라고 느껴진답니다.

 

이렇게 완고한 한혜숙도 한때에는 핑크빛 스캔들 루머에 휩쌓인 적도 있답니다.

한혜숙이 한창 젊었을 때에, 그녀와 정주영이나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루머가 퍼진 적도 있었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시절에, 엄청난 공포정치로 일반시민들을 압박하고 탄압했던 그 서슬퍼런 70년대의 시절에, 박정희는 그 당시 잘 나갔던 여러명의 미모의 여배우들을 건드렸다고 하는 루머가 있었답니다.

 

일반인들에게 숨겨졌던 궁정동의 안가는 박정희가 여배우들을 데려다가 유희를 즐겼던 곳으로 알려지기도 했답니다.

 

한혜숙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정확한 팩트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답니다. 단지 몇몇 사람들의 육성증언만이 있을 뿐이고,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당시 초법적인 권력을 휘둘렀던 박정희가 많은 여자들을 건드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어쩌면 당대의 최정상급 인기여배우였던 한혜숙도 도매급으로 함께 연관되어서 그러한 루머에 휩쌓이게 된 것은 아닌가 합니다.

 

박정희와 한혜숙의 스캔들루머는 제발 사실이 아니길 바라겠습니다.

물론 한혜숙은 이같은 루머는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정했다고 합니다.

 

한혜숙은 1951년생으로 지금 나이가 68세가 되었네요. 그렇지만 그녀는 최근까지도 젊었을 때의 미모를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아름답고 중후한 자태를 잃지않고 있습니다.

 

한혜숙은 2009년 드라마 보석비빔밥을 마지막으로 촬영하고는 더이상 방송에서 모습을 보이지않고 있습니다.

 

전언에 따르면, 한혜숙은 어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지금 어머니의 병간호에 열중하면서 집에서 쉬고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혜숙은 틈나는 데로 절에 찾아가서, 정성껏 불공을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혜숙이 모든 주변상황이 잘 정리되고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찮고서, 방송에 다시 출연해서, 그녀의 완숙하고 중후한 연기를 다시 볼 수 있기를 팬의 한사람으로서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한혜숙이 방송에서 말한 한마디가 떠오르는데요.

 

나는 연기자로서는 성공했을지는 모르지만, 여자로서는 실패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라고 한혜숙은 말했답니다.

 

장년의 나이가 되도록 결혼하지 못한 여성으로 남았다는 것을 실패했다는 말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또한 한혜숙은 나는 아직도 언젠가는 좋은 남자와 만나 결혼하는 꿈을 꾸고 있다라고 한 방송에서 직접 말했다고 합니다.

 

한혜숙이 직접 이 말을 한 것을 보면, 한혜숙은 원래 독신주의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깐깐하고 완고한 성격, 불교적 금욕주의적 가치관과 더불어 동생들을 모두 뒷바라지 하는 데에만 몰두한 나머지, 한혜숙은 혼기를 놓친 것 같습니다.

 

한혜숙이 아직도 결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하니, 이것은 대단한 반전으로 정말 놀랍기만 하답니다.

그녀가 다시 방송에 출연해서 보다 더 기품있고 완숙한 연기를 펼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한혜숙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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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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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하 성추행 미투폭로, 80년대 미스코리아출신 여배우 김씨

연예인 핫토픽 2018. 3. 19. 15:48

 

이영하 성추행미투 폭로한 피해자 A씨 인터뷰, 80년대 미스코리아출신 여배우, 카톡내용

 

우리나라의 중견배우 이영하가 60대 후반 황혼기의 나이에 때아닌 성추행미투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답니다.

 

1980년도 미스코리아 출신의 여배우라고 밝힌 한 여성이 35년전에 이영하에게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를 해서 엄청난 충격을 주고있답니다.

 

18‘tv조선뉴스에서 미스코리아출신 여배우 A씨는 이영하를 성추행가해자라고 폭로하고 나섰답니다.

 

A씨는 ‘tv조선뉴스 인터뷰에서 36년전에 이영하로부터 끔찍한 성폭력을 당했으며, 그 때문에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고서 연기자생활을 접었다고 실토했답니다.

