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의 출연영화 동영상과 사망이유, 린다 에머리

멋진 영화이야기 2018. 3. 27. 21:59

 

70년대 홍콩 무술액션스타 이소룡의 전기와 영화 정무문, 부인 린다 에머리

 

이소룡 19401127~1973720

 

70년대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엄청난 스피드와 절도있는 무술액션, 폭발적인 발차기기술을 발휘해서 무술영화의 극치를 선보였던 위대한 홍콩의 무술액션스타가 있었으니, 바로 이소룡이다.

 

이소룡은 그 이전까지 전혀 없었던 대단히 기술적인 격투액션과 화려하고 절도있는 무술액션을 선보여주면서,

많은 관객들로부터 가장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70년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무술스타였다.

 

그 전까지는 마치 동네 닭싸움 같았던 액션영화들을 이소룡이 나타남으로써, 테크니컬하고 세련된 무술액션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고,

이소룡은 단순한 권법영화를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위대한 무술스타였다.

 

이소룡이 출연해서 무술액션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그의 영화들은 홍콩과 한국은 물론 아시아전역에서 엄청난 히트를 쳤고,

특히 이소룡의 영화 정무문용쟁호투는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흥행돌풍을 일으키면서, 이소룡은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우뚝 솟아올랐다.

 

2006년 미국 한 영화매체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액션스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는데,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액션스타로 단연 이소룡이 압도적인 표차이로 1위에 뽑혔다고 한다.

 

이소룡은 원래 홍콩배우였고 이소룡이 사망한지 30년이 훨씬 지난 시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수많은 허리우드 액션스타들을 제쳐놓고 수십년 전에 죽은 이소룡을 1위로 뽑았다는 것은

이소룡이 미국인들의 가슴에 얼마나 가슴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그런데 참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신은 뛰어난 천재는 일찍 데려가신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소룡은 1973년도 하늘 높이 올라갈 정도로 인기절정의 시기에 매우 의혹스러운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고야 만다.

 

홍콩스타에서 아시아의 스타로 떠올랐고, 아시아의 스타에서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솟아올랐는데, 그 인기절정의 시기에 안타깝게도 이소룡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전세계의 팬들에게 안타까움과 미련을 남겨놓았다.

 

1971년 이소룡이 홍콩영화계에 데뷔한 후, 그가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올라선는 데에는 4편의 영화들 출연이 있었다.

 

이 오직 네편의 영화로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완벽한 무술실력으로 젠세계인들의 큰사랑을 받았던 홍콩의 무술영웅 이소룡’!

 

오늘은 이소룡의 활동과 그의 사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소룡의 생애와 영화

 

이소룡은 원래 홍콩사람으로 희극배우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적에 여러편의 영화에 아역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소룡은 원체 혈기왕성하고 주관이 강한 성격에다가 싸움실력도 좋아서, 주변에 적들이 많이 있었다.

 

이소룡이 한창 혈기왕성했던 청소년시절에 홍콩의 한 댄스클럽에서 친구들과 춤을 추다가 홍콩깡패들과 시비가 붙었고, 무술로 다져진 체력을 갖고 있었던 이소룡은 시비를 거는 깡패 몇몇과 싸움을 벌여서 그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그런데 이 폭력사건으로 이소룡은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까지 밭기도 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이소룡의 인생에 중대한 전기를 가져다준 사건이 된다.

 

이소룡에게 얻어맞은 깡패들은 바로 홍콩의 거대한 조직폭력단의 일원이었고, 그들이 곧 이소룡에게 보복으로 살해하려한다는 정보가 날아 들어왔다.

 

당시 이소룡은 어렸을 적부터 영춘권의 대가인 엽문으로부터 중국무술 영춘권을 배워서 무술과 싸움에 일가견이 있었고,

홍콩에서 벌어진 학생복싱선수권대회에도 출전해서 영국선수를 KO시킨 적도 있을 정도로 싸움과 격투를 잘하는 편이었다.

 

원래 옛날부터 홍콩에는 깡패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소룡이 아무리 싸움을 곧발 한다고 해도, 혼자서 폭력조직과 싸움을 벌이는 것은 섶을 지고 불길속으로 뛰어드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인지한 이소룡의 아버지는 1968년 홍콩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이소룡을 독립시키려고 미국으로 보내버린다.

 

이것이 이소룡이 미국으로 가게된 이유였다.

19세때 미국으로 건너간 이소룡은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면서, 워싱턴대학에 다니며 철학을 공부하면서, 쿵푸도장을 열어서 운영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같은대학의 클라스메이트인 린다 에머리를 만나 평생 가약을 맺었고, 아들 브랜든 리와 딸 섀넌 리를 낳는다.

 

이소룡은 원래 홍콩에 있을 때, 중국전통무술인 영춘권과 공력권, 홍가권등 여러무술을 배워서 무술에 정통해 있었는데,

중국무술의 치명적인 약점이 발차기라고 판단했는데, 중국무술은 주로 주먹과 손을 위주로 사용하는 권법중심의 무술이었기 때문이다.

 

이소룡은 중국무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 위싱턴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이준구관장을 찾아가서 태권도를 배우면서, 태권도의 발차기기술을 연마해나갔다.

 

그리고 발차기기술이 경지에 이른 후, 이소룡은 쿵푸와 태권도, 권투, 레슬링등이 혼합된 새로운 무술 절권도를 창시했고,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 등 3곳에 절권도장을 열어 운영해나갔다.

 

이렇게 미국에서 자신만의 절권도장을 운영해나가면서 무술인으로 살아가던 이소룡이었지만, 역시 피는 못속인다고 하던가!

원래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도 경극배우였고, 이소룡도 홍콩에 있을 때에 아역배우로 활동하면서 23편의 영화들에 출연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이소룡은 무술가로서만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화려한 무술액션을 영화에 접목하여 멋진 무술액션을 펼치는 무술영화배우를 꿈꾸게 된다.

 

1966년도에 롱비치에서 개최된 가라데 토너먼트대회에 참여해 멋진 절권도 시범경기를 보여주었던 이소룡은 많은 무술가와 영화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버렸다.

 

이 가라데 토너먼트대회에 시범선수로 출전한 이소룡은 수많은 무술인들과 영화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인치 권법가격을 선보여서 큰 환호를 받게 되었다.

 

이소룡의 1인치 가격은 상대방과 딱 1인치 떨어진 거리에서 주먹이나 당수를 가격해서 상대방은 단 한방에 쓰러뜨리는 고난도 기술이었다.

 

이 대회에서 이소룡은 다른 무술인들이 전혀 하지못하는 1인치 가격으로 2m 거구의 남성을 한방에 KO시키는 멋진 시범을 보여주었고,

또한 이소룡은 두터운 송판을 1인치 손날가격으로 단번에 박살내는 멋진 시범도 보여주어서, 참석한 수많은 관객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1967년도에 이소룡은 자신의 멋진 시범을 보고 감탄한 영화관계자 윌리엄 도저의 추천으로, 미국의 TV시리즈물 그린 호넷트에 출연하면서 연기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소룡은 1971년도엔 또다른 TV시리즈물 롱스트리트에 출연하며 연기활동을 이어갔지만,

동양인이라는 차별과 천대 때문에 이소룡은 미국방송에서 좋은 배역을 맡지못했을 뿐아니나, 단역이나 만년 조연의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70년대 이 시기에는 미국에서 중국인이나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엄청 심했던 시기였고, 동양인은 결코 미국방송이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1969년도 미국에서 이소룡이 유일하게 출연한 영화 말로우에서도 이소룡은 주인공 제임스 가너와 싸우다가 허망하게 죽는 짧은 단역을 맡았을 뿐이다.

