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패딩 전용 만능세제 만들기와 세탁방법

사랑방 이야기 2018. 3. 4. 16:15

 

오리털 패딩 전용세제만드는 법, 파카 세탁기로 완벽 세탁하기

 

 겨울이 끝나가는 환절기가 되었답니다. 이제는 추운 겨울동안 입고있었던 두터운 패팅을 세탁해서 옷장에 넣어두어야하는 시기인데요.

 

겨울철 두터운 패딩세탁 때문에 주부님들 고민이 많으실 겁니다. 오리털로 된 패딩을 집에서 그냥 세탁기로 세탁할 수가 없어서, 세탁소에 비싼돈을 주고 맡기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세탁소에 패딩세탁을 맡길 경우 비용이 15,000에서 비싸게는 20,000원 정도로 고비용이 들어가서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랍니다.

 

겨울철의 가장 큰 고민이 바로 오리털 패딩을 고비용을 주고 세탁소에 맡기는 일이랍니다. 또한 패딩은 한번 세탁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겨울철 내내 최소 일주일에 한번씩은 세탁을 해주어야 하는데,

매우 높은 세탁비용 때문에 세탁소에 맡길 때마다 엄청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리털 패딩을 세탁소의 고비용을 들이지 않고, 훨씬 적은 비용으로 세탁할 수 있는 특별한 세탁법이 있다고 합니다.

만물상에서 세탁전문가 강지우님이 소개한 저비용으로 패딩을 완벽하게 세탁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주어서 큰 관심을 끌고 있답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세탁소에 패딩을 맡길 필요가 없답니다. 왜냐하면 세탁전문가 강지우님이 집에서 오리털 패딩을 세탁할 수 있는 특별한 세탁법을 공개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이제부터는 패딩을 반드시 세탁소에 맡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강지우님이 소개한 패딩전용 만능세제만 있으면, 집에서도 얼마든지 오리털 패딩을 세탁할 수가 있답니다.

 

패딩전용 만능세제만 있으면, 집에서도 오리털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얼마든지 손쉽게 패딩세탁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패딩을 세탁소에 맡기는 이유는, 집에서 세탁기로 돌릴 경우에 패딩속에 있는 오리털이 손상되거나 뭉치게 되고, 세탁을 하고 난 후에는 패딩의 스타일이 망가지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비싼돈을 주고 울며겨자 먹기식으로 패딩을 세탁소에 맡겨서 특수세탁을 하는 것인데요.

 

그렇지만 패딩 전용 세제를 사용해서 특별한 방법으로 패딩세탁을 하면, 오리털이 전혀 손상되지도 않고, 패딩이 뭉치지도 않으면서 반듯하게 세탁을 할 수가 있답니다.

 

일반세제로 패딩을 세탁하게 되면, 일반세제는 염기성 세제이어서 패딩속의 오리털을 손상시키고 위축시키기 때문에,

세탁 후에 오리털이 없어지거나 뭉침현상이 일어나고, 패딩의 스타일이 일그러질 뿐만 아니라, 보온력도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패딩 전용 세제가 필요한 것인데요. 패딩 전용 세제는 찌든 때를 없애주면서, 오리털을 손상시키기 않고 보온력을 유지시켜주면서, 세탁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재료를 써서 만든 만능세제랍니다.

 

또한 패딩 전용 세제를 이용해서 집에서 세탁을 하면, 한번세탁을 하는 데에 세탁소비용 15,000원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답니다.

 

패딩을 일주일에 한번씩 세탁을 한다고 할 경우, 한달에 60,000여원을 줄일 수 있어서 정말 경제적으로도 적지않은 이익을 보실 수 있고, 또 세탁소로 날라주는 수고와 시간도 절약할 수 있어서 일석삼조라고 할 수 있답니다.

 

그럼 집에서도 손쉽게 오리털 패딩을 세탁할 수 있는 패딩 전용 세제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해드리겠어요!

 

패딩 전용 만능세제만드는 법

 

오리털파카나 오리털패딩을 세탁할 수 있는 세제인 패딩 전용 세제는 일반샴푸와 식초, 소금 이 세가지만 있으면 손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재료 - 샴푸 1(소주컵), 소금 반컵(소주컵), 식초 1/3, 물 한컵

 

패딩 전용 세제를 만드는 재료는 모두 대부분의 가정집에 다 구비되어 있는 재료들이어서 만들기가 정말 쉽습니다.

 

그럼 패딩 전용 세제를 만들어보도록 합시다!

 

1, 용기를 하나 준비하고 그 용기에 소주컵으로 물 한컵을 부어준다. 물은 빨리 녹게 하기 위해서 미지근한 물을 이용한다.

 

2. 그 용기에 소주컵으로 소금 반컵 분량을 넣는다. 소금은 굵은소금이나 꽃소금이나 상관없다. 소금을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저어서 소금을 녹여준다.

 

3. 그리고 용기에 일반샴푸 1(소주컵)을 넣는다.

 

4, 마지막으로 그 용기에 식초 1/3컵을 넣고 잘 섞이도록 잘 저어준다.

 

이렇게 재료들을 다 투입해서, 패딩 전용 세제가 완성되었답니다.

 

패딩 전용 세제의 재료인 샴푸와 식초는 산성제품이라서, 패딩의 재료인 오리털과 아웃도어 재료를 모두 보호해주는 작용을 한답니다.

그래서 샴푸와 식초 같은 산성제품을 사용해서 패딩 같은 겨울외투를 세탁을 하게 되면, 전혀 손상없이 말끔하게 세탁이 가능해진답니다.

 

또한 소금은 옷의 붙은 오염물을 흡착해서 빼주는 역할을 한답니다.

 

이렇게 특별한 세가지 재료를 혼합해서 만든 패딩 전용 만능세제로 오리털 패딩을 세탁하면, 오리털 손상없이,

리고 뭉치는 현상 없이 패딩의 보온력은 그대로 지속시키면서, 묶은 때까지 말끔하게 세탁을 할 수가 있답니다.