 

A씨는 1980년도에 미스코리아에 당선되었던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곧바로 연기자로 전향해서 드라마등에서 연기활동을 했던 여배우랍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A씨는 미스코리아출신 여배우 김씨라고 알려지고 있으며,

연기생활을 그만 둔후에 유학생과 결혼해서 딸까지 있는 50대 중반의 유부녀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A씨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의 전말을 이렇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5년전인 1980년대에 김씨는 이영하와 함께 광고촬영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김씨는 이영하와 같은 드라마를 찍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광고촬영을 한 어느날, 이영하가 A씨에게 잠깐 여의도로 올 것을 요구했다고 하며, A씨는 대선배인 이영하의 요구를 거부할 수가 없어서 여의도로 그를 만나러 갔다고 하는데요.

 

이영하가 자신을 오라고 한 것은 여의도 관광호텔의 룸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호텔로비에서 만날 것으로 생각하고 갔던 김씨는 선배인 이영하의 부름에 어쩔 수 없이 그 호텔의 룸으로 들어갔는데요.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이영하가 김씨를 침대에 강제로 눕히고, 옷을 벗기려 하는등 성추행을 했다고 합니다.

 

김씨는 완강히 저항했지만, 이영하의 힘에 압도당했다고 합니다. 김씨는 이영하에게 살려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라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김씨는 너무도 놀라고 충격을 받아서 그 이상의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김씨의 몸은 온통 멍투성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김씨는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간신히 룸에서 도망쳐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36년 전 그 당시에 피해자 김씨는 고작 대학교 1학년생으로 나이가 겨우 19살이었다고 합니다.

 

김씨는 이사건 때문에 연기자생활을 하면서 이영하를 마주칠 때마다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이후 김씨는 이영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주로 단막극이나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했다고 하며, 가요프로그램의 진행자를 맡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성추행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김씨는 몇달 뒤에 이영하와 같은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게 되었고,
더이상 이영하와 마주치기 싫었던 김씨는
결국 드라마에서도 자진하차하였고, 짧은 연기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김씨는 미스코리아출신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연기자로 입성했지만,

김씨의 스타여배우에의 꿈은 이영하의 성추행으로 인해서, 짧은 연기활동 후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후 김씨는 유학생출신의 남편과 결혼을 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고 합니다.

 

항간에서는 피해자 김씨가 1980년대에 이영하의 전부인 선우은숙과 같은 드라마에 함께 출연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김씨는 자신이 36년전에 이영하에게 당했던 그 사건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쉽게 잊지못하고, 오랫동안 가슴속의 회한으로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씨는 딸과 상의를 거쳐 용기를 얻은 후에, 이영하의 성추행을 폭로하고 이영하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자 했다고 합니다.

   

피해자 김씨와 이영하와의 카톡문자 내용

 

김씨는 최근 이영하와 나눈 카톡문자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는데요.

피해자 A씨가 공개한 카카오톡 내용에서, A씨는 다음과 같은 카톡을 이영하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제가 오래전에 삼촌께(이영하) 힘들었던 일(여의도 관광호텔일) 기억하시죠?’ ‘어린나이에 누구에도 말못하고 혼자 힘들어했던 일이죠

모든 것들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도망치고 싶었던 그 일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지금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그런 것들을 오픈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네요

직접 통화하고 싶어 전화드렸는데, 바쁘신 것 같아 문자 남겨놓습니다

 

피해자 A씨의 이같은 문제메시지에 대해서, 이영하는 다음과 같이 답장문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벌써 35년이 됐나요?’ ‘사과드립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얼굴보고 식사라도 하면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마음이 혼란해서 기절한 듯 누워있습니다’ ‘직접 만나서 진솔한 사과를 하고싶습니다

 

이영하는 피해자 김씨의 카톡문자를 받고서 곧바로 답장메시지를 보내서, 사과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영하는 피해자 김씨와 직접 만나서 진솔한 사과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는데요.

 

피해자 김씨가 이영하에게 보낸 카톡문자 내용

 

피해자 김씨가 36년도 넘은 일을 이제와서 폭로하는 이유는, 이영하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고 또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용기를 내서 폭로하게 됐다고 합니다.