 

결국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데에 커다란 한계가 있다고 느낀 이소룡은 1971년 무협영화의 본산인 홍콩으로 건너가서 영화사의 문을 두드린다.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들

 

홍콩에는 대표적인 영화사로 쇼브라더스골든하베스트가 있었다.

 

홍콩으로 건너간 이소룡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사인 쇼브라더스사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쇼브라더스의 문은 매우 높았고, 이소룡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를 거절했다.

 

쇼브라더스는 나중에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거듭날 이소룡의 진가를 너무나도 몰라보는 엄청난 실수를 범했다.

 

쇼브라더스사에서 거절당한 이소룡은 당시 자본력이 매우 취약한 신생영화사인 골든하베스트사로 찾아갔고,

골든하베스트사의 레이몬드 초우회장으로부터 스카웃제의를 받고 골든하베스트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영화배우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골든하베스트로 들어간 이소룡은 1971년도에 영화 당산대형의 주인공을 맡아서 멋지고 화려한 발차기기술을 선보이면서, ‘당산대형의 무술영화로서의 완성도를 올려놓았다.

 

수많은 관객들은 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이소룡의 초스피드하고 절도 있고 화려한 무술액션에 완전 매료되어 큰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고, 영화 당산대형은 홍콩에서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또한 1972년도에 이소룡이 두번째로 출연한 영화 정무문은 억울하게 죽은 스승의 원수를 갚는 주인공 진진의 절개높은 의리와 복수를 그린 영화였는데,

 

이소룡의 화려하면서 뛰어난 무술액션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이 영화는 탄탄한 이야기전개와 짜임새 있는 구성, 그리고 이소룡에 신기에 가까운 정도로 절도있고 박진감 넘치는 무술연기로 인해서,

아시아의 수많은 관객들로부터 큰 환호를 받았고, 아시아에서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우게 된다.

 

또한 1972년도에 이소룡이 직접 제작, 시나리오, 감독, 주연 등 14역으로 만들어진 이소룡의 세번째 영화 맹룡과강이 상영되었는데,

미국의 가라데 챔피언출신인 척 노리스와 콜롯세움에서의 다이나믹하고 멋진 최후의 결투씬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큰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면서, 이 영화 역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소룡의 네 번째영화인 용쟁호투1973년도에 골든하베스트사와 미국의 워너브라더스사의 합작으로 만들어졌고,

이 영화에서 이소룡은 무술감독과 주인공을 맡아서, 한층 더 차원 높은 멋지고 환상적인 무술액션을 선보였다.

 

이소룡은 영화 용쟁호투에서 마약밀매와 폭력을 일삼는 홍콩폭력조직단의 아지트로 직접 들어가서,

이 폭력조직단원들과 피비린내 나는 대결을 펼치면서, 핵심지도부를 일망타진하는 멋지고 수준 높은 화려한 무술액션을 펼쳐보여서, 전세계의 관객들을 열광시킬 정도로 이 영화는 전세계적인 엄청난 흥행성공을 이루어 내었다.

 

이 영화 용쟁호투는 그 해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홍콩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신기록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용쟁호투가 벌어들인 수익은 무려 2억 달러(우리돈 2,200억원)에 달하며,

이 영화제작에 들어간 돈은 고작 85만불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영화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를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겠다.

 

즉 영화 용쟁호투는 고작 93천만원의 비용을 들여서 2,200억원을 벌어들인 셈인데,

이 영화는 홍콩역사상 최고의 흥행수익을 올린 영화로 기록되었고, 이소룡의 용쟁호투는 홍콩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소룡은 홍콩으로 건너가서 2년 동안 고작 네편의 영화들에 출연함으로써 대단한 흥행신화를 만들어냈고, 세계적인 무술스타로 우뚝 솟아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들이 엄청난 흥행성공을 이루어냄으로써, 70년대 초반 당시 자본이 매우 열악했던 신생영화사였던 골든하베스트사는 세계적인 대형영화사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소룡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무술스타이자, 무술영웅으로 급부상했던 인기절정의 시기에, 그는 돌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하고 만다.

   

이소룡의 사망원인

   

촬영을 마친 영화 용쟁호투의 영화가 개봉되기 3주전에, 갑작스럽게 이소룡의 사망소식이 전혀져서 홍콩은 물론 전세계인들을 경악시켰다.

 

1973720일 홍콩 구룡반도에 있는 이소룡의 애인 베티 팅페이(정패)의 맨션에서, 이소룡이 원인모를 이유로 갑작스럽게 쓰러져 사망하고 만 것이다.

 

이소룡은 만 32(우리나이 34)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애인 정패의 집에서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고, 전세계의 수많은 팬들에게 큰 슬픔과 아쉬움을 남겨놓았다.

 

이소룡의 사망원인은 그가 죽은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수많은 논쟁과 의혹들을 남겨놓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그렇게 강했던 이소룡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소룡의 석연치않은 죽음에 커다란 음모가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가기도 했다.

 

한창 젊은 만 32세의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소룡의 진짜 사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소룡이 사망했던 시기는 1973720일날 오후 1030분에서 11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에 이소룡은 자신의 마지막 영화이자 다섯번째 영화인 사망유희40분 분량의 격투씬을 촬영해놓은 상태였다.

 

1973720일날 이소룡은 낮에 자신의 애인 정패(베티 팅페이)의 맨션에서 자신의 마지막영화인 사망유희에 대해 레이몬드 초우와 상의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때가 되어 레이몬드 초우는 맨션을 나갔고, 이 맨션에는 이소룡과 애인 정패 단 둘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날 밤 이소룡은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면서 정패에게 진통제를 달라고 요구했고, 정패는 이소룡에게 진통제약을 주었으며, 이소룡은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소룡이 진통제를 먹고 쓰러진 때는 1973720일 밤 1030분경이었고, 놀란 정패가 경찰에 전화해서 앰블런스가 와서 이소룡을 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이송시켰지만, 퀸 엘리자베스 병원에 도착한 이소룡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소룡이 사망한 시기는 1973720일날 밤 1030분부터 병원에 도착한 밤 11시 사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소룡이 죽기 직전에 애인 정패가 준 진통제를 먹었다는 점에서 정패가 이소룡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으며,

정패는 홍콩의 수많은 이소룡팬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이소룡의 죽음 뒤에는 애인 정패의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애인 정패(베티 팅페이)가 이소룡과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

독약을 음료수에 타 먹여서 이소룡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정패(베티 팅페이)

 

당시 정패도 잘나가는 젊은 여배우였는데, 그녀는 이소룡에게 반해서 이소룡과 내연관계로 지내왔지만, 이소룡이 부인과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라는 점 때문에 심적부담감이 컸다고 하며,

한 정패가 새로운 애인이 생겨서 부담스러운 이소룡과의 관계청산을 위해서 그에게 독약을 먹여 죽게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문에 대해 정패는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대중과 매스컴의 심한 비난을 받아야했던 정패는 결국 몇 년 뒤에 산속의 절로 들어가서, 속세와 인연을 끊은 채,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이소룡의 죽음에 관련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됐던 정패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깊은 산속 절에 들어가서 거의 10년 동안 칩거생활을 해왔으며, 그동안 계속 독신으로 살아왔다.