 

그래서 주부님들의 겨울철 최대의 고민인 고비용을 들여서 오리털 패딩을 세탁소에 맡기는 고충은 이제 그만두셔도 된답니다.

 

샴푸와 식초, 소금 이 흔하디 흔한 세가지 값싼 재료들만 있으면, 누구든지 손쉽게 오리털 패딩을 세탁할 수 있는 패딩 전용 세제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만물상에서 이렇게 만든 패딩 전용 세제가 얼마나 찌든 때를 잘 세척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았답니다.

 

패딩 전용 세제로 패딩에 묻어있는 김치국물 얼룩과 커피 얼룩을 지워보았는데, 일반세제로 잘 지워지지 않는 김치국물 얼룩과 커피 얼룩이 아주 깨끗하게 제거되었답니다.

 

패딩 전용 세제로 오리털 패딩을 세탁하는 방법

 

이렇게 패딩 전용 세제를 만들었으니, 이제는 이 패딩 전용 세제를 이용해서 오리털 패딩이나 파카를 세탁하는 법을 소개해드리겠어요!

 

1 커다란 다라나 대야에 40도 정도의 따뜻한 물을 잔뜩 부어놓고, 방금 만든 패딩 전용세제한컵(소주컵)을 붓는다.

 

2, 그리고 세탁할 패딩을 물속에 잠기도록 넣는다.

 

3, 패딩을 물에 충분히 적셔준 후, 패딩의 아주 더러운 부분은 칫솔로 비벼서 어느정도 만큼은 닦아준다.

 

4, 그리고 패딩을 꺼내서 세탁기에 넣는다. 세탁기에 넣을 때는, 패딩이 한쪽으로 몰리지 않도록 패딩을 넓게 펴서 넣는 것이 좋다.

 

5, 이렇게 세탁기에 넣은 후에, 처음부터 세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헹굼을 눌러서 헹궈주어야 하며, 헹굼을 두 번 반복해준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섬유유연제는 넣지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만일 섬유유연제를 넣으면 오리털의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안 좋습니다.

 

6 두 번의 헹굼이 끝난 후에는 으로 3분 동안 탈수를 한다.

 

7. 이렇게 탈수 후에 패딩을 꺼내서, 안감이 밖으로 나오도록 뒤집어서 수건과 함께 다시 세탁기에 넣고, 으로 3분간 다시 탈수를 하면 완료된다.

 

8, 이렇게 패딩세탁이 완료되면, 패딩을 꺼내서 널어주는 방법이 중요한데, 패딩을 잘못 널어주면 패딩속의 오리털이 뭉쳐서 옷의 형태가 망가져 버린다.

 

세탁이 끝난 패딩을 건조대에 널어줄 때에는, 지면과 수평이 되도록 눕혀서 널어주어야 합니다.

 

만일 패딩을 일반세탁물처럼 세워서 널어주게 되면, 패딩속의 오리털이 아래쪽으로 쏠리고 뭉쳐서 옷의 스타일이 망가져 버린답니다.

그러니 세탁한 패딩은 반드시 건조대에 눕힌 상태에서, 넓게 펴서 널어주어야 합니다.

 

오리털 패딩이나 파카를 세탁소에 맡기지 않고 집에서 손쉽게 세탁기로 세탁하는 방법을 알아보았습니다.

앞으로 고비용을 들여서 패딩을 세탁소에 맡겨 세탁할 필요가 없답니다.

 

어느 집에나 있는 샴푸와 식초, 소금의 세가지 재료를 이용해서 패딩 전용 만능세제를 만든다면, 얼마든지 손쉽게 집에서 세탁할 수가 있답니다.

 

이제 겨울철 두터운 패딩을 고비용을 지불하면서 세탁소에 맡기는 고민은 떨쳐버리세요!

패딩 전용 세제한컵만 있으면, 오리털 패딩 같은 두터운 외투도 간단하게 세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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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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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실재 용 목격담과 사진 동영상, 괴생명체

미스터리 파일 2018. 3. 3. 16:37

 

중국에서 용 발견과 목격담, 용의 정체는 공룡의 후예인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는 바로 전설속의 동물 이 아닐까 한다.

 

용은 실존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매우 신비롭고 판타지한 동물로 인식되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전설이나 소설, 영화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해온 존재이다.

 

특히 용은 동양에서는 대단히 상서로운 존재로서 인식되어 왔고, 예로부터 용은 인간들의 숭배를 받아왔고, 매우 신성시되었던 신과 같은 대상이었다.

 

옛날부터 왕의 얼굴을 용안이라고 불렀고, 왕의 자리를 용상이라고 칭했으며, 또한 왕은 항상 용의 형상이 그려져있는 공룡포를 입고 있었는데,

이처럼 국가 최고의 권력자는 모두 의 상징을 부착하고 있을 정도로, 동양에서의 은 최고로 숭배를 받았던 신적인 존재감이었다.

 

또한 용꿈을 꾸었을 경우에는 장차 엄청난 부귀영화가 찾아온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였는데, 이처럼 예로부터 민간에서는 은 권세와 부귀를 가져다주는 가장 복되고 신성시되는 존재감이었다.

 

 그런데 서양에서의 은 동양과는 전혀 상반되는 의미로 인식되어 왔는데, 서양에서는 예로부터 은 매우 사악하고 난폭한 악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서양의 은 커다란 날개를 펄떡거리면서 입으로는 불을 토하는 무시무시하고 잔악한 존재로서, 예로부터 서양사람들은 용을 사람들을 해치고 인간세계를 파괴하는 악마의 화신으로 인식해왔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에서의 은 선과 악을 대변하는 매우 신비로운 존재감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수많은 전설과 민담에서의 주인공으로 종종 등장해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에서 한편으로는 최고로 성스러운 존재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악의 화신으로 민담속에서 자주 등장해왔던 은 상상속의 동물인가,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를 가진 동물이었을까?