 

35년전 여의도 관광호텔사건에 대해 이영하가 김씨에게 카톡문자로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을 보니, 이영하가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 피해자 김씨가 ‘TV조선 뉴스인터뷰에서 주장했던 이영하로부터 성추행당했다는 내용에 대해 이영하가 사과의 문자로 응답한 것을 보니, 이 사건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성추행 미투운동이 전방위적으로 계속 폭로되고 있어서 나라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문학계에 처음 터진 미투운동은 연극계, 학계를 넘어서 영화계쪽으로 계속 확대재생산되고 있고, 이제 나이가 60대 후반의 명배우 이영하마저도 성추행사건에 휘말리고 있다는 점이 매우 놀라기만 합니다.

 

현재 이영하는 자신의 성추행의혹 보도가 나온 후에,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고, 자신의 SNS계정을 삭제해놓은 상태이며, 그 어떤 해명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영하는 70~80년대를 주름잡았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남배우랍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나온 이영하는 1977년 영화 으로 연예계에 입문한 후, ‘마지막 겨울’ ‘상처’ ‘타인의 방’ ‘너는 내운명’ ‘욕망의 거리’ ‘우린 제네바로 간다등 수많은 명작들에 출연해서 큰 인기를 누렸던 70, 80년대의 대표적인 인기 미남배우랍니다.

 

피해자 김씨와 이영하의 카톡문자 내용

 

이영하는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20년 동안 총 78편의 영화에 출연했을 정도로, 우리 영화계에 큰획을 그었던 대표적인 명배우로서,

영화 뿐만아니라 드라마출연도 수도 많이 했을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랍니다.

 

이영하, 선우은숙과 결혼과 이혼 사유

 

이영하는 인기절정의 시기인 1981년도에 당시 인기텔런트였던 선우은숙과 결혼을 했고, 두명의 아들을 두고 있는데, 2007년도에 26년 동안 결혼생활을 이어왔던 선우은숙과 돌연 이혼하게 된답니다.

 

이혼이유에 대해 이영하는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각자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이혼을 결심했다고 밝히기도 했답니다.

 

또한 이영하는 이혼으로 우리 두사람관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각각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영하는 선우은숙과의 재결합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있다고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재결합 가능성에 대해서 선우은숙은 이혼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재결합이야기가 나오느냐? 여자가 혼자 사니까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재결합가능성을 일축하고 나섰답니다.

 

한 때 이영하가 선우은숙과 이혼한 이유가 유지인과의 교제 때문이라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이영하는 방송에 나와서 유지인은 대학을 함께 나오고, 대학원까지 함께 다녔던 동문으로서, 그저 막역하게 지내는 친한 친구사이라고 해명했습니다.

 

두사람이 막연한 대학원동기로서, 대학원 회식 때에 함께 있는 것을 본 누군가가 오해를 한 것이라고 해명을 했습니다.

   

이영하는 최근 사랑중 이별이라는 노래를 발표하면서 가수로 데뷔하는 등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혼의 나이에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는 이영하가 때아닌 성추행미투의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어서, 그동안 쌓아왔던 신사 같은 선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될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이영하는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수많은 여성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대표적인 미남 인기배우로서 반듯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는데,

이번 성추행미투사건 폭로로 인해서 그동안 좋은 이미지가 많이 훼손될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답니다.

 

참고로 이영하는 현재 1950년생으로 나이 69세이며, 키는 178cm입니다.

 

이영하 성추행 미투 폭로는 어디까지나 피해자 김씨의 일방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사실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영하의 진심어린 해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영하는 현재 외국에 나가 있다고 하며, tv조선 뉴스담당자가 확인차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영하가 자신에 대한 이러한 성추행의혹에 관해 어떠한 해명을 내놓을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영하의 신곡앨범 사랑중 이별이노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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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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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유지인의 젊은시절 미모와 영화, 전남편 이혼사유

연예인 핫토픽 2018. 3. 18. 22:31

 

유지인의 젊은시절 영화들과 나이, 이혼사유와 이영하와의 스캔들

  

유지인 1956127일생 (나이 63). 중앙대 연극영화과 학사, 석사 , 키 164cm 

 

오늘은 신트로이카여배우의 한사람으로서, 70, 80년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유지인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970년대 유지인은 청순하고 이지적인 미모로 영화와 안방극장에서 사랑 많이 받았던 인기높은 여배우였답니다.

 

70년대 TV가 보급되고나갔던 그시절, 유지인은 드라마 서울야곡에서 매우 청순한 이미지와 인상적인 연기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요.

 

특히 유지인은 지적이면서도 세련된 미모로 70년대를 대표하는 미인 3인방 중 한사람으로 매우 지명도 높은 여배우로 이름을 떨쳤는데요.