 

  아내 린다 에머리와 이소룡

 

이같은 정패의 독살설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은 그 근거가 매우 미약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당시 맨션에서 이소룡에게 정패가 준 약은 단지 평범한 진통제 였고, 그 진통제는 홍콩에서 흔하게 쓰이는 아스피린의 일종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소룡 사망 당시 이소룡부검을 담당했던 의사도 이소룡이 복용한 약은 진통제 에콰제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바가 있었다.

 

정패는 단지 이소룡의 요구에 따라서 평범한 진통제를 주었을 뿐인데, 대중적으로 너무나도 큰 인기를 끌었던 이소룡이 죽었다는 크나큰 안타까움 때문에, 정패가 희생양이 되어서 대신 많은 욕을 먹어야만 했다.

 

따라서 정패가 준 약이 진통제라는 사실이 부검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정패는 이소룡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소룡이 죽은 이유에 관한 두번째 가설은 쇼브라더스사에서 고용한 살인청부업자에 의한 암살설이다.

 

당시 홍콩에서 가장 큰 영화사는 단연 쇼브라더스사였고, 이 쇼브라더스사가 홍콩과 동남아시아의 영화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을 정도로 가장 잘 나가는 영화사였다.

 

그 유명한 왕우의 외팔이검객이나 리칭의 스잔나영화들도 모두 쇼브라더스사에서 제작해서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들이었다.

 

이렇게 쇼브라더스사는 60년대부터 시작해서 70년도까지 수많은 검객영화들을 만들면서 최고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이소룡이 자신의 라이벌영화사인 골든 하베스트사에 들어가면서, 쇼브라더스사가 크게 위축되는 판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골든 하베스트사가 만든 이소룡의 영화들이 계속해서 흥행돌풍을 일으키면서, 상대적으로 쇼브라더스사의 영화들이 점점 흥행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소룡 때문에, 홍콩과 동남아시아에서 최고의 영화사라는 지위를 상실할 상황에 처하게 되자, 큰 위기감을 느꼈던 쇼브라더스사의 고위층이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서 이소룡을 암살했다는 가설이다.

 

그렇지만 이 가설도 별로 설득력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소룡이 미국에서 홍콩으로 건너가서 제일 먼지 문을 두드린 곳은 바로 쇼브라더스사였기 때문이다.

 

제발로 걸어들어오는 이소룡을 스스로 걷어차 놓고, 나중에 이소룡이 경쟁사로 가서 톱스타가 되니까, 그를 죽였다는 것은 너무 말이 되지 않고,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세번째 가설이 있는데, 이소룡집안에서 이소룡의 할아버지의 묘자리를 다른 곳으로 이장했는데, 그 이장한 곳은 원래 신동이라고 하는 풍수지리의 천재아이가 묻혀있던 묘자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풍수신동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머리가 천재였던 이 아이는 12살의 어린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이 아이는 죽기 전에 자신의 묘자리 주변에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묘자리를 만들지 말 것을 경고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소룡집안에서 이 풍수신동의 묘자리가 최고로 좋은 명당자리였기 때문에, ‘풍수신동의 경고를 무시하고, ‘풍수신동의 묘자리 바로 옆에 이소룡의 할아버지 묘자리를 새로 조성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소룡 할아버지 묘자리를 이전하고 난 후, 이소룡 아버지인 이해천이 잠을 잘 때마다, 꿈속에서 풍수신동이 나타나서

네가 내 경고를 무시하고 내 묘자리터에 너의 아버지 묘자리를 만들었으니,

이제부터 내가 너의 자손들에게 저주를 내리겠다, 앞으로 너의 자손 중에 장자들을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 것이고,

너의 손자는 30세 이전에 죽게될 것이다라고 저주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런 꿈이 너무도 사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던 이해천은 큰 우려를 한 나머지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 아들 이소룡을 미국으로 멀리 이민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풍수신동의 악령의 서려있는 홍콩을 떠나서 멀리 미국으로 떠나갔던 이소룡이었지만, 이소룡은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고야 말았고,

결국 이소룡은 젊은 나이에 석연찮은 이유로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풍수신동의 저주가 들어맞은 꼴이 됐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또다시 일어났다. 이소룡의 맏아들이 바로 브랜든 리이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이소룡으로부터 절권도를 배웠던 브랜든 리는 나중에 장성해서,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진출해 유명한 액션스타로 성공할 수 있었다.

브랜든 리는 1993년도에 영화 크로우촬영할 당시에, 상대방이 쏜 총기오발사고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고, 이 때 그의 나이가 29세였다.

 

크로우에서 상대방이 브랜든 리에게 장난감총을 쏘는 씬이 있었는데, 그 장난감총에 진짜총알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이 브랜든 리의 죽음은 아버지죽음만큼 정말로 미스테리한 죽음이 아닐 수가 없다.

 

풍수신동이 꿈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해천의 손자 브랜든 리가 30세 이전의 나이에 사망하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혼령 풍수신동이 이소룡 아버지 이해천에게 꿈속에서 했던 저주의 말이 그대로 실현되고 만 것이다.

   

이소룡사망에 관한 네번째 가설로, 이소룡은 뇌부종으로 인한 쇼크로 사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소룡이 진통제로 먹은 에콰제가 큰 자극을 일으켜서, 뇌부종이 악화되어 그 충격으로 사망한 것이라고 한다.

 

이소룡시신 부검에 참여했던 로버트 티어즈박사는 부검경력이 10만건에 이를 정도로 부검에 있어서는 베테랑이였다.

 

이소룡이 쓰러진 후, 병원에 실려와서 사망하게 되자, 곧바로 부검을 실시했는데, 그당시 이소룡의 뇌가 퉁퉁 부어있었다고 한다.

 

티어즈박사 등이 이소룡의 뇌를 부검해서 정밀조사를 벌인 결과, 이소룡은 원래 뇌종양을 앓은 흔적이 있었고, 이소룡이 죽기 전에 먹은 진통제속에 들어있던 에콰제성분이 위속에서 나왔다고 한다.

 

전문부검의들이 징밀부검 결과, 이소룡은 평소에 앓고있던 뇌종양이 진통제로 먹었던 에콰제성분 때문에 큰 자극을 받아서, 뇌부종이 발생하였고, 그 뇌부종의 충격으로 뇌출혈을 일으켜서 이소룡은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 이소룡의 사인은 에콰제 때문이라기 보다는, 평소에 앓아왔던 뇌종양이 악회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겠다.

 

이소룡은 외부에는 숨겨왔지만, 평소에 뇌종양을 앓아오고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오랫동안 무술인으로서 살아왔던 이소룡은 수많은 무도가들로부터 도전을 많이 받아왔던 이소룡은 크고 작은 여러건의 싸움에 휘말린 적이 많았다.

