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예진은 70년대에 많은 하이틴영화에 출연하면서 젊은남성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대표적인 청춘스타이지요.
임예진은 앳되고 순수한 미모로 70년대 하이틴영화에 출연해 큰 인기를 끌었던 대표적인 하이틴스타입니다.
그녀는 ‘여학생’이라는 학생잡지에 표지모델을 하면서 처음으로 데뷔하게 되었고,
1974년도에 중학생의 신분으로 불교영화 ‘파계’에 전격 출연하였는데, 이 영화에서 여자로서 최초로 삭발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전라 노출연기를 감행해서 큰 화제를 뿌렸던 주인공이랍니다.
70년대에는 고교생을 주인공으로 해서 전면에 내세운 하이틴영화들이 큰 붐을 일으키던 시대였지요.
그러한 붐 한가운데에 임예진이 있었고, 임예진은 여러편의 하이틴영화에 출연해서 큰 인기를 끌면서 최고의 하이틴스타로 우뚝 솟아오르게 된답니다.
1976년도에 ‘진짜 진짜 좋아해’를 비롯해 ‘소녀의 기도’ ‘이런 마음 처음이야’ ‘여고졸업반’ ‘아무도 모를 거야’ 등 소녀 취향 물씬 풍기는 순수하고 맑은 감성의 고교생영화에 임예진이 출연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녀가 출연영화마다 흥행대박 행진을 이어가면서 ‘임예진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답니다.
그 당시 우리영화계는 유신정권의 검열로 침체기에 빠져있었는데, 임예진은 연속으로 하이틴영화에 출연해 흥행돌풍을 일으키면서, 우리영화계의 부흥을 이끌었던 당대의 최고의 하이틴스타였습니다.
그녀가 데뷔한 후 수년동안 임예진은 하늘을 찌를 듯 최고의 하이틴스타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연예인 책받침스타의 원조같은 존재감이었습니다.
1976년에는 그녀는 연예인수입 순위 1위를 기록했을 정도랍니다.
이렇게 70년대 중반에 10대 학생들의 전폭적인 환호와 열광을 받으면서 하이틴스타로 등극했던 임예진은 70년대 후반부터 소녀티를 벗어버리고 성인영화에 출연하는 등 연기변신을 시도하게 됩니다.
대학생이 된 79년도에 임예진은 신성일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땅콩 껍질 속의 연가’에 출연해 성숙한 연기를 펼치면서 이미지변신을 시도했지만,
그녀의 소녀같은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만을 보아왔던 대중과 매스컴으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으면서 좌절하게 되었고, 1980년 이후 심한 슬럼프에 빠지게됩니다.
하이틴영화에서 순수하고 맑은 소녀역할을 많이 맡아서 ‘청순함’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임예진, 그렇지만 이러한 임예진의 소녀감성의 이미지가 나중에 그녀가 성인연기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게 됩니다.
임예진은 1970년대 중반에 앳되고 순수한 소녀같은 미모로 하이틴영화의 아이돌로 큰 각광을 받았고, 이 때만해도 ‘국민여동생’ 같은 깨끗하고 순수한 이미지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습니다.
1978년부터 임예진은 하이틴영화의 한계를 느끼고, 이미지변신을 시도하면서 성인영화에 본격 출연하게되는데요.
임예진은 이대근과 함께 영화 ‘불’에 출연해 파격적인 성인연기를 펼치면서, 소녀로서의 이미지를 완전 벗어버립니다.
또한 임예진은 신성일과 함께 성인영화 ‘땅콩껍질 속의 연가’에 출연해 파격적인 누드촬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답니다.
영화 ‘땅콩껍질 속의 연가’의 임예진
이렇게 임예진이 성인영화에 출연해 파격적인 연기를 펼친 이유는 그녀에게 굳어진 하이틴스타로서의 소녀같은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답니다.
왜냐하면, 임예진은 1977년도까지만 해도 고교생영화의 히로인으로서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 반듯한 이미지의 대명사였기 때문이지요.
