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탈북미녀 배우 김아라의 미모와 탈북스토리

연예인 핫토픽 2018. 2. 6. 15:36

이만갑탈북미녀 김아라의 탈북과정 이야기, 키와 나이

 

 

 

2012년부터 방송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고정 출연하면서 아름다운 청순미모를 뽐내고 있는 탈북미녀 김아라가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방송 이만갑에는 한송이, 신아라 등 많은 탈북미녀들이 출연하고 있지만, 특히 탈북여성 중에서 가장 탁월한 미모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탈북녀는 바로 김아라입니다.

 

김아라는 초기 이만갑에 출연할 때부터 티아라의 지연과 닮은 미녀라고 인식되면서, 눈에 띄는 미모로 많은 사람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아왔답니다.

 

김아라의 프로필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보도록 하죠!

김아라는 함격북도 회령출신이며, 2003년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입국했고, 2009년 중국을 탈출해 어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왔답니다.

 

그리고 김아라는 1991년생으로 현재 나이가 28세이며, 키는 162cm이고 국민대학교에 재학 중이며, 방송활동과 연기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므로 그녀의 직업은 배우랍니다.

 

 

김아라는 과거에 한국 여배우 고아라를 너무도 좋아해서, 자신의 이름에 아라를 붙여서 김아라란 예명을 만들어서 이만갑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임시적으로 만든 그녀의 예명이 계속 진짜이름처럼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2009년도에 한국에 입국해서 명지전문대 뷰티아트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국민대학교 연극과에 재학 중인 김아라는 한국에서 유명한 배우가 되겠다는 당찬 포부를 갖고, 여러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는 등 왕성한 연기활동을 벌이고 있답니다.

 

김아라는 2015년도에 웹드라마 아는 사람에 출연해서 탈북여성 김연희역을 맡아 아주 실감나게 연기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답니다.

 

또한 김아라는 2016년도에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에서 한류부문 MCN상을 수상하면서 전도유망한 방송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김아라는 방송 이만갑출연 외에도 최근 MBC드라마 위대한 유혹자에 출연해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고 있으며,

2018년도 7월 개봉 예정인 원더풀 고스트에도 출연하는 등 영화쪽에도 진출해서 본격적인 연기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북한 탈북녀 출신으로 이렇게 드라마와 영화, 예능프로그램 등 다방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상까지 받은 탈북녀는 아마도 김아라가 최초가 아닐까 하는데,

앞으로 김아라는 탈북출신으로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는 여배우가 될 것으로 예상이 되고 있답니다.

 

김아라는 크고 맑은 두눈과 뚜렷한 이목구비에 시원시원한 마스크와 청순미모를 지니고 있어서, 연기력만 가다듬는다면 앞으로 유망한 연기자로 크게 성공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방송 이만갑에 출연해서 상큼발랄한 미소와 함께 청순 미모를 한껏 뽐내면서 이만갑의 마스코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탁북미녀 김아라의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 북한에서의 이야기와 탈북 이야기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마치 티아라의 박지연이나 김태희를 연상시킬 정도의 청순한 미모를 짙게 풍기고 있는 탈북녀 김아라가 북한에 있을 때에는 하수구에 떨어져 있는 음식까지 주워먹을 정도로 많이 굶주렸다고 실토를 해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답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과거에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하며, 심지어 산속에서 움막집을 짓고 혼자서 살기까지 했다고 고백을 했는데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랍니다.

 

 

탈북미녀 김이라가 탈북하기 전 북한에서 살고있을 때에, 생사를 넘나들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김아라는 북한에서 어린 나이에 목숨을 걸고서 중국으로 탈출을 감행했고, 중국에서 또다시 한국으로 탈출했고, 한국에 온 김아라는 모진 고생 끝에 한국 여배우의 길을 걸으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김아라는 북한에서 학대받고 핍박받던 삶을 살다가 천신만고 끝에 한국으로 건너와서 인생역전에 성공한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랍니다.

그녀가 과거 북한에서 겪었던 고난의 삶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슬프고 참혹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김아라의 북한에서의 삶은 수도없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서,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었던 위태로운 삶의 연속이었답니다.

 

그만큼 북한에 있을 때의 김아라의 생활은 처참했고,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고 합니다.

 

저렇게 청순하고 예쁜 미녀가 어떻게 저런 가시밭길을 걸어왔는지 실감이 나지는 않지만, 김아라의 북한에서의 참혹한 삶은 모두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김아라의 북한에서의 삶과 탈북이야기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어요!