 

미국에서 쿵푸도장을 열었을 때에 외국인들에게 쿵푸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쿵푸대가로부터 도전장을 받았고, 이 대결에서 이소룡은 도전자 쿵푸고단자를 3분만에 주먹과 발차기를 써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이것은 이소룡의 부인 린다 에머리가 직접 들려주었던 이야기이다.

 

또한 이소룡은 역시 미국 시애틀에서 절권도장을 운영하고 있을 때에, 근처에 있는 가라데도장의 가라데사범으로부터 도전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 가라데고단자와의 대결에서 이소룡은 단 10초만에 강력한 옆차기 한방으로 그를 KO시키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이소룡 전기문에 나왔던 내용이다.

 

이렇게 이소룡은 단지 영화속에서 무술시늉만 하는 은막스타로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실전무도의 대가였고 실전에서도 숱한 우승경험을 갖고있는 인물이었다.

이처럼 이소룡은 일대일 싸움에서는 모두 다 완벽하게 승리했다.

 

그런데 이렇게 강했던 이소룡도 집단린치를 당했던 적이 있었다. 이소룡이 1972년도 하반기에 영화구상을 하기 위해서,

제임스 코반과 함께 LA공항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몽둥이를 든 깡패패거리들로부터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10여명의 깡패들이 집단으로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무방비상태에 있었던 이소룡과 제임스 코반에게 주먹과 몽둥이찜질을 가했으며,

워낙 무방비상태에서 이뤄진 기습공격이라서 이소룡도 어쩔 수 없이 집단린치를 당하고만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무도가라고 하더라도 10명이 몽둥이를 들고 집단으로 달려드는데 당할 수 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이소룡은 머리에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아마도 이때의 몽둥이찜질의 충격으로 뇌종양이 생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소룡은 홍콩에서 영화촬영을 할 때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촬영을 중단하고 LA에 있는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그 검찰결과 이소룡은 심한 뇌종양으로 6개월 시한부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었다고 한다.

 

이 때가 이소룡이 영화 용쟁호투를 촬영을 시작할 시기였고, 그때로부터 반년 가량이 지난 7월 이소룡은 실제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소룡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죽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소룡의 부인은 이소룡이 머지않아 뇌종양이 악화되어서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이 자신의 부인 린다 에머리를 놔두고도 홍콩여배우 정패와 바람을 피웠는데도, 린다 에머리가 눈감아주었던 것은 그녀는 이소룡이 6개월의 시한부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있었기에, 그가 죽기 전에 원없이 세상을 즐기게 해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여태까지 이소룡의 죽음에 대해 숱한 의혹들이 많이 제기되었지만, 이소룡의 죽음의 진짜이유는 뇌부종발생으로 인한 쇼크사가 정답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이소룡 시신은 이소룡이 원래 살았던 시애틀의 레이크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아들 브랜드 리의 시신도 아버지 이소룡의 묘지옆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이소룡부인 린다 에머리 근황과 재혼

 

그렇다면 이소룡의 부인 린다 에머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린다 에머리 사진

 

이소룡이 사망한 후에, 이소룡부인 린다 에머리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홍콩에서 다시 미국 시애틀로 이주했다.

 

이소룡부인 린다 에머리는 이소룡이 죽은지 15년이 지난 후인 1988년도에 탐 블리커와 재혼해서 함께 살았었는데, 재혼남 탐 블러커와는 고작 2년만에 파경을 맞았다고 한다.

 

린다 에머리가 탐 블러커와 이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린다 에머리가 죽은 남편 이소룡을 잊지못하고, 그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탐 블리커와 이혼한 린다 에머리는 다시 91년도에 부동산업자인 브루스 캐드웰과 재혼을 해서 지금까지 함께 잘 살아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브루스 캐드웰과 재혼한 린다 에머리는 자신이 이름에 이소룡의 성을 함께 넣어서 린다 리 캐드웰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왔을 정도로 이소룡을 오랫동안 잊지못했다고 한다.

 

두 번째로 재혼한 남편 캐드웰은 이소룡을 그리워하는 린다 에머리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아주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진 남편이라고 하며, 두사람이 서로 이해해주고 배려하면서, 지금까지도 금슬좋게 잘 살고있다고 한다.

 

 

현재 린다 에머리는 미국 아이다호주의 보이즈에서 남편 캐드웰과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이소룡이 생전에 전해준 가르침과 그의 무도가정신을 기리고 후대에 전수해주기 위해서, ‘브르스리 재단을 설립해서 운영해오고 있다고 한다.

 

 

이소룡의 영화 정무문의 마지막대결 장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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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

배우 한혜숙의 미모와 근황, 결혼하지 않은 이유, 젊은시절 사진

연예인 핫토픽 2018. 3. 26. 21:37

 

배우 한혜숙의 출연작품과 독신의 삶을 사는 이유, 나이

 

70년대 청순하면서도 세련된 미모로 큰인기를 끌었던 미모의 여배우 한혜숙을 기억하시나요?

 

동양여성 답지않게 큰 키에 세련되고 청순한 미모로 70년대의 수많은 남성들을 설레이게 했던 당대의 미모얼짱인 한혜숙은 연기자로서 70년대를 풍미했던 인기높은 명배우랍니다.

 

70년대 초반 혜성처럼 우리 연예계에 등장했던 한혜숙은 각종 드라마와 CF모델을 휩쓸고 다니면서, 당시 우리 연예계에서 가장 세련되고 예쁜 미모의 여배우로 명성을 떨쳤답니다.

 

60년대를 주름잡았던 인기 트로이카 여배우들이 모두 은퇴하고 난 후, 무주공산이된 우리 연예계에서 혜성처럼 등장했던 한혜숙이 트로이카 여배우의 뒤를 이어서 새로운 세련된 미녀상을 선보이면서,

70년대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여배우로 큰 스포트라이터를 받았답니다.

 

그럼 70년대에 우리 연예사에서 큰 획을 그었던 대표적인 얼짱여배우 한혜숙에 대해서 포스팅해볼까 합니다.

 

한혜숙은 1970년도에 MBCKBS에 동시에 탤런트로 뽑히면서 연기자로 데뷔했는데, 한혜숙은 70년도에 MBC에 김자옥과 함께 데뷔해서 김자옥과는 동기 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혜숙은 그 이듬해에 KBS에 다시 탤런트로 데뷔하게 되는데, 당시 KBS TV드라마인 꿈나무오디션에 응모하여,

무려 3500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여주인공자리를 꿰차는 엄청난 일을 벌이면서, ‘꿈나무의 여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이 당시 꿈나무여주인공 응모경쟁률인 35001의 경쟁률에서 1위를 한 한혜숙의 기록은 아마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경쟁률기록이 아닐까 합니다.

 

그 당시 동양적인 미모를 중시하던 보수적인 풍토에서 한혜숙은 큰 키에 오똑한 콧날 등 서구적이면서 세련된 미모가 꿈나무여주인공으로 발탁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드라마 꿈나무는 당시 신세대계층인 고등학교 남학생과 여학생간의 순수하고 때묻지않은 우정과 사랑을 그린 학생드라마로,

그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주제와 참신한 내용으로 KBS에서 아주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명드라마였답니다.