임예진은 데뷔 후 3년동안 무려 18편의 고교생영화에 연속 출연해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당시만 해도 그녀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이미지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로 굳어져있던 상태였지요.
그런데, 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그녀가 주도해왔던 하이틴영화가 재탕, 삼탕되며 식상해지면서 점점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고, 이제 성인연기자로의 변신을 꿈꿨던 임예진은 누드촬영 같은 파격연기로 이미지변신을 시도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국민여동생’으로서 반듯하고 깨끗한 이미지만을 바래왔던 대중들은 그녀의 파격변신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고, 그녀에게 대중들로부터 거쎈 질타가 이어졌답니다.
임예진은 이같은 질타로 인해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고, 성인영화는 고작 4편 정도 출연한 후, 활동을 멈추게된답니다.
임예진은 하이틴스타로서는 큰 성공을 거뒀지만, 성인배우로서는 제대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그녀의 성인배우 도전은 사실상 실패하고 만답니다.
이렇게 하이틴스타에서 성인배우로의 변신을 제대로 하지못하면서 공백기를 갖던 시기에, 임예진은 돌연 드라마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TV드라마에 본격적으로 출연하게 된답니다.
그녀는 79년도에 드라마 ‘하얀민들레’를 비롯해 ‘안국동 아씨’ ‘친구야 친구’ ‘겨울해바라기’ ‘사랑과 야망’ 등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70년대의 하이틴스타로서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탈피한 후, 이젠 주연·조연을 가리지않는 전천후연기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임예진은 김수현이 집필한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김수현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김수현사단의 일원이라고 할만큼 수많은 김수현드라마에 출연하는 등 왕성한 연기활동을 펼치게된답니다.
그녀가 출연한 김수현각본의 드라마로는 ‘사랑합시다’를 비롯해 ‘내일’ ‘사랑과 진실’ ‘사랑과 야망’ ‘작별’ ‘무자식 상팔자’ 등 대부분 인기가 높았던 작품들이며, 임예진은 이들 드라마에서 감칠맛 나는 맛깔스럽고 구수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극의 재미를 한층 끌어올렸답니다.
또한 임예진은 200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편의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감칠맛나는 입담을 과시하면서, 프로그램의 재미를 올려주는 감초역할을 톡톡히 하고있답니다.
◆ 임예진의 연애, 결혼과 남편 직업
임예진은 1989년 4월 최창욱과 결혼을 했는데, 그녀의 남편 최창욱은 그녀가 진행자로 출연한 어린이프로그램의 조연출이었고, 두사람은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와 조연출의 인연으로 만나 연인관계로 발전한 사이랍니다.
임예진은 친구들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꿈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녀는 30살 때 최창욱과 결혼해, 슬하에 1명의 딸을 두고 있습니다.
임예진과 남편 최창욱은 나이가 서로 동갑이며, 최창욱은 MBC방송국의 PD로 일하고 있습니다.
임예진남편 최창욱은 원래 학교 영어교사였는데, 직장을 그만 둔 후, 잠시 방황하다가 1986년에 MBC방송국에 입사한 후, PD, 드라마 기획개발센터장, 드라마 1국장등을 역임하는 등 MBC에서 중요한 보직을 맡아 일해온 MBC의 중역이랍니다.
임예진남편 최창욱은 1992년 MBC 베스트셀러극장 ‘거북이의 꿈’을 연출한 후, 수많은 인기드라마를 연출해왔던 MBC의 베테랑 PD입니다.
그는 작년 3월에 MBC 등기이사겸 본부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해오고 있는 중입니다.
최창욱은 MBC 드라마 ‘궁’ ‘환상의 커플’ ‘마의’ 등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한 화제작들을 만들어내기도 한 기회통이라고 합니다.
임예진은 과거 한 방송에서 자신의 연애담을 고백했는데요.
‘이상형과 결혼했더니, 살면 살수록 남편이 더욱 좋아진다’고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과시했답니다.