 

그런데 최근에 은 결코 상상속의 동물이 아니라, 실제로 과거부터 존재해왔던 실존의 동물이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으며, 또한 에 대한 목격담들이 세계의 여러지역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어서 놀라움을 주고 있다.

 

오늘은 우리 인류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존재로서,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의 존재와 목격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중국의 용의 존재와 목격담

 

최근 몇 년 사이에 을 실제로 보았다는 목격담들이 세계의 여러지역에서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어서, 경악과 함께 충격을 주고 있는 중이다.

 

무척 신비스럽지만, 우리가 항상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징적인 동물로서만 생각해왔던 인데, 놀랍게도 중국과 티벳, 캐나다의 여러지역에서 사람들이 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는 중이다.

 

또한 과거에도 뉴질랜드와 미국 등지에서도 에 대한 목격담이 여러건 존재해오고 있어서, 21세기 첨단과학문명의 시대에 접어든 지금 때아닌 용 신드롬현상이 불고 있어서 매우 이채롭게 느껴진다.

 

2000년대 들어서서 가장 핫한 뉴스 중 하나가 중국의 목격담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단순히 을 목격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을 카메라로 찍은 증거사진까지 제시되고 있고, 하물며 날아가는 용을 촬영한 용의 동영상마저 올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2004년 중국의 대기원 시보에 보도되었던 목격담 내용인데, 실제 을 찍었다는 용사진까지 근거로 제시해주고 있어서 놀랍기만 하다.

 

2004622, 중국에서 티벳으로 날아가는 한 여객기에는 한 사진작가가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객기가 히말라야산맥의 능선을 올라서는 순간, 그 사진작가가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놀랍게도 구름사이로 거대한 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여객기가 히말라야산맥의 언덕배기를 넘어서는 찰라에 그 사진작가는 창밖으로 거대한 크기의 용을 보았으며, 그 용은 구름사이를 날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도 비행기의 창밖에 나타난 그 거대한 용은 몸을 꿈틀꿈틀 거리면서 구름사이로 날아가고 있었고, 사진사는 재빠르게 자신의 사진기로 그 용을 찍었다고 하며,

그당시 그 사진작가가 목격한 용은 우리가 알고있는 동양의 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직접 사진을 찍은 그 사진작가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하며,

단지 과거로부터 상상속의 동물로만 여겨졌던 이 실제로 눈앞에서 날아가는 모습 자체가 엄청난 장관이었으며, 그 위엄있는 모습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이 중국 사진작가는 자신이 히말라야에서 찍은 용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서 공개함으로써, 많은 중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캐나다의 용 목격담

 

2006년 캐나다에서 또다른 의 목격담이 전해져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다.

 

200612월 캐나다에서 경비행기 조종사인 존 쉘턴은 비가 많이 내리고 잔뜩 구름이 끼었던 어느날, 자신의 경비행기를 몰고서 캐나다 해안가를 날아가고 있었다.

 

당시는 비가 오고 기상상태가 안좋아서 하늘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잔뜩 낀 상황이었는데, 비행기 안에서 정면을 주시하던 존 쉘턴의 눈 앞에 놀랍게도 의 얼굴이 보였다고 한다.

 

두터운 먹구름 사이로 갑자기 이 나타났으며, 그 거대한 크기의 은 존 쉘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심지어 존 쉘턴과 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고 한다.

존 쉘턴은 의 얼굴을 보고 엄청나게 놀랐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곧바로 카메라를 꺼내어 그 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몇십미터 앞쪽에 나타났던 용은 전혀 존 쉘턴의 비행기를 공격하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가하지 않았고, 잠시동안 존 쉘턴쪽을 응시하다가 이내 구름속으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이 당시 존 쉘턴이 목격했던 은 서양의 날개달린 용의 모습이 아니라, 비늘과 기다란 몸통을 가진 동양의 용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존 쉘턴은 자신이 찍은 의 사진을 지방의 한 방송국에 출연해 공개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는데, 그 방송국에서는 존이 찍은 용의 사진을 사진분석 전문가에 의뢰해서 그 진위여부를 확인까지 했다.

 

그리고 사진분석 감정사의 분석결과, 존 쉘턴이 찍은 용사진은 전혀 조작하지 않은 진짜사진인 것으로 판명이 났다고 한다.

 

사진이 진짜사진인 것으로 판명이 났는데, 그렇다면 존 쉘턴이 경비행기안에서 목격한 그 용 비슷한 형상의 거대한 괴생명체는 진짜 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그동안 우리는 옛날부터 전설처럼 내려왔던 을 단순히 상상속의 동물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조작하지 않은 실제 용의 사진이 존재한다고 하니,

은 정말로 옛날부터 존재해왔던 실존동물이란 말인가? 정말 신비롭고 놀랄만 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뉴질랜드에 나타난 날개달인 용가리 목격담

 

1887년 뉴질랜드에서는 날개달린 이 나타났다는 목격담이 전해지고 있다.

 

18871118일 뉴질랜드의 북부 항구도시 오클랜드에서 거대한 크기의 용이 나타나서 마을을 날아다니면서 마을전체를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고 주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다녔다고 한다.

 

바다에서 갑자기 솟구쳐나왔던 이 거대한 용은 날카로운 이빨과 커다란 발톱을 지녔고 날개가 달린 서양의 용처럼 생긴 괴생명체였는데,

2달 동안 마을을 휩쓸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끼쳤다고 한다.

 

사우리안괴물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이 용은 수시로 마을에 나타나서, 마을주민들을 위협을 하면서 날아다녔는데,

사우리안괴물은 특히 마을 어린이들을 쫒아다니면서 위협을 가했기 때문에, 마을주민들 전체가 매일같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우리안괴물은 마을의 도살장에 자주 나타났으며, 종종 도살장 안에 있는 동물들을 산체로 잡아먹었다고 한다.

 

사우리안괴물칵칵소리를 내면서 이 해안가마을의 공중을 커다란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날아다녔고, 사우리안괴물이 나타나기만 하면, 모든 마을주민들이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집안으로 숨었다고 한다.