 

 

탈북 배우 김아라의 탈북스토리

 

김아라는 북한에 살 때에, 어머니는 중국으로 건너갔고 아버지가 실종된 상태에서, 계모로부터 숱한 구박과 천대를 받으면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아라가 처음부터 이런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요. 원래 김아라는 함경북도 회령출신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았었다고 합니다.

 

김아라가 아주 어렸을 때에, 아버지는 탄광에서 근로자로 일하고 있었고, 30평대의 주택에 살 정도로 가정형편도 넉넉하고 여유로왔다고 합니다.

이때는 부모님과 함께 오붓하고 살던 시기라 김아라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답니다.

 

그런데 이런 안락한 삶이 9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고난의 행군이 닥쳐오고, 북한경제가 파탄나면서 김아라의 아버지는 졸지에 직장을 잃어버렸다고 하며, 아버지의 실직으로 김아라 가정의 경제형편이 매우 나빠지게 되었답니다.

 

점점 가계의 금고가 바닥이 나버리자, 김아라의 부모는 살던 집을 팔아버리고 그 집판 돈으로 먹고살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아라의 30평 크기의 주택이 고작 옥수수 10kg의 돈밖에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아라는 집을 팔고서 벌레와 쥐들이 들끓는 아주 초라한 판자집으로 이사를 했고, 그 집에서도 남은 돈을 다 쓰고 난 뒤에 먹고살 수단을 마련하지 못하고,

가정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주 다투게 되었고, 가정불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결국 어머니는 돈을 벌기위해서 중국으로 떠나버렸고, 김아라와 어린 여동생, 그리고 아버지 세사람이 함께 살게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아버지는 산에서 산나물을 캐어와 그것을 식량으로 삼았는데, 김아라는 와버지와 함께 그 산나물을 깨끗이 씻어서 장마당에 내다팔면서 김아라 식구들은 간신히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김아라의 아버지는 국가로부터 몇고랑의 땅을 분배받을 수 있었고, 그 분배받은 땅을 가꾸고 농작물을 재배해서, 어느정도 생계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이때에 김아라의 나이는 고작 8살에 불과했는데, 어머니가 떠나버린 후라서, 8살의 김아라가 어린 여동생을 직접 돌보아주었다고 하며, 집에서 밥을 짓는 등 김아라가 어머니역할을 대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국으로 건너간 김아라 어머니가 영영 돌아오지 않자, 홀아비가 된 아버지는 그만 다른 여자와 재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재혼한 이 계모 때문에 김아라의 가정은 완전히 파탄이 나고 김아라에게 크나큰 불행이 찾아오고 말았답니다.

 

세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 계모는 아버지 몰래 김아라를 심하게 구박하고 학대를 가했습니다.

계모는 자신의 친자식들에게만 좋은 음식을 먹이는 등 정성을 다하면서도, 김아라는 아주 노골적으로 따돌렸고 학대를 가했답니다.

 

이렇게 계모가 김아라를 모질게 구박하고 학대를 가하자, 이를 알게된 김아라 아버지가 계모에게 항의를 하면서 아버지와 계모 사이에 심한 부부싸움이 일어났답니다.

 

두사람이 싸운 후에 계모의 오빠들과 사촌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김아라의 아버지에게 집단 폭력을 가했고, 아버지는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계모의 집안사람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던 아버지는 그 후에 완전 행방불명되어 버렸고, 더이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그당시 아버지가 가출한 것인지, 누군한테 살해를 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나이가 어린 김아라는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도 없는 처지였답니다.

 

 

이 당시 김아라의 나이는 세상물정 모르는 고작 10살 밖에 되지 않았던 시기였는데, 김아라는 자신의 아버지가 일주일 지나면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 후 아버지를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아라를 유일하고 돌보아주었던 김아라의 친아버지가 사라지고 나니, 김아라는 완전 고아나 마찬가지의 신세가 되었고, 포악한 계모는 김아라에게 더욱 심한 학대를 가했다고 하며, 심지어 나이 어린 김아라에게 집에서 나갈 것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김아라는 고작 10살의 나이에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쫒겨나고 말았답니다.

 

아버지와 결혼할 때에 세명의 자식을 데리고 빈손으로 집으로 들어왔던 계모는 김아라의 아버지를 사라지게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김아라마저 집에서 쫒아버리고는 집까지 빼앗고 말았답니다.

 

어쩌면 계모가 친정오빠들과 합세해서 김아라의 아버지를 살해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답니다.

 

이렇게 집에서 맨몸으로 쫒겨나왔던 이 당시 김아라의 나이는 고작 10살이었답니다.