남편 최창욱은 임예진과 사귈 당시에는 조연출이었는데, 우연히도 임예진과 최창욱이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두사람간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그 프로그램의 연출자가 임예진과 최창욱을 엮어주려고 툭하면, 그녀한테 녹화테이프를 최창욱한테 전해주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임예진은 PD의 부탁으로 최창욱에게 테이프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자주 했었고, 그 때마다 최창욱이 고맙다고 말하면서 임예진에게 차도 사주고, 밥도 사주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임예진과 최창욱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사람이 친해질 무렵, 임예진이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같이 식사나 하실래요’ 라고 데이트를 제안했고, 남편 최창욱이 흔쾌히 응하면서 본격적인 데이트를 했다고 합니다.
임예진은 중학교 때부터 수많은 영화에 출연해 연기활동을 하느라, 학교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지식이 많고 똑똑한 남자를 원했는데, 잘생기고 멋진 남자보다는 똘똘하면서도 평범한 사람이 좋았고, 남편이 딱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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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진은 그녀의 남편 최창욱이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순박한 인상에다 교육자집안에서 자랐다는 점이 맘이 들어 결혼했는데, 살면 살수록 더욱 좋아지는 사람이라고 남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과시했답니다.
사실 임예진남편 최창욱은 고교시절부터 임예진을 무척 좋아했던 임예진의 광팬이었다고 하네요.
최창욱은 임예진을 만나기위해서 방송국에 들어왔다고 할 정도로, 그녀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최창욱이 방송국에 입사하게된 계기가 있는데요. 최창욱은 원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퇴직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때 문득 한 잡지표지모델로 나온 임예진을 보고 그녀를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방송국에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고, 결국 MBC방송국에 입사하는데 성공, PD와 연예인으로 두사람의 만남이 성사되었던 겁니다.
즉, 임예진남편 최창욱은 결혼 전부터 임예진의 열혈팬이었답니다.
이렇게 방송을 통해서 데이트를 하게된 최창욱과 임예진은 1989년 4월 2년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결혼 후 임예진은 딸 한명을 낳았답니다.
남편 최창욱은 임예진을 끔찍하고 사랑하는 아내바보로 유명하답니다.
임예진이 명절날 시댁에서 일을 하고있을 때, 남편 최창욱은 갑자기 주방에 들어와 ‘여기서 뭐하고 있어? 우리 집사람은 이런 거 할 줄 몰라요’라고 말하면서 임예진을 끌고 나올 정도로 아내를 아껴주고 끔찍이 사랑해준다고 합니다.
임예진은 남편 최창욱에 대해 ‘내일을 잘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남편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임예진은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이랑 결혼했고, 마음도 너무 잘 통하고, 이제까지 함께 살면서 단 한번도 실망을 주지않은 사람이다’고 말하면서 남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과시했답니다.
항간에는 임예진이 남편과 이혼했다는 루머가 나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임예진은 남편 최창욱과 결혼 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금슬좋게 잘살고 있답니다.
그런데, 임예진이 한 방송에 출연해 남편과 20년 동안 각방을 쓰고있다고 고백해서 놀라움을 주고있는데요.
방송 ‘동치미’에서 임예진은 ‘나이가 들수록 부부는 각방을 써야한다’면서 ‘저희는 20년 동안 각방을 썼다’고 말했답니다.
임예진은 ‘저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데, 남편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또 저는 불을 환하게 켠다’고 말했는데요.
자신과 남편의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서 서로 각방을 쓰는 게 서로 편리했고, 이런 편리함 때문에 20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각방을 쓰게 됐다고 합니다.
방송에서 그녀는 ‘방송을 끝내고 새벽에 들어와서 막 잠든 시간인데, 남편이 자신의 1인용침대에 비집고 들어오려고 한다. 조만간 문을 잠그고 자려고한다’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임예진의 남편은 상당한 원칙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절대로 남에게 빚을 지면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임예진·최창욱 부부는 결혼한 지 30년만에 처음으로 집을 장만했다고 합니다. 임예진은 2년전에야 비로서 자기집을 장만했다고 하는데요.
정말 놀랍게도 70년대 최고의 하이틴스타였던 임예진이 결혼한 지 30년동안 내집없이 전세를 전전했다고 합니다.