 

사우리안괴물의 위협 때문에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진 마을주민들의 신고로, 결국 경찰과 군대까지 출동해서 이 괴생명체와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어느날 해안가 근처를 낮게 날아가던 이 사우리안괴물에게 경찰이 먼저 총을 쏘았는데, 처음에 몇발의 총을 맞았던 사우리안괴물은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면서도 죽지않고 버텨냈다고 한다.

 

이후 10여명의 군인들이 소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했고, 수십발의 총을 연달아 맞았던 이 사우리안괴물은 하늘에서 육지로 떨어졌고, 이내 날개로 몸을 감싸않은 채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2개월 동안 마을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사우리안괴물은 군인들이 쏜 수십발의 총을 맞은 채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경찰이 쓰러진 사우리안괴물의 신체사이즈를 측정했는데, 이 괴생명체의 몸무게는 360kg이고 몸길이는 3.5m였고, 두 개의 발과 두 개의 날개가 달려있었으며,

16개의 날카로운 잇빨을 갖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4개의 송곳니까지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 날아다니는 용가리처럼 생긴 사우리안괴물은 몸무게 360kg이나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덩치를 갖고 있는데, 이 세상에 조류 중에 이렇게 큰 조류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새들 중에서 가장 큰 독수리가 하피독수리인데, 아무리 큰 하피독수리라고 해도 몸무게는 평균적으로 10kg을 넘지 않으며, 세상에서 가장 큰 독수리의 체중은 14kg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뉴질랜드 오클랜드 항구마을에 나타났던 사우리안괴물은 가장 큰 독수리보다 27배나 더 덩치가 무거운 360kg의 초대형 괴생명체로서,

용가리처럼 생겼지만 날개가 달렸다는 특징과 네 개의 송곳니를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현대의 그 어떤 조류도 잇빨은 없다.

 

사우리안괴물은 분명히 조류는 아니며, 마치 용처럼 생긴 신비로운 동물인데, 아직까지도 그 정체가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한 괴생명체로 남아있다.

 

사우리안괴물은 그 형체가 날개달린 서양의 용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여태까지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익룡의 후예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고, 어쩌면 실제 용의 후예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1887년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해안가마을에 나타났던 이 날개달린 사우리안괴물공룡이나 을 대입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동물이다. 360kg이나 되는 거대한 날개달린 동물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다시말해 이 사우리안괴물은 아직까지 인류가 발견해내지 못한 공룡의 후예이거나, 용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중국의 산림 위를 날아다니는 익룡(?)을 닮은 용 목격담

 

20166월에도 중국에서 하늘을 나는 괴생명체의 동영상 모습이 올라와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한 관광객이 찍어서 올린 동영상인데, 중국의 산림지대를 방문했다가 우연히도 하늘을 나는 비슷한 괴생명체를 보고는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산악지대 위를 유유히 날아가는 매우 괴상한 생명체가 목격되었는데, 이 괴생명체는 덩치도 상당히 컸고

특히 커다란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산림 위를 날아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서양의 날개달린 용의 모습과 매우 비슷했다고 한다.

 

산등성이를 등반하던 한 관광객이 이 괴이한 생명체를 포착하고 재빨리 자신의 카메라로 촬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거대한 몸집에 두개의 날개가 달린 이 괴생명체는 분명 조류는 아니었으며, 현존하는 그 어떤 동물들과는 닮지 않은 매우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길다란 몸통과 여러겹으로 찢어진 커다란 날개의 모습으로 보아 전형적인 서양의 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아뭏튼 이 날아다니는 괴생명체는 그 형태로 보아서 서양의 용이나 이미 멸종한 익룡나 매우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멸종한 줄 알았던 익룡이 다시 부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이 동영상이 그래픽전문가에 의해서 조작된 동영상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날개달린 괴생명체가 날아다니는 형상이나 주변 산림지대의 색깔이나 명암과의 조화, 그리고 이 괴생명체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상세히 분석해보았을 때에, 이렇게 생생하고 뚜렷한 동영상을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조작한 동영상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날개달린 용 비슷한 이 괴생명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현재 존재하는 동물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며, 아마도 쥬라기시대에 멸종한 익룡과 매우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렇다면 이 괴생명체는 익룡의 후예일까? 아니면 서양에서 전설처럼 내려왔던 서양의 일까?

 

이 용처럼 생긴 괴생명체의 정체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드라코렉스 호크와트시아 공룡

 

미국 스텐포트대학의 메이어박사는 용은 실존하는 동물이 아니라, 과거 공룡시대에 존재했던 공룡의 모습을 보고 만들어낸 상상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메이어박사는 과거 공룡시대에 존재했는 드라코렉스공룡을 의 롤모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백악기시대에 살았던 드라코렉스공룡은 길다란 주둥이를 가졌고 머리에 뽀족한 뿔까지 지니고 있어서,

우리가 알고있는 용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고대시기에 멸종한 드라코렉스 호크와트시아 공룡의 화석을 발견한 인류가 이 드라코렉스공룡의 모습을 토대로 해서 의 전설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의 전설이 널리 퍼져나감으로써 전설같은 의 신화가 형성되었고,

의 신화가 오랜시간 동안 동·서양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메이어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은 실존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특정한 공룡을 보고서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속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이고, 그렇게 만든 의 롤모델이 바로 멸종한 드라코렉스공룡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드라코렉스공룡의 모습을 보면, 서양의 용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렇게 특이하고 괴기스러운 드라코랙스공룡의 화석을 본 일부 사람들이 이형상에 상상을 더해서 의 신화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과연 이 오래전에 멸종한 공룡의 화석을 보고서 만들어낸 전설의 산물이었을까?