 

이 드라마 꿈나무에서 첫주연을 맡은 한혜숙은 인기 미남배우 하명중과 함께 열연을 펼치면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여서, 안방극장의 인기스타로 급부상하게 된답니다.

 

당시 교복을 입고나온 한혜숙은 서구적인 세련미에 더해 청순하면서도 깔끔한 미모가 무척 돗보였고, 과거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미인계보를 이어나갈 신세대 미녀스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답니다.

 

드라마 꿈나무의 큰 히트로 스타덤에 올라서게 된 한혜숙은 그 이후 각종 인기드라마에 계속 출연하면서, 자신의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을 계속 어필해나가면서 인기스타의 자리를 굳혀나가게 됩니다.

 

70년대 전반 당시 한혜숙의 미모는 지금의 김태희의 미모에 비견될 정도로, 큰주목과 호평을 받았으며, 수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셀레이게 했습니다.

 

한혜숙은 백옥같이 하얀 살결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서양인같이 오똑한 메부리코와 초롱초롱한 눈 등 그 시대가 요구하는 샤프하면서도 세련된 미모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기에, 70년대를 대표하는 미녀스타라는 닉네임이 붙게되었답니다.

 

한혜숙의 키는 164cm인데, 한국여성의 평균신장이 지금보다 훨씬 작었던 70년대에 이 정도의 키는 지금의 170cm와 맞먹을 정도로 큰 키에 속했답니다.

그당시 TV안방극장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트로이카 세명의 여배우들이 있었는데, 바로 김자옥과 이효춘, 그리고 한혜숙이 그 주인공이었는데요.

 

이 세명의 미녀스타들이 우리 TV의 대부분의 드라마들의 주인공을 꿰차고 있었는데, 이 들 중에서 한혜숙이 가장 키가 컸고 몸매가 가장 글래머스하고 아름다웠답니다.

 

따라서 한혜숙은 이 시기에 세련된 미모와 더불어 큰 키와 글래머스한 몸매, 그리고 탄탄한 연기력까지 더해져서, 7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로 우뚝 올라설 수 있었답니다.

 

한혜숙은 신기록을 가장 많이 세운 여배우로 유명하답니다.

한혜숙이 70년대에 드라마 구미호춘향이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우리나라 여자연기자들이 톱스타로 올라설 수 있는 관문이 되는 드라마가 세편이 있는데요. 바로 구미호춘향이그리고 토지의 서희역이랍니다.

 

이 세편의 유명드라마는 워낙 유명한 명작품들이라서, 계속해서 리메이크되는 작품들이랍니다.

 

이 세편의 드라마에의 여주인공으로의 발탁은 톱스타가 될 수 있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이 세편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여배우들은 모두가 톱스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혜숙은 70년대에 구미호춘향이’ ‘토지에서 모두 여주인공자리를 맡았으며, 한혜숙은 1대 구미호, 1대 춘향이역을 맡은 원조배우랍니다.

 

한혜숙이 TV드라마에서 최초로 선보인 춘향이에서 최초로 춘향이역을 맡았다는 것은, 당시에 그녀의 미모와 인기가 얼마나 높이 평가를 받았는지를 여실히 증명해주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영화에서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인 김지미와 문희 같은 대스타들만이 춘향이역을 맡았었는데, TV드라마에서는 한혜숙이 춘향이역의 첫테이프를 끊은 것이라서, 당시 한혜숙의 비중은 최고의 스타인 김지미와 문희에 맞먹을 정도로 대단히 컷었다고 평가할 수 있답니다.

 

한혜숙은 드라마 토지에서 주인공 서희역할을 맡았는데, 역대 토지 드라마에서 한혜숙이 가장 서희역에 잘 어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가장 예쁜 서희였다고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당시 한혜숙과 같이 드라마에 출연했던 남자배우들 중에 한혜숙을 짝사랑했던 배우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한혜숙의 성격은 대단히 자존심이 강하고 도도한 성격이었으며, 외모와는 달리 매우 직선적이면서 보수적인 성격을 가진 한혜숙은 주변의 따르는 남자배우들을 모두 멀리했고

자신에 대해 철저히 관리했기 때문에, 당시에 한혜숙은 스캔들 없는 배우로 유명했답니다.

 

당시 일반인 중에도 한혜숙을 짝사랑하고 스토킹하는 남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한 남성은 70년대 당시 거의 매일같이 한혜숙의 집을 찾아와서 그녀를 미행했으며, 심지어 한혜숙의 집 담벼락에 한혜숙의 이름을 적고 빨간 토마토로 하트모양을 새겨넣어서, 한혜숙을 깜짝 놀라는 만드는 소동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70년대 당시 한혜숙은 많은 남성배우들과 일반남자들의 커다란 로망의 대상이었답니다.

 

지금은 수많은 매이커의 화장품들이 많이 있지만, 70년대 전반 당시에는 화장품은 3개 정도 밖에 없던 시절이라서,

최고미녀로 공인받을 수 있는 ‘CF의 꽃화장품모델에 발탁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한혜숙은 데뷔한 지 1년밖에 안된 1971년도에 당시 가장 인기좋았던 화장품인 아모레 하이톤화장품의 전속모델로 발탁되었고, 73년도까지 무려 3년 동안 아모레 화이톤화장품의 CF모델로 활동을 이어나갔답니다.

 

나중에 톱스타로 활동했던 유지인과 정윤희 등도 모두 화장품 전속모델 출신들이랍니다. 지금이나 과거나 여자연기자가 화장품모델에 나온다는 것은 톱스타로 가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혜숙은 화장품광고 외에도 여러 종류의 CF광고에 많이 출연했는데, 섬유회사 광고, 이불광고, 파이롯트 만년필광고, 비바라 샴푸광고 등

1970년대 내내 수많은 CF광고들에 출연했는데, 한혜숙은 그야말로 70년대 CF의 여왕이나 다름없었답니다.

 

이렇게 멋지고 새련된 미모로 각광받았던 한혜숙은 그 후 꽃피는 팔도강산’ ‘노다지등 유명드라마에 계속해 주연급으로 출연해서 높은 인기를 계속 이어나가게 된답니다.

 

  토지의 한혜숙

 

그런데 한혜숙의 아킬레스건이 하나 있습니다. 한혜숙은 TV드라마에서는 높은 인기를 끌면서 그녀의 출연드라마들도 크게 히트를 쳤지만, 영화쪽에서는 별로 큰 활동을 펼치지 못했답니다.

 

한혜숙이 본격적인 연기를 펼쳤던 70년대 중반 이후의 우리영화계는 전통영화가 시들어갔고, 새로운 장르인 여자호스티스 영화와 애로영화들이 주류를 이었던 시기랍니다.

 

한혜숙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김자옥 등은 호스티스 영화에 곧잘 출연해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한혜숙은 보수적인 성격 탓에 이런 호스티스영화에 출연을 고사하거나 벗는 연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별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으며, 한혜숙이 출연한 영화도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관이 뚜렷하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한혜숙의 성격탓에, 그녀는 TV드라마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지만, 아쉽게도 영화배우로서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답니다.