절대로 빚을 내어 집을 사면 안되는다는 남편의 고지식한 원칙 때문에, 집을 사고싶어도 집을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임예진은 2년 전에 남편 몰래 은행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고야말았답니다.
인기높은 유명한 하이틴스타 출신 연예인 임예진이 30년만에야 비로소 자기집을 구입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은 큰 놀라움을 금치못하고 있는데요.
임예진의 남편은 그야말로 청렴결백한 삶을 살아온 청백리의 표상같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이런 청렴결백한 삶을 잘 이해해주고 존중해주면서 함께 원앙같은 부부의 삶을 살아온 임예진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임예진은 결혼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과 알콩달콩한 애정을 주고받으면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임예진딸은 미국에서 유학을 했는데, 공부 잘 하기로 소문난 모범생이라고 합니다.
현재 임예진은 방송3사의 여러 드라마에서 어머니역 같은 조연으로 출연해, 감칠맛나는 감초연기로 인기를 끌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임예진이 자신을 끔찍이 사랑해주는 남편과 행복하고 평온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어서 정말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도 임예진이 여러 방송과 드라마에 출연해 맛깔스러운 좋은 연기하는 모습 계속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런데 김두한은 1934년도 불과 17살의 나이에 자신보다 10살이나 더 많은 구마적 고희경에 도전장을 던졌고, 군말없이 그를 실신KO시켰다.
이 당시 김두한은 종로 뒷골목에서 군소 주먹집단의 오야붕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구마적과 신마적은 보다 큰 주먹조직을 운영하는 서열이 훨씬 높은 큰오야붕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당시 구마적은 우미관극장의 기도부장을 역임하면서, 어린 동생이나 뒷골목의 건달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패는 등 악명이 매우 높았고, 이런 포악한 구마적의 횡포에 반기를 든 김두한이 날을 잡아 구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주먹계의 서열을 뛰어넘는 김두한의 대담한 도전은 종로통의 최고주먹으로 올라서겠다는 김두한의 야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고,
종로뒷골목의 많은 건달들에게 자신의 뛰어난 싸움실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속셈도 함께 갖고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김두한은 종로뒷골목에 있는 구마적의 사무실로 가서 ‘고형님, 저와 잠깐 얘기좀 합시다!’라고 말했고, 구마적은 ‘야, 네까짓 게 뭔데 나한테 할 말이 있다는 거야?’라고 응대를 했다.
김두한은 구마적에게 ‘오야붕 정도라면, 주먹은 강한 자에게 써야지, 왜 형님은 저항할 수 없는 힘없고 약한 동생들을 두들겨 팹니까?’ ‘제가 오늘 형님 손 좀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구마적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국, 종로뒷골목의 우미관극장 앞에서 김두한 대 구마적의 맞대결이 벌여졌다.
구마적은 자동차 앞부분을 잡고 번쩍 들어올릴 정도의 괴력을 가진 엄청난 장사였고, 덩치는 남산만 하게 컸고, 주먹은 솥뚜껑만하게 컸다.
90kg의 구마적과 68kg의 김두한의 싸움은 외관상으로는 상대가 되지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구마적의 완전한 KO승으로 끝날 것으로 기대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구마적이 김두한을 향해 오른주먹을 날렸다.
이 때 김두한은 순간적으로 공중으로 몸을 날려서 구마적의 가슴을 오른발로 걷어찼다.
구마적의 공격보다 김두한의 발차기공격이 한템포 더 빨랐기 때문에, 김두한의 발차기에 가슴을 얻어맞은 구마적은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렇지만, 주먹 못지않게 맷집도 상당히 쎘던 구마적은 잠시동안 쉬고난 뒤, 씩씩거리면서 다시 일어나서 다시 김두한에게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김두한은 또다시 공중으로 뛰어올랐고, 몸전체의 체중은 실은 이단옆차기로 구마적의 턱을 정확히 강타했다.
김두한이 두발로 구마적의 얼굴을 ‘탁’하고 차자, 구마적은 ‘억~’하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김두한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두 번의 발차기공격에 천하의 구마적은 단 한번의 공격도 못한 채, 그대로 실신 KO당하고 말았다.