 

동양여성 같지 않은 초롱초롱하고 커다란 눈망울과 가늘면서도 오똑한 콧날, 얇고 가지런한 잎술 등 세련되고 이지적인 미모를 가진 유지인은 70년대 당시에는 청순미의 상징과도 같은 대단한 존재감이었답니다.

 

지금은 수많은 화장품들이 즐비하지만, 70년대만 해도 국내에 화장품회사는 3개사 밖에 없었으며,

배우들이 화장품모델에 뽑힌다는 것은 미스코리아 진에 뽑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답니다.

 

70년대 당시 화장품CF모델에 발탁된다는 것은 최고미인으로 공인받는다는 것을 뜻하지요. 그리고 화장품모델에 발탁된 여배우들은 그 미모를 인정받아서 톱스타로 우뚝 솟아오르게 된답니다.

 

이지적이고 세련된 미모를 간직한 유지인은 그녀의 출중한 미모가 인정받아 쥬단학화장품의 전속모델로 스카웃되어 수년동안 화장품모델로 활동하게 된답니다.

 

70년대의 또다른 그녀의 라이벌인 정윤희도 다른 화장품모델에 발탁되어 유지인과 정윤희는 안방극장과 영화에서 미모와 인기를 겨루는 라이벌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답니다.

 

젊었을 적의 유지인은 허리우드의 미인 그레이스 켈리를 매우 닮은 미모로 눈길을 끌었답니다.

유지인은 지적이면서도 세련된 청순미모를 간직했는데, 허리우드의 미녀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도도하면서도 이지적인 미모를 연상케 해준답니다.

 

반면 정윤희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선굵은 미모로 눈길을 끌었답니다. 이지적이고 청순한 미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유지인을 선호했고,

동양적이면서 조각같은 미모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정윤희를 선호했으며,

깔끔하면서 단아한 매력을 가진 장미희를 좋아하는 대중들의 많이 있었답니다.

 

이렇게 70년대에는 유지인과 정윤희, 장미희가 우리나라 드라마와 영화를 3분할하면서, 서로 미모와 인기의 경쟁을 펼치면서 60년대 트로이카에 이어 신트로이카 3인방을 형성하면서, 대표적인 미녀여배우들로서 맹활약해 나갔답니다.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거의 10년 동안 우리나라 여배우로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것은 유지인과 정윤희, 그리고 장미희의 3인방들이었답니다.

 

이들은 70~80년대 우리나라의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들에 출연해서, 우리나라 영화의 전성시대를 이끌어갔던 최고의 인기여배우들이랍니다.

 

이들 미녀 트로이카 3인방 중에서도 유지인이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그녀의 독보적인 매력인 청순한 미모와 지성적인 매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유지인은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연기력도 뛰어나서 70년대 후반부터 인상적인 명품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얼굴만 예쁜 여배우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렸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미인들 가운데, 초창기에 얼굴만 예쁜 여배우라는 꼬리표를 달았던 여배우가 3명 정도 있는데요.

70년대 전반의 유지인과 90년대의 이영애, 그리고 2000년대 김태희가 그런 여배우로 인식되었던 여배우들이었는데요.

 

즉 얼굴은 엄청나게 예쁜데, 연기력이 잘 받쳐주지 않아서 예쁜 얼굴 덕분에 주연배우자리를 쾌찮다는 평가를 받던 여배우들을 의미한답니다.

 

유지인도 70년대 중반 처음 영화에 출연했을 때와 몇편의 영화들에서 얼굴만 예쁜 여배우로 평가받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유지인은 각고의 노력과 풍부한 연기경험을 쌓으면서 혼과 육신을 다해 열정적인 연기력을 펼침으로써, 인상적인 명품연기를 선보이면서 얼굴만 예쁜 여배우라는 딱지를 금방 뗄 수가 있었답니다.

 

1978년 영화 마지막 겨울에서 과거에 죽은 줄 앓았던 남편과 현재의 부잣집 아들 출신의 새남편 사이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매우 인상적이고도 차원 높은 연기를 펼치면서,

유지인은 탁월한 미모 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연가파 여배우로 거듭나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날로 발전하는 연기력을 통해서, 열정적이고도 뛰어난 연기를 펼친 유지인은 79년도에 TBC 동양방송 연기대상에서 최우수 여자연기상을 거머쥐게 되었고, 같은 해에 영화 심봤다로 대종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어냅니다.