 

한혜숙이 출연한 영화 상록수’ ‘족보’ ‘최후의 증인같은 영화들은 작품성은 뛰어났지만, 사회문제를 다루는 교시적인 성격의 영화들이라서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답니다.

 

그렇지만 한혜숙은 TV드라마에는 계속 출연하면서 뛰어난 연기자로서의 명성을 계속 이어나갔는데, 70년대를 넘어 80년대, 90년대, 2000년대까지 왕성한 연기활동을 벌어나갔답니다.

 

  한혜숙은 80년대, 90년대를 아우르면서 계속 연기활동을 이어나갔는데, ‘황금의 탑’ ‘금잔화’ ‘이 여자가 사는법’ ‘천사의 분노

그리고 2000년대에도 한혜숙은 인어아가씨’ ‘왕꽃선녀님’ ‘하늘이시여등 명작품에 출연해서 중후하고 후덕한 연기력을 선보이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기도 했답니다.

 

특히 한혜숙은 2005년도의 인기드라마인 하늘이시여에서 개성있고 인상적인 명연기를 선보임으로써, SBS 연기대상 시상에서 대망의 대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답니다.

 

젊었을 때에는 빼어난 미모로 한몫했던 한혜숙은 2000년대 이후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는 기품있고 중후한 연기력으로 다시 큰 각광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70, 80년대의 우리연예계의 대표적인 미인여배우로 각광을 받았던 한혜숙에게 한가지 의문점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있답니다.

 

그렇게 높은 인기와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던 그녀가 지금까지도 계속 독신으로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시대를 풍미했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가졌다면, 벌써 진작에 재벌가의 며느리로 들어갔어야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한혜숙은 60이 넘은 지금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의혹스러운 부분이랍니다.

   

한혜숙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이유

 

70, 80년대 세상을 뒤흔들었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와 안방극장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던 한혜숙이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가 무척 궁금하기 짝이 없답니다.

 

미모가 안된다면 모르겠지만, 70년대 초반에 35001의 경쟁률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얼짱미모를 보유한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결혼하지 않았을까요?

 

한혜숙이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표면적인 이유는 두가지 정도 된답니다.

 

하나는 그녀의 가정환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또다른 하나는 그녀의 종교적인 신념 때문이라고 여겨진답니다.

 

한혜숙은 1951년도 부산에서 5자매 중 맏딸로 태어났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척 엄격한 성향을 갖고 있어서, 어려서부터 한혜숙을 엄격하게 훈육했다고 합니다.

 

또한 한혜숙은 29세의 나이에 가장이었던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20대 중반의 한혜숙에게는 부양해야할 4명의 여동생들이 있었으며, 그 당시 한혜숙은 4명의 여동생들을 모두 양육하고 교육시켜야할 사실상의 가장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한집안의 가장이 된 한혜숙은 자기자신을 철저하고도 엄격하게 관리해나갔으며, 오직 일과 가족부양에만 전념해나갔다고 합니다.

 

가족들을 모두 책임져야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사로잡힌 한혜숙은 연기활동을 하면서도, 근검절약을 해나가면서 동생들을 모두 양육해나갔고 대학까지 보내는 등 가족들 부양에 전력을 다했다고 합니다.

 

타고난 성격 자체가 보수적이면서 완고한데다가 동생들 부양에만 신경을 집중시켰던 한혜숙은 어쩌면 연애라는 것을 사치라고 느꼈을 수도 있었다고 보여진답니다.

이렇게 동생들 부양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기자신에게 너무도 엄격했던 한혜숙은 많은 남성들의 프로포즈를 전부 거부했을 것으로 보여진답니다.

 

한혜숙이 현재까지 독신으로 있지만, 사실 한혜숙도 젊었을 때에는 연애를 전혀 안한 것은 아니랍니다.

 

한혜숙이 스스로 밝혔던 내용인데, 그녀는 젊었을 때에 3번 정도 연애를 했었다고 합니다.

70, 80년대의 대표적인 미인이었던 그녀가 아무리 성격이 엄격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한번도 연예를 안할 수가 있겠어요?

 

, 젊었을 때의 한혜숙은 총 세명의 남자들과 연애를 했었고 그 중에는 좋은 감정을 가졌던 상대도 있었다고 해요.

그들 중에는 소위 7공자에 해당하는 대단한 스펙을 지닌 남자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남자가 어찌나 끈덕지게 한혜숙을 쫒아다니면서 끈적댔는지, 한혜숙은 이 남자의 그런 끈질긴 대쉬에 오히려 질려버렸다고 합니다.

 

다른 여자들은 어느정도 배경이 좋은 남자가 자신을 끈질기게 대쉬해오면 좋아했을텐데, 한혜숙은 보통여자들과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여성이랍니다.

 

자신을 좋다고 끈덕지게 데쉬해오던 배경이 좋은 7공자에게 한혜숙은 너무 질린 나머지 보기좋게 차버렸다고 합니다.

 

그 때에 못이기는 척 하면서, 그 남자의 대쉬를 받아줬더라면, 한혜숙은 지금쯤 아들 딸 낳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있었을 겁니다.

 

 이것은 한혜숙의 성격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녀는 엄격하고 완고하고 깐깐하면서, 상당히 콧대가 센 성격이었답니다.

 

이렇게 깐깐하고 완고한 성격을 지닌 한혜숙은 남자들에게 고분고분하길 바라는 그 당시의 남자들의 취향에는 잘 맞지 않았던 겁니다.

 

70~8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여자가 어느정도 남자들에게 고분고분하면서 순종하는 스타일이 대세였던 시대였으며, 남자들은 그렇게 순종적인 여자들을 좋아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지요.

 

한혜숙의 성격의 또다른 단면을 보여주었던 사건으로 경비구타사건이 있답니다.

 

1981년도에 여의도 방송국에 출입할 당시에는 방송국 경비의 파워가 막강했었다고 합니다.

 당시 방송국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모든 연기자들은 명찰을 달고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며, 경비가 매일같이 엄격하게 명찰을 검사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연기자라고 하더라도, 명찰을 달고있지 않으면 경비는 그 연기자를 결코 방송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을 정도로, 경비들이 매우 깐깐하게 통제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혜숙이 명찰을 달지않고서 방송국으로 들어왔고, 당연히 경비는 명찰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답니다.

 

그 당시가 1981년도라 한혜숙은 유명텔런트라서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알고있었을 때였지요.

 

한혜숙은 자신에게 명찰제시를 요구하는 경비에게, ‘나는 한혜숙인데, 당신,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라고 말했고, 그 경비는 당신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고 말하면서, 계속 명찰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자, 두사람간에 심한 말다툼이 벌어졌고, 그 경비가 끝까지 출입을 막아서자, 화가난 한혜숙은 자신의 구두의 뾰쭉한 힐로 그 경비의 머리를 때렸다고 합니다.

어렇게 한혜숙의 구두굽으로부터 얻어맞은 경비는 머리에 피까지 흘렸댜고 합니다.

 

한혜숙의 성격이 얼마나 대쪽 같고 도도하며, 깐깐한 성격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이 이야기는 텔런트 김형자가 직접 전해들었던 그 당시에 매우 유명했던 실화라고 합니다.

 

한혜숙은 독실한 불교신자로도 유명하답니다.그녀의 어머니가 불교신자였고,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명한 사찰을 많이 내왕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답니다.