약관 17살의 김두한이 종로뒷골목에서 최고의 오야붕으로 떵떵 거리던 구마적을 간단하게 발차기 두 번의 공격으로 KO시켰으니, 엄청난 이변이 벌어진 것이다.
씨름장사로 그리고 괴력의 소유자로 우미관극장의 기도부장 자리에 올랐고, 종로뒷골목의 건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면서 최고의 오야붕으로 군림해왔던 천하의 구마적이 약관 17세의 김두한에게 보기좋게 KO패당하면서, 종로의 1인자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종로의 최고의 주먹으로 등극하길 원했던 김두한의 소원이 곧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김두한이 진정으로 종로의 최고주먹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은 또다른 마적, 신마적을 반드시 꺾어야만 했다.
김두한은 구마적을 꺾은 후부터, 자신의 뛰어난 주먹실력을 바탕으로 많은 부하들을 포섭해서 자신의 주먹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936년도에 김두한은 구마적과 함께 종로통의 양대오야붕이었던 신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김두한이 신마적에게 도전하게된 직접적인 계기는 신마적이 김두한의 두 부하들을 때렸기 때문이다.
두명의 김두한 부하들이 종로뒷골목에서 신마적에게 인사를 안했다는 이유로 신마적에게 두들겨맞고 돌아오자, 김두한은 신마적에게 도전할만한 좋은 명분이 생겼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신마적은 당시 종로통에서 구마적과 팔씨름을 겨뤄 유일하게 지지않았던 엄청난 완력의 소유자이다.
신마적은 종로 YMCA의 운동부로 들어가 내노라하는 운동부학생들과 겨뤄서 모두 쓰러뜨리고, 운동부 학생패의 우두머리가 된 인물이다.
신마적은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를 나온 인텔리로 일본유학까지 갔다가, 일본인의 차별을 받고 일본학생들을 두들겨팬 경력 때문에, 한국으로 되돌아왔던 인물이다.
신마적은 고학력을 갖고있었지만, 일제치하에 일본인들의 차별정책으로 사회진출을 하지못한 채, YMCA에 들어가 운동부에 터를 닦고 생활할 수밖에 없었는데,
YMCA운동부에서 우두머리노릇을 하던 전 만주웰터급챔피언출신 권투선수 해학기와 맞승부를 벌여, 그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YMCA 학생패의 두목으로 올라섰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신마적은 180cm의 큰 키에 힘이 대단한 장사인데다, 유도실력이 매우 출중했고 주먹도 무척 강했으며, YMCA에서 운동깨나 하는 학생건달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YMCA 학생패의 우두머리로 올라섰을 정도로 싸움실력도 뛰어난 인텔리주먹이었다.
신마적은 종로 뒷골목의 맥주집에서 우연히 만난 구마적과 시비가 붙어 팔씨름으로 승부를 겨뤄 유일하게 구마적과 무승부를 기록했던 경력을 갖고있는데,
그 때문에 구마적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게 되고 그로부터 ‘마적’의 칭호를 부여받고, 종로통의 새로운 마적 ‘신마적’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때부터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던 신마적 엄동욱은 구마적과 함께 종로통에서 ‘양대 최고의 오야붕’으로 행세를 하면서 종로뒷골목의 주먹세계를 군림해나갔다.
그런데, 십대의 김두한이 구마적을 꺾고 종로의 새로운 왕좌로 올라섰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36년도에 드디어 김두한은 신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김두한은 앤젤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신마적에게 다가가 ‘형님, 형님이 제 두 동생들을 때리셨다지요, 아니, 힘없고 불쌍한 동생들을 왜 팹니까? 오늘을 제가 형님을 좀 때려야겠습니다, 자 밖으로 나가시죠!’라고 말하면서 앤젤맥주집 밖에서 나온 후, 김두한과 신마적간의 일대일 맞대결이 벌어졌다.
김두한은 15세 때 종로3가에 있는 한 당수도장의 옥상에다 샌드백을 설치해놓고, 2년동안 정권때리기와 발차기공격을 훈련했다.