 

 

한참 부모에게 응석을 부릴 나이인 10살의 김아라는 이때부터 그 누구의 돌봄을 받지못한 체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김아라는 아버지가 경작을 했던 그 텃밭으로 갔고, 그 텃밭 바로 언덕 위에 조그만한 움막집을 짓고 혼자서 살았다고 합니다.

 

고사리 같은 조그마한 손으로 손수 돌들을 날라왔고, 냇가의 진흙을 퍼와서 돌을 얹고 진흙을 발라서 아주 야트마한 움막집을 만들었고, 그곳에 혼자 살게 되었답니다.

 

그 당시 김아라의 동생은 외삼촌집에 맡겨서 살게 되었는데, 김아라의 외삼촌도 형편이 매우 어려워서 김아라까지 맡아서 키울 형편이 못되었다고 합니다.

 

10살밖에 안된 김아라가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혼자서 이같이 움막집을 지었다고 하니,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한평 밖에 안되는 야트막한 움막집을 짓고 혼자 살게된 김아라는 밤에는 이 움막집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아버지가 경작했던 텃밭에서 야채를 재배해서 간신히 야채와 무를 먹으면서 끼니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언덕위의 움막집에서 밤에 홀로 잘 때에는 가끔 산짐승들이 다가올 때도 있어서, 어린 마음에 두렵고 무서워서 밤잠을 설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답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홀로 살아가던 김아라는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밭고랑에 앉아서 하염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길가를 지나가던 아버지의 옛친구분이 홀로 울고있는 김아라를 발견했고, 김아라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그 친구분이 김아라를 입양해서 자신의 집에서 살게해 주었답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집에서 쫒겨나 생사의 문턱에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던 김아라는 간신히 아버지의 친구분 집에 앙녀로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아버지 친구집에서 양녀로 들어가 살게된 후 또다시 그 친구분의 누이집으로 양녀로 들어가서 살았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김아라는 중국으로부터 뜻밖의 희소식이 전달받게 되었답니다.

 

오래동안 소식이 끊겼던 중국의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오게된 것인데요.

중국의 어머니가 드디어 중국에서 기반을 잡고서 사람을 보내서 김아라에게 연락을 취해온 것입니다.

 

남의 집을 전전하면서 살아갔던 김아라는 드디어 중국에 있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았고, 중국의 어머니에게 가기 위해서 북한을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니다.

 

이때가 김아라 나이가 13살인데, 어머니가 보내준 브로커를 따라서 천신만고 끝에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고, 결국 김아라는 중국에 있는 어머니의 곁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어머니가 김아라를 일찍 찾지못했던 것은 어머니가 중국에서 경제적 기반을 잡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김아라가 집을 자주 옮겨다녀서 찾지못했기 때문이랍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난 김아라는 중국에서 잠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어머니의 보호아래 안전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온지 6년이 지난 후인 2009년도에 김아라는 어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아라가 한국에 온 이 때가 김아라의 나이 19살이었다고 합니다.

 

  '이만갑'에 함께 나오는 신은하(좌편)와 김아라(우편)

 

북한에서 오랜 기간 동안 부모님 없이 살아왔던 김아라는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온 김아라는 중등교육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하는데, 2년만에 중등검정고시를 모두 합격하고 명지전문대를 거쳐 지금은 국민대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학구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아라가 북한에서 어렸을 때부터 온갖 여려운 일을 다 겪고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면서, 천신만고 끝에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입국한 이야기는 정말 슬프고도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답니다.

 

이토록 공주같이 예쁜 김아라가 이정도로 한많고 가슴아픈 어린 시절의 사연이 있을 줄을 전혀 예상도 하지도 못했답니다.

 

이처럼 김아라는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북한에서 매우 고달픈 시절을 보냈는데, 그녀는 하루에 밥 한끼 제대로 먹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그토록 크나큰 시련과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꿋꿋하게 그 난관을 극복해내고, 한국으로 건너와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가는 김아라가 정말로 대견스럽고 장하기만 합니다.

김아라의 탈북스토리는 정말 인간승리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 합니다.

   

김아라는 방송에서 자신이 어렸을 때에 너무 형편이 어려워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발육상태가 나빠서, 피부도 안좋고 키도 작다고 자신을 비하해서 말했는데요.

 

 

김아라의 이런 말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데, 오히려 김아라는 다른 탈북여성들보다 몸매도 좋고 키나 피부에서 전혀 밀리지 않을 뿐만아니라,

방송에 출연하는 탈북여성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탈북여성으로 큰 스포트라이터를 받고 있는 중이랍니다.