 

한혜숙은 계속해서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리면서, 자신을 보다 더 엄격하고도 철저하고 관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혜숙은 성격자체가 워낙 깐깐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였답니다.

그녀는 자신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엄격하게 관리해왔기 때문에, 그러한 그녀의 완벽주의와 종교적 신념 때문에 남자들과의 만남을 멀리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답니다.

 

이것은 종교적 신념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기 힘든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녀들은 하나님과 결혼했다고 생각하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고 수녀원에서 절개를 지키며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아간답니다.

 

절에 계속 다니면서 불공을 많이 들여왔던 한혜숙도 마치 수녀들처럼, 자신이 부처님과 결혼했다고 생각하면서 동생들 부양과 불공에만 전념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답니다.

 

실제로 한혜숙은 자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자신은 비구니가 될 것이라고 방송에서 말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 한마디야말로 한혜숙이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온 진짜이유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혜숙은 미국 센디에이고에 대규모의 땅을 구입해서, 그곳에다 절을 짓도록 그 땅을 불교계에 무상으로 기부했다고 합니다.

 

다음생에서는 연기자 되지 않고, 비구니가 되겠다고 하는 그녀의 말한마디가 가슴에 찡하게 울려퍼진답니다.

그 정도로 한혜숙은 불교적인 신앙심이 무척 강하다고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들을 종합해본다면, 한혜숙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자연스럽게 도출되어 나온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엄격한 교육과 스파르타식 규율, 타고난 보수적이면서 완벽제일주의 성격, 그리고 불교의 금욕주의적 신념과 가치관, 이런 제요인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한혜숙으로 하여금 자신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스스로 금욕적인 생활을 몰두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남자들을 멀리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특별한 이유와 환경 때문에, 70년대를 대표하는 미녀스타였던 한혜숙은 안타깝게도 60이 넘은 지금까지도 독신으로 살아오게 된 것이랍니다.

 

물론 안타깝다는 것은 우리의 판단일 뿐이고, 독신으로 살고있는 한혜숙 자신은 스스로 현상태에 만족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한혜숙은 자신이 죽기 전에 암자를 하나 지어 보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적도 있으며, 그곳에 복지시설을 하나 지어서,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적도 있답니다.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면서 이런 특별한 사상을 갖고있는 한혜숙은 아뭏튼 보통 사람은 절대 아니라고 느껴진답니다.

 

이렇게 완고한 한혜숙도 한때에는 핑크빛 스캔들 루머에 휩쌓인 적도 있답니다.

한혜숙이 한창 젊었을 때에, 그녀와 정주영이나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루머가 퍼진 적도 있었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시절에, 엄청난 공포정치로 일반시민들을 압박하고 탄압했던 그 서슬퍼런 70년대의 시절에, 박정희는 그 당시 잘 나갔던 여러명의 미모의 여배우들을 건드렸다고 하는 루머가 있었답니다.

 

일반인들에게 숨겨졌던 궁정동의 안가는 박정희가 여배우들을 데려다가 유희를 즐겼던 곳으로 알려지기도 했답니다.

 

한혜숙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정확한 팩트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답니다. 단지 몇몇 사람들의 육성증언만이 있을 뿐이고,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당시 초법적인 권력을 휘둘렀던 박정희가 많은 여자들을 건드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어쩌면 당대의 최정상급 인기여배우였던 한혜숙도 도매급으로 함께 연관되어서 그러한 루머에 휩쌓이게 된 것은 아닌가 합니다.

 

박정희와 한혜숙의 스캔들루머는 제발 사실이 아니길 바라겠습니다.

물론 한혜숙은 이같은 루머는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정했다고 합니다.

 

한혜숙은 1951년생으로 지금 나이가 68세가 되었네요. 그렇지만 그녀는 최근까지도 젊었을 때의 미모를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아름답고 중후한 자태를 잃지않고 있습니다.

 

한혜숙은 2009년 드라마 보석비빔밥을 마지막으로 촬영하고는 더이상 방송에서 모습을 보이지않고 있습니다.

 

전언에 따르면, 한혜숙은 어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지금 어머니의 병간호에 열중하면서 집에서 쉬고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혜숙은 틈나는 데로 절에 찾아가서, 정성껏 불공을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혜숙이 모든 주변상황이 잘 정리되고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찮고서, 방송에 다시 출연해서, 그녀의 완숙하고 중후한 연기를 다시 볼 수 있기를 팬의 한사람으로서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한혜숙이 방송에서 말한 한마디가 떠오르는데요.

 

나는 연기자로서는 성공했을지는 모르지만, 여자로서는 실패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라고 한혜숙은 말했답니다.

 

장년의 나이가 되도록 결혼하지 못한 여성으로 남았다는 것을 실패했다는 말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또한 한혜숙은 나는 아직도 언젠가는 좋은 남자와 만나 결혼하는 꿈을 꾸고 있다라고 한 방송에서 직접 말했다고 합니다.

 

한혜숙이 직접 이 말을 한 것을 보면, 한혜숙은 원래 독신주의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깐깐하고 완고한 성격, 불교적 금욕주의적 가치관과 더불어 동생들을 모두 뒷바라지 하는 데에만 몰두한 나머지, 한혜숙은 혼기를 놓친 것 같습니다.

 

한혜숙이 아직도 결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하니, 이것은 대단한 반전으로 정말 놀랍기만 하답니다.

그녀가 다시 방송에 출연해서 보다 더 기품있고 완숙한 연기를 펼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한혜숙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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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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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독소빼고 군살빼는 ‘쾌속해독두유’ 만드는 방법

건강 & 보양식 정보 2018. 3. 26. 00:29

 

만물상뱃살과 독소빼는 특급해독법 해독두유만들기, 박찬영

 

이제 기나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는데, 봄철에는 이상하게 몸이 나른해지고 졸음이 오면서 매우 노근한 느낌이 드는데,

이러한 현상은 몸속의 독소가 많이 쌓여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랍니다.

 

추운 겨울동안 몸을 적게 움직이면서 몸속에 독소가 많이 쌓이게 되고, 그 독소가 봄이 되면서 절정이 되는데,

이처럼 봄철에는 몸에 쌓인 독소나 지방의 영향으로 졸음이 자주 오고 몸이 나른해진다고 합니다.

 

우리몸의 뱃살(똥배)가 많이 나오면, 그 뱃살속에는 셀룰라이트라는 지방덩어리가 형성되게 되는데, 이 셀룰라이트는 지방과 독소가 한데 뭉쳐서 만들어진 덩어리랍니다.

 

, 뱃살(똥배)이 많이 나온 사람은 자신의 뱃속에 지방뿐만 아니라, 독소도 함께 많이 갖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뱃살이나 군살이 많이 쌓이게 되면, 자신의 몸속에 독소도 함께 늘어나

는데, 이러한 독소가 체내에서 계속해서 증가하게 되면, 그 사람의 건강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답니다.

 

몸속에 쌓인 독소는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몸의 이곳저곳을 공격하기도 하고, 혈관속에 염증을 일으키면서, 심혈관질환이나 당뇨병 등 각종 성인병으로 일으키게 됩니다.