 

또한 유지인은 1980년도에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여자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하면서, 70, 80년대를 대표하는 완벽한 연기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또한 유지인의 미모와 인기는 우리나라에서만 머문 게 아니라, 아시아 여러나라에서도 인정받게 되는데요.

영화 가시를 삼킨 장미1980년도의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특별연기상을 타내면서, 유지인의 미모와 연기력은 아시아 여러나라들에서도 인정받게 되었답니다.

 

유지인의 영화활동 경력

 

유지인은 여고 3학년에 다닐 때인 1973년도에 일찌감치 TBC 동양방송의 공채 탤런트 14기로 입사하였답니다.

 

그다음해인 1074년도에 중앙대학교 1학년생이었던 유지인은 그녀의 빼어난 미모가 소문이 나 있던 터라,

방송국관계자의 추천을 받아서 새롭게 제작되는 영화 그대의 찬손의 여주인공 공모에 응모하게 되었답니다.

 

이 영화 그대의 찬손의 여주인공 공개모집에 응모한 유지인은 놀랍게도 2300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답니다.

 

이때 유지인이 응모한 23001의 경쟁률은 우리나라 여배우 응모사상 최고의 경쟁률로 기록되고 있으며, 유지인은 하늘 같이 높은 이 경쟁률에서 당당히 1위를 거머쥐어서 영화 그대의 찬손의 여주인공 자리를 꽤찰 수 있었답니다.

 

유지인이 이처럼 23001의 높은 경쟁률에서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눈에 띄는 세련된 미모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이렇게 데뷔하면서부터 출중한 미모를 과시했던 유지인은 1977년도 TBC 동양방송의 드라마인 서울야곡의 가련한 여주인공으로 출연해서 슬프고도 애절한 연기력을 펼쳐보이면서, 드라마 서울야곡의 인기도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는데요,

 

드라마 서울야곡이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유지인의 인기도 고공행진을 거듭하게 된답니다.

 

이 드라마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게된 유지인은, 같은해의 또다른 드라마 청실홍실의 여주인공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했던 정윤희와 장미희와 함께 70, 80년대를 대표하는 신트로이카구도를 형성하면서,

라운관과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톱스타로 급부상하게 되었답니다.

 

또한 유지인은 영화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갔는데요. 1978년도 영화 마지막겨울에서 이영하와 함께 열연을 펼쳤는데, 마지막겨울이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고,

79년도 그녀가 출연한 영화 내가 버린 남자는 그해에 흥행 1위를 기록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흥행여배우로 우뚝 솟아오르게 된답니다.

 

유지인은 그 외에도 영화 청춘의 덫’ ‘가시를 삼킨 장미’ ‘심봤다’ ‘바람불어 좋은날’ ‘피막등 여러편의 흥행작품에 출연해서 큰 성과를 펼치면서 그야말로 70, 80년대를 대표하는 미녀여배우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답니다.

 

1980년경 유지인은 연예인 소득 1위에 올랐을 정도로,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유지인의 전성시대라고 할만큼 상도 많이 타고 돈도 많이 벌면서, 높은 인기와 명예를 누리던 최고의 리즈시절이었답니다.

 

또한 유지인은 영화 심봤다로 트로이카 여배우들 중 가장 먼저 대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는데, 이때가 유지인 연기력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답니다.

 

물론 유지인의 뒤를 이어 80년도에 정윤희도 대종상을 수상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기도 했고, 장미희는 1983년도에 영화 적도의 꽃으로 대종상을 수상했답니다.

   

유지인의 결혼과 이혼, 이영하와의 관계

 

이렇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녀여배우로서 수많은 드라마와 총 48편의 영화에 출연해서 맹활약을 펼쳤던 유지인은

1986년 내과의사인 전남편 조태봉과 결혼하면서 연예계에서 사실상 은퇴하게 되며, 가정주부에 전념하게 되었답니다.

 

유지인은 86년도에 동갑내기인 31살의 경찰병원 내과의사인 조태봉과 결혼을 하면서 은막을 떠나고 말았는데요.

유지인과 조태봉은 3년전에 용평스키장에서 만나서 은밀하게 교재를 해왔다고 합니다.