 

그렇지만 이같은 메이어박사의 주장은 많은 모순점들이 발견되고 있다. 메이어박사가 주장한 드라코렉스공룡은 서양의 용과는 비슷한 모습이지만, 동양의 용의 모습과는 생김새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또한 메이어박사가 주장한 드라코렉스공룡은 날개가 없는데, 서양의 은 날개를 가졌고,

2000년 이후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목격되었던 도 날개를 갖고 하늘을 나는 모습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메이어박사의 주장한 용의 모습과는 많이 배치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메이어박사의 주장은 일견 일리는 있어 보이지만, 현실과는 너무 맞지않는다는 모순점을 지니고 있다.

   

용의 정체는?

 

18세기, 19세기에도 여러나라에서 과 흡사한 괴생명체가 많이 발견되었고, 2000년대 이후에도 세계의 곳곳에서 비슷한 괴생명체가 계속해서 목격되고 있을 뿐만아니라, 그 모습이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히기까지 했다.

 

중국, 티베트, 캐나다, 뉴질랜드 등 여러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목격되고 있는 괴생명체는 커다란 날개를 지니고 있고 하늘을 퍼더거리며 날아가고 있으며,

 모습이 과 너무나도 흡사해서, ‘을 대입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래의 용발견 동영상을 보시면,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이 서양의 과 흡사한 모습이며, 이런 모습을 가진 동물은 과거에는 지구상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개체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류가 전혀 확인하지 못한 이런 괴생명체가 2000년대 이후에 부쩍 더 많이 출몰하고 있어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지구상에는 아직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동물과 식물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바다 깊숙한 해저 1000km 이하에는 인류가 확인하지 못한 정체모를 물고기나 생물체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고,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시베리아의 오지지역에도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동물과 괴생명체가 심심치않게 발견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메리카의 빅풋(사스콰치)’, 히말라야의 설인’, 남아메리카의 츄파카브라 등의 괴생명체가 수십년 전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지만,

인류는 아직도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러한 괴생명체는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다.

 

이런 괴생명체들은 인류가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할 뿐이지, 세계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도 이런 괴생명체와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도 세계의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그것을 전설속의 동물’ ‘상상속의 동물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인류가 그 생명체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 ‘은 과거 고대의 시기부터 험난한 오지나 인간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은밀한 지역에서 계속 서식해왔지만, 아직 인류가 발견하지 못하고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계속 존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그 존재를 전설이나 신화속에 묶어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는 스스로 잘 알지못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정하는 네거티브 마인드를 가진 존재들이다.

자신이 잘 알지못하는 존재는 무조건 부정을 해야만 자신의 위신이나 체면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의 곳곳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고, 사람들에 의해서 동영상까지 찍히고 있는 은 그 형상이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데도 무조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열린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를 인정해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 정확한 실체에 대해서 보다 면밀한 조사분석이 이뤄져야 할 때라고 본다.

 

이제 에 대한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겠다. 6500만년 전에 대부분의 공룡들이 멸종했지만, 그 중 생명령이 강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일부의 개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소수의 공룡들이 인간의 발길이 닿지않는 깊고 험난한 산림지역이나 오지에 숨어살면서, 계속해서 그 명맥을 이어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룡의 후예들은 단지 인간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고,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지, 무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깊고 험난한 산속 오지에 살고있던 소수의 공룡후예들을 발견한 소수의 사람들이 의 전설이나 신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은 멸종하지 않고 극소수만 살아남아 명맥을 이어왔던 공룡의 후예들로서, 인간과 멀리 떨어진 깊고깊은 산맥속에 살아왔던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가설이므로, 저보다 더 유능한 고고학자와 동물학자들이 좀 더 심도있고 면민한 조사활동을 벌여서 반드시 의 실체를 밝혀주길 바란다!

 

 

세계의 여러지역에 나타나는 의 동영상

 

 

 

 

 

 

 중국 산림지대에서 촬영된 하늘을 나는 용 동영상

 

 

 

 

 

 

멕시코에서 발견된 하늘로 승천하는 용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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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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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과 민비의 실제얼굴 초상화

역사이야기 2018. 3. 2. 15:38

 

을미사변명성왕후 죽음의 진실, 민비의 생존설과 사진

 

18511117~1895108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치욕스러운 사건으로, 일본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을비사변이라고도 불리우는 명성왕후 시해사건때에 명성황후가 죽지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명성황후는 조선 26대왕인 고종의 정비로써, 조선후기에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비운의 왕비다.

 

조선시대에서 명성황후처럼 파란을 많이 겪었던 왕비도 드물 것인데,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마다 크게 엇갈리고 있다.

 

조선 후기의 어려운 시기에 왕비에 올라서 개혁정책을 실시해서 일본의 침략에 맞섰던 현명하고 영특한 국모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일족을 끌어들여 엄청난 사치와 부정부패를 일삼아 국가재정을 파탄내고, 결국 나라를 망치게 한 요부라는 평가도 함께 받고있는 인물이다.

 

이렇게 고종의 정비 명성황후는 개혁을 단행했던 현명한 왕비라는 평가와 부정부패를 저질러서 국가를 파탄낸 요부라는 두가지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데,

명성황후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좀 더 세밀한 분석과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명성황후가 일본인 낭인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했다고 역사에서 배워왔다.

 

대부분의 역사서적에서 명성황후 민비는 1895년 궁궐에 침입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우리들도 민비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왔다.

 

그런데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해서 종전의 기록과는 다른 새로운 내용들이 나오고 있어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 당시,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자객들에 의해서 살해당하지 않았고, 명성황후는 궁궐의 뒷문을 통해서 몰래 궁을 빠져나가 살아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을미사변 120주년 기념특집으로 방송된 명성왕후를 다시보다에서도 이같이 명성황후가 을미사변 때에 죽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명성황후가 살아있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어서 큰 놀라움을 주고 있다.

 

명성왕후는 을비사변 때에 궁궐로 침투한 일반자객들을 따돌리고 숨겨진 암문을 통해서 몰래 궁궐밖으로의 탈출에 성공했으며, 궁궐밖 은밀한 은신처에서 몰래 살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민비시해사건 때에 죽은 여성은 민비가 아니고 민비처럼 변장한 궁녀라고 하며, 탈출한 명성황후는 남몰래 은신처에서 계속 살아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명성황후 민비가 살해당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쩌면 우리가 알고있던 민비시해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명성황후는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도 은밀한 은신처에서 안전하게 살아갔다고 하는 민비생존설이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을미사변민비시해설의 진실은?