 

이렇게 뱃살과 독소는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아주 유해한 물질이가 때문에, 성인병에 걸리지 않고 우리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뱃살과 독소를 제거해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답니다.

 

한 외국의학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뱃살(똥배)이 나온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암에 걸릴 확률이 훨씬 더 높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무심코 넘겨왔던 뱃살은 고지방과 독소로 이뤄진 사실상 유해물질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 유해한 뱃살과 독소는 제거해주면 줄수록 우리의 건강이 더욱 좋아지게 된답니다.

 

그러니까 뱃살은 단순히 미관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건강에 직결되는 건강문제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몸에 뱃살과 독소가 많을수록 심혈관질환, 당뇨병 같은 성인병과 암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지게 된답니다.

 

반대로 우리몸에 뱃살과 독소가 적으면 적을수록 성인병이나 암에 걸릴 확률이 더 낮아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뱃살(똥배)가 많이 나오신 분들은 단순히 미관상 문제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루빨리 이 늘어난 뱃살을 빼주는 것이 건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 늘어난 뱃살속에는 몸에 해로운 고지방과 독소가 가득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해로운 고지방과 독소를 방치하면 큰 병이 되니까, 이것들을 빨리빨리 빼주는 것이 건강한 삶으로 가는 지름길이랍니다.

 

그렇지만 한번 늘어난 뱃살을 빼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여간 힘든 것이 아니랍니다. 한번 나오기 시작한 뱃살(똥배)는 아무리 운동을 해도, 다이어트를 해도 여간해서는 잘 들어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로운 뱃살과 독소를 제거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비법이 있다고 합니다.

 

방송 만물상에서는 10일 동안에 뱃살과 지방, 독소를 뺄 수 있는 특급프로젝트를 소개해주었답니다.

 

만물상에서 단 10일간의 특급프로젝트 실험을 통해서, 참가자 3명의 뱃살과 지방이 엄청나게 빠지는 놀라운 효과를 보여주었답니다.

 

10일동안의 프로젝트 실험에 참가한 참가자 박씨는 중성지방이 307에서 137로 큰 폭으로 감소되었고, 몸무게가 70kg에서 66kg으로 4kg이나 감소되었답니다.

 

66세의 김효순 참가자는 10일 동안 이것을 매일같이 먹을 결과, 중성지방이 177에서 75로 큰 폭으로 감소되었을 뿐만아니라, 체중도 4.1kg이나 감량되었답니다.

 

또다른 참가자 민씨는 간수치가 85에서 40로 감소했고, 허리둘레가 110cm에서 86cm로 무려 26cm나 줄어들었답니다.

 

이렇게 실제 실험을 통해서, 중성지방과 독소 뿐만아니라 뱃살과 체중까지 줄어들게 만들어준 주인공은 바로 해독두유랍니다.

 

 해독전문가 박찬영 한의사가 만든 쾌속해독 두유10일 동안 매일같이 마신 결과, 3명의 참가들 모두가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 그리고 뱃살이 큰 폭으로 감소되었답니다.

 

여러분들도 쾌속해독 두유를 만들어 마신다면, 불필요한 뱃살과 독소를 없앨 수 있고, 체중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럼 독소와 군살을 제거해주는 쾌속해독 두유만드는 방법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쾌속해독 두유만들기

 

뱃살과 독소를 제거해주는 쾌속해독 두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가는 재료를 알아두어야 하겠지요.

 

쾌속해독 두유에 들어가는 재료는 콩물, 파인애플, 천연식초, 어성초가루의 4가지입니다.

 

콩속에 있는 엽산, 이소플라본성분이 몸속의 자방과 콜레스테롤은 재거해주는 효능이 뛰어나답니다.

또한 콩에는 사포닌도 함유되어 있는데, 사포닌은 대표적인 면역력 강화물질이기 때문에 건강에도 좋고, 사포닌도 우리몸의 대사를 활성화시켜주고 독소를 빼주는 역할을 한답니다.

 

파인애플 속의 브로멜린성분은 단백질의 분해를 도와주기 작용을 하기 때문에, 소화흡수를 빠르게 해준답니다.

따라서 파인애플을 함께 넣어서 만든다면, 다른 재료들의 흡수를 도와주어서 해독효과가 더 빨리 나타나도록 해준답니다.

 

식초는 대표적인 다이어트식품인데, 장속의 유익균을 증가시켜서 장을 활성화시켜주고, 장속의 노폐물이나 독소를 분해해 배출시켜주어서 체중감량에 좋은효과를 발휘하는 식품입니다.

 

그런데 식초는 100% 과일로만 만든 천연식초를 사용해야 하고, 절대 빙초산을 사용하면 안됩니다. 빙초산은 석유화합물질이 재료로 들어가기 때문에, 몸에 해롭습니다.

 

쾌속해독 두유의 재료로 들어가는 어성초에는 퀘르시트닌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이 성분은 모세혈관을 확장시켜서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이뇨작용을 증진시켜서 몸속의 독소를 잘 빼준답니다.

 

이 어성초야말로 괘속해독 두유의 가장 중요한 핵심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콩물, 파인애플, 천연식초, 어성초가루의 네가지 재료들만 있으면, 뱃살과 독소를 빼주는 쾌속해독 두유를 얼마든지 손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럼 쾌속해독 두유를 만들어보도록 하겠어요!

 

재료 - 콩물 400cc, 파인애플 8~9조각(파인애플의 1/10), 천연식초 한큰술, 어성초가루 작은 한술

 

1. 먼저 커다란 대접을 준비하고, 그 대접에 콩물 400cc을 부어넣습니다.

콩물은 시중에도 시장에서 판매하고 있어서 어렵지않게 구입할 수 있어요. 그냥 메주콩을 삶고 난 후, 갈아서 집에서도 콩물을 만들 수가 있답니다.

 

2. 이 콩물이 들어있는 대접에 파인애플 8~9조각을 잘라넣습니다. 이 파일애플 8~9조각은 파인애플 한개의 1/10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3. 이 대접에 천연식초 한큰술을 넣습니다. 이때의 천연식초는 오직 과일을 발효해서 만든 천연과일식초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몸에 해로운 빙초산은 절대 사용하면 안되지요.

 

4. 이 대접에 어성초가루 한 작은술을 넣습니다. 어성초가루도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습니다.

 

5. 이 네가지 재료들의 혼합물을 모두 믹서기에 넣고, 10~20초간 믹서기를 돌려주면 쾌속해독 두유가 완성됩니다.

 

이렇게 만든 쾌속해독 두유는 하루에 한잔씩 매일같이 마시면 효과를 볼 수 있답니다.

좀 더 빠른 효과를 보시려면, 하루에 쾌속해독 두유를 2~3잔 마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러잔씩 단기간 동안 마시는 것보다, 한잔씩이라도 장기간에 걸쳐서 계속 마시는 것이 효과가 더욱 좋습니다.

 

아랫배가 많이 나와서 고민하시는 분들, 지방과 콜레스테롤이 많아서 고민하시는 분들, ‘쾌속해독 두유를 만들어 마셔보세요!

그러면 뱃살도 제거할 수 있고, 몸에 해로운 지방과 독소도 없앨 수 있고, 몸도 더욱 날씬해지는 효과를 보실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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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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