 

유지인남편 조태봉은 충남 대전출신으로 한양대학 의대를 나왔던 재원이었고, 조태봉의 아버지는 대전에서 개인병원을 개업하고 있었기에, 조태봉은 대전에서 아주 잘 나가는 명문가문 출신이었답니다.

 

조태봉의 집안은 지역유지이자 명문가문이었기에, 조태봉이 여배우 유지인과 결혼하는 것을 엄청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세상에 자식 이길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결국 조태봉과 유지인은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서 결혼에 골인하게 된답니다.

 

장래가 출중한 내과의사와의 화려한 결혼식을 치른 유지인은 그후 두명의 딸(조희수와 조연수)을 낳아 기르면서, 연기활동을 잠정 중단한 채 대전의 시집에 들어가서, 가정주부생활에만 매진해나갔답니다.

 

유지인의 두 딸 조희수와 조연수는 모두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현재 큰딸 조희수는 미국회사에 취직해서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둘째딸 조연수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는데, 유지인은 딸들에게 연예인을 시킬 생각은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정생활에 충실했던 유지인은 결혼생활 16년만인 2002년도에 갑자기 이혼을 하게 된답니다.

 

의사인 남편과 두명의 사랑스런 딸, 그리고 유복한 가정환경 등 남부럽지 않은 가정생활을 해왔던 유지인이 평생 이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2002년도에 갑자기 이혼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답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매우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해왔던 유지인의 이혼은 대중들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답니다.

유지인 16년간의 결혼생활 중에 거의 방송에 출연하지 않았고,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에만 전념을 해왔는데요.

 

그렇게 모범적으로 주부생활을 해왔던 유지인의 갑작스러운 이혼의 사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답니다.

 

유지인의 이혼사유는 유지인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주변인들을 통해서 유지인과 남편 사이에 성격차이 때문이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유지인은 외모는 조신하고 여성스럽지만 성격은 시원시원하고 호방한 성격이라고 합니다.

 

유지인은 대전에서 시댁에 들어가 살았기 때문에, 자유롭고 호탕한 성격을 지닌 그녀가 시부모를 모시고 함께 살면서, 말못한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답니다.

 

유지인과 남편 사이에 특별히 큰 갈등이나 외도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유지인과 전남편의 이혼에는 두사람의 성격차이와 시댁과의 갈등이 큰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유지인 스스로 방송에 출연해서, ‘이혼으로 불편한 것들을 다 떼어버리니까 아주 속이 편하더라’ ‘아이들이 반듯하게 잘 커서 지금 내마음속엔 행복만이 가득하다고 말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롭고 호방한 성격을 지닌 유지인은 틀에 박힌 결혼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것으로 보이며, 다시 연기생활을 벌여나가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유지인이 이혼에 대해서 전혀 후회나 부정적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유지인은 전남편과 성격차이와 시댁과의 틀에 박힌 관계에서 오는 굴레의 틀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답니다.

 

유지인은 2002년도에 이혼을 하고난 후, MBC 미니시리즈 삼총사로 다시 연예계에 복귀하게 된답니다.

 

그렇게 연예계에 다시 복귀한 유지인은 MBC 주말드라마 회전목마KBS 일일연속극 금쪽같은 내새끼를 비롯해서, ‘분홍립스틱’ ‘역전의 여왕’ ‘청담동 스캔들’, 그리고 2015년도에는 일일드라마 마녀의 성등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해오면서, 다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듯 왕성한 연기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답니다.

 

결혼생활 16년간의 억압되어 펼치지 못했던 연기활동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이, 유지인은 오히려 이혼후에 수많은 드라마들에 출연해서 더욱 활발한 연기활동을 벌여나가고 있답니다.

유지인이 이혼 후부터, 지금까지 무려 22편이나 되는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해왔답니다.

 

유지인은 1956년생으로 현재 나이가 63세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그녀는 젊은시절 못지않은 단아하고 은은한 미모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60이 넘은 나이로 얼굴에는 다소 주름이 끼어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지인은 젊었을 때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답니다.

 

2002년도에 이혼을 한 유지인은 이혼 후 1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재혼을 하지않고 독신으로 지내오고 있답니다.