 

명성황후가 살해되었다는 을미사변의 진실은 무엇인가? 기존의 이론대로 을미사변때에 명성황후 민비는 정말로 살해되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주장처럼 민비는 을미사변때에 죽지않고 살아남았을까?

 

 을미사변에 관한 기존의 학설과 자료들을 먼저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민비 시해사건으로 알려진 을미사변은 원래 조선후기 동학혁명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4년 민중들의 봉기에 의한 동학혁명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그 동학혁명의 봉기를 진압하겠다는 구실로 일본과 청나라가 동시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즉 동학혁명이 일본군대를 한반도로 끌어들이는 도화선이 되었고, 한반도에 군대를 진출시킨 일본은 동학군들을 전멸시키고 승리를 한 후, 점점 조선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높여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군대와 일본군대간의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서 청일전쟁이 벌어졌고,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머줨으로써,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조선에서 청나라를 몰아내고 주도권을 잡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하면서 점차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자,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손을 잡고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해 나간다.

 

이렇게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강한 연대를 맺고 일본을 견제해나가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조선진출의 커다란 장애물로 판단하고, 은밀하게 민비(명성황후)에 대한 제거계획을 세우게 된다.

 

명성황후 살해설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나갔다.

당시 일본의 힘이 날로 커져나가자, 일본의 침략야욕을 간파했던 명성황후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너무 커진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그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일본 못지않게 영향력이 컸던 러시아를 끌어들여서 일본을 견제할 계략을 세우게 된다.

명성황후는 당시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할 만한 큰 파워를 지니고 있었다고 판단했고, 또한 러시아는 한반도에 큰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서로간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베베르공사를 자주 불러 국사를 논의하는 등 연대를 강화해나갔고, 이에 소외감을 느낀 일본은 러시아를 우대하는 조선국모 명성황후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결국 명성황후 제거계획을 세운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표면적인 이유는 조선이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와 연대를 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장해요소인 명성황후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종보다는 민비가 머리가 더 영특했고 정치적, 군사적 전술전략이나 식견이 높았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민비를 제거하지 않을 경우 조선을 침략하는 데에 많은 방해를 받게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뭏튼 일본은 한반도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여긴 명성황후의 시해계획을 세웠고, 1895108일 일본낭인들을 경복궁에 난입시켜서 건청궁에 있던 명성황후 민비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불로 화형시키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명성황후 시해는 군인출신으로 강경파에 속하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진두지휘했고, 40명의 일본낭인들을 끌어들여서 전격 실행에 옮겼다.

 

그렇지만 명성황후의 시해는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지시를 내렸다고 알려져 있고, 그 실해계획을 처음 세운 자는 이노우에 전공사였다.

 

결국 명성황후 시해인 을미사변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공사의 합작품이며, 일본정부가 승인해서 이뤄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민비살해의 최일선에 있었던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와 일본낭인 40명은 일본정부가 세운 민비시해 계획을 실행시킨 하수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1895108일 새벽 5시경, 미우라공사의 지시로 일본군대의 2개 대대가 경복궁 수비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곧바로 궁궐안으로 쳐들어가서 두 개의 대궐문은 장악했다.

 

일본군대가 갑자기 기습적으로 경복궁으로 쳐들어왔고, 궁궐수비대는 일본군대의 공격을 막으려고 싸웠지만 곧바로 패퇴해서 물러났는데,

이당시 일본군대의 공격에 대항해 싸우던 경비대장 홍계훈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이 당시 일본군대의 공격으로 성문이 열리는 데에는 고작 15분밖에 안 걸렸다고 한다.

이렇게 일본군대가 손쉽게 궁궐의 성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수비대의 일부지휘관이 일본군과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일본군대가 조선수비대를 물리치고 경복궁의 두 개의 성문을 열어제낀 후에, 곧이이서 일본낭인 40명이 궁궐로 침투해 들어갔다.

 

40명의 일본낭인들은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의 옥호루로 들어가서 명성왕후를 찾았지만, 민비를 찾는 데에 실패하자, 그곳에 있던 두명의 궁녀를 본보기로 살해했다.

그러자 민비는 복도로 뛰쳐나갔고, 민비를 알아본 일본낭인들이 민비의 뒤를 쫒아가서 붙잡았다.

 

그리고 일본낭인들은 민비를 쓰러뜨리고 민비를 발로 짓밟은 후에, 칼로 민비의 복부와 옆구리를 세 번 찔러서 살해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낭인들은 민비의 시신을 건청궁의 동쪽 바깥으로 끌어낸 후, 그 시신에 휘발유를 붓고는 화형을 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당시 민비는 45세의 한창 나이였는데, 잔혹하고 무도한 일본낭인 패거리들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명성황후를 척살한 일본낭인들을 곧바로 고종의 침소에까지 쳐들어가서, 고종을 협박해서 죽은 명성황후의 폐비조서를 내리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일본낭인들이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폐비시키라고 강요했지만, 고종은 이같은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명성황후를 죽인 후에 일본은 조선에 친일파 김홍집을 내세워 친일내각을 세웠고, ‘을미개혁이라는 일본식 개혁정책을 단행한다.

그리고 일본의 조종을 받은 김홍집내각은 고종을 겁박해서 명성황후를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렇게 명성황후가 죽은 후에는 고종은 실권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왕으로 전락했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본격화하고 일본은 조선을 서서히 침몰시켜간다. 

 

일본의 에조보고서에 의하면, 일본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명성황후에게 윤간과 시간을 자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렇게 일본낭인들을 동원해서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나중에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의 열강들이 강력히 항의를 하자, 일본은 명성황후 살해의 주범인 미우라공사와 낭인들을 일본 히로시마법정에 세워서 재판을 받게 했다.