 

어린 나이에 이렇게 큰 역경과 시련을 겪었던 김아라이지만, 그녀는 선천적으로 부모의 우수한 혈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빛이 번쩍뻔쩍 빛나는 명품 미모를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답니다.

 

김아라가 북한에서 생과사를 넘나드는 참혹한 삶을 모두 이겨내고, 이제 한국에 들어와서 인기여배우로 성장해나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장하고 보기 좋습니다.

 

탈북미녀 김아라는 최근 방송과 영화에서 매우 활발한 연기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어서, 마치 김아라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랍니다.

 

김아라는 tvN막돼먹은 영애씨시즌16에 김아라 역으로 출연해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고 있으며, MBC드라마 위대한 유혹자에 출연해 중국어 개인교사 역을 맡아서 열연을 펼치고 있는 중이랍니다.

 

또한 김아라는 영화에까지 진출했는데, 금년 7월 개봉예정인 원더풀 고스트에 출연해서 마동석과 함께 열연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생과사의 고비를 여러번 넘기면서 고생을 많이 했던 김아라가 과거의 역경을 모두 극복해내고, 한국에서 제2의 힘찬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녀가 정말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여배우로 성장해나가길 큰 기대감을 갖고 지켜보겠습니다.

 

몇 년전부터 이만갑에 출연하고 있는 김아라는 이만갑의 인기를 올려주는 마스코트같은 존재감으로 급부상했는데, 많은 한국남자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인기 높은 방송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답니다.

 

이제 김아라는 방송 이만갑에서 없어서는 안될 보석같은 존재감으로 이만갑을 가장 빛내주는 미녀스타로 우뚝 솟아올랐답니다.

 

김아라는 한국에서 팔색조 같은 여배우로 성공하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말했는데, 그녀가 더욱 자신을 연마하고 발전을 거듭해서 한국사람들의 사랑을 듬뿍받는 톱스타급 여배우로 성공하길 간절히 고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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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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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엔카의 여왕 계은숙 사건과 근황, 노래듣기

연예인 핫토픽 2018. 2. 5. 16:50

80년대 인기가수 계은숙의 근황과 남편 이혼이야기, 노래듣기

 

오늘을 70, 80년대 발라드가수 계은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계은숙은 한마디로 말하면 파란만장한 여가수라고 할 수 있지요.

 

계은숙은 아리따운 미모와 허스키한 목소리로 80년대에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대표적인 발라드가수랍니다.

계은숙은 고음에서 찢어지는 듯한 호소력 있고, 허스키한 매력적인 목소리로 대중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끌었던 추억의 명가수랍니다.

 

계은숙은 1979노래하며 춤추며로 스타덤에 올랐고, 그리고 80년도에 또다시 기다리는 여심의 대히트로 MBC ‘10대 가수가요제신인상을 받으면서, 대중적인 인기가수로 자리매김했답니다.

 

이렇게 80년대 전반에 대표적인 미모의 인기가수로 이름을 날렸던 계은숙은 85년도에 일본으로 진출해 '오사카의 모정'으로 데뷔하게 되었고, 그 후 일본의 인기 엔카가수로 오랫동안 활동했는데,

그녀는 한국가수로서는 일본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가수로 명성을 쌓았답니다.

 

계은숙은 일본에서 톱가수들만이 참가하는 ‘NHK 홍백가합전7년 연속 참가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총리가 그녀의 팬클럽 회장을 맡을 정도로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큰 사랑과 인기를 받으면서, 2000년대까지 왕성한 가수활동을 벌여왔답니다.

 

 

 

이렇게 국내와 일본에서 한 때 엔카의 여왕으로 불리우며 높은 인기와 큰 명성을 떨쳤던 계은숙이 최근 사기혐의로 고소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큰 충격을 주고 있답니다.

 

20175월 계은숙은 지인으로부터 빌린돈 2500만원을 갚지않는다는 이유로 한 지인으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답니다.

 

‘2,500만원이 그렇게 큰 돈도 아닌데, 과거 일본에서 엔카의 여왕으로 불리우면서 왕성한 가수활동을 벌였던 계은숙이 이 적은 돈을 갚지않아서, 고소를 당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기만 하답니다.

 

고소인 A씨는 201410월에 계은숙에게 2달 후에 갚는다는 조건으로 돈 2,500만원을 빌려주었는데,

계은숙이 약속된 날짜에 돈을 갚지않았을 뿐아니라, 언제 갚겠다는 변제약속도 하지 않은 체로 계속 모르쇠로 일관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계은숙의 사기사건은 또 있는데, 그녀는 2016년도에도 카페운영자들로부터 사기혐의로 고소를 당한 바가 있는데, 두명의 카페운영자로부터 동업을 한다는 조건으로 650만원을 건네받았으나,

그 후 계은숙은 동업약속을 이행하지 않아서 이들로부터 사기혐의로 고소를 당한 바가 있습니다.