 

유지인의 최근근황을 보면, 그녀는 2016년도 마지막 드라마 마녀의 성에 출연한 이후 다음차기작에는 아직 출연하지 않고 있지만,

교양음식프로인 알토란에는 계속 고정개스트로 출연하고 있으며, ‘알토란에서 재미있고 유쾌한 입담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16년간의 길고도 긴 결혼생활, 그리고 틀에 박히기를 싫어하는 성격의 유지인은 이혼 후 다시 16년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재혼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유지인은 방송활동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사랑스런 두딸과 함게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는 듯 합니다.

 

유지인과 두 딸

 

어쩌면 유지인은 다시 재혼을 하지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70, 80년대의 톱스타였던 그녀가 맘만 먹었다면, 벌써 여러번 재혼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유지인은 그정도의 미모와 인기를 보유하고 있지요.

 

유지인은 전성시기절에도 스캔들이 전혀 없는 깨끗하고 반듯한 이미지를 갖고있었고, 자기관리를 아주 잘하는 여배우로 소문이 나 있었답니다.

 

엄격한 군인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반듯하고 모범적인 인성을 갖고 있는 유지인이 남자들을 멀리하고 자기관리를 너무 철저하게 하는 바람에, 점점 재혼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보여진답니다.

 

당분간 유지인의 재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유지인과 이영하와의 스캔들이야기가 퍼지나온 적이 있는데요. 이영하가 부인 선우은숙과 2007년도에 결혼생활 26년만에 이혼을 했는데요.

 

그당시 나온 루머가 이영하가 다른 여자와 사귀어서 이혼을 했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유지인이 이영하와 친하게 지냈다는 두사람의 교제설이 나돌기도 했답

니다.

마치 이영하와 유지인 두사람이 교제하는 바람에, 이영하와 선우은숙이 이혼하게 된 것처럼 잘못된 루머가 퍼지기도 했는데요.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유지인과 이영하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는 목격담 때문에 이같은 소문이 퍼져나갔던 것인데요.

 

사실 유지인과 이영하는 동문이라고 합니다. 두사람은 같은대학인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나왔으며 대학원도 함께 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지인과 이영하는 젊었을 때에 둘다 톱스타였기 때문에, ‘마지막겨울등 여러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해왔기 때문에, 친구같이 막연한 사이였다고 해요.

 

이영하와 유지인은 2000년대 이후에 중앙대학교 대학원을 함께 다녔고, 와인스쿨도 함께 다녔던 동문이자 친한 클라스메이트였기 때문에, 학교식당에서도 밥도 같이 먹고,

같은 동문들끼리 모여서 회식도 같이 하는 바람에, 두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여러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같은대학원 동문출신인 두사람이 함께 강의를 듣고 친하게 지내는 바람에 남들이 두사람의 관계를 오해한 듯하다고 이영하가 해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영하와 유지인은 그냥 동문으로서 막연한 친구사이에 불과할 뿐이지, 그런 관계는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이영하는 아는 지인으로부터 이영하와 유지인 두사람이 팔짱을 끼고다닌다는 말을 들었다는 전언을 들었다고 하는데요.

 

같은 대학원동문으로서 막연하게 지내왔던 털털한 성격의 이영하와 호방한 성격의 유지인이 학교주변에서 회식을 하면서, 같이 있었던 것을 남들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을 것으로 보인답니다.

 

대학원동문 회식자리에서 두사람 외에도 여러명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는데, 항상 유명연예인들은 남들의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에, 아마도 두사람이 교제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왔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두사람의 스캔들 루머가 나돌았기 때문에, 요즘 이영하는 막연한 친구로 지내왔던 유지인과는 전혀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도안되는 스캔들에 매우 놀란 보수적인 성격의 유지인이 친구 이영하와의 만남을 완전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70, 80년대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녀여배우로서, 한시대를 풍미했던 유지인이 지금 독신으로 지내면서 그녀만의 고고한 품위와 아름다움을 잃지않고 방송에서도 활치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유지인이 드라마에서 좋은 배역을 맡아서 그녀의 완숙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해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자신의 품위와 고고한 미모를 잃지않는 유지인은 7080세대의 영원한 마음속의 연인으로 남아있습니다.

 

유지인이 20살 때인 이 시기에 노래를 직접 부르는 아주 보기 드문 장면인데요. 유지인이 왜 70, 8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미인인지는 아래 동영상을 보신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실 줄 믿습니다.

 

 

1975년도에 유지인의 노래하는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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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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