 

그렇지만 이 재판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재판이었고, 1년이 지난 후에 미우라공사와 40명의 낭인들은 모두 무죄로 석방되었다.

 

여기까지가 여태까지 정설처럼 내려왔던 명성황후살해설의 내용이다.

   

명성황후 생존설

 

그런데 명성왕후가 생존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외국공관의 문헌사료들이 여러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로써 을미사변이후에도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생존했다는 명성황후 생존설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을미사변직후에도 명성황후 민비가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기록들이 외국공관의 여러 보고서들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아래의 내용들은 명성황후의 생존을 암시하는 당시의 외교문서의 기록들이다.

 

1895을미사변직후에 뉴욕타임스지는 고종은 명성황후가 을미사변 때에 죽지않고 기생복장으로 변장을 한 채, 궁권을 빠져나갔다고 믿고 있다고 보도를 했다.

 

또한 189662일에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라돌린이 독일본국에 올린 보고서의 내용에 의하면, ‘을미사변 직후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명성왕후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되어 있다.

 

이 독일대사 보고서는 명성황후가 죽었다는 을미사변 날짜보다 8개월이 지난후에 작성된 것이어서, 독일대사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시점으로부터 8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민비가 살아있다고 확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이 을미사변이 일어난 당시나 그 후에 조선에 주둔했던 외교관들의 여러 가지 보고서에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살아있었다는 내용들이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을미사변이 일어날 당시에 일본낭인들이 궁궐로 쳐들어와서 민비가 있는 침소에까지 들이닥쳤지만, 명성황후는 이미 변장을 하고 암문을 통해서 달아나 버렸고, 명성황후 복장으로 갈아입은 궁녀가 대신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장을 한 채 궁궐밖으로 피신했던 명성황후는 한동안 은신처에 숨어서 살아갔다는 암시내용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외교문서들에 따르면,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에 러시아대사관을 비롯해서 독일대사관, 프랑스대사관. 미국대사관 등 대부분의 열강 외교관들은 을미사변당시에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피신해서 살고있다고 강력히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외교관들이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살아있다고 믿었던 이유는 첫째 민비의 시신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왕실의 모든 일들을 기록하는 승정원일기에도 민비(명성황후)가 죽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정사의 어디에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죽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고종도 명성황후가 죽은 후에 한참동안 명성황후에 대한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의 국모가 죽었는데도 장례를 치르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한다는 것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아마도 고종이 명성황후의 장례를 오랫동안 연기해온 것은 민비가 살아있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일본이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강행하려고 하자, 고종은 러시아의 베베르공사에게 가짜인골을 가지고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종은 명성황후가 죽지않았다고 굳게 믿고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고종이 명성황후의 가짜장례식을 저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정황들이 명성황후가 죽지않고 살아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이뤄진 것들이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뒤인 1897년도에 치러지게 된다.

 

한국의 사학자들 중에도 을미사변당시 명성황후가 살해당했다고 믿지 않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밖으로 피산한 명성황후가 은밀한 곳에 숨어서 살고있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외교기록이 또하나 존재한다. 바로 을미사변을 주도했던 책임자로 알려진 미우라공사의 보고서인데,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3일이 지난 후에 미우라공사가 일본내각에 보낸 보고서의 내용이 있다.

 

이 보고서에서 미우라는 조선왕실에서는 왕후의 소재가 불분명하다고 말하고 있고, 민간에서는 왕후(명성황후)가 혼란이 일어났을 때에, 멀리 피신해서 살고있다는 설이 많이 나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을미사변을 주도했던 미우라공사마저도 명성황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전혀 알지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우라공사가 조선왕실에 명성황후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조선왕실에서는 명성황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3일이 지난 후의 시점이었는데, 이같은 미우라공사의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조선왕실에서는 명성황후의 죽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가 있다.

 

, 조선왕실에서도 명성황후가 살해되었다는 것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명성황후가 어딘가로 피신해서 살고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고종은 그 누구에게도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것은 명성황후가 궁궐을 탈출해서 은신처에 몰래 숨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을미사변이 발생했을 당시, 시위대 연대장인 이학균이 고종에게 왕비마마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여쭈었을 때, 고종은 걱정마라, 왕비는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다고 답하면서 이학균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같은 이학균의 증언은 러시아의 베베르공사의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외교문서들을 종합해서 판단해보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는 죽은 것이 아니라, 궁궐을 탈출해 은밀한 곳으로 도망가서 살고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왕후가 일본낭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당시의 정사의 기록에도 명성왕후가 죽었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그러니까 을미사변 때에, 40명의 일본낭인들은 궁궐로 쳐들어갔고, 민비의 처소로 쳐들어가서 어떤 여성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죽였던 여인은 궁녀였고, 민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미 1882년 임오군란 때에 군인들의 난동으로 죽을 뻔했지만, 탈출에 성공해서 살아났던 민비다.

 

한번 죽을뻔 했던 경험을 한 민비는 또다시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피신할 수 있는 은밀한 피신처를 미리 확보해놓았을 것이고,

1895년 일본낭인들이 궁궐로 쳐들어왔을 때에는, 궁녀들의 도움을 받고서 기생으로 변장해서 신속하게 피신처로 달아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민비의 처소인 건청궁의 옥호루로 쳐들어갔던 일본낭인들은 이미 탈출하고 없는 민비를 찾지못하자, 민비 대신 궁녀를 살해했고 그 죽인 궁녀를 불에 태워서 민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추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 민비를 찾지못한 일본낭인들은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을 두려워해서, 일부로 궁녀를 죽이고 마치 민비를 죽인 것으로 위장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을미사변을 진두지휘했던 미우라공사 마저도 민비가 죽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논리로만이 그때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낭인들이 일본에 돌아가서 술집에서 자신들이 조선의 왕후를 죽였다고 자랑질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서 거짓말로 객기를 부렸다고 본다.