이렇게 당수를 배우면서 특별훈련을 거듭한 김두한은 어느새 발차기의 명수가 되었고, 실제싸움에서는 주먹보다도 발차기를 더 많이 활용했다.
김두한의 발치기는 정말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나게 빠르고, 위력적이었고, 그가 주먹계의 왕좌를 차지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완될 비밀병기로 작용했다.
1936년 11월경, 발차기의 명수 김두한과 유도의 달인 신마적간의 종로의 최고오야붕 자리를 놓고 피를 말리는 맞대결이 벌어졌다.
신마적이 자신의 유도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김두한을 붙잡으려고 먼저 손을 뻗어왔다.
이때 만일 김두한이 신마적에게 붙잡히기라고 한다면, 신마적이 유도기술을 써서 그를 공중으로 집어던질 것이고, 그러면 김두한은 공중에서 떨어지는 충격으로 허리가 부러져서 반병신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김두한이 신마적과 싸워 이기려면 그에게 붙잡히지 않고, 아웃파이팅을 펼쳐서 최단시간내에 싸움을 끝내야 한다.
김두한은 신마적이 뻗친 손을 피하면서 잽싸게 몇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다음, 김두한은 재빨리 공중으로 뛰어올랐고, 공중으로 뛰어오른 김두한은 양발차기로 신마적의 가슴을 정통으로 걷어찼다.
김두한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양발차기를 맞은 신마적으로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렇지만, 싸움으로 반평생을 살아온 뚝심의 신마적이 아닌가! 신마적은 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곧바로 일어나서 다시 싸울 포즈를 취했다.
그러자, 김두한이 쏜살같이 몸을 날려 오른발로 신마적의 턱을 정통으로 걷어찼다.
김두한의 오른발강타를 턱에 얻어맞은 신마적은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신마적의 복부에 김두한의 세번째 발차기공격이 가해졌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신마적은 배를 부여잡고 ‘윽’하는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당시 김두한은 나이가 약관 19살이었고, 신마적은 26살이었다.
천하에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정도로 싸움짱이었던 신마적이 자신보다 7살이나 어린 김두한에게 주먹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처참한 KO패를 당했다.
그것도 수많은 종로상인들과 부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신마적은 어린 김두한에게 주먹 한번 써보지못하고, 처참하게 패하는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1936년 11월경 김두한은 19살의 나이에 종로통의 최고의 오야붕이었던 구마적과 신마적을 모두 쓰러뜨리고, 종로의 새로운 일인자로 우뚝 솟아올랐다.
구마적과 신마적을 쓰러뜨린 뒤에도, 김두한은 종로의 또다른 강자인 재비, 뭉치, 김후옥 같은 주먹들과 겨뤄서 모두 쓰러뜨린 후, 명실공히 종로 최고의 주먹으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이렇게 종로를 석권한 김두한은 자신의 나와바리를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 광화문과 서대문, 마포와 영등포, 왕십리 등 서울의 전지역의 주먹조직들을 차례로 정복해나갔고,
얼마되지 않아 김두한은 서울의 모든 지역을 장악하면서, 명실공히 경성(서울) 전체를 아우르는 경성 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섰다.
한편, 김두한에게 처절하게 패한 신마적은 턱와 갈비뼈 4대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3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1937년 2월, 3개월간 입원치료 끝에 퇴원한 신마적은 김두한에게 패했다는 절망감과 수치심을 견디지못하고, 7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군말없이 서울을 떠나서 만주로 이주해갔다.
만주로 이주해간 신마적일행은 만주 봉천의 유조구거리에서 새로운 아지트를 마련하고, 그곳에 정착한 조선인주먹들을 모아서 새로운 주먹조직을 만드는데 성공하고, 또다시 만주에서 제2의 주먹세계를 펼쳐나갔다.
그런데, 김두한은 경성 최고의 주먹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김두한은 야망이 무척 큰 사람이다. 그는 서울의 주먹황제로만 만족하지 않았고, 한반도전체의 주먹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엄청난 야심을 갖고 있었다.