 

계은숙은 2015년도에도 필로폰 투약혐의와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서, 12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복역까지 했답니다.

 

계은숙은 2012년도부터 3년 동안 자신의 집과 호텔등에서 세차례에 걸쳐서 필로폰을 투약한 사실이 적발됐고,

외제차 리스 주택 임대차와 관련해 두건의 사기혐의까지 인정되어 결국 과거 톱여가수로서는 불명예스럽게 교도소에 수감되어 복역까지 했습니다.

 

과거 한국과 일본에서 엔카의 여왕으로 불리울 정도로 높은 인기를 끌었던 계은숙이 그녀의 명성에 걸맞지않게 최근까지 끝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대중들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주고 있답니다.

 

 

이번에 2,500만원의 사기사건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우려가 앞서게 된답니다.

   

그런데 계은숙은 과거 2007년 일본에서도 각성제를 소지한 사실이 적발되어 징역 1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적이 있으며,

이사건 때문에 계은숙은 일본으로부터 비자연장이 거부당하고, 200826년간의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국내로 귀국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계은숙은 한국에서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않은 채 오랫동안 칩거생활을 해왔는데, 계은숙은 한 때 가요계에 복귀한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같은 불미스러운 사기사건과 마약투여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그녀의 가요복귀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답니다.

   

계은숙의 남편, 결혼과 이혼

 

한편 계은숙의 결혼과 남편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계은숙은 과거 궁금한 이야기에 출연해서 자신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밝히기도 했습니다.

 

 

계은숙은 과거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유학생과 일본공항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고, 그 남자는 사실 과거 계은숙이 살았던 동네의 안면있는 오빠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시 만난 3살 연상의 동네 오빠인 김씨와 1992년도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려서 함께 살게 되었는데, 남편과의 결혼생활 중 여러가지 우환들이 겹치게 되어 불행한 결혼생활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계은숙의 남편은 장남이기 때문에 대를 이어야 하는데, 계은숙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또한 계은숙이 가수활동과 주부생활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바쁜 생활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남편은 일본을 상대로 의류무역업에 종사했는데, 남편의 사업에 어려움이 많았고, 자식을 낳지못하는 등 두사람 간의 갈등이 계속 이어졌고,

결국 두사람은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않도록 하기위해서, 결혼 6년만이 1998년도에 이혼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혼을 한 후 계은숙은 일본에서의 인기가 크게 떨어지게 됩니다.

 

계은숙은 몇 년간의 슬럼프를 겪은 후에, 2006년도에 또다시 재기를 해서, 일본 대도시 투어콘서트를 진행하면서 컴백활동을 활발히 벌여나갔답니다.

 

그런데 2007년도에 계은숙은 자택에서 각성제 소지혐의로 체포되면서, 계은숙의 일본에서의 가수활동을 종지부를 찍게 된답니다.

 

그리고 일본법원은 계은숙에게 각성제 소지혐의로 비자연장을 거부하고, 한국으로의 퇴출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한때 일본을 들었다놨다 할 정도로 엔카의 여왕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계은숙이 졸지에 일본으로부터 추방되는 신세로 전락했는데요.

 

일각에서는 계은숙이 일본에서 추방된 이유가 각성제 복용 이외에도 일본으로의 귀화요구를 거부한 데 따른 괘씸죄가 작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소속사는 일본에서 인기있는 계은숙에게 끊임없이 일본귀화를 요구해왔는데, 계은숙은 끝까지 일본귀화를 거부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지조를 지켰답니다.

 

 

계은숙은 너무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답니다. 한 때 일본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엔카의 여왕으로 화려한 삶을 살아왔던 그녀가 왜 이렇게 형편없이 추락하게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랍니다.

 

일본에서 계은숙의 많은 노래들이 히트를 쳤고 음반도 많이 팔렸기 때문에, 그녀가 많은 재산을 모았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최근 계은숙의 경제사정은 형편없이 안좋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에서 최정상급 엔카가수로 활동했던 계은숙이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게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계은숙은 90년대 인기절정의 시기에 월 평균수입이 1천만 엔(우리돈 1)에 달했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답니다.