일본낭인들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해한 여성이 궁녀인지 민비인지를 전혀 알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여라가지 외교기록들을 살펴보면, 을미사변 때에 명성황후가 죽지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그렇지만 을미사변 때에 명성황후가 사망했는지, 아니면 살아남았는지를 속단할 수는 없으며, 현재로서는 아무도 그 진실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일부사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해서,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것으로 믿어왔다.

 

그렇지만 을미사변 당시의 여러나라의 외교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명성황후가 살해당했을 가능성 보다는,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쓰레기 같은 일본낭인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높여놓기 위해서, 궁녀를 죽이고 나서 마치 왕후를 죽인 것처럼 허풍떨고 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에 많은 사람들(한국사람들+일본사람들)켸속 속아왔던 것이다.

 

19세기말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던 그 어려운 시기에 명성황후는 일본의 침략의 야욕을 미리 눈치채고, 일본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서 러시아를 이용해서 일본을 견제하는 등 조선이 생존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강구해왔던 현명한 왕후였다.

 

일본의 침략을 대국인 러시아를 이용해서 분쇄하고자 했지만, 이미 조선의 국력이 너무나도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의 주권을 지키고자 했던 명성황후의 한맺힌 노력과 수고는 안타깝게도 물거품이 되고야 말았다.

 

1990년대 일본의 국력은 동아시아에서 최강의 지위에 있었고, 조선의 국력은 최하위로 떨어져 있었기에, 명성황후가 추구했던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은 안타깝게도 끝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명성황후가 사라지고 난 후에, 조선은 일본의 침략의 마수에 걸려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명성황후가 이미 오래전에 예측했던 데로, 일본은 결국 조선을 합병하고만 것이다.

 

그 당시 조선의 국력이 좀 더 강해서 명성황후의 개혁정치와 실리외교에 뒷받침을 해주었다면, 어쩌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시대를 잘못 태어난 명성황후가 너무나도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이미 조선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상태라서, 명성황후 한사람의 힘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늦어버린 것이다.

 

조선의 국력이 이렇게까지 약화되었던 것은 명성황후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종을 대신해서 섭정을 펼치고 쇄국정치를 강행했던 대원군 때문이라고 본다.

 

대원군이 집권했던 1862년부터 1873년도의 11년 동안의 이 시기가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시기였다.

약 대원군은 이 소중한 시기에 개화를 해서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국력을 키웠더라면, 우리조선이 그토록 일본에게 손쉽게 합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집권한 대원군은 정적들을 제거하고 서원을 철폐하는 등 정치문제에만 집중했고, 부국강병에는 너무 소홀했고,

오로지 쇄국정책만을 고수함으로써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상실했고, 조선은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고종과 민비가 대원군으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았을 때에는 이미 조선의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고, 일본은 결코 넘볼 수 없는 아시아 최강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따라서 대원군이 더 빨리 정권을 고종과 민비에게 넘겨주었더라면, 그리고 고종과 민비가 더 빨리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 지도 모르며, 일본의 식민지배에의 예속을 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명성황후의 초상화와 사진

 

2017814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다보성겔러리에서는 광복 72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명성황후 초상을 공개되었다.

 

이 특별전시회에서 과거에 나돌았던 명성황후 초상화와는 다른 전해 새로운 초상화를 공개했는데, 명성황후가 왕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있는 모습이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다보성갤러리가 공개한 명성황후 초상화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이 공개한 새로운 명성황후 초상화는 명성황후가 두손을 가지런히 모은 상태에서, 머리에는 하얀두건을 쓰고 하얀빛의 평상복을 입고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초상화이다.

 

여태까지 알려진 명성황후 초상화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서 매우 단아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명성황후의 새로운 초상화는 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에서 출토한 것이라고 하며, 여러사람들을 거쳐서 다보성갤러리가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이 초상화의 뒷면에 부인초상이라는 글자가 씌여져 있는데, 원래는 부인초상글귀 위쪽에 閔氏(민씨)’라는 글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지워졌다고 한다.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은 이 초상화에 閔氏(민씨)’라는 글자와 이 여인인 고급 가죽신발을 신었다는 점을 들어서, 명성황후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 초상화는 이승만대통령이 집필한 책 독립정신에 나오는 명성황후 사진과도 매우 닮아있다는 점을 근거로, 명성황후의 진짜 초상화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학계에서는 이 초상화가 명성황후의 초상화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명성황후의 초상화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은 이 초상화가 최초에 운현궁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을 들어서, 명성왕후의 초상화가 맞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고학전문가들과 역사학자들이 보다 치밀한 분석조사를 벌여서 이 초상화의 진위여부를 정확하게 판별해주길 바란다.

 

과거부터 명성황후의 초상화는 여러장이 나돌고 있다.

   

과거에 명성황후의 초상으로 알려진 사진들

 

이 사진은 과거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졌던 명성황후의 사진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사진이다.

그런데 이 사진은 1890년대에 민간에 떠돌아다니던 일반 궁녀의 사진이라고 하며, 실제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 사진은 외국에서 살해당한 왕비라는 명칭으로 나돌았던 사진이며, 과거 우리교과서에도 명성황후의 모습으로 실리기도 했던 사진이다.

 

그렇지만 이 사진은 1894년도의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에서 궁녀의 모습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 사진 역시 명성황후의 진짜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 사진은 이승만이 쓴 책 독립정신에 수록된 사진인데,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직접적으로 지목되있는 유일한 사진이라고 한다.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직접 지목된 사진이기 때문에,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사진은 일제시대 때부터 1980년도까지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가장 널리 알려졌던 사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궁녀생활을 했던 여성의 말에 의하면, 이 사진도 실제 명성황후는 아니라는 평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일반에 알려진 명성황후의 사진들 대부분이 실제 명성황후가 아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이 공개한 사진이 진짜 명성황후의 초상일 가능성이 현재로서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김관장의 주장대로 그 사진이 운현궁에서 흘러나온 것이 맞다면, 이 사진이야말로 실제 명성황후의 초상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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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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