김두한은 곧바로 부하들을 시켜서 수원과 인천, 대전과 대구, 광주와 목포, 그리고 부산의 주먹계까지 차례로 정복해나갔고,
뿐만아니라 북쪽에 있는 개성과 평양까지 정복해나가는 등 한반도 대부분의 주먹계를 장악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나이 23살이 되던 1940년도에 김두한은 한반도의 거의 모든 지역의 주먹계를
평정하면서, 그는 한반도전체를 아우르는 최고의 주먹의 자리까지 올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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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김두한이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딱 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신의주였다.
한반도전체를 아우르는 오야붕이 되기를 바랬던 김두한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그리고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모든 지역들의 주먹계를 평정했지만, 오직 신의주 한곳만은 평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두한이 한반도 북쪽끝 변방의 신의주를 정복하지 못한 이유는, 그곳에 시라소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 김두한부하들의 신의주 진출과 김두한과 시라소니의 헤게모니싸움
한반도전역의 대부분을 평정한 김두한은 마지막 남은 신의주를 점령하기 위해서 자신의 부하들을 신의주로 진출시켰다.
1940년경 김두한부하들은 신의주의 주먹계를 장악하고 있는 신의주의 오야붕 정팔의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김두한부하들은 정팔에게 김두한이 이끄는 우미관조직에 복속해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김두한측에서 신의주주먹들에게 요구한 조건은 이렇다. 평소에는 신의주 주먹조직이 자율적으로 활동하도록 하되,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우미관에서 내리는 결정에 따르고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신의주 주먹조직이 김두한조직의 하부기관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평양의 이화룡도 이같은 김두한조직의 요구에 동의했다고 한다. 이화룡은 김두한조직과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 그들의 요구에 적당히 동의를 하고, 김두한부하들을 돌려보낸 것이다.
그렇지만, 신의주의 정팔은 김두한조직의 복속요구에 대해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처지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의주의 실질적인 오야붕은 정팔이 아닌 시라소니였기 때문이다.
당시, 시라소니는 만주로 진출해서 만주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였고, 그가 신의주에 없는 관계로 시라소니의 후배벌인 정팔이 그를 대신해서 오야붕노릇을 하고 있었다.
즉, 정팔은 시라소니가 없는 신의주에서 시라소니의 대리인노릇을 하고 있었기때문에, 이러한 중요한 사안에 대해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 없었고, 시라소니의 허락을 받아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팔은 김두한부하들에게 결정을 내릴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요청했고, 다음번에 부하를 보내서 결정사항을 통보해주겠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답변을 듣은 김두한부하들을 일단 정팔의 말을 믿고 경성(서울)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도록 신의주로부터 답장이 돌아오지 않자, 더 이상 참다 못한 김두한은 신의주주먹들을 손봐주기로 결정했다.
김두한은 우미관 주먹조직에서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김병수와 털빠진 개고기를 행동대장으로 삼아 40명의 별동대원들을 특별 선발했고, 그들을 급히 신의주로 파견보냈다.
김두한부하 40명이 신의주로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정팔은 안전한 은신처로 급히 숨어들었고, 김두한부하들은 신의주 번화가와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건달들을 찾아 두들겨패면서 온갖 행패를 다 부리고다녔다.
이같은 소문을 들은 정팔은 급히 만주 봉천에 있는 시라소니에게 특사를 파견했다.
시라소니는 ‘내가 없는 신의주에서 경성의 똘만이들이 감히 활개를 치고 다닌다고!’라고 말하면서 만주에서 곧바로 신의주로 돌아왔다.
신의주로 돌아온 시라소니는 정팔의 사무실의 뒷방에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내 정팔의 사무실로 김두한의 별동대 40명이 들이닥쳤다.
사무실로 들어온 행동대장 김병수는 정팔에게 이젠, 더 이상 머뭇거리지말고 우미관조직에 복종하라고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이어 또다른 행동대장 털빠진 개고기는 ‘만일 우리요구를 거부한다면, 신의주전체를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꺼야!’라고 협박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