 

그런데 계은숙은 안타깝게도 그 당시 도박에 심하게 중독되어 있었다고 하며, 그녀는 자신의 많은 수입액의 대부분을 라스베이거스와 제주도의 도박장에서 도박으로 탕진해버렸고, 도박으로 인한 부채가 한때 4억엔에 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소속사의 갈취와 계은숙의 약물중독도 계은숙의 재산탕진에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답니다.

 

유명한 명언이 하나 있는데요. 돈을 버는 것보다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하는 말이지요.

 

깔끔한 미모와 뛰어난 가창력으로 한 때 일본에서 최고의 엔카가수로 큰 인기를 누렸던 계은숙은 도박중독과 약물중독 등 방탕한 생활 때문에, 어렵게 쌓아온 자신의 명예와 재산을 모두 깎아먹어 버렸답니다.

 

그리고 이제는 고작 2,500만원 빚 때문에, 또다시 사기죄로 법정에 서야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답니다.

 

 

한때 월 1억원씩을 벌던 최고의 엔카가수가 고작 2,500만원의 돈을 갚지못해서 사기죄로 고소를 당했다고 되었다니, 정말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으며, 너무나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제 나이도 50대 후반에 접어든 계은숙이 또다시 연루된 사기사건을 잘 마무리하시고, 앞으로는 더 이상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지 마시고, 편안한 여생을 즐기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럼 계은숙이 다시 재기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계은숙의 과거의 노래 기다리는 여심을 오랜만에 다시 들어보도록 하겠어요!

 

 

계은숙의 노래 기다리는 여심노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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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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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트로이카 미녀여배우 정윤희의 미모와 영화, 최근모습

연예인 핫토픽 2018. 1. 26. 17:34

70년대의 최고 미녀여배우 정윤희의 나이 최근근황, 남편 조규영회장

 

 정윤희 나이 195464일생 65, 160cm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미녀여배우는 누구일까 하고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여배우가 한명 있답니다.

바로 70년대를 미모 하나로 주름잡았던 여배우 정윤희가 아닐까 합니다.

 

여배우 정윤희는 1970, 80년대에 가장 촉망받던 인기여배우로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면서 활발하게 연기활동을 펼쳤던 대표적인 미녀여배우랍니다.

 

정윤희는 커다랗고 초롱초롱한 눈, 조각칼로 빚어놓은 듯한 오똑한 코, 앵두같은 입술 등 우아하고 선굵은 미모로 수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던 70년대의 대표적인 한국미인 여배우입니다.

 

일본에서는 정윤희를 아시아 최고의 미인이라고 엄청난 찬사를 했을 정도로 정윤희의 미모는 국제적으로도 공인받은 바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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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특히 정윤희의 미모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외국여배우로 정윤희를 선정했을 정도였고, 그 덕분에 정윤희는 일본항공 달력의 메인모델로 선정되기도 했답니다.

 

또한 정윤희는 일본의 도쿄가요제의 시상자로 선정되어서 도쿄가요제의 시상식에 서기도 했는데,

이 당시 일본의 각종매스컴에서는 정윤희를 동양최고의 미녀라고 대서특필했을 정도랍니다.

 

이 당시 일본의 한언론은 일본의 여배우 100명을 다 합친다고 해도 정윤희 한사람의 미모를 당해낼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답니다.

 

이 당시 홍콩 최고의 액션스타였던 성룡이 정윤희의 미모에 홀딱 반했고, 그녀를 짝사랑했었다는 비밀스러운 고백을 해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성룡이 70년대에 한국에 자주 와서 무술액션영화를 많이 찍었었는데, 그 당시 성룡이 한국에 자주 와서 영화를 찍었던 이유는 성룡이 한국의 정윤희를 좋아했기 때문이고 하며,

성룡은 정윤희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애정도 생겼기 됐다고 합니다.

 

70년대 후반에 실제로 성룡은 정윤희를 몇 번 만나서 데이트를 했다고 고백을 한적이 있습니다.

 

1970년대에는 유독 우리연예계에 미녀여배우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세명의 여배우들이 우리 영화계를 주름잡고 있었답니다.

 

바로 유지인, 장미희, 그리고 정윤희 등 세명의 여배우들이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영화들에 출연해서 상한가를 치면서, 인기절정을 달리고 있었답니다.

 

그 외에도 김창숙, 서미경, 한혜숙 같은 미녀여배우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면서, 적지않은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70, 80년대에는 유지인, 장미희, 정윤희가 신트로이카로 불리우면서, 가장 뜨거운 인기의 절정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답이랍니다.

 

 

정윤희는 1975년도에 욕망이라는 영화로 우리연예계에 데뷔했는데, 그 후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연기력이 인정받으면서,

청춘극장’ ‘나는 77번 아가씨’ ‘꽃순이를 아시나요’ ‘죽음보다 깊은 잠’ ‘사랑하는 사람아’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아벤고공수군단등 굵직굵직한 명작품에 출연하면서, 대중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끌었답니다.

 

뿐만아니라 정윤희는 드라마에도 출연해 매우 인상깊은 연기를 펼치면서, 시청자들의 큰 환호를 받았는데, 1977년 라이벌인 장미희와 함께 청실홍실에 출연해서 연기경쟁을 펼치면서, 더욱 대중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끌었답니다.

 

당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청실홍실에 출연한 정윤희는 당시 장미희와 한남자를 두고 경쟁하는 연적관계를 형성하면서, 실연을 당한 비련한 여주인공역을 훌륭히 소화해내면서, 단번에 톱스타로 우뚝 솟아오르게 되었답니다.

 

 

당시 정윤희와 장미희가 함께 출연한 드라마 청실홍실70%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는데, ‘청실홍실70% 시청률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영원한 넘사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정윤희는 당시 최고의 미녀들만 뽑힌다는 쥬리아화장품의 광고모델에 발탁되어 그녀의 무공해미모를 과시하기도 했답니다.

당시 그녀의 라이벌인 유지인은 쥬단학화장품광고의 전속모델로 활동했답니다.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는 신트로이카 미녀여배우로 불리웠던 세명의 미녀인 유지인, 장미희, 정윤희가 그 당시에 가장 예쁜 여배우로 손꼽히던 시절이었는데

이 세명의 여배우가 거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인기가 높았는데, 이들 세명의 미인 중에서도 정윤희가 미모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정윤희를 70, 8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미녀여배우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신트로이카는 60년대의 트로이카 미녀여배우들에 빗대어서 붙인 말인데, 60년대의 트로이카 여배우는 문희, 윤정희, 남정임이랍니다.

 

정윤희는 한번도 타내기 힘들다는 대종상여우주연상을 80년과 81년 두 번씩이나 수상했을 정도로 미모 못지않게 연기력도 뛰어났습니다.

 

또한 정윤희는 백상예술대상의 여자 최우수연기상도 두 번이나 수상했을 정도로 70~80년대에는 정윤희의 전성시대로 불리울 정도로 왕성한 연기활동을 펼쳤답니다.

 

이로써 정윤희는 단지 얼굴만 예쁜 여배우라는 꼬리표를 떼고, 미모와 연기력을 모두 갖춘 명실상부한 진정한 연기자로서 공인받았던 겁니다.

 

 

이렇게 정윤희는 은막에서 화려한 스포츠라이터를 받으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1984년도에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미녀여배우의 갑작스러운 은퇴는 바로 조규영과의 결혼 때문이었답니다.

 

이 당시 정윤희는 중앙건설 회장 조규영과의 스캔들이 터져서 큰 화재가 되기도 했답니다.

당시 많은 언론들로부터 당대의 최고의 미녀여배우 정윤희와 중견건설업체의 조규영회장이 부적절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윤희와 조규영회장과의 열애소식은 정윤희를 사랑하는 대중들에게 적지않은 충격을 안겨다주었는데, 조규영은 당시 부인과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기 때문이죠.

 

이 스캔들 때문에 정윤희는 최정상급 여배우라는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고, 이 불륜스캔들 때문에 정윤희는 간통죄로 고소까지 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방송출연금지 처분까지 받게 되면서, 정윤희의 전성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졍윤희와 조규영 두사람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84년 결혼에 성공하게 됩니다.

 

아뭏튼 정윤희는 70, 80년대 최고의 여배우로서의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조규영회장과 결혼에 골인하면서, 연예계에서 완전 은퇴하고 맙니다.

 

 

정윤희는 비록 조규영과의 스캔들로 인해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남편 조규영과 결혼 후에 30년 넘게 금슬 좋은 부부애를 과시하면서 11녀를 키우면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해오고 있답니다.

   

정윤희 남편 조규영회장의 파산과 친아들의 죽음

 

정윤희의 남편 조규영은 그 당시 상당히 잘 나가는 건설회사인 중앙건설의 후계자이자, 최고경영자로 전도유망한 CEO였습니다.

 

조규영회장이 운영하는 중앙건설은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중견건설회사로 전국 곳곳에 중앙하이츠빌라를 건설하면서, 한 때 크게 번성했던 건설회사입니다.

 

중앙건설은 중앙하이츠빌라라는 트랜디한 아파트 건설로 80~90년대에는 크게 번창해나갔고, 결국 사업규모를 크게 확대하면서, 전국 곳곳에 많은 아파트를 건설해나갔습니다.

 

84년 결혼할 당시의 정윤희와 남편 조규영 사진

 

그런데 글로벌 경제위기가 찾아오면서, 너무 과도한 투자와 무리한 사업규모 확장으로 인해 중앙건설은 채산성이 악화되어,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중앙건설은 전국적인 아파트건설 확대로 미분양아파트가 점점 늘어났고, 결국 중앙건설은 커다란 영업손실을 겪게 되었습니다.

 

중앙건설은 막대한 영업손실로 인해서, 여러 금융기관에 엄청난 빛을 지게 되었고, 채무를 이행하지 못한 채, 결국 2014년도에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하고, 법원의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된답니다.

 

중앙건설은 여러 금융기관에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되었고, 급기야 조규영회장과 정윤희가 함께 살고있던 압구정동 아파트(60)가 국민은행으로부터 경매처분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국민은행은 중앙건설의 부채를 회수하기 위해서, 저당잡혀 있던 조규영회장의 압구정동 아파트를 경매로 내놓았던 것입니다.

 

중앙건설의 국민은행에 대한 부채는 20억이라고 하지만, 다른 금융기관들의 부채까지 모두 합치면, 중앙건설의 공식적인 부채는 52억이나 된다고 하는데, 시가 25억원하는 압구정동 아파트를 처분한다 해도, 많은 부채금액이 남아있게 되는 셈입니다.

 

또한 조규영회장의 경기도 일산에 있는 480억대의 땅도 하나은행의 부채를 갚지못해서 압류조치되고 경매처분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아니, 한 때 잘나가던 조규영회장과 70년대 최고의 미녀여배우로 명성을 높였던 정윤희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정윤희의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랍니다. 정윤희는 조규영과 결혼해서 조규영과 전처사이의 자녀 11녀를 슬하에 두고 있었고, 별도로 자신과 조규영 사이에 낳은 친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정윤희가 직접 낳은 그 막내아들이 미국에서 유학생활 중, 친구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갑자기 호흡곤란을 일으키면서 쓰러졌고,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바로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그 정윤희의 막내아들은 정밀부검을 실시한 결과, 약물중독에 의한 사망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정윤희의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 자식이 객지에서 약물중독으로 사망함으로써, 정윤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된답니다.

 

이렇게 정윤희는 말년에 친아들의 급작스러운 사망과 함께, 남편이 운영하는 건설회사의 부도라는 이중고를 함께 겪으며, 엄청난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정윤희는 이러한 악재를 겪으면서도 매우 의연하게 생활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정윤희의 주변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정윤희는 자신에게 닥쳤던 이런 불행들을 모두 의연하게 극복하였고, 현재 시부모님도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가정에 더욱 충실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성당에도 성실하게 다니는 등 천주교신자로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윤희는 병원봉사활동 등 천주교에서 진행하는 봉사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 사이에 정윤희는 얼굴도 마음도 모두 예쁜 자매님으로 불리우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정윤희는 화장도 거의 하지않은 체로 외출하고,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고 하며, 누가 보아도 그저 평범한 아줌마 같은 모습이라고 하는데,

한때 대한민국을 휘청거리게 했을 정도로 대단한 톱스타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매우 소탈한 모습으로 모든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합니다.

 

  정윤희의 최근모습 사진

 

정윤희는 1954년생으로 지금 나이가 65세인데, 그녀의 미모는 여전히 아름답다고 하네요.

 

70, 80년대에 수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한없이 설레이게 했던 최고미녀 여배우 정윤희가 이렇게 평범한 모습으로 살고있다고 하니,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진답니다.

 

그런데 정윤희가 인기절정의 시기인 70년대 후반에 놀랍게도 두 번이나 음반을 발표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77년도에 정윤희는 핫트레코드사에서 제작한 음반에 참여해서 발표한 것으로,

왜 내가 슬퍼지나요목마른 소녀’ ‘그대는 모르리3곡이 수록되어 있답니다.

 

 

이곡들 모두 정윤희가 직접 불렀다고 하는데, 정윤희가 가창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자만, 당시 최고의 미녀여배우로서 상한가를 치고 있던 정윤희가 직접 부른 노래라고 하니, 매우 신선한 느낌이 든답니다.

 

정윤희의 노래 목마른 소녀는 정윤희의 매우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하는 곡인데, 한번 감상해 보도록 하겠어요!

 

   

정윤희의 목마른 소녀노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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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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